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18일-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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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350년 - 로마의 장군 마그넨티우스가 황제 콘스탄스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임을 천명하다.

474년 - 레오 2세가 7살의 나이로 황제가 되다.

532년 - 니카 반란이 실패로 끝나다.

1535년 -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를 발견하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프란시스코 피사로 곤살레스(1471년 또는 1476년 ~ 1541년 6월 26일)는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이다. 잉카 제국을 정복하였으며, 현재 페루의 수도인 리마의 건설자이다.

피사로는 스페인의 에스트레마두라의 트루히요에서 태어났다. 그는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와 도시 빈민층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출신이며,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와 6촌이다. 그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불명확하지만, 대략 1470년대 정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교육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피사로는 죽을 때까지 문맹으로 살게 되었다.

피사로는 1509년 11월에 신대륙, 즉 아메리카 대륙의 현재 콜롬비아가 있는 지역으로 항해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식민지를 개척하려 하였으나, 기후와 질병 등으로 인해 결국 식민지 사업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온 이후, 한동안 거리를 전전하다 1513년에 또다시 항해단에 입단하여 바다로 나아가게 된다.

1509년 11월에 피사로는 알론소 데 오제다가 이끄는 선단에 합류하여 현재에 콜롬비아로 항해했고, 1513년에는 바스코 발보아의 선단에 합류하여 최초로 태평양을 바라본 유럽인들 중 한 명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러한 모험을 통하여 식민지의 총독과 가까운 사이가 되게 되었고, 같은 해에 그는 원주민들과 가축들을 관리하는 직을 맡게 되었다. 나중에 총독이 발보아를 점차 싫어하게 되고, 마침내 제거해야겠다는 계획을 짠 후, 그는 피사로에게 발보아를 직접 체포하여 데려오라고 명한다. 피사로는 그를 그대로 체포하여 끌어왔고, 발보아는 1519년 1월에 사형당한다. 한편 피사로는 총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당시 막 지어지고 있던 파나마시티의 시장직과 행정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된다.

한편, 에르난도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아즈텍 제국을 정복했다는 소식은 피사로에게 큰 관심을 갖게 했고, 그는 남쪽에 있다는 황금의 나라를 찾아 원정대를 꾸리게 된다. 그는 1524년과 1526년에 각각 한 번씩 원정대를 만들어 남아메리카 지역으로 향했는데, 고질적인 기후 문제와 향토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만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파나마의 총독은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하지만, 피사로는 이를 거부했고 모험을 계속해나갔다. 그는 끊임없이 남하했고, 1528년 4월에 북부 페루 지방까지 진출하여 그곳의 원주민들과 황금을 발견하게 된다. 이 발견은 그에게 세 번째 원정을 나서겠다는 열망을 심어주었고, 이후 피사로는 곧바로 파나마로 돌아가 총독에게 지원과 함께 새로운 원정단 조직을 요청한다. 하지만 총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향해 국왕 카를로스 1세를 직접 설득하려 나선다. 그의 계획은 대단히 성공적이어서, 그는 지원부대뿐만 아니라 그가 점령하는 땅에 대한 지배권까지도 일부 손에 넣게 된다. 그는 이후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모두 불러 모은 후 1530년에 파나마를 떠난다.

해안가에는 워낙 호전적이거나 이방인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에, 피사로와 그 일행은 내륙을 통해 점차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그는 결국 잉카 제국이 다스리던 영토까지 들어가게 되고, 당시 잉카 제국의 황제였던 아타우알파는 피사로가 그의 영토에 감히 침범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나, 1532년 11월에 피사로 일행에 의해 포로로 잡히게 되며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다.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에게 방에 가득 들어찰만큼의 황금을 주는 조건으로 자신을 살려줄 것을 빌었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하였으나 1533년에 피사로에 의해 사형당하고 만다. 1535년 1월에 그는 현재 페루의 수도 리마를 세웠으며 이를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했다. 한편, 피사로는 그와 함께 잉카 정복에 나섰던 일행 중 하나인 디에고 알마그로와 내분이 일어나게 되면서 결국 전투까지 치르게 되고, 여기서 패배한 디에고 알마그로는 포로로 잡혀 사형당했다. 이후 이에 앙심을 품은 알마그로의 아들이 1541년 6월에 피사로를 리마에서 살해함으로써 파란만장했던 생애도 끝나게 된다. 그의 유해는 리마 대성당에 묻혔다.


1825년 -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 세계 최초의 증기 기관차 로코모션 호 운전.

1871년 - 독일 제국의 성립.

1912년 - 비운의 탐험가 로버트 스콧, 남극에 도달.

1919년 - 파리 강화 회의 개최.

1952년 -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 평화선 선언.

이승만의 독도 라인과 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항의 하는 일본인들의 집회

평화선은 1952년 1월 18일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이 대통령령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의 선언’을 공표함으로써 설정된 대한민국과 주변 국가 간의 수역 구분과 자원 및 주권 보호를 위한 경계선이다. 미국, 중화인민공화국, 일본에서는 이승만 라인으로 부른다. 이는 오늘날 배타적 경제 수역과 비슷한 개념이다. 이렇게 해양 경계선이 획정되었는데 1952년 2월 8일 이승만 정부는 동선을 설정한 주목적은 한·일 양국 간의 평화유지에 있다고 발표함으로써 이를 "평화선"이라 부르게 되었다. 평화선의 설정 목적은 해양 분할이 국제적 경향이 됨에 따라 정당방위 책으로 해안 어족의 보호와 생물자원의 육성을 기하고, 특히 발달한 일본 어업활동으로부터 영세적인 한국어민을 보호하려는 데 있었으며, 국제관계상 합법적인 조치였다. 이 경계선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포함하고 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 이승만은 이를 묵살하였다. 이 경계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미일 평화조약이 1952년에 발효됨에 따라 무효화되자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하고자 한 것이다. 한반도 주변 수역 50-100해리의 범위를 가지고 있다.

이 선언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반대하였는데, 특히 당시 일제 강점기 이후 외교관계가 정상화 되지 않았던 일본과는 어로 문제, 독도를 포함한 해양 영토 문제로 이후 13년간의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대한민국은 일본 어선 328척을 나포, 일본 어부 3929명을 감금 억류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 어부 44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일본 정부에게 형무소에 수감 중인 한국인 범죄자를 석방할 것을 요구, 일본 정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한국인 수감자 472명에게 특별 영주권을 주고 석방하였다.

한국 전쟁으로 인해 깊게 관련된 미국은 두 동맹국 간에 난처한 입장에 서게 되었지만, 대체적으로 중립적 입장을 지켰다.

평화선이 설정된 직접 동기는 맥아더 라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전 직후 미국을 중심 한 연합국은 일본 어업이 세계 어장에 출어하여 남획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1947년 2월 4일 맥아더사령부 명령으로 일본 어선의 출어금지선을 책정하였기 때문에 한국은 직접적으로 큰 혜택을 받아왔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조인됨으로써 맥아더 라인은 자동적으로 철회될 운명(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1952년 4월에 발효할 예정이었다.)에 있었고, 그것은 곧 일본어선의 한국 연안 대거 출어·남획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한 사전 준비 대책으로 평화선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1952년 당시는 한반도는 한국 전쟁 중이었다. 부산을 임시 수도로 한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한국의 연안수역 보호를 통해 수산 자원과 광물, 공산주의 국가로부터의 안보와 인근 국가로부터의 영토주권을 주장하기 위한 선언을 만들게 되었다. 공식 명칭은 '인접 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으로서 1952년 1월 18일 국무원 공고 제14호로 선포되었다. 그 요약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의 영토인 한반도 및 도서의 해안에 인접한 해붕(海棚)의 상하에 이미 알려진 것과 또 장래에 발견될 모든 자연자원, 광물 및 수산물을 국가에 가장 이롭게 보호·보존 및 이용하기 위하여 그 심도 여하를 막론하고 인접 해양에 대한 주권을 보존하며 또 행사한다.
평화선 안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자원 및 재부를 보유·보호·보존 및 이용하는 데 필요한 다음과 같은 한정된 연장 해양에 걸쳐 그 심도 여하를 불문하고 인접국가에 대한 국가의 주권을 보지 하며 또 행사한다. 특히, 어족 같은 감소될 우려가 있는 자원 및 재부가 한국 국민에게 손해가 되도록 개발되거나, 또는 국가에 손상이 되도록 감소 혹은 고갈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수산업과 어로 업을 정부의 감독하에 둔다.
상술한 해양의 상하 및 내에 존재하는 자연자원 및 재부를 감독하며 보호할 수역을 한정할 경계선을 선언하며 또 유지한다. 이 경계선은 장래에 구명될 새로운 발견·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새로운 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다.
인접 해안에 대한 본 주권의 선언은 공해상의 자유항행권을 방해하지 않는다.
정부는 동선언 제3항 규정에 따라 1952년 12월 12일 '어업자원보호법'을 제정, 동선 내의 해양의 어업자원보호를 위한 관리수역을 명시하고(제1조), 동 수역 안에서 어업활동을 하려는 자는 주무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제2조), 국적 여하를 불문하고 한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이를 위반하면 처벌받게 되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전례가 없다는 일본의 주장에 대해 1945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에 의한 '연안어업에 대한 선언'과 '해저와 지하자원에 관한 선언' 그리고 아르헨티나(1946년), 파나마(1946년), 칠레(1947년), 코스타리카(1948년), 엘살바도르(1950년), 온두라스(1951년), 칠레, 페루, 에콰도르(1952년) 등 다른 나라에서 채택한 유사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평화선 침범 상황 전시회 - 제주도 인민유격대와 연락하고 있는 일본인(1965년)


이 선언은 이후 한국의 수역 내에서 외국 선박의 불법 어로 행위를 단속하는 근거가 되었다.

일본은 평화선의 선언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공해 자유의 원칙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선언 직후인 1952년 1월 24일 성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 미국·캐나다·일본의 어업 협정에서 공해의 자유가 인정된 것과 같이 공해 자유의 원칙이 인정되어야 한다.
  • 공해에 국가 주권을 일방적으로 선언한 전례는 없다.
  • 한일 양국의 친선을 위해 이는 신중히 검토되어야 한다.

한국보다 발달된 수산업으로 이 지역에서 당시 연간 23만 톤 이상의 어획고를 올려오던 일본으로서는 경제적 타격과 함께 영토의 위협으로 여긴 여론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또한 1월 28일에는 일본의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독도를 경계선 안에 넣은 것은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 침략이라고 주장하였다.

대한민국은 선언 이후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 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 심판소 및 고등 포획 심판소를 개설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이해 말에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 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

평화선 설정 이후 한국 정부는 동 어로저지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나포하였다. 이에 일본은 해태 등 어로장비의 대 한국 수출금지 등 보복조치를 취하였다. 한·일 조약이 체결되어 어업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평화선 문제는 한·일 양국간에 최대의 분쟁거리가 되었다. 그 후 1997년 일본은 일방적으로 직선기선을 선포해 어업중인 우리 어선을 나포하는 등 현재까지도 끊임없는 문제가 되고 있다.

1952년 2월 4일 일본어선 제1대 방 환호와 제2대 방 환호가 제주도 남쪽 해안의 평화선을 넘어 조업하다가 경찰에 적발되어 나포 도중 총격으로 제1대 방 환호의 선장 세토 준지로가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후 대한민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

1952년 5월 28일 일본 시마네현 어업 시험장 소속의 시험선 '시마네 마루'가 평화선을 넘는 일이 있었으며, 1953년 6월 27일에는 일본의 수산시험선이 독도에 정박해 상륙한 후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라고 쓰여 있는 나무 기둥을 세운 사건이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7월 18일 불법 침입하여 조업하는 외국어선을 나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일본 정부는 9월 20일 일본 어선을 보호하기 위해 해상보안청 감시선을 출동시켜 한국의 경비정과 마찰을 빚었다. 이후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장군이 개입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대한 방어와 밀수출입을 봉쇄하기 위한 '클라크 라인'이라 불리는 해상방위 수역을 선포하였는데 이는 평화선과 비슷한 형태였다. 이후 일본과의 마찰은 줄어들게 되었다.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이 성립되기 전까지 이를 위반한 328척의 일본 선박과 3,929명의 일본인이 한국에 의해 나포되었다.

1955년 12월 25일 대한민국의 해양경찰대 866정은 흑산도 서남방 근해에서 평화선을 침범 조업 중이던 중국 어선 15척을 발견하였다. 이중 1척을 나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5~6척과 총격 교전이 있었다. [4] 이때 4명의 대한민국 경찰관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중국으로 피랍되었으며 이후 12년 5개월간 수감 후 1967년 4월 22일 귀환하였다. 1960년 1월 10일 대한민국의 해양경찰대 701정은 서해 서청도 서방 62마일 해상에서 어선단을 발견하고 검문 중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2명이 순직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평화선과 이에 따른 독도문제 등에 대한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의 영토분쟁은 침략 배상 문제, 오무라 강제수용소 문제, 구보타 씨의 발언 문제와 함께 한일관계정상화에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1960년 3월 19일, 주미국 대사 양유찬은 일본 공동 통신 기자와의 회견에서 한일 간의 여러 문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일문제: 양유찬은 한국과 일본이 1960년 3월에 억류자를 상호 석방하기로 한 합의는 양국 간의 주요한 여러 가지 문제 해결에 더한 층의 진전을 약속해주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양유찬은 기타 모든 조건에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논쟁 중인 한일 간의 어로 문제의 만족할만한 조정이 회담 석상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양유찬은 어로선 문제가 토의되기 전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언명하였다.

 

1. 제2차 세계대전 전 또는 대전중에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보상문제

2. 한국으로 송환되는 재일 한교들이 재산을 반출할 수 있도록 하는 협정

3. 일본에 남아있기를 희망하는 한교들에게 강제송환의 공포를 없애기 위한 정당한 거주권의 인정

4. 한국 국보의 반환

5. 일본에 있는 한국 재산권의 해결

6. 일본에 가져간 한국 선박 7만 5천 톤의 반환

7. 한일 간의 해저 전신에 관한 문제의 해결

△ 영해 문제: 이상의 조건 수락으로 평화선 문제는 해결되나 평화 선문제와 영해 문제는 별개의 것이다.

△ 해양법 회의: 한국 정부는 해양법회의에서 미국 안을 지지하도록 대표들에게 훈령하였다. 그러나 평화 선문제는 영해 문제와는 별도로 한일 양국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양유찬은 이상 조건을 일본이 수락한다면 한일관계는 정상화되고 평화 선문제와 어로 문제는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고 동시에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어업에 관한 협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미지출처 동아일보
  • 어업에 관한 수역으로서 12해리까지는 자국의 배타적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다.
  • 한국의 관할 수역 밖의 주변에 공동규제수역을 설정하고, 이 수역에서는 주요 어업의 어선규모·어로기(漁撈期)·최고 출어 어선수·집어등(集魚燈)의 광도(光度)·총어획 기준량 등이 규제된다.
  • 공동규제수역 외연(外延)인 동경 132˚ 서쪽으로부터 북위 30˚ 이북에 공동자원조사수역을 설치한다.
  • 한·일어업공동위원회를 설치하여 어업자원의 과학적인 조사, 규제조치의 권고를 한다.
  • 한국측은 수산업협동조합중앙회, 일본측은 대일본수산회의 두 나라 민간단체로 한·일 민간어업협의회를 설치하여 조업질서의 유지와 사고처리에 관한 결정과 실무처리를 담당한다.
  • 이 어업협정은 1998년 1월에 일본 정부에 의해 일방 파기 통보되었으며 양국은 이후 새로운 교섭을 통해 신한일어업협정을 1998년 9월에 타결시켰다.

한일관계정상화에 따른 어업협정으로 13년 동안의 분쟁은 일본이 어업협력 금액으로 한국에 9천만 달러(영세어민용 4천만 달러는 정부 차관 형식, 이자는 5%. 그 외 5천만 달러는 민간차관 형식. 이자는 5.75%)를 공여키로 합의했다. 아울러 양국 간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국제사법재판소보다는 양국간 외교교섭을 통해 해결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로써 분쟁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으나 독도문제 등은 깨끗이 해결하지 못한 과제로 남게 되었다. 이는 1998년에 새로 맺은 한일어업협정에서도 마찬가지로 독도 분쟁에 대한 확실한 해결을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입장은 독도 분쟁과 한일어업협정은 별개의 사안이라는 것이다.

현재 평화선을 대체하고 있는 신한일 어업협정에서는 배타적 경제수역을 설정하고 동해와 남해상에 한일 공동관리수역을 두어 관리하도록 하였다.


2002년 - 시에라리온 내전 공식 종결.

2002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유승준 미국시민권 취득

2008년 - 삼성 특검:특검 수사팀은 성영목 신라호텔 사장을 소환하여 조사하였다.

2012년 - 미국 의회의 SOPA·PIPA 법령 제정을 반대하는 의미로 영어 위키백과, 24시간 동안 서비스 중단.

 

 

문화

 

 

탄생

1689년 - 프랑스 정치사상가 샤를 루이 드 세콩다 몽테스키외.

1889년 - 일본의 군인 이시와라 간지.

1899년 - 대한민국의 여성 운동가 김활란.

1904년 - 미국의 배우 케리 그랜트.

1906년 - 대한민국의 화가 오지호.

1925년 -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

1933년 - 미국의 물리학자이자 공학기술자 레이 돌비.

1938년 - 영국의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

1943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윤문식.

1946년 - 대한민국의 축구인 조중연.

1950년 - 대한민국의 폭력 조직 '양은이파'의 두목 조양은.

1954년 - 대한민국의 프로듀서 이호연.

1955년 - 미국의 배우이자 감독 케빈 코스트너.

1958년 - 프랑스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베르나르 젱기니.

1960년 - 영국의 배우 마크 라일런스.
 
1967년 - 칠레의 전 축구 선수 이반 사모라노.

1970년 -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장준환.

1971년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주제프 과르디올라. / 케냐의 작가 비냐방가 와이나이나.

1978년 - 대한민국의 가수 스윗 소로우의 김영우.

1979년 - 포르투갈의 축구 선수 파울루 페헤이라.

1981년 - 대한민국의 배우 강동원.

1983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아나운서 오정연. / 대한민국의 배우 정유미.

1984년 - 대한민국 국적의 미 영주권자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사건 범인 조승희.

1985년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리카르도 몬톨리보.

1994년 - 대한민국의 가수 강지영. / 대한민국의 가수 공민지.

 

사망

264년 -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 종회.

474년 -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 1세.

1862년 - 미국의 제10대 대통령 존 타일러.


1994년 - 대한민국의 목사, 재야운동가 문익환.

재야운동가 문익환 목사

문익환(1918년 6월 1일 ~ 1994년 1월 18일)은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이다. 통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며 참여시인이었다. 본관은 남평이고 호는 '늦봄'이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이 되지 않으면 민주화가 되지 않는다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신념에 따라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기독교 사상에 근거한 사회운동을 한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성서학자로도 활동하였다. 그 실례로 문익환 목사는 감리교 목사인 이현주 목사와 함께 공동번역 성서 번역에 개신교 측 번역자로 참여했으며, 구약성서를 다윗, 사무엘 등의 영웅들에게 가려진 민중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설명한 히브리 민중사, 삼민사를 저술하였다.

1994년 1월 18일 20시 20분에 향년 77세를 일기로 심장마비에 의해 별세하였다.

1918년 만주 북간도(현재의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룡정시 지산진 명동촌)에서 문재린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는 용정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윤동주, 장준하와 절친한 동무였다. 평양신학교는 근본주의적이니, 일본 신학교에서 공부하라는 부친의 권유 로 1938년 도쿄의 일본 신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신학교 입학 시 문익환은 신학적인 갈등을 겪는다. 당시 일본 신학교에서는 성서 비평학이 활발했는데, 축 자영 감설을 믿고 있던 문익환에게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여 해석하려는 성서 비평학은 받아들이기 힘든 학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 익숙하던 문익환 목사는 성서를 학문적으로 비평하고 해석하는 성서 비평학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경청하지 못하면 학문을 할 자격이 없다"라는 교수의 충고로 문익환은 성서 비평학을 학문으로 존중하게 되었다. [3] 1947년에 한국신학대학교(현재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신학대학교와 연세대학교에서 구약 성서학을 강의하였으며, 구약성서를 민중의 입장에서 해석한 히브리 민중사(삼민사)를 쓰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번역 성서 번역사업에 개신교 대표로 참여하였다. 문익환 목사가 공동번역 성서 번역에 참여한 이유는 당시 개역한글판의 단어와 문체가 한자를 모르는 독자들이 읽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데 있었다. 실례로 솔로몬 왕의 성전건축을 기록한 개역한글판 성경전서 역대하 2장 4절을 읽어보면, 매우 어렵게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여 구별하여 드리고, 주 앞에서 향 재료를 사르며 항상 떡을 진설하며, 안식일과 초하루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에 조석으로 번제를 드리려 하니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 니이다.
그래서 문익환은 공동번역 성서 번역에 동참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현대어 성서를 만들고자 하였다.실례로 공동번역성서 역대하 2장 4절을 읽어보면 앞에서 인용한 개역한글판 문장에 비해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본인은 본인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모실 집을 지어 바치려고 합니다. 거기에서 분향제를 올리고 거르지 않고 제사상을 차려 올리며, 아침저녁으로 번제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또 안식일과 매달 초하루와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정해 주신 절기마다 번제를 드리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은 언제까지나 이렇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친구이자 사회운동가인 장준하의 의문사를 계기로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다. 1970년대~1980년대 국민들을 군대의 힘으로 억압하는 군부독재정권에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1978년)하는 등 여러 차례 저항하여 수차례 투옥되었다.

1978년 윤보선은 일본에 체류 중인 정경모를 통해 국민연합 일본지부를 세우려 할 때, 문익환은 '아직도 그의 사상을 믿을 수 없다'라며 반대해버렸다. 스승 김재준 목사가 정경모를 강력히 추천했을 때도 문익환은 그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그의 강력한 반대로 국민연합 일본지부 결성은 무산되었다.

정경모는 일본으로 건너간 후 한민통의 신문 편집장을 했는데, 문익환은 그가 조총련 신문 편집장을 하고 있다고 오해했던 까닭에 이를 극렬 반대했던 것이다. 후에 문익환이 '도쿄에서 만난 그리운 아우 정경모'를 사상적으로 의심하지 않고 다시 흉금을 터놓은 관계로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은 정경모의 저서 찢긴 산하 때문이었다. 79년 10월 유신 정권 붕괴 이후 문익환은 한동안 강경투쟁 노선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재야 민주세력 결집체인 1985년 3월 29일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86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5월제에서 연설하던 중 이동수 학생의 분신 투신으로 구속되었다가 1987년 7월 8일 형 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군사독재정권이 붕괴되자 문익환 목사는 다시 통일운동을 개시하였다.

1989년 통일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는 당시 진보 기독교인들의 인식에 따라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 회담하고 귀국하였으나,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으며 평양 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 정부를 일방적으로 비방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 잠입죄’로 투옥되어 1990년 10월 20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후 공안정국을 조성한 정부에 의해 1991년 6월 6일 재수감되었다. 이후 1993년 초 석방된다.

이후, 활발한 통일운동과 강연 활동을 벌이던 중, 1994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당시 시인 고은이 세수하다가 갑작스레 문익환 목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놀라서 면도기를 떨어뜨렸다는 추모시를 한겨레 신문에 기고하는 등, 문익환 목사를 존경하는 지식인들의 추모가 이어졌다. 부인으로 박용길 장로, 형제로 역시 재야운동가인 문동환 목사, 아들로서 극작가 문호근과 배우 문성근이 있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이 수여되었다. 2002년에는 사회, 통일 운동에 대한 업적이 인정되어 서남동, 안병무와 함께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2007년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임옥상 화백이 제작, (사)통일맞이가 기증한 시비가 건립되었다.

1990년대 초부터 범민련의 운영을 두고서 문 목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과의 갈등이 확대되었다. 문 목사는 대한민국 현실에 맞는 통일운동을 추구해왔으나, 범민련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이적단체로 낙인찍혀 강한 탄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또한 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준비 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이 범민련을 대남공작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의혹이 짙어지면서, 문 목사의 범민련에 대한 회의가 깊어졌다고 한다. 문 목사는 이러한 한계와 종속성을 타개하기 위해 범민련의 틀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한민국 정부와도 협력할 수 있는 새로운 독자 통일운동 조직인 '민족회의'를 만든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북한은 백인준 범민련 북측본부 의장의 명의로 ‘문 목사가 안기부의 사주를 받아 범민련을 해체하려는 책동을 펴고 있는데 이를 거부하고 범민련을 지켜야 한다'라는 팩스를 보냈다. 이 팩스 내용이 남측 통일운동가 진영에 유출되면서 문 목사는 '안기부의 프락치'로 몰리면서 격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문 목사와 함께 방북하여 투옥되었던 문인 황석영, 당시 문 목사의 실질적인 비서 역할을 하던 국회의원 하태경 등 복수의 인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로 인해 문 목사는 사망 전일인 1994년 1월 17일에 점심 식사 자리에서 모 인사와 언쟁을 벌이다가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가 실신하고 말았다. 결국 문 목사는 이날 오후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으며 이튿날인 1월 18일에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문 목사의 차남인 문성근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인터뷰에서 "남북관계 개선이나 통일 방향에 대한 방법론에 이견이 있었던 건 사실"이라고 인정하였으나, 문 목사가 사망하게 된 경과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맞고 부분적으로 틀리다"라고 하였다.

1990년 8월 15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조국통일상
2002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2년에 미국 친우 봉사회가 문익환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AFSC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래로,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규정에 따라, 해마다 후보를 추천해오고 있다.



2016년 - 미국의 가수 글렌 프라이.

2016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 황규봉 .

2017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정미경.

2018년 - 미국의 연쇄 살인자 앤서니 앨런 쇼어.

 

기념일

태국군의 날(วันกองทัพไทย; Royal Thai Armed Forces Day): 나레수안 대왕이 1593년 버마군을 무찌른 농사라이 전투(Battle of Nong Sa Rai)를 기념하는 날, 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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