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2일

반응형

사건

366년 - 알레마니족이 얼어붙은 라인 강을 건너서 로마 제국을 침략하다.

533년 - 메르쿠리우스(Mercurius)가 요한으로 개명하면서 교황 요한 2세가 되다. 교황의 지위에 오르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는 최초의 교황이 되다.

1492년 - 레콩키스타: 무어인의 최후 거점인 그라나다 토후국이 항복함으로써 스페인이 통일되다.

그라나다의 항복을 그린 그림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종교적 관용 정책이 약화되어 종교적 탄압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북쪽의 기독교 세력들은 13세기초부터 남진하여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레콩키스타라고 한다. 그 시작은 722년의 코바돈가 전투이다. 기독교 군대의 승리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승리를 통해 기독교 왕국인 아스루티아스 왕국을 만들기에 이른다. 이슬람 군대들은 피레네 북쪽으로 옮겨가면서 세력을 확장했지만 지금의 프랑스 투르 근처에서 전투로 패하면서 두에로 강과 에브로 강과 함께 피레네 산지를 낀 남쪽 지방(현재의 스페인)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를 투르 전투 혹은 투르-푸아티에 전투라고 부른다. 이슬람 군대는 당시 유럽을 통틀어 가장 신성한 곳으로 여겨졌던 갈리시아를 수호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739명의 군대가 강제로 쫓겨났다. 후에 프랑크족 세력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그들 세력이 나뉘어 성장하게 된다.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그라나다 왕국, 나바라 왕국 둥 네 개의 왕국이 이들에 해당한다.

한편 종래 800년간 스페인을 다스린 무어인의 알안달루스는 주변의 토후국들과 경쟁하느라 결국에 기독교 세력의 팽창을 도와주는 일을 저지르고 만다. 다만 1085년 톨레도를 점령하면서 북쪽 지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국토수복운동이 남쪽 방향으로 향한다. 종교적으로 이때까지는 극심한 탄압이 이뤄지지 않아서 몇 안되는 모스크나 이슬람사원만이 교회로 바뀌었다. 이미 무어인이 스페인 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막대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무어인의 예술과 건축, 음식 등 고유의 문화는 상당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막대한 위력을 떨치던 이슬람 세력은 기독교 세력에 1236년 코르도바 지역을 시작으로 1236년 지금의 세비야까지 내주고 만다. 잠시 동안 여러 상황을 겪은 스페인은 유럽 전체를 집어 삼킨 흑사병으로 1348년 무렵에는 극도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슬람 세력을 지원하던 마린 왕조는 13~14세기에 다발적으로 무슬림의 규약을 부활시키기 위해 재침공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마린 왕조는 13세기 중엽부터 15세기까지 스페인 남부와 지금의 모로코를 통치하였다.

1469년 아라곤의 왕위후계자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후계자 이사벨의 결혼에 의해 공동국왕이 지배하는 왕국이 성립됐다. 두 사람의 공동왕국 출범 이후 1478년에는 카나리아 제도를 복속하고 1492년 기독교 세력이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이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스페인은 내 781년의 무슬림 지배는 종식되고 통일되기에 이른다.

1492년은 스페인에 있어 여러 의미를 지닌다. 통일을 이룬 해일 뿐 아니라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스페인 내 유대인 박해가 시작된다. 철저한 로마 가톨릭 국가가 되기 위해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을 색출하여 화형에 처하고 개종을 거부하는 이슬람교도들과 유대교신자들을 추방하였다. 이를 알람브라 칙령이라고 부른다.

이사벨과 페르난도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서 지위를 확립하면서 지역 귀족과 합세하여 왕족의 권위를 세운다. 이런 과정에서 España라는 단어가 출현하게 된다. 에스파냐라는 단어는 고대에 스페인을 지칭하던 히스파니아(라틴어: Hispania)에서 유래했으며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를 통칭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한다. 스페인 전체에 통합과 더불어 안정기가 찾아오면서 종교, 정치, 군사 등 전반에 발전을 거두게 되며 새로운 강대국으로 떠오르게 된다. 훗날 수많은 식민지를 복속한 국력 신장의 계기는 이때 다져진 것이다.


1788년 - 조지아주가 미국의 4번째 주가 되었다.

1905년 - 일본이 러시아와 접전을 벌인 끝에 뤼순(旅順)을 점령했다.

1929년 - 미국과 캐나다가 나이아가라 폭포 보호 협정을 조인하다.

1942년 - 제2차 세계 대전 : 일본군이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점령하다.

2008년 - 뉴욕상업거래소의 2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 중질유 가격 거래 도중 사상 처음으로 유가가 1 배럴당 100 달러를 돌파하였다.

2013년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동쪽 39 km 해역에서 규모 2.4 지진이 발생하다.

2014년 - 일본 지바현 동쪽 앞바다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2015년 - 영국 블루아일랜즈 항공 소속 여객기가 엔진에서 화재가 발생해 런던 사우스엔드 공항에 비상 착륙하였다. 승객 28명은 전원 무사하였다.

2015년 - 나이지리아 바가의 주민들을 보코하람이 학살하였다.(2015년 바가 학살)

2016년 - 중국 헤이룽장 성에서 규모 6.4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2016년 -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시아파 지도자인 님르 바크르 알님르를 비롯한 47명의 사형수가 처형되었다.

 

문화

1959년 - 소련의 최초의 달 탐사선 루나 1호 발사.

루나1호

루나 1호는 소련의 달 탐사선으로, 세계 최초로 달 착륙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달에 착륙은 하지 못하고, 달에 근접하는데 그쳤다.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고 나서 이미 달 탐사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58년 이후에는 달에 착륙시킨 후 조사를 진행할 루나 계획을 실시하였다. 맨 처음 3번은 실패하였으나, 4번째 발사 시도였던 1959년 1월 2일에 발사를 성공시켰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달 착륙을 시도하다가 달 근방 5,995 km 까지 접근하였다. 현재 루나 1호는 궤도를 바꾸어 지구와 화성 사이의 궤도를 돌고 있다.
탐사선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안테나 5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된 탐사 장치로썬 자력계나 방사능 계수 장치등이 탑재되었다.


2001년 -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을 잇는 직항로가 52년 만에 개설되다.

2004년 - 미국 항공우주국의 스타더스트(Stardust) 우주선이 와일드 2(Wild 2) 혜성을 접근 통과, 샘플을 수집하고 성공적으로 지구로 귀환하다.

2006년 - 대한민국에서 신 5000원권이 통용되다.

 

탄생

869년 - 57대 일본 천황 요제이.

1699년 -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자 황제 오스만 3세.
 
1727년 - 영국 육군의 군인 제임스 울프.

1822년 - 독일의 물리학자 루돌프 클라우지우스.
 
1896년 - 소비에트 연방의 영화 감독 지가 베르토프.

1909년 - 미국의 정치인 배리 골드워터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

1917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정국진.

1917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예술가 김원균.

1918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민병권.

1920년 - 러시아의 과학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

1928년 - 일본의 불교학자, 시인, SGI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1938년 - 대한민국의 전 국무총리 고건.

1944년 - 대한민국의 성우 김정경.

1950년 - 미국의 클라리넷 연주가 데이비드 시프린.

1951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추자.

1960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오대석.

1962년 - 대한민국의 전 육상 선수 장재근.

1971년 - 대한민국의 코치, 전 야구 선수 서용빈.

1975년 - 대한민국의 코치, 전 야구 선수 손민한.

197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윤세아.

1980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김마메.

1988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시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상수. / 일본의 성우 아케사카 사토미. / 덴마크의 축구 선수 나디아 나딤.
1989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남희.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용찬.

199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윤태화.

1991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유지 (베스티)

1992년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빅토르 클라에손.

1993년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욘나 안데르손.
 
1994년 - 대한민국의 가수 정민 (보이프렌드)

 

사망

1557년 - 이탈리아의 화가 폰토르모

1904년 - 남북전쟁 남부동맹의 장군 제임스 롱스트리트

1917년 - 프랑스의 사이클 선수 레온 플라멩

1931년 - 한말의 정치인 조민희

1942년 - 대한민국의 독립지사 김경천

이미지출처 KBS

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가문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김현충이고, 일본군에 근무할 때 김광서로 개명하여 호적에 올라 있다. 후에 신팔균(신동천), 지청천과 함께 '하늘 천(天)'자를 넣어 지은 김경천, 김응천(金應天)은 별명이다. 

아버지인 김정우는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구한국 육군의 엘리트 인사였다. 김정우가 만학의 나이에 큰 아들 성은과 함께 일본에 유학하여 김정우는 동경공업학교를, 김성은은 일본육사를 졸업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고급장교가 되었다. 김경천은 군인인 아버지 및 형들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군인이 되기를 꿈꾸었고, 한성부에서 중학교를 마친 뒤 1908년 8월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육군중앙유년학교에 입학한다. 아버지와 형은 공업을 배우라고 권했지만 ‘나폴레옹’ 책을 탐독하던 그는 결국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유년학교를 마친 후 1909년 12월 1일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더보기

일본 유학을 떠나기 앞서 1908년 3월 중 아버지 김정우가 작고하였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인 1908년 7월말에 대한매일신보에 자신의 재산인 전답, 가옥, 산판을 나열하고, 자신이 일본 유학을 떠나면서 문권을 다 가지고 가니, 내외국인은 사기 당하지 말라는 광고를 두 차례 내었다. 당시 재산 목록을 보아 부친 사후 상당한 재산을 상속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일본 유학중인 1910년 초에 아버지의 별실 화순집이 부친 소유 동대문 등지의 채전을 전군부대신 윤웅렬에 위탁하여 상당 금액을 받고 매각하여, 김정우의 며느리가 윤씨에게 진정서를 내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에 난 것으로 보아 부친의 유산을 두고 집안에 다툼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부친 김정우는 군부대신 윤웅렬의 부관을 지냈다고 한다.

1909년 5월 육군중앙유년학교를 졸업하였다. 이어 1911년 5월 27일 일본 육사 기병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도쿄에서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일본육사를 졸업하면 바로 소위로 임관하는 것이 통례였으나 그는 소위 임관을 처음에 거부하여 말썽이 되었다. 결국 경성부로 소환되어 조선총독 테라우치 마다사케와 면담하였다. 테라우치한테 임관 권고를 받은 김경천은 아버지와 형의 죽음으로 가정 생계도 꾸려나가야 했고,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육사 졸업한 것 갖고는 안 된다. 일본군 장교 생활을 하여 일본 군사기밀을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고쳐먹고 그 권고를 받아들였다.

이후 기병 장교로 근무하였는데, 수 년간 기회를 엿보다가 1919년 2·8 독립 선언을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귀국했다. 그해 6월 초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총재 안병찬)에 가입해 활동했고,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19년에 3.1 만세 운동이 발발하자 김경천은 육사 삼 년 후배 이청천과 함께 만주 삼원포에 위치해 있는, 독립운동가 이회영, 이상룡이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놓은 신흥무관학교에 갔다. 일본육사출신 김경천, 이청천이 그 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있다는 소식이 국내에 들어가자 3.1운동 이후 독립군이 되려던 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삼원포로 갔다. 이에 크게 당황한 일제의 온갖 수단을 강구한 김경천 매장 공작과 중국인과의 외부적 문제, 한국인끼리의 내부적 문제로 인해, 신흥무관학교를 주도하던 중 그는 신흥무관학교 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

이후 1919년 연말 경에 김경천은 만주 삼원포를 떠나 러시아 지역으로 이동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중국인 마적단과 싸웠으며, 창해청년단의 단장 김규면에 이어 총사령관을 맡아 전투를 거듭하면서 시베리아 지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21년에는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되었고[ 러시아의 혁명 세력과 연합하면서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지도자로 소련의 인정도 받게 되었다. 공민 나경석이 1922년 1월 동아일보에 연재한 "노령견문기" 5회와 6회에 당시 그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다.

1922년 수청의병대는 대한혁명단으로 개칭하였으며, 김경천은 사령관을 맡았다. 그해 10월 고려혁명군(총재 이중집)이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후 정세 변화로 러시아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노령 무장 독립 운동의 선도격이던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1923년 상해에서 상해임시정부를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될 때 군사담당 위원으로 내정되었다. 김경천은 상해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1923년 이후로는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하였고 국경경비대의 장교로 일했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1925년 6월에 부인 유정이 딸 셋을 데리고 사라져 종로서에서 수색중이라고 시대일보가 보도하였으므로 이때 연해주로 가서 가족들이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장남 수범은 이듬해 1926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태어났다.

1936년 소련 당국의 한인 인텔리 피검정책과 관련하여 체포되었고, 9월 29일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3년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체포 원인으로는 2가지 추측이 있다. 첫째, 연해주 한인 지도자는 이르쿠르츠파, 상해파 둘로 나뉘었는데 당시 상해파 지도자들이 대거 체포되는 과정 중 상해파 공산주의자로 오인받았을 수 있다. 김경천은 파당을 좋아하지 않아 어느 파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둘째, 그는 소련식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이는 2012년 12월 06일자 KBS 역사스페셜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 에서도 밝혀진다.)

1937년 연해주 거주 전체 한인에게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이주 정책이 시작된다. 김경천은 이 당시 2년 반을 복역한다.
1939년 2월 석방되어 카자흐스탄 까라간다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독일인 농장 잡부로 일했으나 4월 5일 재차 체포되어 까라간다 정치범수용소에서 복역했다. 6월 25일 모스크바로 이송되었고 간첩죄가 적용되어 강제노동수감소 8년형을 언도 받았고, 러시아 북부철도수용소로 이송되어 매일 철도건설 공사장에 동원되었다.

1942년 1월 14일 비타민 결핍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고, 시신은 수용소 근처에 묻혔다고 하나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말년 소식은 1990년대 중반 이전에는 국내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자유신문은 망명지사 가족 탐방 기사를 연재하는데, 그의 가족은 당시 국내에 없었으므로 5번째 기사로 그가 살던 종로구 사직동을 찾아 동네 노인을 만나 그에 대한 옛 이야기를 듣고 보도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1977년 - 일본의 군인 사토 슌지

1988년 - 일본의 군인 가사하라 유키오

2000년 - 영국의 소설가, 번역가 - 패트릭 오브라이언

2001년 - 미국의 정치인,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William Pierce Rogers)

2011년 - 미국의 군인 리처드 윈터스.

2014년 - 대한민국의 군인 김재춘

2016년 - 사우디아라비아의 시아파 지도자 님르 바크르 알님르

2017년 - 영국의 비평가, 소설가이자 화가 존 버거

2018년 - 모르몬경의 제16대 회장 토머스 S. 몬슨

2019년 - 대한민국의 군인 김철우

 

기념일

카니발 데이: 세인트키츠 네비스

조상의 날(Ancestry Day): 아이티

설날(New Year Holiday): 스코틀랜드

 

반응형

'보관함 > 오늘의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역사 1월 6일  (6) 2020.01.06
오늘의 역사 1월 5일  (4) 2020.01.06
오늘의 역사 1월 4일  (0) 2020.01.06
오늘의 역사 1월 3일  (6) 2020.01.03
오늘의 역사 1월 1일  (8) 2020.01.01
오늘의 역사 12월 31일  (0) 2019.12.31
오늘의 역사 12월 30일  (8) 2019.12.30
오늘의 역사 12월 29일  (10) 2019.12.29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