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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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431년 - 잉글랜드의 점령지역인 루앙에서 잔 다르크에 대한 종교재판이 시작되다.

1788년 - 코네티컷주가 미국의 5번째 주가 되었다.

1839년 - 프랑스의 화가이자 물리학자인 다게르가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를 발명했다고 밝혔다.

1867년 - 메이지 천황이 즉위했다.

1885년 - 갑신정변 처리를 위한 한성조약이 체결되다.

1894년 한성의 모습

 

 

클립 상세 - 갑신정변의 전개과정... | EBS클립뱅크

1.김옥균을 중심으로 급진개화파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2.갑신정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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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조약은 1885년 1월 9일(1884년 음력 11월 24일) 조선의 한성부에서 조선측 대표 의정부좌의정 김홍집 외 조선측 대표단과 일본 제국 외무부대신 이노우에 가오루 외 일본측 대표단이 조선과 일본의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 및 보상에 대해 체결한 조약이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말부터 조선은 일본의 갑신정변 개입을 추궁하고 김옥균 등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가, 역으로 일본이 조선 정부에게 일본 정부에 대한 사과를 표명하고, 희생자와 각종 피해에 대한 보상금 10만 원을 지불하고, 한성에 일본 공사관을 새로 건축하는 비용을 부담할 것을 요구하였다. 1884년 12월 말부터 여러 차례의 교섭과 회담 끝에 1885년 1월 9일에 타결되었다.

1884년(고종 21) 12월 4일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급진 개화파가 궁궐을 장악하고 황후 살해를 목적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청나라 군대가 출동하여 일본 제국의 육군을 섬멸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개화파가 일본 제국으로 망명하자, 배일감정으로 흥분한 민중이 한성부에 있는 일본 공사관을 불태우고 공사관의 서기관들과 일본 거류민을 죽였다.

갑신정변을 청나라군의 도움으로 진압한 민씨정권은 1884년 12월말 예조참판 서상우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임명, 일본에 보내 일본 측이 정변에 관여 내지는 지원한 사실을 문책하는 한편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의 송환을 요구했다. 조선측의 문책이 계속되자, 일본에서는 오히려 갑신정변 직후,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서기관 등이 살해당한 것을 이유로 조선에 역문책을 가해 왔다. 일본 정부는 일본 영사관의 피해와 책임을 조선에게 요구하였다.

서상우는 2개월간 머물면서 일본에 망명중인 김옥균, 박영효 등의 체포 송환을 교섭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정치 망명객을 송환하는 법은 없다며 맞섰다.

조선 정부의 추궁에 대해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는 한편, 임오군란으로 살해된 일본인 거류민 40여 명에 대한 사과와 배상까지 요구하였다. 이어 조선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지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을 요구하였다.

조약 체결 과정
12월 말 일본은 갑신정변 직후 일본으로 피신했던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를 다시 조선으로 파견하여 회담을 하였다. 조선 측 회담 대표인 전권대사 외무독판 조병호와 접촉했으나 조선 정부에서는 일본측의 요구를 모두 거절했다.

1884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1월 초(1884년 음력 11월)에 이노우에 가오루 전권대신에게 2개 대대의 병력을 주어 조선에 파견하여, 1885년 1월 2일(1884년 음력 11월 17일) 인천에 상륙하고 한성부로 진주했다. 이노우에는 일본 육군을 이끌고 직접 낙선재로 가서 고종을 예방하고 일본이 입은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하니 고종은 의정부좌의정 김홍집을 전권대신으로 하여 협상에 응하게 하였다.

1885년 1월 2일(1884년 음력 11월 17일)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는 당시 의정부좌의정이자 전권대사인 김홍집과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협상은 쉽게 이뤄지지 못하고 계속 결렬되다가 1월 7일(1884년 음력 11월 22일)부터 양국 대표는 의정부 안에서 협상을 개시했으나 사건의 책임 소재를 양국이 서로 상대국에게 전가하여 논란이 격화되다가 드디어는 일본 측의 무력적 위협에 굴복하여 1885년 1월 9일(1884년 음력 11월 24일) 조약을 체결케 되었다.


한성조약의 주요한 조목은 아래와 같다.

  • 조선 측은 국서를 일본국으로 보내어 사죄의 뜻을 알린다.
  • 사거한 일본국의 인민의 유족과 피해입은 부상자에 대해 진휼하고, 일본국 상인들의 화물이 파손된 것에 관해 조선국이 10만 원을 배상금으로 지불한다.
  • 조선국은 일본군의 이소바야시(기림, 磯林) 대위를 살육한 난도(亂徒)를 체포하여 엄벌로 다스린다.
  • 일본 공사관이 심각하게 파괴된 바, 조선국은 응당 건물을 교부하여 일본국이 공관으로 이용케 할 것이며, 그것의 증축을 위해서 2만 원을 일본국에 지불한다.
  • 일본국 공관 호위병의 병영은 공관 부지에서 선택하도록 하고, 제물포 조약의 제5관에 의거하여 시행토록 한다.
    영향
  • 이 조약의 결과로 사죄를 위한 사절에 정사 서상우, 부사 묄렌도르프가 함께 일본으로 파견되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은 조선에 김옥균을 내어 줄 수는 없지만 조용히 처리한다면 묵인하겠다고 하였다. 일본 정부는 김옥균과 그 일행들 때문에 조선 정부와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그들을 귀찮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조선의 수구당 정부에서는 김옥균 등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885년 2월 고종은 사죄사절로 서상우 전권대사, 묄렌도르프 부 전권대사를 일본에 파견하였다. 1885년 2월 26일 일본에 도착한 묄렌도르프는 비밀리에 도쿄 주재 러시아 다비도프 공사와 스페에르 서가관을 만나 조·러 관계 강화 방안에 대해 협의하였다.[4] 한편 서상우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송환을 요구했다.

민태원이 지은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실린 바에 따르면 한성조약에 따라 일본에 다시 파견된 서상우와 묄렌도르프는 일본 당국자들에게 김옥균 일행을 조선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일본 정부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했지만 자객을 보내 처단하는 것은 묵인하겠다고 했다. 이때 자객으로 지목된 사람은 김옥균이 호조참의로 재직할 당시 그 밑에 주사로 있던 지운영이었다.

그에 따라 1886년 지운영은 극비 지령을 받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는 도쿄와 요코하마 등지에서 김옥균과 박영효의 암살을 노렸지만 미수에 그치고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비밀 문서와 비수 등을 압수당한 지운영은 5월 21일 조선으로 돌아갔고, 곧바로 평안도 영변에 유배됐다.


1900년 - 이탈리아의 축구 클럽 SS 라치오 창단.

1905년 - 러시아 피의 일요일.

1951년 - 유엔 본부가 문을 열다.

1953년 - 창경호 침몰 사건이 일어났다.

창경호 침몰 사고는 1953년 1월 9일 전남 여수항에서 부산항으로 가던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경상남도 부산시(현 부산광역시) 서남쪽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 부근에서 강풍을 만나 침몰한 사고이다. 승선인원 중 선장과 선원 3명 학생 2명 군인 2명을 제외하고 300여 명이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1953년 1월 9일 오후 2시에 전남 여수항을 출발하여 부산항으로 가던 대동상선 소속의 150톤급 정기 여객선 창경호가 오후 10시 40분경 부산 서남쪽 8km쯤 지점에 있는 다대포 앞바다 거북섬에서 200m 떨어진 지점에서 왼쪽으로 급격하게 기울면서 20~30분 만에 침몰하였다. 당시 창경호는 승객 2백 수십 명과 쌀 450가마를 싣고 있었으나, 선장과 선원 3명, 승객 3명만이 구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며칠 후, 또 한 명의 생존자가 있음이 알려져 생존자는 8명으로 늘어났다.

창경호는 길이 33.6m, 폭 6.15m, 총 147 톤이며, 승선 정원은 240명, 화물 적재량 100 톤이었고, 선령은 20년이었다.

창경호를 쫓아가다가 사고를 목격한 장구호의 보고로 조난 사실이 알려졌으며, 어둠 속에서 주변의 선박을 동원한 수색에서는 침몰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다음날인 10일 12시경 현장을 발견하여 시신 5구를 인양하였다.  침몰한 선체는 1월 11일에 발견되었고, 유족들은 배의 인양을 서두를 것을 요구하였다.

13일에는 풍랑과 어둠, 시신 대부분의 표류, 잠수부들의 임금 전달의 문제로 시신 인양 작업이 부진했다고 보도되었다.[10] 센 조수도 인양 작업을 지연시켰다. 시신의 인양은 1월 24일부로 266구를 인양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승선한 승객의 수는 승객 명부에 181명이 기록되어 있었고, 선장의 증언에 따라 실제로는 230명 정도 될 것으로 추측하였으나,[13] 인양 작업이 진행되면서 300명에 가까웠음이 드러났다. 1월 24일까지 모두 266주의 시신이 인양되었고, 40여 구의 시신이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선체 인양은 3월 8일에 착수되었고 3월 15일 완료를 목표로 한다고 보도되었으나, 실제로는 1955년 12월 6일에 인양이 완료되었다. 1956년 6월 1일에는 재취항을 목적으로 수리 중이던 선체의 내부에서 해골이 된 시신 3구가 발견되었다.

1953년 1월 12일에는 국회에 창경호 침몰 사고가 안건으로 긴급 상정되었으며, 13일 진상조사위원회가 결의되었다. 사고의 충격으로, 대형 인명사고시 운수업자와 업무를 소홀히 한 감독기관에 대한 벌금을 이전의 250배로 올리고 3년 이하의 금고였던 형량을 최고 사형까지 내릴 수 있게 하는 〈업무상과실사상죄의 특별처벌법〉의 초안이 법무부서에서 작성되기도 하였다.

창경호 침몰 사고로 모두 13명이 기소되었으며, 1953년 5월 1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검사가 주장한 고의살인죄가 아닌 업무상과실치사가 적용되어 선장은 금고 3년, 대동상선 사장은 금고 2년, 선원들은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창경호의 선장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높은 파도나 횡파에 의해 침몰하였다고 진술하였고, 긴급구호본부에서는 초과 적재를 침몰의 원인으로 추측하였다. 창경호는 당시 2백 톤을 초과한 승객과 화물을 싣고 있었고, 거기에 거센 파도를 만나 침몰했다는 것이다. 1월 14일 보도된 검찰당국의 조사에서는 쌀 260가마를 배 밑바닥에, 200가마를 상갑판에 실어 균형이 맞지 않은 것을 주요 원인으로 추정하였다.

창경호의 선체는 20년이상 된 낡은 화물용 범선을 여객선으로 개조한 것이었다.

1945년 7월에 미군 폭격기 때문에 손상을 입고 침몰한 관부연락선 텐잔마루 호를 수리해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창경호는 또한 구명보트 한 척 및 구명복 70벌을 모두 본사 창고에 두고 다닌 것이 국회 특별조사단의 조사로 드러났다.


1968년 - 아랍 석유 수출국 기구(OAPEC)이 설립되었다.

2011년 -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 개브리엘 기퍼즈 하원 의원을 포함한 19명이 괴한에게 총격을 당했다.

테헤란을 출발 오루미예로 향하던 이란 항공 277편 보잉 727-286Adv 여객기가 복행(고 어라운드)실패 후 추락 77명이 사망하다.

 

문화

2018년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의 메인스트림 지원을 중단했다.

 

탄생

1554년 - 234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5세.

1890년 -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크.

1908년 - 프랑스의 작가이자 여성운동가 시몬 드 보부아르.

1913년 -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1925년 - 미국의 배우 리 밴클리프.

1926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최종건.

1937년 - 일본의 전 야구 선수·야구 감독 모리 마사아키.

1941년 - 미국의 가수, 인권 운동가 존 바에즈.

1942년 - 대한민국의 기업가 이건희.

1944년 - 영국의 락 밴드 레드 제플린의 기타 리스트 지미 페이지.

1945년 - 미국의 배우 존 도먼.

1958년 -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박노해.

1959년 - 과테말라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리고베르타 멘추

1967년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클라우디오 카니히아.

1970년 - YG 엔터테인먼트의 대주주 양현석.

1972년 - 대한민국의 농구인 유영주.

1973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성웅. / 자메이카의 힙합 가수 션 폴.

1974년 - 대한민국의 가수 조성민.

1975년 - 대한민국의 연출가 김흥동.

1978년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젠나로 가투소.

1979년 - 대한민국의 게임자키 길수현.

1980년 / 대한민국의 발레무용가 윤혜진. / 대한민국의 축구 심판 홍은아.

1982년 - 영국 왕세손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의 부인 케임브리지 공작부인 캐서린.

1985년 - 대한민국의 가수 홍대광.

1990년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이제동. / 대한민국의 그룹 포미닛의 멤버 남지현.

1993년 - 미국의 배우 애슐리 아고타.

1994년 - 우즈베키스탄의 축구 선수 이크롬 알리바예프.

1995년 / 대한민국의 배우 하승리. / 미국의 배우 니컬라 펠츠. / 멕시코의 축구 선수 카를라 파올라 니에토.

 

사망

1283년 - 남송의 정치가 문천상

1799년 - 수학자 마리아 아녜시

1840년 -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김 테레사.

1873년 -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

1878년 - 이탈리아 왕국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1983년 - 북한의 정치인 강량욱

1987년 -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 이봉룡

1999년 -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 손목인

2005년 - 대한민국의 수학자 이임학

2012년 - 기니바시우의 대통령 말랑 바카이 사냐

2014년 - 미국의 극작가 아미리 바라카

2017년 -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2018년 - 노르웨이의 정치인 오바르 노를리

 

기념일

순교자의 날: 파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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