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관함/오늘의 역사 이야기

오늘의 역사 1월 6일

sesnag 2020. 1. 6.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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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540년 - 영국 국왕 헨리 8세, 클레페의 앤과 네 번째 결혼.

1912년 - 뉴멕시코주가 미국의 47번째 주가 되었다.

1941년 -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네 가지 자유에 대한 연두교서를 발표.

1980년 - 사무엘 도가 라이베리아 대통령의 임기를 시작했다.

1995년 - 보진카 계획이 발견되다.

2006년 - 북한의 비전향장기수들이 판문점으로 통해 국가인권위원회와 과거사 정리위원회 앞으로 고소장 보내다.

2011년 - 아시아나항공 A380 6대 도입 계약 체결.

2014년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등 북아메리카 일부 지역의 체감온도가 섭씨 영하 46도 (미국에서 사용하는 화씨로는 영하 50.8도)까지 떨어졌다. 이는 최악의 한파로 기록되었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기온이 50도를 기록하는 등 남미지역은 폭염을 겪었다.

미국 상원이 연방준비제도 의장 후보자인 재닛 옐런의 인준안을 가결시키다.

2015년 - 대한민국에서 세월호 특별법 타결.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 줄여서 세월호 특별법은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원인과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대한민국 국회에서 2014년 11월 7일에 통과시키고, 11월 19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공포한 법률이다.

국회는 2014년 11월 7일에 본회의를 열어 국민안전처를 신설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대한민국 정부조직법 개정안, 속칭 유병언법으로 불린 범죄 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과 함께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1월 19일에 박근혜 대통령이 공포했다.

2016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4차 핵실험 실시.

 

문화

1907년 - 이탈리아의 교육자 마리아 몬테소리가 '어린이의 집'을 설립.

2000년 -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전라북도 연고팀 쌍방울 레이더스가 해체.

쌍방울 레이더스(Ssangbangwool Raiders)는 대한민국 전라북도를 연고지로 한 프로 야구팀이었다. KBO 소속으로, 전주 종합경기장 야구장과 군산 월명 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초대 감독은 김인식이었다.

1990년 3월 31일에 구단이 창단된 후, 1990년 5월 11일 프로 2군 리그(현 퓨처스 리그)에서 시작하였다. 그리고 다음 해, 1991년 시즌부터 1군 정규리그 경기에 참가했다. 매년 하위권을 맴돌았으나,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이후에는 1996년 정규시즌 2위, 1997년에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하면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였다.

약팀의 이미지를 조금씩 벗겨 내면서 서서히 강팀으로 변모하고 있을 즈음에 IMF 사태를 맞게 된다. 경제 위기의 여파로 인하여 모기업인 쌍방울 그룹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쌍방울 레이더스 구단도 극심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으며, 1997년 10월 15일에 모기업인 쌍방울 그룹이 부도가 났다. 이때 이후 주축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하는 악순환이 발생했다. 1998년부터 돈도 없는 힘든 구단 사정으로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이에 진정한 팬들이 힘을 모아 야구 최초의 서포터를 결성한다. 최초의 야구 서포터 포레버 레이더스는 전주대생 여용구 씨를 필두로 약 100여 명의 골수팬들이 홈. 원정 가리지 않고 경기장을 찾아 힘든 시절을 겪는 선수들에게 큰 힘을 보태었다. 그러나 팬들의 바람에도 결국 쌍방울 레이더스는 2000년 1월 7일에 해체되었고, 기존 선수단과 코칭스태프, 신인 지명권은 SK 와이번스에 인계되었다. 쌍방울은 1999년 8월 회사 정리 절차 인가가 결정되었고 대한전선 계열로 넘어가 "트라이 브랜즈"라는 이름으로 변경했으나 최근 다시 쌍방울로 환원되었다.

그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지였던 전라북도는 무연고 지역이었으나 2001년 KIA 타이거즈에 반환되었고, 그 해 이후부터 매년 2001년 부터 2013년까지 군산시에서 경기를 치렀는데 2002년에는 미약한 경기장 사정과 적은 수익, 2003년에는 전국체전 관계로 프로야구 경기가 개최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구장 개보수 관계로 3년 동안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았다.

통산 성적은 10시즌, 1202경기 490승 674패 38 무, 승률 0.420이었다.

 

탄생

1412년 - 프랑스의 백 년 전쟁 영웅 잔 다르크.

1822년 - 독일의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

1850년 - 독일의 사회주의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1903년 - 대한민국의 음악인 현제명.

1913년 - 폴란드의 정치가 에드바르트 기에레크.

1916년 - 대한민국의 시인 박목월.

1917년 - 대한민국의 정치깡패 이정재.

1922년 - 대한민국의 정치가 유기정.

1924년 -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 김대중.

청년시절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金大中, 1924년 1월 6일 ~ 2009년 8월 18일)은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이다.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났고,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오랫동안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 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2000년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 1998년 무궁화 대훈장, 1998년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1999년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북미주 한국 인권연합 인권상, 미국 조지 미니 인권상,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연설에 능하였으며, 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북 증서를 받았다.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로 비유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1929년 - 아프가니스탄의 정치가 바브락 카르말.

1939년 - 우크라이나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발레리 로바놉스키.

1944년 - 북한의 축구 선수 박리섭.

1945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인환.

1946년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베른트 횔첸바인.

1953년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만프레트 칼츠.

1976년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선수 전이경.

1977년 - 대한민국의 가수 데프콘.

1978년 - 대한민국의 학원인, 방송인 이현석.

1979년 - 대한민국의 배우 정소영.

1980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시은.

1982년 - 영국의 배우 에디 레드메인.

1983년 - 대한민국의 가수 미쓰라진.

1984년 - 미국의 배우, 성우, 코미디언 케이트 매키넌

1985년 - 대한민국의 배우 서효림

1986년 - 영국의 음악가, 악틱 몽키즈(Arctic Monkeys) 와 더 라스트 섀도우 퍼펫(The Last Shadow Puppets)의 멤버 앨릭스 터너 / 러시아의 모델 이리나 셰이크.

1994년 - 대한민국의 가수 JB (GOT7).

199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우지윤 (볼빨간사춘기)

1998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이승우

2000년 - 대한민국의 가수 권은빈 (CLC). / 중화민국의 가수 슈화 ((여자)아이들).

2002년 - 일본의 가수 야나가와 나나미 (컨트리걸즈, Juice=Juice)

 

사망

1829년 - 체코의 소설가 요세프 도브로프스키.

1852년 - 프랑스의 점자 창안자 루이 브라유.

1884년 -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그레고르 요한 멘델.

1918년 - 독일의 수학자 게오르크 칸토어.

1919년 - 미국의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1949년 - 미국의 영화 감독 빅터 플레밍.

1958년 - 대한민국의 장로교 목사 김응순.

1981년 - 영국의 소설가 아치볼드 조지프 크로닌

1993년 - 미국의 트럼펫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

1996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광석.

이지미출처 BM컬쳐스

김광석(金光石, 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노래하는 철학자’로도 불린다. 2014년 제5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장이 추서 되었다.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가요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찾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다. 1996년 1월 6일 사망하였으나 사인 관련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08년 1월 6일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또한 2010년 11월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대봉동 신천 둑방길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2015년 11월 2일, 1975년부터 1990년까지 김광석이 살던 창신동 130-54의 양옥이 매각되었다.

1964년 1월 22일, 경상북도 대구시 대봉동 방천시장 번개전업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창신동(현재는 종로구 관할)으로 이주하여 서울창신초등학교, 경희중학교, 대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시절 현악부 활동을 하며 선배들로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고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으며, 대광고등학교 시절 합창부로 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 12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85년 1월 입대하였으나 군 생활 중 큰형이 사망함으로 인해 6개월 단기사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복학해 다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1, 2회 정기공연에 참여한다. 1987년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을 결성해 동물원 1집과 2집을 녹음하였다.

1989년 10월 솔로로 데뷔하여 첫 음반을 내놓았으며, 이후 1991년에 2집, 1992년에 3집을 발표하였고, 1994년에 마지막 정규 음반인 4집을 발표하였다. 정규 음반 외에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부르기 1집과 2집을 1993년과 1995년에 각각 발표하였다. 1991년부터 꾸준히 학전 등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하였으며, 1995년 8월에는 1000회 공연의 기록을 세웠다.

1996년 1월 6일 새벽 자택에서 전깃줄로 목 매 죽은 채 발견되었다. 향년 31세. 자살로 알려졌다. 시신을 화장한 후 사리 9과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4년 연하녀 서해순, 1990년 결혼)과 딸(김서연), 어머니(이 달지), 큰누나(김 광나), 둘째형(김광복), 작은누나(김광득)가 있는데 큰형(김광동)은 김광석이 군 입대 도중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김수영)는 2004년 별세했다. 딸 김서연은 1991년에 태어났고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2007년 사망한 사실이 2017년 9월 뒤늦게 밝혀졌다.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의 2016년 1월 23일, 1월 30일 방송분에서 김광석 20주기를 맞아 다시 김광석 편을 하였다.

부인 서해순은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가족 및 지인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세간에 알려진 김광석의 자살설에 대해 가족들은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김광석의 누나들은 "광석이는 '부모보다 먼저 가는 자식만큼 불효는 없다'라고 항상 말했다.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 역시 "활발하고 마음이 약한 아이다.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착하고 남한테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다" 라며 아들의 자살을 믿지 못했다. 또, 김광석과 음악 동호회 활동을 했던 한 지인은 "돌아가시기 한 6개월 전쯤부터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다"며 "자살했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 개인적으로 타살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문점들이 지금이라도 밝힐 수 있다면 밝혀져 김광석이 어떻게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총 3가지 주요 의문점이 있었는데 

1. 김광석이 목을 스스로 맸냐는것, 2. 유서가 발견되지 않은 점, 3. 정말로 우울증이 있었냐는 것이다. 1번 의문의 근거는 목을 매달 전깃줄을 묶기 위해 쓰였어야 했을 의자가 발견되지 않았고 목을 매달 위치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살을 할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또 지인은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것처럼 해서 발견됐다. 줄이 늘어나야 사람이 서있을 거다. 근데 전깃줄이 늘어나냐"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고 김광석 자택은 현재 내부 공사가 이루어져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2번 의문은 고 김광석 씨는 메모광으로 유명하였는데, 아무런 유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 김광석 첫째 자형은 "메모가 아주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습관이 있다. 틀림없이 유서가 있을 것이다"라고 털어놨다. 3번째 이유가 된 고 김광석 씨의 부인 서해순 씨가 주장한 우울증 역시 지인 말에 따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음악 동호회 지인은 "분명 말씀드릴 수 있다. 김광석 씨가 우울증이 있었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라며 "적어도 1년 동안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라이브 1,000회 공연할 때 매일 봤었고 그동안 병원 가는 걸 본 적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부인 서해순의 말의 신뢰도는 떨어지는데, 첫번째. 사후 얼마 안 되어 딸과 미국으로 간 점 두 번째. 고 김광석 씨 가족과 재산 다툼을 한 점, 세 번째. 고 김광석 씨 아버지와 합의한 내용을 어긴 점이다.

2017년 의문스러운 죽음을 다룬 영화가 제작되었고, 더불어민주당의 의원들이 김광석의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딸이 2007년에 사망한 사실이 은폐되어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광석의 사인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또한 김광석의 딸인 김서연이 어머니에게 피살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다만 김광석 본인의 의문사는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


1996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병주.
 
2013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 조성민

2017년 - 인도의 배우 옴 푸리

 

기념일

빠텟 라오의 날(Pathet Lao Day): 라오스

국군의 날(Armed Forces Day): 이라크

동방 박사 3인의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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