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오늘의 역사 1월 26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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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531년 - 1531년 리스본 대지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지진이 발생, 약 3만여 명이 사망했다.

1755년 리스본 지진은 1755년 11월 1일 토요일, 만성절 날에 포르투갈 왕국을 덮친 전대미문의 재앙이다. 지진이 리스본에 도달한 것은 현지시각으로 09시 40분이었다. 지진에 뒤따른 화재와 해일로 인해 리스본과 그 일대 지역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늘날의 지진학자들은 리스본 대지진의 모멘트 규모를 8.5 ~ 9.0, 진앙지는 상비 센트 곶 서남쪽으로 약 200 킬로미터 지점 대서양 해역으로 비정한다. 리스본에서 발생한 사망자 수는 적게는 1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어, 역사상 가장 사망자 수가 많은 지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리스본 대지진은 포르투갈 왕국의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켰고 포르투갈의 식민지 팽창에 심대한 지장을 미쳤다. 유럽의 계몽주의 철학자들 역시 이 사건을 중요하게 다루어 신정론과 숭고에 관한 의문과 발전이 뒤따랐다. 또한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을 미친 지진 중 최초로 과학적 연구가 이루어진 지진으로써, 현대의 지진학과 지진공학의 모태가 되었다.

1755년 11월 1일 아침, 만성절 축일 날 지진이 일어났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3분 30초 ~ 6분가량 지진이 지속되었고, 이 첫 번째 타격으로 도시 한복판에 너비 5 미터(15 피트)의 균열이 쩍 갈라졌다. 건물들이 붕괴하는 아비규환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건물이 없는 탁 트인 곳이 안전할 것이라 판단하고 부둣가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해저가 드러나고 배들이 좌초할 정도로 물이 후퇴한 바다였다. 지진이 덮치고 약 40분 뷔, 해일이 항구와 도심지로 쇄도했고, 탕 구스 강을 역류했다. 몇몇 말 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력을 다해 박차를 가했다. 그 뒤 해일이 두 번 더 왔고, 해일이 덮치지 않은 곳에서는 화재가 발생해 5일 밤낮을 불탔다.

이 재앙에 휘말린 포르투갈 도시는 리스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리스본 남부, 특히 알가르브 지역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었다. 해일이 알가르브의 해안 요새들 중 일부를 박살 냈고, 숱한 가옥들이 무너졌다. 리아 포르모사 모래톱이 해일을 막아준 파루를 제외한 알가르브 지역의 거의 모든 해안도시 및 촌락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라구스에서는 파도가 도시 성곽 꼭대기에 다다랐다. 프니치와 카스카이스를 비롯한 다른 포르투갈 지역들도 피해를 입었으며, 심지어는 내륙도시인 쿠 빌러도 영향을 받았다. 지진의 충격파로 인해 쿠빌라의 성벽과 높은 탑들이 무너졌다. 마데이라 제도에서는 푼샬을 비롯한 작은 정착지들이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아조레스 제도의 거의 모든 항구가 해일로 파괴되었고, 바닷물은 내륙 150 미터까지 육박했다.

지진의 충격파는 전 유럽에서 느낄 수 있었다. 베네치아의 감옥에 갇혀 있던 카사노바도 충격파를 느꼈다. 충격파의 진행범위는 북으로는 핀란드, 남으로는 북아프리카에 이르렀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린란드와 캐리비안까지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높이 20 미터의 해일이 북아프리카 해안을 휩쓸고 대서양을 가로질러 마르티니크와 바베이도스에 이르렀다. 잉글랜드 남부 콘월에는 높이 3미터의 해일이 찾아왔고, 아일랜드 서해안의 골웨이 역시 해일로 인해 도시 성곽 일부가 파괴되었다. 아일랜드 남해안 킨 세일에서는 선박 여러 척이 항구 안으로 굴러들어 오고 시내의 장터에 물이 들어찼다.

지진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은 리스본 대지진의 진앙지가 이베리아 반도 쪽으로 치우친 대서양 어딘가라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에 관해서는 다소의 논란이 있었다. 초기 이론에서는 고린지 해산이 진원으로 추측되었으나 시뮬레이션 결과 역사상의 피해를 입힐 만한 해일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진앙지가 보다 포르투갈 해안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아조레스-지브롤터 변환 단층을 따라 해저 반사 탐사를 하던 도중 세인트 빈센트 곶 서남쪽에서 길이 50 킬로미터의 충상 구조와 깊이 1 킬로미터 이상의 이동 구조가 발견되었다. 이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지각에 상당한 구조적 영향이 가해졌을 것이다.

타구스 강 쪽에서 바라본 리스본 지진을 묘사한 그림

경제사학자 Álvaro Pereira 는 당시 리스본 인구를 대략 200,000 명으로 추산하는데, 그중 30,000 ~ 40,000 명이 죽었다. 모로코 해안에서도 10,000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2009년에 당대 기록들을 조사하던 결과 11월 1일의 지진과 11월 18일의 국소적 지진의 보고가 서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 밝혀졌다. Pereira는 지진과 지진으로 인한 해일 및 화재로 인해 포르투갈, 에스파냐, 모로코에서 사망한 사람의 수를 40,000 명에서 50,000 명으로 추산한다.

리스본 건물들 중 85%가 파괴되었고, 이때 16세기 마누 엘리네(포르투갈의 고딕 양식) 건축물들이 대부분 파괴되었다. 지진을 견뎌낸 건물들도 곧이은 화재로 파괴되었다. 지진 발생 불과 6개월 전에 개장한 오페라하우스는 불에 타 폭삭 주저앉았다. 타 구스 강 바로 옆에 있던 리베이라 궁전도 해일에 휘말려 박살 났다(오늘날 그 자리에는 코메르 시우 광장이 있다). 궁전 안에 소장되어 있던 장서 70,000 여권과 티치아노, 루벤스, 코 레지오 같은 거장들의 미술품 수백 점이 모두 소실되었다. 왕실 문서보관소도 바스쿠 다 가마를 비롯한 대항해시대 초기 탐험가들의 항해 기록 등 소중한 사료들을 품은 채 소멸했다. 귀중한 장서 18,000여 권이 소장되어 있던 de Lourical 후작 궁전도 파괴되었다. 지진은 리스본 대성당, 상파울루 바실리카, 산타 카타리나, 상비센테 데 포라, 노사 센호 라 다 콘세이상 벨하 등 리스본의 이름난 교회 건물들도 파괴되었다. 당시 리스본 최대 규모의 병원이던 호시우 광장의 만성 병원이 불길에 휩싸여 입원 중이던 환자 수백 명이 타 죽었다. 국가 영웅인 누누 알바레스 페레이라의 무덤도 떠내려가 시신이 유실되었다. 오늘날에도 리스본을 찾으면 카르모 수도원을 비롯해 당시 파괴된 폐허들 중 보존된 것들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당시 포르투갈 왕가는 무사히 리스본을 빠져나갔다. 당시 공주 중 한 명의 부탁으로 주제 1세를 비롯한 왕가는 해돋이 구경 인파와 함께 있었고, 덕분에 화를 면했다. 지진이 지나간 뒤 주제 1세는 폐소공포증에 걸렸고, 리스본 교외의 아주다 언덕에 천막과 정자를 만들고 그곳을 궁전 대신 삼았다. 왕의 폐소 공포증은 평생 낫지 않았고, 왕이 죽은 뒤에야 그 딸 마리아 1세가 아주다 궁전의 건설을 시작했다. 수상 세바스티앙 데 멜루(소위 폼발 후작)도 왕가와 마찬가지로 살아남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냐는 물음에 폼발은 “망자를 묻고 산 자를 치유하라”라고 답했다. 소방관들은 넘실거리는 불길을 잡기 위해 사투를 벌였고, 여러 노동자 및 일반 시민들이 나서 서서 시체가 썩어 역병이 돌기 전에 수천 구의 시체를 모두 치웠다. 교회는 싫어했지만 시체들은 바지선에 태운 뒤 바다 한가운데 수장시키는 식으로 처리되었다. 도시의 혼란 상태를 정리하기 위해 포르투갈 육군이 전개되었고, 도시 곳곳에 교수대가 설치되었다. 당시 공개 처형된 사람은 서른 명이 넘는다. 군은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고 그들을 잡아다 도시 재건 사업에 투입했다.

왕과 수상은 리스본 재건에 즉시 착수하여, 지진이 쉽쓸고 지나간 지 1개월이 조금 지난 1755년 12월 4일, 공학자 마누엘 다 마이아의 계획안에 따른 리스본 재건 안이 발표되었다. 마이아는 다섯 가지 선택 안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옛 리스본의 폐자재를 그대로 사용해 그 자리에 다시 도시를 짓는 것으로, 가장 값싼 방법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일부 거리들의 너비를 넓히는 것이었고, 네 번째는 바이자(시내 지역)를 완전히 쓸어버리고 백지상태에서 다시 도시를 짓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는 리스본을 아예 버리고 다른 곳에 새 도시를 짓는 것이었다. 왕과 수상은 네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도시의 잔해는 10년 안에 모두 정리되었다. 새롭고 완전히 질서 정연한 도시를 만들 생각에 왕은 커다란 광장, 직선형 대로, 넓은 거리 등을 신생 리스본의 새로운 표어로 삼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폼발 양식 건물들은 유럽 최초로 내진 설계를 사용한 건물들 중 하나이다. 실험을 위해 작은 나무 모형이 만들어졌고, 군대가 그 주위를 행진하면서 지진을 시뮬레이션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리스본의 새로운 중심지인 바이자 폼 발리나는 오늘날 리스본의 최고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리스본 뿐 아니라 알 가브르의 빌라헤알드산투 안토니우 등지에서도 폼발 양식에 따른 재건이 이루어졌다.

또 대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혼란에 대한 해결책으로 주제 1세의 뒤를 이은 마리아 1세는 1780년 카사피아를 설치하고 경찰총수 피나 마니크에게 그 조직을 맡겼다.

대지진은 일반 대중 뿐 아니라 많은 인텔리겐치아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리스본은 당대 유럽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도시였으며, 지진이 일어난 날은 다름 아닌 만성절 축일 날이었다. 그리고 지진이 휩쓸고 간 뒤 리스본의 대형 교회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그 결과로 기독교 교회와 교회의 가장 큰 후원자인 국가의 권위에 대한 의문들이 술렁였다. 신학자들은 지진의 종교적 원인과 메시지를 찾아내고자 노력하며 이것은 신의 천벌이라고 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지진의 피해를 피해 간 유일한 지역이 리스본의 홍등가인 알파마였다는 점을 거론하며 코웃음을 쳤다.

왼쪽 위 구석에 천벌을 의인화한 천사가 불타는 검을 들고 있다

마침 발흥하던 계몽주의로 인해 유럽 전역의 먹물들은 대지진에 대하여 신학자들과는 전혀 반대되는 생각을 했다. 볼테르는 캉디드 및 리스본 재앙에 관한 시에서 라이프니츠의 “최선의 세계 최선의 상태”를 마구 공격했다. 한편 장 자크 루소는 지진으로 인한 대도시의 파괴는 자신이 주장하는 농촌지역의 자연적 삶의 정당성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훗날 독일의 아도르노는 리스본 대지진이 18세기 근세 사회에 미친 영향은 20세기 근대 사회에 홀로코스트가 미친 그것에 비견된다고 진단했다. 가톨릭의 총본산인 리스본 시민들이,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만성절 날 커다란 대성당들에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를 올리던 도중에 지진으로 깔려 죽고 불타 죽고 물에 빠져 죽었다. 자애로운 신의 존재를 상정하던 라이프니츠는 패배했다. 유럽의 문화와 철학은 영원히 바뀌었다.

이마누엘 칸트도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세 개의 저서를 출판했다. 지진에 매혹되었던 젊은 칸트는 관련된 모든 자료를 긁어모았고, 지진의 원인을 기계적으로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그는 뜨거운 기체로 채워진 지하의 거대 동굴의 이동으로 인해 지진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결론적으론 틀렸으나, 지진의 원인을 신의 천벌 따위 초자연적 무엇이 아닌 자연적인 것에서 찾은 최초의 시도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발터 벤야민은 칸트의 얇은 책들이 독일의 과학적 지리학의 태초이자 지진학의 시작이었다고 단언한다.

폼발 후작은 대지진에 대한 자료 수집을 위해 전국의 모든 교구에 지진과 그 결과에 관한 질문서을 배부했다. 질문서는 13개의 질문이 있었는데 주로 지진의 시간대와 방향, 여진의 횟수, 우물의 수위 변화, 바다의 움직임, 교구가 입은 피해 정도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지진이 언제 시작되어 얼마나 지속되었는가?
  • 충격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방향이 따로 있었는가? 예컨대 남쪽인가 북쪽인가? 건물들이 더 잘 무너지는 방향이 있었는가?
  • 몇 명이나 죽었고 그 중 시체를 분간할 수 있는 이는 몇인가?
  • 바닷물이 처음에 솟아올랐는가 가라앉았는가? 또 평소에 비해 몇 핸드나 더 솟아올랐는가?
  • 만약 불이 났다면 불길이 얼마나 지속되었고 그 불길로 인해 입은 피해는 무엇인가?

질문지와 그에 돌아온 답변들은 오늘날에도 국립문서보관소인 토레 도 톰보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자료들을 연구 및 교차 검증한 결과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리스본 대지진을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재분석할 수 있었다. 지진 역사학자 찰스 데이비슨은 리스본 대지진을 현대의 과학적 방식으로 조사된 최초의 지진으로 평했다.



1699년 - 카를로비츠 조약: 도나우 강변의 카를로비츠에서 신성 동맹 전쟁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과 유럽 동맹국들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다. 이 조약에 따라 오스만 제국이 도나우 강 이북의 영토를 기독교 국가들에 영구적으로 할양하다.

1837년 - 미시간주가 미국의 26번째 주가 되었다.

 


1960년 - 서울역 압사 사고가 일어났다.

서울역 압사 사고는 1960년 1월 26일 열차 탑승객들이 서울역 계단에서 집단으로 넘어진 사건이다.

1960년 1월 26일 오후 11시 45분경 서울역발 목포행 호남선 601편 완행열차를 타려던 승객들이 서울역 3번 계단에서 집단으로 넘어진 사건이다.

사건 발생 후 1960년 1월 27일자 동아일보 석간신문에는 31명이 압사하고 38명이 부상당했다고 타전되었으나 이후 갱신되어 최종 31명이 압사, 49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되었으나 또다시 갱신되어 최종 31명이 압사하고 41명이 중경상을 입은 것으로 확정되었다. 압사한 31명은 교통병원(서울철도병원)에 안치되었으며, 부상자들은 세브란스병원. 서울적십자병원, 국립중앙의료원으로 분산 수용하여 입원 후 치료를 받았다.

이 사고의 사망자 대부분은 부녀자이며 이들 대부분이 귀향 때문에 대개가 무거운 짐을 들고 있어 사고를 한층 더 키운 것으로 파악되었다.

구정 이틀 전인 1960년 1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다른 지역으로 귀향하려는 승객들이 서울역에 몰려 역 구내와 광장에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평소보다 3배가량 많은 3,926명이 열차표를 예매하였고, 이로 인해 이 날 오후 10시 50분에 출발하는 서울역발 목포행 호남선 601편 완행열차의 차량을 8량에서 18량으로 증차하였다. 이에 원래 발차 35분 전인 10시 15분에 개찰할 예정이었으나 차량 증차로 인해 탑승 5분 전인 10시 45분에 개찰을 시작하였다. 열차가 먼저 출발한 것을 우려한 탑승객들은 개찰구에서 무리하게 뛰어나갔고, 먼저 타려는 승객들이 폭이 좁은 4·5번 플랫폼 전용 3번 계단으로 무질서하게 몰려들면서 승객 한 명이 앞으로 쓰러지자 연쇄적으로 후속 승객들이 밀려 넘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31명이 압사하고 49명이 부상을 입었다.

수사 당국은 1월 27일 당일 서울역 관계자가 객차 1량당 최대 수용량이 80명인데 비해 각 량당 평균 200장, 도합 3,000장을 발급하는 바람에 급히 증차를 한 점과 많은 승객을 모아 한꺼번에 개찰한 점, 열차의 정원을 초과하여 표를 판매한 점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서울역장은 한꺼번에 개찰을 한 것에 대해 승객들의 편의를 위해 한 것이며 기차 출발이 지연된다는 점을 여러 번 안내방송으로 고지하였고, 혼잡을 덜기 위해 부녀자들을 먼저 내보냈다고 답했다. 이어 열차의 정원을 넘겨 표를 판매한 점에 대해서는 열차 표를 산 사람이 전부 타지 못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임시 편성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답변했다.

사고 발생 직후 70여명의 역무원들과 다른 사건에 출동 중이던 경찰관 30여 명이 즉시 사고 현장에 투입되어 사망자 및 부상자들을 인근 병원으로 분산 이송하도록 정리하였고, 김일환 교통부 장관 등 교통부 관료가 총출동하여 사건 현장의 수습책을 지휘하였다. 서울역에는 곧바로 사고대책본부가 설치되었고 사망자들의 합동위령제를 사고 다음날인 27일 오후 3시 교통부 앞 광장에서 치르고 사망자들의 시신을 유가족에게 인계하고 위자료를 지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고로 인하여 미처 탑승하지 못한 2,300명의 승객들은 다음날 오전 0시 2분경 출발하는 임시 열차에 탑승하였으며 나머지 승객들은 이어서 새벽 2시 3분경 출발하는 임시 열차에 탑승하였다.

사고 다음날인 1월 28일 오전 서울지검은 서울역에서 일어난 압사 사고와 관련하여 서울역 구내의 사건 현장을 답사하였고 서울역장과 서울역 여객 주임 두 명을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우선 입건하였다. 같은 날 오후 국회 교통체신위원회는 임시긴급위원회를 열고 최인규 당시 내무부 장관을 초치하여 사건의 전말과 사건과 관련된 경찰 수사에 대해 서면보고를 하고 교통부 내부의 인사조치를 단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2월 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월 1일 서울지검이 서울역장과 서울역 여객 주임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신청한 구속영장을 집행하였으며 이날 밤 11시 서울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임흥순 서울특별시장은 예정에 없던 동대문운동장과 효창운동장, 장충체육관의 개조 계획을 발표하였으며, 철도청 당국은 2월 10일부터 운행되는 호남선 열차의 증편을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후 4월 1일 치러진 공판에서 서울역장에게 무죄, 서울역 여객 주임에 대해 금고 1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12월 28일, 서울역 압사 사고가 동아일보사가 선정한 1960년도 국내 10대 뉴스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1962년 -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덕혜옹주가 근 30여 년 만에 김포 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하다.



1965년 - 베트남 전쟁 전투병력 파견안이 국회에 가결됨.

2008년 - 삼성 특검:특검 수사팀은 제일모직 원종운 전무 등 그룹 내 간부급 인사 3명을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하여 조사하였고, 이번 사건의 수사 단서를 제공한 김용철 변호사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2008년 - 성재기 등에 의해 대한민국의 남성단체 겸 인권운동단체 남성연대가 창립되다.

2012년 - 트위터가 '국가별 차단'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2015년 - 로스 야노스 공군기지 추락사고: 그리스의 F-16 전투기 한 대가 스페인 남부에 있는 로스 야노스(Los Llanos) 군사기지에 추락해 11명이 사망하는 등 3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다.

2018년 - 밀양 세종병원 화재.

밀양 세종병원 화재는 2018년 1월 26일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 가곡동에 있는 세종병원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이다. 이 사고로 의사 1명, 간호사 1명, 간호조무사 1명을 포함해 47명이 사망하고 112명이 부상당하는 등 총 15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스프링클러 설비가 작동하지 않았는데 법률상 2018년 6월 30일까지 설치하도록 돼 있어 1월 마지막 주에 공사를 시작하기로 한 상태였다.
 
세종병원 1층 응급실에서 7시 32분에 화재가 발생해 밀양소방서가 대응을 시작하였다. 9시 29분에 큰 불길을 잡고 10시 20분에 화재를 완전히 진화하였다. 그러나 소방력이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이미 25명이 사망한 상태였다.

밀양소방서는 7시 32분에 화재를 접수해 가곡119안전센터와 구조대가 7시 35분에 선착하였다. 선착대는 주 출입구로 진입이 어려워 병원 2층에 사다리를 전개하고 구조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응원 출동한 구조대원 상당수를 요양병원에 투입해 요양병원 환자를 전원 구조하였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사고가 발생한 지 10분 뒤인 오전 7시 39분부터 국가위기관리센터를 가동했고, 위기관리센터는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주재했다. 오전 8시 8분에 문 대통령이 위기관리센터를 방문해 지휘하려 했으나, 청와대는 화재가 진압됐기 때문에 수석-보좌관 회의를 진행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후 오전 10시 55분 문재인 대통령은 긴급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해 화재 상황을 보고받고 철저한 대응을 지시했다.

오전 7시 56분 보건복지부는 국립중앙의료원 재난응급의료상황실을 통해 소방상황실의 의료지원 요청이 접수되자 밀양시 보건소 신속대응반과 인근 재난 거점병원 재난의료지원팀을 출동시켜 환자 분류, 응급처치, 이송 등을 지원했으며 또 재난응급의료 상황실은 소방 등 유관기관과 인근의 수용 병상, 고압산소치료시설, 구급차 등 의료자원 정보를 실시간 수집·공유하며 환자들의 신속한 분산 이송을 도왔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행정안전부 장관, 소방청장, 경찰청장은 보건복지부 등 관계부처와 함께 가용한 모든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건물 내부를 신속히 수색해 최우선으로 인명을 구조하고 화재진압에도 최선을 다하라"는 긴급 지시를 내렸고 행정안전부는 범정부 사고 수습본부를 구성해 보건복지부가 이끄는 중앙사고 수습본부를 지원키로 했다. 범정부 사고 수습본부는 중앙사고 수습본부와 유기적인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유지하고 이미 화재현장에 파견된 범정부 현장대응지원단을 통해 사상자와 유가족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을 할 계획을 밝혔고 오전 9시 10분에 현장으로 급파되어 활동했다. 한편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오전 9시에 헬기를 타고 현장으로 이동해 현장 수습을 위한 지휘 등에 나섰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화재와 관련된 지역책임부대 가용 인력과 장비의 최대 지원을 지시하여 "현재 39사단 119연대의 5분 대기조와 기동중대 5분 대기조, 의무 앰뷸런스 1대, 군의관 2명, 의무병 2명 등을 화재 현장에 보내 지원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한다.

오후 2시 20분에 밀양을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가 밀양시청 상황실에서 보고받고 정부서울청사, 세종 소방청, 청와대 위기관리센터를 연결한 화상회의를 했고, 또 환자들이 대비한 병원을 찾아 의료진에게는 "잘 부탁한다"라고 말했고, 환자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8시 10분에 밀양시 지역재난안전대책본부가 가동되기 시작했고, 이후 8시 23분에 경상남도로 지휘권이 이관되었다. 대한민국 소방청은 8시 27분부터 중앙 긴급구조 통제단을 가동하면서 10시 40분부터 18시까지 중앙사고 수습본부를 운영하다가 보건복지부로 사고 수습 임무를 이관하였다.

세종병원 1층 응급실 옆 직원 탈의실에서 처음으로 화재가 발생하였다. 앞쪽 병원과 뒤편 요양병원에 있던 환자들은 대부분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이었다. 이로 인해 밀양소방서는 연소 확대는 방지하였지만 환자들이 탈출하지 못해 사망자가 많았다고 추정하고 있다. 병상을 증가하여 수용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의료진의 수도 늘어야 하지만 병원 측이 적정한 인원을 갖추지 못했고, 불법 증축으로 대피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피해를 키웠다.

병원 내에 스프링클러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는 점에서 건물관리에 소홀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병원 이사장은 세종병원은 건축법상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이 아니었고, 세종 요양병원은 2018년 6월 30일까지 스프링클러 설치를 마치기 위해 공사 계획을 수립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다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사고 당일 국민의 당은 문재인 정부의 컨트롤 타워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자유 한국당 장제원 수석대변인도 논평에서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던 문재인 정부는 도대체 어디 있었냐며 정부에 대한 비판을 가했으며 이후 SNS을 통해서도 논평과 같은 이유로 비판했다. 김성태 자유 한국당 원내대표는 직접 참사 현장을 방문해, 청와대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현송월 뒤치다꺼리하느라 국민의 생명을 못 지켰다고 지적하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와 책임을 요구했고 한편 함께 현장에 있었던 안철수 국민의 당 대표도 역시 세월호 참사, 제천 참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 달라진 게 없다며 비판했다. 홍준표 자유 한국당 대표는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밀양 화재 참사 긴급 대책회의'에서 세월호를 이용해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지난 8개월 동안 재난안전 대비책을 전혀 갖추지 않은 정부로 보인다며 비판했으며 사고 하루 뒤 홍준표는 자신의 SNS을 통해 자유 한국당은 공식 논평으로 문재인 정권은 눈물쇼로만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면서 전혀 정치적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한다며 비판했다. 국민의 당은 논평으로 지금이라도 말뿐인 국민안전 대신 재발방지를 위한 실질적 지원과 관련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편 일부 유족은 정부가 이번 화재가 난 뒤 해준 게 뭐가 있느냐며 유가족 지원 등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얘기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홍준표는 세종병원을 방문하여 참사에 대한 정치적 책임 차원에서 이낙연 국무총리의 사퇴를 촉구했다.

2018년 1월 26일 화재 사고 발생 직후 경찰수사본부(본부장 진정무 경남지방청 2 부장), 검찰 수사팀(수사지휘 총괄 창원지검 김홍창 차장검사, 수사팀장 박현철 밀양지청장), 수사지원팀(팀장 창원지검 김완규 형사 2 부장)을 구성하여 협조체제가 구축되었다. 2018년 2월 10일 효성 의료재단 세종병원을 운영한 (의) 효성 의료재단 이사장 손경철, 효성 의료재단 세종병원 총무과장(소방안전관리자) B를 구속하였다. 2018년 2월 23일에는 세종병원의 행정이사 C를 구속하였으며, 3월 6일 재단 이사장 손경철(업무상 과실치사상, 의료법 위반, 건축법 위반, 위계공무집행 방해)과 세종병원 총무과장 B(업무상 과실치사상)를 구속 기소하였다. 2018년 3월 15일에는 세종병원 행정이사 C(업무상 과실치사상, 의료법 위반)를 구속 기소하였으며, 세종병원 병원장 D(업무상 과실치사상, 의료법 위반), (의) 효성 의료재단 법인(의료법 위반, 약사법 위반, 건축법 위반), ○○보건소 공무원 F(허위공문서 작성·동행사), ○○보건소 전 공무원 G(허위공문서 작성·동행사)를 불구속 기소, 대진의사 H(의료법 위반), I(의료법 위반), J(의료법 위반), (의) 효성 의료재단 세종 요양병원 전 의사 K(약사법 위반), 세종 요양병원 간호사 L(약사법 위반), N발전기 운영자 M(위계공무집행 방해 방조)를 약식 기소했다.

세종병원은 손경철이 이사장으로 취임한 2008년 연매출 36억 원에서 2016년에는 74억 원으로 2배 이상 성장하였고, 2017년 11월 경 사업비 17억 원을 투자하여 병원을 신축하는 등 점차 그 규모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재 등 안전사고에 대비한 시설, 설비, 인력 확충에 대해서는 투자가 미흡하였고 이에 검찰은 화재사고의 주요 책임자인 효성 의료재단 이사장 손경철, 세종병원 행정이사, 총무과장(소방안전관리자), 병원장을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기소하였다.

또한 효성의료재단 이사장 손경철은 2012년 4월 경 세종병원 및 세종 요양병원에 10kw 발전기 1대만 설치하고도, 20kw의 발전기 2대를 설치한 것처럼 허위의 시험성적서를 보건소에 제출하여 담당 공무원의 의료시설 점검 업무를 방해(위계공무집행 방해)하였으며, 2014년 ~ 2017년 경 목조 휴게실, 컨테이너 창고, 샌드위치 패널 창고, 목조 비가림 천장 등 4건의 불법 증개축(건축법 위반)을 하였다. 세종병원과 세종 요양병원을 잇는 2층 연결통로 바닥에는 1층과 통하는 공간이 있는데, 이를 통하여 유입된 1층의 유독가스가 불법 건축된 폐쇄형 비가림막으로 인하여 외부로 배출되지 못하여 피해가 확대되었다. 세종병원은 관할 당국으로부터 위 폐쇄형 비가림막에 대하여 수차례 철거 명령을 받았으나 이행하지 아니하고, 약 3,000만 원의 이행강제금만 납부하며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손경철 이사장과 세종병원 행정이사는 2017년 2월 28일 ~ 2018년 1월 26일 의료인 수 변경 허가 없이 당직의사 4명을 고용하였으며(의료법 위반), 2018년 1월 8일 ~ 26일 당직의료인으로 의사 1명, 간호사 2명을 두어야 함에도 간호사를 두지 않은(의료법 위반) 사실도 확인되었다. 세종병원 병원장은 2018년 1월 15일 ~ 26일 H 등 4명의 의사로 하여금 병원장인 자신의 명의로 처방전을 작성하게 한 의료법 위반 사실이 확인되었다(대진의사 4명도 의료법 위반).

보건소 공무원 F와 G는 2012년 4월 세종병원에만 자가발전시설이 설치되어 있음에도, 세종 요양병원이 자가발번시설기준을 충족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작성하여 같은 보건소 보건사업과장의 결재를 받았다(허위공문서 작성․동행사).

세종 요양병원 전 의사 K는 2017년 12월 1일 약사가 아님에도 세종 요양병원 간호사인 L에게 의약품을 조제하게 하였고(약사법 위반), L은 약사가 아님에도 의약품을 조제하였다(약사법 위반).

 

문화

1898년 - 전차, 전등, 전화의 독점 사업권을 가진 한성전기회사 설립.

1982년 - 대한민국의 프로야구단 MBC 청룡 (現 LG 트윈스) 창단.

1988년 -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이 뉴욕 브로드웨이 머제스틱 극장에서 개막하다.

2000년 - XHTML 1.0이 W3C의 권고안이 되다.

2017년 - 걸그룹 원더걸스가 데뷔 10년만에 전격 해체하였다.

2018년 - 동해선 영덕역 ~ 포항역 구간이 개통되었다.

 

 

탄생

183년 - 위나라의 초대 황제 조비의 정비 문소황후

1763년 - 스웨덴의 국왕 칼 14세.

1880년 - 미국의 군인 더글러스 맥아더.

1892년 - 미국의 첫 흑인 여성 비행사 베시 콜먼.

엘리자베스 베시 콜먼

엘리자베스 베시 콜먼(1892년 1월 26일 ~ 1926년 4월 30일)은 미국의 민간 비행사다. 콜먼은 첫 흑인 여성 비행사로 알려져 있다. 또한 최초로 비행 자격증을 획득한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이기도 하다. 국제 항공 운항 자격증 역시 흑인 여성과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가운데 최초로 획득하였다.

베시 콜먼은 1892년 1월 26일 텍사스주의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체로키족의 일원이었던 조지로 소작농이었고, 어머니 수잔 콜먼은 흑인이었다. 베시는 이들의 자녀 열셋 중에 열 번째 아이였다. 베시 콜먼이 두 살이 되던 해 가족은 텍사스의 웍 서해 치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23세까지 살았다. 여섯 살이 되어 윅서해치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여 8년 동안 매일 4마일을 걸어서 통학하였다. 콜먼은 목화밭을 가로질러 난 길을 따라 학교와 성가대 그리고 교회를 오갔다고 한다. 학교는 학급 하나가 전부인 곳이었고, 콜먼은 수학에 재능이 있는 학생이었다. 1901년 콜먼은 삶의 극적인 전환점을 만났다. 아버지 조지 콜먼이 가족을 남겨두고 오클라호마의 당시에는 인디언 준주라고 불리던 곳으로 보다 나은 기회를 잡기 위해 돌아갔다. 하지만 어머니 수잔과 아이들은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았다. 12세가 되어 베시 콜먼은 침례교 선교 교회의 학교에 진학하였고, 18세에 오클라호마 유색인 농업 일반 대학교(오늘날 오클라호마 랭스턴의 랭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한 학기가 지나자 학비가 없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916년 23세의 콜먼은 형제들과 함께 시카고로 이주하였다. 시카고에서 콜먼은 화이트 삭스 이발소의 매니큐어 기술자로 일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돌아온 조종사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콜먼은 조종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칠리 가게에서 두 번째 일을 구했다. 당시 미국 비행 학교는 흑인이나 여성 모두 입교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가르쳐 줄 흑인 비행사 역시 없었다. 주간지 시카고 디펜더의 발행인이었던 흑인 변호사 로버트 생스탁 아보트는 콜먼의 유학을 격려하였다. 콜먼은 시카고에 은행을 설립한 최초의 흑인이었던 은행가 제시 빙가와 디펜더로부터 학자금을 빌렸다.

콜먼은 시카고에 있는 버리츠 언어 학교의 프랑스어 수업을 받고 1920년 11월 20일 프랑스 파리로 갔다. 콜먼은 프랑스에서 비행 자격증을 획득했다. 콜먼은 뉴포르 의 82식 복엽기의 조종을 배웠는데, 그 비행기의 "조종 시스템은 야구 방망이 두께의 수직 조종간이 조종사 앞에 튀어나와 있고 러더 페달이 발 앞에 놓인" 것이었다. 1921년 6월 15일 콜먼은 국제 비행 연맹으로부터 국제 비행 자격증을 획득한 최초의 미국 흑인 여성이자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이 되었다. 자격증을 획득한 이후에도 두 달에 걸쳐 비행 기술 교육을 받은 뒤 1921년 9월 뉴욕항에 도착하였다. 언론은 콜먼의 미국 귀환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1920년대 동안 콜먼은 순회 연설을 하였고 올랜도에서 헤자키아 힐 목사와 그의 부인 비올라를 만났다. 그들은 콜먼을 올랜도 인근 패러 모어의 워싱턴 스트리트에 있는 시온산 침례 선교 교회의 사제관으로 초대하였다. 이 거리는 2003년 콜먼을 기념하여 "베시 스트리트"로 이름을 바꿨다. 목사 내외는 콜먼을 딸처럼 대했고 콜먼은 비행 자금을 모으기 위해 미장원을 차렸다.

콜먼은 민간 비행사로 살기 위해서는 곡예비행의 일종인 반 스토밍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러나 이 분야는 이미 경쟁이 치열했고, 그녀는 좀 더 배워야 했다. 시카고에 돌아가 살펴보았지만 그녀를 가르쳐 줄 만한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콜먼은 1922년 다시 유럽으로 갔다. 그녀는 두 달 동안 프랑스에서 고등 비행 훈련 과정을 거치고 네덜란드로 가 세계적인 비행기 제작자인 안토니 포커를 만났다. 콜먼은 독일의 포커 기업도 방문하였고 그곳의 수석 비행사로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는 자신감을 얻은 콜먼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5년 동안 곡예비행을 하면서 콜먼은 "퀸 베시"로 알려졌다. 중요한 이벤트에 초대되고 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는 흑백 양측 모두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콜먼이 주로 타던 비행기는 복엽 기인 커티스 JN-4 "제니""였고, 그 외에도 전쟁 이후 시장에 풀려 나온 여러 종류의 비행기를 탔다. 콜먼은 1922년 9월 3일 개최된 미국 에어쇼에 참가한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되었다. 그녀의 지지자인 아보트는 디펜더를 통해 콜먼을 "세계 제일의 여성 비행사"로 소개하였다.

1926년 4월 30일 콜먼은 플로리다주의 잭슨빌에 갔다. 그녀는 이미 그녀의 애용 기인 커티스 JN-4 (제니)를 달라스에서 주문한 뒤였다. 그러나 그녀의 기술 및 홍보 에이전트였던 24살의 윌리엄 D. 윌스는 달라스에서 비행기를 몰고 오면서 세 차례나 긴급 착륙을 하였고 결국 그 비행기에 문제가 생겼다. 콜먼의 친구와 가족들은 비행기가 안전하지 않다며 비행을 말렸지만, 콜머은 윌을 뒷자리에 태우고 이륙하였다. 그녀는 만약을 대비하여 안전벨트를 풀고 여차하면 콕크 피트에서 뛰어내려 낙하산을 펴 탈출하려고 하였다. 비행기는 이륙 10여분 만에 추락하였고 불길에 휩싸였다. 콜먼과 윌 모두 사망하였으며 후일 조사 결과 기어박스에 렌치 하나가 끼어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사망 당시 콜먼은 34세였다.

시카고 오헤어 국제공항 인근 도로에 있는 공공도서관에 콜먼의 이름이 붙여졌다.

텍사스주 시더 힐에 콜먼의 이름을 딴 베시 콜먼 중학교가 있다.

1995년 미국 우편 사업국은 콜먼을 기념하는 32 센트 우표를 발행하였다.



1917년 -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루이스 잠페리니.

1918년 - 루마니아의 정치인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1925년 - 미국의 배우 폴 뉴먼.

1936년 - 대한민국의 작곡가 백병동.

1940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우식.

1945년 - 미국의 경제학자 제러미 리프킨.

1955년 - 스웨덴의 배우 비에른 안드레센.

1961년 - 대한민국의 법조인, 정치인 주호영.

1962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강성곤.

1963년 - 포르투갈의 전 축구선수,현 축구감독 조제 모리뉴.

1967년 - 일본의 성우 모리카와 토시유키.

1973년 - 일본의 만화가 신조 마유.

1977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해일.

1979년 - 일본의 성우 기모토 오리에.

1980년 - 일본의 성우 고바야시 사나에.

1981년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곽현화.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차일목.

1982년 - 대한민국의 가수 KCM.

1983년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 선수 이재진.

1984년 - 대한민국의 성우 정혜원. / 대한민국의 래퍼 제리케이.

1986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재중 (JYJ). / 대한민국의 성우 김디도.

199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정찬헌.

1994년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스테프 캐틀리.

1995년 - 중국의 가수 선의 (우주소녀).

1996년 - 대한민국의 래퍼 아이엠 (몬스타엑스).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황희찬.

1998년 - 대한민국의 가수 정찬우 (iKON). / 대한민국의 가수 문빈 (아스트로).

 

사망

910년 - 당나라의 시인 나은.

1656년 - 능원대군.

1823년 -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

1893년 - 미국의 군인, 남북 전쟁 북군의 장군 애브너 더블데이

1911년 - 대한제국의 정치가 이범진.

이범진(1852년 9월 3일 ~ 1911년 1월 26일)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이며 순국지사로 자는 성삼이며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17대손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무위 대장을 지낸 조선 말기의 무관 이경하의 아들이고 구한말의 외교관 이위종의 아버지이며 구한말의 독립운동가 이범윤의 형이다.


고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았고 1895년 명성황후가 친러 정책을 쓸 때 대신 서리가 되었으나, 그 해 8월 을미사변이 일어나 친일파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파면되었다. 그 해 10월에 다시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하고 러시아로 망명하였으나 1896년 귀국하여 러시아와 힘을 모아 친일파를 몰아내고 새로운 내각을 세워 법무 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친일파 등으로 인해 신변이 위험해지자 자원하여 1896년~1897년 주미 공사로 임명받아, 그 후 3년 동안 미국과 유럽 나라의 대한제국의 외교관 역할을 했다. 1899년에는 러시아, 프랑스 등 유럽 3개국 주재 겸임 공사가 되었고, 1900년에는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어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공사를 겸임했다.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한 압력이 높아지자 일본 견제를 위한 러시아 외교 강화 차원에서 190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상주공사로 파견되어 초대 주 러시아 상주 공사관으로써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다. 대한제국과 러시아의 외교를 주로 담당하며, 특히 당시 일제의 감시 아래서 러시아와 대한제국의 외교 및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황제에게 비밀리에 고종 황제의 친서를 전하는 등의 중요한 임무도 수행했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각국 주재 한국 공사들을 소환하자 이범진은 이에 불응하고 고국 소환에 응하지 말라는 고종의 밀서대로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면서 일제에 의해 러시아 공사관이 폐쇄된 이후에도 페테르부르크 시내의 아파트에 옮겨 살면서 1910년까지 여권발급 등 공사업무를 계속하였다. 동시에 비공식 외교활동을 통해 국권 회복에 노력했다. 을사늑약에 항거하고,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대한제국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후원했는데, 헤이그에 갈 수 있도록 특사들의 안전을 러시아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그밖에 연해주 지역의 항일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는데. 그중에는 해조신문 후원과 동의회의 조직과 활동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후대에 이범진을 당시 러시아의 정치적인 친분 때문에 친러파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은 일본제국의 맞서 외교적으로 러시아의 힘이 필요했으며, 러시아 입장에서도 한반도의 영향력 강화하는 차원에서 일본과의 대립하는 사항에서 대한제국의 외교관계는 중요했다. 또한 러시아도 조선의 주변의 열강들처럼 조선의 여러 자원과 철도부설 등의 이득을 취하려고 했으며, 실제로 압록강 주변의 산립채벌권을 얻으려는 했다. 하지만 이범진은 러시아의 이러한 행보에 이의 반하여 응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단순한 친러 세력이 아닌 조국의 이익에 우선시 여긴다는 점에서 그 당시의 조선의 친일 세력과는 대조적인 태도였음을 알 수 있다.

러일 전쟁 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러시아 방면에서 방랑하다가 1911년 1월 13일 한일합병 이후 나라 잃은 슬픔으로 밧줄로 목을 맨 다음 머리에다 권총 3발을 쏘고 자결했다. 반일투쟁의 수단으로 자결을 택한 것으로, 당시 서울 주재 러시아 총영사 소모프는 이범진의 자살은 “적들에게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복수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유해는 페테르부르크에 안장되었다.

그의 아들 이위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의 일원으로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의 승인 없이 강압에 의해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임 주장하는 대변인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1911년 아버지 이범진의 자결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16년 동부 유럽 전선에 배치되었다. 1917년부터 1924년까지의 자신의 행적이 담긴 자서전을 일종 보고서로서 소련 공산당에 제출하였고,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이위종은 '블라디미르 세르게예비치 리'라는 러시아 이름도 사용했다.


1949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홍병기.

홍병기(1869년 11월 5일 ~ 1949년 1월 26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에서 받은 도호는 인암(仁菴)이다.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출신으로 홍 익룡과 한익화 사이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1887년 19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1890년까지 3년간 세자익위사에서 조선군 하급 무관으로 활동하였다.

189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94년 손병희 휘하에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박인호와 함께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 망명해 있던 손병희로부터 진보회를 창설하여 머리를 자르게 하라는 지시를 직접 받고 갑진 개화운동에도 참가했다. 1919년 손병희가 주도한 3·1 운동에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측 대표로 참가했으며,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복역했다.

손병희 사망 이후 천도교에는 최린의 신파와 이에 대항하는 구파 외에 소장파를 중심으로 반일 항쟁을 기도하는 파벌이 생겨나 1922년 경성부에서 고려혁명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홍병기는 이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다가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으로 망명했다.

1926년 지린에서 최동희, 김봉국 등 천도교 혁신파가 정의부와 연합하여 양기탁을 위원장으로 한 고려혁명당을 창당할 때 고문으로 참가했다가 검거되어 또다시 징역 2년형을 받아 복역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감개무량한 심기로 조용히 칩거하다가 1949년 1월 26일 서울에서 트럭에 치여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홍병기 선생을 2009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51년 - 대한민국의 군인 심일.

1962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전형필.

전형필(1906년 7월 29일 ~ 1962년 1월 26일)은 대한민국의 문화재 수집, 보존, 연구가이며 교육가이다. 자는 천뢰, 호는 간송, 지산, 취설재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훈민정음 원본 등의 문화재를 수집하고,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들을 되찾아와 1938년 조선 최초의 근대 사립미술관인 보화각을 세웠다. 해방 후 혼란기와 한국전쟁 중에 한국의 문화재들을 지켜내었고 1962년에 순국했다. 간송 전형필 선생의 사후 보화각은 전형필 선생의 유족들과 지인들에 의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와 간송미술관으로 개편되었고, 간송미술관에서는 1971년 봄부터 '겸재 전'주제를 시작으로 2014년 가을까지 일 년에 2차례씩 무료 일반 공개를 하였다. 현재는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설립되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간송 컬렉션을 선보이고자 동대문 디자인플라자&파크에서 간송문화전을 진행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는 그의 업적을 기려 2012년 12월 14일 전형필의 가옥을 등록문화재 제521호로 지정하여 지정 관리하고 있고, 2014년 10월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에 추서 되었다.

1906년 서울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에 휘문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에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고서, 고서화를 취급하던 서점)을 인수하고, 우리 민족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문화재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휘문고 등보 통학교 스승이었던 춘곡 고희동과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1934년에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을 매입하여 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했으며,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을 세웠다.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였으며, 1945년에는 1년 동안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았다. 1960년에는 이전부터 그를 돕던 김상기, 김원룡, 최순우, 진홍섭 등과 함께 '고고미술 동인회'를 만들고 고고미술이란 동인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미술사학 회의 전신인 고고미술 동인회는 한국 최초의 미술사학회이다.

1962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화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 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전형필 선생의 수집품들을 연구 정리하기 위해 한국민족미술연구소로 개편되었고 연구소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1971년부터 간송미술관의 이름으로 봄과 가을 일 년에 두 차례 일반 공개를 하고 있다.

훈민정음해례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가 유명하다. 194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소재되어있던 훈민정음해례본은 원래 광산 김 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 김 씨 문중의 가보였다고 한다. 세종이 광산김씨 문중에 여진 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 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김태준을 통해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해례본만 만원에 판매하였다. 최초 판매가로 천 원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문화재의 가치를 정확히 치르는 것으로 유명했던 전형필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거간 노릇을 한 김태준에게 천 원을,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의 가격으로 만원을 치렀다.

당시 천 원이면 좋은 기와집 한 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학계에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던 한글 창제 원리가 이 훈민정음해례본에 의해 밝혀졌다. 후에 이 훈민정음해례본은 1962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1997년 10월에 대한민국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기도 하였다. 거간 노릇은 한 김태준과 이용준은 사회주의자로, 판매한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광복 후 김태준은 일련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되었고, 이용준은 월북하였다고 한다.

존 개츠비로부터 사들인 국보급 고려청자 20점은 모두 사십만 원에 사들였는데 원래 제시한 가격은 오십만 원 이상이었으나 전형필 선생의 문화재 사랑에 감동하여 판매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중 인민군들이 전형필의 소장품들을 모두 가져가려 하자 포장을 맡아하던 소전 손재형과 혜곡 최순우가 이 핑계 저 핑계로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였고 뜻대로 되지 않자 일부러 계단에서 굴러 다리를 부러뜨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전형필 또한 피난을 가지 않고 보화각 근처 빈 집에 숨어 소장품이 훼손될까 노심초사하였다고 한다.


1963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연병호.

증평군 도안면에 조성된 연병호 항일역사 공원

연병호(1894년 11월 22일 증평 ~ 1963년 1월 26일)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호 도명. 일명 병학, 동학, 병호.

청안 중명 학교와 북간도 창동학원, 중화민국에 건너가 적을 두며 베이징에서 광복군의 소개로 리다자오와 한때 만남을 갖기도 했으며 때로는 심하게 다투면서 러시아를 통한 대한민국의 독립 지원금을 최대한 유치하기 위해 분투하였다. 일본 제국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주권이 강탈당하자 국외로 망명하여 만주·난징·상하이 등지로도 전전하며 활동하였다.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적이 있으며 지린 군정서 분서 조직, 서기장 참모를 역임하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였고 국내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기로 하고 동지 송세호와 함께 입국하여 이병철. 조용주 등을 포섭, 비밀 항일운동단체인 청년외교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의 설립목적은 국내의 정보를 수집하여 임시정부에 제공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정부에 송금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였다. 이 목적을 위하여 여성들의 비밀결사인 대한 애국부인회와 긴밀한 협조를 취하며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1920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이 언도되었다. 1922년 출옥하자 상하이로 건너가 안창호·여운형 등과 같이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동아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한국혁명당 중앙 집행위원 겸 선전부장, 경성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회 영접 부장, 한국독립당 중앙 집행위원, 한국독립당 선열 사적조사위원장 겸 훈련부장, 대한민국 정무위원 겸 농민 부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다.


1971년 - 독일의 군인 헤르만 호트.

1978년 - 일본의 정치인 호시노 나오키.

1991년 -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 가수 한복남.

1996년 - 미국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찰스 주트로.

2001년 -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하다 사망한 이수현.

2004년 - 대한민국의 언어학자 허웅.

 

 


2011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안춘생.

안춘생(1912년 8월 12일 ~ 2011년 1월 26일)은 안중근의 5촌 조카로서, 독립운동가 출신인 대한민국 군인, 정치가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장이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군인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광복 후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다가 중국군 경력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군의 육군 장교로 활동하고 예비역 중장으로 예편했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대한민국 국방부 차관보를 역임했다. 본관은 순흥이다. 1909년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가 된다.

황해도 벽성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황해도 해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그 후 중화민국 만저우 지방 헤이룽장 성 하얼빈에서 성장한 그는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안중근의 5촌 조카이다. 안악 사건을 주도한 안명근은 그의 큰아버지이다.

1936년 만주 중앙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 군 장교로 복무, 중국 육군 제3사단 소대장을 역임했다. 뒤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넘어와 한국 광복군 제2지대 구대장에 임명됐다.

해방 후 1947년 이범석의 민족청년단 창단에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국군의 창군에도 참여하여 육군에서 활동하였다.

민족청년단 훈련부장으로 재직 중이던 1948년 12월 25일, 중국군 경력이 인정되어 대한민국 국군의 육군 장교로 채용되었다.

1952년 진해 육군사관학교 교장, 1955년 육군 소장이 되고, 육군 소장 재직 중 육군대학 9기로 입소하여 1956년 2월 25일 수료하였다. 1956년 7월 26일 육군 제8사단장 직책에 올랐으며 그 후 육군 제6군단장 직무대리, 육군 제2군단장, 육군 제1군단장 직무대리 등을 지낸 그는 1959년 3월 육군 중앙 고등 군법회의 재판장, 1959년 6월 2일 육군 제2관구 사령관, 1959년 10월 육군 인사참모부장이 되고 10월 5일 육군 참모총장 송요찬을 수행하여 대만군 총사령관 나열 장군의 초대로 타이완을 다녀왔다. 1960년 7월 7일 국방부 국군 부재자투표지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1961년 예편하였다.

1961년 3월 대한중공업 상무이사, 1962년 대한중공업 이사장 서리, 62년 10월 인천중공업 부사장, 1963년 2월 13일 인천중공업 대표이사 사장과 2월 15일에는 대한중공업 이사장직에 임명되어 겸직하고 1966년 11월 21일 인천중공업 사장에 연임, 67년 2월 15일에 삼선 하였다. 1964년 6월 15일 인하공대 재단 관선이사로 파견되었다. 그밖에 정방 물산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1972년부터는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간접 선출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유신정우회 당적으로 활동하였다. 기타 광복회 회장, 대한노인회 회장, 신민주공화당 전임 고문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011년 1월 26일에 10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2018년 - 일본의 정치인 노나카 히로무.

2019년 - 프랑스의 음악가 미셸 르그랑.

2020년 - 미국의 농구선수 코비 브라이언트.

이미지출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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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 빈 브라이언트(1978년 8월 23일 ~ 2020년 1월 26일)는 미국의 전 농구선수로, 선수 시절에는 전미 농구 협회(NBA)의 팀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소속으로 활약하며 5회의 우승(2000 ~ 02, 2009, 2010)을 거두었다.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고 WNBA의 로스앤젤레스 스파크스의 감독으로 활동한 조 '젤리 빈' 브라이언트의 외아들이기도 하다. 현역 시절 별명은 "블랙 맘바"다.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난 브라이언트는 전 NBA 농구선수 조 브라이언트와 패멀라 콕스 브라이언트의 3명의 자식들 중 막내로 단 하나의 아들이었다. 그는 또한 농구 선수 조 "처비" 콕스의 외종질이기도 하다. 그의 부모는 레스토랑 메뉴에 본 일본 효고현 고베의 유명한 쇠고기 요리를 따서 그의 이름을 코비라고 지었다. 그의 중앙 이름 "빈"은 부친의 별명이 "젤리빈"이란 이유로 붙여졌다. 브라이언트는 로마 가톨릭 신앙으로 자라왔다. 코비가 6세 때 부친은 NBA로부터 은퇴하고 낮은 수준에서 프로 농구를 지속적으로 하는 데 가족을 이탈리아 리에티로 이주시켰다. 코비는 자신의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고 이탈리아어를 유창하게 하는 데 배웠다. 여름 동안에는 그는 농구의 여름 리그에서 활약하는 데 미국으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브라이언트는 3세 때 농구를 하기 시작하였고, 성장하면서 레이커스가 그의 가장 좋아하는 팀이었다. 이른 나이에 그는 또한 축구를 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팀은 AC 밀란이었다. 부친이 1991년 현역에서 은퇴했을 때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로어메리언 고등학교 체육관에 있는 브라이언트의 영구 결번 등번호 33번 셔츠와 기치 브라이언트는 필라델피아 외곽 로어 메리언에 위치한 아드모어에 있는 로어 메리언 고등학교에서 눈부신 고등학교 경력 동안 국내적 인정을 얻었다. 그는 신입생으로서 대학 농구 팀에 활약하였다. 그는 로어 메리언의 대학 팀을 위하여 시작하는 데 10년간의 세월에 첫 신입생이 되었으나 팀은 4승 20패의 기록과 함께 끝냈다. 이어진 3년에 브라이언트가 5개의 포지션을 전부 활약하면서 에이시스는 77 승 13 패의 기록을 수집하였다. 자신의 주니어 해에 그는 31.1 포인트, 10.4 리바운드와 5.2 어시스트를 평균하였고 "올해의 펜실베이니아 주 선수"로 임명되어 진행에서 대학 신병들로부터 주의를 끌어들였다. 듀크 대학교, 미시간 대학교,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와 빌라노바 대학교가 그의 명단에 정상에 있었고 케빈 가넷이 1995년 NBA 드래프트의 첫 라운드에 갈 때 브라이언트는 곧장 프로로 가는 것을 숙고하기 시작하였다.

아디다스 ABCD 캠프에서 브라이언트는 훗날의 NBA 동료 선수 라마 오돔과 더불어 활약하는 동안 1995년의 시니어 MVP 상을 수상하였다. 고등학교에서 재학하는 동안 당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의 감독 존 루카스는 브라이언트가 제리 스택하우스와 1 대 1로 활약한 팀과 함께 연습 경기를 가지는 데 그를 초청하였다. 고등학교에서 자신의 시니어 해에 브라이언트는 53년 만에 에이시스를 그들의 첫 주립 선수권으로 이끌었다. 경주가 열리는 동안 그는 에이시스를 31 승 3 패의 기록으로 이끌면서 30.8 포인트, 12 리바운드, 6.5 어시스트, 4 스틸과 3.8 블록 슛을 평균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고등학교 경력을 2883의 포인트에서 펜실베이니아 주 남동부의 사상 지도적인 득점으로서 마쳐 윌트 챔벌레인과 라이오넬 시먼스 둘다를 앞섰다.

로어메리언 고등학교 체육관에 있는 영구결번 등번호 33번 셔츠와 기치

브라이언트는 로어메리언에서 자신의 시니어 해 동안 자신의 뛰어난 상연으로 몇몇의 상을 받았다. 상은 "올해의 네이스미스 고등학교 선수" 상, "게이터 레이드 올해의 국내 농구 선수" 상, "맥도널드 올 아메리칸" 상과 "USA 투데이 올 USA 퍼스트 팀 선수" 상을 포함하였다. 브라이언트의 대학 코치 그렉 다우너는 그가 "지배하는 완료적 선수"였다고 소감을 남기고 그의 활동 윤리는 물론 팀의 최고 선수로서 그를 칭찬하였다.

샬럿 호니츠의 지명을 받자마자 트레이드되어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에 입단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의 감독 제리 웨스트에 의하면 1996년 NBA 드래프트에 대비하여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의 전직 선수 래리 드루와 마이클 쿠퍼에 연습 시합을 한 로스앤젤레스에서 연습 운동을 하였다. 레이커스는 자유 계약 센터 샤킬 오닐에게 제공을 만드는 데 샐러리의 공간을 제거하는 순서에서 자신들의 출발 센터 블라데 디바치를 이적시키는 데 추구하고 있었다. 당시 샬럿 호니츠의 총 스카우트 빌 브랜치는 드래프트가 있기 하루 전에 13번에서 자신들의 드래프트 선발을 이적하는 데 호니츠가 동의하였다고 한다. 이적 동의서에 대비하여 호니츠는 브라이언트를 드래프트 하는 데 전혀 숙고하지 않았다. 드래프트가 있는 동안 레이커스는 선발이 이루어지기 전에 레이커스는 순간을 선발한 호니츠에게 말하였다. 브라이언트는 고등학교에서 나온 곧바로 드래프트 된 처음이자 마지막 가드였다.

드래프트 후, 이적은 디바치가 레이커스로부터 이적되기 보다 은퇴하기로 협박할 때 위험에 놓였다. 하지만 6월 30일 디바치는 자신의 협박에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리그의 오프시즌 금지령이 끝날 때 이적이 7월 9일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 브라이언트가 아직 17세였던 이래 그의 부모는 그가 시즌이 시작되기 전 18세가 될 때 자신이 직접 계약을 맺을 수 있을 때까지 레이커스와 함께 그의 계약을 함께 맺어야 했다. 브라이언트는 총 3.5 백만 달러의 3년 신인 선수 계약을 맺었다.

브라이언트는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에서 여름 프로 리그에 데뷔하여 입석의 관중 앞에서 25 포인트를 득점하였다. 디펜더들은 그의 앞으로 오는 데 분투하고 그의 상연은 제리 웨스트와 레이커스의 코치 델 해리스를 신나게 하였다. 그는 끝장에서 36 포인트를 득점하고 4개의 경기에서 24.5 포인트와 5.3 리바운드의 평균과 함께 끝냈다. 1996년 ~ 97년 시즌에 신인 선수로서 브라이언트는 대부분 가드 에디 존스와 닉 밴 엑셀의 뒤로 벤치로부터 중지되었다. 당시 그는 NBA 경기에서 활약하는 데 최연소 선수(저메인 오닐과 전 동료 선수 앤드루 바이넘에 의하여 깨진 이래의 기록 18세 72일)가 되었다. 시초적으로 브라이언트는 한정된 분들에 뛰었으나 시즌이 지속되면서 그는 더 많은 활약 시간을 보기 시작하였다. 시즌의 말기에 그는 한 경기에 15.5 분을 평균하였다. 올스타 주말 동안 브라이언트는 신인 선수 도전에 참가하여 1997년 슬램덩크 시합을 우승하여 18세의 나이에 최연소 덩크 챔피언이 되었다. 그해를 통하여 브라이언트의 상연은 그에게 벤치 동료 선수 트래비스 나이트와 함께 NBA 올 루키 세컨드 팀에 자리를 주었다. 레이커스는 유타 재즈를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서부 콘퍼런스 준결승전으로 진출하였으며 브라이언트가 5번째 경기의 말기에 지도적 역할로 밀어나갔다. 바이런 스캇은 손목이 삐면서 경기를 놓치고, 로버트 호리가 재즈의 제프 호너세크와 싸우면서 퇴장당하고, 샤킬 오닐은 4번째 쿼터에서 1분 46초가 남으면서 파울볼이 상대 선수에게 잡혀 아웃되었다. 브라이언트는 경기의 말기에서 4개의 풍선을 쏘고, 재즈는 레이커스를 4 대 1로 탈락시키는 데 연장전에 98 대 93으로 우승하였다. 그는 처음에 4번째 쿼터에서 경기를 우승하는 2 포인트 점프 슛을 뿜고, 그러고 나서 마지막 분에 2개의 트라이 슛을 포함한 3개의 3점 슛을 불발하였다.

브라이언트의 2번째 시즌에 그는 더 많은 활약 시간을 받고 재능있는 어린 가드로서 자신의 더 많은 능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결과로써 브라이언트의 포인트 평균은 한 경기에 7.6에서 15.4로 2배 이상을 넘었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보통 후원한 가드들 사이에 그가 작은 포워드로 활약하는 것을 보인 레이커스가 소규모로 활약할 때 분들에서 증가를 보았다. 그는 올해의 NBA의 6번째 선수 상을 위하여 준우승을 하였고, 팬의 투표를 통하여 그는 또한 NBA 역사상 최연소 NBA 올스타 출발 선수가 되었다. 1983년 같은 올스타 경기에서 같은 팀에 4명의 선수들이 선발된 이래 그는 동료 선수들 오닐, 밴 엑셀과 존스에게 가입되었다. 브라이언트의 한 경기의 15.4 포인트는 시즌에 아무 비 출발 선수들 중의 최고였다.

1998년 ~ 99년 시즌은 리그에서 브라이언트의 출현을 1위의 가드로서 특정을 지었다. 출발 가드 밴 엑셀과 존스가 이적되면서 브라이언트는 록아웃으로 짧아진 50개의 경기 시즌을 위하여 모든 경기를 시작하였다. 그 시즌 동안 브라이언트는 7천만 달러 가치의 6년 연장 계약을 맺었다. 이 일은 그를 2003 ~ 04년 시즌의 말기까지 레이커스와 간직하였다. 자신 경력의 이른 무대에서 마저 스포츠 기사들은 그의 실력들을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의 실력들과 비교하고 있었다. 레이커스가 서부 콘퍼런스 준결승전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에 의하여 휩쓸어지면서 플레이오프 결과들은 나아지지 않았다.

브라이언트의 행운들은 1999년 필 잭슨이 레이커스의 총감독으로서 차지할 때 향상되었다. 확고한 향상의 세월 후, 브라이언트는 리그에서 최고의 슈팅 가드들 중의 하나가 되어 리그의 올NBA, 올스타와 올 디펜시브 팀들에 출연을 얻었다. 레이커스는 전설적인 센터-가드의 결합을 이룬 브라이언트와 오닐 아래 챔피언십 경쟁자가 되었다. 잭슨 감독은 시카고 불스와 함께 6개의 챔피언십을 우승하는 데 자신이 이행한 삼각 공격을 이용하였고, 이 공격은 브라이언트와 오닐 둘 다에게 NBA의 엘리트 층으로 오르는 데 도움을 주었다. 3개의 결과적 챔피언은 2000년, 2001년과 2002년 연속적으로 우승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워싱턴 위저즈를 상대로 시즌 전의 경기가 있는 동안 일어난 자신의 손 부상의 이유로 1999년 ~ 2000년 시즌의 출발에 대비하여 6주 동안 출장하지 못하였다. 브라이언트가 돌아와 경기에 28분 이상을 뛸 때 그는 그 시즌 동안 전부의 정적인 분류들에서 증가를 가졌다. 이 일은 한 경기에 어스스티와 스틸에서 팀을 지도하는 것을 포함하였다. 오닐과 브라이언트의 듀오는 레이커스를 67개의 경기들을 우승하는 데 이끈 강한 벤치를 후원하여 NBA 역사상 5번째로 가장 많은 기록을 위하여 동일시하였다. 이 일은 오닐이 MVP 상을 수상하고, 브라이언트가 자신 경력에서 처음으로 올 NBA 팀 세컨드 팀과 올 NBA 디펜시브 팀으로 임명되면서 이어졌다. 플레이오프들에서 오닐에게 2번째 사취를 하는 동안 브라이언트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서부 콘퍼런스 결승전의 7번째 경기에서 25 포인트, 11 리바운드, 7 어시스트와 4개의 블록을 포함한 어떤 붙든 상연들을 가졌다. 그는 또한 경기와 시리즈를 움켜쥐는 데 오닐에게 영차의 패스를 던지기도 하였다.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상대로 2000년 결승전에서 브라이언트는 페이서스의 제일린 로즈의 발에 상륙한 후 2번째 경기의 2번째 쿼터에서 자신의 발목에 부상을 입었다. 로즈는 후에 자신의 발을 브라이언트의 아래에 고의로 놓았다고 인정하였다. 브라이언트는 경기에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또한 부상의 이유로 3번째 경기를 놓쳤다. 4번째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후반전에서 22 포인트를 득점하고, 오닐이 경기의 밖으로 파울이 되면서 팀을 연장전 승리로 이끌었다.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를 120 대 118로 앞서는 데 놓는 데 우승 슛을 득점하였다. 6번째 경기의 116 대 111의 승리와 함께 레이커스는 1988년 이래 자신들의 첫 챔피언십을 우승하였다.

통계적으로 2000년 ~ 01년 시즈은 브라이언트가 이전의 해와 비슷하게 상연하는 것을 보았으나 그는 한 경기에 6 포인트 이상을 평균하였다. 그 일은 또한 브라이언트와 오닐 사이에 불 동의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한 해이기도 하였다. 다시 한번 한 경기에 5 어시스트에서 팀을 이끌었다. 레이커스는 56개 만의 경기들을 우승하여 지난해부터 11개의 경기들로 떨어졌다.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들에서 15 승 1 패로 가면서 응답하였다. 그들은 연장전에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상대로 자신의 첫 경기를 패하기 전에 결승전으로 진출하는 데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새크라멘토 킹스와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쉽께 휩쓸었다. 그들은 다음 4개의 경기들을 우승하고 많은 시즌만큼 로스앤젤레스로 자신들의 2번째 챔피언십을 가져오려고 하였다. 플레이오프들이 있는 동안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통계를 한 경기에 29.4 포인트, 7.3 리바운드와 6.1 어시스트로 올려 가져온 무거운 분들을 뛰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동료 선수 오닐은 브라이언트를 리그에서 최고 선수로 선언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정렬에서 2번째 해를 위하여 올 NBA 세컨드 팀과 올 NBA 디펜시브 팀으로 이루고 말았다. 추가로 그는 정렬에서 3번째 해를 위하여 NBA 올스타 경기에서 출발하는 데 투표되기도 하였다.

2001년 ~ 02년 시즌에서 브라이언트는 자신 경력에서 처음으로 80개의 경기들을 뛰었다. 그는 한 경기에 25.2 포인트, 5.5 리바운드와 5.5 어시스트를 평균하면서 자신의 만능의 활약을 지속하였다. 그는 또한 경력 최고의 46.9%의 슈팅을 가졌고, 다시 한번 어시스트에서 자신의 팀을 이끌었다.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31 포인트의 상연 후 자신의 첫 올스타 NBA 트로피를 주장하였다. 올NBA 디펜시브 팀으로 다시 이루는 동안 그는 또한 자신 경력에서 처음으로 올 NBA 퍼스트 팀으로 승진되기도 하였다. 레이커스는 그해에 58개의 경기들을 우승하고, 주 안에서 라이벌 팀 새크라멘토 킹스의 뒤로 퍼시픽 디비전에서 2위를 하였다. 브라이언트는 3월 1일 페이서스에 승리를 거둔 후, 페이서스의 레지 밀러를 주먹으로 친 후 1개의 경기에 출전 정지를 당하였다.

결승전으로 길은 레이커스가 이전해에 가진 라운드 활약보다 더욱 완고함으로 증명되었다. 레이커스가 트레일블레이저스를 휩쓸고 플레이오프의 첫 2개의 라운드에서 스퍼스를 4 대 1로 꺾은 동안 레이커스는 킹스를 상대로 홈코트의 장점을 가지지 않았다. 시리즈는 7개의 경기들로 뻗어져 2000년 서부 콘퍼런스 결승전 이래 레이커스에게 생긴 첫 일이었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자신들의 디비전 라이벌들을 꺾고 자신들의 3 연속 NBA 결승전 출연들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뉴저지 네츠를 상대로 2002년 결승전에서 브라이언트는 한 경기에 26.8 포인트, 51.4% 슈팅, 5.8 리바운드, 5.3 어시스트를 평균하였다. 23세의 나이로 브라이언트는 3개의 챔피언십을 우승하는 데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브라이언트의 활약은 두드러졌고 경기의 4번째 쿼터에서 그의 상연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 일은 브라이언트의 평판을 "움켜쥐는 선수"로서 굳혔다.

2002년 ~ 03년 시즌에서 브라이언트는 시애틀 슈퍼소닉스를 상대로 12점을 만들 때 2003년 1월 7일 경기에서 3점 슛을 위한 NBA 기록을 세웠다. 그는 한 경기에 30 포인트를 평균하고, 역사적인 활약에 착수하여 2월 전체에 40.6을 평균하는 동안 9개의 연속적 경기들에서 40 혹은 그 이상의 평균을 득점하였다. 추가로 그는 한 경기에 6.9 리바운드, 5.9 어시스트와 2.2 스틸을 평균하여 그 포인트에 경력 사상 최고였다. 브라이언트는 다시 한번 올NBA와 올 디펜시브 퍼스 팀 둘다로 투표되었고, MVP 상을 위한 투표에서 3위를 하였다. 정규 시즌에서 40 승 32 패로 끝낸 후,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들에서 벌버 둥치고 결국적인 NBA 챔피언 샌안토니오 스퍼스에게 6개의 경기들에서 서부 콘퍼런스 준결승전을 패하였다.

2003년 ~ 04년 시즌에 이어 레이커스는 NBA 챔피언십에서 또다른 후원을 이루는 데 NBA 올스타 칼 멀론과 게리 페이턴을 취득할 수 있었다. 브라이언트는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성폭행으로 체포되었다. 이 일은 브라이언트의 법원 출연의 이유로 그가 어떤 경기들을 놓치는 원인을 가져왔다. 정규 시즌의 마지막 경기에서 레이커스는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경기를 가졌다. 4번째 쿼터의 말기에 브라이언트는 연장전으로 보내지는 데 1.1초가 남으면서 3 포인트를 이루었다. 경기는 결국적으로 레이커스가 트레일블레이저스를 105 대 104로 통과하는 데 시간이 만기 되면서 브라이언트가 또 다른 3 포인트를 이룬 2번째 연장전으로 갔다.

오닐, 말론, 페이턴과 브라이언트의 출발 정렬과 함께 레이커스는 NBA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1990년 이래 자신들의 첫 챔피언십을 우승한 디트로이트 피스턴스에 의하여 5개의 경기들에서 패하였다. 그 시리즈에서 브라이언트는 한 경기에 22.6 포인트와 4.4 어시스트를 평균하였다. 그는 필드로부터 35.1% 슛을 쏘았다. 잭슨의 총감독으로서 계약은 재개되지 않고, 루디 토먀노비치가 차지하였다. 오닐은 라마 오돔, 캐런 버틀러와 브라이언 그랜트를 위하여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되었다. 이어진 날에 브라이언트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와 계약을 맺는 데 제공을 거부하고, 레이커스와 함께 7년 계약을 다시 맺었다.

브라이언트는 이전의 해에 생긴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의 평판이 손해를 당하면서 2004년 ~ 05년 시즌 동안 가깝게 세밀히 조사되고 비판을 받았다. 특히 손해당한 단서는 잭슨이 〈The Last Season:A Team in Search of Its Soul〉을 저서할 때 왔다. 이 책은 레이커스의 소란스러운 2003년 ~ 04년 시즌의 사건들을 상술하였고 브라이언트의 비판들의 다수를 가졌다. 책에서 잭슨은 브라이언트를 "코치할 수 없다"라고 불렀다. 시즌을 통한 중반에 토먀노비치는 갑자기 레이커스의 총감독으로서 사임하여 건강 문제들과 지침의 재현을 인용하였다. 토먀노비치 없이 레이커스의 시즌 나머지의 책무는 경력 수석 코치 프랭크 햄블렌에게 떨어졌다. 브라이언트는 한 경기에 27.6 포인트에서 리그의 2번째로 지도적인 득점자였으나 그는 표준 이하의 후원 배역들에 의하여 둘러싸였고, 레이커스는 34 승 48 패로 가 10년간의 세월에 처음으로 플레오프들을 놓쳤다. 그가 NBA 올 디펜시브 팀에 이루지 못하고, 또한 올 NBA 서드 팀으로 강등되면서 그해는 NBA에서 브라이언트의 전체 지위에서 떨어짐을 의미하였다. 시즌 동안 브라이언트는 또한 멀론과 레이 앨런과 공공적 불화들에 착수되었다.

2005년 ~ 06년 시즌은 브라이언트의 농구 경력에서 네거리로 특정을 지었다. 브라이언트와 지난 다름들에 불구하고, 잭슨은 레이커스를 감독하는 데 돌아왔다. 브라이언트는 동작을 보증하고, 전부의 출연들에 의하여 둘은 후반전을 함께 잘 해나가 레이커스를 플레이오프들로 다시 이끌었다. 브라이언트의 개인적 득점 성취들은 그의 경력의 가장 좋은 통계적 시즌에 결과들을 놓았다. 2005년 12월 20일 브라이언트는 댈러스 매버릭스를 상대로 3개의 쿼터에서 62 포인트를 득점하였다. 4번째 쿼터로 들어간 브라이언트는 전체의 매버릭스 팀을 62 대 61로 득점 매겨 슈팅 시간의 소개 이래 선수가 3개의 쿼터를 통하여 이 일은 해내는 데 단 한번이다. 레이커스가 2006년 1월 16일 레이커스가 마이애미 히트를 향할 때 브라이언트와 샤킬 오닐은 경기 전에 악수와 포옹에서 착수하면서 표제를 만들어 그들 사이에 괴롭혀진 불화에서 변화를 의미하였다. 1달 후, 그해의 NBA 올스타 경기에서 2명은 함께 웃은 것으로 보였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브라이언트는 경력 사상의 81 포인트를 득점하여 NBA 역사상 2번째로 최고의 싱글 득점 상연으로 1962년 윌트 체임벌린에 의한 듣점 만을 능가하였다.

체임벌린이 되풀이적으로 블로아웃 우승에서 내부 슛을 위하여 동료 선수들에 의하여 주어진 것에 반하여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가 14점에 의한 하프 타임에서 끌어지고 4번째 쿼터에서 후퇴할 때까지 자신 소유의 슛(대부분 외부로부터)을 창조하였다. 경기들이 더욱 빠르게 속력을 내고 득점 기회들이 더욱 힘든 시기에 활약한 체임벌린은 세븐티식서스의 169 대 147의 우승에서 자신 팀의 포인트들의 59%를 위한 계산은 레이커스의 122 포인트들의 득점된 브라이언트의 66%와 비교된다. 같은 달에 브라이언트는 또한 1964년 이래 4개의 연속적 경기들에서 45 혹은 그 이상의 포인트를 득점하는 데 첫 선수가 되어 그렇게 하는 데 체임벌린과 엘진 베일러에 가입하였다. 1월을 위하여 브라이언트는 한 경기에 43.4 포인트를 평균하여 NBA 역사상 8번째로 최고의 싱글의 달과 체임벌린보다 다른 선수를 위하여 최고였다. 2005년 ~ 06년 시즌의 말기에 브라이언트는 가장 많은 27개의 40 포인트 경기들과 2832개의 가장 많이 득점한 포인트를 위한 레이커스의 싱글 시즌 프랜차이즈 기록을 세웠다. 그는 한 경기에 35.4 포인트를 평균하면서 처음으로 리그의 득점 타이틀을 우승하여 한 시즌에 최소한 36의 평균으로 리그 역사상 5번째의 선수가 되었다. 브라이언트는 그해의 NBA MVP 상을 위한 투표에서 4위를 하였으나 22개의 1위 투표들을 받아 우승자 스티브 내시 만으로 2위였다.

시즌의 후기에 브라이언트가 2006년 ~ 07년 시즌의 시작에서 브라이언트가 자신의 등번호를 8번에서 24번으로 바꾼다고 보고되었다. 브라이언트의 첫 고등학교 등번호는 그가 33번으로 바꾸기 전에 24번이었다. 레이커스의 시즌이 끝난 후, 브라이언트는 TNT에 자신이 신인 선수로서 24번을 원하였으나 카림 압둘 자바와 함께 영구 결번된 33번이었으면서 무효였다고 말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아디아스 ABCD에서 143번을 입고 그 숫자들을 더하면서 8번을 선택하였다. 플레이오프의 첫 라운드에서 레이커스는 피닉스 선스에 3 대 1의 시리즈 지도를 도달하는 데 충분히 잘하여 4번째 경기에서 브라이언트의 연장전 탈취와 경기를 우승하는 슛과 함께 최고점에 달하였다. 그들은 6번째 경기에서 연장전에 126 대 118로 그 경기를 패하였다. 시리즈에서 한 경기에 브라이언트의 27.9 포인트에 불구하고, 레이커스는 깨지고 최후적으로 7개의 경기들에서 선스에게 떨어졌다. 6번째 경기의 패배에서 35개의 슛 중 20개에 50 포인트를 득점한 후, 브라이언트는 선스에게 121 대 90으로 패한 7번째 경기의 후반전에서 3개 만의 슛으로 비판을 받았다.

2006년 ~ 07년 시즌 동안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9번째 올스타 경기 출연으로 선발되었고 2월 18일 그는 31 포인트, 6 어시스트와 6 스틸을 기록하여 자신의 2번째 경력 올스타 경기 MVP 상을 수상하였다. 시즌의 코스에 브라이언트는 다수의 온코트 사고들에 연루되기 시작하였다. 1월 28일 가능한 경기를 우승하는 점프슛에 접촉을 다가가는 시도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팔을 휘둘러 자신의 팔꿈치와 함께 스퍼스의 가드 마누 지노빌리의 얼굴을 쳤다. 리그의 재조사에 이어 브라이언트는 뉴욕 닉스를 상대로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다음의 경기를 위하여 출전 정지를 당하였다. 후에 3월 6일 그는 동작을 되풀하는 것으로 보여 이번에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의 가드 마르코 야리치를 쳤다. 다음날 NBA는 브라이언트에게 그의 2번째 하나의 경기 출전 정지를 넘겼다. 3월 9일 그의 처음으로 돌아온 경기에서 그는 팔꿈치로 카일 코버의 얼굴을 쳤다.

3월 16일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의 7개의 경기 패배 경향을 끝내는 도움을 준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홈 경기에서 시즌 최고의 65 포인트를 득점하였다. 이 일은 그의 11년 경력의 2번째로 최고 득점 상연이었다. 이어진 경기에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멤피스 그리즐리스를 상대로 우승에서 자신이 60 포인트를 득점한 후, 팀버울브스를 상대로 50 포인트를 기록하여 1987년 조던이 마지막으로 한 이래 보이지 않은 3개의 연속적 50 플러스 포인트 경기들을 득점하는 데 2번째 레이커스 선수가 되었다. 이렇게 하는 데 또 하나 만의 레이커스 선수는 1962년 12월 3개의 연속적 경연들에서 50 플러스를 득점한 베일러였다. 이어진 날 뉴올리언스 호니츠를 상대로 브라이언트는 50 포인트를 득점하여 체임벌린의 뒤로 4개의 연속적 50 포인트 경기를 가니는 데 NBA 역사상 2번째 선수로 자신을 만들었다. 브라이언트는 그해를 10개의 50 플러스 포인트 경기 들와 함께 끝냈다. 그는 또한 그 시즌에 자신의 2번째 연속 득점 타이틀을 우승하기도 하였다. 2006년 ~ 07년 시즌을 통하여 그의 셔츠는 미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최고로 팔리는 NBA 셔츠가 되었다. 다수의 저널리스트들은 코트에서 그의 지속적인 올스타 상연은 물론 브라이언트의 새 등번호로 향상된 세일에 귀착시켰다. 2007년 플레이오프들에서 레이커스는 다시 한번 피닉스 선스에 의하여 4 대 1로 첫 라운드에서 탈락되었다.

2007년 5월 27일 ESPN은 만약 제리 웨스트가 완전한 권위와 함께 팀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브라이언트가 자신이 이적되는 데 원해졌다는 주장을 하였다고 보고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웨스트의 프랜차이즈로 복귀를 위한 자신의 욕망을 확실히 하였으나 만약 그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자신이 이적되기를 원한 것을 주장하는 데 부인하였다. 주장을 만든지 3시간 후에 브라이언트는 잭슨 감독과 대화를 가진 후 또 다른 인터뷰에서 자신이 자신의 결정을 재숙 고하고 자신의 이적 요구를 후원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브라이언트는 후에 센터 앤드루 바이넘이 올스타 제이슨 키드를 위하여 이적되었다는 것을 말한 아마추어 비디오에 보였다.

12월 23일 브라이언트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닉스를 상대로 경기에서 20,000 포인트를 도달하는 데 29세 122일의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이 기록은 르브론 제임스에 의하여 깨진 이래였다. 자신의 슈팅 손의 작은 손가락 부상에 불구하고 브라이언트는 수술을 받는 대신 정규 시즌의 모든 82개의 경기들에 뛰었다. 2008년 9월 초순에 그는 수술을 받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스페인 출신의 올스타 파우 가솔의 계약에 의한 원조된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팀을 57 승 25 패의 서부 최고 기록으로 이끌었다. 레이커스는 5월 8일 첫 라운드에서 덴버 너기츠를 휩쓸고 브라이언트는 공식적으로 리그의 MVP로 선언되었다. 자신의 MVP 상의 수상에 추가로 브라이언트는 5월 8일 자신 경력에서 3개의 연속적 시즌과 6번째로 올NBA 팀으로 단 만장일치 만의 선발 선수였다. 그는 그러고 나서 케빈 가넷과 NBA 올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표제를 달아 24개의 1위 승인들을 포함하여 총 52 포인트를 받아 자신의 8번째 선발을 얻었다.

레이커스는 57 승 25 패의 기록과 함께 2007년 ~ 08년 정규 시즌을 끝내며 서부 컨퍼런스에서 1위를 하고 너기츠를 상대로 첫 라운드 경기를 위하여 자신들을 세웠다. 1번째 경기에서 경기의 대부분을 통하여 자신을 유인 선수로 만들었다고 말한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가 안전하게 앞서도록 지키는 데 마지막 8분에 자신의 23 포인트 중 18을 득점하였다. 그 일은 2004년 그리즐리스가 스퍼스에게 4개의 경기들에서 떨어진 이래 플레이오프의 첫 라운드에서 휩쓸어지는 데 너기츠를 첫 50개의 우승 팀으로 만들었다. 재즈를 상대로 다음 라운드의 첫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1번째 경기에서 레이커스가 재즈를 꺾으면서 38 포인트를 득점하였다. 레이커스는 다음 경기에도 우승하였으나 브라이언트가 한 경기에 33.5 포인트로 올렸어도 3번째와 4번째 경기들을 떨어뜨렸다. 레이커스는 그러고 나서 6번째 경기에서 준결승전을 우승하는 데 다음 2개의 경기들을 우승하였다. 이 일은 팀이 서부 콘퍼런스 결승전에서 스퍼스를 상대로 경기를 세웠다. 레이커스는 스퍼스를 5개의 경기들에서 꺾어 자신들을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NBA 결승전으로 보냈다. 이 일은 브라이언트 경력에서 5번째와 오닐 없이 결승전으로 가는 데 처음으로 특정을 지었다. 그러고 나서 레이커스는 6개의 경기들에서 셀틱스에게 패하였다.


레이커스의 2009년 챔피언십에 명예를 주는 백악관 방문 동안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한 데릭 피셔와 브라이언트
2008년 ~ 09년 시즌에 레이커스는 자신들의 첫 7개의 경기들을 우승하며 캠페인을 열었다. 브라이언트는 17 승 2 패로 간 시즌을 시작하는 데 가장 많은 우승들을 위한 프랜차이즈 기록을 동일시 하는 데 팀을 이끌었고, 12월의 중순에 그들은 21 승 3 패의 기록을 수집하였다. 그는 출발 선수로서 자신의 11번째 연속적 올스타 경기로 선발되었고, 3번이나 "이번 주의 서부 콘퍼런스 선수"로 임명되는 데 추가로 12월과 1월 "이번 달의 서부 콘퍼런스 선수"로 임명되었다. 2009년 2월 2일 닉스를 상대로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61 포인트를 득점하여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매겨진 가장 많은 포인트를 위한 기록을 세웠다. 2009년 NBA 올스타 경기가 열리는 동안 브라이언트는 27 포인트, 4 어시스트, 4 리바운드와 4 스틸을 평균하여 전 동료 선수 오닐과 공동으로 올스타 MVP 상을 수상하였다. 브라이언트는 르브론 제임스에 밀려 MVP 투표에서 2위를 하고, 자신 경력에서 7번째로 올 NBA 퍼스트 팀과 올 디펜시브 퍼스트 팀으로 선발되었다.

플레이오프들에서 레이커스는 5개의 경기에서 유타 재즈를 꺾고, 2개의 오프닝 라운드에서 휴스턴 로키츠를 7개의 경기에서 꺾었다. 6개의 경기들에서 덴버 너기츠를 꺾은 후, 레이커스는 자신들의 5개의 경기들에서 올랜도 매직을 꺾은 NBA 결승전에서 자신들의 2연속 진출을 얻었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4번째 챔피언십에 자신의 첫 NBA 결승전 MVP 상을 수상하여 32.4 포인트, 7.4 어시스트, 5.6 리바운드, 1.4 스틸과 1.4 블로킹의 시리즈 평균을 얻었다. 그는 1969년 웨스트가 결승 시리즈를 위하여 최소한 32.4 포인트와 7.4 어시스트를 평균한 이래 첫 선수이며, 결승전에서 조던이 타이틀을 우승한 팀을 위하여 30 포인트, 5 리바운드와 5 어시스트를 평균한 이래 첫 선수이다.

2010년 1월 18일 브라이언트가 훗날의 동료 선수이자 올랜도 매직의 드와이트 하워드에 왼손의 슛을 뜨는 모습 2009년 ~ 10년 시즌 동안 브라이언트는 2009년 12월 4일 마이애미 히트를 상대로 기적의 타격과 외다리의 3 포인트를 포함한 6개의 경기를 우승하는 슛을 이루었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만든 가장 행운적인 하나의 슛을 숙고하였다. 1주 후, 브라이언트는 미네소타 팀버울브스를 상대로 자신의 오른쪽 손가락에 골절을 입었다. 부상에 불구하고 수술을 받는 데 시간을 빼먹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활약하는 데 선출되었다. 자신의 손가락 부상이 일어난 지 5주 후, 그는 이번에 연장전 경기에서 밀워키 벅스를 상대로 정식 경기에서 기회를 놓친 후, 또 다른 경기를 우승하는 슛을 이루었다. 브라이언트는 시즌 동안 25,000 포인트를 도달하는 데 31세 151일의 최연소 선수가 되어 체임벌린을 앞섰다. 그는 지속적으로 킹스를 상대로 또 다른 경기를 우승하는 3점 슛을 이루는 자신의 지배적인 움켜쥐은 활약들을 하였다. 이어진 잘에 그는 레이커스 프랜차이즈 역사상 사상의 지도력 득점자가 되는 데 웨스트를 앞섰다. 발목 부상으로부터 5번이나 출장하지 못한 후, 브라이언트는 복귀하여 그리즐리스를 상대로 4초가 남으면서 레이커스에게 1 포인트 선두를 주는 데 또 다른 움켜쥐은 3점 슛을 이루었다. 2주 후, 그는 토론토 랩터스를 상대로 자신의 시즌의 6번째 경기를 우승하는 슛을 이루었다.

2010년 4월 2일 브라이언트는 8천 7백만 달러의 가치의 3년 확장 계약을 맺었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무릎과 손가락에 부상의 이유로 마지막 5개의 경기들의 4개를 놓치며 정규 시즌을 끝냈다. 브라이언트는 시즌을 통하여 다수의 부상을 겪고 결과로써 9개의 경기들을 놓쳤다. 레이커스는 오클라호마시티 선더를 상대로 서부 콘퍼런스에서 6개의 경기들에서 꺾었다. 레이커스는 2번째 라운드에서 재즈를 휩쓸고, 서부 콘퍼런스 결승전으로 진출하여 피닉스 선스를 향하였다. 2번째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13 어시스트와 함께 경기를 끝내 플레이오프 경력 최고의 신기록을 세웠으며, 1996년 매직 존슨이 13 어시스트를 가진 이래 플레이오프들에서 레이커스 선수에 의한 가장 많은 어시스트였다. 2008년 챔피언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리매치에서 필드로부터 24점을 위하여 6점을 슛을 쏘는 데 불구하고 브라이언트는 챔피언십을 우승하는 데 7번째 경기에서 레이커스를 13 포인트 3번째 쿼터의 부족으로부터 원래로 이끌었으며, 4번째 쿼터에서 자신의 경기 최고 23 포인트의 10을 득점하여 15 리바운드와 함께 경기를 끝냈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5번째 챔피언십을 우승하고 자신의 2 연속 NBA 결승전 MVP 상을 수상하였다. 이 일은 NBA 결승전에서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레이커스가 7번째 경기를 우승한 처음으로 특징을 지었다. 브라이언트는 이 일이 자신의 5개의 챔피언십의 전부의 가장 만족이라고 말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조던의 총수와 조화하는데 6번째의 챔피언십을 원하였다. 레이커스는 자신들의 첫 8개의 경기들을 우승하면서 2010년 ~ 11년 시즌을 시작하였다. 너기츠를 상대로 시즌의 자신의 9번째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26,000의 경력 포인트를 도달하는 데 NBA 역사상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브라이언트는 2009년 1월 1일 이래 자신의 첫 트리플-더블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1월 30일 셀틱스를 상대로 그는 27,000 포인트를 득점하는 데 최연소 선수가 되었다. 2011년 2월 1일 브라이언트는 최소한 25,000 포인트, 5,000 리바운드와 5,000 어시스트와 함께 7명의 선수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2월 10일 보스턴에서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가 셀틱스에 92 대 86의 우승을 위한 초반의 15 포인트 부족으로부터 회복하면서 후반전에서 자신의 23 포인트 중 20을 득점하였다. 그 일은 리그의 최고 4개의 팀들 중 하나를 상대로 레이커스의 시즌의 첫 승리였다. 지도적인 투표를 받은 후,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13번째 연속적 올스타 경기로 선발되어 2011년 올스타 경기에서 37 포인트, 14 리바운드와 3 스틸을 가지고 자신의 4번째 올스타 MVP 상을 수상하여 가장 많은 올스타 MVP 상을 위하여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밥 페티트와 동점을 매겼다. 시즌 동안 브라이언트는 NBA 사상 경력 득점에 12위에서 6위로 올라가 존 하블리첵, 도미니크 윌킨스, 오스카 로버트슨, 하킴 올라주원, 엘빈 헤이스와 모지스 멀론을 통과하였다. 브라이언트는 한 경기에 29 슛보다 적게 평균하여 시즌을 끝냈다.

4월 13일 NBA는 이전 날의 경기에서 브라이언트가 좌절에 심판 베니 애덤스를 게이 치욕을 돌린 이유로 그에게 10만 달러의 벌금을 물게 하였다. 그는 후에 사죄하였고, 브라이언트와 다른 레이커스 선수들은 그의 행동을 비난한 레이커스 공동 서비스 발표에 나왔다. 또다른 3연승을 위한 팀의 탐색은 그들이 플레이오프들의 2번째 라운드에서 댈러스 매버릭스에 의하여 휩쓸어진 후 끝났다. 매버릭스는 그해의 NBA 결승전을 우승하러 갔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왼쪽 무릎과 발목에 아픔을 치료하는 데 독일에서 오르토키네라 불리는 혈장 수술을 받았고, 마이크 브라운은 오프 시즌에 은퇴한 잭슨을 감독으로서 대체하였다. 브라이언트는 부상당한 손목과 함께 시즌 활약을 시작하였다. 2012년 1월 10일 브라이언트는 선스를 상대로 48 포인트를 득점하여 자신의 16번째 시즌에서 선수에 의하여 여태까지 가장 많은 포인트였다. 그는 다음 3개의 경기들에 40, 42와 42를 득점하러 갔다. 그 일은 4개의 연속적 경기들에서 그가 40 혹은 그 이상의 포인트를 득점한 6번째이다. 2012년 NBA 올스타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올스타 경기에서 경력 득점 선두자로서 조던을 통과하는 데 27 포인트를 득점하였다. 그는 또한 드웨인 웨이드로부터 강한 파울에 의하여 올스타 경기의 3번째 쿼터에서 코가 부러지고 진탕을 겪었다. 4월 브라이언트는 멍이 든 왼쪽 정강이와 함께 7개의 경기들을 놓쳤다. 그는 정규 시즌의 말기 전에 3개의 경기들에 돌아왔다. 킹스를 사앧로 정규 시즌의 마지막 경기에서 그는 가능한 자신의 3번째 NBA 득점 타이틀을 위하여 가지 않고, 케빈 듀랜트를 앞서는 데 38 포인트가 필요하였다.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들의 2번째 라운드에서 듀란트의 오클라호마시티 선더에 의하여 녹아웃되어 5개의 경기들을 패하였다.

2012년 ~ 13년 시즌에 레이커스는 센터 드와이트 하워드와 포인트 가드 스티브 내시를 얻었다. 11월 2일 브라이언트는 2 스틸과 함께 40 포인트를 득점하여 스틸에서 레이커스의 경력 선두자로서 매직 존슨을 통과하였다. 하지만 레이커스는 클리퍼스에게 경기를 패하고, 34년만에 처음으로 0 승 3 패와 시즌을 시작하여 프랜차이즈 역사상 4번째였다. 시즌을 1 승 4 패로 시작한 후, 브라운 감독은 해고되었다. 그는 마이크 디앤토니에 의하여 대체되었으며, 브라이언트가 어린 시절에 자신의 부친이 이탈리아에서 활약하고 디앤토니가 거기에서 스타 선수였던 것을 알았다고 한다. 팀 USA와 함께 자신들의 시간 동안 브라이언트는 디앤토니와 가까웠다. 12월 5일 뉴올리언스 호니츠를 상대로 브라이언트는 30,000 포인트를 득점하는 데 리그 역사상 34세 104일의 최연소 선수가 되어 그 이정표를 도달하는 데 5명의 선수들 중의 하나로서 명예의 전당 헌액자 체임벌린, 조던, 카림 압둘 자바와 칼 멀론에 가입하였다. 12월 18일 샬럿 밥캐츠를 상대로 101 대 100의 우승에서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7번째 연속적 경기에서 30 이상의 포인트를 득점하여 34세가 된 후 NBA 선수에 의한 장기적 경향이며, 자신 경력에서 4번째로 장기적인 경향이었다. 그의 경향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상대로 자신이 27 포인트를 득점하고 4번째 쿼터 전체에 벤치에 앉았던 104 대 87의 우승에서 12월 28일 10에서 그의 경향이 재빨리 쏘아졌다. 팀의 방어를 향상하는 운동에서 디앤토니는 브라이언트를 상대 팀의 최고 주변 선수를 가드 하는 데 가졌고, 브라이언트는 15 포인트로 보유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카이리 어빙에 주요 디펜더였다. 브라이언트는 더 약한 선수들을 상대로 활약할 때를 반대하면서 자신이 도전 방어 양도를 가질 때 더욱 전념된 디펜더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방어는 상대들을 분열시키고, 불운한 매치업으로부터 내시를 구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첫 42개의 경기들의 거의를 통하여 득점에서 리그를 이끌고 있었다. 시즌으로 실망적인 17 승 25 패의 시작과 함께 디앤토니는 브라이언트가 공격에 주요 용이한 선수가 되는 데 간직하였다. 다음 3개의 경기들에서 브라이언트는 자신 경력에서 3 경기의 가장 많은 총 39의 어시스트와 함께 3개의 우승에서 최소한 10 어시스트를 가졌다. 그는 2회의 9 리바운드와 함께 각각의 경기에서 트리플-더블을 놓쳤다. 3월 2개의 중대한 우승에서 그는 최소한 40 포인트를 득점하여 연속적인 경기들에서 최소한 10 어시스트를 가져 1970년 웨스트 이래 업적의 성취를 이루는 데 첫 레이커스 선수가 되었다.

레이커스가 8번째이자 마지막 플레이오프를 확보하는 데 서부 컨퍼런스에서 싸우면서 팀에 몇몇의 선수들이 부상을 당하여 브라이언트는 각각의 경기에 전체의 48분을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2013년 4월 10일 브라이언트는 NBA 경기에서 47 포인트, 8 리바운드, 5 어시스트, 4 블록과 3 스틸을 얻는 데 NBA 역사상 첫 선수가 되었다. 4월 12일 브라이언트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상대로 아킬레스건이 찢어지면서 자신의 시즌을 끝냈다. 그의 부상은 자신이 7개의 연속적 쿼터를 활약하면서 7개의 연속적 경기를 위하여 최소한 40분을 활약하는 동안 왔다. 레이커스의 총장 미치 쿠프책은 10일 일찍이 브라이언트에게 그의 광범한 활약 시간에 관하여 말하였으나 브라이언트는 레이커스의 플레이오프 추진을 준 분들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브라이언트는 4월 13일 수술을 받고, 트레일블레이저스의 신인 선수 데이미언 릴러드 만이 더욱 많은 분들을 평균하고 있었다. 그는 27.3 포인트, 46.3% 슛, 5.6 리바운드와 6 어시스트의 평균을 득점한 자신의 습관적인 수와 함께 시즌을 끝냈다. 시즌 동안 그는 8번이나 40 포인트에 도달하고, 11번이나 10 혹은 그 이상의 어시스트를 가졌다. 브라이언트의 어시스트는 그의 경력의 2번째로 치고였고 그의 필드골 퍼센티지는 2008년 ~ 09년 시즌 이래 최고였다. 레이커스는 45 승 37 패에 시즌을 끝내 서부에서 7번째로 좋았다. 브라이언트 없이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들의 첫 라운드에서 스퍼스에 의하여 4개의 경기에서 휩쓸어졌다.

2013년 ~ 14년 시즌이 이미 시작된 후, 2013년 11월 브라이언트는 연습을 다시 시작하였다. 11월 25일 그는 측량된 48.5백만 달러의 가치에 레이커스와 2년의 확장 계약을 맺었다. 그는 리그에서 가장 높은 봉급을 받는 선수로 남아있었으며, 한해에 3천2백만 달러에서 시작된 확장을 받는 데 자격이 있어왔다. 브라이언트의 계약은 후원자들이 NBA의 대명 성들은 자신들의 진실적인 가치보다 적은 돈을 벌었다고 대항한 동안 험담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스타 선수들이 자신들의 팀을 더욱 재정적 자유로 허용하는 데 적은 돈을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분 극화된 주제가 되었다. 브라이언트는 시즌의 첫 19개의 경기들을 놓친 후, 12월 8일 활약으로 돌아왔다. 12월 17일 그는 그리즐리스에 96 대 92의 우승에서 21 포인트의 자신의 시즌 최고를 맞추었으나 6주 동안 그를 출장하지 못하게 하는 데 기대된 자신의 왼쪽 무릎에 측면 경골 상승 좌상을 겪었다. 그는 내시, 스티브 블레이크와 조던 파마에게 부상이 생긴 후, 자신의 아킬레스 부상으로부터 복귀한 이래 6개의 경기들을 활약하였다. 브라이언트는 13.8 포인트, 6.3 어시스트와 4.3 리바운드를 평균하고 있었다. 출전 금지를 당함에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16번째 올스타 경기에서 시작하는 데 팬들에 의하여 투표되었다.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선발될 만한 느낌이 들지 않고 어떤 이들은 그것을 그의 지나간 상연을 위하여 경력 성취의 상으로 비교하였다. 하지만 경기에서 활약을 놓치고 아직도 자신의 무릎 부상에 의하여 방해되었다. 2014년 3월 12일 레이커스는 시즌의 나머지를 위하야 브라이언트를 배제하고, 더 많은 갱생을 위한 그의 필요함을 인용하여 시즌에서 남은 시간을 제한시켰다. 동시에 팀은 22 승 42 파였으며, 서부 콘퍼런스에서 최약의 기록을 위하여 동점 매겼다. 레이커스는 27 승 55 패로 끝내고 2005년 이래 처음으로 플레이오프들을 놓쳤다.

브라이언트는 2014년 ~ 15년 시즌을 위하여 디앤토니를 브라이언트의 전 동료 선수 바이런 스캇과 대체한 레이커스와 함께 자신의 19번째 시즌에 돌아왔다. 11월 30일 토론토 랩터스에 129 대 122의 연장전 승리에서 브라이언트는 31 포인트, 12 어시스트와 11 리바운드와 함께 자신의 20번째 경력 트리플-더블을 기록하였다. 36세의 나이로 그는 경기에서 30 포인트, 10 리바운드와 10 어시스트를 이루는 데 최연장 NBA 선수가 되었다. 12월 14일 브라이언트는 팀버울브스에 100 대 94의 우승에서 NBA의 3번째 사상 최고 득점자가 되어 조던을 통과하였다. 그는 시즌의 첫 27개의 경기들에서 활약하여 한 경기에 22.4 슛과 함께 리그를 이끄는 동안 한 경기에 26.4 포인트와 함께 팀 사상 최고의 기록을 평균하였다. 하지만 킹스에게 108 대 101의 패배에서 8 대 30의 슈팅에 25 포인트를 득점할 때 스캇 감독은 그의 시즌의 최악의 상연들 중의 하나 후 휴식을 가지는 데 3개의 연속적 경기들 후에 그를 경기 밖으로 몰아냈다. 그는 자신의 무릎, 발, 등과 아킬레스건에 쓰라림을 겪고 스캇은 포워드로 가는 그의 표준 작업량을 줄이는 계획을 세웠다. 3번이나 브라이언트는 경기에서 과도의 40분을 가지고, 감독은 그런 거대한 형태에서 그가 시즌을 시작한 후 그를 과부한 것에 자신을 핑계되었다. 시즌을 위하여 브라이언트는 필드로부터 37% 만을 슛을 쏘고 팀의 기록은 8 승 19 패 만이었다. 휴식 후 자신의 2번째 경기 복귀에서 그는 너기츠에 111 대 103의 우승에 23 포인트, 11 어시스트와 11 리바운드를 가졌으며, 36세 혹은 그 이상의 나이에 시즌에서 다수의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는 데 리그 역사상 3번째 만의 선수가 되었다. 2015년 1월 21일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를 상대로 두 손의 덩크슛을 위하여 기준선을 몰고 있는 동안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 회전근이 부러진 부상을 당하였다. 자신이 오른손잡이여도 그는 경기에서 활약하는 데 돌아와 거의 자신의 왼손과 함께 독점적으로 슈팅, 드리블과 패스를 하는 동안 공격을 움직였다. 부상에 먼저 브라이언트는 16개의 경기들 중 8개에서 휴식을 취해왔다. 그는 부상을 위한 시즌을 끝내는 수술을 받고 시즌을 22.3 포인트를 평균하면서 끝냈으나 시즌을 시작하는 데 자신의 45.5%의 경력 표 아래의 경력 사상 낮은 37.3%를 슈팅하였다. 그는 2015년 ~ 16년 시즌의 시작을 향하여 목표가 된 복귀와 함께 9달간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기대되었다. 레이커스는 21 승 61 패의 기록과 시즌을 끝내 이전의 해에 자신들이 세운 시즌에서 가장 많은 패배들의 프랜차이즈 기록을 앞섰다.

2015년 ~ 16년의 대비 시즌에서 활약하는 데 회복된 후, 브라이언트는 종아리 부상을 당하여 공개 경기의 마지막 2주를 놓쳤다. 하지만 그는 같은 팀과 가장 많은 시즌들을 위한 존 스탁턴의 19개의 리그 기록을 앞선 레이커스와 함께 자신의 20번째 시즌을 시작하는 데 시즌의 개막식에서 활약하였다. 11월 24일 레이커스는 워리어스에게 111 대 77로 패한 후 2 승 12 패로 떨어졌다. 브라이언트는 1 대 14의 슈팅에 25분에서 4 포인트 만을 득점하여 최소한 5개의 슈팅에서 자신이 시도한 자신 경력의 최악의 슈팅 경기를 짝지었다. 12월 1일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고향 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상대로 자신의 마지막 경기를 가졌으며, 레이커스는 103 대 91로 패하였다.

11월 29일 브라이언트는 시즌의 말기에 자신이 은퇴할 것이라고 공고하였다. 자신의 공고 시기에 그는 조던 클락슨의 뒤에 30분 8초에서 팀에 2번째로 있었고, 15.7 만의 포인트와 경력 사상 낮은 31.5%를 슈팅하는 동안 한 경기에 16.7 필드골 시도와 함께 팀을 이끌고 있었다. 그의 프리스로는 그의 경력 평균으로부터 떨어졌고, 그의 경기는 외상 위조들과 장기의 슛에 더욱 의지되어 거의 2배의 그의 경력 평균인 경기에 7을 시도하는 동안 3점 슛 거리로부터 리그 최악의 19.5%를 이루었다. 은퇴 선언 후, 자신의 기자 회견에서 그는 자신의 쇠퇴한 실력들을 인정하였다.

2월 3일 팀버울브스에 119 대 11의 우승을 위하여 마지막 5분 02초에 팀의 18 포인트 중의 14를 포함한 브라이언트는 7개의 3점 슛과 시즌 최고의 38 포인트를 득점하였다. 우승은 경향을 잃은 10 경기를 끝냈고, 레이커스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장기적 패배 경향을 설립하였다. 브라이언트는 경기에서 최소한 35 포인트, 5 리바운드와 5 어시스트에 측정하는 데 37세의 나이에 4번째 만의 NBA 선수가 되었다. 브라이언트는 2016년 올스타 경기를 위하여 종합적인 투표를 얻어 스티븐 커리의 1.6백만 표를 앞섰다. 그 시즌에 스몰 포워드로 옮긴 브라이언트는 처음으로 프런트코트 출발 선수로서 선발되었다. 2013년 이래 자신의 첫 올스타 경기에서 활약한 브라이언트는 10 포인트, 6 리바운드와 7 어시스트를 가졌다. 웨스트의 동료 선수들은 또 다른 올스타 MVP 상을 그에게 제공하였으나 그는 거절하였다.

4월 13일 시즌의 최종 경기에서 브라이언트는 자신의 마지막 NBA 경기에서 재즈를 상대로 NBA 시즌 최고의 60 포인트를 득점하여 4번째 쿼터에서 23 대 21로 재즈를 꺾어 레이커스에게 101 대 96의 승리를 주었다. 그는 37세 234일의 나이에 경기에서 60 혹은 이상의 포인트를 득점하는 데 최연장 선수가 되었다. 레이커스는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약의 기록인 17 승 65 패의 기록과 함께 시즌을 끝냈다.

브라이언트는 오프 시즌에 결혼을 한 이유로 2000년 하계 올림픽 국가대표 차출을 거절했다. 그는 또한 2002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활약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브라이언트는 원래 2003년 FIBA 미주 선수권 대회를 위하여 선발되었으나 어깨와 무릎 수술을 받은 후, 물러났다. 이어진 여름에 그는 자신의 성폭행 혐의 때문에 올림픽 국가대표팀에서 물러나야 했다. 르브론 제임스와 더불어 그는 제리 콜란젤로에 의하여 2006년 미국 예비 로스터(2006년 ~ 08년)에 공동적으로 임명된 2명의 선수들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무릎 수술 후에 경기에 출장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해의 FIBA 세계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브라이언트의 미국 국가대표팀 경력은 2007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2007년 미국 남자 시니어 국가 대표팀과 10 대 0으로 우승한 미국 FIBA 미주 선수권 대회 팀, 그리고 2008년 하계 올림픽을 위한 미국 남자 팀의 일원이었다. 브라이언트는 토너먼트에서 한 경기에 15.3 포인트, 2.9 어시스트, 2.0 리바운드와 1.6 스틸을 평균하였다.

2008년 6월 23일 그는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미국 국가대표팀으로 선발됐다. 이는 그의 첫 올림픽 출전이다. 2008년 8월 24일 농구 결승전에서 미국이 스페인을 118 대 107로 꺾으면서 브라이언트는 6어시스트와 함께 4 쿼터에서 13점을 포함한 20 득점을 올렸다. 8개의 올림픽 경연에서 그는 필드로부터. 462를 슈팅하는 동안 15.0 포인트, 2.8 리바운드와 2.1 어시스트를 평균하였다.

브라이언트는 2012년 하계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그는 2연속 금메달을 획득한 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 캘리포니아주 사우전드 오크스에 자신의 별명을 본뜬 트레이닝 센터인 맘바 스포츠 아카데미를 열었다.

2020년 1월 26일 자신의 전용 헬리콥터인 시코르스키 S-76을 타고 맘바 스포츠 아카데미로 가던 중, 로스앤젤레스 서쪽의 칼라바사스에서 헬리콥터 추락 사고로 차녀와 함께 끝내 숨지고 말았다.

 

기념일

오스트레일리아의 날: 오스트레일리아의 날이 토요일 또는 일요일과 겹치면 다음 월요일을 공휴일로 정한다.

인도의 제헌절 (en:Republic Day)
 
대한민국 대체공휴일 - 203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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