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21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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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535년 - 성변화 교리 등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비난하는 플래카드 사건으로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서 프랑스의 개신교도 6명이 화형을 당하다.

1637년 - 충청감사 정세규가 험천 전투에서 대패함

1720년 - 스웨덴과 프로이센간에 스톡홀름 조약이 체결되다.

1793년 -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되다.

1919년 -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영국에 대해 아일랜드 독립 전쟁을 시작하다.

1922년 - 모스크바에서 극동인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1968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장 게릴라 31명이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21 사태는 김일성의 명령으로 1968년 1월 21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소속의 군인 31명이 대한민국의 청와대를 기습하여 대한민국의 대통령 박정희를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유일하게 생포되었던 김신조의 이름을 따서 김신조 사건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1968년 1월 13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보위성 정찰국의 124부대 소속 31명이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 국군의 복장과 수류탄 및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1월 17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하여 대한민국 수도권에 잠입하였다. 이들은 청운동의 세검정 고개의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수류탄 및 기관단총을 쏘면서 저항하였다.

대한민국 군·경은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하여 소탕 작전을 벌였으며, 경기도 일원에 걸쳐 군경합동수색전을 1월 31일까지 전개하였다.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은 총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124부대 소속 31명 중 29명이 사살되고 김신조는 투항하였으며, 한 명은 도주하여 다시 돌아갔다. 도주한 이는 조선인민군 대장인 박재경으로, 총정치국 부총국장을 역임하고 2000년, 2007년에 방한하여 송이버섯을 선물하기도 했다.

시도는 미수에 그쳤으나, 이 사건 이후에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하여, 박정희는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미국과 소련 사이에 데탕트가 조성되면서 불발에 그쳤다.

김일성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으로,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대한민국 중앙정보부장과의 오찬 자리에서 1·21 사태에 대해 자신은 아는 바가 없었다고 말하였으나, 1·21 사태 당시 남파공작원이었던 김신조는 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상투적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2013년 10월 24일 평화문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청샤오허 중국 인민대학 교수는 김일성이 1965년에 제2차 한국 전쟁을 계획했지만 중국이 거부했다는 중국 외교부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를 공개했다.



2008년 - 삼성 특검 수사팀은 미술품 수천점이 보관돼 있는 삼성 에버랜드 물품 창고에 대해 압수수색하였다.

2011년 - 대한민국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되었던 삼호주얼리호 선원들이 대한민국 해군에 의해 구출되었다.

아덴만 여명 작전은 2011년 1월, 대한민국 해군 청해부대가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대한민국의 삼호해운 소속 선박 삼호 주얼리호(1만 톤급)를 소말리아 인근의 아덴만 해상에서 구출한 작전이다.


2011년 1월, 대한민국의 삼호해운 소속 선박 삼호 주얼리호가 해적들에게 피랍되었다. 대한민국 기업 소속의 선박이 납치되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해적에 대한 몸값 지불을 반대하는 여론이 생겨났다.

1차 구출 작전은 2011년 1월 18일 20시 9분에 해적들이 소말리아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최영함이 해적들을 뒤쫓는 도중 해적들이 몽골 선박을 추가로 피랍하기 위해 자선을 내리는것을 포착하고, 이 때 해적들이 분열된 틈을 타 작전을 시행했다. 링크스 헬기로 자선에 위협사격을 가한 뒤 관심이 쏠린 사이 청해부대 소속 해군특수전여단 요원들이 고속정으로 삼호 주얼리호에 접근했고 해적과의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 작전으로 적들은 흰기를 들고 항복 하는 척 하다가 바로 AK 소총을 발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특수부대원 3명이 총상과 찰과상 등의 부상을 입고 작전을 중지, 최영함으로 복귀했으며 해적의 자선에서 AK-47 3정과 사다리, 해적 자선을 확보했다. 또한 경고 사격 과정에서 해적 수 명이 바다에 빠져 실종되었다.

대한민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구출 작전을 보고받고 최종승인하였고, '아덴만 여명작전'이라고 불리는 작전이 개시되었다. 2011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최영함과 대한민국의 해군특수전여단(UDT/SEAL)이 투입되어, 약 5시간의 교전을 거쳐, 해적들을 제압하고 21명의 선원들을 전원 구출했다. 8명의 해적을 사살하고 5명을 생포했으며, 대한민국 해군의 사망자는 없었다. 인질 중에 사망자는 없었으나, 선장이 복부에 관통상을 입었다.

작전 과정 중에 해적이 발사한 총탄에 부상을 입은 삼호 주얼리호의 석해균 선장은 응급 처치 후 오만의 제2도시 살랄라에 위치한 술탄카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후 석 선장은 오만 살랄라 공항에서 29일 11시 40분경(한국시각)경 환자이송 전용기를 통해 출발해 중간 급유 국인 태국을 거쳐 11시간 만인 22시 30분경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이후 아주대학교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석선장은 작전 과정에서 목숨을 걸고 기지를 발휘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심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생포한 5명의 해적을 제3국에 인계하여 국제 공조를 통해 대리처벌하도록 할 예정이었으나, 인접 국가들이 대리처벌을 거부함에 따라 최초로 본국으로 송치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선원들이 피랍되어 있는 금미호 선원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해적들과 맞교환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역시 현실적으로 어려운점이 있으며, 소말리아 해적들도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낮다는 지적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에 송치하여 처벌하도록 지시했다. 2011년 5월 27일, 재판부는 1심에서 석해균 선장을 쏜 것으로 지목된 해적 아라이에게 무기징역을, 나머지 3명에게 징역 13년에서 15년을 선고하였다.

 

소말리아 해적은 8명의 해적이 살해된 것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앞으로 대한민국 선박을 납치하면 돈을 요구하지 않고 선박을 불태우고 선원을 죽일 것"이며, "대한민국은 우리 동료를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며 위협하였다고 로이터 통신이 23일 전했다. 또 이로 인해 앞으로 대한민국 무역 기업에선 선박에 해적 퇴치용 방공호와 물대포를 만들게 되었다. 실제로 대한민국의 삼성중공업은 비살상 무기를 사용해 해적을 퇴치하는 해적퇴치 통합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항해정보 분석을 통해 해적선을 판별하고, 고화질 나이트 비전을 이용한 추적 감시, 조타실 등 안전한 장소에서 CCTV를 통해 원격제어해서 물대포를 발사한다.

대한민국은 사망한 해적들의 시신들을 수장하는 방안을 검토하였으나, 소말리아 정부에 시신을 인계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대한민국 국방부가 이 작전에 대해 정부 홍보에 사용하고 있으며, 군사작전 등 군사기밀을 과도하게 공개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구출 작전 직후 찍은 UDT 대원들의 사진과, 작전내용, 최영함의 위성 좌표, 헬기의 대응 등이다. 자유선진당 이진삼 의원은 "앞으로 우리 이거 때문에 작전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고 질타했다. 이에 대해 이성호 합참 군사지원본부장은 비밀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공개했다고 해명했으나 비판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초 최영함이 대한민국에 도착하면 내부까지 공개하려던 군은 인터뷰만 하기로 계획을 변경했다.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군사비밀이 적나라하게 TV화면에 비춰지고 작전 내용이 공개되는 것이 참으로 걱정스럽다”면서 “군의 작전 내용은 홍보 수단이 아니다"라고 지적했으며,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는 "언론들이 아덴만 기사로 꽉 채워서 도대체 그 외에 우리 나라에서,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판단하기 지극히 어렵다"고 지적했다. 결국 국군 기무사령부는 기밀 누설에 대해서 조사에 착수했다. 한겨레는 사설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국방부장관에게 인질 구출을 지시했다'고 담화문을 발표한 것은 썩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지적하며, 작전 초기 부대가 알아서 할 일이라는 청와대의 입장이 작전 성공 후에 입장이 정 반대로 바뀌었다고 비판했다.

대한민국 국방부와 출입기자단은 인질들의 안전을 우려해 작전 진행상황이 언론에 노출되면 안된다고 판단해 엠바고에 합의했으나 부산일보, 아시아투데이, 미디어오늘은 그대로 보도했다. 국방부는 부산일보에 대해서는 요청을 받아들여 기사를 삭제한 점을 감안해 1개월 출입정지를, 재차 요청에도 기사를 게재한 미디어오늘과 아시아투데이에는 등록 취소 결정을 각각 내렸다. 그러나 미디어오늘, 아시아투데이는 지면을 통해 반발했다. 최상재 언론노조위원장은 "부산일보를 통해 이미 보도된 상황에서 엠바고를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며, 엠바고는 종료됐다고 봐야 함에도 이를 인용 보도한 매체마저 중징계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며 이번 징계가 부당함을 지적했다. KBS 미디어비평도 앰바고 요청을 지키지 않은 언론들에 대한 징계에 대해 보도했다. 미디어비평은 '그동안 앰바고를 지켜지지 않은 언론사들에 대해서는 기자단들이 자체 징계를 내리는 행태로 이루어졌다'고 지적하면서 정부에 의한 출입등록 취소는 이례적인 일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징계를 받은 언론들은 국방부 정식 출입 기자단에 등록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앰바고를 깬 것은 아니었다는 주장도 보도하면서, 정부에 의해 이러한 징계가 이루어질경우 언론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보도했다. 반면 전문가들은 원칙적으로 국가 위난과 관련한 엠바고는 언론에서 수용해야 한다는데 이견이 없는데 엠바고를 어겼다고 해서 기자단 차원의 출입 제한 등의 조치외에는 별다른 제재 수단도 없다고 보도했다. 이후 아시아투데이는 정부의 등록취소 조치에 불복하며 법원에 등록 취소 효력 정지 가처분신청을 냈고, 법원은 아시아투데이의 제안을 받아들여 2개월 등록정지하라는 권고안을 내놓았고 양 당사자는 이를 수용했다. 청와대는 미디어오늘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처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석해균 선장이 대한민국 UDT 대원들의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나돌던 가운데 한나라당은 공식 논평을 통해 '인터넷에 떠도는 유언비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석선장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총상중 대한민국 UDT 대원들이 사용하는 총알도 한발이 끼어있던것으로 드러나면서 유탄인지, 오인사격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었고, 한나라당의 논평이 성급한것 아니었냐는 지적도 일었다. 의료진이 치료 과정에서 석선장의 총상에서 발견된 탄을 분실하면서 '무리한 작전으로 인해 오인 사격을 가해놓고 비판여론을 숨기려 일부러 탄환을 숨기려 한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한 정부가 작전 성공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석해균 선장의 부상을 축소한것 아니냐는 의혹이 민주당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2015년 -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영도구 청학동에서 40톤 짜리 크레인에서 구조물이 추락해 근로자 4명이 사망하였다.

 

 

 

문화

1977년 - 대한민국 최초의 지방자치단체 발행 신문인 부산시보가 창간되었다.

2017년 -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용문역 ~ 지평역 연장 구간이 개통되었다.

2018년 - 문화방송 리얼리티 프로그램 신비한TV 서프라이즈 800회 특집이 방영되었다.

 

탄생

1338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 제3대왕 샤를 5세.

1859년 - 구한말의 외교관, 독립운동가 이준.

이준(1859년 12월 18일(음력) ~ 1907년 7월 14일)은 구한말의 검사이자 외교관이다. 1907년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 활동 중 순국했다.

이준의 본관은 전주, 자는 순칠, 아호는 일성, 해사이다. 조선 추존 군주 환조의 아들인 완풍대군의 18대손이며 함경남도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 발영동에서 부친 병관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익혔고 성장해서는 고향 북청 학원을 설립, 교육 사업에 종사하다가, 상경하여 박영효 등 개화파 인물들과 교유하였다.

36세에 법관양성소를 1회 졸업생으로 나오고 나서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검사 5년차에 법무대신 이하영을 탄핵하였다.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아서 박해받기도 할 정도로 강직한 근무를 했다고 한다.

1895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가담해 활동하였으며, 갑오경장시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귀국후에는 독립협회와 감리교 상동교회의 활동을 재개하였다. 당시 상동교회는 전도사 전덕기를 중심으로 개화파 청년들이 많이 모여든 장소였다.

1902년에는 민영환의 비밀 결사 개혁당에 가담했으며, 1904년 공진회 회장을 지냈다. 공진회 활동으로 유배 생활을 한 뒤, 1905년 국민교육회 회장에 취임하고 보광학교, 오성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 계몽 운동에 힘썼다.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제국차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상동교회의 전덕기, 이동휘, 이회영 등은 고종의 밀사를 파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고종에게도 신임장을 받아 특사로는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이준이 정해졌다. 이준은 고종의 신임장을 들고 만주의 이상 용정 러시아의 이위종과 차례로 합류하여 헤이그로 향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영일 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종이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였다.

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순국다. 당시 네덜란드 유력 일간지 헤트·화데란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한 탄압에 항거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같이 온 특사 이준씨가 어제 숨을 거두었다. 일본의 영향으로, 그는 이미 지난 수일동안 병환중에 있다가 바겐슈트라트에 있는 호텔에서 사망하였다.

— 헤트·화데란트, 1907년 7월 15일자 기사

오랫동안 이준이 할복 자결 것으로 잘려져 왔으나, 이는 당시 일제의 억압에 대한 반일적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준이 영웅화되면서 할복 자결설이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 문교부장관의 요청에 따른 조사 결과, 국사편찬위원회는 1962년 "할복 자결 아닌 쪽"으로 판단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으며, 유해는 본래 헤이그에 묻혀 있다가 1963년 봉환되었다.

서울 장충단 공원에 동상이 세워져 있고, 헤이그에는 이준 열사 기념관이 이준열사기념교회(감리교)가 건립되어 있다.

사위 류자후는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한 달 간 돈암장에서 이승만 내외를 보필하였다. 그러나 관상을 볼 줄 알던 류자후는 이승만의 관상이 좋지 않다며, 이승만의 비서들이 11월부터 귀국하거나 돈암장을 찾아오자 서서히 그들에게 일을 넘기고 이승만의 곁에서 물러나왔다.



1900년 - 대한민국의 종교인 김진수.

1904년 - 대한민국의 작가 홍효민.

1905년 - 프랑스의 의상 디자이너 크리스찬 디올.

1918년 - 미국의 군인 리처드 윈터스.

1924년 - 영국의 배우 베니 힐.

1929년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엄기선.

엄기선(1929년 1월 21일 ~ 2002년 12월 9일) 또는 엄기매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이다.

1929년 1월 21일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청사 옆 건물에서 태어났다. 10세의 나이였던 1938년 12월부터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광복전선청년전시공작대에 오희옥 등과 함께 합류하여 박영준, 이재현, 노복선과 함께 일본군 내의 한국인 병사들을 상대로 공연과 연극을 통해 한국인 병사들의 광복군 합류를 선전하는 초모공작을 펼쳤다.

연극과 무용을 통해 대원들의 사기를 복돋우면서 중국 국민들에게 한국인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리고자 노력했다. 1943년부터 일본군 내 한국인 병사들과 국내 동포, 연합국을 상대로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널리 알리고자 당시 충칭임시정부 선전부장이던 아버지 엄항섭을 도와 선전활동을 계속했다. 또한 투치아오에 위치한 중화민국군의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국인 사병들을 위문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에는 서울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하고 경기도 여주에서 교사로 활동하던 중 전쟁미망인들과 결손가정의 열악한 생활에 충격을 받아1964년, 대한민국의 대전에 결손가정을 돕는 루시모자원을 세워 사회복지활동을 이어가던 중 2002년 12월 9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1938년 - 뉴질랜드의 정치인 짐 앤더튼.

1947년 - 중국의 반체제 인사 레비야 카디르.

1953년 - 미국의 기업가 폴 앨런.

1956년 - 미국의 배우 지나 데이비스

1967년 - 대한민국의 현 야구 코치 , 전 야구 선수 최훈재.

1968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윤석.

1970년 - 크로아티아의 전 축구 선수 알렌 복시치.

1972년 - 대한민국의 야구 코치 및 전 야구 선수 이근엽.

1975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윤경.

1977년 - 사우디아라비아의 축구 선수 후세인 술라이마니.

1980년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선수 이경원. / 일본의 성우겸 가수 미즈키 나나.

1981년 - 대한민국의 래퍼 앤디 (신화). / 대한민국의 가수 정려원 (샤크라).

1985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우규민. / 일본의 성우겸 가수 하라 유미.

199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조수향.
 
1994년 - 대한민국의 가수 강승윤 (위너). / 대한민국의 가수 김예림 (투개월).

1995년 - 대한민국의 모델, 배우 최아라.

 

 

사망

1118년 - 교황 파스칼 2세

1542년 - 일본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 아자이 스케마사

1733년 - 영국의 경제학자 버나드 맨더빌

1793년 - 프랑스의 왕 루이 16세.

1862년 - 체코의 소설가 보제나 넴초바.

1892년 - 영국의 수학자 존 쿠치 애덤스.

1901년 - 미국의 발명가 일라이셔 그레이.

1919년 - 대한제국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1대 황제 광무황제.

고종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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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2년,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 운현궁 사저에서 흥선군 이하응과 부인 여흥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흥선군은 남연군의 넷째 아들이며,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지만, 사도세자의 셋째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따라서 남연군은 영조의 법적 증손자가 되어 순조와 동항렬이 되었으며, 아버지인 흥선군은 익종과 동항렬이 되고 고종은 헌종과 동항렬이 되었다.

어머니 여흥부대부인 민씨는 본관이 여흥이며 민치구의 딸이다. 고종 즉위 후 부대부인의 봉작을 받았다. 훗날 고종 비 명성황후 가문에 입적되어 양오라버니가 되는 민승호와, 임오군란 때 참살당하는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친누나이기도 하다.

고종에게는 생모 여흥 민씨 소생의 동복형제인 이재면과, 친누이 2명이 있었고 서형인 이재선과 이복누이 1명이 있었다. 그러나 흥선군은 경제적으로 무능하였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정조의 직계후손이 끊어지고 철종마저 후손이 없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이복형인 회평군과 영평군의 아들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 사이로 압축되었다. 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지만 친조카들이 있었으므로 흥선군은 익종 비 신정왕후 조씨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그에게 자신의 아들들 중 한 명을 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과 대왕대비 조씨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 왕이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대왕대비 조씨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군이 대원군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국왕의 생부로서 섭정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벌열들을 가급적 권력에서 배제하고 남인과 북인들을 등용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 최대의 정치기구로서 의정부의 역할을 대신하던 비변사를 폐지하였다. 의정부와 삼군부를 부활시켜 비변사에 집중되어 있던 정치, 군사적 기능을 양분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군대를 파병한 명나라 만력제의 사당인 만동묘를 철폐하고, 그 밖에 붕당의 근거지이고, 면세의 특권을 누리며 온갖 폐단을 일삼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여 정리하였는데,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의 반발을 샀다. 대원군은 서원 철폐와 관련하여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서원 철폐의 강한 의지를 내비치었다.  

이어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은결을 색출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군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군포를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고 각 관청이 맡은 일과 세칙을 정리한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의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규범을 재정비하였다.

또한 왕실의 권위회복을 위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상승을 초래하고, 원납전 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성을 띤 기부금을 징수하였으며, 양반 소유 선산의 묘지림을 벌목하고, 도성 통행세를 거두고 백성에게 노역을 부과하였으므로, 백성과 양반 모두의 반발을 샀다. 이러한 대원군의 정책은 양반과 유생들의 격렬한 반감을 사게 되어 훗날 실각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고종 초기에 프랑스 군대와 미국 군대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사회가 불안정해지자 서학(천주교)과 동학이 백성들 사이에서 퍼졌는데, 대대적인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도들의 수는 증가하였다.

1866년 1월, 대원군은 러시아의 남하에 위기를 느끼고 견제하고자, 프랑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였으나 프랑스 주교가 동의하지 않자, 정치적 이점을 얻을 수 없을거라 여겨, 프랑스인 신부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도 수천인을 박해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미국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주민에 대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자, 평양 지역민과 평안도 감사 박규수에 의해 선박이 불타고 선원들이 모두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5년후인 1871년에 발생하는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66년 9월,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의 로즈 제독이 군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하였으나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등에게 격퇴당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의 외규장각을 불태우고 관련 유물들을 약탈하였다.

1868년에는 고종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가 도굴당할 뻔한 일이 발생하였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 남연군묘를 도굴하여 남연군의 시신을 두고 협상하려 하였으나 회곽으로 단단히 굳어버린 묘지를 파지 못하고 실패에 그쳤다.

1871년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 존 로저스의 지휘 아래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미군은 초지진과 덕진진, 광성보를 연이어 공격하였는데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전사하고 미군은 승전의 의미로 '수자기'를 탈취하였다. 미군이 탈취한 수자기는 현재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었다.

이 시기 서양 제국과의 일련의 사건을 겪은 고종과 대원군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거부 의지를 천명하였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는 것은 화의를 주장하는 것이고,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이를 자손 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비문을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 척화비

1869년 1월 31일(1868년 음력 12월 19일) 왕정 복고의 사실을 알리는 일본 제국의 사절단이 조선 동래에 도착하였다. 이때 조선 측은 사절 대표가 일방적으로 관직과 호칭을 바꾼 점, 조선이 준 도서가 아닌 일본 정부가 새로 만든 도장을 사용한 점, 황제란 용어를 사용한 점 등을 문제 삼아 서계를 접수하지 않았다.

1872년(고종 9년) 음력 1월 일본 사절단이 3년 동안 기다리다가 동래에서 철수한다. 그 뒤 일본 외무성은 1873년(고종 10년) 음력 2월 대마번에 대조선 외교를 관할케 하는 관행을 폐지하고, 왜관의 명칭을 무단으로 “대일본국공사관”이라고 바꾼다. 이를 “일본 외무성의 왜관 점령 사건”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과 일본의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된다.

1873년(고종 10년) 양력 5월 일본에서 즉시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는 사이고 다카모리 등의 관료가 실각하고, 또한 조선에서는 그해 음력 12월에 최익현의 탄핵 상소로 말미암아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비로소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여흥 민씨에 의한 척신 정치가 시작되었다.

1875년(고종 12년) 음력 2월부터 고종의 어명으로 조선은 일본과의 국교 수립에 나선다. 그러나 일본은 사신 억류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시간을 끈다. 같은 해 9월 20일(음력 8월 21일)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조선을 압박하고, 1876년 2월 27일(음력 2월 3일) 조선과 일본 양국간에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다.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영토 주권과 사법주권이 무시된 불평등 조약이다. 이 조약의 결과 부산(1876년), 원산(1880년), 인천(1883년)이 차례로 개항되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조선 정부는 세계 정세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개화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따라 내정개혁을 실시하였다. 고종은 군제개혁에 관심을 기울여, 과거의 구식 군대인 5군영을 무위영과 장어영의 양영으로 개편하고, 일본식 군제를 도입하여 교육받은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조직하였다. 또 진신 자제의 연소하고 총민한 자를 골라 사관생도라 하고 신식 무예를 연마하게 하였다.

또한 행정기구의 개혁에 착수하여 청나라 정부의 총리아문 기구를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그 밑에 사대.교린.군무.변정.통상 등 12사를 두어 각기 사무를 나누어 보게 하였다.

한편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대원군 집권기부터 서양과의 통상 반대와 척화주전론이 제기되었는데, 대원군의 대외 정책과 맞물렸다. 하지만 대원군이 하야하고 정부가 개항과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최익현과 유인석 등의 유생들이 왜양일체론과 개항불가론을 제기하였다.

1880년(고종 17년), 2차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이 일본주재 청나라 공사 황준셴이 쓴 외교서인 조선책략을 갖고 들어왔는데,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일본, 미국 3국과의 유대관계를 공고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고종은 미국과의 수교에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이에 유생들이 반발하여 이만손과 홍재학 등이 만인소와 척화상소를 올려 개화정책을 반대하고, 책을 들여온 김홍집을 처형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정부는 1882년 4월, 서양의 나라들 중 최초로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통해 최혜국 대우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1882년(고종 19년) 6월,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13개월 간 급료를 받지 못한 구식 군대의 군인들의 불만으로 임오군란이 발발하였는데, 이러한 군란을 초래한 원흉으로 민씨 척족과 명성황후가 지목되었고, 구식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궁궐을 침범하여 왕비를 색출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이미 장호원으로 피신하였다.

구식 군인들의 추대로 정계를 떠나있던 흥선대원군이 10년만에 재집권하였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가 이미 죽었다고 선포한 뒤 황후가 입던 옷을 관에 넣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으로 임오군란은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톈진으로 압송된다. 청나라 군대의 도움으로 고종과 명성황후는 복권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고문관을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였는데, 마젠창과 위안스카이, 독일인 묄렌도르프 등이 파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와 일본의 양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제물포조약)

또한 청나라와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청나라 상인의 통상권과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 등은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켜 온건적인 개화파 대신들을 제거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으로 이궁시켜 14개조 정강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12월 6일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면서 갑신정변의 주모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화되고, 일본에 대한 불신을 키우게 된다.

1885년,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던 영국 군함 세 척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영국군은 섬 안에 포대를 구축하고 병영을 설치하였으며 섬의 이름을 포트해필턴이라 명명하고 영국 국기를 게양하였다. 이들은 청나라의 중재로 1887년 철수하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유길준과 독일 부영사 부들러가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하자는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1886년 사노비의 세습을 폐지하였다. 최초의 공립학교인 육영공원과, 선교사가 세운 이화학당이 이해에 개교하였다. 1887년 경복궁 내에 전등이 가설되었다.

1894년 4월, 동학 농민 운동이 시작되고,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시작된 농민봉기가 거대화되었다. 동학농민군은 5월 31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정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목적으로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다. 6월 6일, 청나라 군대가 아산만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왔는데, 9년전인 1885년 청나라와 일본 양국이 맺은 톈진조약의 내용에 의거하여, 이틀 후인 6월 8일, 일본 또한 군대를 파병하여, 인천항으로 일본군대가 들어왔다. 파병 요청 하지도 않은 일본군이 조선으로 진주하자,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정부는 서둘러 농민군과 화약을 맺고, 양국 군대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철수요구를 무시하고 7월 23일, 군대를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하고 왕궁을 포위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파를 축출하였다. 김홍집을 비롯한 중도 개화파를 중심으로 친일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개혁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의 5개조 개혁안의 제출로 시작되었는데, 조선 정부는 교정청에서 독자적인 개혁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하였다.

이때 친일 정부는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독단으로 파기하고 일본군에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하였다.

7월 25일, 일본은 청나라에 국교 단절을 통보하고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의 전장터는 조선이었다. 충청도와 황해도, 평안도 등이 청나라-일본 양국군대의 전장터가 되었고, 남부지방은 농민군과의 국지적 교전이 계속되어 한반도 전체가 전쟁터가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승전국인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요동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게 된다. 일본의 요동반도 획득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러시아는, 동맹관계에 있던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도록 압박하였다. 일본은 이 세 나라의 압력에 굴복하여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는데, 이 사건이 삼국 간섭이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 사태를 주시하고,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의 힘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895년 8월 25일, 친러성향의 제3차 김홍집내각이 수립되었는데 조선 내에서 러시아의 세력확장을 견제하던 일본은, 친러시아적 성향의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아래, 1895년 10월 8일, 경복궁 내 건청궁 곤녕합 옥호루를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였다. 일본인 낭인과, 조선인 협력자[7]들에 의해 왕비가 제거되고 고종과 왕세자는 덕수궁에 감금되었다.(을미사변)

그 후 김홍집은 고종을 감금하고 을미개혁을 시행하여 연호를 ‘건양’으로 고치고 태양력을 채용하였으며 단발령을 공포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은 유생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난다.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당시 친러파였던 이완용 등의 종용과,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찰나, 왕태자 척(훗날의 순종)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으며, 이때 왕태자비 민씨는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한 그날 고종은 을미 4적으로 김홍집,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을 거론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주필한 고종은 경복궁 및 경운궁을 오가면서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개조사업를 명한다. 1896년 9월 29일 조칙(내부령 제9호)을 내려 도시 개조 사업을 한성 판윤 이채연·총세무사 맥레비 브라운에게 시행토록 한다. 그에 따라 독립문 건립을 독립협회로 하여금 추진토록 한다.

그리고 종래의 경복궁과 운종가 중심의 도로 체계 대신에 경운궁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상 도로와 환상 도로 및 그 외접 도로를 새로 개통하였으며, 기존 도로를 정비한다. 또한 경운궁 앞은 백성들이 집회를 열 수 있도록 광장을 마련했는데, 이는 현재의 서울광장 위치이다. 이 시기에 시민공원 또는 시민광장도 등장했는데, 탑골공원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의 영향력이 막강해지고 열강의 이권 각축 경향을 보였으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환구단(황제로 즉위)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후에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새로 정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였다.

“봉천 승운 황제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과 기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 때에 이르러서 마한, 진한, 변한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 왕위에 오르신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을 세웠으니, 예악과 법도는 당요와 우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께서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와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의 남쪽에서 천지에 고유제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으로 정하고 이 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으며, 종묘와 사직의 신위판을 태사와 태직으로 고쳐 썼다. 왕후 민씨를 황후로 책봉하고, 왕태자를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 고종실록 광무 1년(고종 34년) 10월 13일

대한제국 선포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서재필 등이 독립 협회를 창단하여 대한 독립의 공고화와 입헌군주제의 수립을 호소했으나, 조정의 보수 대신들이 지원하는 황국 협회가 새로이 결성되어 양측은 노골적으로 대결하였다. 결국 고종은 두 단체를 군대로 하여금 모두 무력으로 강제 해산시키고 정국은 다시 소강 상태가 되었다. 1899년에는 이미 방콕, 교토 등에 다니고 있던 노면전차를 도입하였다.

이것을 고종이 신문물에 대해 넓은 이해와 포용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윤웅렬, 유길준, 윤치호 같은 이들은 대한제국 선포에 회의적이었다. 단순히 “국호만 바꾸고 칭제건원을 한다 하여 조선의 국왕에게 없던 용기가 생겨나거나 국격이 더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구본신참의 기치 하에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전제군주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여 교전소와 법규 교정소를 설치하고 시위대와 진위대의 증강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고자 원수부를 설치하였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독립협회가 반대하였기 때문에 고종에 의해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청통상조약을 통해 청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1900년에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하였다. 울릉도와 독도를 울도군으로 승격시켰다.

1902년에는 간도에 간도시찰원을, 1903년에는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였다.

행정개혁은 양지아문을 설치하여 양전사업을 실시했다. 1901년 지계아문을 설치하여 지계를 발급하였는데, 전국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으나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를 확립하였다.

1898년 1월 8일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사망했다. 이어 2월 22일 흥선대원군도 사망하였다. 고종은 을미사변의 배후 중 한 사람인 대원군을 경원시 하였고, 1898년 흥선대원군이 죽었을 때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을 만큼 부자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죽자 한성부에서는 7일장을 했으나, 고종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고종은 그의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고, 흥친왕 이재면은 혹시나 자신도 죽임당할까봐 대원군의 부음을 알리는 것을 머뭇거리면서 주저했다. 그러나 상여가 노제를 한 뒤 서문으로 나갈 때 고종은 마루에 서서 담넘어로 바라보며 오랫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 통곡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한다. 상여가 공덕리로 가는 것을 보고 서대문 밖까지도 쫓아갔다고도 한다.

 

1899년 조카 이준용은 직접 쿠데타(고종의 정부을 전복하는 것)를 기획하였다. 이전까지의 쿠데타가 동학 농민군이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된 것이라면 이번 쿠데타에 이준용 본인이 직접 기획하고 사전 준비까지 한 것이었다. 그 해에는 이준용 추대 관련 역모가 3건이 적발되었다.

이준용이 일본에서 다시 활동을 개시할 때 쯤에 벌어진 장윤상 발언 사건과 어용선 사건은 고종 정부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전 참봉 장윤상이 자신이 일본에서 이준용을 모셨다고 하면서 1899년 1월 이준용이 귀국하면 고종 대신 국왕이 되거나 대통령에 오를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와전되어 "박영효가 반역하여 이준용을 추대하고 고종을 태상왕으로 만들 것이라"는 소문으로 번져나갔다. 이에 4월 12일 소문의 발원자인 장윤상은 교살형에 처해졌고, 그 사실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이유로 유학 신현표와 전 순검 이지현은 태 1백 대에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또한 3월에 어용선 등이 일본에서 그를 모셔다가 현 정부를 전복하고 민주공화정을 표방해 대통령제를 실시하려 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반정부 인사들이 이준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소문이나 움직임은 고종에게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장윤상 사건과 어용선 사건이 처리된 직후인 1899년 6월 고종을 폐위하고 이준용의 옹립을 기도했다는 고발에 따라 윤태영 등 3인이 체포되었는데, 이는 고종 정부가 이준용 추대 모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1900년 안경수, 권형진을 처형 직전 양인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1894년 7월에 이준용이 명성황후와 세자궁을 처단하려 하였고, 이러한 역모 사건은 결국 을미사변으로 이어졌다는 진술이 나왔다. 이에 고종 정부의 고관들인 김성근, 신기선, 조병식, 윤용선, 민종묵 등과 재야의 유생들은 1900년 6월부터 역모를 자행한 이준용을 일본에서 불러다가 처형하자는 상소를 되풀이하여 올렸다. 그러나 고종은 그때마다 윤허하지 않았다.

6월 3일 궁내부협판 겸 대신서리 윤정구의 탄핵이 있자, 고종은 칙령을 내려 이준용의 궁내부 특진 관직을 박탈했다. 그러자 평리원과 학부에서 외부에 조회하여 1900년 6월 19일에 주일본공사 이하영에게 이준용을 즉각 잡아서 돌아오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준용은 귀국을 거절했다. 6월 20일 이하영은 "이준용이 꼼짝하지 않고 듣지 않으니 잡아서 돌려보낼 길이 없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일본 망명 직후부터 이준용은 귀인 엄씨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1899년 4월 이준용은 일본망명객들이 벌인 엄상궁의 왕비책봉에 대한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21] 그는 유길준, 권동진, 조중응 및 기타 2~3인과 함께 논의한 결과 신분이 낮은 엄상궁을 왕후로 삼는 것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조치라는 이유를 들어 엄상궁의 왕후 책봉을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담아 궁내부대신 이재순에게 충고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또한 이준용은 아버지 흥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엄상궁 같은 미천한 소생이 국왕의 총애를 얻은 것을 기화로 간신배들이 벼슬을 얻기 위해 엄상궁을 왕비로 책봉하려 기도하고 있으니, 이러한 때에 왕실에 관계된 이들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준용이 엄상궁의 왕비 책봉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인 것은 엄상궁이 자신의 아들 황자 이은의 권력 승계를 위해 일본에 망명중인 이준용과 의친왕 등을 극력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서 이준용의 엄상궁 왕비 책봉 반대운동은 도리어 그의 신변에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그러나 일본정부에서는 정치 망명객이라는 이유로 이준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고 고종은 밀지를 내려 자객들을 일본 도쿄 부로 파견했지만 실패한다. 이준용 역시 양돼지라는 별명과 달리 거구에 비교해서 상당히 민첩하게 움직였고 무예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으므로 고종의 이준용 제거 계획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갔다.

1900년 9월 27일 육군 참위 김규복(金奎福), 노백린, 어담 등 19인에 일본 유학을 명하였다.

고종은 일본의 침탈에 대비하여 1902년 6월에 정보기관 제국익문사를 설치하고, 1903년 5월 육군과 해군의 창설을 위한 준비를 지시한다. 군대 창설과 관련하여 1903년 3월 15일 징병제도 실시를 예정하는 조칙을 내렸으며, 서양의 징병제와 조선의 5위 제도를 절충하는 군제 개혁을 예정하고 그에 따라 협력을 당부한다. 또한 1903년 시위대 1만2천(최종적으로 1만6천) 병력을 갖추고, 용산에 군부 총기제조소를 건립하였다. 이러한 군대 창설 및 그와 관련한 일련의 성과는 을사조약 이후에 계획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과는 철거되었고, 급기야 1907년 일본군은 군대를 풀어 한양 내에 있는 주변 시내를 장악하고 군대 해산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군대가 해산이 된다.

고종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한국의 황성(한양, 지금의 대한민국 서울)을 침탈하게 된다는 점을 예견하고, 1903년 8월 15일 고종 황제가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보내어 동맹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다.고종은 그 뒤 1904년 1월 23일 대외적으로 중립국을 선포하였으나, 서울을 점령한 일본의 강요로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

일본의 특명전권대사 자격으로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 조선통감는 다음 날인 11월 10일 고종 황제에게 일왕의 “짐이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노니 대사의 지휘를 일종하여 조치하소서.”라는 내용의 친서를 바쳐 고종을 위협하고 1905년 11월 15일 다시 고종 황제에게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 무렵, 주 조선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주조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일본으로부터 증원군을 파송받아 궁궐 내외에 물샐 틈 없는 경계망을 펴고 포위함으로써 대한제국 황궁은 공포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그러나 고종 황제는 통감의 집요한 강요에도 불구하고 조약 승인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상대로 위협·매수에 나섰다. 하야시 곤스케는 11월 11일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 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체결을 강박하고, 같은 시간 통감은 모든 대신과 원로대신 심상훈을 그의 숙소로 불러 조약 체결에 찬성하도록 회유와 강압을 되풀이하였다.

이러한 회유와 강압 끝에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된 통감과 하야시 곤스케는 마침내 11월 17일 경운궁에서 어전회의를 열도록 했다. 그러나 회의는 침통한 공기만 감돌았을 뿐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고종황제는 강압에 의한 조약 체결을 피할 목적으로 의견의 개진 없이 대신들에게 결정을 위임한 상태였다. 어전회의가 5시간이 지나도록 결론에 이르지 않자 초조해진 통감은 하세가와 군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대동하고 일본헌병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궐내로 들어가 노골적으로 협력에 동의하라고 고종에게 강요 및 협박을 했다.

고종은 생각해보겠다는 말로 통감을 달래어 내보냈다. 그는 직접 메모용지에 연필을 들고 대신들에게 가부를 따져 물었다. 그때 갑자기 한규설 참정 대신이 소리 높여 통곡을 하기 시작했던지라 별실로 데리고 갔는데, 그가 “너무 떼를 쓰거든 죽여 버리라.”라고 고함을 쳤다.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만이 무조건 불가를 썼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책임을 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의를 표시하였다. 이 찬성한 다섯 명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통감은 각료 8대신 가운데 5대신이 찬성하였으니 조약 안건은 가결되었다고 선언하고 궁내대신 이재극을 통해 그날 밤 황제의 칙재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같은 날짜로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 간에 이른바 이 협약의 정식 명칭인 ‘한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체결은 한국 내에서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거국적인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일제는 이를 억압하였다.

1905년 12월 1일 윤치호는 한성부 저잣거리에서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고, 그날 을사 보호 조약에 서명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상소하였다.

지난 갑오경장 이후로 자주권과 독립의 기초를 남에게 의지한 적 없이 여유 있게 지켜온 지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정이 잘 다스려지지 않아 하소연할 데 없는 백성들이 모두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졌고 외교를 잘못하여 조약을 체결한 나라와 동등한 지위에 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찮은 소인들에게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궁실을 꾸미는 데 힘쓰게 되니 토목 공사가 그치지 않았고, 기도하는 일에 미혹되니 무당의 술수가 번성하였습니다. 충실하고 어진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니 아첨하는 무리들이 염치없이 조정에 가득 찼고, 상하가 잇속만을 추구하니 가렴주구 하는 무리들이 만족할 줄을 모른 채 고을에 널렸습니다. 개인 창고는 차고 넘치는데 국고는 고갈되었으며 악화가 함부로 주조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두 이웃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고 우리나라에 물자를 자뢰하니 온 나라가 입은 피해는 실로 우리의 탓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새 조약을 강제로 청한 데 대하여 벼슬자리를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들이 끝끝내 거절하지 않고 머리를 굽실거리며 따랐기 때문에 조정과 재야에 울분이 끓고 상소들을 올려 누누이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로 일치된 충성심과 애국심은 어두운 거리에 빛나는 해나 별과 같고 홍수에 버티는 돌기둥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지난날의 조약을 도로 회수해 없애버릴 방도가 있다면 누가 죽기를 맹세하고 다투어 나아가지 않겠습니까마는, 지금의 내정과 지금의 외교를 보면 어찌 상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지금이라도 든든히 가다듬고 실심으로 개혁하지 않는다면 종묘사직과 백성들은 필경 오늘날의 위태로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독립의 길은 자강에 있고 자강의 길은 내정을 닦고 외교를 미덥게 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일을 그르친 무리들을 내쫓음으로써 민심을 위로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을 조정에 불러들여 빨리 치안을 도모하며, 토목 공사를 정지하고 간사한 무당들을 내쫓으며 궁방의 사재 축적을 엄하게 징계하고 궁인들의 청탁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 일이 없게 할 것입니다. 자강의 방도와 독립의 기초가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힘쓰고 힘쓰소서.

—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대한 광무 9년 양력 12월 1일자 5번째기사

그러나 고종은 윤치호의 상소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관련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12월 내내 한성부를 왕래하며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 전단지를 배포했다. 이후 강원도 삼척군과 울진군에서 을사조약 무효 선언과 동시에 의병이 일어났고 쇠퇴해가던 의병 활동에 불을 지피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 힘을 얻은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한다.

 

훗날 고종의 무효선언서의 존재를 확인한 대한민국 정부는 일본에 수교하는 조건으로 을사조약 무효, 파기를 요구한다. 대한민국과 일본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서 을사조약(제2차 한일 협약)을 포함하여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한 번 더 확인하였다. 후일 정상수 명지대 교수는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나타내는 독일어 전보를 발견하였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고자, 1907년 4월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특사를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파견하였는데(헤이그 특사 파견), 이 사건을 두고 일본은 고종에게 퇴위할 것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압력으로 고종은 1907년 7월, 황태자에게 양위하였으나 양위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불참하는 기이한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1907년 8월 17일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제로 영친왕을 결정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32]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영친왕은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영친왕이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점과 일본의 영친왕 지지를 내심 못마땅해 했지만 이준용의 존재는 그에게 생각의 기회를 주지 못했다.

고종은 1919년 1월 21일 아침 6시경 덕수궁 함녕전에서 68세로 사망했다. 고종의 공식적 사인은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이지만, 아직까지 고종의 사망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었고,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무관 출신 한진창은 고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진창은 자신의 누나 한진숙의 시조카 윤치호에게 고종이 독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919년 초까지만 해도 윤치호는 고종 독살설에 부정적이었다.

고종황제가 이왕세자와 나시모토 공주의 결혼식을 꼭 나흘 앞두고 승하하는 바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은 얘기다. 예전에 이미 굴욕을 감수한 고종황제가 이제 와서 하찮은 일에 억장이 무너져 자살했다는 게 말이 되나? 더구나 어린 왕세자의 일본 공주의 결혼이야말로 왕실의 입장에서는 경사스런 일이 아닌가? 이 결혼을 통해서 두 왕실간의 우호관계가 증진될 것이고, 왕세자는 조선의 어떤 여성보다도 더 우아하고 재기 넘치는 신부를 맞이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다. 만약에 고종황제가 병합 이전에 승하했더라면, 조선인들의 무관심 속에 저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선인들은 복받치는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옷소매를 적셔가면서 고종황제를 위해 폭동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

— 윤치호일기, 1919년 1월 26일 일요일

그런데 한진창의 증언을 듣고 얼마 뒤 윤치호는 입장을 선회하게 된다. 윤치호는 자신이 한진창에게 들은 내용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기록해 놓았다. 윤치호와 한진창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다가 죽어갔다.

고종 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민영달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30센티 미터 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고 했다.

윤치호는 한진창 역시 고종독살설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들었는데,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내관) 등과 함께 시신의 염을 한 민영달이 한진창에게 이 내용들을 말해주었다고 하였다.

한편 일본 궁내성 제실회계심사국 장관인 구라토미 유자부로의 일기에 의하면 고종이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수뇌부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적고 있다. 1919년에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조선합병의 부당함을 호소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고종을 독살했다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이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고종으로 하여금 1905년의 을사늑약이 유효했음을 확인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절하여 독살하였다는 일본 정계의 풍문을 일기에 기록하였다. 또한 이시하라 겐조와 다나카 우쓰루와 같은 관료들에게 고종 독살에 대한 풍문을 묻기도 하였다.

"(전 총리)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에게 뜻을 전해, 하세가와로 하여금 이태왕(李太王·고종)에게 설명하게 했지만 태왕이 수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감추기 위해 윤덕영·민병석 등이 태왕을 독살했다는 풍설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寺內正毅ヨリ長谷川好道ニ意ヲ傳ヘ長谷川ヲシテ李太王ニ說カシメタルコトアルモ太王ガ之ヲ諾セサリシ故其事ヲ秘スル爲メ尹德榮閔丙奭等ノ太王ヲ毒殺シタリトノ風說アリトノ話ヲ聞キタル

— 구라토미 유자부로 일기, 1919년 10월 26일 일요일



1924년 - 러시아의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

1938년 - 프랑스의 마술사이자 영화 제작자 조르주 멜리에스

1950년 -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에릭 아서 블레어).

2007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유니.

2012년 - 대한민국의 드라마작가 손문권.

2016년 - 대한민국의 무용가 강선영.

201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전태수.

2018년 - 일본의 축구선수 호사카 쓰카사.

2019년 - 프랑스의 귀족 앙리 도를레앙.

2019년 -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에밀리아노 살라.

 

기념일

알타 그라시아 성녀일(Día de la Altagracia): 도미니카 공화국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로마 가톨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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