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22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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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506년 - 스위스 근위대 150명이 바티칸에 도착해 처음으로 임무 수행에 들어갔다.

1901년 - 에드워드 7세, 영국 국왕으로 즉위.

1905년 - 러시아 피의 일요일 사건 발생

동궁 앞에서 일어난 비폭력 시위

피의 일요일 사건은 1905년 1월 22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발생한 유혈사태를 말한다. 러시아 제국 당시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노동자들의 탄원 집회였다. 니콜라이 2세에게 탄원을 하기 위해 겨울 궁전으로 평화적인 청원 행진을 하는 것을 정부 당국에서 동원한 근위군이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불평등한 사회체제로 억눌린 러시아 민중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상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손에 들고 비폭력 시위를 벌였는데, 당시 실권자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유혈진압이라는 가혹한 탄압을 가한 사건이다. 죽은 사람만 500∼600명, 부상자 수천 명이나 된 대규모 유혈사태였다. 주동자는 사회 개혁론자이자 러시아 정교회 사제인 게오르기 가폰 신부였다.

피의 일요일의 학살은 ‘1905년 혁명’을 활성화시킨 국면의 시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게다가 1905년 혁명의 시작은 라이오닐 코찬과 같은 사학자는 그의 저서 1890-1918년 러시아 혁명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이끈 핵심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1905년 1월 9일 일요일에 개최된 청원 행진은 게오르기 가폰 신부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가폰은 러시아 정교회의 사제이자, 국가 비밀경찰의 급여를 받는 공작원이었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청원의 내용은 노동자의 법적 보호, 당시 일본에 완전히 열세가 있었던 러일 전쟁의 중지, 헌법의 제정, 기본적 인권의 확립 등으로 착취, 빈곤, 전쟁에 허덕이던 당시 러시아 민중의 소박한 요구를 대변한 것이었다.

당시 러시아 민중은 러시아 정교회의 영향 하에 황제 숭배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황제의 권력(왕권)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또한 러시아 제국의 황제는 동로마 제국을 계승한 기독교(정교회)의 수호자이라는 사상이다. 따라서 민중은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직접 탄원을 하면 정세가 개선된다고 믿었다.

행진에 앞서 거행된 파업에 참가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체 노동자 18만 명 중 11만 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지며, 행진 참가자는 6만 명에 달했다.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시위대를 중심가에 진입시키지 않을 방침이었지만, 너무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진입을 막지 못했고, 군대는 각지에서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를 했다.


발포로 인한 사망자 수는 불명확하다. 반정부 운동 측의 보고에서는 4,000명 이상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한편, 더 신중하게 추정한 보고에서도 사상자의 수는 1,000명 이상이 된다. 사건은 모스크바 시내로 빠르게 퍼졌으며, 시내 곳곳에서 폭동과 약탈이 이루어졌다.

가폰이 이 사건 이전부터 조직했던 노동자 집회는 당일 해산되었고, 가폰은 즉시 러시아 제국을 떠났다. 가폰은 같은 해 10월에 귀국했다가 이듬해인 1906년 4월에 사회혁명당에 의해 암살되었다.

미국 출신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댄서 이사도라 던컨은 이 사건 이틀 후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했다가 이 어수선한 상황을 자서전 나의 생애(My Life, 1927년)에 기록했다.

이 사건의 결과, 황제 숭배의 환상은 깨어졌고, 이후 ‘1905년 러시아 혁명’이라고 불린 전국 규모의 반정부 운동이 발발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때 시작된 러시아의 공산주의 운동은 1917년의 러시아 혁명(2월 혁명, 10월 혁명)의 원동력으로 성장해 간다. 성난 제정 러시아 민중들이 사회주의 혁명인 10월 혁명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은 가속화된다.



1924년 - 영국 노동당이 처음으로 다수당이 되어 램지 맥도널드를 총리로 하는 내각이 만들어지다.
 
1990년 - 대한민국에서 3당합당이 일어나다.

1999년 -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의 명칭이 국가정보원으로 변경되었고, 부총리급에 해당하는 안기부장의 명칭과 직급이 국정원장, 장관급으로 조정되었다.


2000년 - 대구 신남네거리 지하철 공사 현장 붕괴 사고 발생.

대구 신남네거리 지하철 붕괴 사고는 2000년 1월 22일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붕괴 사고이다. 이 사고로 3명이 숨지고 1명이 구조되었다.

2000년 1월 22일 오전 5시 12분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공사 현장 (현 대구 도시철도 2호선, 대구 도시철도 3호선 청라언덕역 부근)에서 공사를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복공판이 내려앉으면서 발생한 사고이다. 당시 그 위에는 공사장 직원의 지시로 승객 3명과 기사 1명, 총 4명이 타고 있는 동명교통 소속 601번 좌석버스 (현재 일반버스 600번)가 정차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이 버스는 결국 붕괴될 때 추락하고 말았다.

당시 붕괴될 때 버스 1대가 추락하여 버스에 타고 있던 운전기사는 구조되었고, 승객 3명은 매몰되었다 다음날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사고의 원인은 부실 시공에다 후속 사고에 대한 안전 조치가 미흡한 것이 원인이었다. 지하철 공사장이 붕괴 기미를 보인 것은 새벽 4시경이었다. 현장 근무자가 공사장 위의 복공판 일부가 내려앉은 것을 발견하고 30분 뒤 자체 보고를 하였다. 현장 소장은 5시 20분 현장에 도착하였고 경찰이 복공판이 꺼진 차선만 막고 차량을 통제해 반대편 차선에서 신호 대기를 하던 시내버스가 지반이 침하되며 추락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이 사고로 인해 대구 도시철도 2호선 공사장 전체 공구가 안전하다는 진단이 내려질 때까지 공사가 중단되었다. 지하철 공사에 쓰이는 중장비들도 모두 안전 점검을 받았다.


2000년 - 선수협 파동 사건 발생.

2000년 선수협 파동 사건은 KBO 리그 현역 선수들이 그들의 권익 보호를 목적으로 2000년 1월 22일 한국 프로 야구 선수협회를 결성하면서 한국 야구 위원회(KBO)와 마찰을 빚었던 사건이다.

2000년 1월 22일 새벽, 선수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하여 한화 이글스의 송진우 선수를 초대회장으로 한 '한국 프로 야구 선수협회'를 창립하는 총회가 열렸다. 그러나 이날 오전 한국 야구 위원회 측이 서명한 선수들 전원을 자유계약선수(FA)로 방출을 결의해 제1차 선수협 파동이 약 2개월간 발생하였다. 이후 2000년 프로야구 시즌 시작을 전후로 파동은 다소 사그라들었다.

2000년 프로 야구 시즌이 모두 종료된 이후인 12월 18일, 선수협 집행부가 28명의 선수들이 참석하여 재결성을 시도하자 이에 각 구단측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제2차 선수협 파동이 발생하였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2월 20일 한국 야구 위원회가 선수협 집행부의 주도자인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 심정수, 박충식, 최태원 총 6명을 자유계약 선수로 전격 방출 조치하게 되자 양측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KBO의 6인 전격 방출조치에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를 제외한 6개 구단 선수들이 크게 반발하여 집단으로 선수협 가입에 나서며 단체 행동에 나섰다. 이에 대해 각 구단들은 12월 26일 이사회를 열고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음 시즌 경기를 중단하겠다'는 강경 대응 입장을 천명하면서 사태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결국 사태는 2000년을 넘겨 2001년까지 이어졌고, 2001년 1월 4일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이승엽까지 선수협 가입을 선언했다. (유일하게 선수협 참가 선수가 없던 삼성 라이온즈가 여론의 비난을 받자, 이승엽 1인을 가입시켰다는 게 중론이다.) 이후 문화관광부의 중재 하에 선수협과 구단측이 막판 절충을 시도, 극적으로 합의를 도출하여 2001년 1월 20일, 두 번째 선수협 파동도 1년 여만에 막을 내렸다.

'한국 프로야구선수협회'와 KBO 간의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단 대표 6명 방출조치 철회
송진우, 양준혁, 마해영의 집행부 사퇴
선수들의 자율에 따른 새 집행부 구성
선수협 사무국은 새 집행부에서 구성
선수협 참여선수에 대한 불이익 금지

1차 선수협 파동의 주역이었던 1기 집행부, 2차 선수협 파동의 주역이었던 2기 집행부 인사가 전원 사퇴하고, 회장에 이호성 및 장종훈, 김태균 등으로 구성된 새로운 3기 집행부가 구성되었다.

선수협 파동 이후 협회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선수들은 각 구단 측에 의해 대부분 트레이드당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양준혁이 해태 타이거즈에 트레이드된 지 불과 1년 만에 트레이드되어 LG 트윈스로 이적하였고, 롯데 자이언츠의 마해영은 삼성 라이온즈의 김주찬, 이계성(현재 kbo 심판)과 2:1 맞트레이드되었다. 심정수는 심재학과 트레이드되어 두산 베어스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이적하였다. 그 밖에도 1기 집행부 시절 대변인을 맡았던 강병규가 두산 베어스에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는 등 선수협 결성의 후폭풍은 작지 않았다.

선수협은 프로야구 선수들에 대한 대표성은 갖고 있으나 정식 노조로 인정 받지는 못하는 단체였기 때문에 그 활동 범위에 근본적인 제약이 있었다. 이에 2009년 4월 28일 손민한 선수협회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선수 노조 설립을 공식 선언했으며, 이어서 5월에는 각 구단 대표 선수 10여 명이 두 차례에 걸쳐 노조 설립 추진위원회 회의를 갖고 본격적으로 선수 노조 설립을 위한 행보에 들어갔다. 선수협은 같은 해 12월 2일 선수 노조 설립 찬반 투표를 실시했으며, 그 결과 91%의 압도적인 지지로 설립 안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선수협의 노조 설립 움직임에 대해 8개 구단측과 한국야구위원회는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 실제로 각 구단측이 선수 노조 설립을 저지하기 위해 노조 설립 투표에 참가한 선수들에게 부당한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또한 선수 노조 설립이 시기상조라는 일부 여론과 이에 더해 삼성, LG 등 대기업을 구단주로 둔 일부 구단 소속 선수들이 노조 설립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내부적인 분열의 조짐도 있어 노조 설립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앞선 12월 투표에서 삼성과 LG 측 선수들은 투표에 불참했던 바 있다.



2008년 - 삼성 특검:삼성 에버랜드 물품 창고에 대한 압수수색을 계속 하였으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같은 날, 특검 수사팀은 이순동 삼성 전략기획실 사장과 이형도 삼성전기 부회장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하였다.

2014년 - 유럽우주국(ESA)이 허셜 적외선 우주망원경을 사용해 세레스가 수증기를 내뿜는 증거를 포착하다.

 

문화

2007년 - 대한민국에서 새 10,000원권, 1,000원권이 통용되다.

 

탄생

826년 - 제55대 일왕 몬토쿠

1348년 -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하륜.

1561년 -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

1788년 -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

1887년 - 독일의 심리학자 볼프강 쾰러.

1906년 - 미국의 작가 로버트 하워드.

1907년 - 영국 前 축구 선수 딕시 딘.

1916년 - 대한민국의 군인 이용문.

1921년 - 대한민국의 군인 신응균
 
1928년 - 대한민국의 언론인 방우영.


1953년 - 대한민국의 레슬링 선수 양정모.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직후 선수단 환영회 당시 양정모

양정모(1953년 1월 22일 ~ )는 대한민국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딴 레슬링 선수이다.

양정모는 1953년 1월 22일에 부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원이다.

1976년 제 21회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경기 자유형 62kg급에서 우승해 대한민국이 광복 후 참가한 올림픽 경기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1974년에 이어 1978년 아시안 게임 레슬링 경기에서도 우승해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했으며, 1975년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62kg급 3위, 1978년 세계선수권대회 준우승 등 경력이 화려하다.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행사 때 대회기 가운 반하여 올림픽기를 들고 관중들에게 손을 흔드는 적이 있으나, 현재 한국 조폐공사 레슬링부 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1953년 - 대한민국의 지휘자, 피아니스트 정명훈.

1955년 - 대한민국의 공무원, 정치인 예창근.

196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양금석.


1964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광석

김광석 거리의 김광석상

김광석(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은 대한민국의 싱어송라이터이다. ‘노래하는 철학자’로도 불린다. 2014년 제5회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장이 추서 되었다.

대구시에서 태어나 서울로 상경하여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가요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에 김민기의 음반에 참여하면서 데뷔하였으며, 노찾사 1집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동물원의 보컬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일반 대중에까지 알렸으며, 동물원 활동을 그만둔 후에도 통기타 가수로 큰 인기를 누렸다. 1996년 1월 6일 사망하였으나 사인 관련에 대한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2007년, 그가 부른 노래 중 하나인 서른 즈음에 가 음악 평론가들에게서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었다. 2008년 1월 6일에는 12주기 추모 콘서트와 함께 대학로의 학전 블루 소극장에서 노래비 제막식이 열렸다.

또한 2010년 11월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대봉동 신천 둑방길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조성되어 350미터의 길에 김광석의 삶과 노래를 주제로 다양한 벽화와 작품들이 들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2015년 11월 2일, 1975년부터 1990년까지 김광석이 살던 창신동 130-54의 양옥이 매각되었다.

1964년 1월 22일, 경상북도 대구시 대봉동 방천시장 번개 전업사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창신동(현재는 종로구 관할)으로 이주하여 서울창신초등학교, 경희중학교, 대광고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시절 현악부 활동을 하며 선배들로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고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으며, 대광고등학교 시절 합창부로 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1982년에 명지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하였고, 이후 대학연합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민중가요를 부르고 선배들과 함께 소극장에서 공연을 시작하였다. 1984년 12월 노래를 찾는 사람들 1집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85년 1월 입대하였으나 군 생활 중 큰형(김광동)이 사망함으로 인해 6개월 단기사병(방위병)으로 복무를 마치고 제대하였다. 복학해 다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 합류하여 1, 2회 정기공연에 참여한다. 1987년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함께 동물원을 결성해 동물원 1집과 2집을 녹음하였다.

1989년 10월 솔로로 데뷔하여 첫 음반을 내놓았으며, 이후 1991년에 2집, 1992년에 3집을 발표하였고, 1994년에 마지막 정규 음반인 4집을 발표하였다. 정규 음반 외에 리메이크 앨범인 다시 부르기 1집과 2집을 1993년과 1995년에 각각 발표하였다. 1991년부터 꾸준히 학전 등의 소극장을 중심으로 공연하였으며, 1995년 6월 29일(상품백화점 무너지던 날) KMTV 슈퍼콘서트를 찍었다. 그리고 1995년 8월 25일에는 1000회 공연의 기록을 세웠다.

1996년 1월 6일 새벽 4시 30분 자택 403호에서 전깃줄로 목 매 죽은 채 발견되었다. 향년 31세. 자살로 알려졌다. 시신을 화장한 후 사리 9 과가 나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유족으로는 부인(4년 연하녀 서해순, 1990년 결혼)과 딸(김서연), 어머니(이 달지), 큰누나(김 광나), 둘째형(김광복), 작은누나(김광득)가 있는데 큰형(김광동)은 김광석이 군 입대 도중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김수영)는 2004년 별세했다. 딸 김서연은 1991년에 태어났고 자폐성 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2007년 사망한 사실이 2017년 9월 뒤늦게 밝혀졌다. 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의 2016년 1월 23일, 1월 30일 방송분에서 김광석 20주기를 맞아 다시 김광석 편을 하였다.

부인 서해순은 타살이 아닌 자살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가족 및 지인들은 의혹을 제기했다. 세간에 알려진 김광석의 자살설에 대해 가족들은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김광석의 누나들은 "광석이는 '부모보다 먼저 가는 자식만큼 불효는 없다'라고 항상 말했다. 오래 살고 싶다고 했다" 라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이유가 없다는 모습을 보였다. 어머니 역시 "활발하고 마음이 약한 아이다. 자살할 아이가 아니다. 착하고 남한테 해코지할 사람도 아니다" 라며 아들의 자살을 믿지 못했다. 또, 김광석과 음악 동호회 활동을 했던 한 지인은 "돌아가시기 한 6개월 전쯤부터는 거의 매일 보다시피 했다"며 "자살했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다. 개인적으로 타살이라고 생각하는데 의문점들이 지금이라도 밝힐 수 있다면 밝혀져 김광석이 어떻게 돌아가시게 된 것인지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김광석이 죽었을 때 부인 서해순은 3가지 진술을 했다. 근데 다 다르다.

1. 티브이를 보다가 쿵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목에 줄을 매고 죽어 있었다.

2. 티브이를 보다가 김광석이 너무 추울까 봐 이불을 가져다주러 갔는데 죽어 있었다.

3. 잠을 자다가 쿵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 목에 줄을 매고 죽어 있었다. 고 말했다.

총 3가지 주요 의문점이 있었는데

1. 김광석이 목을 스스로 맸냐는 것,

2. 유서가 발견되지 않은 점,

3. 정말로 우울증이 있었냐는 것이다.

1번 의문의 근거는 목을 매달 전깃줄을 묶기 위해 쓰였어야 했을 의자가 발견되지 않았고 목을 매달 위치조차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살을 할만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주장이다. 또 지인은 "계단에 비스듬히 앉아있는 것처럼 해서 발견됐다. 줄이 늘어나야 사람이 서있을 거다. 근데 전깃줄이 늘어나냐"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고 김광석 자택은 현재 내부 공사가 이루어져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2번 의문은 고 김광석 씨는 메모광으로 유명하였는데, 아무런 유서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 김광석 첫째 자형은 "(김광석은) 메모가 아주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습관이 있다. 틀림없이 유서가 있을 것이다"라고 털어놨다.

3번째 이유가 된 고 김광석 씨의 부인 서해순 씨가 주장한 우울증 역시 지인 말에 따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음악 동호회 지인은 "분명 말씀드릴 수 있다. 김광석 씨가 우울증이 있었으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라며 "적어도 1년 동안 가장 가까이서 지켜봤다. 라이브 1,000회 공연할 때 매일 봤었고 그동안 병원 가는 걸 본 적이 없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부인 서해순의 말의 신뢰도는 떨어지는데, 첫 번째. 사후 얼마 안 되어 딸과 미국으로 간 점 두 번째. 고 김광석 씨 가족과 재산 다툼을 한 점, 세번째. 고 김광석씨 아버지와 합의한 내용을 어긴 점이다.

2017년 의문스러운 죽음을 다룬 영화가 제작되었고, 더불어민주당의 의원들이 김광석의 타살 의혹을 제기하고, 딸이 2007년에 사망한 사실이 은폐되어온 사실이 밝혀지면서 김광석의 사인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또한 김광석의 딸인 김서연이 어머니에게 피살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다만 김광석 본인의 의문사는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 이에 김광석의 유족과 일부 정치인은 김광석의 처 서해순을 딸에 대한 살인과 소송사기로 고발하여, 수사가 진행 중이다.



1970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판즈이.

1975년 - 대한민국의 격투기 선수 김민수

1977년 - 일본의 전 축구 선수 나카타 히데토시.

1979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권윤민.

1986년 - 대한민국의 2006년 한국 플레이보이 모델 선발대회 (1위) 출신의 모델, 가수 이파니

1987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배지현

1988년 - 독일의 축구 선수 마르셀 슈멜처. / 독일의 축구 선수 이자벨 케르쇼프스키.

1995년 - 대한민국의 전 가수 진이.

199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태빈 (마이틴).

1997년 - 대한민국의 가수 준 (유키스, 유앤비).

1998년 - 대한민국의 프로게이머 안준형.

1999년 - 캐나다의 래퍼 데이지 (모모랜드).

200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서연 (fromis_9).

 

사망

239년 - 위나라의 2대 황제 조예.
 
906년 - 중국 당나라의 제19대 황제 소종의 황후 적선황태후 하씨

1901년 - 빅토리아 여왕, 영국의 군주.

1922년 - 교황 베네딕토 15세, 258대 로마 교황.

1923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상옥

김상옥(金相玉, 1890년 1월 5일 ~ 1923년 1월 22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다른 이름은 김영진이다.

호적상에는 조선 개국 498년 즉 1889년 1월 5일생으로 나와 있다. 지금까지 각종 전기 등에 1890년 생으로 씌어있고, 집안에서 1890년 생 범띠로 알고 있다고 하나, 동지 한훈과 "동갑이었다"라고 했다는 점 등을 보아 1889년생인 한훈과 같이 김상옥도 호적상의 1889년생이 틀림없다.(이정은의 김상옥 평전에서의 주장.)

그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한성부 어의동에서 군관을 지낸 김귀현과 김점순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병조판서 김영정의 15대손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성장하면서 한학을 수학 하는 동시에 어의 동보 통학교를 다녔다. 10대 중반부터 기독교에 입문하고 서울 동대문 감리교회를 다녔다. 야학에 다니면서 국산품 장려운동을 벌이고 경상북도 풍기 군에서 결성된 대한광복단에 참가하는 등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실제로 김상옥의 철물점은 (명칭:영덕 철물 상회) 한 때 종업원만 50명에 가까울 정도로 컸었다. 김상옥은 이를 모두 독립운동에 쏟았다.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신문 혁신 공보를 발행해 배포했다. 3·1 운동 당시 만세를 외치던 여고생을 살상하려고 한 일본 군경을 저지 및 폭행하고 군경의 검을 탈취하여 자신이 보관하였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 동지인 한훈 ,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 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기독교인이었던 김상옥은 1922년 5월 5일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신사상에 접했으며, 한 살임 정강 및 선언을 통해 종교를 배경으로 한 민족 혁명에서 유물론적 계급 혁명으로 사상이 변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고 알려져 있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김상옥은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유도사범이자 형사부장인 다무라를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고봉근의 집에서 경부 20여 명에게 포위당한 후, 반격해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923년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천여 명의 일본 군경에게 포위당해 민가의 지붕을 뛰어다니며 일본 군경 4백여 명과 3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남은 한 발로 자결하여 의젓하게 최후를 마쳤다.
김상옥이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의 장본인 인지에 대한 의혹은 풀리지 않았다.

김상옥의 시신에는 11발의 총알이 몸에 박혀있었다. 총알을 맞아가면서도 그 정도로 싸웠으니 매우 전투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생포가 목적이었는데, 의열단원 김상옥이 일본 군경들과의 교전 중 자결했기 때문에 일본 군경들은 과연 김상옥이 폭탄을 투척하였는지에 대해 심문해 볼 수 없었다. 효제동 총격전 직후 3월 14일 총독부 경무국의 야마구치 고등 과장은 사건 전모를 발표하면서 김상옥이 폭탄 투척 사건의 범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공식 발표했다.

또한 후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고 진술한 자가 없었다. 의열단원들도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가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의 주인공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윤익중 - 재판정에서 "그날 그 시각 김상옥과 함께 종로대로를 걸었다, 그때 종로서를 지나온 학생들에게서 폭탄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김상옥은 그런 식의 폭탄 투척은 그리 좋다고 (효과적이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라고 진술했다. -다른 동지들의 증언도 같은 의견이었다.- 조선일보는 3월 16일 신문에서 이 진술을 기사에 실었고, 이와 함께 "김상옥은 정녕 폭탄 범인이 아니다."라고 분석하여 전했다. 또, 그때 김상옥은 사이토 암살 계획 실행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경찰 추적과 경계, 감시를 강화시킬 일을 스스로 자초했을 가능성은 적다. 전에도 이런 식의 치밀하고 영향력 있는 사건이 일어난 후 일본군은 비상경계 상태를 취했었으며, 종로경찰서 폭탄사건 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당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이견이 많이 제기됐었으며, 미와 경부보도 이에 대한 확답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은신처는 혁신단 시절의 동지인 이혜수의 집이었는데, 효제동은 그의 생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종로경찰서 사건에 대해서는 김상옥이 결행했다는 설이 정설이나, 오래 준비해 온 사이토 마코토 총독 암살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며, 목격자가 없다는 점에서 다른 조직의 소행이라는 이설도 있다.

1924년에 임시정부 외교부장이며 김상옥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조소앙이 그의 전기를 집필해 간행했다.
김상옥이 수많은 일본 경찰의 포위 속에서도 단신으로 여러 시간 동안 버티며 총격전을 벌인 이 사건을 당시 중학생이던 서양화가 구본웅이 직접 목격하여, 해방 후 1930년 시화집 허둔기에 스케치와 추모시를 함께 실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사 최후의 순국 장면을 생생히 그린 유일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념사업을 위해 벌이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일제 강점기 초기의 무장 독립운동과 의열단의 용감한 투쟁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김상옥이 최초로 선정되었다.
1998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었다.
1988년에 서울특별시 종로에 김상옥 의거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1926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노백린

노백린(1875년 양력 2월 15일(음력 1월 10일)~1926년 양력 1월 22일)은 대한제국의 군인, 계몽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비행사이다. 임시정부의 각료로 활동하며 교통총장, 군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다. 아호는 계원이고, 별호는 진방, 진영이다. 본관은 풍천이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게이오 의숙과 성성 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 단기 과정을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되고 1900년(광무 3년) 10월 귀국하여 윤치성, 이갑, 류동렬 등과 함께 육군 참위에 임관, 대한제국 국군을 신식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한국 무관학교와 육군연성 학교의 교관, 한국무관학교 교육국장, 연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07년(융희 1년) 군대가 해산당하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해서 교육 총회 조직 등에 참여하였으며, 광산업과 피혁상에 종사하였으나 사업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였다.

1910년(융희 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 등과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비행사 훈련을 하였다.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맡았다. 그해 9월의 통합 임시정부 수립 후에도 군무총장으로 유임되었고, 192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한국 최초로 한인 비행사 학교를 설립하여 비행사를 양성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되돌아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875년(고종 12년 음력 1월 10일) 황해도 송화 풍해면 성하리에서 성리학자인 노병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이다. 일설에는 1873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원적지는 황해도 은율이며 어릴 때는 한학을 수학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얼굴도 컸다 하며, 마음이 침착, 차분하면서도 성격이 매우 호탕하였다 한다. 1895년(고종 32년) 대한제국의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서 게이 오의숙과 일본 육군사관학교(제11기)를 졸업했다.
 
1895년(고종 32년) 정부의 일본 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추천을 받은 뒤,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갑, 박중양, 윤치성, 류동열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도쿄에서 체류하며 이갑, 윤치성, 류동열 등과 함께 게이 오의숙에서 보통과 와 특별과를 수학하였다. 1897년 세이조 학교 학교에 입학하였다. 1898년 2월 세이조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899년(광무 2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견습사관에 임명되었으며, 1900년 초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는 1900년(광무 3년) 10월 귀국하였으며 당시 원수부 회계국 총장 민영환 등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어담, 윤치성, 김형섭 등과 함께 육군 참위로 임관한 뒤 한국 무관학교 보병과 교관, 육군 연성 학교 교관을 맡았다.

이후 육군 보병 정위로 승진하고 1904년(광무 7년) 러일전쟁 당시 관전사가 되어 일본군 위문 사인 군부 대신 권중현을 따라 일본군을 종군, 동삼성의 대련, 뤼순 등지를 두루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참령, 부령으로 승진하여 육군 무관학교 교육국장이 되고, 다시 육군 정령으로 승진하여 육군무관학교 교장, 헌병대대장, 육군 연성 학교 교장 등 육군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노백린은 어담 등의 친일 군인들과는 달리 을사조약 체결과 군대 해산, 한일 병합 조약 등으로 국권이 순식간에 일본에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1907년 안창호, 이갑, 전덕기, 윤치호,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안태국, 조성환, 김규식, 신채호, 옥관빈, 김홍량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데 참여하였으며, 1907년 자신의 재산과 땅을 헌납, 고향인 송화에 사립학교인 광무 학당을 설립하였다.

1907년 8월 을사 보호 조약의 영향력으로 대한제국 국군이 해산당하고 육군 연성 학교도 폐교되면서 노백린은 군부 교육국장으로 전보되었다. 1908년 김구, 최명식, 김홍량 등과 함께 해서 교육 총회를 조직하고 교육 계몽활동 및 신식 학교 설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10년 6월 군사 훈련기지를 마련했다는 연락을 접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박용만 등과 함께 하와이 오아후 가할 루 지방에서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김성옥, 허용 등과 함께 국민군단 별동대 주임으로서 3백여 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에게서는 그에게 남작직과 은사금을 주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이후 안창호, 윤치호 등과 신민회에 관여하기도 하고, 이어 해서 교육 총회 회장이 되어 총무인 김구와 함께 해서 교육 총회를 지도하며 황해도 내에 교육 계몽 운동과 학교 설립 운동 전개하였다. 또한, 수안금광, 경성부에서 피혁상 등을 경영하였으나, 10여 만원의 손해만 보고 상속받은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다.

1914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하여, 재미 동포인 김종림의 지원을 얻어 항공 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용사를 육성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 등과 국민군단의 교관을 맡아 비행사 훈련을 하였다. 1915년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916년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기 위해 노백린은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그러나 서재필이나 이승만은 무장독립론을 주장하던 노백린의 견해에 그는 회의적이었다. 노백린은 캘리포니아에서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 등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18년 《평양 시사 신보》를 창간하는데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열차 편으로 만주를 거쳐, 배편으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해 4월 2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창설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4월 10일 상하이 임시정부 군무부 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이동휘,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의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추가 선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고 확신하여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에서는 하와이주에 머물면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 박용만과 함께 한인 독립군 부대를 조직했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1920년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는 일찍부터 공군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 직후 결성된 한성 임시정부에서 군무 부총장을 맡았고,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군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며, 이동휘를 비롯한 류동렬, 신채호, 박용만 등과 함께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쪽에 속했다.

1919년 임시정부 군무 부총장으로 임명되어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으나 비행사 양성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 후 1919년 미국 체류 중 제2대 군무총장으로 재선임되었다.

미국에 체류하면서 그는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교포인 김종린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으로 최초로 한인 비행사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20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 맞춰 JN-4D 2대를 이용선·이초 두 사람이 조종한 것이 한국인이 처음 비행기를 조종한 것이 되었다. 독립군 비행사 양성소는 1923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토록 하였다. 한편 군사 기지 건설에 대해 서재필 등과 협의하였지만 자금 조달과 재원 조달의 어려움, 한국인이 쉽게 찾아오기 어려울 것을 들어 실패를 예상하였다. 그러나 노백린은 비행기지와 군사 훈련을 계속 추진하였다.

비행사 양성소 설립 초기에는 비행기 2대, 미국인 기술자 1인과 비행사 6명을 교관으로 하였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다. 이후 임시정부의 군무 총장직에 있으면서, 계속 미국에 체류하면서 비행학교 육성에 종사하여 1920년 7월에는 제1회 졸업생 25명을 배출하고 1922년 6월에는 학생이 41명을 추가 모집하였으며,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이 기간 중 그는 모금 활동 등을 통해 비행기도 5대로 늘어났으며, 비행기는 무선통신장비까지 갖추게 된다. 한편 그는 미국에 있었으므로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920년 1월 "전 국민이 광복군 전투 대령에 참가를 당부"라는 제목의 군무부 포고 제1호를 발표하였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일 계몽 운동을 추진하다가 사람과 자원 등 활동 여건이 불편하여 1921년 1월 배편으로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상하이로 돌아온 뒤 1921년 2월 국민대표자대회 개최 문제로 이승만과 안창호가 의견을 달리하게 되자 노백린은 김규식과 함께 이승만과 안창호 사이의 의견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만다. 그는 안창호 등과 시국대책을 논의하던 끝에 임시정부가 소련과 연합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타났다.

한편 그는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 노태연, 도인권, 김훈 등 무관학교 출신 청년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무력 항쟁 단체 설립을 주창하는 한편 일반외교 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광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1922년 1월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후 변절한 김희선, 소련 정부로부터 수령한 독립운동 자금을 임정에 주지 않고 사회주의 정당 조직에 사용한 전 임정 총리 이동휘와 전 국무원 비서실장 김립 등을 성토,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 내무부 총장 이동녕, 교통부 총장 손정도, 김구 등 각료들과 함께 이들을 규탄하는 '임시정부 포고 제1호'를 서명하여 발표한다.

1922년 6월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다.

1922년 7월 국민대표자회의 등의 개최로 임정 창조파, 개조파, 임정 고수파, 아나키스트 등 상하이 내 독립운동 단체의 파벌 갈등과 알력을 수습하기 위하여 안창호, 김구, 김덕진, 한진교, 신익희, 최일, 최창식, 윤현진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통일된 의견과 행동으로 조국광복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분쟁 조절에는 실패했다. 그 해 10월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명의의 격문 등을 작성하여 국내에 파견원을 잠입, 전국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중 경상북도로 파견한 국내 특파원이 경상북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를 의용 단사 건이라 한다.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며, 1924년 12월 16일 박은식 내각의 임시정부 군무총장 겸 교통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에 제2대 박은식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교통총장 겸 군무 총장직을 겸직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활동은 열악하였다. 임시정부의 황폐는 극도에 달하여 불과 5원의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불법 어음을 발행하였고, 이보다 더한 경우는 궁하다 못해 자식을 중국인에게 넘겨주는 참상마저 일어났다. 개중에는 한 끼로 세 끼 식사를 때우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중국의 싸구려 호떡을 사 먹으며 식사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하이의 많은 교포들은 차라리 고국으로 되돌아가기를 권유했으나 그것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이었다.

1925년 4월 임정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그 해 5월 참모총장이 되어 독립군 육성에 헌신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워싱턴 D.C. 의 구미 위원부에서 외교 위원으로 소련에 파견되어 외교 활동을 하였으나 소득 없이 되돌아왔다. 1926년 1월 22일에 상하이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언론인 송건호는 그가 자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송건호에 의하면 임시정부의 참상에 좌절하여 자살했다는 것이다. 송건호는 '노백린은 골방 속에서 실의와 절망으로 상심한 끝에 인사불성이 되어 비참한 나날을 보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고 한다.

1926년 1월 시신은 화장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상하이의 쑹칭링 묘 공원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8월 다른 독립운동가 4위와 함께 유골이 국내로 봉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 44-7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 훗날의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으로 개정)이 추서 되었다.

아들인 노선경과 노태준, 딸 노 순경도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후일 독립운동 공로로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특히 노태준은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1945년 - 일본의 군인 야나가와 헤이스케

1968년 - 하와이 섬 출신의 원주민 수영 선수 듀크 카하나모쿠

1973년 - 린든 B. 존슨, 미국의 제36대 대통령.

1987년 - 미국의 정치가 버드 드와이어

2008년 -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배우 히스 레저.

2011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박완서

2017년 - 도미니카공화국의 야구선수이자 전 KBO리그 야구선수 앤디 마르테

2017년 - 도미니카공화국의 야구선수 요다노 벤투라

2018년 - 미국의 작가 어슐러 K. 르귄

 

기념일

통일기념일: 서부와 중앙 우크라이나 공화국이 통일한 날, 우크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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