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오늘의 역사 1월 27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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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98년 - 트라야누스가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다.

1945년 -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가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다.

1989년 - 전두환 정부 시절 안기부장이었던 장세동이 비리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장세동(1936년 9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겸 정치가이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16기로 졸업하여 군인이 되었고 196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 당시 중대장과 감찰관으로 다녀왔으며 공수특전여단, 대통령 경호실, 특수전사령부 등에서 근무하였다. 그 뒤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재직 중 12.12 사태 및 5·17 비상계엄에 개입하였다. 이후 3 공수특전 여단장을 거쳐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재직하였다.

5 공청산 때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처하였고 1993년, 1987년의 용팔이 사건이 밝혀지자 스스로 책임을 지고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다. 1995년 풀려났으나, 그 해의 12.12, 5.18 관련 수사로 체포되어 다시 투옥되었고, 1997년 12월 석방되었다. 허삼수, 허문도, 허화평, 박희도, 정호용, 노신영 등과 함께 전두환의 최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장세동도 세월이 가며 전두환의 말을 듣지 않았고 급기야 전두환은 '장세동이도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내 말을 안 듣는다' 고 하였다.

1936년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에서 3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서울로 유학하여 성동공업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60년 2월 23일 육사 졸업 후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으며 북극성회(하나회의 전신)에 참여하였다.

육군대학을 수료하였다. 보병사단 소대장 등을 거쳐 대위 진급 후 제1공수특전단에서 팀장(중대장)으로도 복무하였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 1966년에는 4월 19일과 4월 20일에 퀴논 북쪽 24 km 탄광 지역에서 어깨에 총격을 당하여 부상을 입었지만 견디면서 전투를 계속, 부대원들의 사기를 올려 베트콩 43명을 사살하고 1개 중대를 전멸시키는 성과를 올려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1967년 육군 수도보병사단 30 경비대대 작전장교가 되었다. 그 후 군 감찰관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는데, 이로써 월남 파병을 두 번 가게 된 셈이 되었다. 이때 역시 베트남에 파병 중이던 전두환을 만나서 그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았고 장세동도 전두환의 리더십에 이끌려서 그의 충복이 되었다. 이후 육군 제9보병사단에 있다가 귀국, 육군본부의 여러 보직을 거쳐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박정희 대통령 때의 대통령 경호실 경호관으로 있다가 1977년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 경비단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충성심에서나, 두뇌에서나, 전두환 최고의 충복으로 평가받았으며, 12·12 군사 반란 당시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제30경비단장으로 전두환에게 협력하였다. 이때 그는 장태완 등과의 일전도 불사했다 한다. 훗날 1996년의 재판에서 그는 육군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이 경복궁을 공격하려 했을 때에 나는 탱크 한 대 당 72발 포탄을 적재케 하고, 이미 한 발은 탑재한 상태였다. 일촉즉발의 불바다가 되었을 것'이라 했다. 1980년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특전사령부 작전참모로 부임해서는 그해 5월의 5·17 비상계엄에도 관여하였다. 그 후 육군 준장으로 진급 제3공수특전 여단장 보직 중 1981년 7월 제5대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되었다.

1981년부터 1985년까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재직하며 제5공화국의 실세로 떠올랐고, 노태우-노신영과 함께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1983년 8월 5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사절단 80여명과 함께 대통령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버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대통령 전두환과 함께 뒤늦게 출발하여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에서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귀국 후 그해 10월 15일 아웅산 참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으나 전두환이 반려시켰다.

1984년 12월 7일 육군 소장에서 육군 중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예편하였다. 그는 예비역의 신분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을 계속하다가 1985년 2월 18일 대통령 경호실장직을 사퇴했다. 2월 19일에는 노신영의 뒤를 이어 국가안전기획부장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안기부장으로 재직하면서 금강산 댐과 평화의 댐 공작, 수지 김 간첩 조작 사건, 용팔이 사건 등 각종 국가 안보 문제와 간첩사건을 처리했다.

1986년부터는 전두환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대표최고위원 노태우와 공공연히 신경전을 벌이며 갈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7년 6.10 항쟁 과정에서 박종철이 사망하자 학생들의 데모는 격화되었고, 장세동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안기부장에서 사퇴했다.

1988년의 5공청문회에 참여하였으나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의 추궁에 모른다로 일관하였다. 1988년 11월 4일부터 5차례에 걸쳐 진행된 일해재단 청문회에도 정주영 현대그룹 당시 회장 등과 함께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한편 그는 자신을 처벌하려는 여론이 높아지자 노태우 대통령을 향해 "가만히 있어라. 내가 입을 열면 여러 사람이 다친다"라고 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3년 2월 1987년 4월의 신한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인 용팔이 사건에 안기부 직원들이 개입한 사실이 밝혀지고, 이택돈 등이 검거되자 장세동은 그해 3월 내 선에서 처리된 사건이라고 밝히고 윗선은 없다며 스스로 경찰에 출석,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이후 민주당에서는 그를 경찰에 고소했고, 원심은 1년 6월형이 내려졌으며 거듭된 항소심 재판 끝에 1994년 4월 12일 대법원 형사 2부에서 최종형 확정을 받고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는 운동 전까지 책만 읽었고 교도관들에게 절대 반말을 쓰지 않았다. 그는 거의 흐트러짐 없이 행동하여 화제가 되었다. 다른 고위층들과 달리 사식을 반입하지 않았고 교도관이나 사무원에게 욕설 한마디 하지 않았다.

석방 직후 1995년부터 서석재, 박계동 등의 폭로로 전직 대통령 비자금을 수사하는 가운데 다시 12.12 군사 혁명과 5.18 광주무장소요사태 관련 수사를 받았으며 1996년 12.12 군사 혁명과 5.18 광주 무장소요사태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어 1997년 4월 대법원 재판에서 징역 3년 6월형을 확정 선고받았으나 그 해 12월 정권교체 후 사면, 복권되었다. 사면 직후 전두환의 집을 방문하여 "신고합니다. 각하! 휴가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휴가 잘 다녀왔다고 거수경례하여 화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가자 으뜸의 나라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대선을 하루 앞두고 후보직을 공식 사퇴하였고, 이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서초구 을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그해 4월의 선거에서 3위로 낙선하였다.

1980년대 5공청문회 때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의원의 집요한 질문에 '기억이 안 난다'라고 모르쇠로 일관하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운동권의 비판과 함께 한편으론 신군부 최고의 충신이라는 평도 들었다. 그는 5공 청문회장에서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 "차라리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각하가 구속되는 것은 막겠다"라고 하여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장세동에 대해서는 의리와 충성스런 인물로 평가를 받았었지만 국민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0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한민국 서해 백령도 NLL부근에 해안포를 발사하였다.

2011년 - 이광재 강원도지사가 대법원 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도지사직을 잃게 되었다.

 

 

문화

1988년 - 서울 여의도에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이 완공되었다.

2010년 - 애플이 아이패드를 공개하였다.

9.7" 아이패드 프로 골드

아이패드는 미국의 애플사의 태블릿 컴퓨터 브랜드 및 시리즈이다. 9.7인치 LED 백라이트 IPS 디스플레이를 탑재하였으며, 아이폰과 같은 iOS를 기반으로 하여 아이폰에서 구동되는 거의 모든 응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자책과, 애플에서 개발한 업무용 프로그램인 아이워크 등 보강된 기능들이 탑재된 것이 특징이다.

애플은 2000년 경에 태블릿형 컴퓨터에 대한 특허를 제출한 바가 있어, 이때부터 태블릿을 개발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9년 말 태블릿형 컴퓨터가 애플에서 나올 것이라는 구체적인 소문이 났다. 공식 발표가 나오기 전까지 정식 이름은 공개되지 않았으며, 태블릿은 아이슬레이트, 아이 태블릿, 태블 로이드, 아이패드 등으로 불렸다. 2010년 1월 27일 샌프란시스코의 야르바 부에나 아트 센터에서 정식으로 아이패드가 공개되었다.

아이패드에는 기본적으로 사파리, 메일, 사진, 비디오, 유튜브, 아이튠즈, 앱스토어, 아이북스, 지도, 노트, 달력, 연락처와 같은 응용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아이폰과 유사한 프로그램이나 아이패드의 넓은 스크린과 기능향상에 맞추어 확장된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아이패드는 기존에 개발된 아이폰 기반 응용 프로그램도 추가적인 수정없이 확대 모드(2배 확대)나 기본 모드(아이폰과 동일)를 통해 이용할 수 있다. 이는 iPhone OS 3.2 시스템 개발 도구를 공유하여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인데 향후 같이 발표된 iWork 같은 아이패드 전용의 소프트웨어 개발도 같은 시스템 개발 도구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상당수의 언론들은 애플의 아이패드 발표에 주목했다. 대한민국에서는 IT 신제품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공중파 방송 3사가 모두 아이패드 출시를 단독 보도로 다루었으며 아이패드의 영향력에 대한 해설까지 곁들이며 차후 있을 시장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주로 IT기기와 인프라 개발을 게을리하면 세계 추세에 뒤처질 수 있다는 점과 폐쇄적인 정보유통 환경, 혁신적인 사고방식 부재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아이패드의 액정 화면을 LG가, 메모리는 삼성이, 터치스크린과 배터리도 한국 업체에서 제작하도록 되어 있어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

주로 잡지사들과, 종이신문 시장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언론사들이 아이패드 출시 이후 유료 콘텐츠를 공급하여 새로운 수익 모델이 나올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환영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전자책 시장에도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평가가 엇갈렸다. 이찬진 드림위즈대표는 "디자인, 기능, 콘텐츠 등에서 아이패드와 비교할 수 있는 비슷한 제품은 현재 없다. 그야말로 혁명적인 제품이다"라고 말했으며, 안철수는 "큰 흐름의 모티브를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사건이다."며, "아이패드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IT 산업의 주도권이 하드웨어와 통신에서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로 넘어가는 패러다임 전환을 가속화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애플의 경쟁사인 닌텐도의 이와타 사토루 사장은 "아이패드는 좀 더 커진 아이팟에 불과한 것 아니냐"며 "별로 놀랍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마이크로소프트의 전 회장인 빌 게이츠는 "내가 아이폰을 처음 봤을 때 'MS가 더 높은 목표를 잡았어야 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지만 아이패드는 그렇지 않았다"며 아이패드의 혁신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나타냈다. 또한 수많은 태블릿 컴퓨터의 특성상 키보드가 없다는 점과, 데스크톱 운영 체제가 아니라서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설치할 수 없어 기능이 제한된다는 점 때문에 차후 출시될 태블릿 PC들에 밀리게 될 것이라는 비판적인 분석도 나왔다. 가격대 성능비가 넷북에 비해 떨어지기 때문에 크게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폐쇄적인 인터넷 환경 때문에 아이패드의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을 것이란 분석도 있었다. 실제로 아이패드 출시 초기에 대한민국은 웹 호환성 문제 때문에 사파리가 탑재된 아이폰에서 인터넷 뱅킹, 쇼핑몰 등 상당수의 웹사이트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패드 사용자가 증가하면서 2011년 1월 신한은행의 '아이패드 전용 신한에스뱅크'를 시작으로 하나은행이 아이패드 전용 스마트 뱅킹 앱을 출시했고, 아이폰에서 동작하는 대부분의 앱들이 아이패드에서도 호환 가능하다는 것이 알려진 후 이러한 분석은 정확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이패드의 핵심 기능인 전자책을 보기 위해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아이북스 스토어도 애플코리아 측이 출판업계와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한국어 전자책 콘텐츠가 제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실제로 애플코리아와 음반사들 간의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2013년 7월 29일 현재 아이튠즈 뮤직스토어에는 대한민국의 가요 콘텐츠가 제공되지 않고 있다.

출시 직후 미국의 블로거들과 언론사들은 앞다투어 리뷰를 작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성공 여부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렸지만 IT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아이패드를 분석한 리뷰어들은 편리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휴대성에는 후한 점수를 주었지만, 키보드가 없다는 점,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한 점과, USB 포트를 지원하지 않는 점에서 낮은 점수를 주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리뷰어는 "여러 시간을 사용해본 결과, 애플의 이 아름다운 신형 터치스크린 기기가 '포터블 컴퓨팅' 환경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한편 랩탑의 아성에 도전할 잠재력이 있다고 믿게 됐다"며, "수십 년간 이어져온 마우스를 통한 사용자 환경을 밀어내고 궁극적으로 손가락을 이용하는 '멀티터치' UI를 추동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뉴욕타임스 리뷰어는 "단순히 멀티터치 스크린을 크게 만든 것이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하며, 특히 오전 7시 반부터 오후 7시 53분까지 영화를 연속으로 틀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배터리 기능이 강력했다"며 터치와, 반응속도, 액정, 사용자 인터페이스가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이 외에도 "아이폰보다 구동 속도가 빨라서 더 실감 나게 게임을 할 수 있다", "별도의 외장 키보드를 지원해 메모나 문자 입력의 불편함이 줄었다", "내려놓고 사용하는 노트북과 달리 항상 들고 애플리케이션을 실행하는 아이패드에서 이 무게는 부담스럽다" 등의 평가도 나왔다.

출시 첫날에만 30~60만대가 판매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으며, 연말까지 판매량에 대한 예상 수치는 125만 대부터 아이폰의 판매량에 버금가는 1000만 대까지 다양하게 엇갈렸다.

아이패드가 개인용 컴퓨터(PC)보다 더 큰 범위의 태블릿 컴퓨터 영역에 포함되긴 하지만, 아이패드의 발표로 인해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태블릿 PC 시장에 대한 관심도 또한 급증하였다. 삼성, 마이크로소프트, HP, 아수스, LG전자, 델, 에이서, 소니, 도시바 등의 관련 업체들은 태블릿 PC 출시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이들은 모두 2010년에 태블릿 PC를 출시할 계획을 세웠다. 2011년 3월까지 업체들이 발매할 계획인 태블릿 PC는 102종에 달해 아이패드 열풍으로 인한 영향력은 막강했다.

또한 인터넷 속도가 느려지고, 보안이 취약하다는 이유로 애플이 어도비 시스템즈사의 플래시를 사파리에서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는 가운데 대한민국의 포털 사이트인 네이버는 이를 계기로 '모든 기기들에서 웹 서핑이 가능하도록 플래시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아이패드는 출시되자마자 탈옥이 되었다. 탈옥이란 공식적으로 지원하지 않는 특수한 기능을 사용하거나, 불법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하기 위해 운영 체제(OS)를 조작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정부의 규제를 받는 위법행위는 아니지만, 업체측에서는 이를 불법 개조로 판단하여 A/S를 거부하는 등 불이익을 주고 있다.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 등 iOS가 탑재된 모든 기기들에서 탈옥 행위가 벌어지고 있다.

 

 

탄생

1756년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75년 -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1832년 - 영국의 수학자 루이스 캐럴.

1836년 - 오스트리아의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1859년 -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

1871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이상설.

이상설(1871년 1월 27일(1870년 음력 12월 7일) ~ 1917년 양력 3월 2일)은 조선(대한제국)의 문신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순오, 호는 보재이다. 본관은 경주이다. 1907년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이후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이바지하였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1년 권업회 창설과 1914년 러일전쟁 10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을 주관하여 정통령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870년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생부는 이행우(行雨)였으나, 1876년 이용우(龍雨)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1894년 전시(殿試)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96년 성균관 교수가 되고, 탁지부재무관에 임명되었으며, 이무렵 호머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에 접한다. 1900년 일본에서 인기 있던 우에노 기요시(1854~1924)의 '근세 산술'을 번역·편집하여 산술 신서를 편찬하였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의 개간권을 요구했을 때, 박승봉과 연명으로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이해 8월에 보안회의 후신으로 결성된 대한협동회의 회장에 선임되었다. 다음 해 1905년 법부 협판, 의정부 참찬을 지냈다. 이 무렵부터 그는 외국 서적 등을 참조하며 만국공법 등 법률을 번역하고 연구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당시, 그는 조약 체결 결사반대와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고종에게 5차례 올렸으나, 12월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쳤다. 이후 국권 회복,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1906년, 영의정(내각 영문하 총리대신 직무대행)에 임명되었지만 한 달 동안 있다가 사직하였다.

1907년, 러시아 제국 군주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개최되자, 고종은 그를 정사로 하고,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헤이그 밀사 사건 참조.)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과 함께 참석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했다.

1907년 7월 5일에 이상설이 만국평화 회의장에 나가, 호소하는 글을 막힘이 없는 불어로 발표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삼가 황제의 뜻을 받들고 귀국 총통과 대표에게 눈물로써 고하나니 우리 한국이 1884년에 자주 독립국이 된 것은 공인된 사실이고 이로써 각국과 수교를 계속해 온 것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7일 이후 일본이 무력으로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각국에 대한 국제 교섭의 권리를 강탈하였다.

현재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해 취하는 사례를 두 세 개 열거해보면,

 

  • 모든 정무를 우리 황제의 승인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시행하는 것
  • 일본이 육해군의 세력을 믿고 한국을 압박하는 것
  • 일본이 한국의 모든 법률과 풍속을 파괴하는 것

등이니 총통께서는 정의에 근거하여 처단하라.
한국은 자주국인데 어째서 일본이 한국의 국제 교섭에 간여하여 우리나라 황제의 명을 받든 사절단이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가?
귀국 총통 및 대표는 위기에 빠진 약소국을 돕고 조력을 베풀어 우리 사절단을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시키고 모든 호소를 허용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헤이그 밀사에 실패한 그는 1908년 이후 사실상 대한제국 관직에서 은퇴하여, 미국에서 대한제국의 독립 지원을 계속 호소하는 한편, 각지의 미주 한인교포를 결속시키는 데 힘쓰고, 콜로라도 주에서 개최된 애국동지 대표회에 연해주 한인 대표로 참석했다. 1909년, 국민회 중심의 독립운동 확대를 위해 이위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이에 앞서 1906년 이동녕, 정순만 등과 함께 조국을 떠나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지역인 연추로 가서 이범윤과 국권회복운동에 논의하고, 간도 용정촌으로 갔다. 이곳에서 여준, 왕창동, 박무림 등과 서전서숙을 설립하고,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에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다음 해 서전서숙의 문을 닫아야만 했다.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사이 부근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 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했다. 1910년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하고자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 군을 편성하고, 퇴위된 상태에 있는 고종에게 13도의 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했었다. 이해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를 조직하고, 한일합병의 반대운동을 전개했으며 미국, 러시아 제국, 청나라 등에 일제의 침략 규탄과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이해 일제의 교섭에 의하여 러시아 제국 관헌에 체포되어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으나, 다음 해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이상설은 권업회를 조직하여 '권업신문'을 간행하고 한인학교들을 확장시키는 한편, 한인교포의 경제 향상과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기관으로 발전시키는 데 힘을 썼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 제국령 안에서 규합한 모든 한인들을 모아, 한일합병 후(3.1 운동 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 광복군 정부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대한 광복군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제와 러시아 제국이 연합국으로 동맹하여 한인들의 정치, 사회 활동을 철저히 엄금했기 때문에 대한 광복군 정부는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한 채로 해체되었고, 권업회마저 러시아 관헌에 의해 해산당했다. 1915년 상하이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과 신한 혁명당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이상설은 1917년,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그는 죽기 전에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제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닥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1971년 숭모비(崇慕碑)를 건립하였고, 1975년 숭렬사를 건립했다.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2005년 12월 그를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하였다.


18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김병로.

김병로(1888년 1월 27일(1887년 음력 12월 15일) ~ 1964년 1월 13일)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통일운동가·법조인·정치가이며 시인이다.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출신이며, 본관은 울산, 호는 가인이다.

일제 강점기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고, 각 학교의 법률학 전문 교수와 독립 운동가들을 무료로 변호하는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이인, 허헌과 함께 조선국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서 명망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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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으나, 결국 한국민주당의 정책 관련 노선에 반발하여 1946년 10월에 탈당하고, 이후 좌우합작위원회와 남북 연석회의에 참여하였다. 후에 분단의 현실을 느껴 노선을 선회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과, 초대(初代) 대법원장을 지냈다.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등 이승만 정권의 노선에 반발하여 대립하였고, 대법원장 퇴임 후 이승만, 박정희 정부의 야당 인사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자택에서 간장염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대한민국 서울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삼각산로 5)에 안장되어 있다.

김병로는 1888년 1월 27일(1887년 음력 12월 15일) 전라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에서 조선 말 사간원 정언을 지낸 아버지 김상희(金相熹)와 어머니 장흥 고씨(長興 髙氏) 사이에서 3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河西) 김인후의 15대손으로, 가계상 울산 김씨(蔚山 金氏) 문정공파(文正公派) 자연당공파(自然堂公派)에 속하며 파조는 자연당(自然堂) 김시서(金時瑞)이다.

인촌(仁村)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할아버지 뻘 되는 먼 친척으로 하서(河西) 김인후의 5대손에서 갈라진다.

부모가 서울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유년 시절은 조부모 슬하에서 유교적인 소양을 쌓으며 자랐으나 열 살도 되기 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었다. 13세에 정교원의 딸 연일 정씨(延日 鄭氏)와 혼인하였으며, 17세 때 한말 거유(巨儒)인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2년 간 성리학을 배우면서 백관수 등과 교분을 쌓았다. 1904년 18세 때 김병로는 전우를 떠나 전라남도 담양의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로부터 산술과 서양사 등 신학문을 접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 향리의 용추사(龍湫寺)를 찾아온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에 감화되어 18세 때 5~6명의 포수들과 최익현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가, 의병부대가 해산하자 1906년 20세 때 김동신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으나, 기적적으로 처벌은 모면하였다. 그리고 그 해 고정주(김성수의 장인)가 세운 전라남도 창평군의 창흥학교(昌興學校)에 입학하였으며, 이후 유학을 결심한다.

1910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니혼 대학(日本大学) 전문부 법학과와 메이지 대학(明治大学)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녔으나, 같은 해 8월 한일 병합 조약 소식을 듣고 정신적 충격에 귀국하였다. 폐결핵 진단까지 받아 요양하다가, 1912년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 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이듬해 졸업하고, 1914년 주오 대학(中央大学) 고등연구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일본 유학 중 잡지 《학지광》(學之光)의 편집장을 지내는 한편 금연회(禁煙會)를 조직하여 조선 유학생의 학자금을 보조했다.

교수로부터 일본 변호사 시험 응시 권유는 받았으나 조선인에게는 변호사 시험 응시 자격을 부여하지 않았던 이유로 1915년 7월 귀국한 뒤, 1916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조교수로 출강하였다. 1917년 보성전문학교 강사가 되는 한편 사회적으로도 조선변호사협회 회장과 조선인변호사회장 등에 임명되어 활동을 하였다. 이후 경성전수학교와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사로 형법과 소송법 강의를 맡았으며, 법학자 활동을 인정받아 1919년 4월 16일 판사에 임용되고,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원 판사로 활동하다가 1년 후인 1920년 4월 17일 사임하고,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변호사 개업 후 김병로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 변론하였는데, 105인 사건을 비롯하여 대동단 사건, 단천 농민 조합 사건, 여운형·안창호 등이 연루된 치안유지법 위반사건, 흥사단 사건, 6·10 만세운동, 간도 참변, 정의부 사건, 대한광복단 사건 등 변호한 사건이 1백여 건이 넘는다.

1922년 이상재, 윤치호, 이승훈,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주동하여 발기인 1,170 명을 확보하여 민립대학기성회를 출범하여 모금 활동을 하기도 하였지만, 일제 당국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독립 운동 사건의 변호를 전담하다시피 했던 김병로와 허헌, 김용무, 김태영 등은 1923년 서울 인사동에 형사 변호 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는데, 무료 변론을 하는 한편 일반 형사 사건에서 수임료를 받아 활동자금으로 사용하였다. 형사 변호 공동연구회가 맡은 첫 사건이 김상옥 의사 사건이며, 이어 김시현 등의 제2차 의열단 사건, 박헌영 등의 조선공산당 사건 등을 변호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을 무료 변론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면서 이인, 허헌과 함께, 일제 강점기 유명한 3인의 인권변호사로 활약하였다.

1929년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 겸 회계장에 선임되었으며, 자신의 고향이자 곡창지대인 전북 지방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와 수리조합 분규 등의 사건과 갑산화전민항일운동의 진상조사 등 농민·화전민들과 관련된 사건 변호를 많이 맡았는데, 이는 농민 생활에 이해와 관심을 가졌던 것에 따른 것으로 보이고 광복 후 토지개혁문제와 관련하여서도 무상분배를 주장하였던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1929년 광주에 파견되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조사를 맡았고, 이 과정에서 신간회 간부들이 민중대회를 계획한 것이 일제에 의하여 탐지되면서 검거되자 결국 1931년 신간회는 해체되었다.

이후 김병로는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 전신) 이사에 취임하였는데,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 해체 이후 수많은 변호와 법정투쟁을 하던 중 만주 사변과 중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변호사 정직 처분이 떨어지고, 창씨 개명을 요구 받는 등 사상사건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이 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 생활을 하였다. 따라서 1940년대 일제가 창씨 개명을 요구했을 때도 성을 바꾸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은둔 생활로 어렵게 생활을 하다가 광복이 되면서 건국준비위원회에 가담하고자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안재홍과 중재 협상을 벌였으나,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이 협상결과를 허락하지 않았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 내각)의 사법부장으로 추천, 선임되었다. 이후 1945년 9월 한국민주당(한민당)이 창당 되었을 때 한국민주당에 참여했다. 한국민주당은 ‘조선공산당’등 좌파와 대립했지만 김병로 자신은 한국민주당 내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좌파와의 대화와 타협을 강조했다. 이런 김병로의 태도는 신간회 활동 시절에서 드러나듯 일제 강점기부터 일관된 것이었다. 1945년 9월 21일 당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김병로는 한국민주당이 토지 개혁에 소극적이던 것을 격렬히 비판하면서 대다수 농민들에게 토지를 무상으로 나누어 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공산당 등 좌파에서 요구하던 토지의 무상 분배를 김병로가 주장한 까닭은 사상에 관계없이 일제 강점기 인권 변호사로서 수많은 소작 쟁의와 관련하여 소작인들의 열악한 상황을 목격한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농지 분배를 놓고 다른 한국민주당 의원들과 갈등이 많았으나, 김성수의 권고로 탈당은 하지 않았다.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참여하였고, 1947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 등을 지냈다. 해방 정국에서 그는 한국민주당의 단정노선과 토지개혁에 소극적 태도 나아가는것에 크게 반발하여 1946년 10월 탈당하였다. 이후 우파 김규식과 좌파 여운형 등이 주도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47년 7월 여운형 암살과 10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완전 결렬로 좌우합작위원회가 해체되면서 김병로는 분단에 직면한 사태에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으며,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당시 김병로는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던 중 이미 단정 수립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현실적인 노선으로 바꿔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게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에는 김병로가 김규식 계열이라는 생각에 대법원장 임명에 부정적이었으나, 법무부 장관인 이인의 적극적 요구로 결국 김병로를 초대(初代) 대법원장에 임명하였고, 이어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김병로는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장을 맡아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민족의 과제임을 천명하고, 신속하고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 그러나 친일파 처벌에 미온적인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옹호하고 6.6 반민특위(특경대) 습격사건을 통하여 반민특위를 해산하자, 이에 대해 정면으로 대통령을 비판하고 나섰다.

6.6 사건은 중부경찰서의 단독 결정이 아니라 내무부의 명령에 따라 빚어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경찰의 이 행위는 직무를 초월한 과잉이며 불법이올시다.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중대하기 때문에 국회와 정부 당국은 비상시국에 적정한 정치적 조치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따라서 사법기관에서는 추호도 용서없이 법대로 판단할 것입니다.
대법원장으로 반민특위 해산을 반대했지만 이승만은 반민법에 규정된 죄의 공소시효를 당초의 1950년 6월 20일까지에서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하는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가결하였고, 1951년 2월 14일 반민족행위처벌법등폐지에관한법률을 통하여 공소계속 중의 사건은 법률시행일에 공소취소된 것으로 간주하여 결국 반민족행위처벌법은 폐지되었다.

대법원장 재임 9년 3개월 동안 그는 사법부 밖에서 오는 모든 압력과 간섭을 뿌리치고 사법권 독립의 기초를 다졌다. 사법부에 압력을 가하는 이승만 정권과 심심찮게 대립각을 세웠는데, 대표적인 것이 1950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 판결이다. 법원은 ‘프락치’로 지목된 국회의원 13명에 대해 징역 3~10년의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내렸다. 이 판결과 안호상 전 문교부장관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윤재구 의원의 횡령 사건에 대한 잇따른 무죄 선고는 이승만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 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를 억제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법부의 독립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1956년에는 김종원 치안국장의 손아귀로부터 김선태를 석방시키기도 하였다.

김병로에게 사법권의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은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절대 명제였다. 그의 사법권 독립에 대한 신념이 얼마나 확고했던가는 걸핏하면 사법부에 압력을 행사하던 이승만 대통령과의 마찰로 인하여 마음고생으로 지병이 도져 한국 전쟁 때 다쳤던 한쪽 다리를 절단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대수술을 받고 병석에 누운 그에게 이승만은 사표를 종용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며 의족을 짚고 등원(登院)할 만큼 강직한 성품이었다. 어느 대법관 출신 인사는 의족에 의지한 채 “지팡이를 짚고 한쪽으로 기운 그의 모습은 병들기 시작한 사법부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안타까워했다. 한번은 이승만이 법무부 장관에게 “요즘 헌법 잘 계시는가?”라고 물었는데, 장관이 말을 못 알아듣자 이승만은 재차 “대법원에 헌법 한 분 계시지 않느냐?”고 물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승만이 1956년 국회 연설에서 “우리나라 법관들은 세계의 유례가 없는 권리를 행사한다.”라고 사법부를 비판하자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라.”라며 맞대응한 일화는 유명하다. 또한 김병로는 대법원장 시절 법관들에게 항상 쳥렴을 강조하였다.

현실을 보면 세상의 모든 권력과 금력과 인연 등이 우리들을 둘러싸고 우리들을 유혹하며, 우리들을 바른길에서 벗어나도록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 내 마음이 약하고 내 힘이 모자라서 이와 같은 유혹을 당하게 된다면 인생으로서의 파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법관의 존엄성으로 비추어 보아도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 법관 회동 훈시, 1954년 3월 20일

김병로 자신은 반공주의자였지만서도 “국가보안법을 폐지해도 형법을 통해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특수한 법률로 국가보안법 혹은 비상조치법을 국회에서 임시로 제정하신 줄 안다. 지금 와서는 그러한 것을 다 없애고 이 형법만 가지고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 또는 장래를 전망하면서 능히 우리 형벌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는 고려를 해 보았다. 지금 국가보안법이 제일 중요한 대상인데, 이 형법과 대조해 검토해 볼 때 형벌에 있어서 다소 경중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이 형법만 가지고도 국가보안법에 의해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다고 생각한다.
— 국회연설, 1953년 4월 16일

또한 “국민은 악법의 폐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하면서 경찰관직무집행법과 관련하여서도 이와 같은 법률이 헌법이나 형사소송법 기타 모든 법률에 우월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오인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래도 관사와 좋은 차과 상당한 보수를 받았으나, 법원서기들 봉급은 쌀 1가마니값 정도에, 초임법관들이 2가마 값 정도였고, 10여 년 경력의 중견 법관들도 봉급이라야 쌀 3가마니 값을 넘기지 못했소. 이런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법질서 확립과 인권 옹호를 위해 밤잠을 자지 않고 일하는 법관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안타까운 심정이었소. 그러나 천하가 일자리는커녕 먹을 것, 입을 것이 없고, 발 뻗고 잘 방한 칸 없는 사람들이 많은 현실에서 얼마나 됐든 국록을 받은 사람은 불평하거나 돈을 탐내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소.

1955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6년부터 여성법률상담소, 경기여자고등학교 출신 여성의 해바라기회에 의하여 가족법 개정운동이 추진되었고, 그외 정일형 외 33인의 이름으로 여성 입장을 반영한 가족법 개정안이 1957년 11월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심의 과정에서 심의위원장이던 김병로는 국회의원 유림 등과 함께 순풍 양속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가족법 개정안에 반대하였다. 1957년 12월 대법원장 정년 퇴임 뒤에도 재야 법조인으로서 활약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는데, 1958년 법관회의의 대법원장 제청권을 없애려는 정부를 규탄하였으며, 1959년 민권수호국민연맹 고문과 재일동포송북반대국민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같은 해 정부가 경향신문을 폐간하자 ‘경향신문 폐간은 위헌 불법이다’라는 기고문을 동아일보에 싣기도 하였고, 4·19 혁명 당시 재야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사태 수습을 위한 대 정부 건의안을 발표하였으며, 이승만 하야 뒤에는 비상대책위원회 지도위원 명의로 과도정부의 개편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960년 자유법조단대표를 지냈고, 같은 해 7월 민의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1표를 얻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동아일보를 통하여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글을 기고하였고, 사상계에 ‘군정 연장과 국민투표에 대하여’를 기고한 뒤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군정 종식을 촉구하였다. 1963년 민정당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윤보선, 허정과 함께 야당 통합과 대통령 단일후보 조정 작업 등을 하였다. 1962년 문화훈장,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으며, 1964년 1월 13일 오후 6시 15분 간장염으로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자택에서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사회장으로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선열묘역에 안장되었다.

평생 한복을 입고 지낸 그는 사법의 기초를 다졌고 법전 뿐만 아니라 3심 제도와 법복에 이르기까지 사법 행정의 제반사를 정한 ‘사법부의 수장’이었다.

일제 강점기 김병로와 함께 숱한 항일 변호를 맡았던 이인은 회고록에서 ‘당시 사회운동하는 사람들이 다 넉넉지 못해 신간회 동지들이 가인의 집에서 기식하면서 부근 설렁탕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1년만에 그 밥값을 갚으면서 자신의 서대문집 근 50간을 팔아야했다’고 하면서 김병로의 청빈을 강조했으며, 법조계에서는 김병로를 정부의 압력과 간섭에 맞서 사법부 독립과 권위를 지켜낸 ‘법조인의 모범적인 표상’으로 꼽는 사람이 많다.

전북 출신 법조계 3대 성인동상건립추진위원회는 1999년 12월 3일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공원에서 김병로와 서울고등검찰청장을 지낸 화강 최대교,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낸 김홍섭의 동상 제막식을 가졌다. 2001년 가인 김병로 평전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고,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 가운데 법률·경제 부문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었다. 2010년 전라북도 순창군에 대법원 가인 연수관이 개관되었고, 대법원 주관으로 법학전문대학원 학생들의 변론경진대회인 가인 법정변론 경연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1899년 - 캐나다의 여성 장수자이며 前 트뤼도 행정부 예하 별정행정관 섬잉펑.

1903년 - 대한민국의 개신교 목회자 한경직.

1908년 - 한국의 극작가 이석훈.

1929년 - 이집트의 기업인 모하메드 알파예드.

1943년 - 대한민국의 방송 작가 김수현.

1950년 - 대한민국의 배우이며 前 정치가 최종원.

1956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유지인.

195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장미희.

1962년 -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의 범인 김현희.


1964년 - 미국의 배우 브리짓 폰다.

1965년 - 대한민국의 배우 임대호.

1968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상면.

1969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현 야구 코치 박정태.

1970년 - 대한민국의 배우 임호.

1973년 - 대한민국의 배우 · 방송인 · 전 아나운서 최은경.

1976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박소현. / 대한민국의 축구인 안정환. / 타이완의 배우, 가수 임심여. / 대한민국의 래퍼 조PD.
 
1979년 - 일본의 성우 고야마 기미코. / 영국의 배우 로저먼드 파이크

1984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태완. / 대한민국의 성우 최낙윤.

1987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선신. / 미국의 가수 애슐리 그레이스.

1991년 - 대한민국의 가수 예아라

1993년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야야 사노고.
 
1998년 - 대한민국의 가수 키노 (펜타곤).

 

사망

98년 - 로마 제국의 황제 네르바.

672년 - 76대 교황 교황 비탈리아노.

1142년 - 송나라 남송 초기의 군인 악비

1596년 - 영국의 해적, 군인, 탐험가 프랜시스 드레이크.

1731년 - 이탈리아의 악기제조자이자 피아노의 발명가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

1814년 -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1901년 - 이탈리아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1924년 - 일본의 정치인 하세가와 요시미치.

1951년 - 핀란드의 정치인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1987년 - 대한민국의 목사 김재준.

2008년 - 인도네시아의 전(前) 대통령 수하르토.

2010년 - 미국의 소설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2017년 - 영국의 배우 존 허트.

2017년 - 프랑스의 배우 에마뉘엘 리바.

2018년 - 스웨덴의 기업인 잉바르 캄프라드.

 

기념일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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