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이야기 2월 17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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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21년 - 도쿄 제국대학병원에 입원 중이던 조선의 신념형 친일파 민원식이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친일파 민원식

민원식(1886년 7월 12일 ~ 1921년 2월 17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사회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언론인, 사상가이다. 일제 강점기 초기에 조선인의 참정권, 자치권을 주장하였다. 그는 1907년 당시 일본 궁내성에 시찰 갔다가 일본인에 의해 유인, 인종 박람회에 끌려간 조선인 남녀를 보고 안타깝게 여겨,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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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청나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귀국, 1905년(광무 8년) 경무청 총순을 지내기도 했다. 1906년 귀국, 이토 히로부미의 후견으로 내무부 위생국 위생과장, 통정대부 등을 역임했다. 1907년(광무 10년) 내무부 위생과장으로 있을 때 위생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 뒤 내무부 위생국장 겸 광제 원장을 거쳐 황실 회계심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1908년(융희 2년) 친일 인사 이지용 등과 함께 대한실업협회를 조직했고, 1910년 1월 1일에는 시사신문을 발행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한일 합방 이후에는 중추원 부찬의를 역임했다. 한일 합방 조약 직후부터 그는 이규완 등과 함께 조선인의 참정권을 허용해줄 것을 여러 번 조선총독부와 일본 제국 정부에 건의하였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1919년에는 3.1 만세 운동을 비판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오해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1920년 조선총독부에서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문화 정치로 정책을 바꿔 민간신문 발행이 허용되자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며 조선인 참정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해 국민협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4월 1일에는 시사신문을 복간하였다. 1921년 2월 16일 일본 도쿄 데이고쿠 호텔에서 목수로 위장하고 찾아온 민족주의자 양근환의 칼에 복부, 이마를 찔려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3.1 운동 이후에 나타난 민원식 등의 참정권운동은 그의 피살로 일단락되었다. 엄준원의 사위이며 고종의 계비 순헌황귀비의 조카사위이고, 엄주명의 매형이었다.

독립운동가 양근환선생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양근환은 그를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이 때에 참정권 운동을 벌이는 것은 매국노 짓"이라 평하였다. 독립운동가 겸 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의 주장을 광론이라 했다. 신채호는 조선혁명 선언에서 "3.1 운동 이후에 강도 일본이 또 우리의 독립운동을 완화시키려고 송병준 민원식 등 열두 매국노를 시키어 이따위 광론을 부름이니, 이에 부화하는 자는 맹인이 아니면 어찌 간 적이 아니냐"라고 비판하였다.

독립운동가 김규면은 그의 행동을 "어리석고 비루한 행동들의 하나"로 규정하면서도 그의 활동을 일종의 독립운동으로 보기도 했다. 김규면은 "조선독립운동단체들의 정치적 경향이 여러 가지 이었다"고 하여 독립운동의 하나로 봤던 것이다.

윤치호는 그에게 공감하지도 않지만,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평하였다. 윤치호는 "민원식을 한 인간으로서 높이 평가하지도 않고, 그의 정치 노선에 공감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가 죽어야 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조선이 독립을 팔아넘기자는 게 아니라, 현 상황에서 최상의 이익을 얻자는 것이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윤치호는 그를 암살한 양근환과 양근환을 영웅시하는 시각을 비판하였다. "설령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기서 끝나야지,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조선의 역사, 특히 지난 500년 간의 역사가 당파 간의 상호 살육이라는 치욕스러운 기록의 연속이었다는 점이 서글프기만 하다. '우리와 의견을 달리하는 자는 제거하라!' 이것이 조선 정치가들의 좌우명이었다. 오늘날 조선 청년들이 정치 선배들의 악습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백남운은 1927년에 쓴 "조선 자치운동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에서 민원식의 자치론,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을 차례로 비판한 글이었다.

한편 그의 참정권 청원운동이 일본인 또는 조선총독부측의 사주를 받았다는 견해가 있다.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의 조종 아래 참정권 청원운동을 전개했다'는 의혹도 있다.

그의 암살 사건은 속칭 "M사건"으로도 불린다. 민원식을 살해한 양근환의 체포 소식을 들은 윤치호의 1921년 2월의 일기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젊은 사람이 하찮은데 자기 목숨을 내놓다니 정말 유감스럽다. 암살 따위를 통해 조선 독립을 쟁취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윤치호는 민원식을 암살한 양근환에게도 동정하였다.

3.1 운동을 반대하는 가장 체계적인 논설을 발표 한 친일관료는 아마도 고양 군수 민원식(閏元植) 일 것이다. 이완용 백작이 귀족계의 대표자였다고 한다면 그는 관료계의 선봉장이었다.라는 평도 있다.


1992년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렸던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 공연 도중 여고생 1명이 압사했다.

2006년 - 크립톤 퓨처 미디어 사에서 남성 VOCALOID KAITO를 출시하였다.

2008년 - 코소보 독립선언

2014년 -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마우나 오션 리조트 내 강당 천정이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 오리엔테이션 중이던 부산외국어대학교 신입생 110여 명이 매몰, 다수의 사상자 발생.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사고는 2014년 2월 17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마우나오션리조트에서 발생한 사고이다. 이 사고로 체육관에서 신입생 환영회 행사를 진행중이던 부산외국어대학교 학생 9명과 이벤트 업체 직원 1명 총 10명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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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2월 17일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에서는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신입생 환영회 행사를 하고 있었다. 오후 8시 10분, 무대 앞 부분부터 붕괴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체육관 내 500여 명이 있었다.

마우나오션리조트의 체육관은 철제 구조에 샌드위치패널로 마감하는 PEB 공법으로 신축되었다. 그 외에 하중을 지탱하는 부분이 부실하게 지어졌다는 논란이 있다. 연세대학교 토목공학과 조원철 교수는 기둥을 제 멋대로 놓아 지은 사실을 지적하였다. 건축법상 경주시 지역에는 50 kg/m²의 적설 하중에 견디도록 되어 있다. 적설하중 기준 자체가 낮았던 것과 눈을 치우지 않은 것이 이후 굳어져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것이 사고의 한 원인이었다. 또한 설계도와 다르게 지붕이 건설된 부분이 발견되었다. 전문가는 설계도대로 지었다면 폭설을 버텼을 가능성이 컸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 부분에 대해 수사에 들어갔다.

신입생 환영회 장소 선정 과정에서의 문제점도 지적되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측에서는 캠퍼스 이전 때문에 재정적 지원이 어려워지면서 새로 이전한 캠퍼스 내에서 신입생 환영회를 진행할 것을 권유하며 대외행사를 금지하였으나, 총학생회 측에서 이를 어기고 학생회 주도하에 학생들에게 회비를 걷어 진행하였고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사전답사조차 하지 않은 채 금액이 낮은 곳을 선정하였다. 또한 신입생 환영회 장소가 원래 공표되었던 장소에서 급작스럽게 변경된 사실이 알려졌다.

총학생회에서 학생들에게 배포한 안내문에는 경주 켄싱턴리조트였으나 갑작스럽게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로 변경되었다. 이에 대해 부산외국어대학교 사고대책본부는 당초 켄싱턴리조트를 예약하였지만 리조트 측에서 취소 통보를 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없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숙박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예약 단계에서 총학생회가 켄싱턴리조트를 신입생 환영회 장소로 안내문에 못 박은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의혹도 있었고 이후 "켄싱턴리조트가 학생 수가 더 많은 다른 대학과 계약을 해 뒤늦게 예약 취소를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마우나리조트를 선택했다"라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하였다.

 

하지만 켄싱턴리조트 측에서는 "1월 부산외대를 포함한 대학 20곳 정도가 피크 시즌 예약을 위해 찾아왔다"며 "하지만 부산외대는 답사만 했지, 예약은 물론 계약금조차 낸 적이 없다"고 말해 진술이 엇갈렸다. 일부에서는 대학 측이 학생회와의 갈등으로 교통비 1천만 원 외에 별도의 재정지원을 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시설을 신입생 환영회 장소로 잡은 게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대책본부 관계자는 "학생들이 묵은 숙소는 과거에 비해 가격이나 시설 면에서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며 이 같은 가능성을 일축하여 무엇 때문에 장소를 급하게 바꾼 것인지 의혹을 증폭시켰다.

 

 

 


의문점은 사고 리조트가 신입생 행사를 대행한 이벤트업체가 계약을 하였지만 총학생회와 이벤트 업체는 명확한 계약서가 없는 데다 행사 장소도 이달 초 수차례나 변경되었다. 경찰과 부산외국어대학교 등에 따르면 총학생회는 신입생 환영회 행사를 위하여 전체 신입생 1600명에게서 1인당 6만 5000원씩, 재학생 800명에게 1인당 3만 원씩 총 1억 2800만 원을 참가비로 거두었다. 행사는 1차(2월 17~18일)와 2차(2월 18~19일)로 나누어 각각 1박 2일간 진행하기로 하였으며, 사고 당일에는 1052명이 1차로 참석하였다. 하지만 총학생회 측 의뢰를 받은 이벤트 업체는 사고 리조트와 숙박비, 식대 등 모두 5600만 원에 계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이벤트와 차량 비용 등 부대비용을 포함하더라도 행사 진행 비용으로는 과하였다는 지적이 일었다. 이에 경찰에서는 총학생회 측이 신입생 환영회 장소를 변경한 이유, 이벤트 업체와 학생회 간의 계약 내용과 이 과정에서 부당한 거래가 있었는지 등 각종 의혹에 대해서도 수사하기로 하였다.


총학생회의 태도 또한 논란이 되고 있다. 언론 및 외부인과의 접촉을 기피하고 장소 변경 과정 등에는 침묵하며 학교 측에 일부 책임을 미루고 마우나리조트의 안전 부실만 주장해 유가족과 학생들로부터 비난을 사고 있다.

사고 직후 마우나오션리조트를 운영하는 코오롱그룹의 회장 이웅열은 2월 18일 오후 12시 50분 임시 빈소가 마련된 울산 21세기 좋은병원을 찾아 "여러분이 겪으시는 고통을 제가 같이 나눠야 한다. 뭐든지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하겠다"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사고 원인이 관리 소홀인지, 건물 부실인지를 묻는 취재진 질문에는 "원인을 파악 중이다"며, 리조트 건물의 보험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해 유족들의 분통을 터트리게 하였다. 피해자 유가족들은 "진정한 마음으로 왔다면 제대로 사죄하고 가야 한다."며 "부하 직원들을 데리고 왔다가 그냥 가는 것은 언론플레이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또한 코오롱 측은 사고에 대비하여 재산종합보험을 가입하였지만 보험료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한도를 낮게 설정했기 때문에 유족들이 받는 보험금이 미미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건물이 붕괴된 재물손해에 대해서는 5억 원 한도로 보상을 받을 수 있지만 사고는 인당이 아닌 건당 1억 원으로 한도를 정해놨기 때문에 100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이번 사고로 보험사에서 받을 수 있는 인명피해에 대한 보험금 총액은 1억 원에 그쳐 1억 원을 피해자 유족들이 나눠가져야 하는 상황이다. 코오롱과 대학교 보험금을 전부 합쳐도 1인당 6천만 원 정도이기 때문에 코오롱에서 자체적인 보상 마련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사고 사망자 중의 한명인 부산외국어대학교 학생 박주현 씨의 장례식이 2014년 2월 20일 부산광역시 용호동 이기대 성당에서 사망자 중 처음으로 치러졌다. 이후 2월 21일 부산외국어대학교 남산캠퍼스 체육관에서 학교장으로 치러졌다. 이벤트 업체 직원 최정운 씨도 같은 날 오전 7시 20분 부산 좋은 강안병원에서 모교인 경성대학교 동문회장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로써 이번 사고로 사망한 10명에 대한 장례절차가 모두 마무리되었다.

대구지방검찰청 수사대책본부는 4월 18일 마우나오션리조트 임직원과 감리/설계/시공 관련 담당자 4명을 업무상 과실 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4월 22일 수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2016년 - 터키 앙카라에서 폭탄테러가 발생하여 28명이 사망하고 61명이 부상을 입었다.

문화

1988년 - 아시아나항공 설립.

2000년 -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윈도우 2000 출시.

 

탄생

624년 - 중국 유일의 여자 황제 측천무후.

2014년 중국에서 방영된 역사드라마(무미랑전기)에서 무미랑(측천무후)역을 맡은 배우 판빙빙

측천무후(624년(630년) 2월 17일 ~ 705년 12월 16일)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이자 무주의 황제이다. 중국에서는 그를 무측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공포정치를 했다는 비난과, 민생을 보살펴 나라를 훌륭히 다스린 황제라는 칭송을 같이 받고 있다. 그녀가 통치했던 15년을 '무주의 치' 라 부른다. 그녀는 중국을 통치한 200여 명의 황제들 중 유일한 여성 통치자였다. 그런 만큼 당나라 멸망 이후 문치주의와 유교 시스템을 중심으로 성리학적 정치체제가 마련되었던 송나라와 이후 명나라의 유학자들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았다. 또한 여성의 중앙정치 진출이 극도로 제한되었던 고대에 그녀가 어떻게 황제가 되려 했는가에 대한 비판과 그녀의 욕심, 야욕, 욕망에 대한 것이 명나라까지의 주된 평가였다면 청말 개항 이후 신해혁명을 거치며 평가는 조금씩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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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무조이고, 아명은 무미랑이며,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이름을 조로 개명하였다. 무사확(武士彠)의 차녀이다. 624년에 태어나 705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통치는 당 태종에서 당 현종 시기로 이어지는 당나라 정치, 사회, 경제, 문화를 발전 및 계승해 현종 시기의 당나라가 태종 이후 또다시 전성기를 맞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태어난 연도는 정확하지 않고, 630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도 있다.

무조는 624년 음력 1월 23일에 당의 이주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유명한 목재상인데, 수 양제 양광의 대토목 공사로 거부가 되었다. 617년 양광의 폭정 때문에 일어난 대반란에 당시 태원 유수 이연과 같이 참전하여 얼마 뒤 당나라가 건국되자, 황제가 된 이연으로부터 태원군공 겸 이주 도독이란 작위를 받았다. 620년에 무사확이 본처를 잃고, 양 씨를 새로이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으니 그중 둘째가 무조이다. 무조의 어머니 양 씨는 수나라 시절 재상을 지낸 양달의 딸로 명문 출신이었다.

636년, 당 태종 이세민이 황후 장손씨를 잃자, 그 이듬해에 무조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얘기를 듣고 14세의 무조를 입궁시켜 무미라는 칭호를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무미랑이라고 불렀다. 무사확이 죽은 뒤로 어머니와 궁핍한 생활을 보내던 무조는 입궁하게 된 것을 반갑게 여겼다. 그러나 무조는 가문이 빈한하여 황제의 후궁 중 비교적 낮은 지위의 재인(才人: 정 5품)에 봉해졌고, 다른 후궁들의 업신여김을 받으며 어려운 궁중 생활을 보냈다. 어느 날 태종 이세민이 대신들에게 성질이 사나운 말 한 마리를 다룰 수 있겠느냐고 묻자 무조가 나서서 "신첩에게는 철편, 철추, 비수 단 세 가지 물건만이 필요합니다. 우선 철편으로 말을 때리고, 듣지 않으면 철추로 머리를 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머리를 잘라버리겠습니다." 고 답하였다. 이세민은 무조의 기개를 칭찬하며 그녀에게 상을 내렸다. 그러나 무조는 애교를 부릴 줄 몰라 이세민의 총애를 받지 못했고 무조는 이세민이 죽을 때까지 12년 동안, 승은도 받지 못했다. 그렇게 649년에 이세민이 사망하고, 무조의 간청으로 9남인 이치가 이태를 몰아내고 황제에 올라 고종이 되었다. 이치는 태자일 때, 부황 이세민을 간호하던 무조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녀에게 반했고, 무조 또한 이치에 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무조는 후사를 두지 못한 선제의 후궁은 비구니가 되어야 하다는 법도에 따라 머리를 깎고 천조라는 법명으로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에 들어갔다. 이치는 분향차 감업사에 들렀는데, 거기서 무조를 본 순간 또다시 옛정이 떠올랐고 무조 또한 이치에게 몰래 여의 낭이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무조가 황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이유로는 이치의 황후인 왕씨의 도움이 컸다. 왕 씨는 당시 이치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소 숙비를 질시했는데, 이치가 무조와 밀회한 사실을 알고 이치의 마음을 소 숙비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무조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왕 씨는 무조에게 다시 머리를 기르게 하고 이치에게 무조를 후궁으로 삼으라고 부추겼다. 그러나 이것은 여우를 잡기 위해 범을 불러들인 격이 되었다. 무조는 황후 왕 씨의 비위를 맞추며 그녀 앞에서는 지극히 공손하고 겸손하게 행동하였고, 왕 씨는 무조가 진심으로 자기에게 복종한다고 여겨 이치 앞에서 여러 번 그녀를 칭찬하였다. 이치가 무조를 소의에 봉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묻자 왕 씨는 흔쾌히 승낙하였고 무조는 황후 왕 씨와 소 숙비 다음가는 지위인 소의가 되었다.

무조는 이치와의 사이에서 모두 4남 2녀의 자녀를 낳아 이치의 사랑을 차지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황후 왕씨와 결탁하여 소 숙비를 폐출시켰다. 이리하여 무조는 비가 되었다. 하지만 야심만만했던 무조는 황궁 안에서 왕 씨나 그 일족이 오만한 태도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을 기회 삼아 그들을 반대하는 궁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모았고 왕 씨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무조가 딸 안정 공주(장녀이자 태평공주의 언니)를 낳자, 아이를 좋아하는 황후 왕 씨는 기뻐하며 무조의 처소를 찾아와 딸을 보고 갔다. 무조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목졸라 죽이고 딸의 시신을 이불로 덮어두었다. 이때, 고종 이치가 들어와 딸을 보러 왔다가 죽어있는 것을 확인하자, 무조는 이 모든 것이 황후의 소행이라 모함하였다. 이에 이치는 황후 왕 씨를 폐서인 시키고, 소의 무조를 황후로 삼으니, 이때가 영휘 6년(655년) 10월 13일이었다. 무조는 황후가 되고 나서도 왕 씨와 소 숙비를 가만 놔두지 않았고, 그녀들에게 곤장 백 대를 치고 다리를 잘라, 술 항아리에 가두어 죽어가게 하였다. 또한 왕 황후와 소 숙비의 성을 각각 망, 효로 바꾸어 불렀다.

황후 무씨는 가장 먼저 남편의 외숙부이자, 승상인 장손무기를 자결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장손씨 일가를 모조리 몰살시켜버렸다. 656년, 무씨는 황태자였던 이충에게 여러 죄를 뒤집어씌우고 폐위시켰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신의 장남 이홍을 앉혔다.

이런 그의 전횡을 보다 못한 이치가 대신들을 은밀히 불러 무씨의 폐위를 의논하였으나, 무씨의 심복들이 그 사실을 알고 무씨에게 밀고하였고, 그는 폐황 태자인 이충과 대역죄를 꾸미려 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을 모두 처형해버렸다. 이충은 검주로 귀양 보내졌다가 664년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무씨는 실제로 대단한 정치적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치에게 '건언12사'라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치는 이를 모두 수용하였다. 얼마 뒤, 이치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치는 황태자 이홍에게 제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홍은 총명하고 겸손하였으며, 이치와 대소 신료들 사이에서도 신임이 두터웠지만 무씨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많았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무씨는 675년 합벽 궁 기운전에서 고종, 이홍과 함께 식사를 하였고 이홍은 그 자리에서 독살당하였다.

이후, 그 다음 아들인 이현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이현 역시 죽은 형 이홍 못지않게 총명하여 이치의 총애를 받았다. 무씨는 아들의 총명에 위기감을 느껴 이현에게 여색을 밝힌다 모함하였다. 680년에 이현은 황태자에서 폐출당하였고 이치의 요청으로 죽음만은 면하였으나 681년 수도에서 2,300리 떨어진 파주로 유배되었다. 이현은 유배지에서 황 대과 사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가 퍼져 무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684년 무씨는 조사를 한다는 구실로 구신적을 파주로 보내 아들을 자살하게 하였고 조정에 파문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구신적이 이현을 죽였다고 덮어 씌웠다.

무씨는 자신의 셋째 아들 이현을 새로이 황태자로 삼았다. 그는 형들과 달리 유약하였고, 어머니의 말에 절대 순종했다. 3년 뒤인, 683년 고종 이치는 사망하였고, 황태자 이현이 황제에 오르니 이가 중종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무씨는 그를 폐위시켰다. 이유는 바로 이현의 처인 황후 위 씨와 그 아버지 위현정이 정사를 농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현을 여릉 왕으로 강등시키고, 자신의 소생 중 막내아들인 이단을 황제에 올리니 이가 바로 예종이다.

중국 역사 드라마 무미랑전기 측천무후(판빙빙)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무씨는 낙양을 신도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발한 대신들도 적지 않았다.

684년 9월, 양주의 서경 업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장안으로 진군하였는데, 그 격문을 낙빈왕이 썼다. 무씨는 그 격문을 보고 낙빈왕이 자신의 수하에 없는 것을 안타까워했으며, 어쨌든 그녀는 30만의 진압군을 파견하여 40일 만에 그 모든 반란이 평정되었다. 그리고 무씨는 이 반란에 동조하였던 모든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내각을 새로이 개편하였다.

무씨는 하늘의 뜻을 거론하며, 여론을 조작하기도 했는데, 그녀의 조카 무승사(649~698)가 '성모 임인 영창 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즉, 황태후께서 군림하시니, 황제의 기운이 대대손손 번창하리라는 쓰인 돌을 가져와 무씨에게 바쳤고, 이것을 본 무씨는 기뻐하여 연호를 '영창'으로 고쳤다. 한편, 당 고조 이연의 11남인 한 왕 이원가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할 뻔했으나, 무씨는 군사를 보내 이를 진압함으로써 자기의 황제 즉위에 대한 모든 장애물을 치우고 말았다.

그녀는 690년 국호를 '주'로 고친 후 15년간 황제로서 중국을 다스렸다. 역사가들은 그녀가 세운 국호인 '주'를 서주, 동주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녀의 성씨를 따 '무주'라고도 불렀다. 그녀는 황제에 오르자마자, 혹리를 동원해 그녀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을 양성한 후 당 황조의 종친과 구대신들을 몰살시켰으며, 이를 통한 혹리들의 정치참여를 꺼려 그들을 죽이는 '토사구팽'을 취한다. 비록 잔혹하게 황제의 지위에 올랐지만 정치가로서는 상당히 유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먼저 국법을 엄격히 해 주나라의 일원적 통치시스템 구축과 사회안정을 이뤄나갔다.

그녀는 그때까지도 제대로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지 않았던 과거제도를 다시 개편하였고, 또한, 과거를 회시, 공사, 전시의 순으로 삼아서, 국가에 필요한 많은 인재들을 배출, 적재적소에 등용시켰다. 이로 인해, 여기서 뽑힌 신흥 세력들이 많았다. 이들은 훗날 이융기를 도와 '개원의 치'를 성립시키는데 일조한다. 그녀는 이러한 사람들을 많이 중용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만들었다. 또한, 당나라 때도 실력이 있던 대신들을 중용하였다. 이들이 적인걸, 장 간지 등이다. 그녀가 다스리던 시기는 태종 이세민이 다스리던 시대에 버금갔고, 백성들의 생활은 풍족하였다. 그녀는 근무가 태만한 관리들은 모두 파면하였으며, 심지어 사형을 내리기도 했다.

 

그녀는 또한 불교를 중흥시켜, 전국에 많은 불교 사원을 세우고 많은 승려들을 양성시키도 하였다. 그녀가 재위하는 동안 당나라 장안성은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국제도시로 자리 잡았으며, 이는 동서양을 통틀어 그 시대 현존하는 가장 최고의 국제도시이자 동서양이 만나는 장이 바로 장안임을 얘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개방적인 분위기는 당 현종 시기 조로아스터 교, 경교 등이 전래될 정도로 가장 뛰어난 세계 최고의 도시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백성의 소리를 듣기 위해 '진실의 함'을 만들기도 했으며, 50여 년동안 당나라에서의 민란과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민생회복과 생산력 강화를 국정운영의 기치였고, 특히 이 과정에서 2년 3 모작이 가능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러한 그녀의 치세를 '무주의 치'라 불렀다.

 

자영농이 성장했으나, 도리어 전쟁이 더 이상 발발하지 않고, 이를 통해 영토가 확보되지 않자, 자영농이 조금씩 쇠퇴하고 지주가 등장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식 교육도 대단히 엄격히 시켰는데, 그녀가 가장 사랑한 딸 태평공주를 엄격히 가르쳐, 법을 위반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조카 무승사도 꽤 뛰어난 정치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권력이 매우 커져 무씨와 조정 대신들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환관 설회의는 무씨의 총애를 등에 업고, 횡포를 일삼기도 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무씨는 조카 무승사에게 황위를 물려줄지, 아니면 당 황조의 황태후로 돌아가야 할지라는 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무씨 황조를 잇는 것에 대해 적인걸 등과 같은 여러 재상들과 신료들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699년, 무씨는 유폐되어 있던 여릉 왕 이현을 다시 태자에 봉했다. 6년 뒤인, 705년에 무씨는 병에 걸렸고, 이러한 때에 재상 장 간지가 군사들을 이끌고 무씨가 와병 중인 전각으로 가 당 황조의 복원을 요청하였고, 무씨는 이를 승낙하여 당 황조가 15년 만에 복권되었다. 그리고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에 즉위하였다.

 

무씨는 그리고 최초의 여성 태상황이 되었다. 그 해 11월, 무씨는 중종 이현과 막내아들 예종 이단, 막내딸 태평공주 등을 불러놓고 무씨 일가를 잘 부탁한다는 말과 죽은 뒤에 황제가 아닌 황후로 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억울하게 자신의 손에 죽었던 폐황후 왕 씨의 일가 역시 사면 복권해달라 간청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 명하였다. 705년 음력 11월 2일, 거의 반 세기 동안 천하를 다스렸던 여걸인, 측천 성신대 황제 무조는 장안 상양 궁 선거전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는 비록 잔혹한 정치를 펼쳤으나, 이러한 그의 정치는 당 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이후 성공한 정치를 펼쳐, 훗날 당 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무씨는 본래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이를 대신하여 무주를 세웠기에 역적으로서 태묘(太廟)에서 제사 지낼 수 없었으나, 그의 두 아들이 모두 황위에 오른 이후 예종의 후손들이 황위를 계속 물려받았기 때문에 무주의 황제가 아닌 당나라의 황후로서 태묘에 봉인되어 제사를 받을 수 있었다.

황제 신분으로 올린 존호는 자 씨 월고 금륜 성신 황제이며, 후에 개칭하여 천책금륜성신 황제로 존호를 고쳤으며, 태상황 신분으로 받은 존호는 측천 대성황 제이다.

사후에 당나라 황후로 신분이 복원되어 시호를 측천 대성 황후로 올렸으며, 후에 천후, 대성 천후, 천 후성제 등으로 개칭하였고, 최종적으로 올린 정식 시호는 측천 순성 황후이다.

능호는 고종과 합장된 건릉이다.

개원 4년(716년) 측천무후의 아들이었던 태상황 예종이 사망하자 현종은 무측천의 시호에서 황제를 제외하고 무측천의 정책을 부정했으며 그녀나 무씨 일족에 의해 숙청된 자들의 명예회복을 실시하였다.

후세 중국 사회나 문인 사회에서 측천무후는 여성으로서 군주의 권한 위에 군림하면서 당의 황위를 찬탈하였다는 부정적 평가가 이어졌고, 찬탈에 실패한 위황후의 행실과 함께 '무위의 화'라 부르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치세 중의 사적에 대해서도 그녀가 정치를 펼쳤던 시대에 떠돌거나 도망친 호수가 늘어나는 등 전적 파악이 등한시되고 은전이 늘어나 균전제를 실시하기 곤란해졌으며, 측천무후 자신의 씨족을 요직에 앉혀서 정치를 좌지우지한 것에 대해서도 혹평되고 있다.

한편으로 그녀가 권력을 쥐었던 시기에 중국에서 농민반란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정관 말기의 호수가 줄지 않고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민중의 생활은 그전보다 안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나아가 그녀의 인재 등용 능력은 측천무후를 혹평했던 후세의 역사가들도 인정하는 것으로, 측천무후에 의해 등용되었던 인재들이 현종 시대 개원의 치를 이끌었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또한 전근대의 사학자들 가운데서도 밝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평했던 남송의 홍매나 여자 중의 영명한 군주라 부르며 현상 유지나 구습 타파에 대해 호평한 청대의 조익처럼 무측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도 존재한다.

 

중국의 주석 마오쩌둥의 부인으로 문화 대혁명을 지휘했던 장칭에 이르러서는 마오 사후 후계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명실공히 중국의 국정을 쥐었던 측천무후를 자신에게 겹쳐서 이를 칭찬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장칭과 문혁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부정되었으나 무측천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속 텔레비전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다.


1781년 - 프랑스의 의사 르네 라에네크

1798년 - 프랑스의 철학자 오귀스트 꽁트.

1820년 - 벨기에의 음악가 앙리 비외탕.

1869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이동녕.

독립 운동가 석오 이동녕 선생

이동녕(1869년 2월 17일 ~ 1940년 3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언론인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고,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을 지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 대통령 직무대리. 주석. 국무위원, 임시 의정원 의장 등으로 활동했다. 신흥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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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천안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충청도 청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28살 되던 해에(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하였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 간사원에 선출되었다. 독립협회 활동 당시 그는 이석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다음 해 경성에서 만민공동회가 열렸을 때 상동교회의 청년 지사들과 함께 나라의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임금께 상소하는 등 국민운동 일선에 나섰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이승만. 이준과 함께 투옥되었다. 이승만과는 이때 이후 친숙한 동지가 되었다.

1898년에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그는 옥파 이종일이 경영하는 제국신문에 입사, 제국신문에 사설을 집필하였다.

1902년에 이상재와 손잡고 YMCA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에는 한일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서울 상동 교회에서 전덕기. 양기탁. 신채호. 조성환과 같이 청년회를 조직한 뒤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구. 이회영을 알게 되었다. 다음 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그는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이 조약이 체결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여 2개월간 다시 투옥 생활을 감수하였다.

 

이동녕(가운데)을 비롯한 임시정부 주요인사들

그가 감옥에서 나오자, 1906년 만주 북간도로 망명, 이상설과 함께 한국 최초의 해외 사립학교인 서전 의숙을 설립, 한국 동포의 2세의 민족교육을 본격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뒷날 독립운동의 기수들을 길러냈다. 이때 이상설이 2명의 특사와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다녀오는 길을 수행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김구. 전덕기. 양기탁. 이동휘. 이갑. 유동열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1907년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청년학우회 총무로 선출되었다.

또한 그는 안창호. 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 공립협회와 대한매일신보의 조직과 발행을 지원하였다. 한편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함에 있어서도 크게 조력하였고, 상동 학교의 교사로 재직한 일도 있었다. 삼원보에 망명하여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형제 및 이상룡과 함께 한국인 자치기관인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교포들의 신분보장과 독립정신 고취에 앞장섰다.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상설 등과 함께 권업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고, 대동신문, 해조신문을 발행하는데 참여하였다.

이상설의 알선으로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 보 스타 빈이 약속한 한국 군관 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 3개월간 투옥 생활로 고초를 겪었다. 1915년 그의 나이 47세 때 이상설 · 이동휘 등과 함께 독립운동가의 사업기관으로 권업회를 조직,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 보급하였다 그가 49세되던 1917년에는 노령 니콜라에 프스크에서 나철이 창시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독립의 가능성을 타진하였다.

1918년 11월에는 길림성에서 대종교 김교헌 외에 조소앙 · 조완구·김좌진·여준 등과 독립선언서(무오 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국내에서 3·1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 의정원의 초대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석오이동녕기념관에 전시된 친필 휘호 산류천석 (산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이 담겨있다. - 이미지출처 천안시

1919년 4월 11일 동지들과 임시 정부 수립을 내외에 선포하고 이승만이 부임치 않자 국무총리로 취임, 임정의 터줏대감이 되었다. 그해 9월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자 그는 내무부 총장에 선임되었다. 11월 '남녀 학생에게'라는 격문,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라는 격문을 배포, 황종화. 최 익무 등의 정보원들을 통해 국내에 잠입, 살포케 하였다.

1920년 이동휘가 사임하자 그는 국무총리 대리를 맡아 임정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국민대표회의 소집 등 임정 불신이 표면에 나타나자 그는 안창호. 여운형. 조소앙. 이시영. 차이석. 홍진. 노백린 등과 시사책진회를 조직 대동단결을 호소하였다.

1924년 그는 국무총리로 정식 취임하였고 9월 군무총장도 겸임하였으며, 이승만의 장기 궐석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대통령 직권을 대행하였다. 이때 조선총독이 한국인을 시켜 그에게 귀화를 권유하였으나 즉석에서 일축, 이로 인해 그 부친이 투옥된 일도 있었다. 1925년에 두 번째로 의정원 의장이 되었고, 1924년 8월 17일의 임시의정원의 대통령 유고 안 재의심의위원회는 6월 16일의 임시의정원의 대통령 유고 결의가 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로써 국무총리 이동녕이 대통령 권한을 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동녕도 1924년 12월 11일 '민정식 사건'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 대리직에서 사퇴하였다. 1925년 8월 이동녕은 이건규 외 10명에게 의뢰하여 국내에 밀파하였다. 이건규 외 10명은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일경에 체포되어 모두 대구 경찰서에 수감되고 독립군자금 모금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926년에는 국무령에 지목된 양기탁, 안창호가 거절하면서 의정원 의장으로 국무령이 되었다. 이때 58세인 그는 법무총장도 겸임 2차 개헌에 따른 국무령 지도체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1927년 3월 임정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그해 그는 임정의 주석이 되어 약화된 임정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1927년 8월 19일 임시정부에서 임시 약헌을 발표할 때 의정원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주석과 국무위원 겸 법무장을 겸임하였다.

1929년 10월 세 번째로 의정원 의장이 되어 임정의 존폐위기를 겨우 극복하고, 두 번째의 임정 주석이 됨으로써 중책을 짊어졌다.

1930년 1월 김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 그 이사장에 추대되었으며, 당 기관지 한보·한성을 발행하였다. 1930년 11월 6일 임시정부 주석과 국무위원 겸 재무장에 재선출되었고, 임시의정원 의장을 겸임하였다.

쓰촨성 치장 현에 위치했던 이동녕의 묘

1932년에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김구·이유필 등과 지도, 쾌거를 이루었다. 이로 인해 민필호 등의 주선에 따라 임정 요인과 같이 절강성 가흥 수륜 사창으로 피신하였다. 

1935년 10월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 되었다.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여 1939년 9월까지 재임했다. 11월 한국국민당의 초대 당수로 선출되었다.

1937년에는 한국국민당 대표로 대한 광복 진선을 구축하고 그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9년 10월 25일의 임정 국무회의에서 그는 임정의 네 번째 주석이 됨으로써 김구와 합심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 서안에 대한 국사단을 파견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중 1940년 3월 13일 쓰촨 성 기강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장례는 임시정부 국장으로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 1993년에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에 이동녕 집 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2019년 3월 13일 순국 79주기를 맞아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석오 이동녕 선양회 주관 추모식 및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고, 석오 이동녕 선생 서훈 등급 상향(1등급)을 청와대 청원을 2019년 4월 10일까지 진행하였다.


1923년 - 북한 정치인 출신으로 대한민국에 귀화한 황장엽.

1932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박성용.

1963년 - 미국의 농구 선수 마이클 조던.

1968년 - 중국의 반체제 인사 우얼카이시.

1971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아나운서 임경진. / 대한민국의 개그맨 신동엽.

1972년 - 미국의 음악가 빌리 조 암스트롱. / 대한민국의 배우 이세창. / 미국의 음악가 테일러 호킨스.

1975년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하리수.

1976년 - 대한민국의 가수, 뮤지컬 배우 고영욱.

1979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축구 선수 쉬윈룽.

1980년 - 대한민국의 플로리스트 문정원. / 일본의 성우 엔도 아야. / 대한민국의 배우 홍은희.

1981년 - 미국의 배우 조셉고든 레빗.

1984년 - 대한민국의 배우 장신영.

198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장우람.

1987년 - 대한민국의 가수 씨야의 이보람.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천세라.

1988년 - 나타샤 캄푸쉬 유괴사건의 피해여성, 영화 3096일의 배경이 된 실제 사건의 주인공 나탸샤 캄푸쉬(Natascha Kampusch)

1991년 - 영국의 음악가 에드 시런

사망

364년 - 로마 황제 요비아누스.

647년 - 신라(新羅) 27대 왕 선덕여왕(善德女王).

1600년 - 이탈리아 사상가, 철학자, 천문학자 조르다노 부르노.

1609년 - 토스카나의 대공 페르디난도 1세.

1673년 - 프랑스의 극작가 몰리에르.

1736년 - 스웨덴의 정치가 안드레아스 웅에.

1856년 - 독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1905년 - 러시아 대공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1909년 - 인디언 최후의 전사 제로니모.

1921년 - 조선의 신념형 친일파 민원식.

1937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고이허.

고이허(1902년 9월 5일 ~ 1937년 2월 17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최용성이다.
 
황해도 수안 출신이다. 경성부의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여 학생 운동을 시작했다.

1922년 배재고보를 졸업한 뒤 곧바로 만주에 망명하였다. 지린에서 계몽 운동과 농촌 개발 운동을 벌이던 김진호와 변창근을 만나 화이더농우회에 가담해 활동했다. 이때 화이더농우회에는 화이더 현 우자쯔의 삼성학교 교사 최일천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정의부에서 일하던 김진호의 소개로 1925년 정의부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삼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항일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9년 참의부, 신민부와 정의부의 3부 통합 운동에 적극 나서 삼부가 함께 조직한 국민부에 참가하여 청년 조직을 담당했고, 지도 조직인 조선혁명당, 무장 투쟁을 위한 조선혁명군도 결성했다. 조선혁명군은 1932년 사령관 김관웅, 부사령관 장세용 등이 한꺼번에 체포되었으나, 그는 양세봉 등 살아남은 인사들과 함께 조선혁명당과 조선혁명군을 재정비하고 1932년 조선혁명군 총사령이던 양세봉이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자 중앙집행위원장 대리로 고군분투했다.

1936년 12월 경 남만주의 콴뎬 현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에 체포되었다가, 다음해 2월 펑톈(현 선양)에서 총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고이허는 김일성의 초기 활동 공간과 겹치는 지역에서 활동했으며, 사회주의적 성향을 띤 이론가이면서도 1929년 몽치단 사건 이후 국민부 우파로 분류되면서 김일성과 대립했던 인물이라 북한에서는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52년 - 북한의 군인 박종근.

1976년 - 대한민국의 화가 변관식.

2014년 - 대한민국의 영화배우 황정순.

2014년 - 독일의 정치인이자 외교관, 42차 유엔 총회 의장 페터 플로린

2014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지수.

2019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이진설.

2019년 - 일본의 성우 사사키 스미에.

 

기념일

독립 기념일: 코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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