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2월 7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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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457년 - 레오 1세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어 제관을 받았다.

1948년 - 미군정 영역에서 2·7 사건이 발생했다.

1951년 - 한국전쟁 중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산청・함양 양민학살 사건 은 1951년 2월 7일 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 주민에게 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이 학살로 약 700여 명의 민간인이 피살당했다.


1964년 - 비틀즈가 미국을 첫 방문, 2월 9일 에드 설리번 쇼에 첫 출연했다.

1967년 - 전통 야당의 맥을 이은 신민당 창당

1968년 - 경전선 진주~광양 구간 철도가 완전개통했다.

1974년 - 그레나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1992년 - 마스트리히트 조약 체결

마스트리흐트 조약(공식적으로는 유럽 연합에 관한 조약)은 1992년 2월 7일,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유럽 공동체 가입국이 서명하고 1993년 11월 1일부터 발효한 조약으로 유럽 연합의 기초가 되는 조약이다.

이 조약은 유로화의 도입을 이끌었으며, EU의 3가지 중심 구조(경제 및 사회 정책, 공동의 외교 및 안보, 사법과 국내 문제)를 제안했다. 공동의 외교 및 안보에 관한 조항은 유럽 정책 연합(European Political Cooperation, EPC)의 기초 위에 만들어졌으나 이것을 더 확대해 조약으로 만들었다. 사법과 국내 문제에 관한 조항은 사법 집행, 형법 재판, 민사 문제, 임시 피난처(Asylum) 및 이민에 대한 협력에 관한 것을 담고 있다.

원래 유럽 공동체(EC)는 주로 경제와 무역에 관한 것을 담당했다. 유럽 위원회(European Commission)과 유럽 법원(European Court of Justice)은 유럽 공동체와 독립적으로 이 시스템 내에서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 공동체 회원국의 시민에 의해 직접 선출되는 유럽 의회(European Parliament) 또한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각 회원국의 정부는 그 나머지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식은 국제 기구가 각 정부에 대해 직접적인 힘을 갖지 않고, 각 회원국은 다수결에 의해 국제 기구의 결정을 반대할 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방식, 또는 초국가주의라고 불린다.

한편 유럽 공동체에 외교 정책이나, 군사 및 치안 문제에 관한 권한을 주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많은 회원국은 이런 분야들이 유럽 공동체의 방식으로 다뤄지기엔 너무 민감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유럽 공동체 정부의 힘보다 각 나라의 정부의 힘이 더 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즉, 초국가적 방식보다 정부간(intergovernmental)의 시스템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회원국들은 이런 방식이 경제 문제에 대한 독립된 초국가적 기관(유럽 법원과 유럽 위원회, 유럽 법원)의 권한을 위협할 것이라며 경계했다. 이에 따라 세가지 중심 구조가 경제에 대한 전통적인 공동체의 책임을 외교 및 군사 및 형사 문제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1991년 12월에 최종 협상을 한 후 1992년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서명되었다. 이 조약은 1993년 11월 1일부터 효력을 발휘하였으며 이후 조약을 통해 개정되었다.

■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전문과 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 총칙

  • 제1조에는 유럽공동체를 다시 유럽 연합으로 설립하는 것과 유럽 연합이 유럽 연합 조약과 유럽 연합의 기능에 관한 조약의 법적 지위를 정하고 있다.
  • 제2조에는 유럽 연합이 "인간의 존중, 자유, 민주주의, 평등, 법의 지배, 소수자의 인권을 포함한 인권의 존중이라고 하는 가치 위에 성립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가맹국은 "다원주의, 무차별, 관용, 정의, 결속, 양성의 평등을 지원하는 사회"를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도 규정되어 있다.
  • 제3조에는 유럽 연합의 목적을 6개 항에 걸쳐 열거하고 있다.
  • 제1항에는 평화, 연합의 가치, 시민의 행복을 발전시키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 제2항은, 영역 외와의 경계의 관리를 실시하면서 역내에 있어서 이동의 자유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 제3항은 역내 시장을 언급하고 있다.
  • 제4항은 유로의 설치를 말하고 있다.
  • 제5항에는 유럽 연합이 그 가치를 촉진하고, 빈곤의 퇴치에 노력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국제 연합 헌장을 존중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 제6항에는 유럽 연합은 기본조약에서 부여받은 권능에 꼭들어맞는 "적절한 수단"으로 이들 목적을 추구함에 대하여 규정한다.
  • 제4조는 가맹국의 주권과 의무에 대하여 말한다.
  • 제5조에는 유럽 연합의 권능의 한계에 대하여 수권 원리, 보완성 원리, 비례성 원리를 정하고 있다.
  • 제6조는 유럽 연합이 유럽연합 기본권 헌장 및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보호를 위한 조약에 구속됨을 규정하고 있다.
  • 제7조에는 가맹국의 자격정지에 대하여 규정한다.
  • 제8조에는 인접 여러나라와의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규정한다.

2010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인 임수혁이 10년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코스타리카 대통령 선거에서 라우라 친치아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코스타리카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였다.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중화민국 화롄 동남쪽 165km 떨어진 해상에서 진도 6.3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2012년 - 필리핀에서 진도 6.8의 강진이 발생하여 43명이 사망하는 등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다.

미국의 기업 및 단체 75개가 연합하여 SOPA, PIPA에 대한 반대 공개서한을 미국 의회로 발송하다.

2013년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과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 및 문희상 민주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핵문제와 관련하여 긴급회동을 열다.

2014년 - 파키스탄 정부의 친미정책에 반대하여 7년 간 반군활동을 하던 탈레반이 파키스탄 정부와 평화협상을 시작하다.

영국 노퍽주의 해안가에서 80만 년 전 인간의 발자국 50여 개가 발견되다.

2016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오전 9시(한국 시각 오전 9시 30분)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미사일 기지에서 장거리 로켓(미사일)을 발사하였다.

 

문화

2014년 - 러시아 소치에서 2014년 동계 올림픽을 개막.

2018년 -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 진영 분기점 ~ 노포 분기점 구간 개통.

 

탄생

1102년 - 잉글랜드 최초의 여성 통치자 마틸다

1478년 - 영국의 법률가, 작가 토머스 모어.

1812년 -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

1867년 - 미국의 작가, 초원의 집의 원작자 로라 잉걸스 와일더

1873년 - 아일랜드의 선박 디자이너, RMS 타이타닉의 설계자 토마스 앤드류스

1877년 - 영국의 수학자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1885년 - 미국의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1906년 -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1914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호.

1940년 - 대한민국의 대금, 아쟁 명인 서용석.

서용석(1940년 2월 7일 ~ 2013년 3월 17일)은 대한민국의 대금 연주가 겸 아쟁 연주가이며, 국악 작곡가이다.

본관은 이천이고 호는 산남이다. 전라남도 곡성에서 출생하였고 전라북도 군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57년 대금 연주가 첫 데뷔하였고 2년 후 1959년 아쟁 연주가 데뷔하였다.

산조는 우리나라의 민속기악독주곡으로, 진양조에서 시작해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로 이어지는 장단 흐름에 따라 연주한다. 연주 상황이나 연주자에 따라 길게는 한 시간 이상, 짧게는 10분 정도로 자유로운 가락을 연주하는데, 대개 그 가락을 처음 구성한 사람의 이름을 붙여 ‘OOO류 대금산조’ ‘OOO류 가야금산조’라고 구분한다.
서용석 명인은 현재 대금산조의 예능보유자 후보로, 자신의 이름을 딴 대금산조 외에도 서용석류 아쟁산조, 서용석류 해금산조, 서용석류 피리산조 등 다양한 악기의 산조 가락을 후학들에게 전수한 분이기도 하다.
서용석 명인은 어려서부터 이모인 박초월 명창에게서 판소리를 배웠고, 대금을 하는 이모부 김광식에게서 대금 풍류와 산조를 배운 후, 20대에 여성국악단, 국극단 등에서 활동하며 방태진 명인에게서 호적을, 한주환 명인에게서 대금산조를, 서공철 명인에게서 가야금산조를, 정철호 명인에게서 아쟁산조를 공부했다. 모두들 각 분야에 정통한 예인들이었다. 이때 배운 악기와 가락들이 본인의 대금산조 가락은 물론, 다양한 악기들의 산조 가락을 구성한 좋은 재료가 되었다.


여성국극은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모두 여성들로 구성되어, 전통적인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창작된 음악극 형식으로, 광복이후부터 1960년대까지 대중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었다. 이 시기에 새로운 음악들이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신민요로 널리 불리는 것들이 있고, 보다 효과적이고 새로운 음향을 선보이기 위해 산조아쟁이나 철현금 같은 새로운 악기가 선보이기도 했다. 서용석 명인은 이 시기에 국극단과 함께 하면서 신뱃노래, 사철가, 흥겨운 마을, 흥타령 같은 음악들을 작곡하기도 했다.


1990년대 말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은 거의 못하고 있지만, 심상남, 채조병, 이재익, 김광복, 김재영 등이 그의 가락을 이어 받아 중견 음악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세 아들도 국악인으로서 서영호는 아쟁, 서영훈은 피리, 서영민은 해금을 전공해 가업을 잇고 있다.


1947년 - 미국의 성우 웨인 올와인.

웨인 올와인(1947년 2월 7일 ~ 2009년 5월 18일)은 미국의 배우이다. 만화 영화 캐릭터 미키 마우스의 목소리를 맡았으며, 음향을 담당하기도 했다.

1991년 루시 테일러와 하와이에서 결혼했으며, 2008년에는 디즈니 레전드의 명단에 올랐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닌텐도 DS용 게임 킹덤하츠 358/2 Days 였다.

2009년 5월 18일 당뇨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출연작

  • (미키 마우스 전담)
  •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 디즈니 삼총사
  • 미키 마우스 워크
  • 미키의 크리스마스 선물
  • 하우스 오브 마우스
  • 미키의 클럽하우스
  • 킹덤하츠 시리즈

1952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김승연.

1955년 - 미국의 배우 미겔 페러

1959년 - 아일랜드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믹 매카시.

1965년 - 미국의 배우 크리스 록.

1974년 - 캐나다의 농구 선수 스티브 내쉬

1977년 - 일본의 축구 선수 미야모토 쓰네야스.

1978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정형돈.

1979년 - 예멘의 사회운동가 타우왁쿨 카르만.

타우왁쿨 카르만 (1979년 2월 7일 ~ ,타이즈 주 출생)은 예멘의 사회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인이다.

1979년 2월 7일 타이즈 주에서 태어나 그의 부친은 정치인 겸 변호사였던 압델 살람 카르만이었다. 카르만은 예멘 최대의 야당인 알이슬라 소속으로, 2005년에 7명의 공동대표와 같이 세운 '자유로운 여성 언론인'을 결성해 언론의 자유와 민주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을 벌였다. 2011년 예멘 봉기에서 활약한 공로로 2011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모하마드 알 나흐미와 결혼하여 세 명의 자식을 두고 있다.


198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영화 배우 이정현. / 대한민국의 희극 배우 겸 MC 김인석.

1982년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김민정. / 일본 가나가와 현 출신의 배우 무카이 오사무.

1987년 - 일본의 방송인 아키바 리에. / 스웨덴의 축구 선수 구스타브 스벤손.

1988년 - 일본의 가수, 영화 배우 카고 아이. / 대한민국의 배우 이준.

1994년 - 아이콘(iKON) 김진환

 

사망

199년 - 중국 후한 말의 무장 여포

여포( ? ~ 199년 2월 7일)는 중국 후한 말의 장군이다. 자는 봉선이며 병주 오원군 구원현 사람이다. ‘마중적토 인중여포’라는 말로 표상되듯 신기에 가까운 무예로 천하의 명성을 얻었다. 동탁의 양아들이었지만 왕윤과 공모하여 동탁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가 30여 일 만에 이각·곽사·장제·번조에게 패하고 장안에서 달아났다. 이후 각지를 떠돌다 자신을 받아준 유비를 내쫓고 서주를 탈취하였다. 조조에 맞서다가 패망하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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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주에서 무관으로 일했다. 병주자사 정원이 기도위가 되어 하내군에 주둔하면서 여포를 주부로 삼고 가까이 대했다. 189년(중평 6년) 영제가 붕어하고 정원은 수도인 낙양으로 불려가 집금오에 임명되었다. 역시 낙양에 당도한 동탁은 정권을 장악하고자 정원의 군대를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여포는 동탁의 꾐에 넘어가 정원을 죽이고 기도위에 올랐으며 그 양아들까지 될 정도로 깊은 신임을 받았다.

190년(초평 원년) 동탁의 횡포에 반동탁 연합군이 궐기하였다. 서영에게 깨졌던 손견이 다음해인 191년에 흩어진 군을 수습하여 다시 양현의 양인으로 진군해왔다. 호진이 대독을, 여포가 기독을 맡아 5,000명으로 함께 요격에 나섰으나 서로 반목하여 패주했다. 이각을 통한 화평 교섭도 무위로 돌아간 탓에 동탁이 몸소 응전하고 여포는 낙양을 지켰지만 손견을 가로막지 못했다. 동탁은 동월, 단외, 우보 등을 대치시키고 장안으로 들어갔다.

직위는 점차 올라 중랑장에 도정후가 되었으며 늘 동탁을 경호하였다. 동탁은 억세고 편협하며 화가 나면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사소한 마찰로 동탁이 여포를 향해 수극을 던졌다. 민첩하게 피하고 사죄했기에 망정이지 죽을 뻔한 여포는 이 일이 앙금으로 남았다. 거기다 동탁의 집에서 중합을 지킬때 시중드는 계집종과 몰래 정을 통했는데 이것이 동탁에게 발각될까 두려워했다. 어느날 여포는 같은 고향(병주)출신으로 친분이 있던 사도인 왕윤에게 수극 사건 등을 토로 했는데, 당시 왕윤은 상서복야 사손서와 동탁 주살을 모의하고 있었고, 여포가 동탁에게 불만이 많은 것을 알게되자 여포에게 동탁 암살에 참여할 것을 회유한다. 왕윤의 회유에 여포는 처음에는 부자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펄쩍 뛰었지만, 왕윤의 ‘친부도 아닐 뿐더러 아버지가 아들에게 수극을 던지겠느냐’는 설득에 결국 동탁 암살에 동참하였다.

초평 3년(192년) 음력 4월 23일 황제 유협의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미앙전에서 모임이 열려 동탁도 입궐하게 되었는데 여포와 왕윤 등은 이날을 동탁 암살일로 잡는다. 여포는 기도위 이숙과 공모해 진의, 진위, 이흑 등 10여 명을 위사로 위장시켜 북액문에 매복시켜둔 뒤 본인들은 동탁을 마중나간다. 동탁의 지시에 따라 동탁을 호위하던 여포와 이숙은 북액문에 도착한다. 동탁이 북액문을 통과하자 이숙이 먼저 동탁을 창으로 찔렀지만 동탁은 조복 속에 갑옷을 입고 있어서 팔에 부상만 입고 죽지 않았다. 창에 찔려 수레에서 낙마한 동탁은 급하게 여포를 찾았지만 여포는 동탁에게 “조서를 받들어 역적 동탁을 치노라”고 답하고, 이에 동탁은 “개 같은 놈,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여포를 욕하자 여포는 동탁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 주부 전의와 동탁의 창고지기 두전이 동탁의 시신을 보고 통곡하자 이들도 죽였다.

여포는 왕윤과 정권을 차지하여 분위장군 혹은 분무장군에 임명되고 가절을 받았으며 삼사에 준한 대우를 누렸다. 작위도 온후로 진봉됐다. 여포는 사후처리를 놓고 왕윤에게 동탁의 잔당은 사면할 것을, 동탁이 쌓아놓은 재물은 공경대신과 장교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수차례 권했으나 왕윤은 이를 거부했다. 거기다 왕윤은 여포를 단순한 칼잡이라며 업신여겼으므로 여포는 왕윤과 점차 틈이 생겼다.

여포는 홍농군 섬현에 있던 동탁의 사위 우보의 토벌을 시도한다. 처음에는 이숙에게 토벌을 지시했지만 실패하고 이숙에게 책임을 물어 처형했지만, 그 뒤 우보는 괜스레 겁을 먹고 도주하다가 그 부하에게 목숨을 잃었다. 우보가 죽자 우보의 부하였던 이각·곽사·장제 등 양주인들이 사면을 청해왔다. 왕윤이 고집으로 인해 사면이 불허된 이들이 가후의 진언을 받아들여 무기를 들고 장안으로 몰려왔다. 이에 번조 등 이런저런 세력들도 합류하니 그 수가 10여만 명에 이르렀다. 모를 쥐고 곽사와 일기토를 벌여 부상을 입히기도 했지만 6월(음력) 성 내부에 호응자가 있어 입성을 허용하고 말았다. 여포는 왕윤에게 같이 도피하자고 했지만 왕윤은 죽을 것을 알면서도 헌제를 내비두고 갈 수 없다며 스스로 잔류를 택했다. 여포는 수백 기만을 거느린 채 동탁의 머리를 들고 무관을 거쳐 남양태수 원술에게로 달아났다. 동탁이 죽은 지 채 40일도 되지 않은 때였다.

스스로 동탁을 죽여 원씨 일가의 복수를 한 공이 있답시고 마음대로 군사들의 노략질을 허용하니 여포를 환대했었던 원술이 근심하였다. 불안해진 여포는 하내태수 장양에게로 갔다. 이각 등이 현상을 걸어 여포를 찾자 장양에게 ‘우리는 동향인데 죽이지 말고 산 채로 넘겨야 더한 상을 받지 않겠냐’고 돌려 말하였다. 장양은 여포를 넘기지 않고 보호해주었다.

193년 기주목 원소의 신세를 지면서 원소를 도와 상산국에서 흑산적 장연과 싸웠다. 장연의 정병은 수만 명에, 기병 또한 수천 명이었음에도 여포는 해자도 뛰어넘는 명마인 적토마를 타고 성렴, 위월 등 수십 기와 더불어 돌진했다 나오기를 하루에 많으면 서너 번에 이르기까지 10여 일을 계속해 많은 적을 참수하였다. 이에 공을 세웠답시고 증원을 청한 데다 부하들은 흉포하게 노략질을 벌이니 원소가 우환거리로 여겼다.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여포는 낙양으로 떠난다 하였다. 원소가 임의로 사례교위를 얹어주고 장사 30명으로 배웅했는데 실은 암살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눈치챈 여포가 다른 사람에게 군막 안에서 쟁을 켜게 해 자신이 켜는 척 위장하고 몰래 빠져나갔다. 장사들이 밤중에 난입했지만 여포는 이미 피신한 후였다. 원소가 뒤늦게 보낸 추격병들은 여포의 무용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해오지 않았다. 다시 장양을 의지했다. 이각 등이 여포를 회유하며 영천태수를 주었다.

194년(흥평 원년) 조조가 서주목 도겸을 공격하느라 연주를 비운 사이 진류태수 장막이 진궁의 조언에 따라 반기를 들고 여포를 연주목으로 추대하였다. 여포는 동군 복양현으로 들어가, 급히 회군한 조조를 상대로 100여 일을 버티며 선전했으나 황충이 덮쳐 식량이 고갈되는 바람에 매듭을 짓지 못했다. 조조는 본거지인 제음군 견성현으로 물러나 주 전체의 수복을 꾀했다. 여포는 승씨현을 찔러봤다가 이진에게 저지당하고 산양군으로 이동하였다. 195년 거야현을 수비하던 설란과 이봉 구원에 실패하였다. 만여 명을 동원하여 진궁과 함께한 역공도 복병에 패하였다. 결국 제음군 정도현이 뚫리면서 여러 현들을 잃고 장막과 같이 유비에게 투탁하였다. 도겸 사후 유비가 그 뒤를 이었던 터였다. 장막은 원술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가던 도중 수하에게 살해당했다.

196년(건안 원년) 하비국의 우이현과 회음현 일대에서 회수를 끼고 유비와 다투던 원술의 연합 제의에 흔쾌히 응하여 하비성을 습격하였다. 하비는 장비와 하비상 조표가 방비하고 있었다. 장비는 모종의 이유로 조표를 죽이려 했고, 조표측에서 여포에게 성문을 열어준 덕분에 쉽게 하비를 점령하였다. 유비는 여포와 원술 가운데에 샌드위치가 되어 광릉군 해서현으로 패주하고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여포에게 귀의하였다. 마침 원술이 군량 조달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유비를 소패에 발붙이게 해주고 스스로 서주자사 내지 서주목이라 칭하였다.

6월(음력) 하내 사람 학맹이 오밤중에 반란을 일으켜 하비의 관아를 엄습하였다. 여포는 의관도 갖추지 못하고 급히 고순에게로 갔다. 고순은 휘하 부대로 일제히 화살을 쏘아 학맹을 쫓아냈다. 자신의 진영으로 도망간 학맹은 그 부장 조성에게 팔이 잘리고 고순에게 참수당했다. 조성은 원술이 배후이며 진궁도 공모했다고 진술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진궁이 모두가 알아볼 정도로 얼굴을 붉혔지만 중요한 장수라서 불문에 부쳤다. 본래 이 모의에 반대했었던 조성에게는 칭찬과 더불어 학맹의 진영을 맡겼다.

원술이 기령을 시켜 3만 명으로 유비를 마저 정리하려 하자 유비가 구원을 청해왔다. 부하들이 원술의 손을 빌려 유비를 멸하자고 했지만 여포는 ‘원술이 유비를 잡으면 북쪽의 장패, 손관 등과 연계하여 우리를 포위하는 형국이 될 수 있다’며 보병과 기병 천여 명만 데리고 가서 중재하였다. 기령과 유비 사이에 자리를 만들어 자신의 성정은 싸움이 아니라 화해시키는 것을 좋아한다며 영문을 지키는 무관에게 극을 세우게 하고는 자신이 활을 쏴 옆에 달린 날을 맞히면 모두 화해하고 못 맞히면 싸워서 결착을 보라 하였다. 여포는 이를 정확히 맞혔고 장수들은 여포가 하늘의 위엄을 지녔다며 경탄하였다. 이후 유비가 소패에서 만여 명을 모으는 등 병력이 늘어나자 위험 요소로 판단해 밀어냈다. 유비는 세력을 이끌고 조조에게 의탁하였다.

197년 원술이 한윤을 사자로 파견하여 황제를 참칭한 일을 알리고 예비 며느리를 데려갔다. 이전에 원술과 여포는 결속을 굳건히 하고자 사돈을 맺기로 했었다. 패국상 진규는 원술과 여포가 동맹하면 국난이 될 것이라 보고 여포에게 ‘천자를 받들고 국정을 보좌하는 조조와 협동해야지, 원술과 이어지면 의롭지 못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써 누란지위에 처하게 된다’고 설득하였다. 여포도 원래 원술을 싫어했던 터라 이미 길을 나선 딸 일행을 뒤쫓아 돌려세우고 한윤은 붙잡아서 허도로 압송하였다.

그동안 조조는 우호를 다지는 친필 서신과 원술 토벌 조서, 그리고 사비를 들여 평동장군과 평도후의 인장 및 자수도 보내왔다. 이전에 헌제가 내린 벼슬과 작위였는데 사자가 산양군께에서 그 문서를 잃어버렸었다. 여포는 헌제와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여러 번 답례하였다. 이내 좌장군직까지 받자 진규의 아들 진등으로 하여금 헌제에게 감사를 표하고 서주목 자리를 받아오라 하였다. 진등은 조조를 만나 여포를 조속히 처치해야 한다고 속내를 밝히며 내부에서 협력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고는 복귀하여 서주목을 받아오지 않은 것에 대해 “장군을 보살피는 것은 호랑이를 기르는 것과 같아 고기를 주어 배부르게 하지 않으면 사람을 물 것이라 말하니 조조는 장군을 호랑이가 아니라 매에 비유하며 주리면 부릴 수 있고 배부르면 날아가버릴 것이라 하였습니다.”라고 둘러댔다.

한편 원술은 노하여 장훈, 교유, 한섬, 양봉 등 수만 명으로 일곱 길에서 밀고 올라가게 했다. 진규가 “한섬과 양봉은 막 귀속해서 단결력이 약합니다. 아들 진등도 닭들이 모여 함께하지 못하는 형세라며 금방 찢어질 것이라 하였습니다.”라 말하고 계책을 올렸다. 편지를 써 보내기를, ‘두 장군이 어가를 호송하며 동쪽으로 온 것과 여포가 동탁을 주살한 것은 모두 나라에 제일가는 공이오. 원술은 반역하여 토벌받아야 마땅한데 어찌 역적과 한패가 되어 여포를 친단 말이오? 힘을 합해 원술을 격파하고 천하에 공을 세웁시다.’ 또 노획한 군수물자도 전부 주기로 약속했다. 여포가 진격하여 장훈군과의 거리가 100보 가량 되었을 때 한섬과 양봉도 군을 돌려 동시에 장훈군을 타격하였다. 대파하여 교유를 사로잡고 수많은 이를 살상했다.

이어서 한섬, 양봉과 구강군 수춘현 방향으로 수륙병진하며 지나는 곳마다 노략하고 종리현에서 회수 북쪽으로 군을 물린 뒤 원술에게 편지를 썼다. ‘족하는 군세가 강성하다고 자부하며 늘 호언하기를, 휘하의 맹장과 난폭한 무사들이 서로 싸우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제한다 하셨소. 내 비록 무용이 없어도 회남 지방을 한 때의 시간 동안 범처럼 거닐었는데, 족하는 쥐 새끼처럼 수춘에 숨어 있고 다른 누구도 고개조차 내밀지를 않으니 대체 그 맹장과 무사들은 어디에 있단 말이오? 족하는 큰소리쳐 천하를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어떻게 천하의 사람들을 모조리 속일 수 있겠소? 자고로 교전 중에도 서로 소식을 주고 받았소. 내가 먼저 꾸민 짓도 아니거니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으니 또 소식 전할 수 있을 것이오.’ 원술이 친히 보기 5천 명을 이끌고 회수에 다다랐다. 여포와 그의 기병들이 회수 북안에서 크게 비웃고 귀환하였다.

장패가 낭야상 소건을 무찌르고 거현을 점거하였다. 약속한 재물을 주지 않기에 손수 무력을 행사하여 받으러 갔다. 고순이 “장군의 위명은 이미 널리 알려져 원근이 두려워하며 복종하는데 경솔하게 몸소 출군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기지 못한다면 명성의 손상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반대하는 것은 듣지 않았다. 장패의 농성에 부딪혀 공략에 실패하고 회군하였다. 이후 장패와의 관계를 회복하였다.

198년 세력이 몹시 쇠한 원술과 다시 손잡았다. 패국 일대에서 조조의 지원을 받아 여포군을 교란하던 유비를 고순과 장료로 하여금 정벌하게 하였다. 9월 유비와 그 원군 하후돈을 깨트리자 조조가 친정을 시작하였다. 10월 조조가 팽성국을 함락하여 팽성상 후해를 생포하고 하비까지 전진해왔다. 여포가 역격에 나섰으나 격퇴당하고 성렴이 붙잡혔다. 항복해야겠다 싶었는데 진궁 등은 그래봤자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며 되레 여포가 성 바깥에서, 진궁이 성안에서 서로 기각의 형태로 방어하다보면 열흘도 안 되어 조조군의 군량이 다해 승리할 것이라 보았다. 괜찮다 여기고 출성하려는데 부인이 “진궁은 조조로부터 갓난아이인 양 귀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우리에게 귀순하였습니다. 하물며 장군의 대우는 조조에 미치지 않았는데도 온전히 성을 맡긴 채 처자식은 내버려두고 멀리 나가려 하십니까? 만약 변고가 생긴다면 제가 장군의 처로 남아있겠습니까?”라고 말려서 그만두었다.

한편 원술에게는 허사와 왕해를 파견하여 급박함을 알렸다. 원술이 출병하고 여포도 기병 천여 기로 조조군을 찔러봤지만 또 패퇴당했다. 여포는 용맹한 반면 꾀가 없고 시기심이 많아 무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으며 장수들은 뜻이 달라 서로 의심했으므로 번번이 패했다. 조조는 기수와 사수를 끌어들여 하비를 물에 잠기게 하고 공성전을 벌였다. 섣달 후성, 송헌, 위속이 이반하여 진궁과 고순을 포박하고 조조에게 투항했다. 여포는 남은 부하들과 백문루에 올랐다가 이내 저항을 포기하였다.

조조에게는 여포가 기병을 조조가 보병을 지휘한다면 천하도 쉽사리 평정할 것이라 제안하고 유비에게는 묶인 줄이 너무 조이니 조금 느슨하게 하라고 한마디 해달라고 부탁했다. 조조가 범을 잡아매는데 꽉 조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약간 풀어주라 명하자 유비가 “공께서는 여포가 정원과 동탁을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라고 귀띔하였다. 여포는 유비를 가리켜 “저 귀 큰 놈이 가장 믿지 못할 놈이다!” 라 외쳤다. 교살당하고 허도에 효수되었다. 중간에 여포가 “장수들을 후대했었음에도 위급해지자 죄다 나를 배반했소”라는 말도 남겼었는데 조조가 “경은 처를 저버리고 장수들의 여자를 사랑했으면서 어찌 후대했다 하시오?”라 반문하기도 했다.

힘이 세고 궁마술에 능숙하여 비장이라 일컬어졌다. 비장은 전한 무제 시절의 명장인 이광도 들었던 바였다. 사람들은 “사람 중에 여포가 있고, 말 중에 적토가 있다.”고 감탄하였다. 진궁도 여포는 장사로서 맞설 상대가 없을 정도로 싸움을 잘한다고 장막에게 말한 바 있다.

진등은 여포가 용맹하기만 할 뿐 무모하고 거동이 가벼워 조속히 제거해야 한다고 보았다. 조조 역시 여포에게는 도저히 길들여지지 않는 이리 새끼 같은 야성이 있다고 하였다.


590년 - 63대 로마 교황 펠라지오 2세.

1045년 - 제69대 일본 천황 고스자쿠

1799년 - 청나라의 황제 애신각라 홍력.

1878년 - 255대 로마 교황 교황 비오 9세.

1979년 - 대한민국의 화가 김은호.

1986년 - 대한민국의 군인, 독도 의용수비대의 대장 홍순칠.

1986년 - 미국의 건축가, 뉴욕 세계 무역 센터의 설계자 미노루 야마사키

1994년 - 폴란드의 작곡가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2000년 - 미국의 랩퍼 빅펀.

2007년 - 미국의 소설가 프레드 스테워트.

201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임수혁.

2017년 - 미국의 배우 리처드 해치.

2017년 - 스웨덴의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

2018년 - 미국의 시인 존 페리 발로.

2019년 - 대한민국의 외교관 주철기.

2019년 - 미국의 야구선수 프랭크 로빈슨.

2019년 - 잉글랜드의 영화배우 앨버트 피니.

 

기념일

북방 영토의 날 - 일본
 
그레나다 독립기념일

한국의 설날 - 2008년 , 2027년, 2073년

참치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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