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17일-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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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819년 - 시몬 볼리바르, 그란콜롬비아 선포

1893년 - 하와이 왕국 전복

하와이왕국 문양

하와이 왕국는 1795년부터 1893년까지 지금의 미국 하와이주 일대에 존재했던 군주국이다.

1778년에 영국의 탐험가인 제임스 쿡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하와이 제도에 도달하였다. 그 때 당시에는 폴리네시아인들과 타히티에서 도래해 온 사람들이 부족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었다. 비록 제임스 쿡 본인은 이곳에서 자신의 부하 선원들과 원주민들과의 사이에서 발생한 무력 분쟁에 휘말려 살해당하였지만, 뒤에 통일 하와이 왕국의 초대 국왕이 되는 카메하메하 1세는 제임스 쿡의 일행으로부터 영국식의 문화와 기술을 적극 수용하였고,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얻은 무기를 이용해 통일 전쟁을 시작했다.

1810년에는 하와이 제도 전체를 통일시키고 하와이 제도 최초의 통일 국가를 선포하고, 영국의 정치 체제를 크게 모방한 입헌군주제에 기초한 정치 체계를 세웠다. 1874년에 6대 국왕인 칼라카우아가 미국인들의 이주를 허용한 직후부터 점점 미국에게 경제적으로 속박당하고 만다. 결국 마지막 국왕인 릴리우오칼라니가 실시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대한 국유화 조치에 반발하여, 친미주의자인 샌포드 돌이 일으킨 반란에 미국계 이주민과, 소수의 공화파 농장주들이 가담하였고, 국왕의 거처인 이올라니 궁전이 함락당한다.

1893년에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은 폐위되고, 일시적으로 샌포드 돌을 대통령으로 하는 하와이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후, 하와이 공화국도 초대 대통령인 샌포드 돌이 미합중국 가입을 선언하면서, 멸망하고 만다.

이전에 벨기에 식민제국의 왕인 레오폴2세가 이곳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그 회사가 도산하면서 포기하게 되었다.


1955년 - 미국 해군이 건조한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 호가 항해를 시작하다.

노틸러스 호의 첫 출항

USS 노틸러스 (SSN-571 USS Nautilus)는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다. USS 노틸러스는 1958년 8월 3일 세계최초로 북극점 아래를 항해한 잠수함이기도 하다.

이 배의 이름은 쥘 베른이 지은 1870년 소설 해저 2만리의 네모 선장이 가진 가상의 잠수함인 노틸러스 호에서 가져왔으며, 같은 이름을 가진 USS Nautilus (SS-168)과 구분짓기 위해 새로운 원자력 잠수함인 노틸러스는 1951년 인가, 1952년 기공, 그리고 1954년 미국의 제 34대 대통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영부인인 메이미 아이젠하워(Mamie Eisenhower)가 세례를 했었으며, 9월에 미국 해군으로 취역하게 된다. 잠수함의 마지막 건조는 1955년에 최종적으로 끝나게 된다.

노틸러스호의 원자로로 인해 노틸러스는 기존 디젤-잠수함보다 더 오래 해저를 누빌수 있었으므로 기존의 기록들을 취역 1년만에 깨버렸으며, 기존 잠수함들이 갈수 없던 장소까지 가게 되었다. 항해중 여러가지 디자인과 건조의 한계점이 드러났으며, 이 한계점은 더 나은 잠수함을 만드는 정보로 사용되었다.

노틸러스는 함체의 노후화로 인해 1980년 퇴역했으며, 1982년 국가 역사 랜드마크에 지정되었다. 노틸러스 호는 현재 코티컷의 그로튼에 위치한 잠수함대 잠수함 및 박물관에 박물관 배로 보존되어 있으며 연간 25만명의 방문객이 찾고 있다.

1951년 미국 의회는 미국 해군의 해군 대령(나중에 제독으로 승급) 하이먼 G.리코버, 보통 "원자력 해군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가 계획하고 직접 감독한 원자력 잠수함 진수 계획을 승인하게 된다. 1951년 12월 12일 미국 해군성은 이 원자력 잠수함의 이름을 "노틸러스"로 정하였고, 이 배는 노틸러스란 선명을 가진 4번째 함선이 된다. 그리고 헐 코드로 SSN-571을 받게 된다.

노틸러스의 용골은 1952년 6월 14일 해리 트루먼에 의해 제너럴 다이내믹스의 전기 선박 부서에 배정되었다. 노틸러스는 그후 메이미 아이젠하워가 1954년 1월 21일 세례를 했으며, 코네티컷 템즈 강으로 진수되었다. 그후 1954년 9월 30일 유진 P. 윌킨슨 함장의 지휘를 받게 된다. USS 노틸러스 (SSN-571)(USS Nautilus (SSN-571))는 미국이 개발한 세계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이며, 1958년 8월 3일 세계 최초로 북극점을 잠수 횡단한 잠수함이기도 하다.

1951년 미국 의회는 하이먼 G. 리코버 대령이 계획하고 관리감독한 핵추진 잠수함의 건조를 승인했다. 하이먼 G. 리코버 대령은 "원자력 해군의 아버지"(Father of the Nuclear Navy)라고 불린다. 이후에 4성장군인 제독(Admiral)까지 승진했다.

1951년 12월 12일 미국 해군성은 최초의 핵잠수함 이름이 노틸러스라고 발표했다. 미국 해군 역사상 4번째 노틸러스함이다.


1952년 6월 14일 해리 S. 트루먼 현직 대통령이 참석하여 코네티컷주 그로톤의 제너럴 다이내믹스 일렉트릭 보트에서 기공식이 열렸다. 1954년 1월 21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현직 대통령의 영부인 매미 아이젠하워 여사의 축복으로 준공식을 하였다. 1954년 9월 30일 공식 취역했다. 유진 P. 윌킨슨 함장이 지휘했다.


1991년 - 다국적군의 공중폭격에 의해 걸프 전쟁,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되다.

사막의 폭풍 작전 전개도

1991년 1월 16일 ‘사막의 폭풍’ 작전 명령(Operation Desert Storm)이 개시되었다. 미국 공군의 EC-130H 전자자원기가 이라크군 통신을 방해하였고 17일 드디어 본격적으로 이라크와 쿠웨이트에 공습이 개시되었다. 당시 이라크 전투기는 거의 폭격으로 출격하지 못했으며 설사 출격하더라도 대부분 다국적군의 F-16과 F-18, F-15E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5,000대가 넘는 전차는 불능이 되었으며 이라크는 간간이 이스라엘을 항해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였으나, 대부분 미국이 제공한 최신형 패트리어트 요격 미사일에 격추되었다. 당시 40일에 가까운 포격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2월 24일, 다국적군은 대규모 지상군을 항공기 호위하에 진격시켰다. 이라크군 전차는 다국적군의 미국제 M1A1 전차나 영국제 챌린저 1 전차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부시 대통령이 전쟁 발발 42일만에 전투를 중지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1990년 프랑스 툴롱항에 정박해 있는 만재배수량 33,000톤의 클레망소 항공모함이 승무원 1천여명, 40대의 헬기, 4대의 브레게 알리즈 프로펠러기를 탑재하고 걸프전을 위해 출항하였다. 6대의 퓨마 전투용 헬기와 60명의 기술진이 툴롱항으로 이동했다.


1992년 - 김보은 김진관 사건이 발생

김보은 김진관 사건은 1992년 1월 17일 충청북도 충주에서 김보은과 그녀의 남자 친구 김진관이 12여 년 동안 자신을 강간한 계부를 살해한 사건이다.

김보은의 어머니는 김보은이 7세 때 재혼하였고, 김보은은 9세 때부터 상습적인 강간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계부는 김보은과 김보은의 어머니를 번갈아 강간하였으며, 집에 식칼과 쥐약을 갖다 놓고 사실을 알릴 경우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협박하였다. 김보은은 대학에 진학하여 기숙사에서 살게 되면서 주중에는 계부로부터 떨어져 지낼 수 있었고, 자신의 괴로움을 남자 친구인 김진관에게 털어 놓았다. 김진관은 계부를 찾아가 강간을 그만 둘 것을 요청하였으나 당시 충주지방검찰청 총무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계부는 오히려 "다 잡아 넣겠다. 죽여 버리겠다"며 김보은과 김진관을 협박하였다.

김보은과 김진관은 강도로 위장하여 계부를 살해하기로 공모하였고 1992년 1월 17일 김진관이 김보은의 집에 몰래 침입하여 김보은과 함께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계부를 식칼로 살해하였다. 김진관은 강도를 당한 것처럼 위장하고 집을 나갔으며, 김보은은 강도를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하였다. 피살자가 살해될 당시 방에 이불이 하나만 있었고, 의붓딸과 계부가 함께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수상히 여긴 경찰은 김보은에게 계부가 살아있다고 말하여 김보은을 자극하였다. 김보은이 흥분하여 울부짖는 것을 본 경찰이 그녀를 집중적으로 추궁하자 결국 범행을 자백하였고, 이들은 1월 19일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김진관의 아버지가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상담을 의뢰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전국에서 "김보은 김진관 사건 공동 대책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들의 구명 활동을 벌였다. 공동 대책 위원회는 김보은과 김진관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22명의 무료 변호인단도 구성하였다. 또한 성폭력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였다.

변호인단은 김보은과 김진관의 정당방위를 주장하였으나 재판부는 1992년 4월 4일 1심에서 김진관에게 징역 7년, 김보은에게 징역 4년을, 10월 2일 항소심에서 김진관에게 징역 5년, 김보은에게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였다. 피고인들은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12월 22일 상고를 기각하였다. 김보은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사면, 복권되었고, 김진관은 잔여형의 절반을 감형받았다. 김진관은 1995년 2월 17일에 출소한 후 1998년 2월 3일과 7월 16일에 복권 신청을 하였으나 기각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서 공론화가 금기시되었던 근친 성폭력의 실상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91년에 일어난 김부남 사건과 함께 1993년에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되는 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또한 살인 사건에 대해서 집행유예가 선고된 최초의 고등법원 판례이기도 하다.


1995년 - 고베 대지진. 일본의 효고현 남부에서 지진이 발생하다.

효고현 남부 지진, 한신·아와지 대지진 또는 고베 대지진은 1995년 1월 17일 화요일 5시 46분 52초, 효고현의 아와지 섬 북쪽을 진원으로 발생한 모멘트 규모 6.9의 도심 직하형 지진이다.

당시에는 미진이 있었으나 대지진이 올거라는 예측을 할 수 없었다. 지진의 피해가 컸던 이유로는 지진의 진원지가 지표면으로부터 겨우 15km 아래에서 발생하여 지진 가속도가 생성이 되면서 격렬한 지각운동을 만들었다. (고베시는 갯벌매립도시이다. 즉 약한진동에도 매립되었던 갯벌이 흘러나와 도시가 그대로 주저 앉을 수 있다.) 그리고, 도시 교외에 있는 많은 일본의 전통가옥이 무너지고 화재가 발생하면서 사망자가 발생한다. 일본의 전통가옥은 지붕이 무거운 기와로 되어있는 반면, 가느다란 기둥과 벽은 석고나 대나무로 만들어져 있어서 지진에는 약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본의 주택 구조는 일본의 자주있는 태풍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설계되어 있었으나 지진에는 취약한 단점이 있었다. 지진이 발생했을때의 팬케이크 현상으로 일본의 전통가옥은 쉽게 무너졌다. 고베의 사망자 90%, 오사카의 사망자 40%는 이러한 일본의 전통 가옥에서 살았기에 피해가 컸다. 한신 고속도로의 상판이 무너지고 500m 이상이 쓰러졌다. 한신 고속도로의 기둥은 3중 철골로 보강이 되어 있었으나 가장 안쪽의 보강 철골이 짧아 지주의 약한 지점인 안쪽 철골이 끝나는 곳이 끊어지고 쓰러졌다. 그리고 고베의 생명줄인 항만이 파괴되어 복구하는데만 2년이 걸리고 400억 달러의 피해가 발생했다.

  • 첫 번째 지진-1995년 1월 16일 월요일, 18시 26분 리히터 규모 3.6
  • 두 번째 지진-18시 49분 2.5 강도, 지진의 근원지: 본토와 아와지 섬 사이의 아카시 해협으로 남서쪽으로 15 킬로미터
  • 세 번째 지진-18시 55분 강도 1.5
  • 네 번째 지진-23시 49분, 아카시 해협에서 5시간 동안 4번의 지진 발생
  • 마지막 지진-1995년 1월 17일 5시 46분, 고베 지진 발생 마지막 지진 후 6시간이 지난뒤 규모 7.2 측정, 400년 만의 고베지진 강타 후 17시 47분 12초, 14초만에 지진이 진정된다.

"한신지역"이라고 불리는 니시노미야 시, 아시야 시 등 효고현 남동부의 인구 밀집 지역과 아와지 섬의 일부에서 최대 진도 7도를 기록했고, 오사카에서 진도 6.4를 기록하였다. 인구 약 150만 명의 고베 시에서 피해가 특히 컸다. 일본에서는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최대의 인명 피해를 기록했다. 6,434명이 사망, 3명 실종, 43,792명이 부상당했으며, 주택 전파 104,906채 등 재산피해도 10조엔(당시 일본 GDP의 2.5%에 해당)에 달했다. 한신 고속도로 일부와 산요 신칸센, 특히 신오사카 역~히메지 역 구간이 무너져 WIN350(500계의 시제차) 시험이 하카타 역~히메지 역 구간만 이루어지고 붕괴된 구간은 임시 JR버스로 대체, 흙을 덮어 우회선로를 만드는 등 피해가 심각하였다. 이처럼 많은 교통 수단이 무너지면서 교통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오사카, 요코하마, 도쿄에서도 진동이 관측되었고, 오사카에서는 놀란 주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고, 지진에 취약한 여러 일본식 집들이 붕괴되었으며 마이니치 방송 자야마치 사옥이 심하게 흔들리는 등 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지진으로 인한 한국 교포의 인명 피해도 5백여 명에 달했다.

지진 직후에 현지에서 이재민 지원의 자원봉사 활동에 참가한 사람의 수는 하루 평균 2만 명 이상, 3개월 간으로 총계 117만 명이라고도 말한다. 재해 현장에서의 자원봉사 활동(전문 자원봉사·정보 자원봉사를 포함한다)의 중요도에 대한 많은 일본인의 인식도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현지에는 가지 않고 재해 부상자를 위한 헌혈·모금·물자 제공 등의 후방 지원에 종사한 사람들도 포함하면, 참가인 수는 한층 더 증가할 것이다.

대지진으로부터 약 18년이 지난 2013년 4월 13일 5시 33분, 효고현 아와지 섬을 진원으로하는 강한 지진이 발생, 효고 현 아와지 섬의 아와지 시에서 최대 진도 6약이 관측되었다. 그외 같은 아와지 섬의 미나미아와지 시에서 진도 5강, 역시 같은 아와지 섬의 스모토 시, 오사카부의 미사키 정, 카가와 현의 히가시카가와 시, 도쿠시마현의 나루토 시 등지에서 진도 5약이 관측되었다. 이 지진으로 인해 효고 현 스모토 시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땅이 갈라졌고 목조주택의 일부가 파손되었다. 또한 건물들의 모든 물건들이 다 쏟아지고 수도관이 파손되어 갈라진 도로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등 많은 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사망자는 없었고 인명피해는 20명의 부상자가 전부였다. 진앙의 깊이는 15km,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매그니튜드는 6.3으로 최종 측정되었다.


1995년 -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의 제 73대 총리직에서 물러나다.

 

문화

2006년 - 국민중심당 창당.

2010년 - 국민참여당 창당.

2012년 - 한국예수교장로회가 하승무 목사를 중심으로 창립.

 

탄생

1706년 - 미국의 정치인이자 과학자 벤자민 프랭클린.

1820년 - 영국의 소설가 앤 브론테.

1860년 -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 체호프.

1899년 - 미국의 마피아 알 카포네.

1910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 박태원.

1923년 - 미국의 중국학자 데이비드 니비슨.

1926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래혁.

1905년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기예르모 스타빌레.

1942년 - 미국의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1942년 1월 17일 ~ 2016년 6월 3일)는 미국의 전직 권투 선수이다. 1964년 맬컴 엑스 등이 이끄는 이슬람운동에 가담하기 전까지 이름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였다. 30년 동안 파킨슨병으로 투병해 오면서도 권투선수로써 위상을 날렸던 무하마드 알리는 2016년 6월 3일 세상을 떠났고, 전 세계의 많은 유명인사들이 애도를 표했다.

캐셔스 클레이 주니어는 1942년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아마추어 복서로 로마 올림픽에 참가하여 복싱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알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로마에서 돌아온 후 인종 차별을 겪고 강에 메달을 던져버렸다고 하였으나 이 일화의 진위는 후에 논란이 되었다.

1964년 소니 리스턴(Sonny Liston)을 이기고 복싱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본래 침례교 신자였으나 맬컴 엑스가 소속되어 있던 네이션 오브 이슬람 운동에 감화되어 리스턴과의 시합 이후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하였다. 1967년, 미군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반대하며 종교적인 신념을 들어 징집을 거부하였다. 알리는 곧 체포되어 병역 회피로 유죄 선고를 받고 챔피언 타이틀도 박탈당했다. 1971년 대법원에서 성공적으로 자신을 변론하여 무죄 선고를 받았으나, 이 시기까지 거의 4년 동안 시합을 하지 못하였으며, 운동 선수로서의 최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기간을 상실하였다. 전쟁에 대한 양심적 거부자로서의 알리의 행동은 그를 반문화 세대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1976년 일본 도쿄에서 레슬링 선수 안토니오 이노키와 대결한 이후 태권도인 이준구의 주선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 알리는 서울 시내에서 카퍼레이드를 하고, 문화방송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하였다. 비행기 시간 문제로 박정희 대통령과의 만남은 이뤄지지 않았다.

은퇴 후에는 파킨슨 병을 앓았으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성화 점화자로 참여하였다. 2016년 6월 3일 애리조나주 피닉스의 한 병원에서 폐혈증으로 사망하였다.

알리는 당시 선수들이 매니저에게 발언을 맡긴 것과 달리 스포트라이트를 갈명하였으며 도발적인 말로 상대방을 자극하였다. 알리는 복싱에서의 트래시 토킹(trash-talking)을 위하여 라임 구성와 스포큰 워드를 즉흥적으로 구사하였고, 자신의 활동을 지지하기 위한 정치적 시(poetry)의 일종로서 그러한 것들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이는 랩과 힙합 음악을 예견한 것이기도 하다. 알리의 대한민국 방문을 주선한 이준구는 알리가 기자들 앞에서는 기상천외한 내용이나 표현으로 자신을 드러냈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과묵했다고 회상하였다.[8] 그리고 상당한 달변가이기도 했는데 일례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를 거부하려는 상황헤서 한 발언은 당시 미국의 사회문제로 대두된 인종차별에 대해 명확하게 비판했다.

“ 나는 당신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되겠다. 베트콩들은 우리를 검둥이라고 욕하지 않는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


1950년 - 대한민국의 배우 이영하.

1952년 - 일본의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

1956년 - 대한민국의 사회학자 이정옥.

1959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문세. / 일본의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

1964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소진. /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 레이디 미셸 오바마.

1967년 - 대한민국의 배우 송강호.

1969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윤유선.

1971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두아.

1973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정태. / 멕시코의 축구인 콰우테모크 블랑코.

1975년 - 대한민국의 축구인 김정수. / 대한민국의 농구인 추승균.

1979년 - 일본의 유도 선수 우에노 마사에.

1980년 - 미국의 가수, 배우 주이 디샤넬.
 
1982년 - 대한민국의 가수 환희 (플라이 투 더 스카이).

1983년 - 대한민국의 기상캐스터 오하영

1984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아롬. / 대한민국의 배우 장신영.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유도 선수 오정애.

1985년 - 대한민국의 가수 강인 (슈퍼주니어). / 대한민국의 배우 최성원

1986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도윤. / 대한민국의 가수 태군.

1986년 - 타이완의 야구 선수 양다이강.

1987년 - 대한민국의 그룹 아이리스의 전 멤버 故이은미

199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장성우.

1992년 - 일본의 야구 선수 요시다 에리.

1995년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도미니크 블러드워스.

2000년 - 대한민국의 그룹 SF9의 멤버 찬희.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정은원.

2002년 - 미국의 가수 사무엘.

 

사망

1468년 -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 스칸데르베그.

1893년 - 미국의 제19대 대통령 러더퍼드 B. 헤이스.

1911년 - 영국의 인류학자 프랜시스 골턴.

1981년 - 대한민국의 시인 김종문.

1994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일권.

1997년 -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

클라이드 윌리엄 톰보(1906년 2월 4일 ~ 1997년 1월 17일)는 명왕성을 발견한 미국의 천문학자이다. 뉴멕시코 주립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기 전인 24세 때, 퍼시벌 로웰의 예측을 참고로 로웰 천문대에서 관측을 했으며 그 결과로 명왕성을 발견했다. NASA 는 2006년 클라이드 톰보의 유해 일부를 뉴 허라이즌스에 태워 명왕성으로 보냈으며, 이는 2015년 7월 14일 최근접점에 도착하였다.


2005년 -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

2008년 - 미국의 체스 기사 보비 피셔.

2018년 - 잉글랜드의 배우 사이먼 셸턴.

2019년 - 수단의 정치인 바비케르 아와달라.

 

기념일

내셔널 데이(National Day): 미노르카 스페인

파트라스 카니발 개막일: 파트라스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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