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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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066년 - 에드워드 참회왕이 자녀 없이 죽어 승계 위기를 촉발시켰고 결국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으로 이어졌다.

1066년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들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Norman conquest of England)은 11세기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 일명 정복왕 윌리엄이 이끄는 노르만인, 브르타뉴인이 앵글로색슨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정복한 사건이다.

윌리엄은 자식 없이 죽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참회왕과 자신의 친척 관계를 근거로 들며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했다. 참회왕은 1066년 죽었으며 그의 매제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가 왕위를 계승했다. 1066년 9월, 노르웨이 국왕 하랄드 하르드라디가 잉글랜드 북부에 상륙, 풀퍼드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해럴드는 9월 25일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하르드라디를 꺾었고 하르드라디는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로부터 며칠 되지 않아 윌리엄이 잉글랜드 남부에 상륙했고, 해럴드는 병력 상당수를 북부에 남겨둔 채 윌리엄과 대적하기 위해 남하했다. 해럴드의 수비군은 윌리엄의 침략군과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격돌했고, 그 결과 윌리엄이 승리하고 해럴드는 사망했다.

윌리엄의 주요 경쟁자들인 해럴드와 하르드라디가 사라졌지만 이후 몇 년에 걸쳐 잉글랜드에서는 노르만 침략자들에 저항하는 반란이 잇따랐고, 윌리엄은 1072년 이후에야 왕위를 확실히 확보할 수 있었다. 계속 저항하던 앵글로색슨인 귀족들의 영지는 몰수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외국으로 망명했다. 윌리엄은 새로이 차지한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 자신을 따라온 기사들에게 잉글랜드 각지에 성을 쌓고 군사 거점을 지휘하도록 했다. 노르만 정복의 결과 상당한 변동이 있었다. 우선 상류층 언어로 노르만 어가 사용되게 되었고, 윌리엄이 영토를 분봉함에 따라 지배계층의 구성도 변화했다. 한편 농촌 지역에서는 이때를 전후하여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는데, 이것이 노르만인의 정복과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정부 구조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시절에 비해 달라진 것이 거의 대부분 없었고, 새로운 노르만인 지배자들은 앵글로색슨인들의 행정구조 거의 대부분을 그대로 사용했다.


1554년 -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다.

1781년 - 미국 독립 전쟁: 버지니아주 리치먼드가 베네딕트 아놀드의 영국 해군에 의해 타격을 입었다.

1885년 - 우정총국에서 우편 업무 폐지.

1905년 -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 러시아 노동자 장례행렬에서 춤추다.

1924년 - 의열단원 김지섭, 일본 천황 폭살 기도 실패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김지섭

사서삼경에 능통하였고, 일어를 자습해 21세 때에 상주보통학교 교원과 금산 지방법원 서기 겸 통역으로 재직하였다.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김원봉·곽재기·김시현 등과 조국의 독립을 기도하였다. 독립투쟁을 목적으로 국경을 넘어 만주·상해·시베리아 등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922년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러시아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충당하고자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다. 그 뒤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거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판사였던 백윤화에게 5만 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배신당하고 동지 윤병구마저 붙잡히고 말았다.


국내에서 파괴공작을 실행하고자 1923년 3월에 폭탄 36개를 상해로부터 톈진으로 수송해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 안동현에 중개소까지 설치하였다.
그 폭탄을 김시현·유석현·황옥 등에게 서울로 가져오게 해 3월 15일을 기해 조선총독부·경찰서·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찰에 사전에 탐지되어 실패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가 일어나 한국인 학살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하겠다는 결의를 굳혔다. 1924년 초 일본 동경에서 소위 제국의회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를 보복의 기회로 결심하고 동경에 가기로 하였다. 이듬해 1월 4일 동경으로 가던 중, 오사카에서 제국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계획을 바꾸어 침략의 아성인 황성에 투탄하기로 결정하고 1월 5일 황성 정문에 접근하였다. 호위 경관이 저지하자 폭탄 한 개를 던지고 재빨리 궁성 쪽으로 달려갔다. 호위 경관들이 달려오므로 나머지 폭탄은 니 주바 시 한복판에 던지고 붙잡혔다.


1925년 8월 동경공소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1927년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이듬해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49년 -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페어딜 정책을 발표하다.

1964년 - 동, 서방 교회 수장이 예루살렘에서 910년 만에 만남.

2003년 -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2회의 자살폭탄테러가 발생하여 23명이 사망하다

2004년 - 부룬디의 후투족 무장 조직인 FNL(fr)이 2003년 12월 31일 발표한 선전 포고를 철회하고 도미티앵 은다이제예(fr) 대통령과 협상할 것을 받아들이다.

2006년 - 제주도 5개 사립고교가 개정 사학법에 반발하여 신입생 배정 거부 뜻을 밝히고 신입생 입학원서 수령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학교장이 배정업무를 거부할 권한이 없다고 밝히고 "어떠한 경우라도 학생들을 담보로 학습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며 강력 대처할 뜻을 표명했다.

2012년 - 한나라당 고승덕 의원이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을 폭로하다.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 및 의혹은 한나라당 고승덕 국회의원이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당대표 선거에서 자신에게 돈봉투가 배달되었음을 밝히면서 불거지기 시작한 사건이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레임덕에 빠져 있었으며, 위기를 느낀 당시 한나라당이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당내에서는 최고위원에 해당하는 비상대책위원들을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투표를 통해 선출할지,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어 임의로 임명케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당시 당의 주류였던 친이계는 전당대회 개최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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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살포 사건 및 의혹은 한나라당 고승덕 국회의원이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당대표 선거에서 자신에게 돈봉투가 배달되었음을 밝히면서 불거지기 시작한 사건이다.

2012년 총선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는 레임덕에 빠져 있었으며, 위기를 느낀 당시 한나라당이 박근혜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당내에서는 최고위원에 해당하는 비상대책위원들을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투표를 통해 선출할지, 박근혜 위원장에게 전권을 주어 임의로 임명케 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당시 당의 주류였던 친이계는 전당대회 개최 쪽으로 기우는 분위기였다.

그러던 2011년 11월 14일, 고승덕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서울경제신문에 고정 연재 중이던 칼럼을 통해 전당대회에는 돈봉투와 줄 세우기 등 폐해가 난무한다며, 그 예로 2008년 전당대회 당시 한 당 대표 후보가 자신에게 돈봉투를 보내와 돌려준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내용은 당초 큰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2012년 1월 3일, 고승덕 의원이 채널A 생방송 프로그램인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해 재언급한 뒤로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당시 방송의 진행자였던 박종진 앵커는 고승덕 의원에게 칼럼을 거론하며 돈봉투 사건의 진위 여부를 물었고, 고승덕 의원이 이에 대해 사실임을 확인해주며 정국에 파란이 일었다. 고승덕 의원은 훗날 그의 수기인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은 없다' 2014년 개정판에서 당시 방송국 측이 정부예산 관련 인터뷰를 하겠다고 해놓고서 막상 생방송에서는 진행자가 의도적으로 "일 잘하는 000 구청장을 공천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전당대회에서 돈봉투를 주면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는 것을 아는가?" 등 질문을 계속 던졌다고 썼다. 000(전 구청장)은 다음 해 4월에 있을 총선에서 고승덕 의원에게 도전하기 위해 국회의원 선거 예비후보로 등록한 상태였기 때문에 고 의원의 증언은 음모설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후 고승덕 의원이 언론에 누가 돈봉투 주었는지를 밝히지 않자 새로 구성된 당 지도부는 논란을 해소하기 위하여 검찰에 위 사건에 대한 수사의뢰를 하였고, 고승덕 의원은 검찰에 출석해 자신에게 돈봉투를 보낸 사람은 박희태 국회의장이라고 진술하였다. 검찰은 해당 사건이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당시에 일어났으며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30대가 고승덕 의원실의 여직원에게 30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는 정황을 파악하였다. 검찰은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30대를 정확하게 지목하지 못한 상태에서 300만원이 나온 곳으로 지명된 박희태 국회의장의 의원실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그의 자택 및 국회 내 사무실을 압수 수색하였다. 검찰은 고승덕 의원이 받았다고 주장하는 돈봉투에 들어있던 자금의 출처를 라미드그룹에서 박희태 의장에게 지급했던 자금으로 보고 라미드그룹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였으며, 문병욱 라미드그룹 회장에게 검찰 출석 통보를 하였다. 박희태 의장은 돈봉투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며 모든 의혹을 부인한데 이어 라미드그룹으로부터 받은 돈은 변호사 수임료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1월 8일 검찰 수사에서 고승덕 의원은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때 박희태 당시 당 대표 후보 측으로부터 300만원이 든 돈봉투를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고승덕 의원은 1월 9일 기자회견에서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남자가 노란색 돈봉투가 여럿 들어있는 쇼핑백에서 300만원이 들어있는 봉투 하나를 꺼내어 박희태 당시 당 대표 후보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함과 함께 자신의 여비서에게 건네주었다고 밝혔다. 고승덕 의원은 자신은 돈봉투를 바로 돌려주었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히면서 검은색 뿔테 안경을 낀 남자가 여러 의원실에 같은 봉투를 돌린 것이 아닌가 한다고 밝혀 돈봉투가 자신뿐만이 아니라 다른 의원들에게도 전달되었을 것이라 추측하였다.

1월 9일 고승덕 의원 기자회견 전에는 2008년, 2010년, 2011년에 열린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각각 대표로 선출된 박희태, 안상수,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들 중 한 명이 돈봉투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론들에서 보도하였다. 또한 일부 보도에서는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 돈봉투를 전달하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다고 하였으나 1월 9일 기자회견에서 고승덕 의원은 김효재 전 수석은 돈봉투를 전달하라는 지시를 한 것이 확실히 아님을 밝혔다. 또 같은 기자회견에서 돈봉투와 함께 박희태 당시 당 대표 후보의 이름이 적힌 명함을 고승덕 의원 자신의 여비서가 검은 뿔테 안경을 낀 남자로부터 전달받았다고 밝히면서 돈봉투 전달 지시를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가 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언론들이 보도하게 되는 근거를 제공하였다. 기자회견일인 1월 9일 일본을 순방하고 있었던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자신이 돈봉투 전달을 지시한 적도 자신의 보좌관이 돈봉투를 전달하거나 되돌려 받은 적도 없으며 고승덕 의원이 언급한 개인명함을 돌린 적도 없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돈봉투 전달과 관련해 검찰 수사를 의뢰하였다. 검찰은 평검사만 6~7명에 달하는 대규모 수사팀을 꾸려 관련 사실을 언론에 발표한 고승덕 의원과 돈봉투를 직접 전달받은 고승덕 의원의 여비서 및 돈봉투를 돌려준 고승덕 의원의 전직 보좌관을 소환하여 조사하였다. 고승덕 의원은 소환 조사에서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이름이 적힌 명함이 300만 원이 든 돈봉투와 함께 자신의 여비서에게 전달되었음을 진술하였고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한나라당은 책임 있는 자의 책임있는 행동을 요구하여 한나라당이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의장직 사퇴를 요구한 것이 아니냐는 언론의 해석을 낳았다. 검찰은 또한 고승덕 의원의 진술 후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전 비서인 고진명과 2008년 전당대회 당시 박희태 후보 측 캠프에서 일한 안병용 서울 은평갑 당협위원장을 소환 조사하고 안 위원장을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당시 한나라당 원외 인사들에게 금품을 돌린 혐의로 구속하였다. 해외 순방 후 1월 18일 입국한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입국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소정의 책임을 지겠다면서도 자신은 돈봉투 전달 관련하여 아는 바가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1월 19일 오전 8시경부터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자택과 국회 내 사무실을 포함하여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때 박희태 당시 당 대표 후보 캠프에서 각각 회계담당, 재정담당, 공보담당을 맡은 이봉건 국회의장 정무수석비서관, 조정만 정책수석 비서관, 그리고 함은미 국회의장 보좌관 등 현직 국회의장인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측근들의 국회 내 사무실 및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였다. 검찰은 설 연휴 기간에도 수사를 계속하기로 하여 압수 수색을 통해 확보한 문건 등에 대한 검토가 끝나는 대로 조정만 수석 등 국회의장인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측근을 소환하기로 하였다. 검찰은 함은미 국회의장 보좌관을 2012년 설 연휴 다음날인 1월 25일에 소환하여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당 대표 선거 캠프에서 비서로 있었던 고명진과 구의원에게 돈봉투를 돌린 안병용 서울 은평갑 당협위원장에게 각각 자금 지원을 해준 사실이 있는지 조사하였다.

검찰은 1월 28일 라미드그룹을 압수 수색하고 라미드그룹의 회장 문병욱에게 검찰 출석 통보를 하였다. 검찰은 라미드그룹이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지급한 1억 원이 고승덕 의원이 받았다고 주장한 돈봉투에 든 자금의 출처라고 보고 압수수색을 실시하였으나 라미드그룹은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변호사 수임료로 해당 자금을 지급한 것이라며 변호사 수임 계약서를 공개하였다.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는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5개월 전 라미드그룹부터 변호사 공동 수임료를 받았을 뿐이며 세무신고 후 공동 수임한 다른 변호사와 수임료를 분배하였다고 밝혔으며 박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의 당 대표 선거캠프에서 근무한 조정만 정책수석비서관은 200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 당시 라미드그룹으로부터 선거캠프가 받은 돈이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에 수임 계약서에 수임액이 기재되어 있지 않고 전당대회 5개월 전에 수임 계약이 체결된 점을 들어 자금의 실제 사용 목적에 대한 의문을 나타내었다.

박희태는 5월 2일 재판부에 "혐의를 모두 인정한다. 재판을 빨리 끝내 달라"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2012년 - 브라질 상파울루 등 남동부 지역에서 집중 호우와 산사태로 피해가 속출하다.

호스니 무바라크 전 이집트 대통령에 대해 이집트 검찰이 사형을 구형하다.

2014년 - 인도 가오주의 신축 중이던 건물이 붕괴해 14명이 사망하였다.

방글라데시에서 야당의 보이콧 속에 총선이 실시되어서 야당이 승리하였다. 이 날 반정부 시위가 발생해 100여명이 사망하였다.

 

문화

1982년 - 대한민국의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다.

야간통행금지 해제 당일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야간 통행금지, 또는 통금, 야통은 야간에 일반인의 통행을 금지하는 제도를 이르는 말이다. 원칙적으로 분쟁이나 재난이 있을 때에 치안 유지를 위해 오직 제한적으로만 시행된다. 어린이나 청소년의 보호를 위해 시행되기도 한다. 당나라의 장안, 조선의 한양 등 근대 이전의 도시에서는 주로 치안과 화재 예방을 위해 시행되었다.

조선 시대

  • 조선 시대에는 국경 부근과 도성의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였다. 통행을 금지하는 시간은 인정(人定, 22:30)에서 파루(罷漏, 04:30)까지였다. 단, 정월 초하루, 정월 대보름에는 행사를 위해 야간 통행을 허가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7일 이후로 미군정청이 공포한 〈미 군정 포고 1호〉에 의해 근거, 서울과 인천에서 20:00에서 다음날 05:00까지 야간 통행금지가 실시되었으며, 22:00부터 04:00까지로 바뀌었다. 한국 전쟁 이후 전국으로 확대되어 계속되다가 1955년 〈경범죄 처벌법〉의 제정으로 내무부장관이 통금을 실시하게 되었다.

야간 통행금지는 1982년 1월 5일 폐지될 때까지 36년 4개월 동안 실시되었다. 1961년부터는 00:00부터 04:00까지였으며, 어떤 사회불안요인이나 정변이 있을 때에는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었다. 이 기간 동안 23:00~00:00에는 귀가를 위해 대중교통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밤 12시에 사이렌이 울린 이후에 통행하는 사람은 경찰서에서 대기하다가 오전 4시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학원도 교습 시간을 줄여 야간 통금에 맞추었다. 야간통행금지 당시 대한민국 (김포 국제공항, 김해 국제공항)에 착륙하지 못한 국제선 비행기는 일본이나 홍콩, 타이완, 하와이, 알래스카로 회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처님 오신 날, 크리스마스 (12월 25일)와 12월 31일, 신정에는 예외적으로 통행을 금지하지 않았다. 현재는 주한 미군만 평시의 야간 통행이 무기한 금지되며, 적군이 침투한 지역이나 적군의 공격을 받은 지역(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이나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난 지역 등)에서 사건이 해결되거나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일반인에 대한 야간 통행금지를 한시적으로 실시하는 경우도 있다.

야간 통행금지의 폐지는 여러 차례 논의되었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지적이 있었으며, 1964년에는 제주도와 울릉도가 해제되었고 1965년에는 충청북도가 해제되었으나 1966년에는 경주시(구 월성 군 제외), 온양시(구 아산군 제외), 해운대구, 경기-충남 지역을 제외한 전 도서지역, 수출산업과 관련된 수송 수단과 일부 관광지가 해제되었다.

제5공화국 3S 정책과 함께 1981년 초에는 1988 서울 올림픽에 대비하여 대한민국의 치안 안정과 안보 확보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민정당을 중심으로 통금의 폐지를 적극적으로 검토하였고, 국회에서 만장일치로 폐지를 결정, 1982년 1월 5일부터 일부 지역을 제외한 전국에서 폐지되었다. 1988년 1월 1일에는 제외되었던 나머지 지역도 통금이 해제되었다.

야간 통행금지의 폐지는 국민의 기본권 보장과 국가안보와 치안확보에 대한 자신감을 대외적으로 나타내는 의의가 있고, 실제적으로는 24시간 조업이 가능한 환경이 마련되어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고, 농·수산물의 이른 시간의 경매가 가능해졌다고 보도되었다. 하지만,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하였고, 유흥업소의 영업시간 연장으로 향락적인 사회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2008년에는 야간 통금 제도 부활론이 일기도 했다.


2005년 -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공룡인 천 년 부경용이 클리블랜드 자연사박물관의 세계 공룡 목록에 등재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것으로는 두 번째로, 한국어 이름으로는 처음으로 등재된 것이다.

2007년 - 중화민국의 타이베이와 가오슝간의 고속철도가 개통하였다.

2009년 -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 소녀시대, "The First Mini Album 'Gee'" 발매.

2013년 - 동차형 새마을호가 운행 중지되었다.

새마을형 디젤 액압 동차 (대우중공업 제작차량)

새마을형 디젤 억압 동차(새마을形 Diesel液壓動車), Diesel Hydraulic Car)는 한국철도공사에서 운용했던 새마을호 전용 디젤 동차이다. 편성의 앞과 뒤에 기관이 있어 전후동력형 새마을호 (Push-Pull) 또는 흔히 PP동차라고도 불린다. 동력차는 2013년 1월까지 모두 퇴역하여 일부 보존되고 있으며, 부수차는 객차로 개조하여 기관차 견인 편성으로 운행하다가 2018년 4월 모두 퇴역하였다.

새마을형 디젤 액압 동차는 1987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새마을호 열차의 증설과 고급화를 위해 최초로 도입되었다. 이후 1994년까지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 현대정공에서 반입되었다. 도입된 시기에 따라 크게 초기형, 중기형, 후기형 차량으로 구분된다. 구입 가격을 낮추기 위해 차량의 대부분은 리스로 구입하였으며, 차내 패찰에도 리스 사명과 함께 리스한 자산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동차형 새마을호는 열차의 편성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편성 안에서의 차량 번호가 일정하지 않다. 초기에 도입된 차량은 5량 1 편성이었으나 이후 출력증강을 통해 8량 1 편성으로 도입되었다.

1987년에 도입된 차량이 철도안전법의 내구연한 도래로 2006년부터 운행을 순차적으로 종료하였다. 2013년 1월 5일 마지막 동차형 새마을호 편성 1005 / 1042 열차가 운행하였다. 동차형 새마을호 차량은 내구연한이 20년이며 부수 차는 25년이다. 이들 차량 상호 간에는 차량 간 물리적 연결 및 제동관 연결은 가능하지만, 제동 지령용 점퍼와 객실 전원 공급용 점퍼의 규격이 맞지 않아 전력 공급은 불가능했다. 2012년에 시행한 연결기 개선사업으로, 현재 이들 부수 객차는 동차형 새마을호의 APU 뿐만 아니라 8200호대 전기 기관차의 HEP나 발전차의 전원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탄생

1759년 - 방데 반란 지도자 자크 카텔리노.

1876년 - 서독의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

189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상옥.

독입운동가 김상옥 (이미지출처 중앙일보)

김상옥(金相玉, 1890년 1월 5일 ~ 1923년 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다른 이름은 김영진, 아호는 한지· 위엄이다. 본관은 김해이다.

호적상에는 조선 개국 498년 즉 1889년 1월 5일생으로 나와 있다. 지금까지 각종 전기 등에 1890년 생으로 씌어있고, 집안에서 1890년 생 범띠로 알고 있다고 하나, 동지 한훈과 "동갑이었다"라고 했다는 점 등을 보아 1889년생인 한훈과 같이 김상옥도 호적상의 1889년생이 틀림없다.(이정은의 김상옥 평전에서의 주장.)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한성부 어의동에서 군관을 지낸 김귀현과 김점순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조판서 김영정의 15대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 하는 동시에 어의 동보 통학교를 다녔다. 10대 중반부터 기독교에 입문하고 서울 동대문 감리교회를 다녔다. 야학에 다니면서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이고 경상북도 풍기 군에서 결성된 대한광복단에 참가하는 등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실제로 김상옥의 철물점은 한 때 종업원만 50명에 가까울 정도로 컸었다. 김상옥은 이를 모두 독립운동에 쏟았다.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신문 혁신 공보를 발행해 배포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살상하려고 한 일본 군경을 저지 및 폭행하고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하였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 동지인 한훈 ,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기독교인이었던 김상옥은 1922년 5월 5일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신사상에 접했으며, 한 살임 정강 및 선언을 통해 종교를 배경으로 한 민족 혁명에서 유물론적 계급 혁명으로 사상이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알려져 있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김상옥은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유도사범이자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고봉근의 집에서 경부 20여 명에게 포위당한 후, 반격해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923년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게 포위당해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일본 군경 4백여 명과 3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 발로 자결하여 의젓하게 최후를 마쳤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의 장본인 인지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김상옥의 시신에는 11발의 총알이 몸에 박혀있었다. 총알을 맞아가면서도 그 정도로 싸웠으니 매우 전투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생포가 목적이었는데, 의열단원 김상옥이 일본 군경들과의 교전 중 자결했기 때문에 일본 군경들은 과연 김상옥이 폭탄을 투척하였는지에 대해 심문해 볼 수 없었다. 효제동 총격전 직후 3월 14일 총독부 경무국의 야마구치 고등 과장은 사건 전모를 발표하면서 김상옥이 폭탄 투척 사건의 범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한 후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고 진술한 자가 없었다. 의열단원들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윤익중 - 재판정에서 "그날 그 시각 김상옥과 함께 종로대로를 걸었다, 그때 종로서를 지나온 학생들에게서 폭탄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김상옥은 그런 식의 폭탄 투척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라고 진술했다. -다른 동지들의 증언도 같은 의견이었다.- 조선일보는 3월 16일 신문에서 이 진술을 기사에 실었고, 이와 함께 "김상옥은 정녕 폭탄 범인이 아니다."라고 분석하여 전했다. 또, 그때 김상옥은 사이토 암살 계획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찰 추적과 경계, 감시를 강화시킬 일을 스스로 자초했을 가능성은 적다. 전에도 이런 식의 치밀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비상경계 상태를 취했었으며, 종로경찰서 폭탄사건 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견이 많이 제기됐었으며, 미와 경부보도 이에 대한 확답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은신처는 혁신단 시절의 동지인 이혜수의 집이었는데, 효제동은 그의 생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종로경찰서 사건에 대해서는 김상옥이 결행했다는 설이 정설이나, 오래 준비해 온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며,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조직의 소행이라는 이설도 있다.

1924년에 임시정부 외교부장이며 김상옥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조소앙이 그의 전기를 집필해 간행했다.
김상옥이 수많은 일본 경찰의 포위 속에서도 단신으로 여러 시간 동안 버티며 총격전을 벌인 이 사건을 당시 중학생이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직접 목격하여, 해방 후 1930년 시화집 허둔기에 스케치와 추모시를 함께 실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사 최후의 순국 장면을 생생히 그린 유일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념사업을 위해 벌이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일제 강점기 초기의 무장 독립운동과 의열단의 용감한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김상옥이 최초로 선정되었다.

 

1998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었고, 서울 종로에 김상옥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1907년 - 대한민국의 수필가 김소운.

1912년 - 대한민국의 아동 문학가 이원수

1920년 -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1928년 -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인 술탄 이븐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1932년 -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작가 움베르토 에코.

1937년 - 일본의 정치인 고노 요헤이.

1938년 - 스페인의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

1941년 -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1942년 - 이탈리아의 피아니스트 마우리치오 폴리니.

1945년 - 러시아의 정치인 이반 립킨.

1952년 - 대한민국의 성우, 배우 장광.

1953년 - 대한민국의 농구인 김동광. / 대한민국의 기업인 최신원.

1956년 - 대한민국의 정치평론가 강준만. / 독일의 정치인이자 제12대 대통령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1965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기정.

1969년 - 미국의 음악가 마릴린 맨슨.

197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강성우.

1972년 - 대한민국의 배우 장서희.

1973년 - 대한민국의 성우 국승연.

1975년 - 미국의 배우이자 영화 감독, 프로듀서 브래들리 쿠퍼.

1982년 - 일본의 야구 선수 아오키 노리치카.

1984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유인영.

1985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윤소이. / 대한민국의 쌍둥이 허공, 허각.

1986년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이국주.

1987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명제.

1988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나성용.

199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양요섭.

1992년 - 영국의 모델 수키 워터하우스.

2000년 - SM 루키즈 나카무라 히나.

 

사망

1477년 - 부르고뉴의 공작 용담공 샤를.

1588년 - 명나라의 군인 척계광.

1589년 - 앙리 2세의 어머니이자 프랑스의 섭정 카트린느 드 메디치.

1762년 - 로마노프 왕조의 6번째 군주 옐리자베타.

1827년 - 조지 3세의 아들 요크와 올버니의 공작 프레더릭.

1922년 - 영국의 군인,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1933년 - 미국의 대통령 캘빈 쿨리지.

1947년 - 일본의 군인 나가노 오사미.

1951년 - 대한민국의 독립 운동가 서재필.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은 조선의 무신, 대한제국의 정치인, 언론인이자 미국 국적의 한국 독립운동가, 의사였다. 미국에서 병리학자, 의사, 시인, 소설가로 활동하였다.

그의 문학가로서 주요 작품은 영문소설집 한수의 여행이며 문학적으로 벤저민 프랭클린 등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전라도 보성군 출신이다. 자는 윤경, 호는 송재·쌍 경이다. 본관은 대구이며 이름 대신 일명 “피제손”과 필명은 오시아(N. H. Osia)를 사용하였다.

그는 김성근,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기도 하며 1879년 초시에 합격 이후 1882년(고종 20년) 증광시에 급제해 교서관 부정자로 관직에 올랐다. 그 뒤 승문원 부정자, 훈련 원부 봉사를 거쳐 1883년 일본으로 유학, 게이오 의숙과 토야마 육군 하사관학교의 단기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귀국했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 국 사 관장이 되었다.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났다. 그는 일본을 경유,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0년 6월 10일 한국인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

1895년 김홍집 내각에서 중추원 고문으로 초빙되어 귀국하였다. 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고 그해 7월 독립 협회를 설립했다. 이후 독립협회를 통해 토론회와 강연회, 상소 활동, 집회 및 시위 등을 주도했고, 민주주의와 참정권을 소개하고, 신문물 견학을 위한 외국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개화사상을 견제하던 대한제국 정부에 의해 추방된 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으며, 재미 한국인 지도자로도 활동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면서 자신이 운영하던 문구점과 가구점이 파산할 만큼 생계 곤란을 겪던 그는 독립운동과 동시에 의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징병 검사관으로 봉사하였다.

광복 직후 미군정 사령 장관 존 하지 장군 등의 요청으로 귀국하여 미군정과 과도정부의 고문 역을 하였다. 한때 그를 대통령 후보자로 추대하려는 운동이 있었으나 사양하고 1948년 미국으로 출국하여 1951년 후두암과 방광암, 과로의 합병증으로 미국에서 병사하였다.


1951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동인.

2007년 - 일본의 기업인 안도 모모후쿠.

2013년 - 대한민국의 조직폭력배 김태촌.

2014년 - 포르투갈의 축구 선수 에우제비우.

2016년 - 프랑스의 지휘자이자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

2017년 - 대한민국의 국악인 성창순.

2018년 -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전해종.

2018년 - 미국의 우주비행사 존 영.

2019년 - 대한민국의 배우 하용수.

2019년 - 유고슬라비아의 전 축구선수 및 지도자 드라고슬라브 셰쿨라라츠.

 

기념일

조류의 날(National Bird Day):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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