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20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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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60년 - 존 F. 케네디가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미국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존 피츠제럴드 "잭" 케네디(영어: John Fitzgerald "Jack" Kennedy, 1917년 5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또는 약어로 JFK는 미국의 제35대 대통령이다. 1961년부터 1963년에 암살당하기까지 겨우 3년 가까이 대통령직에 있었지만 미국의 자유주의에 대한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남태평양에서 PT-109 고속 어뢰정의 해군 장교로 근무했고,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하원의원으로, 1953년부터 1960년까지 상원의원으로 미 의회에 있었으며,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케네디는 대통령직에 1961년 1월 20일부터 1963년 11월 22일까지 있었고, 임기 동안에 피그스만 침공, 쿠바 미사일 위기, 베를린 장벽, 우주 경쟁, 베트남 전쟁 간접 개입, 흑인 인권 운동 등 많은 일이 일어났었다.

다만, 케네디는 미국 대통령 중에서 유일한 로마가톨릭교 신자라는 점과, 상류사회에서 잉글랜드계 혈통에 밀리던 아일랜드계 혈통 때문에 기독교 근본주의를 내세운 개신교 세력의 반발과 논쟁을 불러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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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식을 올리는 케네디

유럽에서의 베를린 위기와 카리브 해에서의 쿠바 미사일 위기가 그에게 부담이 되었으나 극복하였으며, 핵 실험 금지 조약을 성사시켰다.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케네디가 행한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주장한 새로운 개척자 정신을 말한다. 1961년 4월 입법부 의원들은 경제적으로 불황적인 지역들에 원조를 찬성하였다. 5월에 의회는 1시간 당의 임금을 1 달러에서 1 달러 25 센트로 증대하는 데 찬성하였다. 1962년 9월 의회는 케네디의 무역 확장 결의서를 통과시켰다. 결의서는 대통령에게 관세를 삭감하는 데 넓은 권력을 주어 미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 국가들과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케네디의 가장 성공적인 프로그램들 중의 하나는 미국 평화 봉사단이었다. 1961년 3월 행정적 명령에 의하여 착수되었고, 후에 의회에 의하여 공인되었다. 평화 봉사단은 개발도상국들에 수천 명의 미국인들을 보내어 그들의 생활 기준들을 늘였다.

케네디는 또한 주요 입법상 패배를 만나기도 하였다. 의회는 내각 수준의 도시 문제부와 연령자들을 위한 의료 계획을 거절하였다. 2개의 계획은 후에 린든 B. 존슨의 대통령 입기 때에 통과되었다. 케네디의 농장 프로그램도 또한 패배를 겪었다.

재래식 병기의 증가에 의하여 국가의 국방 정책들을 인정하였으며, 비핵무기 전쟁들을 준비하고 핵무기 사용을 피하는 모든 노력들을 만들기를 원하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주장들은 케네디 정권 도중의 주요 국내적 논점이 되었다. 1961년 지방의 분리적 법률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흑백인들을 포함한 비폭력적 단체 "자유의 기수"는 버스를 타고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들어갔다. 백인 폭동자들이 그들을 공격하자, 당시 로버트 케네디 법무 장관은 명령을 복구하는 도움을 주기 위하여 도시에 연방 보안관들을 보냈다. 1962년 수많은 반대에 불구하고 제임스 메러디스는 미시시피 대학교에 처음으로 등록된 흑인 학생이 되었다.

1963년 동등한 인권과 경제적 권리들을 위한 흑인들의 주장들이 증가하였다. 미국 전역을 통하여 인종적 항의와 데모들이 일어났다. 5월에 버밍햄에서 폭동이 일어나자, 다음 달에 케네디는 앨라배마 대학교에 흑백인의 공동 입학을 집행하도록 앨라배마 주군을 연방화하였다. 9월에는 앨라배마 주의 3개의 도시들에서 학교들의 공동 입학을 보증하기 위하여 다시 주군을 연방화하였다. 8월 28일에는 워싱턴 D.C. 에서 흑인들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요구를 데모하기 위하여 200,000명의 사람들이 "자유의 행렬"을 결성하였다.

흑인들의 주장들의 증가를 만나면서 케네디는 인종에 상관없이 공공장소들에 손님들을 허락하는 데 입법을 통과시키기를 의회에 청하였다.

1961년 4월 17일 망명한 쿠바인 반란군들이 쿠바혁명으로 수립된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자기들의 모국을 침공하였다. 폭력은 큰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케네디는 미국에 의하여 계획된 불행한 침입을 위한 책임을 받아들였다.

소비에트 연방이 쿠바에 미사일을 세우는 것을 미국이 알아내자 1962년 10월에 또 다른 위기들이 일어났다. 케네디는 해군에게 쿠바를 봉쇄하는 명령을 내렸다. 군함들은 쿠바에 소비에트 연방의 미사일을 배달하는 배들을 돌려보내는 데 명령을 받았다. 또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대략 14,000명의 공군 예비병들을 부르기도 하였다.

1주 동안 전쟁은 좋아보였다. 그러고 나서 니키타 흐루쇼프 소비에트 연방 총리는 모든 소비에트 공세 미사일들을 이동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케네디는 검역소를 들어 올렸다.

1963년 6월 26일 서베를린을 방문하여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베를린 장벽 설치를 공산주의의 실패의 증거로 삼으며 이렇게 말했다.

“ 모든 자유인은 그들이 어디에 있건 베를린 시민이라 할 수 있으므로 저 또한 자유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베를린 사람입니다(독일어: Ich bin ein Berliner.).'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
서베를린 시민의 5/6이 거리에 나왔으며 케네디 자신도 놀랐다고 하였다.

1961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흐루쇼프와 회담하면서 베를린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위기만 더욱 깊어졌다. 미·소 양국은 군사력을 증가시켰다. 8월에 동독인들은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시민들을 막기 위하여 동·서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세웠다. 케네디는 미국의 군사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주군들과 예비군들을 약 145,000명이나 동원하였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는 부인 재클린 부비에르와 존슨 부통령 부부와 함께 자신의 재선을 위하여 계획 세운 1964년 대통령 선거 운동 전에 텍사스주의 민주당 회의에서 갈라짐을 고치기 위하여 댈러스에 내려왔는 데 리무진에 타고 있던 중 리 하비 오스월드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향년 46세.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세계 92개국의 국가원수와 사절단들이 참석하였다. 대통령직은 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이 승계했다.

뉴욕 아일드와일드 국제공항의 명칭이 이 사건을 추념하여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으로 바뀌었다.

1962년 4월 30일 백악관 노벨상 수상자 축하 만찬에서 이루어진 펄 벅과의 아시아 문제에 관한 짧은 대화에서 케네디는 "내 생각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할 것 같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요. 우리는 빠져나오고 대신에 옛날처럼 일본이 한국을 통제하게 해야 할 것 같소"라는 발언을 했고, 펄 벅은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일각에서는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후에는 아예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고 한국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몰락하도록 내버려 둘 것을 신중히 고려했으나, 북한은 눈에 띄는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는데 비해 남한이 뒤처지고 있어 케네디는 할 수 없이 한국에 계속 원조를 했다는 주장도 있다.

케네디의 사후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알려진 그의 여러 업적들도 다시 평가받는 분위기다.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이 미국 근해에 공산정부(쿠바)를 유지시키고 장기 군비 확장을 자극한 사건으로, 베트남전 역시 과거에는 미국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베트남 철수를 지시한 지도자의 이미지였으나, 최근 비밀 해제된 자료에 의하면 정치적 목적에 의해 베트남전을 확대시켰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미국의 역사기술이 '성공의 기록'에서 '미국도 잘못이 있고 결점이 있다, 그의 결점 역시 인정해야 한다'라는 수정주의로 돌아선 영향이 있다.

당시 미국 정부는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연방준비은행에서 지폐를 발행해왔고, 현재까지도 운영되어오고 있다. 이 은행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승인한 7명의 이사들로 구성된 이사회를 바탕으로 하나, 소수의 국제 민간금융업자들 소유의 사설은행이었고 현재까지 정부로부터 철저한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 케네디는 국가재정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헌법상의 조폐권(지폐를 발행하는 권리)을 가진 새 국립중앙은행으로 교체하려 했지만 서거 후 이 정책은 무산되었다.

트리비아
링컨과의 연관성
이 부분의 본문은 링컨과 케네디의 공통점입니다.
존 F. 케네디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과 일치하는 점이 많으며 다음은 공통점의 일부이다.

두 대통령 모두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는 점.
두 대통령을 암살한 범인은 재판 없이 의문사를 당했다는 점.
그의 부인은 백악관에서 자식을 잃었다는 점.
두 대통령이 하원의원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46년과 1946년이라는 점.
두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때와 취임한 때가 1861년과 1961년이라는 점.
두 대통령 모두 테쿰세의 저주를 당했다는 점.
그의 후계자의 성이 존슨이라는 점 - 앤드루와 린든 B(두 대통령이 민주당 소속).
그 두 후계자 존슨은 100년 차이라는 점 - 1808년생과 1908년생.
그의 부인은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다는 점 - 메리 토드와 재클린 부비에르
두 대통령 모두 흑인들을 위해 애를 썼던 점 - 노예 해방과 인권 운동.
로버트와 에드워드란 친족이 있었다는 점 - 케네디의 동생들과 링컨의 아들들.
두 대통령의 초상화가 모두 미국의 동전에 그려진 점.
링컨 대통령은 포드 극장에서, 케네디 대통령은 포드 자동차 회사에서 만든 링컨 컨티넨탈 차를 타고 가다가 암살당했다는 점.



1974년 - F-16 파이팅 팰콘이 첫 비행(비공식)에 성공하다.

1993년 - 빌 클린턴이 미국의 제4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1997년 - 신창원이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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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申昌源, 1967년 5월 28일 ~ )은 대한민국의 수감자로, 1997년 탈옥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한민국에서 범죄자의 예로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체포 당시 입었던 화려한 빛깔의 쫄티가 유행하기도 했다.

출생 이후 신창원이 어렸을 때 지독한 가난도 고통이었지만, 모친이 간암으로 사망하는 등 매우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였다. 만약 아버지가 사랑해주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엇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을 속였다는 이유로 신창원을 때렸고, 나중에는 계모까지 들어왔다. 계모는 신창원의 동생이 아픈데도 아무 관심도 없었다. 학교에서는 급우들로부터 잦은 따돌림과 괴롭힘에 시달렸으며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하였고 그래서 국민학교 시절부터 가출을 시작했고, 중학교에 진학한 지 3달 만에 퇴학당했다.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급우들로부터 잦은 따돌림과 괴롭힘에 시달려 불과 3개월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 1982년에 절도죄로 소년원에 들어갔다. 신창원의 친아버지 신흥선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찰에게 신창원을 구속 수감시키라고 계속 요구했다. 이는 아들 신창원이 소년원에 가서 새 사람이 되길 갈망하였기 때문이었으나, 신창원은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반항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신창원은 출소 뒤에 서울로 올라갔다. 음식점 배달부 등을 하다 1983년 절도죄로 또다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1989년 공범 3명과 함께, 서울 돈암동 정모 씨 집에서 강도행위를 하다 공범 중 하나가 정 씨를 죽여 강도 치사죄로 수배를 받았고 9월 검거되었다. 검거 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후 1994년 부산교도소에 이감되었다.

1997년 1월 20일 부산교도소의 화장실 쇠창살을 쇠톱 날로 절단하고 탈출하였다. 이후 약 2년 동안, 전국을 오가며 약 9억 8000여만 원을 훔쳤고, 훔친 돈으로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을 유혹해 동거하며 아지트로 삼았다. 그러나, 동거할 곳이 없을 때는 토굴 등에서 생활하며 쥐고기로 연명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경찰의 추격에 쫓기는 중 신창원의 담당 형사인 원종열 경장이 쏜 총에 맞아 부상당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추격을 끝내 따돌려 신창원은 자신의 초인적인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경찰은 신창원의 검거를 위해 헬리콥터를 띄우고 전경을 동원했으나 번번이 속수무책이었으며 열세 번을 눈앞에서 놓쳐 많은 경찰관들이 이에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99년 7월 16일, 신창원이 숨어있던 전남 순천의 아파트에서 가스레인지 수리를 의뢰받은 수리공의 제보를 받은 경찰에게 검거되었고 2년 6개월간의 탈옥 생활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이후 당시 수사과장 김진희는 제63대 광주 동부경찰서장으로 부임, 신고한 수리공은 경찰 특채되었다. 국내 여성 경찰공무원 최초 강력계장으로 임명된 박미옥 경감도 당시 특별검거팀 소속으로 활약하였다. 그 밖에도 1998년 5월 대구 목련아파트 203동 405호로 몸을 숨긴 바가 있다.

재검거 이후에 22년 6개월 형을 추가로 선고받았으며, 현재 교도소에서 모범적인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수감 중에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연이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신창원이 이태원 햄버거 가게에서 사람을 죽인 아서 패터슨보다 무거운 형을 받은 이유는 아서 패터슨은 범행 당시에 미성년자였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 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하고 머리 한 번만 쓸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5학년 때 선생님이 '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 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하고 소리쳤는데 그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
신창원 907일의 고백 중

2009년 9월 29일에 대구 고등법원에 따르면 신창원은 지난 7월 작성한 서신 12통의 발송이 허락되지 않자 지난달 경북 청송 3 교도소장을 상대로 서신 발송 불허처분 취소와 손해배상금 300만 원의 지급을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신창원은 소장 작성 매뉴얼에 어긋남이 없이 모든 소장을 직접 작성했다. 정보 비공개 처분 취소 행정소송의 소장 등은 A4 용지 7장 분량으로 정보 비공개 처분(처분 경위. 위법, 관계법령, 소결)과 서신 수. 발신 불허처분(처분 경위. 위법), 손해배상 책임 발생, 결론 등의 기본요건을 갖췄다.

또한 신창원은 2010년 4월 1일 교도소에서 기자의 접견을 막고 편지를 외부로 보내주지 않아 피해를 봤다는 소송을 내어 승소하여 100만 원의 배상을 받았다.

2011년 8월 18일 신창원은 자신의 감방에서 자살을 기도했고 중태 상태에 빠졌다. 현재 복역 중인 경북 북부 제1교도소에 따르면, 특이한 가혹행위 등은 없었고 지난 7월 부친이 사망한 것에 대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이로써 신창원은 지난해 6월 흉악범만 수용된 중경비시설인 제2교도소에서 제1교도소로 이감된 지 1여 년 만에 자살기도로 물의를 일으킨 셈이 됐다. 제2교도소는 특별관리가 필요한 아동 성폭행범 등 흉악범죄자와 문제 수형자만 분리 수용하는 국내 유일의 중경비 시설이다. 당시 신창원은 제1교도소에서 모범적인 수형생활로 일반 교도소로 이감된 바 있다.



2000년 - 새정치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이름을 변경하다.

2001년 -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제4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2008년 - 삼성 특검:특검 수사팀은 윤형모 삼성화재해상보험 부사장과 이실 삼성전자 부사장 등 임원 2명을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해 조사하였다.

2009년 -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2009년 - 용산 4구역 남일당 화재 사건이 일어나다.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또는 용산 참사로 불리는 이 사건은 2009년 1월 20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세입자와 전국 철거민연합회(이하 전철연) 회원들, 경찰, 용역 직원들 간의 충돌이 벌어지는 가운데 발생한 화재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세입자 2명, 전철연 회원 2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경찰 16명, 농성자 7명)을 입었다. 사고 당시의 폭력 문제, 용역 직원, 안전 대책, 과잉 진압 여부 등에 대한 논란과 함께 검찰의 수사가 이어졌고, 홍보 지침, 왜곡 시도 등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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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월 19일 오전 5시 33분 용산 4구역 철거민과 전국 철거민 연합회 회원 등 약 30여 명이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4층짜리 남일당 상가 건물 옥상을 점거하였으며, 경찰은 경비 병력으로 3개 중대 300여 명을 투입하였다. 검찰의 공소사실에 따르면, 철거민들은 옥상 건물 위에 망루를 짓고 충분한 양의 가연성 물질인 시너를 바닥과 옥상에 준비하였고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철거반에 저항하였으며, 경찰은 물대포를 쏘며 맞섰다. 철거민들은 서울시가 최소한의 보상도 없이 철거를 밀어붙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1월 20일 오전 1시 22분,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농성장 옆 상가 건물 가림막에 화재가 났으나 40분 만에 진화되었고, 오전 6시 12분에 경찰은 철거민들에게 물대포 살수를 시작하였다. 6시 45분, 경찰은 건물의 옥상에서 농성하던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컨테이너에 경찰특공대를 태워 옥상으로 올려 보냈으며, 7시에 컨테이너가 옥상으로 올라가자 본격적인 진압이 시작되었다. 7시 20분에 특공대를 실은 두 번째 크레인이 올라가자 3층과 5층에서 불이 났고, 옥상에 있던 망루에도 불길이 번졌다. 7시 30분에서 40분 사이, 5층에서 3명이 불을 피해 창문가로 이동했다. 7시 45분에는 불이 붙은 망루가 무너졌고, 8시 30분에 소방관들이 옥상에 올라가 망루를 해체하였다. 11시 45분 경찰은 망루를 수색하여 사망자 5명(세입자 2명, 전철연 회원 2명, 경찰특공대 대원 1명)을 발견했으며, 23명(경찰 16명, 농성자 7명) 이 부상했다고 발표하였다. 12시 20분 농성자 시신 1구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서울시는 도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용산 4구역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삼성물산, 대림산업, 포스코건설을 시공업체로 지정해(대표업체는 삼성물산) 강제철거 등의 작업계획을 관리하도록 승인한다. 용산4구역 재개발 사업은 한강로 3가 63∼70번지 일대 5만 3442m² 를 도시환경정비 차원에서 재개발하는 사업이다. 이 사업으로 40층 규모 주상복합 아파트 6개 동(493가구, 평형은 164∼312m2)이 들어서게 된다.

상인들은 재개발로 인해 주변 땅값이 많이 올라 장사가 힘들어졌다. 그리고 도시정비사업 관련 법률은 도시개발법과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도시 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 토지보상법 등으로 다종 다양하여 법률 간에 일관되지 않는 점도 있었고, 행정적인 판단을 하기에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되어 있는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법 체계의 틈으로 공공연한 불법행위가 저질러졌다. 재개발조합(토지 및 건물 소유자)측은 토지보상법에 규정된 주거이전비가 너무 적다며 반발해 시위를 해온 세입자들(약 100여 명)을 강제로 철수시키는 과정에서 물의를 일으켰다.

인명 참사로 이어진 서울 용산 재개발 철거민들의 건물 옥상 농성은 철거민과 조합 간 보상비 갈등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서울시와 용산구에 따르면 재개발조합 측은 세입자에게 법적으로 규정된 휴업보상비 3개월분과 주거이전비 4개월분을 지급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부 세입자는 조합이 주는 보상비로는 생계와 주거를 이어갈 수 없다는 입장이다. 상가 세입자들은 "지금껏 충분하지는 않지만 먹고살 만했는데, 조합이 주는 보상비는 턱없이 적다"며 "철거하면 당장 생계를 이을 수 없으니 대체 상가를 마련하는 등 대책을 세워 달라"라고 요구하였다. 사건 발생 전에 세입자 890명 중 85.7%(763명)의 보상은 완료되었다. 철거도 80%가량 이뤄졌으나 일부 상인과 주거 세입자 중 100여 명이 2007년부터 보상비에 반발해 시위해 왔다.

철거민들이 적극적인 수단을 동원한 것은 겨울철 강제철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해당 구역은 2008년 11월부터 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거처 마련이 어려운 상황에서 겨울철 철거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서울시에도 겨울철 강제철거를 금지하는 행정지침이 있지만 처벌규정이 없어, 실제로 지켜지지 않으며 법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애초 진압계획에는 유류화재 진압을 위한 화학소방차가 필요하다고 되어 있었는데, 용산경찰서에서는 이를 제외하였다. 경찰은 대량의 인화 물질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1차 진입 당시에도 화재가 발생했다. 이것으로 대형 화재의 위험성이 예견되었는데, 안전조치 없이 2차 진입을 강행하여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는 견해가 있다.

검찰은 경찰이 진압 준비단계에서 유류화재에 대비하여 소방서에 소화 물질을 요청했지만 마땅한 소화(消化) 약제가 없다는 이유로 소방대 비책이 없는 상황에서 진압을 시작했으며, 소방장비를 갖췄더라도 참사를 막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사 사건 수사 중인 검찰이 경찰특공대의 진압 직전, 건물을 무단 점거하고 있던 한 농성자가 망루 계단에 인화물질로 추정되는 액체를 뿌렸다는 단서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월 27일 검찰 수사본부 관계자는 "망루 안에 있던 농성자가 경찰특공대 2차 진입 직전에 망루 2, 3층의 계단에 액체를 뿌리는 장면이 촬영된 동영상을 확보했다"라고 언론에 밝혔다. 그는 '아직 망루 화재의 발화 지점이나 직접적인 화인은 확인되지 않았'고, '계단에 뿌려진 액체가 화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이 물질의 정체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2009년 9월 30일 공판에 증인으로 나온 경찰특공대원은 "진압 당시 화염병 던지는 것은 본 적이 없으며,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들린 뒤 불이 올라 화염병으로 생각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한편 화재 전문가들은, 검찰의 공소사실처럼 인화성 물질의 유증이 꽉 차 있었다면, 옷깃이 스칠 때 발생하는 정전기만으로도 불이 붙을 수 있다고 증언했다. 그밖에 진입 과정에서 시너통이 넘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재판부는 "농성자들이 망루로 진입한 경찰 특공대원에게 던진 화염병의 불이 인화물질의 유증기에 옮겨 붙어 화재가 발생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사건 직후 용산경찰서는, 농성자들이 1월 19일부터 시위용품을 사용하였고 그로 인한 피해는 다음과 같았다고 밝혔다.

º 화염병 투척 : 농성 건물 옆 건물 상가, 공가(1층 단독)에 화재 발생.
º 새총으로 유리구슬 발사 : 차량 파손, 경찰 채증요원 가슴 타박상.
검찰 발표에 따르면, 농성자들은 화염병 400개, 염산병 40여 개, 쇠파이프 250여 개, 골프공 1만 개, 새총 20개, 1톤이 넘는 시너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1월 28일 오전 경찰청은 본 사건과 관련하여 여론 조사 참여를 독려하라는 지시를 하였고, 광주경찰청은 산하 경찰서 직원들에게 '용산 사건 관련 인터넷 여론조사 적극 참여 요망: MBC 100분 토론 시청자 투표'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여론 조작 논란이 일었고, 부적절한 처사였다는 지적이 있었다. 100분 토론 인터넷 설문 '용산 참사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의 결과는 '경찰의 과잉진압' 48%(19222명), '불법 과격시위' 45%(18049명), 재개발 사업의 구조적 문제 7%(2845명)로 집계됐다.

2009년 2월 3일 청와대 국민소통 비서관실 행정관 이성호는 경찰청 홍보담당관에게 용산 참사를 무마시키기 위해 경기 서남부 지역 연쇄 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는 이메일을 보내 문제가 되었다. 처음 민주당 국회의원 김유정이 이 사실을 폭로하였을 때 경찰과 청와대 모두 이메일에 대해 부인하였으나 결국은 이메일을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청와대 측은 이를 이성호의 개인적인 행동이라고 발표했다.

용산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 연쇄살인사건'의 수사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랍니다. … 예를 들면 ▲연쇄살인 사건 담당 형사 인터뷰 ▲증거물 사진 등 추가 정보 공개 ▲드라마 CSI와 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비교 … 용산 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
— 청와대 행정관 이메일

검찰은 1월 28일에 병원에 있던 철거민대책위원회 위원장 이충연을 구속했다. 당시 이충연은 농성 진압과정에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검찰이 구속한 것에 대해 지나치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검찰은 2009년 2월 9일 용산 참사의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경찰에 형사책임을 전혀 묻지 않는 반면, 건물 점거농성을 벌인 농성자 20명(5명 구속, 15명 불구속)과 불법행위를 저지른 용역업체 직원 7명 등 27명을 기소했다.

당시 망루에 불을 내 경찰관을 숨지게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4명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하지만 3월 26일 열린 공판준비기일에서 증인 숫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국민참여재판 신청은 기각되었다. 이에 대해 변호인 측은 검찰이 중복적으로 증인을 신청해 국민참여재판을 방해했고 재판부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며 반발하고 있다. 한편 철거민을 내보내려고 연기를 피운 혐의로 기소된 용역업체 직원들은 자신들이 업무 집행과정상의 정당한 행위를 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재판부는 사안 자체가 별거 아니라며 재판을 가급적 신속히 진행하자는 주문을 변호인에게 해 중립성 논란이 일고 있다.

2월 8일 용산참사 변호인단은 수사기록 열람과 등사를 신청했지만, 2월 18일 검찰은 열람, 등사를 거부했다. 변호인단은 이에 대해 피고인이나 변호인은 검사에게 공소 제기된 사건에 관한 서류 또는 물건의 목록과 증거에 대한 열람과 등사를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266조를 들어 검찰의 재판 방해 의혹을 제기했다. 검찰은 형소법 제266조의 3 제2항을 들어 검찰은 공범 5명의 수사가 진행 중이고, 이들이 수사기록을 열람하게 되면 "관련 사건의 수사에 장애를 가져올 우려"가 있어 수사 종료 시까지 열람, 등사를 제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약 두 달 뒤인 4월 17일 준비기일까지 검찰은 1만 쪽에 달하는 수사 기록 중 경찰 핵심 지휘관들의 진술조서 등이 포함된 3천여 쪽을 변호인에게 공개하지 않았고, 변호인은 이에 대해 재판부에 증거물 압수를 신청했다. 검찰 측은 이에 대해 "사건과 직접 관계가 없거나 정치적 사안이라 재판 진행을 오히려 지연시킬 수 있어 거부한 것"이라고 맞섰다.

4월 22일 첫 공판에서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에서 검찰이 법원의 열람·등사 결정에 불복하면 그에 대한 불이익으로 관련 증인이나 서류를 증거 신청을 하지 못하게 하는 만큼 이에 따라 처리할 계획"이라며 압수 신청을 거부했다. 5월 1일 3차 공판은 변호인단이 수사기록의 전면 공개될 때까지 공판이 중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기일 변경을 신청해 5월 6일로 연기되었으며, 5월 6일에도 변호인단은 재판 중지를 재차 요청하였으나 거부되자 변론을 맡지 않겠다고 말했다. 결국 5월 8일 재판부는 국선 변호인이 피고인들의 변호를 맡도록 했다.

2010년, 고등법원은 변호인단이 별도로 신청한 재정신청 심리 중 변호인단의 수사기록 열람등사신청에 대해서 인정하는 처분을 함으로써 수사기록을 공개하였다. 이에 검찰은 재정신청 제도의 밀행성과 비공개주의 원칙을 위반하였다면서 재판부에 대해서 기피신청과 함께 열람등사 처분의 취소를 담은 재항고를 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재판부의 변경을 이유로 기피신청을 기각했고 열람등사 처분에 대해서도 이는 재항고 대상이 아닌 재판장의 처분에 불과하다면서 기각하였다.

철거민 9명은 이에 반발해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으나 6월 2일 법원은 열람, 등사가 이뤄질 때까지 공판절차를 중지시키지 않는다고 재판부가 불공평한 재판을 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며 신청을 기각했다. 철거민들은 이에 고등법원에 항고했으나, 고등법원 역시 6월 22일 항고를 기각했다.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등 야당은 2009년 2월 1일, 서울 명동을 행진하며 이명박 정부를 규탄했다.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홍준표는 야당에서 용산 사고를 이용한 정치 공세에 몰두한다는 비판을 했는가 하면, 이회창은 경찰청장(당시 내정자) 김석기의 사퇴를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 속에 결국 김석기 청장은 2월 10일 사고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며 사퇴의사를 밝혔다.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1월 20일 자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 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

이 사건 수사를 지휘한 천성관 서울 중앙지검장은 6월 21일 검찰총장에 내정됐다. 그러나 천성관 검찰총장 내정자는 인사청문회에서 각종 의혹으로 인해 낙마하고 검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서울지방경찰청 경찰특공대는 7월 2일 10시 30분부터 1시간 30분 동안 주상용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경찰간부 1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진행된 종합전술훈련 시범에서 용산 철거 현장 화재 사건 당시 작전을 그대로 재연하는 훈련을 해 논란이 됐다. 2010년 1월 5일 오후 용산참사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는 서울시 용산구 한강로 남일당에서 장례위원회를 발족하고 9일 서울 시내에서 열릴 철거민 희생자 5명의 장례식을 범국민장으로 치렀다. 범국민장은 장례식 당일 오전 9시 발인식을 시작으로 운구가 퇴계로를 거쳐 영결식장인 서울역 광장에 도착하는 방식으로 치러졌다. 이어 오후 2시 행진을 시작해 오후 3시 노제 장소인 용산참사 현장으로 이동했다. 장례 기간은 9일까지 5일간이었으며, 고(故) 전태일 열사가 묻힌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 공원에 안장됐다. 이강실, 조희주 범대위 공동대표가 상임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범대위는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장례를 치르게 된 것은 오로지 국민 여러분 덕택"이라면서 "시민 장례위원으로 참여하고 용산참사 현장 분향소와 각 지역에 설치된 분향소를 조문해 달라"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 작전 관련 진상 규명이 미진하고, 국가 공권력 희생에 의한 국가배상이 아닌 조합 차원의 장례비용 지급에 불과한 정도로 일이 해결되어 논란거리가 됐다.



2011년 - 대한민국 대법원이 조봉암 간첩 혐의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2017년 -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문화

1939년 - 낙랑 고분이 발견됨.

1985년 - 상파울루 구아룰류스 국제공항 개항.

2005년 -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천안역까지 연장 개통되다.

2016년 - 호남고속도로 북광산 나들목 구간이 개통되었다.

 

탄생

1029년 - 셀주크 제국의 제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

1716년 -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3세.

1775년 - 프랑스의 물리학자 앙드레마리 앙페르.

1824년 - 남북 전쟁 당시 남군에서 활약한 미국의 군인 스톤월 잭슨.

1855년 - 프랑스의 작곡가 에르네스트 쇼송.

1860년 - 구한말의 의병장 김복한.


1896년 - 일제 강점기의 페미니스트 작가, 언론인 김명순

김명순(1896년 1월 20일 ~ 1951년 6월 22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작가, 소설가, 시인이며, 언론인, 영화배우, 연극배우였다. 1917년 잡지 청춘 지의 현상 소설 모집에 단편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1919년 일본 유학, 도쿄에 체류 중 전영택의 소개로 창조지의 동인으로도 참여했다. 일본 유학 시절의 자유로운 연애 활동으로 화제가 되었으며, 이광수, 김일엽, 나혜석, 허정숙 등과 함께 자유 연애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그에 대한 연구에서 그는 '자유연애'를 주창하기보다는 차라리 성적으로 보수적이었으며 여성에 대한 과도한 억압과 편견이 내재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한 오해와 난무한 유언비어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1927년 영화 '광랑'의 주연으로 캐스팅된 이후 '아름다운 시절', '꽃장사' 등 몇 편의 영화에도 출연하였다. 1925년 '생명의 과실'이라는 시집을 간행한 한국 최초의 여성 시인이며, 그 외에 많은 산문과 희곡 및 극본을 남기기도 했다. 근대 신문학의 대표적 문인의 한 사람으로, 여성 해방을 부르짖은 선구자적 구실을 하였으며,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현실적이고도 치밀하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칼럼니스트와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다. 개인적인 생활고와 사랑의 실패, 여성 해방론에 대한 사회의 반발과 공격 등으로 인해 불우한 삶을 살다가 일본 도쿄의 아오야마 뇌병원에서 사망했다. 김동인의 소설 김연 실전의 모델이기도 하다. 초명은 탄실, 자는 기정, 호는 탄실, 망양초, 필명은 탄실, 망양초, 망양 생이다.


192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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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1860년 8월 15일~1920년 4월 7일)은 대한제국과 러시아 제국의 항일 독립운동가 겸 군인이다. 일명 최재형(崔在衡)·최도헌(崔都憲)이고, 러시아식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다.

1860년 8월 15일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최흥백은 노비였으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최재형은 1869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조선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던 러시아의 지신허로 갔다. 최재형은 조선인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는 동안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굶기를 밥 먹듯 하여 11살이 되던 해 포시예트 항에 가면 굶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가출하여 포시예트를 찾아갔을 때는 기진해서 바닷가에서 정신을 잃었다.

배고픔에 지쳐 기절한 최재형을 발견하여 돌본 이들은 선한 러시아 선장이었다. 선장 부부는 나이가 많았고 선박을 타고 세계를 도는 선주였다. 최재형은 그들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선장 부인은 학식이 뛰어났다. 선장 부인은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서양학문을 가르쳤고, 선장은 최재형이 해외에서 견문을 넒힐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최재형은 1871년부터 1877년까지 6년 동안 선장 부부와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무역을 배웠고 이를 통해 최재형은 풍부한 학식과 폭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7살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최재형은 유창한 러시아어로 한인 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를 시정해주고 한인 인부들을 데리고 도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치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은급 훈장을 받았다.

군수업으로 1년 수입 10~12만 불의 막대한 부를 쌓았다. 최재형은 특별히 조선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자력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의 연해주의 연추에서 활동하였는데, 조선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기여한 덕분에 연추의 조선인 사회에서 도헌(군수 비슷한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서 지위가 높아졌다. 최재형은 한인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아 한인 마을의 정교회 학교를 32개나 세웠다. 한인들은 최재형을 페치카(따뜻한 난로)라고 불렀다. 러일전쟁에 참여한 최재형은 그 후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항일운동에 뜻을 두었다. 1907년 안중근은 해외 망명을 통해 러시아에서 최재형을 만났다. 최재형은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이 된다. 안중근은 평의원으로 참여한다.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값지게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류인석이 13도의 군을 조직할 때 의병들의 총기 구입 등 무장을 도왔다. 옛 소비에트 연방이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킨 것이다.

동의회는 러시아의 모든 항일의병 세력을 단결시켰고,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했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 40여 명에 달했으나, 의병들은 부상자가 불과 4명이었다.

결국 의병들의 러시아 활동 사실을 파악한 일본은 제정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 국적의 조선인 청년의 징집, 무기 수거 등으로 의병 활동을 방해했다.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하는 안중근의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싼값에 무기를 샀고 의군의 숙식은 최재형의 집에서 했다. 그만큼 최재형은 군납업으로 많은 자금과 큰 저택을 보유했다. 대한의군은 신아산 전투 등 국내 진공작전에 연전연승하고 영산 전투에서는 참패했다. 참패의 원인은 포로를 석방하여 대한의군의 비밀 루트가 발각된 때문이었다. 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여 최재형을 무장해제시켰다. 최재형은 자금난에 문을 닫게 된 해조신문을 인수하여 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안중근은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다짐하며 최재형의 집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했다. 그 후 대동공보 기자증을 가지고 활동하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에서 최재형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을 모의한다. 당시 하얼빈은 중국의 영토였지만 러시아가 조차 해서 다스렸다. 하얼빈에 이토 히로부미가 오니 최재형은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서 권총 연습을 한다.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사주고 안중근 거사 후 일본이 관할하지 않는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받도록 계획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그러나 안중근이 1910년 일본 법정의 불법 재판 끝에 순국하자, 최재형은 자신이 안중근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의 처자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러일 전쟁 패전국인 러시아의 연해주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고 최재형은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음모에 따라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곧 석방됐으나, 러시아 정부가 더 이상 그와 거래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전로 한족 중앙 총)의 명예회장으로 활동했고 191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곧이어 최초 임시정부였던 대한 국민의회에서 외교부장을 맡았다. 그 이후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교육가, 사업가, 독립운동가, 언론가 등 다양한 길을 걸으며 오로지 한인들을 위해 살았고 엄청난 자금을 독립운동에 쏟아부었다.

여건이 나빠진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의 한 초라한 집에서 지내다가, 1920년 러시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손자 최 발렌틴은 모스크바에 살고 있으며, 최재형의 사진과 관련 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했다.
그가 거주했던 우수리스크의 유럽풍 벽돌집은 러시아인에게 넘어갔었는데 대한민국 정부가 2014년 러시아 한인 이주 150주년을 기하여 매입했다.
그 후 대한민국 보훈처가 10억 원을 들여 최재형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해서 2019년 3월 28일에 개관했다.

군수업으로 쌓은 막대한 재력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자로 평가된다.


1920년 -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1921년 - 일본의 작곡가 요시다 다다시.

1924년 - 대한민국의 법조인 이선중.

1930년 - 미국의 우주비행사 버즈 올드린. / 체코의 소설가 에곤 본디.

1952년 - 대한민국의 전 대한민국 정보통신부 장관 진대제.

1957년 - 체첸공화국의 대통령 알루 알하노프.

1964년 - 미국의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

1965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경기도지사 남경필.

197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정웅인.

1974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한성호

1977년 - 대한민국의 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정수근.

1978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인권.

1979년 - 대한민국의 배우 추자현.

1980년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목진석. / 대한민국의 탁구 선수 주세혁.

1981년 - 영국의 축구 선수 오언 하그리브스.

1983년 - 대한민국의 배우 전지혜. / 대한민국의 배우 강예빈.

1984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양승학.

199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악동광행.

1991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오아희.

1994년 - 대한민국의 래퍼 키썸.

1995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소희.

 

 

사망

1495년 - 조선 9대 국왕 성종(1494년 음력 12월 24일)
 
1612년 -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

1666년 - 프랑스 루이 13세의 왕비이자 루이 14세의 모후 안 도트리슈.

1819년 -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

1907년 - 러시아의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

1936년 - 영국의 국왕 조지 5세.

1938년 - 한국의 독립투사 신언준.

신언준(1904년 11월 8일 ~ 1938년 1월 20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천도교 신자로 도호는 은암이다.

평안남도 평원 출생이다. 정주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대 초반 상하이로 유학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상해 청년동맹회를 발기해 설립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상해 청년동맹회는 김상덕, 엄항섭, 윤소야 등이 참여한 단체이다.

안창호의 흥사단 간부를 지내며 안창호가 1927년 중국 각지를 돌며 외교적인 노력을 벌일 때는 그를 보좌하였고, 상하이에 망명한 독립 운동가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여운형이 설립한 인성학교의 학감을 맡기도 했다. 이후 상하이와 난징에 머물면서 동아일보 특파원을 지내다가 35세의 나이에 병사했다.

신언준이 중국에서 기자로 근무하며 외부 기고를 병행하여 언론 활동을 하던 192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 동안은 일본이 만보산 사건 등으로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이던 때였다. 그는 중국 문제를 한국에 바로 알리고 중국 내에서도 한국 독립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폐결핵이 악화되어 귀국한 뒤 1938년 3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주체사상 비판으로 유명한 철학자 신일철이 그의 아들이다.



1957년 - 미국의 육상 선수 겸 작가 제임스 코널리.


1993년 - 영국의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

1956년의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

오드리 헵번(영어: Audrey Hepburn, 본명은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영어: Audrey Kathleen Ruston), 1929년 5월 4일 ~ 1993년 1월 20일)은 영국의 배우이자 자선가였다. 할리우드의 황금시대에서 영화와 패션의 아이콘으로 활동했다. 미국 영화 연구소로부터 여성 배우 중 스크린 전설 3위로 선정되었고, 베스트 드레서 부문 명예의 전당 여성 배우로 선정되었다.

브뤼셀의 익셀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린 시절을 벨기에, 영국 및 네덜란드에서 보냈다. 암스테르담에서 소니아 가스켈과 발레를 공부한 후 1948년 런던으로 건너가 마리 램버트와 발레 수업을 계속했다. 그 후 웨스트엔드(West End) 뮤지컬 극장에서 코러스 걸로 활동했다.

몇몇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 후, 프랑스의 소설가 콜레트의 주목을 받았다. 1945년에 발표된 콜레트의 소설 지지(Gigi)를 원작으로 한 1951년의 브로드웨이 연극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후 로마의 휴일(1953)에서 주연(앤 공주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상 및 BAFTA 상을 수상한 첫 번째 배우였다. 같은 해 헵번은 장 지로두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옹딘에서 토니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브리나(1954), 파계(1959),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샤레이드(1963), 마이 페어 레이디(1964), 어두워질 때까지(1967)와 같은 성공적인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 및 BAFTA(영국 아카데미 영화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1967년까지 BAFTA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세 번 받았다. 영화에서의 경력을 인정받아 BAFTA에서 평생 공로상, 세실 B. 드밀 상(Golden Globe Cecil B. DeMille) , Screen Actors Guild Life Achievement Award 및 토니상 특별상(Special Tony Award)을 수상했다. 아카데미상, 에미상, 그래미상 및 토니상을 받은 12 명 중 한 명이다.

나이가 들면서 헵번은 적은 수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나중에 만년의 삶 대부분을 유니세프에 헌신했다. 1954년부터 조직에 기여했으며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의 가장 가난한 나라의 공동체에서 일을 했다. 1992년 12월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대통령 훈장을 받았다. 1개월 후 스위스의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투병 끝에 고인이 되었다. 1989년에 햅 역으로 출연했던 영혼은 그대 곁에(원작 : Always)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1993년 - 대한민국의 변호사 황인철.

2014년 - 이탈리아의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2019년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안화영

 

기념일

취임일자가 일요일인 경우를 제외하고 1월 20일은 미국의 대통령 취임식 날이다.

동아시아권의 국가에서는 설날(음력 1월1일)에 많이 일치하는 날이기도 하다.

국군의 날: 말리

영웅의 날(Heroes' Day): 케이프 베르데

스페인의 가수 라 오레하데 반 고흐는 2004년 4월 19일, 이 날짜를 제목으로 한 노래 20 de enero를 발표하여 유럽과 남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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