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13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반응형

사건

593년 - 독성산성 전투 발발.

임진왜란 독산성 세마 상상도 - 이미지출처 오산시 문화원

독성산성 전투는 경기도 수원부(현 오산시)의 독성산성에서 권율이 벌인 전투로 이치전투이후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경기도 지역의 일본군들을 궤멸시켰다.

임진왜란 초기에 벌어진 용인 전투에서 5만 명의 남도근왕근이 궤멸당한 후 용인 전투 참전 장수 중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았던 권율은 이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임진년 말경에 휘하 장수 선거이, 소모사 변이중, 조방장 조경, 의병장 임희진과 변사정, 승병장 처영과 1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북상한다. 권율은 용인 전투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수원의 독성산성으로 들어갔다. 당시 한양에는 6만 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한양 주둔 일본군 총사령관이자 제8진 우키타 히데이에는 권율이 독성산성에 있으면 한양의 후방 연락망과 보급 추진로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해 2만 명의 군사를 뽑아 수원에서 오산, 관천, 용인 등지로 들어가는 길을 차단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임진왜란 중에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서울을 회복하기 위해 병사를 이끌고 올라와 왜병을 무찌른 것으로 유명한 독산성(禿山城)은 오산시 지곶동 독성산(280m) 정상부에 위치한 삼국시대 테뫼식 석성이다. 독산성은 독성산성이라고도 하며 1964년 8월 29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40호로 지정되었다.

독성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비탈진 경사를 이루고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않은 천혜의 요새다. 정상부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주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략적 요충지임에 틀림없다.

400여년 전 처절했던 함성 소리가 들려온다. 왜군은 1592년 4월 한반도로 쳐들어와 2개월도 채 못 되어 전 국토가 유린되고 한성이 함락된다. 무기력한 채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12월 북진하던 왜군은 권율이 경기도 수원부(현 오산시)의 독산성에 있으면 한양의 후방 연락망과 보급 추진로의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해 2만 명의 군사를 보내 성 주변을 에워싸고 우리 군이 투항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의 운명을 걸머진 우리 군사들은 필사항전의 정신으로 타격조를 편성하여 수시로 야습을 감행하며 왜군을 교란했다. 왜군은 독산성의 식수가 부족하다는 점을 감안, 성 안으로 가는 물줄기를 막아 성을 고립시키며 지구전(持久戰)을 펼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군은 식량과 식수가 고갈되어 전의를 상실했다.

권율은 성 안에 물이 풍부한 것처럼 계략을 쓴다. 성 아래의 적군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흰말을 세워 놓고 흰 쌀로 말을 씻기는 장면을 연출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본 적장의 눈에는 물이 넘치는 것으로 보였다.

때 마침 남부지방에서 모여든 의병들이 왜군의 후방에서 포위망을 좁혀오자 왜군은 5일간 독산성을 공격하다 실패하고 한양으로 퇴각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적의 퇴로를 기습하여 수많은 적병을 살상하였다는 세마대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그 후 독산성의 승리를 기념하여 나라에서는 ‘말을 씻은’ 장소에 세마대(洗馬臺)를 세웠다.

독산성은 선조 27년(1594) 임진왜란 중 인근 백성들이 산성을 보수했고,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5년(1602)에 당시 부사 변응성이 석성을 수축하였다.

독산성은 전체 둘레는 1,095m, 성벽 높이는 2~4m이다.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8개의 치(雉)가 있다. 성문은 동, 서, 남, 북 4개에 남문과 서문 사이에 암문이 있어 5개가 존재하며 누각은 없는 상태이다. 북쪽에는 곳곳에 건물터와 여러층의 석단이 남아 있다.


1888년 - 미국지리학회 설립

1898년 - 에밀 졸라가 로로르지에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하다.


1958년 - 진보당의 조봉암이 간첩 혐의로 구속됨.

1958년 진보당 사건 당시 재판

1956년 대통령 선거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비밀리에 왕래하는 잡화상인 양명산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 자유당 정부와 관변단체 및 우익단체들은 조봉암이 양명산을 통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고 공격했다. 1957년 9월 정우갑 사건으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혐의 없음으로 석방되었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1월 12일 새벽, 돌연 비상사태에 돌입한 서울시경 관하 형사대는 이강국 치안국장과 최치환 시경국장 진두 지휘 아래 진보당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섰다. 민의원선거 4개월을 앞두고 선거대책에 몰두하다가, 겨우 잠자리에 든 윤길중, 조규택 등은 서울에서, 진보당부위원장 박기출은 부산에서 각각 체포되었다. 조봉암은 피신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월 13일 약수동의 조봉암의 집을 급습한 10여 명의 형사대는 이미 이틀 전에 그가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극도로 당황했다. 이로부터 48시간 동안 시경은 관하 전 경찰관을 투입하여 조봉암 색출에 투입했으나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조봉암은 이때 은신중이었는데, 동지들의 체포소식에 도망을 가면 무고한 혐의가 사실화될 것이고 애꿎은 동지들만 희생될 것이라고 말하며, 1월 13일 오전 당국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 하겠다고 전하였다. 이틀 전에 치안국에서 새어나온 수사기밀을 탐지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뒤였으며 관철동에 있는 친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일 밤 그는 그곳에서 밤새껏 술을 마시며 사후 대책을 협의했다. 친구들은 이제 붙들리면 다시 나오기 어렵다고 강조하면서 그에게 모든 준비를 해줄 터이니 해외로 망명이나 하라고 권했으나, 그는 거부하였다. '망명을 한다면 어느 나라에서 나를 받아주겠는가. 또 설사 해외탈출이 가능하다고 해도, 나에게 걸린 혐의는 사실화되고 애꿎은 당원들만 희생될 것이 아닌가. 설마 하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선거가 끝나면 내주겠지!' 하고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는 것이다.

1958년 1월말,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진보당 주요 간부들과 함께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심에서는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봉암이 사형을 선고받자 조봉암과 가까웠으며 그를 잘 알고 있었던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장택상과 윤치영은 조봉암이 간첩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장택상은 수감 중인 조봉암을 찾아와 대신 변호를 서주겠다고 하였으나 조봉암은 이를 사양하였다.

2월 20일 육군특무부대는 양명산 사건을 발표하여 조봉암이 양명산과 접선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접촉하였고, 정치자금(공작금)을 받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여러가지 간첩행위를 했다고 발표하였다.

조봉암 등이 간첩 혐의로 피소되자, 장택상, 윤치영 등은 조봉암이 간첩일리 없다며 탄원서를 제출하고, 탄원 서명을 받기도 했다. 그의 조봉암 구명운동에 이어 윤치영이 조봉암을 옹호하고 탄원, 변호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윤치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에는 다소 소극적이었다. 당시 민주당과 조병옥 등은 조봉암의 이적행위 철저 수사를 주장하며 규탄했지만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 운동에 발벗고 나섰다. 공판기간 중 조봉암을 대신하여 변호사 선임을 알아봐주기도 했고, 조봉암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봉암을 대신하여 변론과 항소를 작성하여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 발송하기도 했다.

조봉암의 딸 조호정은 마침내 전 총리 장택상을 찾아 갔다. 정이 많은 장택상은 조호정의 지극한 효심을 외면할 수 없어 홍진기 법무장관을 집무실로 찾아가 조봉암의 구명 을 호소했다. 홍진기 장관은 "지금은 적절한 시기가 아니니 내년 봄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이박사의 82회 생신일이 됩니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해서는 비밀에 부쳐 주십시오"라고 답했다. 그러나 장택상은 그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여기 저기 다 발설해 버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그 약속은 무산되고 말았다.

1959년 장택상은 조봉암이 사형선고를 받자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다. 조봉암의 정치활동을 변호하는 국회질의를 하였고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직접 추진하기도 하였다. 조봉암의 옥중 성명서를 대신 작성 발표하기도 하였다. 조봉암의 인물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광복후 경찰청장으로 폭력적 좌익세력 검거에 앞장섰던 장택상은 조봉암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 이후 우익 단체로부터 사형을 집행하라는 비판이 빗발쳤다. 그러나 장택상과 윤치영이 나서서 조봉암의 무고함을 주장하였다. 일본에서는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봉암의 사면을 요청하는 탄원서가 대한민국 정부에 제출되기도 하였으나 묵살되었다.

장택상은 조봉암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서 조봉암 구명운동을 하였고, 조봉암을 변호하는 변론을 써서 법정에 대신 제출해 주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조봉암에 대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간첩 및 간첩방조죄는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 후 자유당의 정치깡패인 이정재 수하들과 반공청년단원 200명이 용공판사타도를 외치며 법원으로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한반공청년회' 200명은 대법원에 난입하여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법원 청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1심의 변호인단이 구속되거나 검찰의 신문을 받기도 했다. 그 후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크게 달랐다. 양명산이 진술을 번복, 검찰과 특무대에서 허위진술해 조 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았다고 말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간첩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주심 김갑수 대법관)도 2심과 마찬가지 판단을 내렸다.

법조 출입기자인 김모씨가 신동아를 통해 "조봉암에 대해 무기징역으로 합의됐다가 모 대법관의 요청으로 선고기일에 대법관을 긴급 소집하여 사형으로 변경했다"고 주장하자 주심 대법관인 김갑수는 "재판장이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잘못 읽었던 것 같으나 형량이 갑자기 변경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등 사회적인 논란이 있었으며 이에 대해 대법관에서 물러나 변호사를 하던 김갑수는 "지금도 오판이 아니라고 확신한다"고 하면서도 "당시에는 무척 괴로웠다"고 말했다.

3심에서 조봉암에겐 사형이 선고되었다. 재판 당시에도 언론은 끊임없이 의혹을 제기했고, 미국도 계속 이승만 정권에 경고를 보냈으나 자유당 강경파는 1959년 끝내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했다. 미국에서는 소극적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에게 조봉암 사형을 철회할 것을 계속 주문하였다.

장택상은 해방 후 좌파탄압에 힘을 쏟던 사람이었는데, 조봉암에게 끝내 사형이 선고되자 장택상은 이를 개탄하였다고 한다. 윤치영은 이승만의 강경파 반공주의자 측근으로 유명하였다. 조봉암이 사형을 선고받자 윤치영은 그가 정치노선을 잘못 선택했지 용공분자는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그는 담담하게 이를 받아들이고 가족과 측근들에게 심경을 밝혔다.

법이 그런 모양이니 별수가 있느냐.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어 죽고 침실에서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60이 넘은 나를 처형해야만 되겠다니 이제 별수가 있겠느냐, 판결은 잘됐다. 무죄가 안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 나는 만사람이 살자는 이념이었고 이 박사는 한 사람이 잘 살자는 이념이었다.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만 승리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를 하자면 그만한 각오는 해야한다.

1959년 7월 31일 아침 사형집행 직전 조봉암은 창백한 표정으로 끝내 무표정하게 사형전 성직자가 사형수를 위해 해주는 설교와 기도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사형 집행 전 목사에게 예수가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의 성경구절인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했느냐, 나는 그의 죽을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내려서 놓아라 한데 ...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를 읽어달라 했다고 한다. 조봉암은 7월 31일 오전 11시 3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 사형당하였다. 시신은 서대문형무소 밖에서 기다리던 큰딸과 조카, 측근들에게 인도되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61세였다.


2012년 - 4,232명이 탑승한 대형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가 이탈리아 서해안 토스카나 제도 질리오 섬 앞바다에서 암초에 걸려 좌초, 31명이 사망하고 한 명이 실종되다.

유로존 13개국중 프랑스를 비롯한 9개국의 신용등급이 강등되다.

2015년 -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에서 인질극이 벌어졌다.

문화

1999년 - 그룹 god가 활동을 시작하였다.

2014년 - 아이돌 그룹 B1A4 정규 2집 Who Am I 발매.

2015년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7, 윈도우 서버 2008, 윈도우 서버 2008 R2의 메인스트림 지원을 종료했다.

2017년 - 남해고속도로제3지선이 개통되었다.

 

 

 

탄생

1338년 - 고려의 문신 정몽주.

1919년 - 대한민국의 역도 선수 김성집.

1939년 - 대한민국의 여성 성우 겸 연기자 김석옥.

1956년 - 전 대전광역시장 권선택.

1968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건모.

1971년 - 대한민국의 가수 조규찬.

1977년 - 한민국의 방송 기자 곽상은. / 영국의 영화배우 올랜도 블룸.

1981년 - 대한민국의 가수 성진환 (스윗 소로우).

1982년 - 대한민국의 래퍼 상추 (마이티 마우스).

1983년 - 대한민국의 당구 선수 김가영.

1984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현주.

1986년 - 캐나다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조아니 로셰트.

1987년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배우 이승기.

1990년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서설희.

1992년 -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 산티아고 아리아스

1994년 - 일본의 가수 나카야마 유마.

1995년 - 대한민국의 가수 제이어스 (온앤오프).

 

사망

888년 - 카를 3세, 카롤링거 왕조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599년 - 영국의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

1864년 - 미국의 작곡가 스티븐 포스터.
1937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유여대.
태회관 모여 독립선업문을 낭독하는 31인 민족대표들-이미지출처 천안 독립기념관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한학을 익혀 서당 훈장으로 일하던 중 1898년 선교사를 통해 개신교에 입교했다. 당시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랬듯이 교육을 통한 계몽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의주에 일신학교와 여학교인 양실학원을 세워 교육 사업에 종사했다. 1915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9년 2월에 선천의 양전백 집에서 이승훈을 만나 다음 달에 있을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기로 했다. 그는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도장을 이명룡에게 맡기고 당일 경성부에서 열린 낭독 모임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양실학교를 중심으로 의주 지역의 만세 운동을 조직했다. 정명채, 김두칠 등 의주의 기독교인들과 미리 뜻을 나누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한 뒤, 탑골공원에서의 거사와 비슷한 시각에 군중을 모아 선언서를 낭독했다가 곧바로 피검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의주로 돌아가서 양실학교를 재건하고 목회 활동을 하다가 신의주로 이주한 후 사망했다.

계몽 운동과 교육 사업, 문맹퇴치운동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가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1941년 - 아일랜드의 문학가 제임스 조이스.


1964년 -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

1981년 - 대한민국의 시인, 소설가 월탄(月灘) 박종화

2002년 - 대한민국의 군인 이형근

2002년 - 쿠바의 어부 그레고리오 푸엔테스

2011년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오건우

2014년 - 대한민국의 야구감독 김정수

2014년 - 대한민국의 배우 겸 가수 한지서

2017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대학교수 박세일

2018년 - 대한민국의 방송 PD 전기상

 

기념일

미주 한인의 날: 일부 미국의 주

민주주의의 날: 카보베르데(Cape Verde)

광복절: 토고

성 크누트의 날(Tjugondag Knut), 크리스마스의 마지막날: 스웨덴, 핀란드

올드 새해 전야: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공화국, 스릅스카 공화국

 

반응형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