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오늘의 역사 1월 24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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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55년 - 저우언라이, 타이완은 중화인민공화국 영토의 일부이고 타이완 해방에 대하여 유엔 등 외국이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

1963년 - 남북체육회담 최초 개최

1972년 - 일본군 패잔병 요코이 쇼이치 발견

2011년 - 러시아의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남

 

문화

1984년 - 애플, 매킨토시 출시.

최초의 매킨토시인 매킨토시 128K

 



1986년 - 보이저 2호, 천왕성에 접근. 천왕성의 표면 이미지를 최초로 전송함.

1989년 - 설날 부활

설날은 새해의 첫날을 기념하는 명절이다. 현대 사회에서 전 세계는 양력을 표준 달력으로 쓰기 때문에 공식적인 새해의 첫날은 양력 1월 1일이다. 따라서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양력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기념한다. 동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은 전통적으로 음력 1월 1일을 설날로 삼았으며, 현재는 양력 1월 1일과 음력 1월 1일을 모두 명절로써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 설날은 설, 원일 (元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연수(年首), 단월(端月)이라고도 하며, 조심하고 근신하는 날이라 하여 신일(愼日)이라고도 일컫는다. 영어로는 양력 1월 1일 새해 첫날을 New Year’s Day라 한다. 다만, 음력 1월 1일은 Lunar New Year’s Day, 또는 Chinese New Year’s Day라 한다.

 

 

 

탄생

76년 - 로마 제국 14대 황제 하드리아누스.

1705년 - 이탈리아의 카스트라토 파리넬리.

1732년 - 프랑스의 극작가 피에르 보마르셰

1737년 -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웨이크.

1776년 - 독일의 후기낭만파 화가이자 소설가, 작곡가 E. T. A. 호프만.

1891년 - 독일의 군인 발터 모델.

1918년 - 미국의 목사 오럴 로버츠.

1937년 - 김정일의 아내 성혜림.

1945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손욱.

1951년 - 대한민국의 교육자 박헌영.

1953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춘진. / 대한민국의 성우 장정진.

1953년 - 대한민국의 제 19대 대통령 문재인.

문재인(1953년 1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이다.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이끌며 박정희 유신 체제에 항거하다가 1975년 서대문구치소에 투옥됐고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에는 신체검사도 받지 않은 상태로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특전사를 제대한 후 복학해 다시 학생운동을 이끌며 전두환 군부 독재에 항거하다가 1980년 청량리 구치소에 투옥됐으나, 조영식 경희대 총장의 신원보증으로 옥중에서 사법시험에 합격하면서 석방되었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최우수 성적으로 수료했으나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 임용이 거부되자 부산에서 노무현 변호사와 합동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며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2003년에 참여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역임했다. 2004년, 자리에서 물러나 히말라야 산맥으로 트래킹을 떠났으나, 도중에 노무현의 탄핵 소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의 간사를 맡았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문재인은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선출직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동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며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등과 겨루어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 제18대 대선 후보로 확정되어 출마하였으나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2015년 2월 8일에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에 선출되었고, 2016년 1월까지 새로 개편된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대표직에서 물러난 후 제20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더불어민주당 소속 후보들을 위해 지원 유세를 다녔다. 2016년 11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 시기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대권에 재도전하였고, 이재명, 최성, 안희정과 겨루어 전체 표수의 과반을 얻어 결선투표 없이 2017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최종 승리하여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선 후보가 되었다. 2017년 5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41.1%를 득표하여 24%를 득표한 자유 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대통령이 파면되어 치러진 궐위 선거이기 때문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당선인 결정 시간인 2017년 5월 10일 8시 9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구성하지 않고 바로 제19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55년 -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소칼.

1957년 - 미국의 농구선수 마크 이턴.

1959년 - 벨기에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미셸 프뢰돔.

1963년 - 일본의 영화 감독 이와이 슌지.

1966년 - 대한민국의 배우 명로진.

1966년 - 프랑스의 배우 카랭 비아르.

1967년 - 대한민국의 무술인 정두홍.

1969년 - 대한민국의 테니스 선수 김일순. / 대한민국의 배우 유호정.

1979년 - 대한민국의 배우 송창의.

1983년 - 미국의 가수 다이앤 버치. / 대한민국의 배우 문보령

1984년 - 대한민국의 래퍼 팔로알토.

1986년 - 미국의 배우 리키 울먼. / 미국의 배우 미샤 바턴.

1987년 - 우루과이의 축구 선수 루이스 알베르토 수아레스.

1989년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방송인 공평희.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기성용. / 일본의 가수 나카니시 유카(SKE48). / 일본의 축구 선수 나가사토 아사노. / 말리의 축구 선수 삼바 디아키테.

1990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석. / 일본의 수영 선수 이리에 료스케.

1991년 - 대한민국의 아티스트 기리보이.

1993년 - 대한민국의 펜싱 선수 윤지수

1994년 - 대한민국의 가수 영재 (B.A.P).

 

 

 

사망

41년 - 로마 제국의 3대 황제 칼리굴라

1865년 - 라이베리아의 초대 총리이자 2대 대통령인 스티븐 벤슨.

1916년 - 한말의 정치인 친일파 고영희.

고영희(1849년 12월 16일(음력 11월 2일) ~ 1916년 1월 24일)는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이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포함되었다.

1866년 부사용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후 김기수가 수신사 대표로 일본에 갔을 때 그를 수행하였다. 그는 이런 기회를 통해 강화도 조약 체결 후 바로 일본의 문물을 접하면서 일찌감치 친일 개화파에 속하게 되었다. 귀국 후 일본의 발전 모습을 알리고, 원산항이 개항되어 통상항이 되자 사무관 처리가 되어 크게 공을 세웠다.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갔을 때 또다시 김기수를 수행하였다. 1882년 일본공사 하나부사의 차비 역관이 되었고, 그 뒤 중용되어 인천 조계 획정의 사무를 맡았다. 이어서 참의 교섭 통상 사무. 참의 내무 부사를 역임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면서 일시 몰락하여 간성.삭녕.고양 등의 군수직을 지낸 뒤 사직하고 일시 항거하다가 다시 복귀하여 1885년 이후 기기 국방판을 지냈다. 1894년 갑오경장에 참여하여 내부 참의, 학무아문 참의, 농상아문 협판을 지냈다.

1895년 주일 특명전권공사를 거쳐 1896년 농상공부 협판, 외부 협판이 되었으며, 독립협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1899년 9월 12일 - 9월 17일, 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1903년 주일 특명전권공사, 탁지부 협판, 중추원 찬의 등을 거쳐 1904년 황해도 관찰사, 1905년 제실 회계심사국장·경리 원경을 거쳤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 탁지부대신으로 중용되어,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의 양위를 강요할 때 적극적인 반대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 뒤 법부대신, 1909년 내부대신 임시서리·탁지부대신이 되었다. 한일 신협약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협조하여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포함되었다.

훈장으로는 이화대수장 및 1910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 1등 자작 위를 받고, 10만 엔을 받았다. 또한,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그의 작위를 습작한 아들 고희경과 함께 선정되었다. 고희경은 후에 백작으로 승급했다. 2006년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일제 강점기 초기 친일 반민족 행위 106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1924년 - 룩셈부르크 여대공 마리아델라이드.

1930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좌진.

김좌진(1889년 12월 16일 ~ 1930년 1월 24일)은 일제 강점기의 군인이자 독립운동가이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 김동삼, 오동진 등과 3대 맹장(猛將)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 의해 피살되었다. 본관은 신 안동. 김상용의 11대손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나이 17세에 집안의 가노를 해방 및 땅을 분배하였고 민족적 자립을 위한 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도 서는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위한 교육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대한제국 교육 사회사업 르네상스 혁신 선구자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하다.

1889년 12월 16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다. 3살 때 아버지 김형규를 여의었으나 넉넉한 살림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손가락질하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모친인 한산 이 씨에 의해 엄하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1904년 해주 오 씨 오숙근과 혼인하였다.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가노 해방 및 전답을 무상 분배한 뒤 1907년 호서(충청도) 지방을 밝게 한다는 즉 개화한다는 뜻인 호명학교를 설립하였다. 가산을 정리한 뒤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으로 된 자신의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했다. 홍성에 대한협회 지부와 기호흥학회를 조직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기호흥학회 장학재단을 설립하였고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이갑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 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하는 한편,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하여 자금조달차 돈의동에 사는 족질 김종근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복역 중 김구와도 조우한다. 1913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한 김좌진은 “사나이가 실수하면 용납하기 어렵고 지사가 살려고 하면 다시 때를 기다려야 한다.”라는 시를 지었다. 1917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박상진 등과 활동하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면서 “칼 머리 바람에 센데 관산 달은 밝구나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고국이 그립도다 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진정 내가 님의 조국을 찾고야 말 것이다.”라는 시를 지었다. 대한 정의단에 합류한 군사부문 책임자가 되었고 동 단체를 군정부로 개편한 후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한편, 1918년 박상진이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박상진을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은 하지 못했다.

1918년 무오 독립선언에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 사단장과 사관연성소 소장을 겸임했다. 1920년 10월 21일 청산리 전투를 지휘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김좌진은 1921년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 1921년 우수리강을 넘어 이만까지 갔다가, 다시 만주로 돌아왔기 때문에 자유시 참변은 겪지 않았다.

1925년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직 겸임한 신민부를 창건하였다. 또한 성동사관학교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 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1928년 한국유일독립당을 조직하였고 1929년 한족 총 연합회 주석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사이에 갈등이 격화되었고, 공산주의 선동에 방해되는 이유로 1930년 1월 24일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고려 공산청년회 회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김일성은 사건 직후 이 붕해에게 살해되었으며, 박기봉에 의하면 만주 공산주의 단체의 기관지인 「적기(赤旗)」지(誌) 1930년 3월호에 암살 교사범 김일성의 죽음을 추도하는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한편 중외일보 1930년 2월 24일자 기사 배후(背後)에서 권총으로 김좌진에 하수(下手)한 김일성에 나오는 김일성은 단순한 성행 불량자로 김봉환과 다른 인물로 보이며, 그가 단독으로 암살을 실행한 것으로 나온다.

또 암살범 박상실이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집행을 위해 봉천으로 이송 중이라는 1931년 9월 11일 자 동아일보 기사가 있고, 삼천리 1932년 3월호 기사 남편 김좌진의 초혼, 미망인 나혜국 여사의 방문기에도 "그놈(박상실)을 잡아서 봉천에 보내어 사형에까지 처하게 만들었다"라고 했으므로, 그도 무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래에 중국 연변의 학계에서는 김좌진 암살범은 조선공산당 아성총국에서 파견한 무장 공작대원 공 도진이라고 말한다. 공도진은 이복림(1907 ~1937)의 본명이며, 그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 산하 동북 항일연군 제3로군 총사령 자오샹지(趙尙志, Zhao Shangzhi, 1908~1942)의 신임을 받던 최측근 인사였는데, 1937년 전사했다. 박상실이 공도진(이복림)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김좌진은 사망하기 직전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란 말을 남겼다. 사후 3년 뒤, 아내 오숙근이 유해를 수습하여 고향 홍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해방 후 김두한에 의해 정식으로 안장되었다.


한족 총연합회에서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장례에 참석한 중국 사람들은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애도하였다.
1933년 경성에 있던 부인 오숙근이 일제를 피해 만주로 다시 가서 상자에 김좌진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밀장 한 뒤 1957년 김두한에 의해 지금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이듬해 사망한 부인 오숙근은 남편 김좌진과 함께 합장되었다.
1947년 김좌진을 추모하는 추모회가 열렸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74년 보령시에서 김좌진의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고, 이와 동시에 그의 업적과 정신을 후세에 계승코자 매년 10월 22일에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2013년 8월, 대한민국 해군 손원일급 잠수함 4번 함이 '김좌진함'으로 명명되었다.


1932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장녕.

이장녕(1881년 음력 5월 20일 ~ 1932년 양력 1월 24일)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이장영(李長榮)이라고도 하며, 아호는 백우(白于)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1907년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여 구 대한제국의 군인들은 황실의 친위대에 편입되었으나, 그는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어서 이상룡과 이회영 형제들, 김동삼, 이동녕 등이 뒤따라 망명했고, 그는 이들과 함께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무장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설립된 서일의 군정부 참모장을 맡았고, 이 기관이 북로군정서(총재 서일)로 확대 개편되었을 때도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북로군정서는 1920년 대한독립군 등 다른 독립군과 연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는데, 이때 이장녕은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 영내로 이동했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 운동가들이 다수 사망하고 서일이 자결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장녕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독립 운동 단체 통합을 위해 지린에서 열린 전만 통일회의 주비회 주비 회장을 맡아 신민부를 조직했다. 1930년 김좌진 암살 이후 홍진의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고 당군인 한국독립군도 조직했다.

1932년 가족과 함께 중국인 마적단에게 피살되었는데 이장녕을 살해한 마적들은 일제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다. 아들인 이의 복도 건국훈장을 수여받은 독립 운동가이다.



1932년 - 독일의 히틀러 청소년단원 헤르바르트 노르쿠스.

1965년 - 영국의 정치 지도자 윈스턴 처칠.

윈스턴 레오너드 스펜서 처칠 경(영어: Sir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KG, OM, CH, 1874년 11월 30일 ~ 1965년 1월 24일)은 영국의 총리(1940년 5월 10일 ~ 1945년 7월 26일, 1951년 10월 26일 ~ 1955년 4월 7일)를 지낸 정치가이다.

윈스턴 처칠은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의 후손 가운데 한 명이다. 그 가문은 유명한 정치가를 배출했는데, 그의 할아버지는 처칠이 어렸을 때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비서로 일하였다. 처칠 7대 선조인 선덜랜드 백작 3세 찰스 스펜서 전 영국 총리는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8대 선조이기도 하다. 즉,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처칠은 같은 뿌리의 친척이다.

윈스턴 처칠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Lord Randolph Henry Spencer-Churchill)은 재무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자넷 처칠 여사는 미국 여성이었다. 그러나 비타협적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정적과 권력투쟁에 밀리고서 회한의 세월을 보내다가 일찍 사망한다. 당시 처칠은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서 사관생도로 공부하고 있었다. 처칠은 아버지의 정치적인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적에게 타협과 유머와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았던 그는 해로우 스쿨에서의 학과 공부에 흥미가 없었으나(계몽사에서 펴낸 《어린이 그림 위인전기 처칠》(신상웅 씀, 김희준 그림)에 따르면 해로우 학교 입학시험 때에 주어진 시간인 2시간동안 라틴어 작문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다행히 영문학과 역사 성적이 좋아서 입학을 허락받았다.), 독서를 좋아한 덕분에 문학과 역사에 소질이 있었다. 결국 친척동생들과 전쟁놀이를 하면서 뛰어놀다가 다쳐서 1년간 치료받은 일을 계기로 라틴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브라이튼 학교로 옮긴 그는 학과공부에 비로소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아들이 군인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부친의 권유로 3수 끝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계몽사에서 펴낸 《어린이 그림위인전기 처칠》(신상웅 씀, 김희준 그림)에 따르면 사관학교 입학 때에 독서, 수영, 승마 등을 익히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했으며, 중대장이 모범을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리더십과 공동체의 규칙 존중을 배웠다.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혀서 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수용소에서 겨우 탈출한 처칠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로 변장하여 돌아다니다가 영국인의 도움으로 숨어 지낼 수 있었다. 처칠은 수단과 인도 말란 칸트에서 주민들이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항하여 일으킨 항쟁을 진압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 장관을 맡고 있었다. 처칠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어 속도를 빠르게 향상하는 등의 국방개혁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었으나, 독일이 잠수함을 개발하는 바람에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튀르크(현재 터키 공화국)의 무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영국군을 파병한 작전도 인명과 재산피해가 커서 사실상 실패한 작전이 되었다.

작전 실패에 대한 문책으로 장관직을 사퇴한 처칠은 처제의 권유로 우울증을 잊기 위해서 시골에서 수채화를 그렸다. 제1차 세계대전에 중령으로 복귀하여 참전하였다. 당시 그는 유머를 활용하고 복지를 개선하여 군인들의 사기를 높였는데, 모든 장병들을 목욕을 하게 하여 만연해 있던 피부병을 치료하게 했으며 "겁먹지 말게.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것이야."라고 설득하여 군인들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를 진정시켰다. 또한 그는 알렉산더 플레밍을 도왔다.

보시다시피 영국 수상은 미국 대통령 앞에 숨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 2차 세계대전 초기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프랭클린 델러노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러 갔을 때 보수당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보수당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꿨다가, 다시 보수당에 입당하였다. 때문에 당시 보수 당계 정치인들에게 처칠은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이후 정계에서 퇴출되었지만 다시 정치에 복귀하였다.

처칠은 한때 나치 독일이 영국을 공습할 것을 염려해 과거 공군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던 일이 있었는데 당시 정계에서 무시되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이 진짜 영국을 공격하여 처칠의 견해가 맞다는 것이 입증되자 영국 정부는 처칠을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하였다. 이후 네빌 체임벌린이 외교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조지 6세의 승인으로 처칠이 총리에 임명됐다. 이후 처칠은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막아내고 연합국의 승리를 가져왔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칠 시대에 지은 벙커는 현재도 영국 지하에 있다.

1945년 1월 1일에서 1945년 7월 26일까지 6개월간 영국 군주 조지 6세의 대리청정을 전담 수행하기도 한 처칠 영국 총리는 1943년에서 1945년까지 전후 유럽 문제를 놓고 연합국이 몇 차례 회담을 열었는데, 여기서 부분적으로 소련이 동유럽 국가를 병합하여 지배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처칠은 소련 지도자 스탈린이 혐오스러운 체제를 이끄는 "악마"같은 폭군이라고 보았다.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의 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카이로 회담이 끝나자마자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으로 장소를 옮겨 소련의 스탈린을 만났다. 테헤란 회담에서 처칠은 영국은 폴란드가 독립 국가로서 복원되는데 지대한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다. 영국은 이 문제가 연합국 간에 마찰의 소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문제를 꺼내길 우려하였다.

1946년 3월 5일, 미국 남부 미주리주의 작은 도시 풀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행한 연설에서 처칠은 유럽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졌다고 주장했다. 처칠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영어 사용 국민들 간의 형제애적 단결'을 호소하였다. 1951년 보수당이 다시 정권을 잡고 총리에 재임명되었다.

1953년 처칠 회고록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1955년에 앤서니 이든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정식으로 은퇴하였다. 1964년 미국 의회는 처칠에게 미국 명예시민권을 수여하였다.

1965년 1월 24일,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1972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윤재근.

1981년 - 대한민국의 아동 문학가 이원수

1993년 - 미국의 법학자 서드굿 마샬.

2004년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레오니다스 다 시우바.

2006년 - 미국의 배우 크리스 펜.

2011년 - 독일의 영화 제작자 베른트 아이힝거.

2015년 - 독일의 전차 에이스 오토 카리우스.

 

기념일

한국의 설날 - 음력 1월 1일

통일의 날: 루마니아 왕국의 전신인 몰다비아 왈라키아 연합공국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 루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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