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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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기원전 49년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넘으로써 카이사르 내전이 시작되다.

9년 - 외척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우다.

69년 - 로마 제국의 황제 갈바가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리키니아누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다.

1072년 - 노르만족 정복자 로베르 기스카르가 팔레르모를 정복하다.

1810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첫번째 아내인 조제핀과 이혼하다.
 
1991년 - 일본 정부, 재일 한국인에 대한 지문날인제도 퍠지.
 
2006년 -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비공식 방문하였다.

2015년 -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동의 대봉 그린 아파트에서 대형화재가 발생, 12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건물 8동이 불에 타는 등 다수의 인명 및 재산피해가 발생하다.

화재 이후 폐허가 된 아파트

의정부 대봉그린아파트대봉 그린아파트 화재는 2015년 1월 10일에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도시형 생활주택인 대봉 그린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접한 도시형 생활주택인 드림타운 아파트, 해 뜨는 마을 아파트와 단독주택 등에 불이 옮겨 붙어 5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부상한 사고이다. 화재가 발생한 원인은 4륜 오토바이 배선 합선에 의한 실화로 추정되고 있다.

9시 27분경 1층에서 불이 났는데,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이 없어 불이 위층으로 옮겨붙어 퍼졌다. 이후 의정부소방서에 출동지령이 내려졌고 소방대가 출동했으나 아파트로 진입하는 길목이 불법주차로 인해 혼잡했고 이로 인해 초기대응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도착한 소방대가 진화작전을 펼쳤지만 불은 이웃 건물로 옮겨 붙어 급속히 확산되었다. 화재는 발생 약 2시간 뒤인 11시 44분경 진화되었고 이 진화작전에 소방관 약 160명 장비 약 80대 헬기 4대 등 투입되었으며 경찰에서도 약 1000여 명을 투입하여 주변을 통제하고 진화를 도왔다.

초기에는 한 입주민이 친구에게 빌린 4륜 오토바이를 만진 후 화재가 일어난 것으로 추측되었다. 조사 결과 방화 가능성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으나 해당 입주민은 오토바이를 무면허운전한 사실이 드러나 입건되었다. 처음 경찰과 소방당국 등은 합동 검식을 실시했음에도 정확한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으나, 건물의 CCTV를 분석한 결과 오토바이 운전자가 키박스를 녹이기 위해 라이터를 사용하였고, 이후 해당 오토바이에서 불길이 일어나 옆의 다른 오토바이로 옮겨 붙으며 건물 전체로 번져나간 사실을 확인, 오토바이 키박스를 가열하면서 배선이 녹아 합선되어 불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해당 입주민을 실화 및 과실치사상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

도시형 생활주택인 대봉그린아파트와 드림타운 아파트는 1층 주차장, 2-9층 원룸, 10층 오피스텔로 허가를 받았는데 10층의 오피스텔의 방을 늘려 원룸 주거용으로 쪼갠 채 사람들이 입주한 상태였다는 증언이 나왔다. 소방당국이 밝힌 두 건물의 가구수는 두 건물의 건축허가상의 가구수보다 많았다. 주민들과 부동산 중개업소에서는 건물주가 오피스텔을 여러 개의 원룸으로 쪼개서 불법으로 가구수를 늘렸다고 증언했다. 기존의 형태를 쪼개서 불법 증축을 할 경우 이동 통로가 좁아지고 화재 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환기 시설과 소방시설을 불가피하게 축소할 수밖에 없고, 가연성이 높은 자제를 칸막이로 사용할 경우 화재 시 피해가 더 커질 수 있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일부 주민들은 "처음 불이 난 대봉그린아파트는 30분 만에 불길이 잡혔는데, 소방헬기의 하향풍으로 인해 불이 다시 번졌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의정부소방서장은 "고층 건물에서 불이 난 경우 소방헬기를 활용한 구조는 기본이고, 건물 외벽이 가연성이어서 외벽을 타고 불이 확대된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우성천 강원대 교수는 "소방헬기가 바람을 날리면 전혀 영향이 없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이미 불길이 맹렬하게 타고 있는 상황이었다. 불은 밑에서 위로 올라갈 때 순식간에 올라가는 것이지 위에서 부는 바람이 아래로 내려온다고 해서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고 보지는 않고, 신속하게 출동하려면 헬기만큼 빠른 게 없고 병원으로 이송할 때도 빠르기 때문에 진화 또는 인명구조를 위해 헬기가 출동하게 된다"면서 "헬기가 안 왔으면 안 왔다고 이유가 나올 것이고, 왔으면 왔다고 하고, 이런 이야기를 다 들어줄 수는 없다"라며 주민들의 주장을 일축했다.

화재가 발생한 직후 주민들은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화재 경보기나 대피방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등 주민들의 안전을 위한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화재진압을 위해 출동한 소방차량이 아파트 진입로 양옆에 늘어선 20여 대의 주차된 불법주차 차량으로 인해 10여 분 이상 현장진입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골든타임을 놓쳐서 초기 진화 활동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참고로 화재 발생 후 5분 이내가 골든타임으로 이 안에 화재진압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화재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게 된다. 이번 의정부 아파트 화재사고도 그러한 예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인 데이빗 보위가 타계하였다.

 

서해안고속도로 당진 부근에서 16중 추돌사고가 발생해 7명이 부상을 입었다.

 

 

 

 

 

 

 

문화

1863년 - 세계 최초의 지하철이 영국 런던에서 운행 시작.

영국에서 철도 건설은 183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1850년 경에 여섯 개의 독립된 철도 종점역이 런던 중심가 바로 밖에 설치되었다. 이는 런던 브리지 역, 유스턴 역, 패딩턴 역, 킹스크로스 역, 비숍스게이트 역, 세인트 판크라스 역 그리고 워털루 역이다. 펜처치 스트리트 역(Fenchurch Street) 만이 런던 시 안에 있었을 뿐이다. 이 시기에 런던의 교통 체증은 증가하였는데, 그 원인 중의 일부는 기차를 타고 런던에 온 승객들이 도로로 중심가로 가려고 하는 수요였다. 런던 시와 간선 철도 종점 역을 연결하는 지하철 도망은 1830년에 처음 계획되었지만, 1850년이 되어서야 이 방안은 교통 체증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심도 있게 논의되었다.

1854년에 패딩턴 역, 킹스 크로스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지나 패링던 스트리트 역까지 가는 지하철도의 건설을 허가하는 국회 제정법이 통과하였는데, 이는 메트로폴리탄 철도(Metropollitan Railway)라고 불렸다. 이는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 (Great Western Railway)의 보조로 짓기로 하였다.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는 이 계획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조건으로 환승역을 자사의 종점역인 패딩턴 역으로 할 것을 내걸었다. 그러나 공사는 제정 문제 때문에 1860년 2월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이 계획이 진행된 사실은 전적으로 찰스 피어슨(Charles Pearson)의 로비 덕분이었다. 찰스 피어슨은 당시 런던 시의 사무 변호사였다. 1859년에 그는 결국 런던 시 법인 회사에 이 사업에 투자하도록 설득하였다.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1863년 1월 10일에 개통되었다. 이는 세계 최초의 도시 지하 여객철도였다. 개통되고 난 지 몇 달 안에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하루에 26,000명의 승객을 수송하고 있었다. 1년 뒤에 서쪽으로는 해머스미스(Hammersmith)로 연장되었으며, 이어서 동쪽으로는 무어게이트(Moorgate)로 연장되었다. 이 초기 노선의 대부분은 오늘날 현재 해머스미스 앤 시티 노선(Hammersmith and City Line)의 한 부분이다. 10년 후 나중에 스위스 커티지 역(Swiss Cottage)까지 가는 지선과 사우스 켄징턴(South Kensington)과 애디슨 로드(Addison Road)까지 가는 지선, 그리고 켄징턴(Kensington), 현재는 켄징턴 올림피아 역(Kensington Olympia)지 가는 지선이 개통되었다.

1868년 12월 24일에 메트로폴리탄 디스트릭트 철도(Metropolitan District Railway)가 사우스 켄징턴(South Kensington)에서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까지 영업을 개시하였는데, 이는 메트로폴리탄 철도의 화차와 객차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나중에 디스트릭트(the District)로 알려진 이 회사는, 1864년에 메트로폴리탄 철도와 연계할 계획으로 런던에 내부 순환선(Inner Circle)을 완공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법인 회사가 되었다. 이 계획은 런던에 내부 순환선(Inner Circle)과 외부 순환선(Outer Circle) 모두를 지으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메트로폴리탄 철도와 디스트릭트 철도는 처음에는 서로에 우호적이었다. 두 회사는 네 명의 이사를 공유하였으며, 한 때 내부 순환선이 완공되었을 때에는 폭넓게 합병하기로 기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곧 격렬한 경쟁이 디스트릭트 측 위원회의 독립적인 이사들이 메트로폴리탄 회사의 서비스 공급자들에게 불만을 느끼면서 불붙었다. 1870년 1월 3일에는 메트로폴리턴 측이 디스트릭트 측에 운영 협정이 18개월 후에 중지될 것을 통보하였다. 그 결과 디스트릭트 측에서 일하고 있던 네 명의 이사가 사임하였다. 이는 내부 순환선 계획의 완공에 심각한 차질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는 두 회사가 경쟁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철도를 런던 교외에 지었기 때문이었다. 1870년에 디스트릭트는 웨스트 브롬턴 역(West Brompton)과 블랙프라이어즈 역(Blackfriars)을 잇는 노선을 개통하였는데, 사우스 켄징턴에서 메트로폴리탄 철도와 한 번 교차하였다. 10년 여가 지나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북서부의 해로(Harrow) 역까지 연장된 한편, 디스트릭트 철도는 서부와 남서부의 얼링(Ealing), 리치먼드 역(Richmond), 그리고 풀럼 역(Fulham)까지 연장되었다. 내부 순환선은 결국 1884년에 완공되었다. 외부 순환선을 착공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이는 나중에 기각되었다. 연이어 일어난 메트로폴리탄과 디스트릭트 사이의 경쟁 때문에, 내부 순환선은 1930년에 런던 지하철도가 완전히 병합되기까지 하나의 독립된 노선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이 철도는 1949년에 서클 선으로 개명되었다.

초기의 터널은 주로 개착식 공법을 사용하여 착공되었다. 이 때문에 많은 붕괴가 일어났으며, 지상의 일부 건물을 파괴해야 했다. 초기 런던지하철의 열차는 증기 기관차였으므로, 지상에 효율적으로 환기 장치를 설치해야만 했다. 도로 위의 여러 통풍구 덕분에 기관차의 엔진은 증기를 내뿜고 터널에 신선한 공기를 들일 수 있었다. 이러한 통풍구 중에 하나는 레인스터 가든즈(Leinster Gardens)에 있다. 제 기능을 하고 있는 도로로서의 외관을 보존하기 위하여, 진짜 집의 앞모습을 닮은 1.5m 두께의 콘크리트가 설치되었다. 이 차량은 나중에 전기동차 차량으로 대차 되어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다.

1869년 12월 7일에 이스트 런던 철도(East London Railway)가 화이트채플 역(Whitechapel)과 뉴 크로스 게이트 역(New Cross Gate : 당시에는 뉴 크로스(New Cross)) 사이의 운행을 시작하였는데, 이 노선에는 이셈바드 킹덤 브루넬(Isambard Kingdom Brunel)이 설계한 템즈 터널(Thames Tunnel)이 사용되었다. 이 터널은 원래 1843년에 보행자 터널로 개통하였지만, 이스트 런던 철도(East London Railway)가 1865년에 이 터널을 사서 철도 터널로 전환한 것이었다.

1880년대 말에 지하철도 노선은,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체셤 역(Chesham)까지, 디스트릭트 철도는 하운 슬로(Hounslow)와 윔블던 역(Wimbledon)까지, 그리고 동런던 철도는 쇼어디치 역(Shoreditch)과 뉴 크로스 역(New Cross)까지 연장되었다. 19세기 말까지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런던 밖의 에일즈베리 역(Aylesbury)과 버니 정션 역(Verney Junction)과 브릴 역(Brill)까지 철로를 따라 새로운 교외를 만들며 노선을 연장하였다. 1930년 바로 전까지 메트로폴리탄 철도는 도시철도 운영보다는 간선철도 운영으로서의 철도를 추구하였다.

실드 공법과 전기 견인과 고심도 터널 설계 등의 진보에 따라, 후기의 철도들은 훨씬 지하에 건설되었다. 이는 개착식 공법보다 지상의 붕괴를 덜 야기하였다. 따라서 비용이 더 저렴했고 더 선호되었다.

시티와 남런던 철도(City & South London Railway 또는 C&SLR, 현재 노던 선(Northern Line)의 일부분)가 1890년에 스톡웰(Stockwell)과 킹 윌리엄 스트리트(King William Street) (현재 뱅크와 모뉴먼트[Bank and Monument])'사이의 구간에서 개통하였다. 이 노선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고심도'로, 그리고 전철화 노선으로 개통되었다. 1900년까지 이 노선은 남쪽으로는 클랩햄 커먼(Clapham Common), 북쪽으로는 분기로 무어게이트(Moorgate)까지 양쪽 끝으로 연장되었다. 그러한 두 번째 철도는 워털루 & 시티 철도(Waterloo and City Railway)였는데 1898년에 개통하였다. 워털루 & 시티 철도는 런던과 남서부 철도(London and South Western Railway)의 선로를 따라 설계되고 운행되었으므로, 따라서 두 경쟁 회사(메트로폴리탄 철도와 디스트릭트 철도)가 1900년대에 노선을 통합하기 시작할 때 법인 회사가 되지 않았다.

1900년 6월 30일에 중앙 런던 철도(Central London Railway)가 개통하였는데, 이 철도는 뱅크 역과 셰퍼즈 부시(Shepherd's Bush) 역 사이의 노선을 운영하였다. 이 철도는 '2페니 튜브'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이의 균등한 운임과 원통 모양의 터널 때문이었다('튜브'라는 별명은 결국 지하철도 체계 전체를 상징하게 되었다). 도시와 남부 런던 철도와의 환승이 뱅크에서 이루어졌다. 1898년 8월에는 베이커 가와 워털루 철도(Baker Street & Waterloo Railway)라는 다른 노선에서 건설이 개시되었다. 그러나 이 철도의 공사는 18개월 동안 중지되었는데, 이는 자금 부족 때문이었다.


2003년 - 위키미디어 재단의 프로젝트 위키책 프로젝트가 시작되다.

2008년 - 비수도권 최초의 광역전철인 부산 도시철도 2호선 호포역 ~ 양산역 연장 구간 개통.

2023년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8.1, 윈도우 서버 2012, 윈도우 서버 2012 R2, 인터넷 익스플로러 10, 11의 모든 지원을 중단할 예정이다.

 

 

 

 

 

 

 

탄생

1644년 - 프랑스의 원수 부플레르 공작 루이 프랑수아.

1729년 -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라차로 스팔란차니.

1835년 - 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

1875년 -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관료 이종국.

1877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병조.

독립운동가 김병조 목사

김병조(1877년 1월 10일 ~ 1952년)는 일제 강점기의 목회자, 독립운동가이며, 한국의 장로교 목사이다.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사람이며, 6.25 전쟁 중 공산군의 손에 피살되었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아호는 일재.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으로, 한학을 익혀 서당 훈장을 하던 중 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03년 근대식 초등학교인 변산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개신교에 입교했으며, 1917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개신교 목사가 되었다.

1919년 2월에 유여대 등 장로교 인사들과 함께 선천의 양전백목사 사택을 방문하여 이승훈을 만났고, 이 자리에서 3·1 운동 거사 계획을 듣게 되었다. 이미 경성부에서 천도교 지도자들과 연대에 합의하고 돌아온 이승훈의 권유로, 김병조와 유여대, 이명룡과 양전백은 그 자리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운동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도장을 이명룡에게 맡기고 당일 태화관에서 열린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평북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

이후 33인 중 유일하게 체포되지 않고 상하이로 망명을 떠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고,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지역구 대표와 선전위원회 이사(1920년) 등을 지냈다.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으로도 근무한 그는 독립운동 자료의 수집과 편찬에 관심을 두고 1924년 대동 역사, 독립 혈사를 발간했다.


1923년부터는 상하이를 떠나서 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이동하여 무장 조직인 광복회를 조직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만주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가, 1933년 귀국했다. 이후 신사참배 강요 때문에 공식 활동을 접고 정주의 묘 두산 기슭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중 광복을 맞게 된다.


광복 직후에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가했으나 반공 인사였기에 소군정과 마찰을 빚었다. 이후 월남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거부하고 반공주의 청년들을 모아 남한의 이승만, 김구와 연락하는 한편 반소련 무장 비밀 결사를 조직했다가 1946년 12월 24일 겨울 체포되었다. 소련군에 의해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가 52년 봄에 그곳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885년 - 청나라 광서제 치세 시대의 천립 군주 보경제 부준.

1913년 -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인 구스타프 후사크.

1905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리종옥.

1921년 - 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 출신 정치 깡패 임화수.

1924년 - 대한민국의 경찰 출신 정치가 곽영주.

1928년 - 대한민국 예비역 육군 중령 출신의 암살 방조자 신초식.

1930년 - 대한민국의 만화가 길창덕.

1937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차경복.

1938년 -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도널드 커누스.

1945년 -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로드 스튜어트.

1953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허정무.

1954년 - 대한민국의 팝페라 가수 키메라.

1957년 - 대한민국의 배우, 공연 제작자 송승환.

1961년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최순호.

1963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전 야구 감독 선동열.

선동열(1963년 1월 10일)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지도자로 전 KBO 리그 해태 타이거즈의 투수이자, 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다. 본관은 보성이며, 광주 출생이다. 1985년 1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여 11년간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7년 연속 평균자책점 수위와 4회의 다승왕을 차지했고 3회의 정규시즌 MVP와 6회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으로 최고 구속 154km/h의 패스트볼과 종 슬라이더의 두 가지 구종을 던지던 투 피치 투수였으며, 커리어 동안 총 3회의 규정이닝 0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광주제일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팀인 한국화장품에 입단하여 잠시 몸 담은 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하였다.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총 3회의 정규시즌 MVP와 6회의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하지만, 1989년과 1991년에는 뒤끝이 좋지 않았는데 1989년에는 태평양이 9월 30일 광주 더블헤더 2차전에서 9-1로 앞서던 5회 말 2사 후 박정현을 투입해 19승을 거두자 이 같은 다승왕 타이틀에서 질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해태가 10월 2일 OB와의 광주 더블헤더 2차전에서는 4-0으로 앞선 4회에 선발 신동수 대신 선동열을 구원 등판시켜 21승으로 간신히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으나 9 구원승이 포함되어 있어 박정현 이강철에게 최다 선발승 타이틀(15 선발승)을 빼앗겨야 했고 1991년에는 9월 9일 광주 LG전에서 3-0으로 앞서던 5회 초 선발 이강철에 이어 등판해 1승을 챙겨 18승(최종 19승)으로 선발승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결과적으로 이강철의 승리투수 기회를 가로챈 셈이 됐으며 이 탓인지 16 선발승을 거둔 빙그레 한용덕에 이어 롯데 윤학길과 함께 15 선발승(86년(16 선발승)에 이어 자신의 최다 선발승 2위)으로 그 해 최다 선발승 2위에 머물렀고 정규시즌 MVP도 홈런, 타점 2관왕인 빙그레 장종훈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대한민국에서 선수 생활을 마친 뒤 1996년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의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하여 구원 투수로 활약하였다. 일본에서는 1997년에 당시 각종 신기록들을 세우며 개인 최다 세이브인 38세이브를 기록하여 사사키 가즈히로와 함께 세이브 공동 1위(구원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9 시즌 주니치 드래건스의 리그 우승을 이끈 후 1999년 11월 22일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은퇴 후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코치 연수를 받은 그는 2000년에 KBO의 홍보위원으로 위촉됐으며,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팀 전력분석관으로 활동했다. 2003년 시즌 후 김인식의 후임으로 두산 베어스가 그에게 감독직을 제의했으나, 조건에 이견을 보여 협상이 결렬됐다. 협상이 결렬된 두산 베어스는 당시 배터리 코치였던 김경문을 후임 감독으로 내정했다. 이후 당시 감독이었던 김응용의 부름을 받아 라이벌 팀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KBO 리그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4년 한국시리즈 이후 선수단 인사에서 김응용이 구단 사장으로 보직이 바뀌자 11월 9일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부임하자마자 박진만, 심정수를 FA로 영입하여 호화 멤버진을 구축했으며, 이때 삼성 라이온즈는 "레알 삼성"으로 불렸다.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인 2005년 정규 리그 1위(74승 48패 4 무)를 차지했고 정규 리그 2위 두산 베어스를 4연승으로 스윕 하여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정규 리그 3위였던 한화 이글스를 4승 1 무 1패로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09년에는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으나 재계약에 성공했다.

 

하지만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별다른 전술 대처 없이 무기력하게 4전 전패로 스윕 당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때마침 삼성그룹의 조직 개편이 겹치면서 구단 사장과 단장이 전부 바뀌자 그 해 말 당시 작전코치였던 류중일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물러나 구단의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다. 2011년 10월 18일 조범현의 후임으로 친정 팀 KIA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등번호는 자신의 영구 결번 18번이 아닌 90번을 달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2012 시즌 5위, 2013 시즌 8위, 2014 시즌 8위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KIA 타이거즈와 2년 재계약에 성공하며 엄청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으나 팬들의 안 좋은 여론이 일었고, 결정적으로 당시 경찰청 입대를 선언한 내야수 안치홍에게 임의탈퇴 공시하겠다는 발언을 한 사실이 드러나 2014년 10월 25일 재계약을 발표한 지 6일 만에 사퇴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김기태가 선임되었다. 이후에는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국가대표팀 투수코치로 활동했고, 2017년 7월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전임 감독으로 선임됐다.


2018년 아시안 게임 야구 결승전에서 오지환의 군 면제를 위해 출전시킨 게 아니냐는 논란에 대해 국정감사의 증인 신분으로 출석했다. 

그는 1994년 같은 팀 선수였던 이종범과 가수 양수경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Two & One을 결성하여 앨범을 내기도 했다.


1968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조경태.

1972년 - 일본의 아이돌/ 팝 록 밴드 TOKIO의 멤버 야마구치 다쓰야.

1973년 - 미국의 야구 선수 게리 레스.

1974년 - 일본의 성우 유즈키 료카.

1980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조재호.

1981년 - 미국의 가수 브라이언 (플라이 투 더 스카이).

1982년 - 이란의 축구 선수 모함마드 노스라티.

1989년 - 대한민국의 가수 솔지 (EXID)

1994년 - 대한민국의 국민 박시완.

1995년 - 대한민국의 아이돌 다카다 켄타.

1996년 - 일본의 배우 오하라 사쿠라코.

1998년 - 대한민국 최초 사이버 여가수 류시아.

1999년 - 대한민국의 가수 여름 (우주소녀).

2002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준욱 (더이스트라이트).

 

 

 

사망

314년 - 제32대 교황 멜키아데.

681년 - 79대 로마 교황 아가토.
 
1778년 - 스웨덴의 식물학자 칼 폰 린네.

1833년 - 프랑스의 수학자 아드리앵마리 르장드르.

1840년 - 영국의 엘리자베스 공주.

1862년 - 미국의 총기 개발자 새뮤얼 콜트.

1964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약수.

1965년 - 대한민국의 수필가 전혜린.

1971년 - 프랑스의 패션디자이너 코코 샤넬.

1986년 - 체코의 소설가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2007년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김형은.

2012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규환.

2014년 - 미국의 교육학자 엘리엇 아이스너.

2016년 - 영국의 가수 데이비드 보위.

2017년 - 독일의 제7대 대통령 로만 헤어초크.

 

기념일

전통의 날(Traditional Day): 베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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