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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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915년 - 교황 요한 10세가 이탈리아의 베렌가리오 1세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하다 .

1952년 - 유엔 총회, 한국 전쟁 포로 문제에 관한 결의안 채택.

1800년 - 호엔리덴 전투에서 장 빅토르 마리 모로장군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

호엔린던 전투(The Battle of Hohenlinden)는 프랑스 혁명 전쟁 중 1800년 12월 3일 뮌헨 인근의 호엔린던에서 벌어진 전투다. 전투는 모로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은 정전 협젓 서명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었다. 모로의 56,000명의 강력한 군대는 64,000여 명의 오스트리아 군-바이에른 군과 교전을 벌였다. 모로의 복병은 에벨스부르크 숲을 통해 오스트리아 군에게 접근 하였다. 리셰팡스의 사단도 불시에 측면을 기습하였다. 이 결정적인 승리는 프랑스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마렝고 전투에서의 승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전투로 인해 제2차 대프랑스 동맹국과의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2월(1801년 2월), 오스트리아 군은 뤼네빌 조약에 서명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이탈리아 및 네덜란드 통치권을 프랑스에 넘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미엥 조약은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긴 휴전 기간 및 나폴레옹 전쟁(1803~1815)의 원인이 되었다. 11월 말, 18살의 요한 대공은 제2지휘관인 프란츠 라우어와 최고의 참모인 프란츠 폰 웰로더에게 조언을 받고, 12월 1일 모로의 프랑스군에 대해 공세를 취하였다. 미셸 네는 프랑스군의 후위를 지키면서 오스트리아 군을 공격했다. 모로는 군대의 호엔린던 근처에 전개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수풀이 많은 지역을 통해 오스트리아-바이에른 군의 진지로 다가갔다

■ 전투 계획

모로의 주력부대는 진지를 수비하다 4개 사단이 있는 동쪽으로 방향을 전환을 했다. 북쪽과 남쪽에서, 명령을 받은 장군들이 왔으며, 샤를드 레그랑(8,000명), 루이 바스토울(6,000명), 미셸 네(10,000명) 그리고 엠마누엘 그루시 후작(9,000명)들이었다. 가장 북쪽의 사단은 폴 그리니어의 군단에 속한다. 모로는 기병 2천을 예비대로 남겨둔다. 2개 사단은 남쪽에서 벗어나 안토니오 리스펜스(11,000명) 그리고 요한 리스취(13,000명)에게 북쪽에서 남쪽으로 갈 것을 명령하였다. 요한 대공은 콜로와트에게 지휘권을 행사하기 위해 그쪽으로 말을 몰았다. 그는 동서 주요 간선도로를 사용하였다. 빽빽하게 우거진 숲지대와 서투른 막료 때문에, 오스트리아군 종대는 서로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의 지휘관들은 프랑스 군이 퇴각했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이미 지나간 적들을 잡으려 했다.

■ 전투

모든 오스트리아 군 종대는 새벽에 출발하였다. 오전 7시 콜로와트는 그루시의 사단과 충돌했다. 북쪽에 키에메이어는 프랑스군 전초부대를 공격하고 그리고 후미에 있는 주련전열을 몰았다. 그 사이에, 리스취와 바일레츠는 숲의 오솔길 한복판에 눈 그리고 진눈깨비 폭풍 때문에, 예정보다 늦게 왔다. 당연한 결과로, 리스펜스의 측면 종대가 리스취의 정면을 통과했다. 그 무렵, 오스트리아 군의 2개 척탄대대가 콜로와트에게 파견되고 리스취를 찾았으며, 리스펜스의 사단은 반으로 나뉘었다. 반대로 단독으로 이끌고 싶다는 결심을 한, 리스펜스의 좌측의 후미 여단은 장 밥티스트의 아래에서 싸워 적을 내몰았다. 그는 주 도로를 통과하며 싸웠다. 서쪽에서 벗너나 콜로와트의 후위와 충돌했다. 바이레트가 당황하는 동안, 키에메이어와 콜로와트는 프랑스 주력 전열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리니어의 사단과 그루시의 부대는 지상최고의 완고함을 오스트리아 군에게 보여주었다. 정오쯤, 뎅셍부대는 고전하고 있는 드라운트의 여단을 지원하기 위해 근처 남쪽 봉우리에서 전장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뎅셍의 주둔군이 리스취의 종대를 동쪽으로 밀어냈다. 오스트리아-바이에른 군은 4,600명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어느 시인은 프랑스 전사자 및 부상자가 1,900명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3,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바스토울은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 전투의 여파

이 전투 뒤에, 질서 정연했던 요한 대공의 군대는 사기가 꺾여 퇴각을 했다. 15일 후, 그는 189마일을 전진해, 지배력을 행사하고 2만 명의 오스트리아 군을 포로로 잡았다. 12월 17일, 이때 유능한 카를 대공(요한 대공의 형)이 나타났다. 이제 오스트리아 군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12월 24일, 프랑스군은 빈에서 50마일 밖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카를은 휴전을 간청했다. 프랑스 군의 '호엔린덴'에서 완벽한 승리의 영향으로, 모로는 휴전을 승낙했고 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잠재적인 라이벌이 되었다.


1909년 - 국민연설회가 발기했다.

1995년 - 전두환 전 대통령, 12·12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수감됨.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과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했다. 전두환은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 사건의 배경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건을 수사했다. 하지만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현장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증폭됐다.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면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하였다"라고 말했다.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총장이 무혐의라는 발표를 뒤집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로 내세우며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이던 정총장을 강제 연행한 실제 이유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 경비 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 전개과정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선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12월 12일 18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충장 체포안에 대한 재가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횐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유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헌병대를 투입했고 병력은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 이후 반란군은 정충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연행 후 전두환, 유학성, 황영시 등은 다시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 총장의 연행 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채 요구하였으나 다시 거절당했다. 이후 신군부 세력에 반하는 진압군을 무력화 시키고 결국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 반란 이후

12.12는 숙군 목적을 띤 군 내부의 반란이었다. 정권을 탈취한다고 하는 의미로의 쿠데타에 해당하는 것은 오히려 1980년의 전국 비상 계엄령으로부터 광주 민중항쟁에 이르는 과정이다. 결국 이런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최구하를 사임시키고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반란 이후 대대적인 군장성 물갈이가 있었고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같은해 최규하 대통령은 긴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했고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 후 국보위는 헌법을 개정했고,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 처벌 및 사면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투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결국 전두환, 노태우들의 신군부 핵심 인사는 1월 23일 5.18 사건에서의 내란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 재판 1심에서는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의 판결을 내렸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보복은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영삼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12.12, 5.18 사건 관계자를 특별사면했다.

1997년 - IMF와 대한민국 정부간의 구제금융 협상이 타결되어, IMF 구제금융 사태가 시작되었다.

1997년 - 오타와 협약 조인.

2014년 - 일본 가고시마현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발사한 소행성 탐사기 하야부사 2가 우주궤도 진입에 성공하였다.

남극 장보고과학기지에서 300km가량 떨어진 엘리펀트 모레인 청빙지역에서 운석을 발견하였다.

영국 런던 한국전 참전기념비를 준공하였다.

2016년 - 대한민국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이 발의되었다.


문화

1921년 - 한글 학회가 창립됐다.

한글 학회는 한글과 한국어의 연구를 위해 이루어진 학술 단체이다. 1908년 8월 31일에 김정진을 회장으로 하여 창립한 '국어연구학회'를 모체로 1921년 12월 3일에 창립하였다. 한글 학회는 1926년 11월 4일에 한글날(가갸날)을,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 한글을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해방 후, 학회는 한글 전용을 주장해 국한문혼용을 한글 전용으로 쓰는 것을 장려했다.

■ 역사

처음의 명칭은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로서 국문연구소(1907년 설치)를 계승하여 만들어졌다. 당시 회원은 장지영·김윤경·최현배·권덕규 등 15~16명이었다. 이들은 동호인들을 규합한 후 학회 활동으로 연구발표회를 가지는 한편, 1927년 2월 8일에는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고쳤고,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고 우리말사전을 편찬했다. 1942년부터 회원들이 여러 차례 독립운동죄로 검거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이다. 8·15 광복과 더불어 부활되었다. 1949년 한글 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79년~1980년 우리말 큰사전을 간행하였다


■ 한글만 쓰기 운동


일본 제국 패망 후인 1945년 11월 8일 이후 한글학자들은 한글만 쓰기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로, 해방 직후의 초·중등 교과서에는 한글만 사용되었으며, 필요시 괄호 안에 한자가 표시되었다. 단, 중학교에서는 한문교육을 실시하여 중국과의 교류, 고전(古典)에의 접근을 고려하였다. 공문서에는 한글이 전용되었다. 1949년에는 다시 '한자 전용안'에 의해 문서에 한자를 섞어쓰게 되었다. 이에 반대하여 1964년 성명서를 통하여 한글 학회가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일상생활에서 한글만 사용하자.

글자생활의 기계화를 위해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

'한글전용'은 한자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며, 한자어를 한글로 쓸 뿐이다.

학교 과목의 용어는 쉬운 한글로 표기하자.

더 철저히 한문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한자로 적힌 고전은 한글로 번역되어야 한다.

신잡지는 모두 한글로 써야 한다.

1968년에는 정부 차원에서 '한글전용5개년계획'을 세우고, 이를 다시 단축하여 '한글전용촉진7개항', '한글전용연구위원회' 등이 생겨났다. (10.7 선언) 이에 맞추어,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글전용국민실천회'가 조직되었다.

1973년 - 파이어니어 10호, 목성에 접근. 

파이어니어10호는 1972년 3월 3일 발사되어, 처음으로 소행성대를 탐사하고  목성을 관찰한 우주선이다. 1973년 12월 3일  목성에 접근하여 사진을 전송하였다. 1983년 6월 13일 해왕성의 궤도를 통과했다. 명왕성의 궤도이심룰이 커, 당시에는 해왕성이 태양계의 가장 바깥 행성이다. 정의에 따라서는 파이어니어 10호는 태양계를 벗어난 첫 우주선으로 볼 수도 있다. 파이어니어 10호와 파이어니어 11호에는 인류가 외계의 지성체에게 보내는 메세지가 담긴 금속판이 함께 실려져 있다. 2003년 1월 23일 마지막 교신을 끝으로 파이어니어 10호는 통신이 두절 되었다. 2006년 3월 4일 최종 교신을 시도 했으나 파이어니어 10호로부터 응답이 오지 않았다.

■ 심우주 탐사

1976년 토성의 궤도, 1979년 천왕성의 궤도. 1983년 6월 13일에는 해왕성의 궤도를 횡단했다. 후에 보이저 1호가 기옥을 갱신하기 전까지는 파이어니어 10호는 인간이 만든 물체 중에서 지구로부터 가장 멀리 있었다. 보이저나 파이어니어 11호와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하고 있고, 태양계의 진행 방향과는 역방향이다. 1999년경 감속이 약 9×10-8 cm/s의 감속이 확인되었지만, 2003년 1월 23일의 아주 미약한 송신을 마지막으로 교신은 끊어졌다. 송신 확인은 2006년 3월 4일의 시도를 마지막으로 중지되어 이 날 운용이 종료된 날이 되었다

■ 구조

탐사선 본체는 6각형의 형상을 하고 있다. 직경 2.4m의 대형 파라보라 안테나를 가지고 있고, 본체에 달린 3개의 붐의 끝에는 플루토늄 238을 이용한 원자력 전지 2기와 자력계가 장착되어 있다. 관측 기기로서는, 자력계 외에 외적외선 방사 계측기, 자외선 계측기, 방사선 계측기, 카메라 등이다. 또, 칼 세이건의 발안에 의한 외계 생명을 향한 메시지로서 인간의 모습과 태양계를 그린 금속판이 장착되어 있다.

제1차 에너지 파동 으로 인하여 대한민국 지상파 텔레비전 아침방송(KBS TV, TBC TV, MBC TV 등) 중단.

1987년 - 서울특별시와 충청북도 청주시를 잇는 중부고속도로가 완성및 개통되다.

1992년 - 세마그룹 소프트웨어 설계자 닐 팹워스(Neil Papworth)에 의해 세계 최초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서비스(SMS)탄생하다.

2014년 - Outfit7이 마이토킹안젤라를 출시시켰다.


탄생

1368년 - 프랑스의 왕 샤를 6세.

1684년 - 덴마크, 노르웨이의 작가, 철학자, 소설가, 역사가, 극작가 루드비 홀베르.

1800년 - 슬로베니아의 시인 프란체 프레셰렌.

186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이시영.

1880년 - 독일의 군인 페도르 폰 보크.

1886년 - 러시아 비밀 경찰 야코프 페테르스.

1900년 - 오스트리아의 생화학자 리하르트 쿤.

1912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최정희.

1922년 - 대한제국 황손 이현.

1930년 -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 뤽 고다르.

1934년 - 대한민국 정치가 김만제. 대한민국 비전향장기수 리공순.

1949년 - 미국 가수 겸 작곡가 미키 토머스

1954년 - 대한민국의 배우 양희경.

1955년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알베르토 타란티니.

1958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두관.

1960년 - 미국의 배우 줄리앤 무어.

1962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경협.

1966년 - 대한민국의 성우 김일.

1967년 - 러시아의 축구인 알렉산드르 듀코프.

1976년 - 미국의 야구 선수 게리 글로버.

1977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채종범.

1981년 - 스페인의 축구 선수 다비드 비야.

1982년 - 가나의 축구 선수 마이클 에시엔. 대한민국의 가수 김완제(트래비스 킴). 대한민국의 가수 황치열.

1985년 - 미국의 영화 배우 어맨다 사이프리드.


사망

1610년 -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혼다 다다카쓰.

1784년 - 영국의 시인, 평론가 사무엘 존슨.

1894년 - 영국의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1993년 - 대한민국의 군인 김동하.

1996년 - 아프간의 정치인 바브락 카르말.

1999년 - 미국의 배우 매들린 칸.

2015년 - 미국의 가수 스콧 와일랜드.

2016년 - 대한민국의 군인이자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

2018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김철만.

2019년 - 대한민국의 문화기관단체인 차길진.

2019년 - 대한민국의 배우 차인하.


기념일

소비자의 날: 대한민국

세계 장애인의 날

바스크어의 날(International Day of the Basque 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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