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19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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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793년 - 프랑스 루이 16세에 대한 사형 확정

1966년 - 인디라 간디가 인도 총리에 취임하다.


1967년 - 대한민국 해군 56함 침몰 사건

해군 56함 피격 침몰 사건(당포함 침몰 사건)은 1967년 1월 19일에 대한민국 강원도 거진 동쪽 해상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하던 대한민국 해군 초계호위함 PCE-56 당포함(650톤 급)이 조선인민군 해안포의 공격으로 침몰된 사건이다. 승조원 79명 중 39명이 사망하였다.

연초의 한일호와 충남함의 충돌 사고 수습이 진행되던 1967년 1월 19일 오후,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14시 30분경, 동해에서 어로보호작전 중이던 650톤급 해군 경비함이 북한의 해안포 공격으로 격침되었다"라고 발표하였다. 경비함은 어로저지선을 넘어가 조업 중인 어선을 남쪽으로 돌리려 하였으며, 승무원 79명 중 51명이 구조되었다는 것이다.

피격된 경비함은 PCE 56 당포호로, 대한민국 해군이 1961년 12월 13일 미국으로부터 인수하여 대간첩 침투작전과 어로보호에 투입된 선박이었다고 보도되었다.

당포호는 조선인민군의 해안포대에서 발사된 125mm 해안포 200여 발을 맞고 침몰되었다고 보도되었다. 1월 19일 오후 1시 30분경, 70여 척의 어선단이 어군을 따라 해상 휴전선을 넘었고, 이들을 북으로 끌고 가려는 인민군 함정을 발견한 당포호가 어선들을 유도하기 위해 북상했을 때 인민군의 해안포가 포격을 시작하여 오후 1시 50분부터 20분 동안 200여 발의 포격을 받았고, 53함이 3인치 포로 응전했으나 포탄을 선체에 맞은 당포호는 침몰했다고 밝혔다.

1월 20일 오전까지 51명이 구조되었으나, 그중 11명은 사망하고, 11명은 중화상을 입었다. 실종자는 더 이상 발견하지 못했으며, 28명 모두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해군 본부는 침몰 해역은 휴전선 부근이고, 수심이 210 m 여서 인양 작업은 불가하다고 판단하였다.

1월 20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비서장회의에서 유엔은 PCE 56함에 대한 포격에 대해 엄중 항의하고, 공동 조사를 제의하였다. 사회주의 진영은 1월 21일 열린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서 중립국 휴전감시위원단의 사건 조사를 거부하였다.

어로보호 업무는 해군에서 농림부와 내무부로 이관하고, 1968년까지 동해안 2개 지역에 제트기의 운용이 가능한 공항을 신설할 것을 발표하였다. 침몰한 당포호를 대신할 함정으로 미국으로부터 PCE 50함을 인수하여 ‘거진호’로 명명하였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1967년 6월 19일 남한의 어선 2척을 기관총으로 위협하여 납북을 시도하였다. 끌려가던 중에 피해를 입은 어선(한풍호)이 휴전선 부근에서 침몰하였고, 그 틈을 타 다른 배에 옮겨타 돌아왔다. 이 사고로 1명이 행방불명되었고, 2명은 총상을 입었다.

9월 20일에는 북한 측 해안에서 9척의 남한 어선에 30분간에 걸쳐 250발의 포탄을 발사하여 어선 1척이 침몰하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12월 21일에는 조선인민군 함정이 250여 척의 남한 어선단을 포위하여 납북을 시도하려다가 실패하였고, 그 후로 어선 1척을 들이받아 침몰시켰다. 이 사고로 6명의 선원이 사망하였다.

1968년 1월 11일에는 조선인민군 함정이 동해어로저지선 부근과 봉수리 근해에서 조업하던 남한 어선단을 위협, 어선 1척은 침몰시키고 어선 3척과 20명의 어부를 납북하였다.



1993년 - 슬로바키아와 체코가 유엔에 가입하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분리된 후 동시 가입)

2008년 - 삼성 특검:특검 수사팀은 김동식 전 삼성 SDI 독일법인 상무(현 제일기획 전무)와 자금 운용 담당 전 삼성증권 전무인 김상기(현 삼성벤처투자 사장)를 소환하여 조사하였다. 특검 수사팀은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출국금지하였다.


2012년 -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카메라, 필름 회사인 코닥이 파산 보호 신청을 하였다.

이스트만 코닥 컴퍼니(Eastman Kodak Company)는 미국의 이미지 솔루션 관련 기업이다. 초창기부터 2011년까지는 카메라 및 필름의 제조사였다. 코닥은 2000년 이후 필름 사업부와 디지털카메라 사업부를 제때 매각하지 않아 심각한 재정난을 겪게 되었고, 결국 2012년 1월 19일에 파산 보호 신청을 하였다. 이후 2013년 9월 4일에 필름 및 카메라 사업부를 매각함과 동시에 '인쇄의 기술적 지원, 전문가들을 위한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서비스' 기업으로 회생했다.

1911년 코닥에서 사용한 Mrs.kodak. 이 광고는 여성 및 중 장년층의 카메라 보급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코닥(Kodak)은 1882년, 뉴욕 로체스터 은행 서기였던 조지 이스트만(George Eastman, 1854년 7월 12일 ~ 1932년 3월 14일)이 현대식 필름의 초기 형태를 만들어 내고, 1883년에는 세계 최초의 감광 필름을 만들어내 이것을 양산화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창업자인 조지 이스트만은 알파벳 'K'가 소비자나 사용자 모두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 알파벳 'K'를 앞뒤에 반복하여 사용하여 Kodak이라는 이름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코닥은 1888년부터 "당신은 찍기만 하세요,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영어: You press the button, We do the rest)라는 광고 카피를 사용하여 카메라의 판매에 뛰어든다. 그러나 당시로써는 카메라가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코닥이 개발한 카메라와 필름은 일부 전문 사진사 계층에게만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당시 경영학에서는 '이벤트'로 그치던 광고라는 것에 세계 최초로 지속적인 투자 및 광고를 결정함으로써 잠재 시장을 빠르게 넓혀갔다. 또한 당시에는 파격적인 의상인 파란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Mrs. Kodak'이라는 캐릭터를 광고에 기용해 사진이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심어주고, 결과적으로 급속도로 대중에게 사진과 카메라를 전파하게 되어 필름 시대의 황금기를 개척하게 된다.

1910년대부터 필름을 코닥이라고 부를 정도로 필름의 대명사가 될 만큼 회사는 급성장했지만, 하지만 이러한 영광을 뒤로한 채 조지 이스트만은 1932년 "친구들이여, 나의 일은 모두 끝났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영어: To my friends: my work is done. Why wait?)"라는 유언을 남기고 77세를 일기로 자살한다. 그러나 코닥은 1930년대 후반, 현대적인 필름을 개발함으로써 또다시 시장을 개척하는 데 성공하는 등의 발전을 이룬다.

1950년대에 카메라 시장이, 카메라 바디, 렌즈, 필름으로 세분화되어감에 따라 독일의 칼 자이스, 라이카와 일본의 니콘, 캐논, 펜탁스 등이 등장하게 되면서 입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닥은 필름 사업에서 고정적인 수입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분위기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필름 시대가 끝나가는 1990년대 이르렀을 때에는 매년 1억대가 넘는 일회용 카메라를 판매하고, 각종 특허와 디지털 기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는 등 대내외적으로도 큰 성장을 이뤄냈고, 미국 25대 기업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1975년 코닥의 전자 사업부 엔지니어였던 스티브 세손(Steve J. Sasson,1950년 7월 4일~)은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CCD)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코닥은 이 디지털카메라가 향후 아날로그 필름 시장 전체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이것에 대한 상용화를 중지시켰으며, 필름 시장의 붕괴를 우려해 간간히 디지털카메라의 시험작 만을 출시하며 디지털카메라의 출현을 억지로 늦추려고 시도했다.

이러한 억제 전략은 20여 년 간 이어졌지만, 1998년, 디지털카메라의 대중성을 예측한 일본 카메라 기업들이 보급형 디지털카메라를 출시하기 시작하면서 필름 카메라는 급속도로 사장되기 시작했고, 이러한 시장 역전에 코닥의 입지와 수익성은 극단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수익성이 악화된 코닥은 끝내 2012년 1월 19일에 끝내 Chapter 11, Title 11, United States Code에 의한 파산보호 신청을 하게 된다. 이후 코닥은 연방 정부에서 US $844만 지원받았으며, Chapter 11에 따라 인쇄의 기술적 지원, 전문가들을 위한 그래픽 커뮤니케이션 서비스 분야만을 남겨두게 되었고, 카메라 사업부는 Kodak 라이선스와 함께 JK Imaging으로 매각되었으며, 필름 사업부는 상업 영화 필름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전부 매각했다. 이에 미 정부는 코닥의 수익성이 성공적으로 재고됨을 인정해 2013년 9월 4일 파산보호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문화

1983년 - 애플 컴퓨터가 마우스와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갖춘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 리사를 발표하다.

애플 리사(Apple Lisa)는 1980년대 초 동안에 애플 컴퓨터사가 설계한 개인용 컴퓨터이다. 이 리사 프로젝트는 1978년에 애플에서 시작되었으며 비즈니스 고객들을 대상으로 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GUI)를 갖춘 강력한 개인용 컴퓨터를 설계하는 프로젝트로 발전하였다. 1982년에 스티브 잡스는 리사 프로젝트에서 파면되어 대신 매킨토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프로젝트에 소요된 비용은 총 5천만 달러이다(정확한 정보인지는 확인이 안 됨).

리사는 여러 면에서 당시 매킨토시보다 더 고급적인 시스템이었는데 이를테면 보호 메모리, 협동 멀티태스킹, 더 세련된 하드 디스크 기반의 운영 체제, 내장형 화면 보호기, 종이테이프와 역 폴란드 표기법(RPN)을 갖춘 고급 계산기, 최대 2 메가바이트 (MB)의 램 지원, 확장 슬롯, 숫자 키패드, 데이터 손상 보호 설계, 더 높은 해상도를 제공하였다. 몇 년이 지나 이 가운데 많은 기능들이 매킨토시 플랫폼에 들어가게 되었다. 5 MHz 모토로라 68000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갖춘 시스템에서 리사 운영 체제와 프로그램이 복잡하여 소비자들은 특히 문서를 스크롤하며 볼 때 동작이 굼떴다고 이야기하였다.

호환성 문제와 1만 달러나 되는 비싼 가격으로 인해 10년이 넘도록 총판매량이 10만 대 정도였고, 1989년, 애플은 결국 세금 등의 문제를 감당하지 못해 리사를 전부 미국 유타주의 매립지에 매장하였다.


1988년 - 한글 맞춤법 개정.


1996년 - 서태지와 아이들이 해체되다.

서태지와 아이들(Taiji Boys, Seo Taiji & Boys)은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이다.
보컬, 작사·작곡의 서태지와 코러스 및 백보컬과 안무를 맡은 이주노, 양현석 세 명으로 구성되었다. 1992년 1집 서태지와 아이들로 데뷔하였으며 4집 SEOTAIJI & BOYS IV를 끝으로 해체되었다.

시나위의 해체 이후 서태지는 당시 대한민국에 막 도입되기 시작한 미디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때의 미디 작업으로 난 알아요, 환상 속의 그대 등 서태지와 아이들 1집에 수록될 곡들의 일부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음악 활동을 모색하던 서태지는 1992년 1월에 양현석, 이주노를 만나 '서태지와 아이들'을 결성하고 1992년 4월에 1집 Yo! Taiji를 발표한다. 1992년 4월 11일, MBC의 특종 TV 연예에 데뷔하게 된 그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하였다. 당시 심사위원들은 노래를 듣고 7.8점이라는 역대 가장 낮은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실제 데뷔는 1992년 3월 14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였다. 또한 TV저널 올해의 스타상, 서울 가요대상 최고 인기상, 스포츠서울 올해의 가수상, 대한민국 영상음악 대상 골든 디스크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최고 인기 가요상과 신인 가수상, KBS 가요대상 15대 가수상 등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Yo! Taiji는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 판매량인 18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1993년 6월에 발표된 2집은 하여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국내 최초로 220만 장 이상 판매고를 기록했다. 또한 다시 한번 각 방송사 및 언론사의 가요 프로그램 1위를 휩쓸었으며, 각종 상을 수상하게 된다. 음악적인 면에서도 하여가의 힙합 음악에 국악을 접목시킨 음악과 수시아의 158비트에 달하는 빠른 멜로디는 1990년대 말 테크노 열풍에 한 발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집 발표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은 잠시 일본 공연을 했으며 3집 앨범 제작을 위해 몇 달간의 공백기를 가진다. 그러던 1994년 8월 3집 앨범을 발표하며 발해를 꿈꾸며를 시작으로 3집 활동을 시작한다. 3집에서는 기존의 댄스 음악의 비중이 약해지고 록의 비중이 늘어났다. 댄스 음악에 열광했던 일부 팬들은 실망하기도 하였으나, 한국의 교육을 비판한 교실 이데아 등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3집은 16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대한민국 100대 명반에 선정되었다.

3집 때에는 사탄설 등 서태지와 아이들을 둘러싼 각종 괴소문들이 횡행했는데, 이는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들어보면 사탄의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괴소문이 PC 통신을 통해 전국에 퍼졌고, 언론에까지 보도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 외에도 동성애자설, 임신설 등이 퍼졌다. 이러한 괴소문들은 MBC 뉴스데스크, KBS 추적 60분,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교실 이데아를 직접 돌려 틀어 사실무근임을 밝혀내면서 잠잠해졌다.(교실 이데아 소동)

또한 3집에는 기존 앨범에서는 볼 수 없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가 수록되어 있었다. 기존의 앨범은 상업적 색채가 강한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룬 데 반해, 3집 앨범에는 통일, 교육 현실, 마약 문제 등의 사회 비판적 내용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특히 뉴 메탈 색채를 강하게 드러낸 교실 이데아는 교육 현실을 직설적으로 꼬집으면서 10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런 사회적인 색채의 음악과 그에 대한 당시 10대 팬 들의 반응 이후 ‘서태지 담론’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1994년 대한민국 학계와 언론계가 뽑은 광복 50년 한국을 바꾼 100인에 가수로서는 최초로 선정되는 등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정작 그가 시도한 음악적 변화 자체는 큰 대중적 주목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훗날 서태지의 음악적 성취가 재평가되면서 3집 수록곡인 발해를 꿈꾸며가 고등학교 7차 교육과정의 '음악과 생활'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당시 서태지와 아이들은 앨범 때마다 수십 회 이상의 TV 출연을 하면서도 꾸준히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1992년, 1994년, 1995년에 각각 1, 2, 3집 활동에 해당하는 라이브 앨범을 발표하였다. 또한 1992년, 1993년, 1994년에는 환경문제를 주제로 당대 아티스트들이 모인 환경 콘서트인 '내일은 늦으리'에 참가하여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더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1994년에는 일본판 앨범을 발매하였다.

훗날 서태지는 4집 발표 전에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가 예정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1~3집 활동 기간 동안 큰 인기를 누린 그들이지만, 너무나 바쁜 일정, 시간에 쫓겨 앨범을 만드는 데 대한 부담이 너무나 컸다고 그 후 당시를 떠올리며 심경을 밝혔다.

3집에서 댄스적인 색채를 없애고 록, 메탈 등을 선보인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5년 10월에 4집을 발매함과 동시에 갱스터 랩 스타일의 컴백홈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갱스터 랩은 당시 대한민국에서는 생소한 장르로, 기존의 인기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일부의 관측도 있었다. 그러나 4집 음반은 발매 첫날 30만 장이 팔리는 등 총 240만 장 이상이 팔려 당시까지 대한민국 가요계 역사상 세 번째 더블 밀리언 셀러를 기록했다. 앨범 발매 때마다 그러하듯, 서태지와 아이들은 각 방송사 가요 순위 1위를 휩쓸었고, 컴백홈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학생의 이야기가 각 방송사 뉴스를 통해 전파를 타는 기현상도 벌어졌다. 또한 `컴백 홈` 방송 출연 당시 립싱크 공연에 반발하여 마이크를 아예 소지하지 않는 등의 파격 행위도 이어졌다.

1995년 연말에 큰 활약을 펼친 후에도 그들은 길거리에서 게릴라 콘서트를 펼쳐 필승의 뮤직 비디오를 만드는 등 인기몰이를 계속하였으나, 이듬해 1월 19일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 방송된 공연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1월 31일에는 성균관대학교 유림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새로움에 대한 부담과 이에 따라 창작의 고통이 컸으며 화려할 때 미련 없이 떠난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연 그룹 해체와 은퇴를 선언하며 미국으로 떠났다. 이날 서태지와 아이들의 갑작스러운 은퇴 소식은 전 사회적인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각 방송사 9시 뉴스의 메인 뉴스가 되었고, 각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했다. 2월에는 베스트 앨범을 발표하였다.

3달 여의 활동 끝에 그룹은 은퇴했지만 4집의 여파는 은퇴 이후에도 남았다. 4집 수록곡인 시대유감은 공연윤리위원회의 검열에서 가사를 지적받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곡을 가사가 삭제된 상태에서 그대로 4집에 수록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진 이후 공연 윤리 위원회의 검열 제도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으며, 포크가수 정태춘의 심의 철폐 운동과 시너지를 일으켜 현재 공윤의 사전심의 철폐에 공을 세웠다고 평가된다. 실제로 공연 윤리 위원회는 1996년 6월 7일에 폐지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7월 10일에 시대유감 싱글 앨범이 발표되어 가사가 삭제되지 않은 원곡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은퇴 선언 이후 미국으로 떠난 서태지는 1년여간 아무런 음악적 활동을 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이후로 대한민국 음악계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기 전에는 발라드나 트로트 음악 등이 대한민국 대중 음악계의 주류를 이루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로 랩 음악이 가미된 댄스 음악이 가요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가요계는 정확히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1992년 4월 11일을 기점으로 구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활동은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반향도 불러일으켰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은 “10대들의 대통령”이라 불리며 청소년들의 지지를 얻었다. 4집 앨범 수록곡 중 시대유감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에 통과하지 못하자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가사가 전부 삭제된 채 앨범에 실렸으며, 이 외에 다른 수록곡들도 심의에 제출된 곡의 가사와 앨범에 실린 곡의 가사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물의를 빚었다. 결국 이 사건이 음반 사전 심의 규제 폐지 운동에 큰 도움을 주었고, 현재 사전 심의 제도는 폐지된 상태이다.

그리고 이후 H.O.T. 와 젝스키스 등의 이후 아이돌 시장의 시초를 만들었다. 국내 아이돌 그룹의 시작은 H.O.T.이지만 그건 시스템을 만든 것이고 휴식기와 활동기의 구분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처음이고 한국어 랩도 처음 방송에서 시도한 그룹이었다.

그룹의 리더였던 서태지는 잠적 기간을 거쳐 이른바 서태지 밴드를 결성, 록 위주의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양현석과 이주노는 각각 음반 기획자와 안무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 중에 양현석은 YG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후배 가수들을 양성하고 있다.
멤버 전원이 자신보다 최소 12살 이상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다. 서태지는 16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고 양현석은 12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으며 이주노는 23살 연하의 여성과 결혼했다.

병역은 양현석만 현역 입대 후 의가사 전역했으며 나머지는 면제되었다.



2006년 - 명왕성 탐사를 목적으로 NASA에서 무인 우주 탐사선 뉴 허라이즌스를 발사하다.

 

 

 

탄생

1544년 -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2세.


1807년 - 미국 남북 전쟁 당시 남부동맹의 장군 로버트 E. 리.

로버트 에드워드 리(807년 1월 19일 ~ 1870년 10월 12일)는 미국의 군인이다. 미국 남북 전쟁 때 남부군 총사령관을 맡아 북군을 괴롭혔다. 최후엔 패배했으나 미국 역사상 굴지의 명장으로 명성을 드높였다.

버지니아주 웨스트 모아 랜드 군의 스트라 포트(Stratford Hall)에서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헨리 리 3세와 안나 힐 카터(Anne Hill Carter) 사이에서 태어났다. 리는 1825년 뉴욕주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해 4년 후 차석 성적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리는 직업군인으로의 길을 걸었고, 1832년 공병장교가 되어, 소위에 임관하고, 1836년 중위, 그리고 1838년 대위로 진급했다.

리는 1846년부터 1848년까지 계속된 미국-멕시코 전쟁에 참전해 무공을 세웠다. 1852년 모교였던 웨스트포인트의 교장에 임명되었다. 3년간 교장 생활을 보낸 후, 1855년 중령으로 진급한 리는 그 후 수년간 텍사스주에서 보냈다. 1859년 버지니아주(현재는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발생한 전투적 노예제도 반대 활동가 존 브라운에 의한 하퍼스 페리 봉기 사건의 진압을 지휘했다.

남북전쟁 직전 대령 계급에 있었으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육군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 소장의 추천에 의해 미국 합중국 육군(북군)의 사령관 취임을 요청받았다. 그러나 리는 노예제도에는 찬성하지 않았으나, 고향인 버지니아에 대한 향토애 등을 이유로 1861년 섬터 요새 전투 후 연방군에서 물러나고 버지니아로 돌아갔다.

남부에서 처음엔 버지니아 주군의 사령관이 되지 않고, 1861년 8월 남부연합군 총사령관(Full General)에 임명되었다. 그때 동시에 임명된 5명 중 선임 순위는 3위였다. 리는 당초엔 버지니아주 서부의 부대 사령관, 캐롤리아니 주 연안의 방위사령관, 제퍼슨 데이비스 연합국 대통령의 군사 고문을 역임했으나, 북버지니아군 사령관 조지프 존스턴 대장이 1862년 6월 1일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 부근까지 침공한 북군의 포토 맥군을 맞아 싸운 세븐 파인즈 전투(Battle of Seven Pines)에서 중상을 입어 더 이상 군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되자 그 후임으로 기용되었다.

리는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벌어진 7일 전투(Seven Days Battles)에서 매일 포토 맥군에 공격을 가해, 우세한 적에게 리치먼드 침공을 단념하게 만들었다. 이 전투로 인해 명성을 얻은 리는 남부연합의 항복 직전에 남부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될 때까지 북버지니아군 사령관으로서 동부전선의 지휘를 맡았다.

리는 언제나 항상 북군에 비해 열세의 군을 지휘하고, 보급의 어려움에 괴로워했으나, 대담한 기동과 적의 의표를 찌르는 공격으로 북군을 괴롭히기를 계속해, 제2차 불런 전투, 프레더릭스버그 전투, 챈슬 러즈 빌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고, 북군의 리치먼드 침공의 의도를 저지하는 데 노력했다. 또한 2번에 걸쳐 북부 영역에 대한 침공작전을 실시하여, 1862년 앤티텀 전투, 1863년 게티즈버그 전투 등에서 북군과 전투를 벌였다. 리는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패배해 남부로 후퇴한 후,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사임을 요청했으나, 리 말고 수적으로 뒤지는 북버지니아 군을 이끌고 북군에 대항할 수 있는 장군이 남부에는 없었기에 데이비스 대통령은 이를 기각했다.

1864년 율리시스 그랜트 중장이 북부 연방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북부의 물량적 우위를 충분히 활용하는 전략을 수립하자, 리는 방어전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1864년 6월 수도 리치먼드 근교까지 후퇴하여 방어를 굳혔다. 1865년 1월 31일 남부 의회에 의해 남부 육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남부연합의 세력이 만회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고, 1865년 4월 3일 리치먼드가 함락되었다. 리는 군을 지휘하여 리치먼드를 탈출하여 조지프 존스턴 군과 합류를 시도했으나, 버지니아주 애 포매 톡스에서 북군에게 사로잡혀 1865년 4월 9일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였다. 일부 장교는 부대를 해산시켜 산속으로 도망쳐 게릴라전을 계속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다고 느낀 리는 이를 거절하고 항복 후에도 남부 병사들에게 게릴라전을 하지 말고 투항하라고 호소하였다.

지휘관으로서 리는 지휘에 관하여 분권적인 방식을 좋아했다. 필요에 응하고 필요한 일은 실제 전선에 있는(말하자면 전선에 가까운) 부하의 판단에 맡긴다고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또한 부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일을 좋아하지 않고, 부하에게 무언가를 권하는 식으로 말하는 태도를 많이 보였다. 수세로 돌아설 때 리가 말하던 “지도를 가리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나의 생각을 이미 알아챘다”라던 스톤월 잭슨 장군 같은 훌륭한 부하에게는 아주 좋은 이 시스템은 매우 훌륭한 기능을 발휘했으나 왠지 공세로 전환할 때는 모두 기능하지 못했다. 리 장군의 오른팔 잭슨 장군이 게티즈버그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전사한 것도 게티즈버그에서 패배한 한가 지 원인인지도 모른다. 휘하의 한 병사의 자신의 일기에서는 "게티즈버그 전투가 끝난 뒤 얼마 후 리 장군은 '잭슨 장군이 정말로 전사한 것이냐'라는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라고 쓰여 있었다.

덧붙쳐서 영국군의 종군 장교는 리에 대해 “장군의 업무에 관련된 것 중에 지루한 작업은 좋아하지 않았다”라고 쓴 책이 남아있었다. 실제 리는 작전 서류를 작성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아(이것은 적이었던 북군에게 작전계획이 흘려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고 한다), 북부를 침공하려던 시기에 이에 관련된 명확한 서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진행하는 도중에 하다 보면 알게 된다고 생각했다. 명확한 작전목적(적 야전군 격파, 도시 공략, 보급물자 강탈 등)의 결여는 부하 장군들 사이에 혼란을 일으켰고, 공세로 전환 시 북버지니아 군은 수세로 전환할 때 보여준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매번 패배했다.

전후에 석방되어 1865년 10월 2일 버지니아주 워싱턴 컬리지(현재의 워싱턴 앤 리 대학) 학장에 취임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남부의 복구에 노력하면서 인재육성에 전력을 다했다.

1870년 리의 사후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1975년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미국 의회에 의해 미국 시민권을 회복했다. 조지아주 애틀랜타 근교의 스톤 마운틴 파크에는 리 장군을 포함한 남부 장군들의 거대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리는 전술지휘능력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과도하게 공격적인 인물들로 인해 내부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남부 지도층에서는 귀중한 온화한 인품과 그에 걸맞은 인격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의 온화하지만 강한 성격으로 인해 북버지니아군 사령부의 운영이 윤활해졌고, 데이비스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에 남부 정부와의 의견 마찰이 거의 없었던 것도 그가 거둔 많은 승리에 기여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전략적으로는 전쟁에 승리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에는 실패해(물론 이것은 전역 사령관의 임무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2번에 걸쳐 벌어진 북부 침공작전은 북부지역에서의 승리로 인해 북부 대중의 압전 감을 일으키면서, 유럽 열강에 의한 정전 중개가 개시되는 것을 기대한다는 애매한 전략 목적에 매달린 것이었기에 2번의 승리를 얻었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실패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리 본인은 백인의 도덕심이 어지렵혀진다는 이유로 노예제는 반대했다.



1809년 - 미국의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

1813년 - 잉글랜드의 발명가 헨리 베서머.

1833년 - 독일의 수학자 알프레트 클렙슈.

1839년 - 프랑스의 화가 폴 세잔.

1879년 - 이탈리아의 수학자 귀도 푸비니.

1883년 - 독일의 지휘자 헤르만 아벤트로트.

1902년 - 러시아의 역사학자 게오르크 오스트로고르스키.

1903년 - 독일의 작곡가 보리스 블라허.

1910년 - 대한민국의 화가 김인승.

1920년 - 제5대 유엔 사무총장, 페루의 외교관, 정치인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1921년 - 미국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1937년 - 일본의 기업인 사쿠라다 사토시.

1943년 -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재니스 조플린

1950년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뮤지컬배우 이승규(탐 리).

1954년 - 미국의 배우, 싱어송라이터 케이티 사갈

1961년 - 대한민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지도자 박경훈.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지도자 신경식.

1962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광정.

1963년 - 일본의 배우 마츠시게 유타카

1969년 - 몬테네그로의 전 축구 선수 프레드라그 미야토비치.

1977년 - 대한민국의 성우 김서영.

1983년 - 일본의 가수 우타다 히카루.

1985년 - 미국의 영화 감독, 각본가 데이미언 셔젤.

1987년 - 대한민국의 MC 이현지 / 대한민국의 가수 문현아.

1994년 - 독일의 축구 선수 마티아스 긴터.

 

 

 

사망

1865년 - 프랑스의 사상가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1938년 - 오스트리아의 작가, 인권운동가 로자 마이레더.

1942년 - 중국 청나라의 황족 종실 겸 정치가 보국공 푸쥔.

1983년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가린샤.

2000년 -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배우이자 발명가 헤디 라마르.

2017년 - 미국의 배우 미겔 페러.

2018년 - 미국의 배우 도러시 멀론.


2020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신격호.

롯데 창업주 신격호 회장

 

기념일

남부동맹 영웅의 날& 로버트 E. 리 데이(Robert E. Lee Day): 미국 텍사스주, 앨라배마주, 아칸소주, 플로리다주, 조지아주, 미시시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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