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30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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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018년 - 바우첸 조약 - 하인리히 2세의 폴란드 원정이 실패로 끝나고 바우첸에서 폴란드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다.

1607년 - 브리스틀 해협 해안선을 따라 51,800 헥타르가 대규모 홍수로 파괴되고 2,000여 명이 사망하다.

1648년 - 네덜란드 독립 전쟁: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협정인 뮌스터 조약이 조인되다.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공화국간의 80년 전쟁이 끝나다.

1902년 - 영일 동맹, 런던에서 체결.

1933년 - 히틀러, 독일 수상에 취임.

아돌프 히틀러(독일어: Adolf Hitler, 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는 독일의 나치스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총통이다.

뛰어난 웅변술과 감각의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유 체제, 대공황 이후 정권을 잡았다. 이후에 독일 민족 생존권 수립 정책을 주장하며 자를란트의 영유권 회복과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폴란드 침공 등을 일으키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전쟁 중 그의 유대인 말살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같은 나치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 또한 히틀러는 상당수의 폴란드 사람들에게까지도 유대인이라고 모함하여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같이 학살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 가운데에는 집시와 장애인도 있었다.

승승장구하며 전세를 확장하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패배하였고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 소련군에 포위된 베를린에서 에바 브라운과 결혼한 뒤 이튿날 베를린의 총통관저 지하 벙커에서 시안화칼륨 캡슐을 삼키고 권총으로 자신을 쏘아 자살했다. 그러나 독약 캡슐을 쓰지 않고 권총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의 어머니인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이미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에게는 장남 알로이스 2세와 딸 앙겔라를 두고 있었고 결혼 후 아돌프를 갖기 전 낳은 클라라의 아들 두 명과 딸 한 명은 모두 일찍 죽었다. 양봉일에 열중해있던 아버지와 아돌프의 관계는 소원했던 반면 이미 자신의 친자식을 셋이나 잃은 클라라는 아돌프마저 일찍 죽게될까 두려웠고 그를 애지중지하며 키워 아돌프는 클라라의 응석받이가 되었다. 이어 1893년 남동생 에드문트가 태어났고, 1896년 여동생 파울라가 태어났으나 에드문트는 일찍 죽게 되고 결국 아돌프와 파울라만이 클라라의 친자식으로 살아남게 되었다. 또한 아돌프가 7세 되던 해 당시 14세였던 그의 형 알로이스 2세는 아버지 알로이스와의 마찰로 가출하게 된다. 독일 출신이라는 설이 한때 돌기도 했지만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다.


1972년 -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 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났다.

1991년 - 김부남 사건이 발생했다.

김부남 사건은 1991년 1월 30일 김부남(당시 30세, 여성)이 9세 때 자신을 성폭행했던 송백권(당시 55세, 남성)을 살해한 사건이다.

김부남은 자신이 9세 때 이웃집 아저씨인 송백권에게 성폭행을 당하였다. 김부남은 성인이 된 후 결혼을 하였지만 성관계를 거부하는 등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이어가지 못하였다.1991년 1월 30일 김부남은 송백권을 찾아가 식칼로 살해하였으며, 현장에서 검거되었다.

1991년 8월 26일, 1심 재판부는 김부남에게 징역 2년 6월(집행유예 3년), 치료감호를 선고하였으며, 이후 항소와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김부남은 약 1년 7개월간 공주 치료감호소에서 치료감호를 받은 뒤 1993년 5월 1일 석방되었다. 김부남은 1심 3차 공판에서 "나는 짐승을 죽인 것이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하였다.

김부남 사건은 아동 성폭행의 후유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김보은 김진관 사건과 함께 성폭력 특별법 제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2004년 - 부천 초등학생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경찰 수사 결과 2004년 1월 14일 오후 9시 24분에 대한민국의 경기도 부천시에 살던 윤기현 군(당시 11세, 초4)과 임영규 군(당시 10세, 초3)은 원미구 집 앞에서 윤군과 공놀이를 하던 임군이 수신자부담으로 전화를 걸어 여동생(9)한테 '엄마가 집 옆 PC방에 있다' 는 얘기를 듣고 '엄마가 있는 PC방으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둘의 행방이 끊겼다.

윤군이 이날 오후 7시경에 먼저 집을 나간 뒤 집에 있는 임군에게 전화를 걸어 밖 에서 만났다는 것과, 이어서 오후 8시 26분께 임군이 집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D아파트 앞 공중전화로 여 동생에게 집주위에서 놀다가 들어가겠다고 말했고, 오후 9시께는 담배를 피우기위해 집 밖으로 나왔던 윤군의 아버지가 집앞 공터에서 놀고 있는 윤군과 임군을 목격했다.

임군의 부모는 임군 동생의 전화를 받고 PC방에서 1시간 기다렸다가 오후 10시 38분께 PC방을 나왔다.

앞서 오후 9시45분께 임군의 친구가 합기도학원에서 운동을 마치고 귀가하다가 가톨릭대 정문부근 주택가 골목에서 어떤 성인 남자를 뒤쫓아가는 윤군 등 2명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종 16일 만에 경찰은 인근 야산에서 두 명의 초등생의 시체를 발견하였다.

수사 시작 2년 5개월만인 2006년 6월에 범인을 밝혀냈다.

범인은 연쇄살인범 정남규(사건 당시 34세)로 "그냥 죽이고 싶어 죽였다"고 진술하였다.


2008년 - 삼성 특검:특검 수사팀의 윤정석 특검보는 삼성측의 증거 훼손과 소환 불응 등 수사에 지장을 주는 행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증거 인멸에 대한 구속수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특검의 한 관계자는 삼성전자 황창규 사장에 대해 소환을 통보했으나 해외 업체와 계약 관련 미팅을 이유로 불응하였다고 말하였다.

2009년 - 크립톤 퓨처 미디어에서 VOCALOID2를 채용한 메구리네 루카를 발표했다.

2012년 - MBC 노조가 총파업에 들어가다.

 

 

 

문화

1980년 - 부산대교가 완공되었다.

1996년 - 일산선 개통.

1999년 - 강원 동계 아시안 게임 개막. (~ 2월 6일)

2011년 -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 개최.

2012년 - EXO 데뷔 프롤로그 싱글 "What Is Love" 공개.

2013년 - 대한민국의 최초 우주 발사체 나로호가 3차 발사에 성공하였고,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확인하였다.

2016년 - 신분당선 2단계 정자역 ~ 광교역 연장 구간이 개통되었다.

 

탄생

133년 - 로마 제국 19대 황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1736년 - 영국의 발명가 제임스 와트

1841년 - 프랑스 제3공화정 시대의 정치가 펠릭스 포르

1882년 -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1894년 - 불가리아의 국왕 불가리아의 보리스 3세.

1920년 - 일본 최초의 여성 프로 만화가, 사자에상(サザエさん)의 작가. 하세가와 마치코

1925년 - 노르웨이계 미국인 과학자 더글러스 엥겔바트.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C. Engelbart, 1925년 1월 30일 ~ 2013년 7월 2일, 오리건주 출생)는 노르웨이/스웨덴계 미국인 발명가이다. 그는 특히 컴퓨터 마우스의 발명자로 유명하다. 또한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하이퍼텍스트, 네트워크 컴퓨터 등 인간과 컴퓨터 상호 작용 분야의 선구자이다.

1948년 오레건 주립대학교에서 전기공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1953년 UC 버클리에서 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5년에는 동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필리핀의 무선전기 기사로 해군에 복무하던 시절, 버니바 부시(Vannevar Bush)가 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As We May Think)'란 글에서 큰 영감을 받는다. 전쟁이 끝나고, 영감을 실현시키기 위해 UC 버클리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955년 박사학위를 받는다. 여기서 CALDIC을 만드는 데 관여 했으며 이후 1년간 박사 학위 논문에서 만든 기술을 상업화 하려는 저장기기 제조 회사를 설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후 스탠퍼드 연구소에서 휴위 크레인과 함께 자기 논리 장치의 개발에 참여했다.

2013년 신부전으로 인해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41년 - 미국의 정치가 딕 체니.

1951년 -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드러머 필 콜린스.

1954년 -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인 김승환. / 대한민국의 가수 유현상(백두산).

1962년 - 요르단의 현 국왕 압둘라 2세

1968년 - 스페인의 현 국왕 펠리페 6세.

197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서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홍집.

1974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한준호.
 
1981년 - 불가리아의 축구 선수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 영국(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피터 크라우치.

1982년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나드송 호드리게스 지 소자.

1984년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김신영.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우시흥.

1985년 - 대한민국의 미스코리아 박샤론.

1987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최유정.

1989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백성현. / 대한민국의 가수 건우 (마이네임).

1991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변서은.

1997년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선수 심석희.

 

 

 

사망

1649년 - 영국 국왕 찰스 1세.

1840년 -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민극가.

1948년 - 인도의 독립운동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1869년 10월 2일 ~ 1948년 1월 30일)는 인도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인도의 시인인 타고르가 지어준 이름이다. 영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인도의 영국 식민지 기간(1859~1948) 중 대부분을 영국으로부터의 인도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다.

1890년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한 그는 이후 1916년 영국 런던 대학교 법학과에서 명예 학사 학위를 받았다.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반영 인도 독립운동과 무료 변호, 사티아그라하 등 무저항 비폭력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인도의 작은 소공국인 포르밴더의 총리를 지냈던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종교는 부모의 영향으로 힌두교이다. 인도의 화폐인 루피의 초상화에도 그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간디는 인도 서부에서도 사우라슈트라 주의 유명 항구도시인 포르반다르의 명문가에서 출생하였다. 부모에게서 인도의 전통종교중 하나인 자이나교의 교육을 받으며,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수상으로 부임한 라지코트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배움은 없었으나 아들의 말을 믿어주고 배려하는 분이었으며, 어머니는 힌두교의 교리와 전통을 성실하게 지키는 신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간디에게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성격과 성실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1902년의 간디와 그의 아내 카스투르바 간디.
7살 때 이미 그는 약혼을 했었지만 약혼녀들이 모두 차례로 죽어, 세 번째 약혼녀인 상인 집안의 딸인 카스투르바이 마칸지와 13세에 결혼한다. 간디는 아내와 네이버 책 :: 책 읽는 당신이 아름답습니다 그 뒤 방탕한 생활을 버리고 힌두교의 교리를 충실히 지키며 성욕을 자제하기도 했다. 그는 정액은 생명력의 근원이고 정액의 배출은 몸과 머리를 약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뒤로 일생 동안 수많은 여성의 사랑을 받고 그들을 가까이 두었음에도 직접적인 성행위나 사정은 자제하였다 한다. 그는 보어 전쟁과 아프리카 전쟁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고 영국군에 지원했으나 참전하기 며칠 전 결핵에 의한 염증에 걸려서 포기해야만 했다.

1887년 인도 사밀러스 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생 시절 아버지 친구의 권유로 영국 유학을 결심하였는데, 당시 힌두교에서는 그의 유학을 좋아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유학하고 온 청년들이 서방의 자유로운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힌두교 전통을 무시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당시 힌두교 원로지도자들은 간디를 배웅하면 벌금을 물리기로 결의할 정도로 격렬하게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3년간의 영국유학생 시절 간디는 공부에 열중했으며, 개인적인 도덕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인도와는 다른 런던의 도시생활과 음식, 예절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힌두교 전통에 따라 채식을 고집하여, 멀리 떨어진 채식식당까지 가서 밥을 먹을 만큼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채식에 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알려주는 책과 식당을 알게 되었으며, 런던 채식주의협회 집행위원이 되었다.[2] 그는 어린시절 영국처럼 강해지려면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한 친구의 말에 감화되어 고기를 먹은 적도 있었지만, 힌두교 신자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간디는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University College London: UCL) 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여 1891년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그 후 남아프리카를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귀국 전 이미 별세한 뒤였다. 인도 라지코트와 봄베이에서 변호사생활을 시작했지만 법정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물러날 정도로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간디는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의 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하였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생활은 간디가 백인들에게 교통시설 이용, 취업 등에서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보면서 독립운동을 다짐하게 했다.

1893년 남아프리카의 나탈에 부임하여, 변호사를 개업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인도인들이 받고 있는 차별 대우를 깊이 체험하여 인종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만들었다. 또한 톨스토이 주의에 의거한 '비폭력 투쟁'의 단서를 열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인 트란스발 정부가 인도인 이민 제한을 위해 부과한 지문 등록을 거부하는 운동을 일으키다가 여러 번 투옥되었으나, 마침내 철회에 성공하였다.

남아프리카의 프리토리아에서 살던 시절 간디는 동포들이 처한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찾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1894년 6월, 1년 계약이 끝나고 환송잔치 자리에서 우연히 나탈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신문기사를 읽게 됐다.

1894년 7월 정치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나탈 지방의회와 영국 정부에 보낼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았다. 인도인 차별법의 입법은 막는 것에는 실패하였으나 나탈·영국·인도에까지 나탈 인도인의 문제에 대한 관심을 홍보하는 데 성공했다. 1894년 더반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그는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창설하고 인도인의 단결심을 고취시켰다. 또한 인도인에 대한 차별대우의 실상을 국제사회의 여론에 널리 알렸다.

제1차 대전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노동 운동, 민족 해방 독립 운동의 지도에 전념하였다. 1915년 이후 1918년까지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기는 했지만 정치활동에는 잘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시켜주겠다고 했던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19년 반영운동을 하면 체포영장 발부 등의 적법한 절차없이 무조건 잡아갈 수 있는 즉, 반영운동을 이전보다 더욱 가혹하게 탄압할 수 있는 롤래트 법이 제정되자 그는 영국의 지배에 다시 반기를 들고 "빵을 구하는 데 돌을 준다"고 항의하면서 전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의 불매·납세 거부·공직 사퇴 등 영국에 대해 저항할 것을 호소하였다. 1919년 봄 그는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하고 봉기가 발생했지만 400명의 인도인이 영국군의 무자비한 발포로 학살당하면서 운동은 주춤하기도 했다.

1922년 체포되었으나 병으로 출옥하였으며, 1925년 국민 회의파 의장이 되었다. 1942년 영국에 대하여 인도 철퇴의 요구, 불복종 운동을 일으키다 투옥되었다. 석방된 후에도 인도 독립을 위해 활동하였으며, 델리에서 인도와 파키스탄과의 융화에 전력하였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드디어 영국에서 독립을 했으나, 이슬람교도는 파키스탄으로, 힌두교도는 인도로 가는 민족분열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종교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자, 간디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일하였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모습은 극단적 보수파 힌두교 신도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것처럼 보였으며, 결국 1948년 1월 30일에 뉴델리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반이슬람 힌두교 급진주의 무장 단체인 라시트리야 세와크 상가의 나투람 고드세에게 총을 맞아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는 79세였다.

1930년 그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간디는 노벨 평화상 수상 후보자에 4번이나 올랐으나 끝내 수상하지 못하였다.


1948년 - 미국의 비행기 제작가 오빌 라이트.

1951년 - 북한의 정치인 김책.

1970년 - 독일의 군인 프리츠 바예를라인.

1991년 - 미국의 물리학자 존 바딘.

2006년 - 미국의 인권 운동가 코레타 스콧 킹.

2010년 - 대한민국의 만화가 길창덕.

2013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김지원.

2018년 - 미국의 배우 마크 샐링.

2019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이인희.

 

기념일

진한 그리움(향수)의 날: 브라질

한국의 설날 - 20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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