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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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066년 - 스페인 그라나다에서 무슬림 군중이 와지르(재상)인 Joseph ibn Naghrela를 포함하여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하였다.

1853년 - 개즈던 구입: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영토를 구입하다.


1895년 - 김홍집 내각, 단발령 공포.

단발령(斷髮令)은 김홍집 내각이 고종 32년인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에 공포한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고 서양식 머리를 하라는 내용의 고종의 칙령이다. 서양인, 일본인들의 단발 건의 이후 당시 내무부 대신 유길준 등의 상주로 전격 단행되었다.

당일부로 고종과 황태자 순종은 솔선수범하여 머리를 깎고, 내무부대신 유길준은 고시를 내려, 관리들로 하여금 칼과 가위를 가지고 도성 거리나 성문에서 백성들의 머리를 깎게 하여 이를 직접 지도 감독했으며,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그러나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의 격렬한 반발로 1897년(건양 2년) 일단 철회되었으나, 1900년(광무 4년) 이후 광무개혁을 준비,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시 부활, 전국적으로 단행되었다. 그러나 1906년(광무 10년)까지도 지방에서는 단발에 호응하지 않자 군수삭 발령이라는 새로운 규정을 공포하였다.

최초의 단발자는 고종 이전의 개화파들이고, 1885년 청나라 망명 중인 개화파 정객 윤치호가 스스로 자기 머리를 자른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00년 이후 단발은 조선 전국 각지로 보급되었으나, 그 반발은 심하여 1930년대까지도 단발을 거부하는 이들도 존재하였다. 단발령의 여파로 1920년대부터는 여성 단발도 시작되었다. 한국 여성으로 최초로 공개 단발한 이는 여성 사회주의자 겸 독립운동가 허정숙이었다.


1922년 -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수립을 선포하다.

1965년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다.

1997년 - 대한민국에서 흉악범 23명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다.

2006년 - 前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의 사형이 집행되다.

2011년 - 남태평양의 섬나라 사모아와 토켈라우가 표준시간을 변경, 2011년 12월 29일에서 하루(30일)를 건너뛰고(skipped) 31일로 넘어가다. 세계에서 가장 늦게 해가 지는 나라에서 가장 빨리 해가 뜨는 나라가 되다.

2013년 - 여당과 야당, 노조가 국회의 철도발전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철도파업에 철회하는 내용의 합의문에 사인하였다.

2014년 - 감비아에서 군인 출신 무장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했다.

 

문화

1927년 -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지하철 노선인 도쿄 지하철의 긴자 선 개통.


1993년 - 대한민국의 힙합듀오 듀스(DEUX), 《듀시즘(DEUXISM)》 발매.
남성 듀오 듀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 사이인 그들은 1992년 부터 방송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95년까지 3장의 정규 앨범과 1장의 리믹스 앨범을 내고 해체하였다.

현진영과 와와 출신답게 뛰어난 춤 솜씨는 물론 백댄서 출신이라는 핸디 캡을 넘어서는 뛰어난 음악 실력과 오랜 외국 생활로 익힌 스타일리시한 패션으로 트렌드 세터(Trend Setter) 다운 앞서 나가는 패션을 선보였다. 댄스 음악을 하는 팀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대중의 인기는 물론 음악 마니아와 동료 가수들에게 까지도 음악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또한, 활동 당시에는 물론 해체 후 지금까지도 "듀시스트(DEUXIST)"로 불리는 수많은 마니아 집단을 형성하며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멤버 이현도는 보컬과 랩을 맡았고 대부분의 노래를 작사·작곡·편곡하였으며, 김성재 역시 보컬과 랩을 맡았으며 팀의 댄스와 스타일을 맡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완벽한 각운을 구사하였고 비트박스와 DJ의 스크래치, 현란한 비보잉은 물론 앨범 재킷 속에서 보여준 그라피티 등 힙합의 4대 요소를 완벽히 보여주었다. 그들은 한국 최초의 100% 랩곡을 선보이는 등 한국 힙합 역사에 있어 서태지와 아이들, 현진영과 더불어 선구자적인 역할을 완벽히 수행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서태지와 아이들, 현진영과는 다르게 흑인 음악의 범주안의 뉴 잭 스윙, 힙합, 재즈, 펑크(Funk), R&B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발표하며, 흑인 음악을 한국적으로 개량 발전시켰다. 또한 그들은 앞선 음악뿐 아니라 남들이 소화하기 힘들었던 세련된 패션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헐렁한 힙합 바지와 세련된 프린팅의 티셔츠는 물론이고 그들이 직접 디자인한 다양한 스타일의 멋스러운 옷을 선보이며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패션의 트렌드 세터로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행보들은 지금도 주석, 휘성, 김종국, 빅뱅 등 장르를 망라한 수많은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1994년에 발표 한 여름 안에서는 서연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하였다.


1996년 - 서울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 ~ 왕십리역 구간 개통.

2000년 - 중화인민공화국 항저우 샤오산 국제공항 개항.

2003년 -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로 연소된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 재건.

2007년 - 만화 '노블레스',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 시작.

2008년 - 대전광역시의 시내버스 노선 전면 개편.

2013년 - 교황 프란치스코, 유경촌(티모테오) 신부와 정순택(베드로) 신부를 천주교 서울대교구 보좌 주교에 임명.

2016년 - 부산권 전철 동해선 부전역 ~ 일광역 8구간 개통.

 

탄생

39년 - 로마 제국 10대 황제 티투스

1607년 - 조선 후기의 문신, 철학자 송시열

1865년 -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 러디어드 키플링

1880년 - 독일의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

1884년 - 일본의 군인, 정치가 도조 히데키

1912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양일동


1917년 - 대한민국의 시인 윤동주

일본 유학 후 1942년 도시샤 대학에 입학 1943년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 100여 편의 시를 남기고 27세의 나이에 옥중에서 요절하였다. 사인이 일본의 소금물 생체실험이라는 견해가 있고 그의 사후 일본군에 의한 마루타, 생체실험설이 제기되었으나 불확실하다. 사후에 그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의 양심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그의 시는 일제와 조선총독부에 대한 비판과 자아성찰 등을 소재로 하였다. 그의 친구이자 사촌인 송몽규 역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려다가 체포되어 일제의 생체 실험 대상자로 분류되어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창씨개명 '히라누마'가 알려져 1990년대 후반 이후 논란이 일기도 했다. 본명 외에 동주와 윤주라는 필명도 사용하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지금의 지린 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요절한 두 동생을 포함하여 4남 2녀였다. 그의 처음 이름은 해환이었다.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다.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은 함경북도 종서군 동풍면 상장포에 살다가 1886년 북간도 자동으로 이주하였으며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된다. 한학자였던 외삼촌 규암 김약연은 1899년 종성에서 만주로 건너와 명동촌에 정착하였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장로로 부유한 농부였고, 아버지 윤영석은 명동학교에서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 윤하현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고모 윤신영은 송창희에게 시집갔는데, 그 고모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그의 친구였던 송몽규였다. 당숙은 윤영춘으로 후일 가수가 되는 윤형주는 그의 6촌 재종이었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 6년 뒤인 1931년, 14세에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학교에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여,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소학교 동창인 문익환이 다니고 있는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였다. 그해 10월, 숭실중학교 학생회가 간행한 학우지 숭실활천 제15호에 시 공상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사 참배 거부로 숭실중학교가 폐교되어,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그는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1937년 광명중학교 졸업반일 무렵, 상급학교 진학문제를 놓고 부친과 갈등하나, 조부의 개입으로 연전 문과 진학을 결정한다. 1938년 2월 17일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으로 유학, 그해 4월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숙사와 하숙 생활을 하며 그는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벗과 담론을 하였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과 시를 발표하고 그 해 소년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0년 일제 경찰의 학생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자 후배 정병욱과 함께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나와 북아현동 누상동 등지에서 하숙 생활을 함께 하며 시작에 몰두하였다. 그 후 1941년 12월 2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할 무렵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려했으나 일제의 탄압을 걱정하는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원고를 정병욱에게 증정한 후 일본 대학으로 유학 준비를 하게 된다.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0월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하였다.[4] 도시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 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로 창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 유학에 뜻을 둔 윤동주의 도일을 위하여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 씨를 개명하게 되었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윤동주가 전시의 학제 단축으로 3개월 앞당겨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면서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 씨하였다는 것이다. 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후 그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참담한 비애를 그린 시 참회록을 썼다. 윤동주의 창씨개명설은 해방 이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에 와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영문과에 입학하였고, 6개월 후에 중퇴하여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령선인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 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은 징역 2년형을 선고하면서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독 했으며 친구 감화 등에 의해 대단한 민족의식을 갖고 내선의 차별 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망의 뜻을 품고 있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시키려 하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제5조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뒤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시신은 화장된 뒤 가족들에게 인도되어 그 해 3월 장례식을 치른 후 간도 용정에 유해가 묻혔다. 그의 조부 윤하현의 비석으로 마련한 흰 돌을 그의 비석으로 사용하였다.

그가 죽고 10일 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오라' 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뒤늦게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규슈제대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후일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이를 두고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라고 회고하였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이 처음 소개되고 함께 추도회가 거행된다.

1948년 2월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을 임시로 발간하였고, 같은 해 3월 정식으로 정음사에서 간행하였다. 이후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1920년 - 대한민국의 작가 이범선

1930년 - 대한민국의 학자 정의숙

1935년 - 미국의 야구 선수 샌디 쿠팩스

1939년 - 대한민국의 영화 각본가 이희우

1946년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베르티 포크츠

1955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해숙

1957년 - 대한민국의 축구 심판 김영주

1964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윤다훈

1969년 - 에스토니아의 대통령 케르스티 칼률라이드

1975년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인 스콧 치퍼필드 / 대한민국의 야구인 신경현 / 미국의 골프 선수 타이거 우즈.

1978년 - 미국의 가수, 배우 타이리스 깁슨

1979년 - 앙골라의 축구 선수 플라비우 아마두

198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오지은 / 대한민국의 가수 케이윌.

1984년 - 대한민국의 배우, 영화감독 구혜선 / 미국의 농구 선수 르브론 제임스.

1987년 - 대한민국의 쌍둥이 한기원, 한기웅 / 대한민국의 화제인물 박송아

1989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태군.

199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권희동.

1992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유나 (AOA)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데시레이 판 륀테런.

1995년 - 대한민국의 가수 뷔 (방탄소년단) / 미국의 가수 조슈아 (세븐틴).

 

사망

274년 - 26대 로마 교황 펠릭스 1세

1896년 - 필리핀의 독립 운동가 호세 리살

1945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의 사장 송진우

1947년 -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1947년 - 네덜란드의 화가 한 판 메이헤런

1968년 - 소련의 군인 키릴 메레츠코프

1968년 - 제1대 유엔 사무총장, 노르웨이의 정치인 트뤼그베 리

1997년 - 일본의 소설가 호시 신이치

1997년 - 대한민국의 범죄자 김용제

2006년 - 이라크 전직 대통령 사담 후세인

2011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근태

2011년 - 영국의 교육철학가 리처드 스탠리 피터스

2012년 - 대한민국의 대학교수 황수관

2018년 - 미국의 심리학자 주디스 리치 해리스

 

기념일

리잘 기념일: 스페인 정부에 의해 처형된 필리핀의 독립운동가 호세 리살 박사를 기리는 날,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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