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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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502년 - 양 무제 소연(蕭衍)이 아들 소통을 왕세자로 정하다.

640년 - 교황 요한 4세 선출되다.

759년 - 당나라의 시인 두보가 배적(裴迪)의 초대를 받고 청두시로 출발하다.

1794년 - 청나라의 주문모 신부가 조선 최초 사제로 입국함.

주문모(1752년 ~ 1801년 5월 31일) 사제는 조선에서 순교한 중국인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이다. 한국 교회 역사에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기독교 선교사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 사제이다. 세례명은 야고보, 포르투갈어 이름은 벨로 조이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에서 6년간 활동했다. 1752년 청나라 장쑤 성 쑤저우 쿤산 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7세에 어머니를 잃고 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고모 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과거를 보았으나 계속 낙방하자 20살 때 결혼하였다. 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다가 늦은 나이에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중국 교구에 속하였으며, 1784년에 청나라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천주교 신자인 이승훈과 김범우 등은 임의로 교계제도를 제정하여 천주교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교리 문답을 하던 도중 자신들이 하는 행위가 천주교 교회법에 합치하는지 의문이 생겼고, 윤유 일을 보내 천주교 북경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유권해석을 요청하였다. 구베아 주교는 가성 직제 도로 교회법을 어긴 사실에 대해서는 책망했지만, 그들의 열정적인 신앙은 칭찬했으며, 조선에 천주교 신부를 보내 주기로 하는 한편, 그는 조선에 제사 금지령을 내렸다. 금지령에 따라, 천주교 신도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자, 조선 조정에서는 천주교회를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에 반대하는 사학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처벌하였다. 북경 교구는 청나라 사람 오 신부를 보냈으나 신해박해의 여파로 조선 입국에 실패한 후 병사하였다. 재차, 구베아 주교는 외모나 분위기가 조선 사람과 매우 닮은 주문모를 보내기로 하였다. 주교의 명에 따라 1794년(정조 18년) 봄에 북경을 떠난 주문모는 그해 음력 12월 3일 조선인 신자 지황·윤유일 등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입국한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서 왔기 때문에 북경에서 국경까지 10개월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 뒤 주문모는 12일 만에 서울에 잠입하였고, 북촌 계동에 있는 최인길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미사를 집전하였다. 국경을 넘은 지 6개월 만에 도착했다는 주장도 있다. 1795년 6월까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세례성사를 주고 전교하였다. 그러다가 배교자 한영익이 밀고하는 바람에 그에게 체포령이 내려졌으며, 그의 얼굴을 그린 벽보가 나붙기도 했다. 역관 최인길의 도움을 받아서 도피하였으며, 여성 교우 강완숙이 용감하게도 자신의 집을 은신처로 제공하여 피신하였으며, 주문모 신부 대신 검거된 역관 지황과 윤유 일은 붙잡혀서 순교했다. 주 신부는 강완숙에게 세례를 주고 조선 천주교회 최초의 여회장으로 임명하여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였다. 덕분에 강완숙은 자신을 모시는 여종을 비롯한 수많은 여인들을 천주교로 인도했으며, 양반 신분을 활용하여 은언군의 부인 송 씨, 며느리 신 씨가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도록 주선하였다. 주 신부는 교리 연구회인 명도회를 만들어 정약종을 회장에 임명하고, 황사영을 비롯한 홍필주, 현계흠, 홍익만 등을 명도회 하부 조직인 육회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교리 연구와 전도에 힘쓰게 하였다. 송 씨와 신 씨도 명도회에 가입하고, 자신의 종들까지 모두 입교하게 할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의를 가졌는데, 이는 각각 남편이자 시아버지인 은언군이 강화도에 귀양 가는 불행으로 마음을 둘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얼마나 신앙생활에 집중했는지는 정순왕후가 송 씨와 신 씨에게 독약을 내려 함께 죽게 하라는 사형선고를 내리면서 "시어미와 며느리가 둘 다 사학에 빠져서 외인의 흉추(주문모 신부)와 왕래하여 서로 만나고 나라의 금지함이 지엄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라고 비난했다는 순조실록 1년 3월 16 일조와 천주교 순교자 이기양의 추안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주 신부는 서울에서 강완숙의 전도 등으로 목회에 자신이 생기자 지방으로도 발길을 옮겼다. 자신을 보호하려다가 죽은 윤유 일의 가족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경기도 여주, 충청도 온양, 공주, 남포, 내포, 전라도 전주에서 전교하여 5년 만에 신자 수가 4천여 명에서 1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러한 교회 성장에 대해 황사영은 '백서'에서 조선 천주교회에서 강완숙만 한 사람이 없다고 평가하여 강완숙의 도움이 컸음을 말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을 믿는 자들이니,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정순왕후의 사학 엄금 교서 발표로 신유박해가 일어났을 때에도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소재지를 알리지 않는 강완숙의 보호로 몸을 피하였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는 고향인 청나라로 피신하려고 황해도 황주로 갔으나 사태가 매우 좋지 않음을 알게 되자 1801년 음력 3월 12일 한양으로 돌아와 의금부에 '내가 당신들이 찾는 천주교 신부'라며 자수하였다. 그해 음력 4월 19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고, “살아 있어서 도움이 안 되니 죽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우려하여 추방령으로 감형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사형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새남터에서 참형으로 순교한 주문모 신부의 유해는 신도들이 장례를 치르는 것을 막기 위해 비밀리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2014년 8월 16일 시복 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조선 입국전까지 신학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평신도들이 목회한 조선 천주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교리서와 신앙 안내서라고 생각하여 사순절과 부활절을 위한 안내서라는 고해성사 지침서 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문서선교는 천주교회의 세력 확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865년 - 퇴역한 남부 동맹 군인들이 백인 인종차별 단체인 큐 클럭스 클랜을 결성하다.

1949년 - 문경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 제69주기 문경석달 양민집단학살 합동 위령제가 봉행되고 있다. /문경시 제공 출처 : 경북매일

문경 양민학살 사건(聞慶良民虐殺事件)은 1949년 12월 24일 공비를 토벌 중이던 국군 제2사단 25 연대 2대대 7중대 2소대 및 3 소대원 70여 명이 경상북도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 석 달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주민들을 살해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을 말한다. 당시 학살로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과 여성 44명을 포함해 모두 8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이후 이승만이 집권한 제1공화국 정부에 의해 공비에 의한 양민학살 사건으로 조작되었다. 하지만 참여정부 들어 발족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과거사 청산에 의해 2008년 여름 사건 진상과 가해 부대 책임자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공식 결정 이후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유족들이 헌법소원을 낸 2000년 3월을 기점으로 손해가 발생한 날로부터 5년, 손해를 안 날로부터 3년의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하지만 2011년 9월 8일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대법원은 "진실을 은폐하고 진상 규명을 위한 노력조차 게을리 한 국가가 이제 와서 문경 학살 사건의 유족인 원고들이 미리 소를 제기하지 못한 것을 탓하며 시효 완성을 이유로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판시하고, 손해배상 청구권 시효는 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결정을 한 2007년 6월부터 시작된다고 봤다.


1950년 - 흥남 철수 작전이 끝났다.

흥남 철수 작전은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하여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15일에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동부전선의 미국 10(X) 군단과 대한민국 1군단을 흥남항에서 피난민과 함께 선박 편으로 안전하게 철수시킨 작전이다.
앞서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38선을 넘기 시작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미리 평양에서 철수하고 일부가 중공군 국가 안으로 들어가 중공군 도움을 요청하고 중공군 역시 한국전쟁에 개입을 할 때부터 시작했는데 중공군이 드디어 11월 27일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일으켜 국제 연합 사령부는 중공군의 공세로 인해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 8일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이어 12월 15일 미국 1 해병사단을 시작으로 12월 24일까지 열흘간 철수가 이뤄졌다. 장진에 머물렀던 미국 1 해병사단도 12월 24일에 마지막으로 흥남에서 철수하였다. 한편, 평양은 이미 12월 4일에 대한민국 국군이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12월 6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평양을 수복하였다. 미국 전쟁 역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미국 1 해병 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국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국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 후퇴작전이 1.4 후퇴의 시작이었다. 김백일 1 군단장과 10(X) 군단 소속의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은 에드워드 아몬드 10 군단장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피난민까지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 마지막에 남은 상선이 완전히 되었고 온양호는 가장 마지막에 흥남부두를 떠난 배가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함으로써,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또한 절박한 피난길 중에 사람 많아 비좁은 배에서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철수작전 기념비에는 10만 명의 인명을 구한 6명의 영웅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흥남 철수 작전에서 대한민국  제1군단과 미국 제10군단의 장병 100,000명과 차량 17,000대, 피난민 약 100,000명과 350,000t의 군수품을 안전하게 동해상으로 철수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91년 - 러시아가 유엔에 가입하다.

2006년 - 멜레스 제나위 에티오피아 총리가 소말리아 이슬람 반군 '이슬람법정연맹(ICU)'과의 전쟁에 돌입했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소말리아 내전이 국제전쟁으로 비화되었다.

2008년 - 대한민국 국방부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 도입 추진 방침을 바꾸어, “현재로선 시기상조”라며 수용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2011년 - 대한민국의 논산천안고속도로에서 104중 추돌사고가 일어나 4시간 30분 동안 정체를 빚었다. 이는 영종대교 106중 추돌사고 다음으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추돌사고였다. 다행히도 34명이 부상당했고 사망자는 없었다.

안전거리 미확보, 과속, 그리고 심각한 안개와 블랙 아이스가 만든 두 번째 최악의 교통사고이면서 잘 안 알려진 사건
2011년 12월 24일 오전 10시 20분경 논산 천안고속도로에서 104대의 차량들이 추돌하면서 일어난 사고이다. 사고 전날 새벽 충남 내륙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릴 정도로 눈이 많이 온 상태였다. 아침에 짙은 안개가 낀 상황 때문에 운전자의 시야를 가리게 되었고, 또한 제설 작업 이후 많은 물기와 물안개 때문에 사고를 키웠다고 한다. 남논산 톨게이트 부근에서 4km 구간 10여 곳에서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해 하행선 통행이 통제되어 많은 차량들이 국도로 우회해야 했다. 이후 사고처리를 위해 하행선을 전면 통제하면서 정체가 4시간 30분 이상 지속되었다. 사고 차량 중에는 관광버스, 탱크로리 등의 차량도 있었다고 한다. 그나마 다행히도 많은 차량이 추돌한 사고였지만 영종대교 106중 추돌사고와 달리 34명이 부상당하고 3명이 응급실에 실려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90중 추돌사고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공식적인 집계가 늦어져서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2012년 - 스와질란드가 미니스커트 등 노출이 심한 옷을 법으로 금지시켰다.

 

문화

1777년 -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환초 섬인 키리티마티 섬이 제임스 쿡에 의해 발견되다.
 
1871년 -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가 초연됨

1906년 - 레지널드 페센든이 세계 최초로 무선으로 음성신호를 전송하여 라디오 방송을 하다.

2001년 -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을 수지출장소로 승격하다.

2007년 - 분당선 죽전역 개통.

2015년 - 중부고속도로 남이천 나들목 구간 개통.

 

탄생

기원전 3년 - 로마 제국 6대 황제 갈바.

1491년 - 스페인 사제, 성인 이냐시오 데 로욜라.

1748년 - 조선 후기의 실학자 겸 문신 유득공.

1789년 - 폴란드 시인, 작가 아담 미츠키에비치.

1886년 - 미국의 헝가리 태생 영화감독 마이클 커티즈.

1910년 - 미국의 작가 프리츠 라이버.

1917년 - 북한의 정치인 김정숙.

1943년 - 핀란드의 정치인 타르야 할로넨.

1946년 - 중국의 전산학자 앤드루 야오.

1956년 - 대한민국의 대학 총장 심화진.

1959년 - 대한민국의 배우 선우은숙. / 대한민국의 가수 조하문.

1961년 -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일함 알리예프.

1963년 - 대한민국의 희극배우 조금산

196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최진실.

최진실(1968년 12월 24일 ~ 2008년 10월 2일)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1990년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텔레비전 배우로서는 김희애·채시라, 영화 배우로서는 강수연·심혜진 등과 트로이카를 구축했고, 광고계·방송계·영화계를 걸쳐 흥행의 측면에서 최진실이 연예계 전체를 리드했다. 이는 탈신비화 전략, 포용적 태도, 유연한 사고, 진취적 행보로 정치권력, 경제권력, 사회권력, 문화권력의 핵과 연결성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하였다. 1988년 광고 모델로서 연예계에 데뷔하였고 이듬해인 1989년 MBC 조선왕조 오백 년 - 한중록에 출연하면서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여 년 동안 밝은 이미지로 140여 편의 광고, 20여 편의 TV 드라마, 18편의 영화 등에서 주연 배우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출연한 여러 작품의 성공으로 인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중으로부터 오랫동안 널리 사랑을 받고 연기력 또한 인정받아 국민배우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2000년대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포럼이 조사하는 '세계 성 격차 지수(Global Gender Gap Index)'에서 하위권을 기록하는 국가로서 성 불평등 문제가 심각한 사회였는데, 최진실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차별을 불식시켜나가는 데 이바지한 바 있다는 평가가 있다. 부부 나이 차이 역전, 이혼 유책주의 활용, 친권 포기각서 수령, 자녀의 성·본 변경, 친권 자동부활 금지 법안 제정 등과 관련하여 능동적인 여성상을 보여 주었고 아동 인권 수호에도 기여하였다. 이를 통해 가부장제 타파와 젠더 권력 해체에도 이바지하였다. 활발한 활동 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에 삶의 의미에 대한 큰 물음을 던졌으며, 심리적  부검을 통한 문제 해결에 대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렇게 심리적 부검의 중요성이 공유되면서 스스로 세상을 떠난 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 교정에 실마리가 제공되었다. 최진실의 죽음은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모순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최진실의 죽음은 허위사실 유포행위와 관련하여 사회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연예인의 사회적 위상을 바로잡는 데 영향을 주어 명예훼손행위에 대한 연예인의 소송 제기에 대해 당연한 권리 행사라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하였다. 이로써 허위의 사실이 음지에서 흐지부지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공론의 장에서 투명하게 처리되는 물꼬가 트였다. 또 베르테르 효과에 의해 연예인 한 명이 700명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언론에 대해 파파게노 효과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성공한 연예인, 성공한 여성으로서 대한민국 사회의 빛과 그림자 모두를 겪었지만, 대한민국 사회의 모순에 눈감지 않고 배우로서 연예인과 여성의 인권 수호에 남달리 관심을 가졌다. 최진실의 삶에는 역사의식, 사회의식, 인권의식이 잘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연예인과 여성에 대한 혐오가 만연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연예계와 여성계를 방어하면서, '허위사실 유포에 취약하여 고립되기 쉬운 연예인'이라는 특수한 위치, '부와 명예의 편중이 심한 연예계에서 연예인으로서 대(大) 성공한 사람'이라는 특수한 위치,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이지만 주류 사회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는 특수한 위치로 인해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또 친족, 친구, 친지, 지인 등과의 신뢰 관계에도 균열을 가져오는 여론 조작이라는 위기가 발생했을 때에 대중과의 직접 소통을 지향하는 정면돌파를 택했다.


1971년 - 푸에르토리코의 가수 리키마틴.

1972년 - 대한민국의 배우 황수정.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도명진.

1973년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임창정.

1974년 - 칠레의 전 축구 선수 마르셀로 살라스.

197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유리 (쿨).

1979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핑창.

1980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종완.

1982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상호.

1983년 - 대한민국의 가수 노민혁 (클릭비).

1985년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최영아.

1986년 - 일본의 배우 이시하라 사토미.

1988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재경. / 대한민국의 가수 윤수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진주.

1993년 - 일본의 축구 선수 구보 유야

1994년 - 대한민국의 인터넷 만화가 김영택 (엉덩국). / 대한민국의 가수 설아 (우주소녀). / 대한민국의 가수 한승우 (빅톤, 엑스원).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에브 페리세.

2003 - 우신고 부엉이 권대근 DK

 

사망

427년 -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시시니오(Archbishop Sisinnius of Constantinople)

820년 -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온 5세

1524년 - 포르투갈의 탐험가, 항해가 바스쿠 다 가마

1934년 - 한국의 시인 김소월

김소월은 일제 강점기 시인이다. 본명은 김정식이지만, 호인 소월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공주다.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 자택에서 향년 33세로 음독자살한 그는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한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 현대시인의 대명사 중 한명이다.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출생하였고 평안북도 곽산군에서 성장하였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군과 곽산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평안북도 곽산 남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 등보 통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시 옥의 딸 홍단 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  배재 고등 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 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로부터도 천시를 당했고 일본의 압박으로 부인과 동반자살 기도까지 했다. 류머티즘으로 고생을 하다가 1934년 12월 24일 평안북도 곽산에서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시 32세였다. 1977년 사후 43년 만에 그의 시작 노트를 발견했는데, 여기에 실린 시 가운데 스승 김억이 이미 발표한 게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억이 제자의 시를 자신의 시로 발표했던 것이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이 추서 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1986년 조사 결과 발표에 따르면, 한국 가곡의 20%가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며 그 수에서 가곡 시인 중 1위를 차지하였다. 민요조의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 등 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참여적인 목소리로 기울었다. 조연현은 "김소월의 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면서 "한 마디로 전통적인 시인"이라고 평했고, 조병춘은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건드려 준 시인"이라고 했다. 김현은 김소월의 시가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라고 했으며, 유종호는 김소월의 젊은 시절 시단에서 이른바 조선주의가 유행이었으나, 시인은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 시인"이라고 했고, 김용직은 김소월을 "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며 역사"라고 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57년 - 일본의 사상가 오카와 슈메이

1980년 - 독일의 군인 카를 되니츠

19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외교관 안진생

2000년 - 대한민국의 시인 서정주

2012년 - 미국의 가수 레이 콜린스(The Mothers of Invention)

2016년 - 영국의 가수 릭 파핏

2018년 - 대한민국의 법조인 조규광

2018년 - 슬로바키아의 축구선수 요제프 아다메츠

 

기념일

  • 많은 나라에서 12월 24일은 성탄절 전날이며 크리스마스 이브라 불린다. 기독교 교파에 따라서는 성탄을 기다리는 날이라는 뜻으로 성탄 성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니라 김일성.김정일 가계를 찬양하는 날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식 명절이다.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에 등재된 날이며 동시에 김정은이 졸업한 날이라며 선전하고있다.
  • 리비아의 독립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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