오늘의 역사 이야기 2월 12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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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818년 - 칠레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함.

1912년 - 선통제가 퇴위함으로써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출범하였다.

1961년 - 소비에트 연방의 금성 탐사선, 베네라 1호가 발사됨.

1968년 - 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퐁니. 퐁넛 여성과 아이들의 주검사진

퐁니・퐁넛 학살 사건(영어: 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이 대한민국 해병대의 청룡 부대에 의해 70여 명(69 ~ 79명 추정)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겨레21이 당시 베트남 호찌민시 통신원이던 구수정의 현지 르포와 고경태, 황상철 기자의 참전군인 인터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듬해인 2000년 여러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결성되었고 2004년 6월, 대한민국의 시민단체는 성금을 모아 관련 희생자에 대한 추모비를 세웠다. 같은 해 11월 한겨레21은 미군의 자체 조사 보고서를 공개하여 다시 한 번 사건의 전모를 세상에 알렸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월남전참전회는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증거가 명확히 나온 바 없다고 주장한다.

베트남 전쟁은 정규군끼리의 전투 이외에도 베트콩으로 알려진 비정규군이었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게릴라 활동이 거세었던 전쟁이었다. 북베트남은 비정규군에 의한 게릴라전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모든 베트남인이 참전하는 “인민 전쟁”이라고 불렀다. 한편, 미군을 비롯한 한국군 등 남베트남의 동맹군은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이 모호해지자 일정 구역에 민간인을 몰아놓고 수용하여 전략촌을 만들고, 그 이외의 지역은 “움직이는 모든 것을 적으로 간주”하는 “자유 사격 지대”보아 수색 섬멸 작전을 펼쳤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미라이 학살에서도 확인되듯이 작전 중인 미군은 “눈에 띄는 것은 모두 베트콩”이고 “어린 아이도 첩자”이며, “놓치는 것보다 오인해서 죽이는 게 낫다”는 태도를 보였다. 조너선 닐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 측이 게릴라를 찾지 못하면 사람들을 죽였는데, 그것은 전승을 과장하려는 속임수이기 보다는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그만두라고 말하도록 압박하는 전략이었고, 이 과정은 미국 정부의 압력아래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은 미군의 전략에 따라 안전 마을로 분류된 곳이었고, 미국 해병대 켑소대와 자매 결연을 한 곳이었다. 이 때문에, 퐁니 퐁넛 사람들은 미군이나 한국군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고, 마을에는 남베트남군의 가족들도 살고 있었다.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 여단은 1968년 1월30일부터 2월29일까지 여단 규모로 ‘괴룡 1호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1968년 1월30일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구정 대공세에 맞선 것으로 ‘구정공세 반격작전’으로도 불렸다. 1968년 2월12일 오전 11시 무렵 퐁넛 마을을 지나던 청룡 부대 1중대가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의 민간인 70여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베트남 주둔 한국군의 공식 기록인 파월 한국전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68년 2월 12일 9음력 1월 14일 제1중대장(김석현 대위)는 08:15에 1번 도로를 정찰하며 북진하고 퐁넛마을에 진입.
11:05에 목표(11-이곳은 퐁니촌에 해당한다)를 공격하였는데 이 때 서쪽 지역으로부터 30여발의 적 사격을 받아 4.2인치 박격포로 발사지점을 포격 제압. 부상자 1명 생겨 후송하였다. - 파월한국전사 -

그러나, 당시 학살 피해자의 증언과 전투 참여자의 증언, 미군측의 조사 보고서에 의해 드러난 사실은 파월 한국전사의 기록과 다르다. 살아남은 마을 주민은 아침밥을 먹고 난 후 쯤의 시간에 한국군이 당산나무 쪽으로 밀고 들어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집을 불태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작전에 참여 하였던 1중대의 1소대장 최영언 씨는 “갑자기 마을로부터 선두 1소대 병력 쪽을 향해 사격이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모든 소대원들이 수풀 바닥에 엎드렸다. 누군가 한명이 총에 맞아 부상 당한 듯했다. 중대장 김석현 대위에게 긴급히 무전을 쳤다. 중대장의 응답은 마을을 공격하라는 것이었다. 1소대와 2소대가 방향을 왼쪽으로 틀고 총을 쏘며 마을에 진입했다”고 말하였고,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베트콩은 떠나고 겁먹은 마을 사람들뿐이어서 마을 사람을 한 곳에 모아 놓았는데, 부대 후미의 누군가가 갑자기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고 증언하였다. 2소대장이었던 이상우 역시 “베트콩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마을 주민들도 저항하거나 그런 움직임도 없었다. 애들이 겁이 나서 도망가니까 죽인 거지 참 …….” 이라고 말하였다.


안전 마을이었던 퐁니 퐁넛 민간인에 대한 학살이 벌어지자, 남베트남 정부는 미국에 강력히 항의하였고 미군은 독자적인 조사를 벌였다. 주월 미군 사령부 감찰부는 조사결과를 주월 미군 사령관 및 군부 고위 장성에게 보고하였다. 보고서에는 20여 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A4 용지규격 총 554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감찰부는 이 보고서에서 한국군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잔혹 행위를 저지르고 사람들을 학살하였다는 것을 보고하였다. 이 보고서는 기밀문서로 분류되어 비공개로 있다가 30년이 지난 후, 2000년 6월1일 비밀이 해제되었다. 미군 감찰부의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은 미 해병 연합 행동소대 Delta-2 소속 본 상병이 촬영한 것이다. 본 상병은 한국군 철수 이후 민간인 부상자 치료를 위해 마을로 들어갔다. 보고서는 퐁니 퐁넛 학살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1968년 2월 12일 사건
장소 : 꽝남성 디엔반 퐁니(Phong Nhi)·퐁넛(Phong Nhut) 마을
작전부대 : 한국 해병 2여단 1대대 1중대(일명 괴룡1호 작전)

- 1968년 2월12일 퐁넛에서 사격을 받은 직후 한국해병대는 그 마을을 공격했다.
- 퐁니마을에 무차별사격이 행해졌고 그로 인해 많은 손상을 야기시켰다.

희생과 손실 : 6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음. 한국 해병 1명 부상

 

미국의 퀘이커 구호단체 활동가 다 이앤과 마이클 존스는 한국군이라 불린 동맹군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이들은 이 보고서에서 퐁니-퐁넛 학살의 생존자들이 “한국군이 정찰중에 대인 지뢰에 걸렸고, 마을 사람들은 지뢰가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총소리는 없었다. 그 뒤 한국군이 마을에 왔고 학살이 일어났다”고 증언한 내용을 실으면서, 이 사건이 베트남 현지는 물론이고 뉴욕 타임즈에도 기사가 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을 근처 작은 절에 있던 비구니는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죽었어요. …… 우리 작은 절 안에는 그들 모두를 위해 향을 피울 공간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

 

감찰부의 보고를 받은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부 사령관이었던 웨스트 모어랜드는 1968년 4월 29일 파월사령부 사령관 채명신 장군에게 전쟁범죄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나 채명신 장군은 6월 4일 보낸 답장에서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고 하면서 베트콩의 기만전술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당시 청룡부대 헌병대 수사계장은 상부로부터 “청룡부대를 가장한 게릴라의 소행”이란 지침에 따라 조사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퐁니-퐁넛 마을의 생존자들은 1969년 2월 자신들이 남베트남 정부에 복무하고 있는 군인의 가족이고 합당한 시민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학살을 당하였다며 진실을 밝히고 배상하여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남베트남 하원 의장에게 보내 탄원하였다. 남베트남 정부 역시 미군 사령부에 강력히 항의하였다. 한편, 미군 정치 고문 제임스 맥은 보고서에서 퐁니 퐁넛과 같은 민간인 학살이 무수히 일어나 “한국군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증오심이 대단히 심각하다”고 진단하였다. 미국은 한국군이 공산주의자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매우 용감하지만, 민간인에 대한 잔혹행위를 일삼고 점령군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어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미국은 이 문제를 쉽게 넘기지 않으려 계속하여 추궁하였지만, 한국은 소대장들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끝내고,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까지 알고 있었지만 결국 사건을 은폐하였다. 당시 한국의 언론은 이 사건을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학살의 증거 사진을 찍은 본 상병은 조사관인 캠퍼넬리 소령에게 사진과 함께 진술서를 제출하였고, 얼마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1994년 46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한편, 본 상병이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에 나온 16세의 쩐티득은 4년뒤인 1972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에 가담하였다. 빈디엔 근처의 남베트남군 초소에 부비트랩을 설시하다 발각되어 감옥에 갔으며 1975년 4월 전쟁 후에 풀려났다. 쩐티득은 이후 다낭에서 잡화상을 하다 1999년 8월 유방암에 걸려 47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000년 11월 한겨레21은 종전 26년을 맞아 기밀 해제된 문서 속의 희생자를 찾아 나섰다. 사진 속 가슴이 도려내진 여성은 당시 21살이었던 응우옌 티 탄이었다. 여동생 응우옌 티 호아는 언니가 하룻동안 더 살아 있었고 나즈막히 엄마를 부르다가 숨을 거두었다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다낭에 살던 응우옌 티 탄의 가족은 정월 대보름 불공을 드리기 위해 퐁넛 마을을 찾았다 일가족이 모두 희생되고 막내만이 살아남는 참사를 당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대한민국 정부가 사건의 진실을 인정하였는지 궁금해 하였다.

2013년 8월 글로벌포스트와 인터뷰한 대한민국 국방부 대변인은 “한국군이 그러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학살 일체를 부정하였다.

2015년 4월 8일 방한한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 씨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의 반대 집회를 마주했다.

2018년 4월 22일 - 23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한베평화재단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여러 시민사회 단체들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개최하였다. 이 시민평화법정은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 응우옌 티탄이 원고로 나서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으며, 시민평화법정의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가배상법’에 따른 배상을 판결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진상조사를 권고하였다. 시민평화법정은 모의법정으로 법적 구속력이 없으나 베트남 전쟁 시기 학살을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서 천명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시민평화법정 측은 공소시효를 없애는 특별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민변은 1968년 당시 퐁니-퐁넛 마을 사건을 조사하였던 중앙정보부의 자료 공개를 청구하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국정원은 "외교적 불이익"을 근거로 정보를 공개하지 않다가 법원의 공개 명령을 받자 ‘개인정보 보호’를 이유로 다시 정보 공개를 거부하였다.


1999년 -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 탄핵안이 부결되었다.

2009년 - 미국 뉴욕주 버팔로에서 콜간 항공 3407편 여객기가 버펄로 나이아가라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중 마을에 추락하여 탑승객 49명, 주민 1명 등 50명이 사망하였다.

2012년 - 그리스에서 긴축 재정안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다.

2013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함경북도 길주군에서 3차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2014년 - 스페인 법원이 티베트 독립 운동을 무력 진압한 장쩌민 전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및 4명에 대해 체포 영장을 정식으로 발부하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판문점에 위치한 평화의 집에서 7년 만에 고위급 회담을 열다.

2015년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서 사육사가 사자에게 물리는 사고가 발생하다.

 

문화

1912년 - 중화민국이 그레고리력을 채택하였다.

2010년 - 동계 올림픽이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막되었다.

2011년 - 대구광역시의 개신교 복음방송인 대구극동방송(대구FEBC) 개국.

2012년 - 영국 가수 아델이 제54회 그래미상에서 올해의 레코드상, 올해의 앨범을 포함해 6개 부문에서 상을 받다.

 

탄생

1272년 - 남송의 제 9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소제

1809년 - 미국의 제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1809년 -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

찰스 로버트 다윈(1809년 2월 12일 ~ 1882년 4월 19일)은 영국의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서, 진화론에 기여가 가장 크다고 알려져 있다.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한다. 다윈은 생물의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와의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인 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 선택을 소개했다.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의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다.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것에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폭 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 수정된 내용에서는, 다윈의 과학적 발견은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생명의 다양성을 설명한다.

종의 기원에서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즉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 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인간과 원숭이는 공통 조상을 갖는다'는 그의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그 당시 진화론과 창조설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 진화가 관찰되는 현대와 진화의 명백한 증거들이 관찰되었던 과거에도 과학계에서는 이러한 논쟁이 전혀 없으나,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창조설자들에 의해 이러한 논쟁은 심화되었다.


1884년 -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 롱워스.

1898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여성 문필가, 사회운동가, 정치가 쉬광핑

1900년 - 소련의 군인 바실리 추이코프.

1908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유정.

1910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삼성그룹의 창업자 이병철.

이병철(1910년 음력 2월 12일 ~ 1987년 11월 19일)은 삼성그룹과 CJ그룹, 중앙그룹을 창업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1938년에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이후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1953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1964년 5월에 TBC를, 다음해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방송과 언론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그 뒤 기업 활동에 전념하여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제품의 수출에 성공을 거두었다.


1918년 - 미국의 물리학자 줄리언 슈윙거.

1930년 - 대한민국의 연기자 김인태

1948년 - 미국의 미국의 작가, 컴퓨터 과학자, 발명가이자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

1950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애경.

1961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응수.

1963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세준.

1966년 - 브라질의 스트리트 파이터 캐릭터 블랑카.

1969년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홍명보.

1970년 - 네덜란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브리얀 로이.

1972년 - 대한민국의 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허문회.

1973년 - 미국의 성우, 배우, 가수 타라 스트롱.

1974년 - 대한민국의 배우 원기준.

1977년 - 대한민국의 현 야구 코치 , 전 야구 선수 유동훈.

1980년 - 미국의 배우 크리스티나 리치

1981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정미선. / 대한민국의 개그맨 김형인. / 대한민국의 배우 김산호. / 대한민국의 방송인 경동호.
 
1988년 - 대한민국의 모델,배우 설초록.

1990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보영.

1992년 - 대한민국의 가수 소유.

1993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구자욱.

2000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민.

 

사망

1554년 - 영국의 국왕 제인 그레이

1763년 - 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 카르레 드 샹브렝 드 마리보

1799년 -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라차로 스팔란차니

1804년 -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

1834년 -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1896년 - 프랑스의 작곡가 앙브루아즈 토마

1916년 - 독일의 수학자 리하르트 데데킨트

1926년 - 대한민국의 친일파 이완용.

이완용(1858년 7월 17일(음력 6월 7일) ~ 1926년 2월 12일)은 대한제국의 관료이다. 을사조약, 기유각서, 정미7조약,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을 포함한 주요 친일파로 평가된다.


2004년 - 대한민국의 비전향장기수 강동근

2010년 - 조지아의 루지 국가대표선수 노다르 쿠마리타슈빌리

2013년 - 대한민국의 사진작가 최민식

2015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한필

2015년 - 말레이시아의 정치인 닉 압둘 아지즈 닉 맛

2017년 - 미국의 가수 알 재로

2018년 - 대한민국의 바둑기사 이관철

2019년 - 잉글랜드의 축구선수 고든 뱅크스

 

기념일

다윈의 날(Darwin Day)

링컨 탄생일(Lincoln's Birthday):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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