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오늘의 역사 1월 28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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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077년 - 카노사의 굴욕(Walk to Canossa):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만나기 위해 카노사 성으로 가다.

1547년 - 에드워드 6세,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하다.

1932년 - 중국과 일본 간의 제1차 상하이 사변 발발.

방어진지에서 전투중인 국민군 19로군

상하이 사변(상해 사변) 또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은 1932년 1월 28일에 상하이 국제 공동 조계 주변에서 일어났던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의 군사적 충돌이다. 1937년에 발발한 중일 전쟁의 전초전 성격을 지닌 충돌이었다. 1월 28일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중국은 '일이팔 사건'이라고도 부르고, 구미에서는 상하이 사변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이라고 한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은 상하이 북동쪽의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서양 열강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조계지를 가지고 있는 상하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그래서 대의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하였다.


1월 18일에 다섯 명의 일본인 승려가 삼우실업사 근처에서 성난 중국 군중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현재는 이 범행은 일본 측에 고용된 중국인에 의한 행위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1월 20일에 상하이 거주 일본인들이 항의 데모를 벌였고, 일부 청년들이 삼우실업사 공장을 불태우고, 한 명을 살해하였다. 진압을 위해 파견된 중국 관원 2명을 일본도로 살해하고, 일본인 1명도 살해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상하이 시민들의 반일 감정을 자극하여, 일본 제품의 보이콧을 외치며 항의 행진을 벌이게 만든다. 사건으로 일본을 포함한 서양 열강은 협의를 통해, 공동 조계 내의 경비를 분담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무라이 구라마쓰 총영사는 오철승 상하이 시장을 면담하고, 손해배상과 더불어 사건에 관한 진상조사와 가해자 처벌 및 항일 단체의 해산 등을 요구했다. 이에 상하이 시장 측은 즉답을 미루었지만, 최종적으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 소식을 들은 일부 학생들이 분개하여 시청을 습격하였다.

1월 26일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계엄령을 포고하고, 중국인 지구 전역에 모래자루와 가시 철망으로 바리케이트를 구축하고, 외국인에게 조계 안으로 피난을 권고한다. 2일 후, 상하이시 의회는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상하이 의용군 부대를 수비에 배치하였다. 공동 조계 방위 위원회는 여전히 사태에 위협을 느끼고, 훙커우 방위를 일본인 의용군 부대에 맡겼다.

1월 27일이 되자 일본군은 30척의 함정과 40기의 전투기를 동원하여 상하이 해안 근처에 7,000 정도의 부대를 집결시켰다.

1월 28일 오후 5시에 조계국은 마침내 계엄령을 선포하고, 서양열강의 군대가 각자의 담당 경비 구역에 도착했다. 당시의 일본의 병력은 1,000명이 넘었고, 9시 30분경 더욱 군함에서, 1,700명을 상륙하게 하여 합계 2,700명이 주둔하였다.

당시 상하이에는 중화민국 정부의 채정해를 사령관으로 하는 약 33,000명의 19로군 병력이 있었다. 사태가 악화되자 19로군은 조계의 요소에 강력한 방어진 지를 구축하고, 황푸 강 유역에 포대를 설치하였다.

1월 28일 자정에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 양군이 북사천로에서 충돌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조계지 개정 방위계획에 따라 일본군이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중화민국 정부에는 통보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중국의 주권지에 속했는데, 중국은 일본에 맞서 자위권을 행사한 것이다. 일본군은 개전 3일 만에 본국 증원군을 요청하여 2월 1일 해군 사령부는 2개의 육군 부대를 증파하고, 제3함대를 편성하여 해군 병력을 지원하였다. 장제스의 중앙 정부에서도 3개 비행대대, 중포, 직속 2사단, 독일식 사단(87, 88사단)으로 구성된 최정예 5군, 헌병 연대, 세무 경찰 연대를 증원하였다. 이들의 중장비는 화력이 빈약한 19로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다시 중국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히자, 일본은 일본 제국 육군 9사단을 주력으로 한 병력을 증파 16척의 수송선에 나누어 15, 16일 상하이 항과 오송부대에 상륙하였다.

9 사단장 우에다와 19로군 군단장 채정해는 영국이 주선한 중일 양국 군 대표 회담을 통해, 입장을 조율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음모에 의한 전쟁이기 때문에 양측의 간극은 좁힐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2월 10일 다시 양군이 충돌하게 된다. 일본은 19로군의 방어를 뚫지 못해서 또 한차례 증원을 본국에 요청하게 되는데, 일본에서는 또다시 2개의 사단이 증파된다.

3월 1일이 되자, 그간 잘 방어를 해 오던 중국군은 갑작스런 철수를 시작하였다. 그 갑작스러운 철수의 배경에는 청나라 숙친왕의 딸인 금벽휘라는 여인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설이 있었다. 금벽휘는 당시 일본군 특무기관의 소좌 다나카에게 포섭되어, 일본군이 또 증파된다는 거짓 정보를 중국군 지휘관들에게 흘려 철수를 유도했다고 한다. (이 여인은 1948년 장제스에 의해 총살된다.)

19로군의 철수로 인해, 상하이는 군대의 무장해제를 당했고, 자국의 군대를 상주시키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패전의 분위기 속에서 1932년 4월 29일 중일 양국이 정전협정을 맺기 전, 일본인 거주민들은 홍커우 공원에서 열병식을 거행하였는데, 이는 일본 천황의 천장절 경축행사와 일본군 승전 파티를 겸한 행사였다. 이때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인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하여 상하이 일본 영사와 해군 중장 등의 여러 군 인사가 죽거나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체포되어 사형되었다.


1969년 - 서울에 적설량 25.6cm의 기록적인 폭설이 내리다.

1986년 -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사고가 일어남.

외부연료탱크의 폭발 직후 보조추진로켓이 분리되어 본체가 압력에 의해 분해되었다

챌린저 우주왕복선 폭발사고는 1986년 1월 28일에 미국의 챌린저 우주왕복선의 발사 73초후 고체 연료 추진기의 이상으로 인한 폭발로 7명의 대원이 희생된 사고이다. 챌린저호는 열 번째 임무인 STS-51-L을 위해 발사된 직후였다. 이 사고로 탑승하고 있던 승무원 7명 전원이 사망하는 인명피해와 4865억 원의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

발사 전

  • 처음 예정은 1월 22일이었으나 다른 발사(STS-61-C)로 인해 23일로, 다시 24일로 연기되었다.
  • 이어서 착륙 예정지의 악천후로 인하여 25일로 연기되었다.
  • 또 발사 기지(케네디 우주센터)의 악천후로 인해 27일 9시 53분으로 다시 정해졌다.
  • 챌린저 호 본체의 추가 정비가 필요해져 결국 발사는 28일로 미뤄지기에 이른다.
  • 그리고 전문가들은 28일도 너무 추워서 안된다고 했으나 NASA는 더 미룰 수 없다면서 발사시킨다.

발사 당일

  • -6.6초 : 챌린저호 본체의 주 엔진 점화.
  • 0초 : 발사.
  • +0.678초 : 오른쪽 보조추진로켓(고체 로켓 부스터(이하, SRB) 아래쪽에서 검은 연기가 나는 것이 확인됨.
  • +2.273초 : 연기가 더 이상 뿜어져 나오지 않게 됨.
  • +3.375초 : 연기가 모두 확산되어 보이지 않게 됨.
  • +28초 : 주 엔진의 출력을 낮춰 궤도 수정.
  • +35.379초 : 주 엔진의 출력을 65%까지 높여, 마하 1 돌파.
  • +51.860초 : Max Q(가장 압력이 높은 지점)에 도달함.
  • +58.788초 : 오른쪽 SRB 아래쪽에 불꽃이 확인됨. 이는 나중에 기록을 판독하여 확인된 결과로, 당시에는 챌린저 호 내에서도, 휴스턴의 관제센터에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 +1분 0.238초 : 불꽃이 SRB와 외부 연료 탱크(이하, ET)의 연결 부위로 옮겨 붙음.
  • +1분 4.660초 : ET의 액체 수소 탱크에서 수소가 새어나옴.
  • +1분 6.764초 : ET 수소 탱크의 압력 저하가 확인됨.
  • +1분 8초 : 관제센터, 챌린저 호에 출력 증가를 지시함.
  • +1분 12.284초 : 오른쪽 SRB가 갑자기 바깥쪽으로 밀리는 현상이 관측됨.
  • +1분 12.525초 : 사후의 분석에 따르면 오른쪽 SRB가 갑자기 가속하였음. 이는 선내의 승무원들도 인지하였을 것으로 추정됨.
  • +1분 13.025초 : 조종실 CCTV에 기록된 마지막 부분으로 스미스 조종사가 계기판을 보며 "Uh oh"라고 반응하고 있다. 주엔진의 작동상태나 ET의 압력저하에 대해 의아해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1분 13.124초 : ET의 수소 탱크 위쪽 돔이 파손되어 산소 탱크쪽으로 밀려들어감. 동시에 오른쪽 SRB가 앞쪽 연결부 방향으로 돌아오면서 ET를 타격함.

사고의 원인은 오른쪽 SRB의 고무 재질로 된 O링(간단히 말해서 고무패킹이다)이 추운 날씨로 인해 얼어 버려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발사 전 NASA와의 회의 때, 우주왕복선 고체 로켓 부스터를 설계하고 제작한 모튼 치오콜사의 경험 많은 고무 O링 기술자는 발사를 취소하거나 일정을 조정해달라고 몇 번이고 요청하였다. 그는 매우 낮은 온도가 O링을 얼게 하여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NASA와 치오콜사의 고위 관리자들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발사를 허가하였다. 결과적으로 챌린저 우주왕복선에 장비된 SRB의 O링은 낮은 온도로 인해 탄력성이 부족해져 발사 후 그 틈으로 새어 나온 고온, 고압의 연료에 불이 붙었다. SRB는 발사 후 2분 뒤에 분리되므로 그대로 2분만 버텨주었으면 무사히 발사될 수도 있었으나, SRB의 불꽃이 외부 연료탱크(ET) 아래쪽에 들어 있는 액체수소 연료로 옮겨 붙으면서 폭발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고온, 고압의 연기 속에서 챌린저호 본체가 압력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공중분해되는, 최악의 결과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 후 설립된 사고 원인 분석 대통령 직속 위원회에서는 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이 원인을 찾아내었다.

  • 우주왕복선의 운용이 전면 중지되었다. 운용이 재개된 것은 약 2년 8개월 뒤인 STS-26(en, 1988년 9월 29일 발사, 디스커버리호)이었다.
  • 희생자들의 이름을 딴 학교, 도로, 건물 등이 생겨났고, 달의 크레이터와 소행성에도 희생자들의 이름이 붙여졌다. 특히 학자 출신인 맥네어와 교사 출신인 매콜리프의 이름을 따 개명된 학교가 많았다.
  • 승무원들의 유족이 중심이 되어 비영리 교육재단인 챌린저 재단이 설립되었다. 동 재단에서는 미국 내외에서 약 60여개소의 우주 과학에 대한 교육센터(en)를 운영하고 있다. 그 중 미국 국외에는 3개소의 교육센터가 운영되고 있으며 대한민국 내에는 양주시에 위치한 송암천문대에서 운영되고 있다
  • 1990년에는 영화화되었다. 해당 영화(en)는 STS-51-L 미션의 발사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 STS-4(en) 이후로 철거되었던 우주왕복선의 승무원 비상탈출기구가 재차 설계, 설치되었다. 이는 승무원들 중 적어도 2명(오니즈카와 레스닉)이 기체의 잔해가 바다에 떨어질 때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 챌린저호와 승무원들을 추모하는 악곡도 다수 만들어졌다.
  • 스웨덴의 그룹 유럽이 1986년 5월에 발표한 3집 앨범The Final Countdown의 타이틀곡 The Final Countdown은 챌린저호와 승무원들을 추모하는 곡으로 알려졌으나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나는데 이 노래는 이미 그 전 해인 1985년에 녹음을 끝낸 노래였다고 한다.
  • 장미셸 자르는 텍사스주와 휴스턴의 1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에서 연주할 곡 중 Randez-vous VI'을, 동 곡을 공동작곡한 로널드 맥네어를 추모하여 Last Randez-vous(Ron's Piece)로 제목을 바꾸어 초연하였다.
  • 존 덴버의 Flying for Me는 크리스타 매콜리프를 추모하는 곡이다. 덴버는 Teacher in space의 우주비행사 선발에 응모하기도 했다.
  • 아울 시티의 Galaxies와 앞 트랙인 January 28, 1986도 날짜와 가사 내용으로 보아 챌린저호 폭발 사고를 추모하는 노래로 보고 있다.

2003년 -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사, 인터넷 마비 등 사태 사과.

2008년 - 삼성 특검:특검 수사팀은 삼성탈레스 박태진 사장과 장병조 삼성전자 부사장 등 계열사 임원 4명을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 조사했다.

2009년 - 스리랑카에서 계속된 내전이 격화되어 최근 수백명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2012년 - 일본 도쿄 인근에서 규모 5.5의 지진이 발생하다.

2014년 - 미국 조지아주 상원에서 한반도 동쪽 바다 동해 표기법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우크라이나의 총리 미콜라 아자로프가 반정부 시위의 여파로 사임하다.

 

 

 

문화

2007년 - 중화인민공화국 장춘에서 2007년 동계 아시안 게임 개막(~ 2월 4일까지).

2010년 -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그룹 소녀시대, 두번째 정규앨범 "Oh!" 발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김운회(루카) 주교를 천주교 춘천교구장에 임명하였다.

2017년 - 201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가 알마티에서 개막하였다.

 

탄생

1312년 - 나바라 왕국의 여왕 호아나 2세

1457년 - 영국의 국왕 헨리 7세.

1600년 - 238대 로마 교황 교황 클레멘스 9세.

1693년 - 로마노프 왕조의 4번째 군주 러시아의 안나.

1887년 - 폴란드 태생 미국의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1898년 - 대한민국 현대 의학의 개척자 백인제.

1905년 - 일본의 연쇄살인자 고다이라 요시오.

1912년 -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

1916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안진생.

안진생(安珍生, 1916년 1월 28일 ~ 1988년 12월 24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며 군인·외교관·정치가이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조카이고 역시 독립운동가인 안정근의 둘째 아들이다.

1916년(호적상으로 1918년) 1월 28일 시베리아에서 안태훈의 아들 안정근과 이정서의 2남 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가족이 중국으로 망명을 하면서 함께 떠났고 중국 광둥 성 광저우를 비롯한 홍콩과 마카오에서 청년기를 보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안정근은 1949년 상하이에서 끝끝내 대한민국을 귀국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한편 그는 1934년 당시 마카오에서 성직을 하던 중국인 신부의 후원으로 인하여 이탈리아에 유학, 이탈리아 중국인 학생회 회장을 지냈고, 1945년 7월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에 대항하는 저항군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 이탈리아 지하조직의 한 사람으로 저항군 비행기에 포탄을 실어 나르는 역할 등을 하였다.

2차 대전 종전 후 제노아 조선소에 입사하여 근무하였고, 1947년부터 1953년까지 미국에서 회사원으로 생활했다. 이때 미국에 체류 중이던 이승만과도 교류를 하였으며 1953년 이승만의 제의를 받고 대한민국에 귀국하여 정착한다. 1954년 박태정과 결혼하였고, 해군에 입대하여 장교로 3년간 복무한 뒤 1958년 해군 대령으로 예편, 1958년에서 이듬해 1959년까지 한국독립당 국방과학행정 특보 위원을 지냈고 한국독립당 탈당 후 1959년 대한조선공사 부사장으로 부임하였다. 1962년 이탈리아 참사관으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하여 프랑스 공사(~1969년), 네덜란드 대리대사(1969년 11월~1971년 2월) 등을 역임하며 주로 대한민국 정부의 차관을 들이는 협상을 주로 전담하였다. 자이레(現 콩고 민주공화국) 대사(1971년 2월), 콜롬비아 대사 등에 임명되었고 1975년 버마(현 미얀마) 대사로 부임하였다.

1980년 외교안보연구원 본부 대사로 재직 중 전두환 정권에 의해 해임되었다. 당시 충격으로 뇌경색이 발병, 투병생활을 하였다. 1988년 12월 24일에 사망하였다.

가족 및 친척 관계
할아버지: 안태훈
할머니: 조마리아
아버지: 안정근, 1949년 사망, 독립운동가
어머니: 이정서
부인: 박태정
딸: 안기수, 1988년 서울 올림픽 국제 레슬링협회장 역임
딸: 안기려
백부: 안중근(安重根,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숙부: 안공근
형: 안 원생(安原生), 미국 USIS, 미 국무성 직원 역임
누나: 안미생, 백범 김구의 큰며느리
자형: 김인
육촌 형: 안춘생(安椿生) - 前 대한민국 독립기념관 관장. 안진생의 할아버지이며 안태훈의 형인 안태진의 손자.


1920년 - 일본제국의 군인 가네코 야스지.
 
1927년 - 대한민국의 민주운동가 이문영.

1938년 - 대한민국의 가수 현미

1955년 - 프랑스의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1963년 - 일본의 성우 이와쓰보 리에.
 
1965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여영국.

1973년 - 대한민국의 야구 해설가, 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이종열.

1975년 - 일본의 성우 카미야 히로시.

1976년 - 대한민국의 MBC 아나운서 차미연.

1978년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잔루이지 부폰.

1979년 - 대한민국의 삼성 라이온즈 야구 선수 박한이.

1980년 - 대한민국의 배우, 탤런트 이유리. / 일본의 축구 선수 엔도 야스히토.

1981년 - 미국의 배우 일라이저 우드.

1983년 - 일본의 삽화가 호리구치 유키코.

1985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차유주. / 일본의 축구 선수 미야마 아야.

1986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장진용.

1990년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칼요한 욘손.

1991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재민.

1993년 - 대한민국 야구 선수 이태양.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강두리.

 

 

 

사망

814년 - 프랑크 왕국의 2대 국왕 카롤루스 대제.

1547년 - 잉글랜드의 국왕 헨리 8세.

1621년 - 233대 로마 교황 교황 바오로 5세.

1754년 - 덴마크, 노르웨이의 작가, 철학자, 소설가, 역사가, 극작가 루드비 홀베르.

1794년 - 방데 반란 지도자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

1939년 -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1951년 - 핀란드의 군인·정치가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1975년 -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인 안토닌 노보트니.

1978년 - 영국의 예술사회학자 아르놀트 하우저.

1996년 - 슈퍼맨의 원작자 제리 시겔

1998년 - 일본의 만화가 이시노모리 쇼타로.

2002년 - 스웨덴의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2002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주일.

2016년 - 미국의 가수 폴 캔트너.

2019년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 김복동.

김복동(金福童, 1926년 4월 24일 (1926년 음력 3월 13일) ~ 2019년 1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인권운동가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세계 여러 곳을 돌며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기 위해 활동하였다. 67주년 세계 인권 선언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2015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받았다. 2019년 1월 28일 지병으로 사망하였고 다음날인 29일 대통령 문재인이 빈소 조문을 했다. 현직 대통령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조문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1993년 유엔인권위원회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처음으로 파견되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유럽 등 여러 곳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2012년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쉼터'에서 함께 기거하는 길원옥과 함께 '나비기금'을 발족시켰다. 나비기금은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일본의 공식 사죄와 함께 이뤄질 법적 배상금 전액을, 전 세계 '전쟁 중 성폭력 피해자' 들을 중심으로 각종 폭력에 고통받는 여성들을 위해 기부하는 기금이다!

암 투병 중이었던 김복동은 2019년 1월 28일 22시 41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경상남도 양산시 출신인 김복동은 14살에 일본군에 끌려가 22살에 돌아왔다. 김복동은 나라 안팎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해온 평화운동가였다. 2015년에는 분쟁 지역 피해아동 지원과 평화활동가 양성에 써달라며 평생 모은 돈 5000만 원을 ‘나비기금’에 기부했다. 나비기금은 이 돈으로 ‘김복동 장학기금’을 만들었다. 김복동은 같은 해 국제 언론단체가 선정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 등과 함께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공익 사단법인 정(이사장 김재홍·김용균)이 제정한 ‘바른의인상’ 첫 수상자로 선정됐다. 당시 공익사단법인 정은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서 아픔을 안고 있으면서도 거의 전 재산을 후진 교육을 위해 기부했으며 평화와 통일의 신념과 한일 과거사에 대한 바른 역사관을 전파시켰다”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김복동은 재일동포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어린 나이에 일본군에 끌려간 학교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일본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이 유독 눈에 밟혔다. 2016년부터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재일조선학교 학생 6명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던 김복동은 지난해 11월 22일 신촌 세브란스 병실에 누운 채로 재일조선학교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라며 3000만 원을 더 내놓았다. 마지막까지 김복동의 소원은 “ 아베한테 진심 어린 사죄를 받는 일”이었다.

 

기념일

데이터 프라이버시 데이(Data Privacy Day)

한국의 설날 - 1998년, 2017년, 2036년, 205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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