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이야기 2월 19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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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607년 - 교황 보니파시오 3세, 66대 로마 교황으로 취임.

1771년 - 샤를 메시에가 은하를 발견하여 M102로 목록에 넣음. 그러나 진위여부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음.

1945년 - 이오지마 전투가 미군의 상륙으로 시작되어 3월 26일 끝났다.

 

문화

2002년 - 미국 항공우주국 NASA의 2001 마스 오디세이 탐사선이 열 방출 이미징 시스템을 사용하여 화성 표면을 매핑하기 시작하다.

2012년 - MBC TV에서 최일구 앵커 주말 MBC 뉴스데스크 마지막 방송.

2017년 - 2017년 동계 아시안 게임이 일본 삿포로에서 개막.

 

탄생

1473년 -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1856년 - 독일의 법학자 루돌프 슈타믈러.

1865년 -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

1901년 - 영국의 군인 플로렌스 그린

1924년 - 미국의 영화배우 리 마빈.

1930년 - 미국의 영화 감독 존 프랭컨하이머.

1940년 - 투르크메니스탄의 대통령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1950년 - 대한민국의 교수 조용진.

1953년 - 아르헨티나의 전 대통령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1954년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소크라치스.

1958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장경식.

1961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배우 박순천.

여성 1호 정치인 박순천

박순천(1898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 1983년 1월 9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이며 대한민국의 저술가, 여성운동가, 정치인이다.

경상남도 동래군과 경상남도 기장군과 경상북도 고령군을 거쳐 서울특별시에 거주한 그녀는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과 서울에서 거듭 당선되면서 2, 4, 5, 6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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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10월 24일(음력 9월 10일) 경상남도 동래군에서 한학자인 박재형의 딸로 태어났다. 한때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12세에 아버지가 기장읍내에 나갔다가 일본인에게 상투가 잘린 뒤 모욕당하고 돌아왔는가 하면 기독교 교인이던 어머니가 태극기를 꺼내어 담장 아래에 묻으면서 통곡하는 것을 보고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교육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래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부산진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최초의 여학교였던 의신여학교 교사로 부임, 성경 채플 담당 교사와, 생리학 겸 동물학 교사가 되었다. 당시 일인 교사는 24원의 월급을 받고 그는 12원의 월급을 받아 일본인 교사와의 차별대우에 항의, 싸우기도 했다.

1919년 2월 박명련은 일본에서 귀국, 마산에 체류하고 있던 이갑성와 만나게 된다. 이갑성은 일본 유학생들이 2월 8일 일본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서울에서 3월에 거사 계획이 있을 것임을 알려주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3월 1일 3·1 운동이 각지에서 발생하자, 박순천도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3월 5일 박순천은 많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마산장에 나온 장꾼들에게 나눠 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 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 관헌에게 체포, 신마산에 있는 일본 헌병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3월 12일 한석규 목사와 시인 이은상, 이승규 목사(이은상의 아버지) 등의 신원보증을 받고 가석방되었다. 12일 헌병대서는 석방과 동시에 가택수색을 실시했는데 이곳에서 태극기를 비롯 독립선언서와 항거 계획, 일기장 등이 발견되자 도주, 다시 쫓기는 몸이 되어 야산으로 산행 중 밤중에 30리 길을 걸어 칠원에 도착했다.

칠원에서 3개월간 은신했다가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으나 일본 형사들의 눈을 피해 제자인 이수학의 집에 숨어있었다. 그는 마산교회 한석진목사의 따님인 한 소재의 권고로, 경찰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를 따라 기생으로 가장하고 일본으로 출국하는 데 성공하였고, 동경 기찌오까 의전에 입학하였다. 그는 평양 순의 여학교를 나와 동경유학생으로 있던 황신덕(전 중앙여고 재단 이사장)을 이때 만나 교분을 쌓았으며, 동경에 가서 그곳 일인 하숙집인 상마라는 집에 하숙하던 중, 같은 하숙생이었고 의전에 다니던 변희용을 만나게 되었다.

유학을 위장하여 일본으로 피신했으며 일본 니혼 여자대학교 사회학부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고국인 경상남도 기장에서 하숙 및 학비 등이 송금되어 왔는데 집에서는 본명인 박명련으로 송금한 것이 문제되어 3·1 운동 참가 경력이 드러나면서 국내로 압송되어 복역했다. 일본 도피 생활 중 사용한 순천댁이라는 별칭에서 '박순천'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1920년 4월 일본 우씨고매형무소에 수감되자 동경 유학생 총무였던 변희용은 면회 등 성의를 보였으며, 보안사범으로 죄수번호 98번을 부여받고 일본 형무소에서 다시 마산형무소로 이감되어 1년 4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1921년 8월 출감, 고향인 기장의 대변리로 돌아왔다. 출감 후 그는 황신덕과 함께 항공사가 되겠다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여성이라는 체력적 약점 때문에 부득이 니혼 여자 전문학교 사회학부 여공보 전과에서 유학했고 1924년 귀국, 12월 24일 서울 무교동의 태화관에서 변희용과 결혼했다.

이후 시댁인 경북 고령군으로 건너가 농사일을 하면서 마을의 조산부와 대서소를 경영하다 1939년 여성 교육에 뜻을 두고 황신덕과 함께 경성가정여숙(현 중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을 설립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박순천

기장에 여학교인 명정의숙 여 학당 설립이 논의되자 조언했다 하며 경 성가 정여숙 부교장이자 여성계와 교육계의 저명인사로서,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친일 활동을 했다. 1940년 친일 단체인 황도학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고, 1941년부터 조선임 전보 국단 주최의 강연에 연사로 참여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중 교육/학술과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다.

경 성가 정여숙 학생이었다가 조선여자 근로정신대에 지원했던 김금진의 증언을 근거로, 황신덕과 함께 '제자를 정신대로 보낸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금진이 지원해 근무한 정신대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른 여자 근로 정신대이며, 정신대 지원이 없으면 학교가 폐교된다는 협박 때문에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이므로 황신덕과 박순천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건국부녀동맹에 참가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 우익 여성 단체인 독립 촉성 애국부인회 회장(1947), 부인 신문 사장 등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종로 갑구) 총선에서 낙선하였다.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감찰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49년 대한부인회 회장, 대한 여자 청년단 단장 등을 지냈다.

1949년 8월 20일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50년 대한부인회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부산과 서울에서 거듭 당선되면서 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후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그러나 그해 말에 열린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신당 창당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후 1955년 김성수, 신익희, 윤보선, 장면, 조병옥 등과 함께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56년 부산과 1960년 서울에서 거듭 당선되면서 4대, 5대, 6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민주당의 신파 계열에서 여성 정치인의 대표 격으로 활동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피신하지 못했으나 극적으로 납북위기를 모면하였다. 1960년 7월 민의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1표를 얻었다.

1961년 5.16으로 정치활동정화법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일체의 정치활동 금지를 당했다가 63년 2월 해금되었다. 5·16 군사 정변 직후 그는 5.16이 우발적인 정변이 아니라 계획적이고 탐욕스러운 군인들의 쿠데타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윤보선 등 민주당 구파 출신이 군사 정변을 방조한 점 역시 비판하였다. 그러나 군정 측은 군인 세력이 타락한 한민당 계열과 동일한 세력 일리 없다며 반박하였다.

정치활동 금지에서 풀리면서 그는 1963년 초 민주당 재건위를 조직하여 장면, 오위영, 현석호, 조재천, 김도연 등과 함께 민주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이후 와병중인 장면을 대신하여 구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되어 재건된 민주당의 총재에 추대되었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다. 민주당이 창당되자, 총재에 피선되었고, 초기에는 대통령 후보로 나설 의향을 보였으나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해 대통령 후보 자리는 윤보선에게 양보하였다.

1963년 3월 22일 윤보선·변영태·박순천 등의 재야지도자들은 박정희의 3월 16일 군정연장 선언에 반발하여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열어 군정연장 봉쇄를 결의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1963년 10월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한 윤보선의 예방을 받았다. 1964년 민주당과 민정당이 통합되어 민중당이 설립되자 민중당 대표최고위원, 1965년 다시 민주당을 재건하고 민주당 총재가 되었다가, 1967년 범야당 통합에 참여하고, 그해 신민당 고문 등 야당의 지도자를 역임했다.

1965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강행하자 윤보선, 함석헌, 장택상 등과 함께 한일협정 반대 투쟁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소극적으로 참여하여 윤보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나중에 박정희정권에 호의적으로 변하였는데, 송건호는 그가 박정희에게 붙었다고 비판하였다.

1972년 정계를 은퇴하였으며, 근명 학교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였고 1965년 윤보선·장택상·장준하 등과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가하였으나 1970년대 이후 유신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 여사 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통령 국정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1980년 2월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선출되었고, 1981년 4월 23일 전두환에 의해 국정 자문회의 위원에 재선출되었다.

1982년 12월 29일 고혈압성 신부전증과 뇌졸중으로 연세대학교 의료원에 입원하였다가 이듬해 1월 9일에 사망했다.

그녀는 민주당 창당 후 대표최고위원을 지냈고, 장면, 곽상훈, 정일형, 이철승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5·16 직후 정치금지를 당하였다가 해제 후, 1963년 민주당을 재건하였으나, 뒤에 유신정권에서 국토통일원 고문, 육영수 여사 추모기념사업회 이사장, 대통령 국정 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본명은 박명련으로 뒤에 순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다가 1960년 박순천으로 정식 개명하였다.

"나라 일이 급한데 암탉 수닭 가리지 말고 써야지 언제 저런 병아리를 길러서 쓰겠느냐. 암탉이 낳은 병아리가 저렇게 꼬꼬댁거리니 길러서 쓰려면 아직도 멀었다"(국회에서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남성의원의 인신공격에) 1960년 40년 가명을 벗고 호적에 정식으로 박명련에서 박순천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민주당 신파의 지도자였음에도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 참여하였다 하여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송건호는 박순천과 곽상훈을 박정희 정권 말기에 변절했다고 비판한 바 있다.


1964년 - 대한민국의 심리학자 이수정.

1965년 - 미국의 기업인 클라크 헌트.

1967년 - 미국, 푸에르토리코의 영화배우 베니치오 델 토로.

1974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기상캐스터 한연수.

1975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윤희석.

1976년 - 대한민국의 前 가수 서지원.

1977년 -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잔루카 참브로타.

1979년 - 러시아의 가수 비탈리 블라다소비치 그라초프(비타스)

1983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호영 (뮤지컬배우). / 일본의 가수 및 배우 나카시마 미카.

1984년 - 미국의 영화 감독 조시 트랭크.

1986년 - 중화민국의 배우 및 가수 궈차이제.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마르타 비에이라 다 시우바. / 노르웨이의 가수 마리아 메나. / 대한민국의 배우 박공주. / 일본의 축구 선수 반다이 히로키. / 베트남의 축구 선수 부이떤쯔엉. / 스웨덴의 배우 비에른 구스타프손. / 잉글랜드의 배우 오필리아 로비본드.

1989년 - 대한민국의 배우 겸 모델 정유진.

1990년 - 대한민국의 배우 이엘리야

1993년 - 대한민국의 가수 펀치. / 대한민국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민석. / 미국의 배우 밎 가수 빅토리아 저스티스.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마우로 이카르디. /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 자라 차드라칠.

1997년 - 양볼가득 버블티 안상혁

1998년 - 한국계 미국 가수 샘 김. / 대한민국 가수 정우 (NCT).

2000년 - 일본의 가수 모리토 치사키 (컨트리걸즈, 모닝구무스메'17)

 

사망

1709년 - 일본 에도막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1821년 - 독일 언어학자 아우구스트 슐라이허

1887년 - 네덜란드 작가 물타툴리

1897년 - 독일 수학자 카를 바이어슈트라스

1931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손정도

손정도(1872년 7월 26일 ~ 1931년 2월 19일)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감리교 목사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장과 교통부 총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아들은 훗날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 및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손원일 제독이다. 윤치호 일가와는 사돈으로, 윤치호의 이복동생 윤치창이 그의 맏사위였다.

1872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 오흥리에서 손형준과 오신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아 1872년생 설, 1881년생 설, 1882년생 설이 있다. 유교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는데 손정도의 아버지 손형준은 전통적인 유림인사였으며 강서 지방에서는 명성이 높은 부농이기도 했다.

유년기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888년 사숙에 입학하여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관리 지망생이었다. 1895년 23세에 중매로 고향 이웃 아저씨인 박용의 첫째 딸 박신일과 결혼하였다. 박신일에게서 장녀 진실, 다른 이름은 원미, 차녀 성실, 장남 원일, 차남 원태, 삼녀 인실이 태어났다.

1902년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한 가정에 투숙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집이 조씨 성을 가진 목사 댁이었다. 그 날 상투 틀고 갓을 쓴 손정도는 조 아무개 목사로부터 신학문, 서구문화, 기독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유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후일 1976년 그의 장남 손원일은 손정도의 개종과정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평소 괄괄하고 열정적인 성품이었던 청년은 당장에 몸을 떠는 감동을 맛보았다. 불과 하룻밤도 안 되는 사이에 청년 손정도는 기독교에 몸을 맡기는 변신을 이룬 것이다.
기독교로의 개종을 결심한 그는 조 목사에게 부탁하여 상투를 자르고 고향 강서군으로 귀향하였다. 유교가정에서 태어난 손정도는 집안 대대로 모셔온 조상의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숴 버렸다.

사당을 철거한 이 일로 그는 친족들에 의해 패륜으로 낙인찍히고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어머니 오신도가 새벽에 그를 깨워 잠옷 바람으로 빼돌려 야간 도주를 하게 되었다. 손정도는 고향에서 도주하던 날 밤하늘에서 “도망가라 도망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즉시 아내 박신일을 대동하고 조 목사를 찾아갔고, 조 목사를 통해 평양 주재 개신교 선교사인 문요한(John Z. Moore:1874-1936)을 소개받고 면담하였다.

문요한과의 상담 후 문요한은 그를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채용하고, 동료 선교사들에게 추천하여 숭실중학교에 추천, 입학을 주선해 주었다. 손정도는 숭실중학교 5회로 입학하였다. 숭실중학교에서 그는 동기로 조만식, 선우혁 등을 만났다. 숭실중학교 재학 중 중학교 선배인 김형직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형성했다. 김형직은 후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도자 김일성의 생부였다.

졸업반이던 1907년 1월에 평양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을 때 숭실중학교 안에서 학생들이 시험 부정행위, 절도, 속임수, 험담, 불평 등을 회개할때 참여하였다. 1908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숭실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관리 지망생의 길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숭실전문학교를 중퇴하였다. 1909년 진남포 신흥리 교회의 전도사로 부임, 사역을 하면서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감리교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09년 미국 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내외국선교회”를 창립하는데 가담과 중국 선교를 시작하려 할 때 선교사를 지원했다. 1910년 만주에 감리교 선교사로 파견되어 활동했다.

1910년 정동교회에서 개최된 연회에 참석, 청나라에 파견될 감리교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어 연수차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베이징 체류 중 조성환을 만났는데 그는 안창호, 전덕기, 김구, 이동녕, 양기탁, 이승만 등이 조직한 신민회의 핵심 인원이었다. 조성환을 통해 안창호와 소개를 주고받았고 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와는 깊이 친해져서 서로 아우님, 형님 하는 호형호제 하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안창호와 가까워지면서 그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통해 입수한 국내의 소식을 안창호에게 전하고, 국내에 있는 인사들에게는 안창호, 조성환 등과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수행하고 있는 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에 전달하는 소식통 역할을 하였다. 중국 체류 중 한일합방 소식을 접하였다.

1911년 연회참석 차 귀국하여, 그해 4월 "기독교인의 자신력"이라는 글을 '그리스도인 회보'에 투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기독교인들은 남을 의지하지 말고 자신력으로 행복을 향유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도 마땅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각 성도들 스스로의 믿음으로 발달해야 한다'라면서 기독교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자력, 자주를 역설했다.

1911년 손정도는 한국에서 집사직을 받았다. 그리고 북경으로 가서 중국인과 조선족들을 위한 선교를 시작했다. 1912년 3월 귀국,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미국감리회 연회에 참석하여 선교활동을 보고하자 다시 “청국 봉천 북방 할빈 남방” 선교사로 재 파송되었다. 1912년 다시 만주 하얼빈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 선교하여 200명의 신자를 얻고 자력으로 모금과 강연, 설교, 노동 등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이층 예배당을 헌당하고, 한국인들을 위한 공동묘지까지 마련하였다. 그러나 해외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로 그는 조선총독부의 눈에 들게 되었다.

1912년 하얼빈(에서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기간에도 그는 성서를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하여 순사, 형사를 비롯하여 유배지 근처의 주민, 수십 리 밖의 진도 신자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선교활동을 하여 기독교인으로 개종시켰다. 1914년 유배가 풀려 석방되었다.

1914년 6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감리회 연회에서 동대문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음으로써 감리교 성직자가 되었다. 이때 탁사 최병헌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동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1년간 목회하는 동안 손정도 목사의 설교와 간증, 믿음의 실천에 감동받은 신도들이 몰려왔고 교회 건물이 꽉 차자 마당에 서서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신자를 끌어모았다. '동대문교회 100년 사'에 의하면, 당시 교회의 규모는 전도사 6명, 지교 회수 12곳, 입교인 312명, 학습자 142명, 원입자 469명 등 924명이었으며, 주일학교 학생은 786명이었다. 성직자로 유명세를 타게 되자 평일에도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왔으며 무엇인가 열심히 의논했다고 한다.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두 번째 줄 가운데 손정도(이승만과 이시영 사이)

1915년 감리교로부터 현순 목사의 뒤를 이어 정동교회로 발령되었다. 손정도 목사를 존경한 동대문교회 교우들은 연판장을 돌리며 손정도의 교회 이임을 극구 반대했다. 이 시기는 일본의 억압과 덕수궁에 살았던 고종을 위해 근처의 가옥들을 이전시켜 이화학당, 배재학당 학생들이 주로 참여했다. 그는 1916년 이전에 해산된 엡워스 청년회를 10년 만에 재조직하고, 남반 여반을 갈라놓았던 휘장도 제거했다. ‘손정도식 설교’, ‘손정도식 목회’는 여기서도 효력을 발휘하여 1916년 교세는 입교자가 747명, 학습인 275명, 원입자 930명, 주일 학생 820명 등 총 2,772명으로 국내 최대의 교회로 발전되었다. 이때 600원의 헌금으로 교회를 증축, 수리하기도 했다.

1917년 손정도는 우여곡절 끝에 협성신학교 제5기로 졸업했다. 1918년 6월 23일 장로(elder)목사 안수를 받고, 신병치료차 휴직원을 내고 고향 근처 평양으로 이사를 갔다. 이는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하려는 의도에서 계획된 행동이었다.

1919년 초 한국인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만세운동을 벌여야 된다는 여론이 나오자 그는 33인 민족대표에 서명하기로 했다가 파리평화회의에서 의친왕 이 강공을 참여시키는 일을 돕기 위해 평양에서 신한 청년당에 입당했다. 가정을 돌볼 수가 없었던 그는 박신일 사모가 낮에는 기흘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밤에는 재봉틀을 돌리면서 가정 생계를 꾸려가야 했다. 박신일의 가장 어려웠던 일은 일경의 감시와 압박을 견디어 내는 일이었다 한다.

그에게는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조달책 역할과 조직망의 가동을 책임지는 역할이 부여되었다. 손정도는 하란사를 통해 손병희의 애첩인 주산월과 접촉하여 손병희를 설득, 민족대표 33인에 참여, 서명하게 하고 경비 문제를 해결하는 실력을 보였다. 손정도는 가족을 평양에 남겨두고 홀로 베이징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강 공의 평화회의 참석은 하란사의 급사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에 참여했던 핵심인물들은 해석, 현순, 최창식 등 모두 감리교 목사들이었다. 이들의 암호명은 손정도는 입정, 현순은 석정, 최창식은 운정으로 입석 정이었다.

1919년 2월 국내에서 3·1 운동 시위 계획에 참여하다가 출국,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4월 2일 임시정부 준비에 참여하였다. 파리 강화회담에 참석한 김규식으로부터 정부 수립 요청을 받고 현순, 안창호 등이 임시정부 조직을 추진하였고 손정도는 뒤에서 실무조직에 착수하였다. 임시정부의 살림꾼이었으나 신변의 노출을 우려한 그는 각종 위원회에 그 이름 없이 참여하거나 가명, 익명으로 참여하였다. 자신의 신분 노출이 조직의 활동에 장애가 될까 하여 익명으로 노고를 감당했던 것이다. 종파를 초월하여 천도교 인사들과도 접촉했던 그는 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천도교로부터 1만 원, 미국 선교부로부터 1만 원을 얻어낸 것도 모두 해석의 일이었다.

이해 4월 10·11일 양일간 김신부로 회의장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의장 이동녕이 이틀 만에 사퇴하자 4월 13일에는 이동녕의 후임으로 제2대 임시의정원 의장이 되었다.

이무렵 서울에서 공포된 조선민 국 임시정부의 평정관에 선출되기도 했다.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했고, 통합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임시의정원 기초위원이 되었다. 1920년 1월 김립. 김철. 김구. 윤현진. 김순애 등과 함께 무장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을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1921년 상하이 왼쪽 맨 끝 손정도

1920년 중반 베이징에서 열린 ‘미국 감리 감독교회 동아시아 총회’(Central Conference of Eastern Asia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는 대한 예수교회 진정서를 발표하고 외교적 역량을 발휘하면서 선교사 수 십 인을 접대했다. 비용은 해석이 국내로부터 모금한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파의 음해로 공금 유용 죄로 조사를 받게 되어 도산 안창호가 직접 조사하고 국내의 후원자까지 만나서 조사했으나 무혐의 처리되었다. 해석은 큰 상처를 입고 길림성의 목회를 지원하였다.

1921년 3월 3일 이원익. 김병조. 김인전. 조상섭. 송병조. 장덕로 등과 함께 대한 야소교 진정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다. 한편 이승만이 상하이로 오기를 거부하자 서신을 보내 그를 설득하여, 이승만을 상하이로 오게 하였다.

1921년 8월 임정 국무원 교통총장에 임명되었고, 1922년 2월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으며, 8월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 노병회를 조직하고 노공 부장을 지냈다. 동시에 휴일에도 교회활동과 교육활동에도 참여하여 상해 한인교회 상의회 위원, 치리 회원, 미션 학원 인성학교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이탁과 함께 평안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재정위원에 선임되었다. 홍진·이시영과 함께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만주에 지린으로 되돌아가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1924년 9월 만주 선교사로 파송받아 북만주 길림성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그러면서도 독립운동가들과 연락, 국민대표자회의가 강제 해산될 무렵, 안창호의 설득에 감화되어 흥사단에 입단, 흥사단원이 되어 안창호와 의논하여 이상촌 건설을 추진했다. 액목현 지역에다 황해도의 재산을 처리하며 동생 손경도의 명의로 경박호 일대에 50 향의 땅을 사서 농민 호조사를 설립했다.

안창호와 손정도

이는 국내에서 쫓겨나거나 생계를 찾아 떠도는 한민족의 경제자립과 독립운동기지의 견실화 내지는 이상촌 건설을 위한 다목적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일본의 밀정에 의해 체포, 구금 등 고난의 길을 걸었으나 선교사업을 이유로 풀려났고 액목현 교회, 그 주변 대분, 대강자 교회, 더 나아가 하바로브스키 선교까지 두루 다니며 돌보았다. 이 무렵에 김일성과 만나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1927년 만주지방 교민의 복지를 위하여 농민 호조사를 결성하기 위한 준비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과로와 격무, 체력 저하, 스트레스, 고문 후유증 등에 시달리게 되었다. 1931년 1월 해석은 한 동포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져 일본인이 경영하는 동양 병원에 입원했다가 별세했다. 별세 당시 그의 나이 60세였다.

장남(첫째 아들) 손원일은 귀국, 대한민국 해군 아버지로,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의 삼녀(셋째 딸) 손인실과 셋째 사위 문병기는 미국으로 떠났고, 국내에서 사업을 하던 맏사위 윤치창도 1963년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손정도는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었다.

현재 북한에서는 손정도 목사를 김일성의 은인이자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존경하고 있다. 1926년 무렵 만주에서 김일성 주석을 손정도 목사가 친아들처럼 돌보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김일성 수령의 생명의 은인'으로 부르며, 김일성도 "손정도 목사님은 비록 나와 사상은 달랐지만, 참으로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라고 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2003년 10월 손정도 목사 기념 남북 학술토론회를 남한의 신학자들과 같이 열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원장으로 활동한 손정도 목사의 업적을 기념하였다.

그와 김일성과의 만남은 김일성의 회고록 7권이 1992년에 출판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이 회고록 제2권 제1장은 ‘손정도 목사’란 제목 아래 그 관계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해석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부친과 사별 후 김일성이 길림으로 왔을 때 손정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에 출석하면서, 길림 육문중학교에 편입하고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의 자녀들과는 형제자매처럼 지냈는데, 손정도 목사의 둘째 아들인 손원태 장로와 김일성은 2살 차이였다.

김일성은 길림에서 청소년 조직인 조선인 유길 학우회를 사회주의 방향으로 이끌면서 혁명 세력화하자 중국 공안당국에 체포되어 7달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이때 해석은 옥바라지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뇌물까지 주며 그를 석방시켰다. 그리고 일본 군경의 위협이 다가올 것이니 피하라고 권고하여 재판에 회부되었으면 10년형을 살게 될 것을 면해 주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해석을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 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라고 평가하였다. 손원태는 1991년 5월 네브라 스키 주 오마하에서 평양으로 가 김일성을 만났고, 철 봉리 특각을 선물로 받았고, 김일성의 약속대로 손원태의 80회 생일은 대상 중에서도 평양에서 치러졌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에 예술영화 조선의 별 1,2부에서 손정도 목사를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손정도 목사에 대해 존경을 보였다.

맏사위 윤치창을 통해 윤치호·4대 대통령 윤보선 일가와 사돈관계를 형성했고, 증손녀 손정희는 기업인 겸 정치가 홍정욱과 결혼하여 탤런트 겸 영화배우 남궁원 일가와도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1997년 - 중국 정치가 덩샤오핑

2013년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박철수

2016년 - 미국의 소설가 하퍼 리

2016년 - 이탈리아의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

2017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지영

2017년 - 대한민국의 국악인 박송희

2018년 - 소련의 해머던지기선수 세르게이 리트비노프

2019년 - 독일의 디자이너 카를 라거펠트

2020년 - 대한민국의 국어학자 이기문

 

기념일

멕시코 삼군기념일(Armed Forces Day)

투르크메니스탄 국기의 날(Flag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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