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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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기원전 46년 - 카이사르가 아프리카 북동부 루스피나 전투에서 라비에누스를 격파하다.

1135년 - 고려의 묘청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묘청의 난을 일으키다.

1896년 - 유타주가 미국의 45번째 주가 되었다.

1947년 -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 창간

1951년 - 1.4 후퇴로 조선인민군과 중공군에게 서울을 내줌

1.4 후퇴 서울을 떠나며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1·4 후퇴 또는 제3차 서울 전투, 서부 전선 제3차 공세는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12월 경부터 이듬해인 1951년 1월 초 사이, 중국 공산당에서 파견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로 국제 연합군의 주력이 서울에서 물러나고 공산군이 서울을 재점령한 사건을 가리킨다. 

조선인민군의 남침 이틀 후, 그리고 중공군 개입 3개월 전인 1950년 6월 27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중화민국을 보호하기 위해 타이완 해협으로 미해군 제7함대를 급파하였다. 7월 1일, 저우언라이는 만일 미군이 38선을 넘는다면 자국의 군대는 북한군으로 가장해 전투에 참가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를 위해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이미 묵덴지역에 12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놓았다고 언급했다. 같은 해 8월 4일, 마오쩌둥은 소련 정치국에 중화인민의용군의 준비가 완료되는 대로 전쟁에 개입할 것임을 보고하였다. 8월 20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UN에 "한국은 중국의 이웃나라이므로... 중국인은 한반도 상황에 개입해야만 한다."는 내용을 통보하였으며 중립국 외교관을 통하여 "중국의 안전을 위하여 UN의 한국전 개입을 방해할 것"이라고 미국에도 통보하였으나 트루먼 대통령은 "UN을 협박하기 위한 뻔한 시도"로 결말을 내렸다. 1950년 10월 2일, 한국군이 38선을 통과한 다음날, 소련 정치국은 중공군 개입을 승인하였고 후에 중공군은 미군 폭격기가 북한을 향하던 중 중공의 영공을 침범하였기 때문이라 주장하였다.

9월 모스크바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는 외교와 개인적 노선을 동원해 스탈린에게 군사와 물자지원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지체함에 따라 마오쩌둥도 예정을 변경하여 한국전 개입을 1950년 10월 13일에서 19일로 연기하였다. 소련군은 또한 공중엄호를 서방 공군과의 전쟁 경험을 위한 전선에서 100km 이상의 거리에서만 허용하였으나 이용된 미그-15s 기는 UN의 제공권에 큰 위협을 가하였다.

1950년 10월 8일, 미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진군 다음 날, 마오쩌둥은 중화인민해방군 북방지역군에게 중화인민의용군 휘하로 편입하여 한국을 침공할 것을 명령하였다.

중공 인민의용군의 야간 진군과 오전 5시 30분 이전까지 전개된 대공 위장술, 그리고 이어진 주간진군팀의 다음 야영지 수색은 미 항공 수색의 의용군 포착을 어렵게 하였다. 주간 진군 동안 항공기가 포착되면 사라질 때까지 병사들은 미동을 정지한 채 있도록 하였고 그러한 전략은 3사단을 만주의 안퉁에서 한국전쟁지역까지 460km를 19일 동안 이동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하였고 반면 산악지대를 행군로로 선택한 다른 사단은 18일 동안 29km를 행군하는데 그쳤다.

그동안, 1950년 10월 10일, 제89전차대대는 제1기갑사단에 포함되는 등 UN군은 기갑을 강화하고 있었다. 10월 15일, 비교적 약한 북한 인민군의 저항에 맞서 제7기갑연대와 제70 전차대대는 남천 잠을 획득하였고, 10월 17일 평양으로 가는 주로의 우측 측면으로 우회하여 황주를 공략하였다. 이틀 후, 제1기갑사단은 평양을 점령하였고 1950년 10월 19일, UN군은 북한 공략에 성공하였다.

10월 중순에 중화인민공화국의 저우언라이는 소련을 비밀리에 방문하고 모스크바에서 전문을 타전하였는데, 이 전문에는 “스탈린이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조선 파병 반대 결의에 이의를 표명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10월 하순,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에서 타전한 전문을 접수한 이후 중공 지도부에서는 한국전쟁 참전 여부에 관해 논란이 있었다. 가오강은 10월 25일 회의에서 자신이 중공군의 조선 파병을 반대하는 저우언라이와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고 언급하였다. 결정적 순간에 가오강은 펑더화이에게 미국이 조선 전역을 점령할 경우 중공과 국제 정세 전반에 야기될 위험을 설명하고 펑더화이를 설득하여 마오쩌둥에게 즉각적인 조선 파병을 공동 건의키로 합의했다.

1950년 10월 15일,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 웨이크 섬(Wake Island)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중공군이 개입하기에는 이미 늦어 침공가능성이 적다고 의사를 밝혔고 중공군은 만주에 30만, 압록강변에 10~12만 5천 명의 군이 포진해 있으며 그중 반 정도가 압록강을 넘어 남진할 수도 있으나 "공중지원 없이 그들이 평양으로 진격할 경우 대패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10월 24일, 중공 정부가 개최한 '민주적 정당' 지도자들과의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조선은 중국의 문턱으로, 일본이 조선 강점 이후 조선을 중국 침공의 교두보로 이용했음을 들어 미국의 조선 장악을 용인할 수 없다고 연설하였다. 또한 소련으로서는 조선의 사태에 개입할 당위성이 현재로서는 없으나 중공과 소련 간에는 우호 및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돼 있으므로 만약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는 경우 소련은 조약상 중공에 대한 의무를 이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25~26일, 중국 인민지원군은 북조선에서 한국군의 1개 대대를 궤멸시켰으며 이는 중공군의 한반도 내 첫 번째 전투행위였다.

두 번의 작은 충돌 후, 1950년 11월 1일 북한진영 깊숙이에서 첫 번째 대규모 미-중 전투가 벌어졌다. 수천의 인민의용군이 곳곳에 산재한 UN 지휘 부대를 북쪽, 북서쪽, 서쪽 3개 방향에서 삼자 창 전법으로 포위, 공격하여 방어 태세의 측면을 괴멸시켰다. 11월 말, 서부 진영 청천강 유역에서 인민의용군은 몇몇 한국군 사단과 남아있던 UN군의 측면을 괴멸시켰고 UN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터키 여단이 중국 국경의 군우리에서 방어에 성공함에 따라 미 8군은 퇴각로를 확보하였고 중화인민의용군의 진격을 4일간 늦출 수 있었다. 동부 진영의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삼지창 전법에 익숙하지 못했던 3 미 제7보병사단의 연대전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5군단의 지원사 격하에 겨우 탈출에 성공하였다. 이는 10배에 달하던 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간신히 성공한 후퇴 작전으로 미군 측이 15,000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이다.

초창기의 전방 인민의용군은 중화기나 승무원 탑승의 경기갑이 전혀 없었으나 빠르게 그들의 이러한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전법은 50명 규모의 소대에서 200명 규모의 중대 등 작은 규모의 부대를 침투시켜 여러 분대로 나눈 후, 한 분대가 미군의 퇴각로를 차단하는 사이 남은 분대는 전방과측면을 합동 공격하는 것이었다. 방어 세력이 결국 패하여 후퇴할 때까지 전방위 공격을 집주 저음 소한 위 후의 측면으로 몰래 이동하여 같은 전법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첫 번째 대공세 국면에서는 경험이 풍부한 경보병이 박격포 이상의 중장비의 도움 없이 공격을 주도하였고 이들 중공군은 수십 년 동안 중일전쟁과 국민당과의 내전을 통해 잘 훈련된 모습을 보였으며 야간기습에 특히 뛰어났고 무엇보다도 군사 위장에 능통하였다. 순찰대는 UN군의 위치추적에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이들 부대의 후면으로 이동, 퇴각로를 차단한 후 삼자 창 전법으로 전방위 대공세를 가하는데 뛰어났다. 또한 하치 시키라 불리는 전법도 구사하였는데 이는 V자 진형을 구축하여 적군을 진형 가운데로 끌어들인 후, V자의 입구를 막아 퇴각로를 차단, V자 좌우 측면이 적군을 포위, 섬멸하는 전법이었다. 이러한 전법은 온정, 운산 그리고 초산 전투에서 큰 성공을 걷다었

11월 말, 인민의용군은 UN지휘본부를 북동부 북한에서 38선 이남까지 밀어냈. 북한으로의 진격 때보다 빠르게 퇴각한 UN군은 북한 동부 해안에 위치한 흥남시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하 여고 조를 기다렸다. 1950년 12월, 193척 분량의 UN군과 물자(군인 105,004명, 민간인 98,000명, 차량 17,500대, 물자 350,000톤)가 탈출하여 부산에 정박하였고 1950년 12월 16일, 트루먼 대통령은 대통령 성명으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1951년 1월, 중화인민의용군과 북한인민군은 제3단계 공세(중공군 동계 대공세)에 들어가 UN군을 비밀리에 포위, 공격하는 야간 전술을 펼쳤다. 공격에는 요란한 나팔과 징이 동원되어 작전 전달과 적군을 혼란시키는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전법을 처음 목격한 UN군은 중공군 동계작전에 압도되어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중공군에 빼앗기게 되었다.

게다가 미8군의 월턴 워커 장군이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 것이 군의 사기저하를 불러오게 되고 이러한 차질에 맥아더 장군은 중국 대륙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후 이로 인해 발생한 방사선 낙진 지역을 중공군의 보급로 차단에 이용할 것을 고려하게 된다. 하지만 곧 워커 장군의 대체자 투입된 카리스마적 매 있는 리지웨이 중장이 후속 사령관으로 임명된 후 유혈이 낭자했던 미 8군은 곧 다시 회생하기 시작했다.

한국 전쟁에 중국 공산당이 투입한 군사는 92만6천명이나 되어 UN군과 한국군을 모두 합친 것과 비슷한 규모였다.

1950년 12월 제2차 청천강 전투와 장진호와 같은 곳에서 벌어진 공산진영의 예상치 못한 강력한 반격에 부딪친 한국군과 미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이 12월 4일에 평양을 철수하고, 이를 평양 철수 작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결과 12월 6일에 인민군과 중공군이 평양을 재점령하였다.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과 피난민 10만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하였는데, 이를 가리켜 흥남철수라고 한다.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미국 1 해병사단도 12월 24일에 흥남에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1982년 - 대한민국 문교부가 중·고등학생의 머리와 교복의 자율화 방안을 발표하다.

1987년 - 한국의 민주 운동가인 박종철을 수사관들이 물고문을 통해 익사시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다.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한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대한민국 경찰 수사관들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을 심문하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6월 항쟁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6월 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사건 당시 박종철 학생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재학생이었다. 1986년 청계피복노조 합법화 요구 시위를 한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을 선고받은 바 있고, 출소 이후에도 학생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후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 당시 연행 명목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받고 있었던 박종운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연행한 것이었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여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경찰은 14일 밤에 은폐를 위하여 화장할 계획이었으나, 최환 부장 검사는 사체 보존 명령을 내렸다. 사건 지휘는 그날 밤 당직이었던 안상수 검사가 맡았다.

사건 다음 날 1월 15일 오후 6시가 넘어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실시되었다.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 부검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의 황적준 박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가 맡았다. 경찰의 협박과 회유를 물리치고 1월 17일 황적준 박사는 보고서를 작성했으며, 1년 뒤 부검 과정에서 받았던 경찰의 회유와 협박을 받은 내용을 적은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기도 하였다. 박종철 학생의 사망 이후 중앙일보의 신성호 기자는 한 검찰 간부가 “경찰, 큰일 났어”라고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서 단서를 잡고, 1월 15일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데스크로 내보냈고, 석간에 단신으로 실렸다. 이 소식은 다른 국내 언론과 외신에서도 인용되었고, 그날 KBS와 MBC 저녁뉴스에서도 단신으로 내보냈다.

보도 다음날인 1월 16일 강민창 당시 내무부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감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여기서 그는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의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당시 부검의 의사로 대공분실 509호실에 출입했던 오연상으로부터 "사건현장에 물이 흥건한 것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확보하며, 고문에 의한 사망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결국 기자회견 4일 만인 1월 19일, 강 치안본부장은 다시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기존의 입장을 뒤집고 "박종운 군의 소재를 묻는 심문에 답하지 않자 머리를 한차례 잠시 집어넣고 내놓았으며, 계속 진술을 거부하자 다시 집어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 사망했다"라고 "가혹행위"로 인한 사망을 시인하였다. 이후 조한경과 강진규 등 고문 경찰관 2명을 사건 주도자로 지목해 구속, 사건을 축소하였다. 그리고 부검을 거친 박 군의 시신은 가족 허락도 없이 벽제 화장터에서 시신을 화장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했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부 장관에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며 고문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했는데, 그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특전사령관으로 민중 학살의 책임자중 하나로 지목되던 사람이었기에 이 말 역시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사건 주도자로 구속된 경찰 두 명은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됐다. 당시 안유 구치소 보안계장은 이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그들 외에 추가로 경찰관 3명이 고문에 관여하였고, 경찰은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다는 정황을 알아차렸다. 안 계장은 마침 수감 중에 있던 이부영 당시 전민련 상임의장에게 그 사실을 전달하였고, 이 씨는 쪽지에 추가 관여 은폐 사실을 적은 뒤 서로 친분이 있었던 한재동 교도관을 통해 외부에 전달토록 하였다. 해당 쪽지는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와 함세웅 신부에게까지 전달되었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 도중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대공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 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혔다. 폭로 다음날 통일민주당에서는 당 차원에서 진상조사를 벌이겠다고 밝혔고, 아버지 박정기 씨는 명확한 진상규명과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을 대행해달라는 진정서를 대한변협 측에 전달하였다.

당시 경찰이 박종철을 고문하여서까지 소재를 밝히려 했던 장본인 박종운은, 이후 한나라당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고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하여 논란이 있었다.
수사를 지휘했던 신창언 검사는 이후 민자당(현 자유한국당의 전신)의 추천으로 헌법재판관을 지냈다. 담당 검사였던 박상옥은 2015년 박근혜 정권에서 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되었다. 당시 박상옥 검사는 사건이 축소, 은폐된 사실을 알고도 수사를 확대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나 논란을 빚었다. 담당 검사였던 안상수는 한나라당 당대표를 역임했으며, 현 창원시장으로 선출되었다. 안상수는 수사 당시 사건 은폐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2007년 - 낸시 펠로시가 미국 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사상 첫 여성 미국 하원 의장이다.

러시아와 벨라루스가 석유로 인해 분쟁이 발생했다.

2010년 - 미 항공우주국 케플러 계획의 첫 데이터가 수신되어 다섯 개의 외계 행성을 발견하다.

두바이에 세계 최고로 가장 높은 부르즈 칼리파가 개장되었다.

대한민국(한반도) 중부 폭설: 대한민국의 수도권과 강원도 등을 비롯한 중부 대부분 지역에 폭설이 내리다.

2011년 - 파키스탄의 정치인 살만 타시르가 자신의 경호원에게 살해당했다.

이란의 마지막 샤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막내 아들 알리 레자 팔라비가 미국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2012년 - 미국 대선의 첫 관문인 아이오와 공화당 코커스에서 롬니가 승리하다.

터키가 미국의 이란 제재 대상에서 예외로 해 줄 것을 요청하다.

2016년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선착장 앞바다에서 승용차가 바다로 추락해 6명이 사망하였다.

문화

 

 

탄생

1076년 - 북송 철종 조후(趙煦)

1643년 -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

1785년 - 독일의 언어학자 야코프 그림

1809년 - 프랑스의 교육자, 발명가 루이 브라유

1897년 - 대한민국의 목사 이동욱

1899년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군인 프리츠 바예를라인

1938년 - 대한민국의 기타리스트 신중현

1940년 - 영국의 물리학자 브라이언 데이비드 조지프슨.

1940년 - 프랑스의 소설가 가오싱젠

1959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양석.

1962년 - 미국의 소설가 할런 코벤.

1968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故 박동희.

1973년 - 대한민국의 MC, 개그우먼, 가수 송은이.

1982년 - 대한민국의 배우 강혜정.

1985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정성룡.

1987년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대니 심슨. / 멕시코의 축구 선수 모니카 오캄포.

1990년 - 대한민국의 사회기관단체인 김동근. / 독일의 축구 선수 토니 크로스.

1993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윤서

1995년 - 미국의 배우 매디 해슨

 

사망

1695년 - 프랑스의 원수 뤽상부르 공작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

1707년 - 신성로마제국의 장군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

1794년 - 독일 출신 프랑스의 장군 니콜라 뤼크네르

1856년 - 프랑스 조각가 다비드 당제

1907년 - 한말의 의병장 노응규

진주의 의병장 노응규

노응규(盧應奎, 1849년 3월 15일 ~ 1907년 1월 4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 유학자이며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본관은 광주이며 호는 신암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하였고, 을미사변 당시에는 일본의 만행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킨 공로로 규장각 주사와 동궁 시종관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종증조부 이기도 하다.

노응규는 경상남도 함양 태생으로 아호는 신암(愼菴)이다. 유명한 유학자인 허전의 제자였으며, 위정척사론의 거두인 최익현과 송병선, 송근수에게서도 사사했다.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진데 분노한 유림 세력은 대거 거병하게 되었는데, 노응규도 1896년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장수사의 승려인 서재기를 선봉장으로 삼은 노응규의 의병은 진주를 단숨에 함락시켰고, 진주 인근 세력을 합세시켜 진주 의병진(총대장 노응규)을 구성하게 되었다. 진주 의병진은 부산 방면으로 진공 하여 김해까지 손에 넣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개입에 밀려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노응규 의병진 일부는 행패를 부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매천 황현의 증언에 의하면 '1897년 초 노응규 등은 진주에서 웅거하면서 전 경내를 분탕 하니 주민들은 동 학교도들의 행패를 만났다고 말했다. 안동 주변 수십 군에는 난폭한 겁탈이 있었으며 이중으로 경 군까지 유린했는데 공사가 도탄에 빠졌다.'라고 진술하였다.

이 일로 가족들이 피살되는 불행 속에 노응규는 호남 지방에서 피신하던 중, 1897년말 대한제국 선포 직후 상소를 올려 사면을 받았다. 이후 여러 나라의 세력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고종은 을미사변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유학자들에게 벼슬을 주어 등용했고, 그도 규장각 주사와 동궁 시종관 등의 직책을 맡아 고종과 가까운 거리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지면서 한일의정서와 을사조약 체결 등으로 국권의 피탈이 가시화되었고, 노응규는 190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스승인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했다. 최익현의 의병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

이때 몸을 피한 노응규는 또다시 거사를 준비하여 그해 충청북도에서 서은구, 엄해윤, 김보운, 오자홍 등과 함께 의병 조직을 구성했는데, 밀정에 의해 이 일이 탄로나 12월 8일 체포된 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옥사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가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1년 -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

1960년 - 프랑스의 철학자, 소설가 알베르 카뮈

1965년 - 영국의 시인, 평론가 T. S. 엘리엇

1961년 -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에어빈 슈뢰딩거

2010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유기정

2011년 - 이란 마지막 황제의 아들 알리 레자 팔레비

2011년 - 파키스탄의 기업가이자 정치인 살만 타시르

2017년 - 프랑스의 지휘자 조르주 프레트르

2018년 - 일본의 전 야구감독 호시노 센이치

2019년 - 영국의 작가 존 버닝햄

 

기념일

독립기념일: 미얀마, 1948년에 버마라는 이름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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