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오늘의 역사 1월 23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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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556년 - 명나라에서 산시 대지진이 발생하다.

현재의 산시 성(붉은색)과 지진 피해지역(노란색)

산시 대지진은 1556년 1월 23일 오전 중국 명나라 산시 성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리히터 규모 8.0~9.0으로 2008년 중국 쓰촨 성 지진과 비슷한 규모이다.

사망자만 83만 명에 달할 정도로 중국 역사상 최악의 지진 피해로 기록되고 있으며 당시 산시 성 전체 인구의 60%가 사망했다고 한다. 게다가 산시 성은 지진 발생 당시 안전에 취약한 탄광들이 많이 있어서 피해가 더욱 커졌다.


1793년 -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제2차 폴란드 분할에 합의.

1910년 - 친일단체 국민동지찬성회가 발족했다.

1910년 1월 23일에 설립하고 발기회를 가졌다. 이 단체에는 비슷한 성격의 다른 단체에 비해 거물급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고 조직 체계도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었다. 고문 중에는 고관인 민영휘와 이지용, 실업인 이학재가 포함되었고, 회장은 정3품 전직 관료인 이범찬, 부회장은 서창보, 총무는 조덕하가 맡았다. 활동 경비는 일진회가 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진회 간부들과는 따로 회동을 갖는 등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발기 직후부터 활발한 활동을 펼쳐 찬성원 망첩과 취지서를 발간하고 현식 대신들에게 망첩을 발송했다. 그러나 한일 병합 반대 여론에 부담을 느낀 대신들은 모두 이 망첩을 되돌려 보냈다. 본래 총재로 김종한이 추천되었으나 거듭 사양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황성신문은 "대한국의 역당"인 일진회 도당이라며 이들의 활동을 비난하는 논설을 게재했고, 연이어 대한민보도 "신흉회"라 지칭하면서 국민동지찬성회를 맹비난했다.

회원 수는 결성 초기를 기준으로 100명이 채 되지 않았으나 입회자들에게 400~500명 선이라고 과장 선전하여 들통이 난 바 있다. 이 단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 이름을 도용당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민찬성동지회는 1910년 2월 5일과 2월 6일 조속한 "정합방"을 간곡히 바란다는 청원서를 각각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의 내각에 보냈다.

국민찬성동지회는 병합 찬성 여론몰이를 위해 토론회도 개최했는데, 이 자리에서 "부모도 임금도 없는 한 마리 개돼지"라는 말을 들었을 만큼 반감을 많이 샀다. 검계단이라는 단체가 부회장 서창보의 죄상을 적은 글을 사무소 문 앞에 걸어놓고 사라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굴하지 않고 3월 12일에 또다시 내각과 통감부에 장서를 보내 한일 병합을 촉구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일진회와 같은 날인 9월 12일에 해산되었다.



1937년 - 히로타 고키가 일본 총리에서 물러나다.

1968년 - 미국 해군 정보선 푸에블로 호 납치사건 발생.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피랍 사건 (Pueblo Incident)은 미 린든 B. 존슨 행정부 시절이던 1968년 미 해군 소속 정찰함 USS 푸에블로 (AGER-2)가 동해 공해상(동경 127 °54.3 ', 북위 39 °25 ')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되어 82명의 미 해군 승무원들이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가 풀려난 사건이었다.

대한민국 해군 56함 침몰 사건이 발발한 지 1년 뒤이자 청와대를 기습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려다 미수에 그친 1.21 사태 이틀 후인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 상에서 해양 조사선으로 위장한 미군의 정찰함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었다. 푸에블로호는 일본 큐슈에서 출발해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소련의 극동 기지를 정찰한 뒤 북한의 동해안에서 정보를 수집할 목적이었다. 하지만 1월 23일 정오경 원산앞바다에서 1척의 북한의 초계정으로부터 무전으로 “국적을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미국 소속”이라고 답변했다. 이에 북한 함정은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 해군은 “공해 상에 있다”는 답전으로 이를 거절하였다. 약 1시간 후 북한 함정의 지원을 받고 3척의 무장 초계정과 2대의 미그기가 도착하여 포위하였다.

북한 미그기들이 주변을 선회하고 있는 동안 한 척의 북한 초계정이 접근하였으며 무장군인들이 푸에블로호에 승선하였다. 이때가 12:40분이었다. 푸에불로호는 “무력 저항을 하지 않았다”면서 원산항으로 끌려간다고 보고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망을 시도하다가 3명이 부상당하고 1명이 피살된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즉각 미국은 일본에서 월남으로 항해중인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와 3척의 구축함을 진로를 변경시켜 원산만 부근에서 대기토록 하였으며, 25일에는 해공군의 예비역 14,000여 명에게 긴급 동원령을 내리고,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기 372대에 대한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했으며, 오산과 군산기지에 2개 전투기대대를 급파하는 등 군사적 조치를 위해 나갔다. 28일에는 추가로 2척의 항공모함과 구축함 1척 및 6척의 잠수함을 동해로 이동시킴으로써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소련을 통한 외교교섭이 소련의 거부로 실패하자, 미국 측은 한국정부의 반발을 무릅쓴 채 2월 2일부터 판문점에서 북한당국과의 비밀협상에 들어갔다. 한편 이 사건이 마무리된 불과 4개월 후인 1969년 4월 15일 미 해군 정찰기 EC-121가 동해 북방한계선(NLL)에서 북한에 의해 격추됨으로써 또다시 한반도에 급박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승무원 31명을 태우고 일본에서 출발한 미 해군 EC-121 정찰기는 동해 북방한계선 부근에서 북한에 의해 격추되어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미국은 한반도 주변에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호를 급파하는 등 한반도에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한 존슨 행정부의 초기 인식은 냉전적 사고에 지배를 받고 있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 사건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대북인식에 기초하여 푸에블로호 사건의 배경을 소련과 북한의 공모,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시도 등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러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한반도에 제2의 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베트남 전쟁과같은 글로벌 전략의 일부였기 때문에 푸에블로호 사건도 전략적 수준의 선후관계 속에서 전개되었다. 이러한 구조적 틀 속에서 북미협상에 임했던 미국은 동맹국인 한국을 안심시키는 동시에 나포된 승무원을 송환해야 하는 두 가지 목표가 서로 충돌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북한의 의도대로 북미 간 직접협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은 나포 당시에는 군사적 충돌까지 감수했으며 군사정전위원회 비공개 협상에서 강경한 자세를 고수했다. 북미협상을 통해 북한은 국가간의 관계를 부각시키고 국내정치적으로 주체사상의 성과를 선전했다. 무엇보다 미국과 협상을 지속하면서 미 국무부의 직접 개입으로 전개된 협상자체가 북한의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미국은 협상 주도권을 북한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미국의 협상력(negotiation power)이 제한된 이유는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서 협상을 진행하기 어렵다는 인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과 미국 국내에 공개할 수 없었던 현실 때문이었다. 그 결과 미국은 박정희 정부의 방기 우려, 북한의 강경한 자세 그리고 미국의 연루 우려라는 3중 제약 속에서 전례 없는 기묘한 타협을 이끌어냈다. 나아가 밴스 특사의 방한 이후 존슨 행정부 내에서 북한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대북인식 변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근거였다.



2003년 - 파이어니어 10호의 마지막 교신이 있었다.

2008년 - 삼성 특검:특검 수사팀은 김용철 변호사가 이건희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가 회사 비자금으로 구입했다고 지목한 미술품 가운데 일부를 삼성 에버랜드 근처 창고를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찾았다고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참여연대는 "비자금 조성 의혹 등에 대한 검찰 및 특검 수사에 대비해 삼성그룹이 관련 증거를 조직적으로 인멸, 은닉했다"며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및 삼성전자 경영지원총괄본부 임직원들을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2015년 - 초대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이븐 사우드의 25번째 아들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제7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되다.

 

 

 

교통

2016년 - 각각 사가정역 2번 출구, 용마산역 3번 출구 에스컬레이터 공사지연으로 심야 주박역(駐泊驛)이 되었다.

 

탄생

598년 -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 이세민

당 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 598년: 개황(開皇) 19년 1월 23일 ~ 649년: 정관(貞觀) 23년 7월 10일)은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이며, 당 고조 이연의 두 번째 아들이다. 이름인 '세민'의 본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 전략가, 예술가이기도 했으며, 중국 역대 대황제 가운데 최고 성군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종종 청나라의 강희제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가 다스린 시기를 정관의 치라고 일컫는다.

이세민은 개황 19년 (598년)에 당 국공 이연과 그의 처 두씨 사이에서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선비족 출신이었지만, 아버지인 이연이 수나라 황실 친인척 관계상 수 문제 양견의 처이질었던데다가 수나라에서 크게 활약하였기 때문에 이후 그의 집안이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614년에는 장손씨와 혼인을 올렸다. 617년 수 양제 양광의 고구려 원정과 엄청난 대토목 공사로 이미 피폐해진 수나라 각지에서 반란군이 일어났으며, 이연 역시 여기에 가담하였다. 이 무렵의 일화로, 운정흥 장군에게 깃발을 많이 세워 군의 수가 많은 것처럼 위장하라는 계책을 올려 칭찬을 들었다는 것이 있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수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진격해서 장안을 손에 넣고, 때마침 수 양제 양광(친인척 관계상 양광은 아버지 이연의 이종사촌 남동생이었음.)마저 강도에서 그의 시위장이자 우문술의 아들인 우문화급과 우문지급 형제에게 암살되자, 이연은 당의 황제 자리에 오르고, 이세민을 진왕에 봉했다.

그러나 뒤이어 반란을 일으킨 여러 호족과 귀족들이 당나라에 충성을 바치지 않자, 이세민은 그들을 격파하러 출병했다. 반역 호족은 왕세충, 두건덕, 설인고, 유무주 등이었는데, 이세민은 이들에게 단 한번도 패하지 않고 모두 제거하여, 아버지인 당 고조 이연에게 천책상장, 즉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호를 얻었다.

이후, 이세민의 권세는 점점 커졌고, 인기 또한 높아졌다. 이것을 불안하게 여긴 형이자 황태자인 이건성과 막내동생인 제왕 이원길은 이세민을 죽일 모책을 세우고, 급히 자신들 계파의 대신들을 불렀다. 이건성의 부하들 중에는, 위징, 왕규, 배적 등이 있어, 이세민 제거 작전을 세운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챈 이세민은 처남 장손무기와 장군 이정, 이세적 등을 이용해, 도리어 역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다.

626년 7월 2일, 이세민은 부황 이연을 알현하여, 형제들이 자기를 죽이려 모함한다고 아뢰었고, 이연은 지체없이 그들을 자신의 황궁으로 불렀다. 그들이 황궁의 현무문으로 들어온 순간, 매복한 이세민의 군사들이 이건성과 이원길에게 화살을 마구 쐈고, 그 자리에서 그들은 살해당한다.

이것이 바로 '현무문의 변'이다. 3일 뒤에 이연은 할 수 없이 이세민을 황태자로 삼고, 2개월 뒤에 그에게 양위하였다. 이에 이세민이 9월 4일에 황제에 올랐으며, 이듬해에 연호를 정관이라 하니, 이가 바로 당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이다.

이세민은 황제에 오르고 나서 농민들에게 균등히 토지를 나누어 주어 조용조 제도로 세금을 걷었다. 이 제도는 토지를 받은 사람은 국가에 곡물을 바치고, 1년 중 20일을 국가를 위해 일하며, 직물 등을 바치게 하는 제도로써, 국가는 풍족해지고 민생은 안정되었다. 이세민은 형 이건성의 편에 있던 위징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고, 위징은 명재상이 되어 중국을 안정시켰다.

또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했고, 군사 제도는 부병제인 징병제로 택하였다. 이렇게 많은 인재를 등용시킨 당나라는 나날이 번창해져 갔으며 백성들도 더더욱 이세민을 우러러 보았다. 또한 이세민은 아무리 적의 밑에서 일했던 장수라 할지라도, 능력이 뛰어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세민은 아무리 신하들이 자기에게 독설을 퍼부어도 역정을 내지 않고, 그 간언을 잘 받아들여 언제나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좋은 정책을 만들 수 있었다.

-630년에 이세민은 동돌궐을 정벌하여 텡그리카간, 즉 천하의 칸 중의 칸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중앙 아시아도 정복해 당의 영토를 이전 황조의 2배의 수치로 넓혔다.

649년,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원정 실패 후 이질을 앓았다. 원래 그는 황태자 이승건이 있었으나 폐하고, 이후 4남 복왕 이태를 봉하였으나, 행실을 이유로 역시 폐하였다. 그리하여, 9남 위진왕 이치를 황태자에 세웠다. 황태자 이치는 이후 당의 제3대 황제 당 고종이 되며, 대리 청정을 했다. 649년 7월 10일, 당 태종 이세민은 장안 함풍전에서 51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초기 시호는 문황제이며, 고종 때 개칭하여 문무성황제로 고쳤으며, 당 현종 때 추가로 개칭한 정식시호는 문무대성대광효황제이다.

묘호는 태종이며, 능호는 소릉이다.


당 태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다롄과 부여성(눙안)을 연결하는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당나라는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645년, 당 태종은 이적.장량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안시성 전투에서 약 60일간 사투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 태종은 2차 ·3차(647년 ·648년)에 걸쳐 이적 · 우진달. 설만철 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514년 - 명의 정치가 해서

1737년 - 미국의 정치가 존 핸콕

1783년 - 프랑스의 소설가 스탕달.

스탕달(프랑스어: Stendhal, [stɑ̃.dal], 문화어: 스땅달, 1783년 1월 23일 - 1842년 3월 23일)로 더 잘 알려진 앙리 벨은 그르노블에서 태어나 파리 1구에서 뇌졸증으로 사망한, 소설 적과 흑과 파르므의 수도원으로 특히 잘 알려진 프랑스의 작가이다.

스탕달은 그의 인생을 몽상하는 데에, “행복의 추구”에, 예술과 사랑에 바치고자 했다. 허나 이와 정반대로 그는 다사다난한 삶을 살게 된다. 정말 사랑하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로 그는 자신이 경멸하던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던 할아버지와 함께 그르노블에서 살면서 억압적인 유년 시절을 겪게 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다.

프랑스 육군 중사로 예편한 그는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시조로,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 이래 이탈리아 예찬자가 되었으며, 독특한 연애관에 의한 최초의 소설 아르망스를 써서 문단에 등장했다. 최초의 사실주의 소설이라고 불리는 적과 흑을 써서 왕정복고기의 특권계급에 도전했고, 파르므의 수도원에서는 전제군주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다.

7세 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애정을 주지 않는 완고한 아버지, 위선적이고 까다로운 숙모, 엄격하기만 한 가정교사 신부 밑에서 굴욕적이고 증오에 찬 소년시절을 보냈다. 대신 어머니 쪽 친척인 가니용 가의 사람들로부터 정신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는데, 그 중에서도 외할아버지로부터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6세 때 나폴레옹 군에 입대하였으나, 1814년 나폴레옹이 추방되자 군대를 그만두었다. 모차르트·로시니의 음악과 이탈리아 미술을 좋아하였으며, 각지를 여행하면서 소설·평론·여행기 등을 썼다. 정열적인 이탈리아의 풍물을 사랑하였고, 자신처럼 아무것도 구속받지 않고, 자기의 행복을 쫓는 정열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썼다. 대표작으로 적과 흑 파르므의 수도원 등이 있다. 그는 사람 마음의 움직임을 아무리 보기 싫은 것이라도 있는 그대로 표현하여, 발자크와 함께 리얼리즘(사실주의)의 개척자로 알려졌다. 생전에는 거의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프랑스 19세기 최대의 작가로 손꼽히며, 그의 문학을 '벨리슴'이라고도 부른다.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그는 신병으로 1842년 3월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대부분의 삶을 이탈리아에서 보낸 스탕달은 이탈리아를 제 2의 고향으로 사랑하며 묘비명에 자신을 '밀라노인'이라고 표기하게 했다.

스탕달의 죽음을 둘러싼 상황은 가정과 사회에서 행복을 얻는 전통적 비결을 마음에 항상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결코 따르지 않은(또는 따르지 못했던) 한 사람의 생애를 상징하는 것으로 쉽게 해석할 수 있다. 그는 일정한 주소나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집도 자식도 없었고, 심지어는 애인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1808년에 누이 폴린(그는 폴린에게 모든 것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고, 마르세유와 독일에서 많은 편지를 써보냈음) 마저 결혼한 뒤에는 가족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 되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갈망했고 대다수 사람보다 훨씬 더 간절히 우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런데도 오늘날 입수할 수 있는 모든 문서 자료에 따르면,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진정한 공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그의 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앙리 벨의 가장 근본적인 삶(그의 생각과 환상, 감정의 전기)은 '스탕달'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소설 속에서 영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들은 근본적으로 같은 젊은이의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설들은 서로 다른 무대 속에 펼쳐진 앙리 벨의 환상이며,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이다. 소설 주인공인 젊은이의 매력은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을 매혹시키고, 그들의 마음 속에 질투심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의 주인공들 적과 흑의 쥘리앵, 파름의 수도원의 파브리스, 아르망의 옥타브은 각기 다른 사회에 나타나 다른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만, 그들의 욕망과 감수성 및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모두 똑같다. 그들은 스탕달이 상상하는 스탕달 자신이며, 따라서 이 소설들은 일종의 자서전이다. 그는 이런 소설로써 자신의 감정을 달랬다.

스탕달의 전기작가들은 그의 성격과 그가 종사한 직업의 다양한 측면을 묘사하면서, 끊임없이 '실패'라는 낱말을 사용했다. 그는 연인으로도 실패했고, 군인으로도 실패했으며, 작가라는 천직에서도 실패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비평가들이 그를 발자크·플로베르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작가로 인정하고 있다. 젊은 독자층, 특히 프랑스·영국·미국의 젊은 독자들은 발자크나 플로베르보다 스탕달한테서 훨씬 더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스탕달의 글은 수많은 역설적 갈등과 욕망이 뒤섞인 그의 인간성과 생각을 놀랄 만큼 많이 반영하고 있다. 그는 '행복한 소수'는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 비굴함 속에서는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 감각과 본능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자신이 살고 봉사하는 세계에 반항하는 인물로 제시되어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탕달은 세계를 맞서 싸워야 할 적으로 간주하고, 세계와 싸울 때는 세계가 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832년 - 프랑스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

1862년 - 독일의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

1865년 - 대한제국의 교육자 겸 기독교 운동가 친일파 윤치호



1881년 - 소련의 군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1907년 - 일본의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

1922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장승태.

1929년 - 독도의용수비대의 대장 홍순칠.

홍순칠(1929년 1월 23일 ~ 1986년 2월 7일)은 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군인 출신으로 1954년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여 독도를 지키는 활약을 하였다.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군인이 된 후, 한국 전쟁에 참전해 함경남도 원산 근처에서 부상을 입고 1952년 7월 특무상사로 전역하였다.

그는 1952년 가을부터 부산에서 무기 등에 장비를 구입한 뒤, 1953년 4월 20일 경기관총 2정, M2 3정, M1소총 10정, 권총 2정, 수류탄 50발, 0.5t 보트 1척 등의 장비를 사비로 마련하고, 한국 전쟁 참전 경력이 있는 군 출신을 모아 15명으로 구성된 전투대 2조, 울릉도 보급 연락요원 3명, 예비대 5명, 보급선 선원 5명 등 모두 45명으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였다고 자신의 수기에서 주장하였다. 그러나, 1966년 독도의용수비대원 11명이 훈장을 받을때 작성된 공적조서에는 창설시기가 1954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수비대 일부 대원의 병적기록에 따르면 1953년에 군에서 전역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조선일보는 1954년 5월 3일 "울릉도 1만5천 도민은 독도자위대를 결성해서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결사 방위하기로 4월 25일 결의하였다"고 보도하면서, 독도자위대 결성을 주도했던 민의원 후보 이정윤이 그해 5월 20일 제3대 민의원 선거를 앞두고 빠지면서 홍순칠이 독도자위대의 대장이 됐다고 전했다. 또, 1954년 5월 6일 조선일보에서는 "5월 3일 백두진 총리가 백한성 내무부 장관에게 울릉도 도민의 독도자위대를 적극 후원하라고 지시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홍순칠은 수비대 창설 전부터 부산 국제시장에서 무기를 구입했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백두진 총리의 지시에 따라 울릉경찰서가 독도자위대에 총기와 탄약을 지급하고 울릉군은 구휼미로 식량을 지원했다. 이 같은 내용은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에게 탄약과 보급품을 전달했던 울릉경찰서 경찰관 다수가 증언하고 있다.

홍순칠은 수기에서 1953년 6월 독도로 접근하는 일본 수산고등학교 실습선을 귀향 조치하는 한편 7월 23일 독도 해상에 나타난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 PS9함을 발견하고 처음으로 총격전을 벌여 격퇴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55년 대한민국 내무부가 발행한 '독도문제개론'에 따르면 해쿠라호를 격퇴시킨 것은 울릉경찰서 소속의 독도순라반이었다. 독도문제개론은 "1953년 7월 11일 오전 11시 울릉경찰서 근무 순찰주임 경위 김진성, 경사 최헌식, 순경 최용득 3명으로 구성된 경기 2문으로 장비된 순라반"이 해쿠라호를 격퇴시켰다고 밝히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사진과 함께 일본 잡지에도 실렸다.

홍순칠은 또 1953년 8월 5일 동도 바위 벽에 독도가 대한민국 영토임을 밝히는 '韓國領(한국령)' 석 자를 새겨 넣었다고 주장하였으나, 독도 영토 표석 건립은 1953년 9월 24일 대한민국 외무부가 건립을 요청하고 내무부 장관이 경상북도지사에게 측량표 설치를 지시한 공문에 따라 1954년 8월 28일 경비초사와 영토표석을 건립하고 제막 기념식까지 개최하였다.

1966년 독도 수호에 공적을 인정받아 5등 근무공로훈장을 수여하였다. 1985년 폐암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한 뒤에도 잡지 "학부모"에 독도에 대한 연재를 해오다 1986년 2월 7일에 사망했다. 저서로는 잡지에 연재한 1997년 수기 이 땅이 뉘 땅인데가 있다.

1996년 보국훈장 삼일장이 추서되었다. 1996년 "자랑스러운 한국인상"에 수상되었다.

독도의용수비대장 홍순칠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4] 1974년 12월의 일이었다. 홍 대장의 미망인 박영희씨는 1974년 12월 남편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사흘 간 붙잡혀 있으면서 "'앞으로 독도에 대해 언급하지 마라'고 강요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2005년 열린우리당 전병헌 의원 등이 특별법을 제정하여 국가유공자로 지정해주었다. 또한 홍순칠을 비롯한 독도의용수비대의 다른 유공자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도 있고 지원금도 타게 되었다.

홍순칠의 수기에 대해서는 과장과 허위로 의심되는 부분이 많고 자기의 처를 비롯한 가짜 대원이 섞여있는데다, 활동기간도 1954년에 8개월 남짓이었던 것을 3년8개월로 부풀려 여러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2007년 대한민국 감사원은 1950년대에 활동한 독도의용수비대 생존대원 11명의 증언을 종합해 본 결과, 실제 독도에 가서 활동한 대원은 33명 가운데 17명뿐이고, 나머지 16명은 독도에 가지 않았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1924년 - 오스트리아의 과학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

1950년 - 미국의 텔레비전 및 영화 배우, 프로듀서 겸 작곡가 리처드 딘 앤더슨

1959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조건진.

1965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규원.

1974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아나운서 박나림.

1979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박은지.

1984년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아르연 로번. / 일본의 축구 선수 오노 시노부.

1985년 - 대한민국의 래퍼 산이.

1992년 - 아일랜드의 배우 잭 레이너.

1994년 -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곽민정.

1995년 - 대한민국의 래퍼 와이엇 (온앤오프). / 대한민국의 가수 조용근 (D1CE).

1998년 - 일본의 래퍼 유토 (펜타곤).

 

사망

1002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3세.

1622년 - 잉글랜드의 항해가 윌리엄 배핀.

1744년 - 이탈리아의 철학자 잠바티스타 비코.

1935년 - 한국의 농촌운동가 최용신.

최용신(崔容信, 1909년 8월 12일 ~ 1935년 1월 23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농촌계몽운동가이며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사리(현재 경기도 안산시 본오동)에서 봉사한 농촌운동가이다. 이후 소설가 심훈의 대표작인 상록수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1944년 -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1989년 - 에스파냐의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2001년 - 대한민국의 동양화가 김기창.

2007년 - 대한민국의 배우 조재훈.

2015년 - 제6대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2017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위제하

2018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트럼펫 연주자 휴 마세켈라

 

기념일

바운티 데이(Bounty Day): HMS 바운티호의 반란자들이 섬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는 날, 핏케언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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