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이야기 2월 18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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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30년 -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가 명왕성을 발견함.

1951년 - 네팔, 영국으로부터 독립.

1981년 -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신경제정책인 레이거노믹스 발표.

2003년 -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에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하여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당하다.

방화로 전소된 지하철 내부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2003년 2월 18일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중앙로역에서 김대한의 방화로 일어난 화재 참사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명 피해가 큰 철도사고이다. 1995년 아제르바이잔 지하철 화재 참사,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함께 세계 3대 최악의 지하철 사고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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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대구 지하철 참사, 2.18 참사, 김대한 방화 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로 인해 2개 편성 12량(6량 × 2 편성, 1079, 1080 열차)의 전동차가 모두 불타고 뼈대만 남았으며, 192명의 사망자와 21명의 실종자 그리고 148명의 부상자라는,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앙로역도 불에 타서 2003년 12월 30일까지 복구를 위해 영업을 중지했다.

방화범 김대한(당시 56세)은 개인택시 운전을 하다가 우울증세를 보여 대구 시내 한 병원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4월에는 뇌졸중이 겹쳐 상. 하반신 마비증세로 11월 지체장애 2급 판정으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생계를 이어 왔던 개인택시를 무작정 세워둔 채 증세가 호전될 가망이 없자 김대한은 세상을 비관, 안방에서 1회용 라이터 2개와 자동차 세척 샴푸통(용량 4리터의 흰색 플라스틱 통)을 꺼내 검은색 가방에 넣고 집을 나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송현역 부근에서 내린 다음 인근 주유소에서 휘발유 7,500원어치 상당을 구입하여 샴푸 통에 담았다. 그리고 1호선 송현역으로 들어가 안심방향 승강장에서 9시 30분경 안심역 방면으로 운행되는 1079 열차의 1호차에 탑승하였다.

9시 53분경, 1079 열차가 반월당역을 출발해 중앙로역에 도착할 무렵 2호차와 가까운 1호차 노약자석 옆 일반석에 앉아 있던 김대한은 1회용 가스라이터를 꺼내 불을 켜려고 망설이던 중 맞은편에 앉은 승객으로부터 "왜 자꾸 불을 켜려고 하느냐"는 나무라는 말을 듣자 순간적으로 불을 붙이기로 결심하고, 1회용 가스라이터를 켠 다음 샴푸통에 들어 있는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방화범 김대한 씨 옷에 순식간에 불이 붙자 황급하게 가방을 객실 바닥에 던졌고 불길은 더욱 순식간에 객실 내로 번지면서 화재가 확산되었다. 불길이 번지자 승객들은 우왕좌왕하며 황급히 대피하는 등 혼란이 일어났다. 1079 열차 기관사 최정환은 중앙로역에 도착해 출입문을 연 뒤 "불이야!" 하는 소리를 듣고, 운전실 앞에 있는 CCTV 화면에 객차 쪽에서 승객들이 서둘러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고 운전실 옆에 있는 소화기를 들고 나와 불을 끄려 했지만 가연성 소재로 가득한 전동차 객실 내부의 불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승객들에게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9시 55분 30초 경 1079 열차와 반대방향 대곡 방면으로 운행하는 1080 열차가 대구역을 출발하여, 9시 56분 45초 경 현장 상황을 알지 못한 채 상행선 승강장에 진입하여 정차함으로써 1079 열차에서 발생한 불길이 순식간에 1080 열차로 옮겨 붙으면서 화재가 더욱 확산되었다.

화재 발생 20여 초 만에 대구지하철 공사 종합사령실에 설치되어 있던 승강장 감시용 CCTV의 화면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검은 연기와 유독가스 분출량이 많았던 것으로 판단되며, 화재가 진행되면서 지하 3층 승강장과 1079, 1080의 두 열차 내부는 유독가스와 화재로 인한 열기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대피하거나 우왕좌왕하는 등 아수라장이 되었다.

1079 열차의 승객 대부분은 정차 중으로 문이 열려 있었고 기관사가 승객들에게 대피를 지시하여 대피한 반면, 반대방향으로 운행 중이던 1080 열차는 화재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역에 진입, 정차함에 따라 화재가 확산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1080열차의 경우 중앙로역에 진입할 때 이미 승강장의 연기로 인해 전동차 외부의 시야가 전혀 확보되지 않았었으며, 1079열차 1호차와 인접한 1080열차 5~6호차의 승객들은 전동차가 중앙로역에 정차 후 전동차 외부 상황에 대해 알 수 없을 만큼 이미 화재로 인한 연기가 지하 3층 승강장에 꽉 차 있는 상태였다. 다만 불행 중 다행으로 1080 열차에 타고 있던 대구선의 권춘섭 역장이 비상 개방 장치를 취급하여 문을 열고 주위 승객들을 대피시켜 피해를 다소나마 줄일 수 있었다. 훗날 권 씨는 이 활동을 인정받아 2013년 6월 7일 개설된 철도안전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다.

사고 당시 화재가 처음 화재 발생한 안심행 1079 열차에는 방화범을 포함한 250여 명이, 대곡행 1080 열차에는 180여 명의 승객이 탑승했었다.

지하철에서 불이 나자 중앙로역 일대는 유독가스로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으며, 환풍구와 출입구 등에서 나온 시커먼 연기는 시내 전체를 뒤덮어 앞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정도였으며, 사고소식을 접한 뒤 가족들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사람들과 지켜보는 시민들로 아수라장을 이뤘다.

또한, 지하철에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승객 가족들은 현장에 나와 오열하였고, 일부 가족들은 경북대학교 병원과 동산병원 등을 뛰어다니다 눈물을 흘리며 현장으로 되돌아오기도 하였으며, 사고 수습대책본부와 언론사에는 사고 경위와 사상자 명단을 알 수 없겠냐는 문의전화가 쇄도하였다.

사고가 나자 경찰관과 소방관이 긴급 출동하여 현장지휘소를 설치함과 동시에 중앙로 일대 차량 출입을 전면 통제하고, 소방인력과 장비를 동원하여 화재 진화와 구조작업을 펼쳤으나, 화염과 유독가스로 현장접근이 힘들어 구조가 지연되자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은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대구 지하철 중앙로역 화재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는 사망자 192명, 부상자 151명으로 총 343명에 달한다. 사망자 192명 중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가 185명, 신원 미확인 사망자 6명, 인정사망 1명이었다. 신원미확인 사망자 6명 중에서 DNA가 확인된 사망자가 3명, DNA 확인이 불가능한 사망자가 3명이었다.

실종자로 접수된 사람은 총 619명이었고 이 가운데 생존 380명, 지하철 화재사고와 무관한 사망 60명 지하철 사고 부상자 4명 기타 54명 을 제외하고 121명의 인정사망 심사를 하였고 인정사망 심사에서 확정 사망 99명, 인정사망 1명, 불인정 20명, 판단 유보 1명으로 결정하였다.

화재로 그을린 벽에 쓰인 추모글

 

 

■ 인명피해

2.18 대구지하철 참사 신원확인불능 A26-ca03, A24-ca08의 묘
2.18 대구지하철 참사 신원확인불능 K42의 묘
2.18 대구지하철 참사 신원확인불능 K14의 묘
2.18 대구지하철 참사 DNA 감정 확인 미신고 K35(여) 의 묘
2.18 대구지하철 참사 DNA 감정 확인 미신고 K05(여) 의 묘
2.18 대구지하철 참사 DNA감정 확인 미신고 D08-ca01의 묘

사망자 - 186명(신원 미확인 사망자 6명 제외) - 남자:61명, 여자:125명
부상자 - 151명(법적 보상 제외 자포함) - 남자:80명, 여자:71명

 

연령별
사망자 186명 - 0~9세: 4명, 10~19세: 30명, 20~29세: 52명, 30~39세: 28명, 40~49세: 15명, 50~59세: 28명, 60세 이상: 29명
부상자 151명 - 0~9세: 3명, 10~19세: 18명, 20~29세: 38명, 30~39세: 39명, 40~49세: 30명, 50~59세: 12명, 60세 이상: 11명


직업별
사망자 186명 - 무직: 29명, 학생: 47명, 가사: 26명, 자영업: 11명, 일용직: 2명, 회사원: 15명, 공무원, 교사: 5명, 기타: 51명
부상자 151명 - 무직: 5명, 학생: 29명, 가사: 37명, 자영업: 10명, 일용직: 17명, 회사원: 32명, 공무원, 교사: 14명, 기타: 7명


지역별
사망자 186명 - 중구: 1명, 동구: 92명, 남구: 4명, 북구: 8명, 수성구: 6명, 달서구: 8명, 달성군: 2명, 경북: 48명, 기타: 17명
부상자 151명 - 중구: 2명, 동구: 78명, 서구: 5명, 남구: 11명, 북구: 10명, 수성구: 6명, 달서구: 13명, 달성군: 6명, 경북: 14명, 기타: 6명


지하철이 대중교통수단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고 발생시간이 오전 9시 53분경으로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바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인명피해의 규모가 컸다.

사상자 가운데 동구 주민이 가장 많았던 것은 안심역에서 출발한 1080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의 인명피해가 컸고, 달서구 대곡역에서 동구 안심역으로 가던 1079 열차에 동구 지역 주민들이 많이 탑승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한, 청~장년층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것은 시기적으로 봄방학 기간이었던 점과 사고 당일 계명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가족이 함께 탑승하였다가 사고를 당한 사례가 18 가족이나 되어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하였다.

이번 지하철 사고에서는 부-모, 모-자, 처-자 등 1가구에 2명 이상의 가족이 동시에 참변을 당한 유가족이 12가구나 되었으며, 특히 두 딸을 동시에 잃었던 모친 김 00의 경우 보상 합의 후 두 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천도제를 지내기 위해 경남에 있는 한 사찰을 찾았다가 9월 한반도 남부를 강타한 태풍 "매미"로 인해 사찰 내 요사체가 붕괴되면서 모친도 두 딸의 뒤를 따라간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2004년 - 울산광역시의 시내버스 기업 경진여객이 폐업하여 사업면허가 취소되었다.

2006년 - 용산 초등학생 성폭행 살해사건이 발생하였다.

용산 초등학생 성폭행 살해 사건은 2006년 2월 18일 심부름을 하러 갔던 당시 10세 초등학생 허미연 양이 김장호(당시 53세, 남성)에게 살해되어 경기도 포천시의 한 공터에서 불태워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2006년 2월 18일 토요일, 서울시 용산구 용문동에 거주하는 10세 허미연 양이 집 앞 비디오 가게에 테이프를 반납하러 갔다가 실종되었다. 피해 어린이는 실종 신고 16시간 만에 경기도 포천시의 한 창고 옆 공터에서 목 주변이 흉기로 찔리고 온몸이 불에 심하게 손상된 채로 살해되어 발견되었다.

범인은 인근의 신발 가게 주인인 김장호로 밝혀졌다. 김 씨는 비디오를 반납하러 가던 피해 어린이에게 신발을 공짜로 주겠다면서 접근하여 성폭행을 시도하려다 피해 어린이가 소리를 지르면서 저항하는 바람에, 피해 어린이를 목졸라 살해하고 목 주변을 흉기로 찔렀다. 김장호는 공범인 아들 김범진과 함께 시신을 경기도 포천시의 한 공터로 옮겨 불태웠다.

김 씨는 현장 검증을 하면서도 담담히 사건을 재현하고 아들의 선처를 호소하였다. 허 양의 부모는 재판이 끝난 후 곧바로 항소하겠다고 밝혔으며, 피해 어린이의 할머니와 함께 현장 검증을 지켜보던 인근 주민과 상인 150여 명은 이런 김 씨의 모습에 경악하였다. 김 씨는 당시 사건 이전인 2005년 7월 4세 어린이를 성추행하여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당시 재판을 방청했던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은 "무기징역 선고는 성범죄에 대한 관대한 처벌 관행에 쐐기를 박은 과감한 판단"이라면서 "대한민국 차원에서 우리 아이들을 보호하고 이런 범죄가 재발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2006년 4월 13일, 서울 서부지방법원 제11형사부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서 김윤권 부장판사는 가해자 김장호에게 무기징역을, 공범 김범진에게 징역 3년의 판결을 내렸다. 피해 어린이의 부모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국가와 김장호 부자를 상대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다. 김장호는 원심에 승복하지 않고 항소하여 2006년 8월 13일 2심이 열렸다. 2심에서도 원심과 같이 김장호에게는 무기징역을, 김범진에게는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이에 김범진은 상고를 포기하였고, 11월에 열린 3심에서 김장호에 대한 선고는 원심 그대로 확정되었다.


2008년 - 마포 일가족 실종사건이 발생하였다.

2014년 - 필리핀 앙헬레스에서 한국인 관광객 1명이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

 

 

 

 

 

문화

1910년 -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 경성 고등 연예관 개관.

1910년 경성고등연예관 전단지

경성 고등 연예관은 1910년 2월 18일에 개관한 조선 최초의 상설영화관이다.

1910년 2월 18일, 경성고등연예관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위치는 현재의 을지로 2가 외환은행 본점 옆 자리인 황금정 63통 7호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11년 8월경 황금정 도로확장으로 건물이 헐리게 되자 황금정 3번지로 장소를 옮겨 다시 신축되었다. 경성 고등 연예관을 소유하고 있던 인물은 영화배급사였던 K 다이아몬드사와 관련 있던 가네하라 긴조였다. 내부는 이른바 ‘기석’이라는 일본식이었고, 2층은 다다미, 아래층 객석은 긴 의자로 배치하였다. 수용인원은 4~5백 명 정도였고, 건물의 외관이나 내부 설비를 현대적으로 구비하였다. 또한 ‘요시자와 상점’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 영사기사를 영화 상영을 위해 고정배치하였고, 프랑스 ‘파테 회사’의 영사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현대적 시설을 갖춘 탓에 경성 고등 연예관의 입장료는 이전의 다른 극장들에 비해 큰 폭으로 인상되었는데 특등석은 1원을 받았다. 이 요금은 극장 입장료로서는 가장 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이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경성고등연예관의 영화상영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경성고등연예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관심거리가 되자 고종황제가 이들을 궁내로 초대해 정부관리와 황실 인사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주 와다나베에게 하사금을 주어 격려하기도 했다. 황제가 일반극장의 영사시설을 궁내로 불러들여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 주인에게 하사금까지 주었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경성고등연예관은 당시 서울에서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1912년 7월에는 『매일신보』의 평양지국개설을 기념하는 영화상영회를 평양에서 열기도 했는데, 이 행사 역시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는 사실이 당시의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경성고등연예관 측은 지방순회상영을 시도함으로써 영업의 범위를 넓혀나가기 시작했지만 그 같은 순회상영은 1912년 8월의 메이지 천황 사망을 계기로 곧 중단되었다.

경성고등연예관의 존속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11년 8월경에 서울에서 영화장비의 판매와 영화 제작, 극장 운영 등의 사업을 시작한 금원 상회가 경성 고등 연예관을 매입함으로써 경성고등연예관은 금원상회의 ‘연예관’에 흡수되었다. 영업상태가 양호하던 극장이 왜 매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금원상회’로 소유권이 넘어간 후에도 계속해서 영화상영극장으로 운영되다가, 1912년 7월 말경에 구리개 일대의 도로확장 공사가 진행되면서 건물 일부가 헐리게 되자 이를 계기로 건물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이에 따라 이 극장은 1913년 1월 1일부터 새로 개관하고 영업을 계속했으나 이듬해인 1914년에는 운영권이 다시 ‘대정관’으로 넘어갔다. 경성고등연예관을 사들인 ‘대정관’은 이를 ‘제2대 정관’으로 이름을 변경함으로써 ‘경성 고등 연예관’은 없어지고 말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제2대 정관’은 조선인을 상대로 운영되었으나, ‘대정관’과 ‘우미관’ 극장주들 사이에 사업적 협상이 맺어짐에 따라 ‘제2대정관’은 다시 ‘세계관’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영업대상도 일본인을 주로 상대하는 극장으로 전환시켰다.

영화 극장 사적 측면에서 본다면 경성 고등 연예관은 존속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본격적인 영화 전문극장으로는 첫 장을 열었으며 존속기간 동안에는 상업적인 흥행의 중심지 역할을 함으로써 조선에 영화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극장의 소유주가 일본인이며, 일본 자본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일본인이 조선의 영화시장을 본격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경성 고등 연예관’은 그것의 구체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010년 - 서울 지하철 3호선의 연장 구간인 수서역에서 오금역까지 연장·개통했다.

2019년 - MBC ON 개국.

 

 

 

 

 

탄생

1516년 - 영국 메리 1세, 잉글랜드 왕국 및 아일랜드 왕국의 여왕

1530년 - 일본의 센고쿠 시대 장수 우에스기 겐신
 
1745년 -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알레산드로 볼타

1883년 - 그리스의 소설가, 시인 니코스 카잔차키스

1896년 -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

1898년 - 이탈리아의 페라리 창립자 엔초 페라리

엔초 안셀모 페라리(1898년 2월 18일 ~ 1988년 8월 14일)는 이탈리아의 기업인으로, 페라리의 창립자이자 F1 자동차 경주팀 스쿠데리아 페라리의 창설자이다.

1898년에 이탈리아의 모데나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나, 10살 때 우연히 볼로냐에서 열린 자동차 레이스를 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13살 때부터 운전을 배우기 시작하여 16세에는 스포츠 신문에 축구 기사를 기고하면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포병으로 입대하였으나, 1916년 아버지 알프레도 시니어와 형 알프레도 주니어가 독감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20세에 모 자동차 회사의 트럭 운전사로 취직하였으며, 그러던 중 이탈리아 최고의 레이서 중 한 명인 펠리체 나 차로를 만나 그의 소개로 밀라노의 스포츠카 제조사 CMN(Costruzioni Meccaniche Nazionali)으로 직장을 옮기고 운전 실력을 인정받아 레이싱에 데뷔하게 된다.

1920년에 알파 로메오 팀에 입단 후, 점점 두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다. 이후, 유능한 인재들과 함께 알파 로메오 P1 차량을 개조한 P2로 많은 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이탈리아의 명문인 피아트 사까지 누르면서 엔초는 마침내 일인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1929년에는 마구간을 뜻하는 '스쿠데리아 페라리'라는 자신의 공장을 차려 진정한 페라리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이 때문에 오늘날의 페라리 엠블럼에는 말 그림과 함께 "SF"라는 영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이 바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를 뜻하는 약자이다. 1939년에는 스쿠데리아 팀을 흡수하면서 자신을 내쫓으려는 알파 로메오를 뛰쳐나와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다. 1940년에는 첫 생산 차량인 Tipo 815를 만들었지만,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알파 로메오 와의 계약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딴 레이싱카를 생산할 수 없었다. 1947년에는 드디어 페라리의 진가가 그랑프리와 르망 24시 레이스에서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시작했고, 1988년까지 무려 5,000번이라는 우승 타이틀을 거머쥘 정도로 스쿠데리아 페라리는 막강한 팀으로 성장하게 된다.

1988년 8월 14일 마지막 역작인 페라리 F40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1913년 - 대한민국의 동양화가 김기창

1931년 - 미국의 소설가 토니 모리슨

1933년 - 일본의 설치미술가 오노 요코 / 영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보비 롭슨

1949년 - 前 KBO 사무총장, 前 KBS, KBS N 스포츠의 야구해설위원 하일성

1953년 - 대한민국의 언어학자 김두식

1954년 - 미국의 영화 배우 존 트래볼타

1957년 - 미국의 배우, 휠 오브 포춘의 사회자 바나 화이트

1958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현식.

1961년 - 일본의 가수 가게야마 히로노부.

1963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상훈. / 스웨덴의 축구인 안데르스 프리스크.

1965년 - 미국의 랩 가수, 프로듀서, 기업가 닥터 드레

1967년 - 미국의 애니메이터 겸 성우 토니 안셀모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로베르토 바조

1973년 - 프랑스의 축구 선수 클로드 마켈렐레

1975년 - 영국의 축구 선수 게리 네빌

1978년 - 크로아티아의 축구 선수 요시프 시무니치

1981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재원.

1984년 - 카메룬의 축구 선수 이드리스 카를로스 카메니.

1985년 - 대한민국의 배우 송재림.

1987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신아영. / 대한민국의 스케이트 선수 성시백.

1988년 - 대한민국의 가수 최강창민 (동방신기).

1990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신혜. / 대한민국의 배우 강소라.

1991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성민

1992년 - 중국의 배우 야오왕

1994년 - 대한민국의 래퍼 제이홉 (방탄소년단).

1997년 - 대한민국의 가수 도겸 (세븐틴).

1998년 - 미국의 래퍼 버논 (세븐틴).

 

 

 

 

 

사망

1405년 - 티무르 제국의 창시자 티무르

1546년 -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1564년 - 이탈리아 화가이자 건축가 미켈란젤로

천지창조 (시스티나 성당)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대표적 조각가, 건축가, 화가, 그리고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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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유년 시절부터 조토와 마사치오의 작품들을 습작하며 그림에 많은 관심을 쏟아 집안에서 자주 꾸중을 들었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에 의하면 , 소년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에서 아버지를 설득한 덕분에 미켈란젤로는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고, 13세 때 화가 도메니코에게서 그림을 배웠다. 14세 때부터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베르트르드 디 조반니를 통하여 도나텔로 작풍을 배웠다. 또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돔, 성 베드로 대성전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 니니의 피에타 등 세 조상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89세를 일기로, 외롭고 괴로운 긴 생애를 로마에서 마쳤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의 위탁으로 다비드를 즉 소년 다윗 조각을 3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계속하여 원형 부조인 성 모자를 만들고, 원형화 성 가족을 그렸다. 1504년 피렌체 시청의 위촉으로 대회장의 벽화 카시나 수중 접전도를 그리게 되었는데, 맞은편 벽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앙기아리 기마 접전도를 그렸으므로 경쟁을 하게 되었다.

1508년 바티칸 사도 궁전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고 허리가 꺾이는 듯한 고통에도 4년 만에 완성하였다. 1520년 메디치가 성당의 묘비를 10년에 걸쳐 조각하는 한편, 산 로렌초 성당 부속 도서관 입구를 건축하였으며, 1529년 독일 카를 5세 군의 피렌체 포위 때 방위 위원으로 뽑혀 성을 쌓았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에 의하면, 카를 5세는 성을 쌓아서 자신과 싸운 미켈란젤로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존중하였기 때문이다.


후에 메디치 가의 폭군 알레산드로와 사이가 나빠져, 1534년 고향인 피렌체를 영원히 떠났다. 계몽사에서 출판한 미켈란젤로에 의하면 같이 일한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임금으로 대신할 것을 부탁하고 떠났다 한다. 로마로 옮긴 그는 새로운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경당의 정면 대벽화를 위촉받고, 노령으로 발판 위에서 떨어져 가면서까지 혼자 꾸준히 그려 6년에 걸쳐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였다.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의 실력을 존중하여, 어느 추기경이 미켈란젤로를 무지하다고 업신여기자, "무식한 것은 추기경님입니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며 편들어주었다 한다.

1550년 성구실인 바티칸 바오로 경당의 벽화 바오로의 회심(그림은 다음 블로그에서 확인, 1549년)과 십자가의 베드로(1550년,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처형되는 순교 그림. 카라바조가 그린 그림도 있다.)를 완성하였다.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로마 가톨릭의 출발점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그려줄 것을 부탁했고, 미켈란젤로는 두 성인의 그림을 그리면서 로마 가톨릭의 지도자인 교종들을 비판하는 뜻을 담아냈다.

그의 예술은 인생의 고뇌, 사회의 부정과 대결한 분노, 신앙을 미적으로 잘 조화시킨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여러 지역에 주거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고객으로 하는 고급화가였다.

1505년에 미켈란젤로는 새로 임명된 교황 율리오 2세의 초대로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교황의 묘를 짓는 일에 위촉되었고, 40개의 조각을 만들어야 하는 방대한 양의 작업이 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에게는 평생의 부담으로 남았다. 교황의 후원받긴 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작업 외에도 수많은 다른 작업들이 있었기에 무덤을 완공하는데 끊임없는 방해를 받았다. 40년 동안 묘 짓는 작업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스럽게 끝내지 못했다. 묘는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 콜리 성당에 위치하며 중앙에 놓인 1516년에 완공한 '모세' 동상으로 가장 유명하다. 묘를 위해 만든 조각상 중에서,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로 알려진 2개의 조각은 루브르 박물관에 현재 보관되고 있다.

같은 기간에,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4년에 걸쳐 작업하였다 (1508~1512). 콘디 비 설명에 의하면, 브라만테가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작업하고 있었는데,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묘 공사에 위촉되었다는 사실에 분개하다가 교황을 설득해서 미켈란젤로가 실패하도록 그에게 생소한 과제를 주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원래 천장을 지탱해주는 삼각 궁륭에 열두 제자를 그리고 천장 중앙에 장식으로 처리하라는 위촉을 받았다. 미켈란젤로는 율리 오를 설득 해 재량권을 얻고, 천지창조/인류의 타락/예언자를 통한 구원의 약속/그리스도의 계보 등 다양한 그리고 더 정교한 작품을 제시했다. 이 작업은 가톨릭 성당의 대부분의 교리를 표현하는 그림의 일부이다.

작품은 500 평방미터의 천장 전체를 아우르며, 300명 이상의 인물을 포함하고 있다. 천장 한가운데는 창세기에 나오는 9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고, 3개의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지구 창조; 하느님의 인간 창조와 하느님 은혜 밖으로 추락한 인간, 마지막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보여주는 인간의 상태. 천장을 지탱하는 삼각 궁륭에는 예수님의 오심을 예언하는 12명의 인간이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 예언자 7명과 고전 세계에 나오는 5명의 무녀. 천정벽화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아담의 창조,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 노아의 홍수, 예언자 예레미아, 그리고 쿠메의 시뷜라이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을 그림으로 장식할 것을 명한다. 미켈란젤로는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작업을 하는 경직된 자세로 일해야 하였고,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 안료로 인해 눈병도 생겼다. 1512년 마침내 작품을 완성하였다. 교회를 화려하게 수놓은 천정벽화에는 복음서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선조로 시작하여 천지창조 이야기 등 구약 성서의 네 가지 사건이 그려져 있다.


1955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및 언론계 친일파, 제2대 부통령 김성수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

김성수(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다. 전라도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한성부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전라도 부안 줄포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1914년 와세다 대학교 정치경제학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귀국 후 1915년 중앙 고등 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내는 등 교육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준비에 참여하여 자신의 집을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 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 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 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냈다. 그 뒤 5.10 단독 총선거에 찬성하였다.

1949년 민주국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 전쟁 기간인 1951년 5월부터 1952년 8월까지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재선을 추진하자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반대하는 호헌 동지회에 참여하여 통합 야당인 민주당의 창립 준비에 관여하였고, 1955년 2월 18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례와 병자성사를 받았다.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 대법원에서 거짓 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1967년 -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1981년 - 미국의 엔지니어이자 사업가, 노스롭 법인 설립자 잭 노스롭

1994년 - 대한민국의 기독교 목회자 겸 신흥 종교 연구가 탁명환

2012년 - 대한민국의 교육인 조영식

2014년 - 미국의 프로레슬링선수 넬슨 프레지어 주니어

2016년 - 일본의 소설가 쓰시마 유코

2018년 - 미국의 생물학자 권터 블로벨

2019년 - 이탈리아의 디자이너 알레산드로 멘디니

 

기념일

감비아 독립기념일: 1965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을 기념하는 날

네팔 민주주의의 날(National Democracy Day): 1951년 라나 왕조의 멸망을 기념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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