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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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기원전 63년 - 로마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4개의 연설문 중 마지막을 발표하다.

1590년 - 교황 그레고리오 14세가 즉위하다.

1931년 -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폭파 해체되었다.

1933년 - 미국 금주법 1919년부터 14년 만에 해제

1936년 - 소련에서 스탈린 헌법이 제정되다.

1952년 - 영국 런던에 스모그 현상. 이날부터 5일 연속 계속된 이 현상으로 4,000여 명이 죽음.

1968년 - 대한민국에서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되었다.

2011년 -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9번째로 무역수지 1조 달러를 돌파하였다.

2014년 - 대한항공 086편 회항 사건 발생.

사진 출처 서울 와이어 뉴스

대한항공 086편 회항 사건은 2014년 12월 5일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하던 대한항공 여객기 내에서, 대한항공 조현아 당시 부사장이 객실승무원의 마카다미아 제공 서비스를 문제삼아 항공기를 램프 유턴 시킨 뒤 사무장을 강제로 내리게 할 것을 요구하고, 기장이 이에 따름으로써 항공편이 46분이나 지연된 사건이다. 대한항공 이륙 지연 사건, 땅콩 리턴, 땅콩 유턴, 땅콩 회항, 땅콩 갑질 사건 등으로 불린다.

이 사건에 대해 '사상 초유의 갑질'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영국 일간지《가디언》은 '"땅콩(미친) 분노(nuts-rage)"로 조사를 받게 된 대한항공 임원'이란 제목의 기사로 상황을 전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한국발로 조 부사장 사태를 보도하면서 "조 부사장의 행동은 대한민국 항공법에 따라 최대 징역 10년형에 처해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배경

- 초기 사건과 공식 보고

2014년 12월 5일, 대한항공 086편은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에서 한국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이륙하기 전에 대한항공 객실본부장이었던 조현아 부사장이 접시 위가 아닌 뜯어지지않은 봉지 속에 있는 마카다미아를 객실승무원으로 부터 받았다. 대한항공은 마카다미아가 나무 견과 알레르기를 일으킬 위험 때문에 봉지째로 전달한 뒤 고객이 뜯어먹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마카다미아 서비스 규정을 잘 알지 못했던 조현아는 마카다미아 서비스를 빌미로 객실승무원을 심하게 질책하였고 사무장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조 전 부사장에게 규정을 설명하였으나 조현아의 명령으로 사무장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애걸하도록 강요받았다고 전해진다. 조현아는 반복해서 그의 손마디를 객실서비스 매뉴얼 모서리로 때리며 모든 책임을 사무장에게 전가하였으며 분에 못이겨 사무장에게 게이트로 다시 돌아가도록 기장에게 전달하라고 강요하였다. 사무장은 기장에게 기내 서비스 문제로 인해 게이트로 돌아가야 한다고 보고하였고 조현아의 난동을 인지하지 못한 기장은 단순 기내 서비스 문제로 인지하고 게이트로 리턴한 사건이다. 사건 초기에, 전해진 바에 의하면 사무장과 관련 승무원들은 회사의 압박 및 회유에 의해 회사가 원하는 대로 진술할 것을 강요받았다. 또한 회사의 악의적인 거짓진술 강요를 용납하지 못한 사무장이 방송사 및 언론매체에 사건의 전모를 공개함으로써 사건 은폐 및 축소를 모의하였던 대한항공 임원과 국토부 조사관의 증거조작이 크게 물의를 일으켰다. 이 사항을 인지한 검찰이 해당자를 조사하여 거짓 진술을 모의하고 참가한 상무를 포함 여러명을 기소하고 그 중에 국토부 조사관 1명과 조현아 전 부사장은 실형을 선고 받고 항소 하여 조현아는 집행유예를 받은 사건이다.

- 대한항공의 대처

2014년 12월 8일 이 문제로 조현아는 대한항공 기내 서비스, 호텔사업 부문 총괄부사장에서 물러났지만, 부사장 직함은 유지했다. 다시 문제가 되자 12월 10일 조현아는 부사장직에서도 물러났다. 더불어 조현아의 부친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또한 기자회견을 열어 사과문을 발표했다.

논란

- 검열 논란

조현아 전 부사장이 사태와 관련 사원들의 카카오톡을 검열한 사실과 거짓 해명을 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되고 있다.

- 은폐 논란

사건 당시 조현아의 앞자리에 타고 있던 한 여성 승객은 대한항공 측에서 사과 차원에서 모형 비행기와 달력을 보내준다고 했다고 주장하며 대한항공의 대처방식에 비난을 표한 바 있다. 이 사건과 관련한 수사를 위해 국토교통부에서는 대한항공 측에 당시 탑승객 명단을 요구했으나 대한항공 측에서 이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 항로 변경죄 쟁점

2014년 12월 30일, 검찰의 구속 기소 당시, 처벌 사항 중 가장 큰 죄로 다루고 있는 항공보안법 제42조 항공기항로변경죄 성립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조현아 변호인 측은 일반적으로 항로는 고도 200m 이상의 관제구역이며, 해당 비행기는 토잉카에 의해 지상로에서 17m~20m가량을 후진한뒤 제자리로 돌아왔을 뿐 검찰의 주장은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12월 20일 대한항공 측이 CCTV 영상을 공개하며 항로변경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21일 '박재홍의 뉴스쇼'에 출연한 한 항공 전문가는 이미 문을 닫았기 때문에 항로 변경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반박하였다.

또한 변호인 측의 논리에 반박하여 2015년 1월 21일, 대한항공 조종사 노조 홈페이지에서 조종사들이 반발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홍석진 교수등의 일부 전문가들은 항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으며, 램프 리턴을 하였으나 목적지를 무단으로 바꾸거나 관제소의 허락 없이 항로를 변경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밝혔다.

결국 2월 13일 조현아에게 항공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이 선고되었다. 조현아는 국내에서 처음으로 항공보안법 42조 '항로변경죄'로 처벌받는 첫 사례가 됐다. 또한, '땅콩 회항' 사건에 대한 국토교통부 조사를 방해한 혐의(위계에의한 공무집행방해)로 대한항공 여모 상무에게 징역 8개월이, 국토교통부 조사관 김모씨에게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이 선고됐다.

재판

2015년 1월 12일, 대한민국 국회의 한 의원이 처음으로 조현아의 기소로부터 항공사의 매뉴얼에 따라 마카다미아 땅콩이 봉지 째로 적절하게 제공됐음을 보여주는 서류를 발표했다. 게다가, 조현아는 나중에 이것을 인지하였으나 본인이 매뉴얼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 드러나자 분을 이기지 못하고 현장에 있던 사무장과 해당 승무원들을 질책하였다.

재판은 1월 19일 서울서부지방법원에서 시작되었고, 피고는 모든 책임을 부정했다. 조현아의 아버지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법정에 출석하여 해당 사무장이 회사에서 불리함 없이 일할 수 있게 하겠다고 재판장에게 진술하였다. 법원 소환에도 불구하고, 사무장은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땅콩을 대접했던 승무원은 법정에 출석했고 조현아가 그녀를 밀치고 무릎꿇게 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또한 조현아측으로부터 대한항공 계열 대학에서 교직 자리를 제안받았다고 말했다.

2015년 2월 12일, 조현아는 항공 안전을 위반한 혐의로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같은 해 5월 22일, 항소심에서 항로변경죄가 인정되지 않아 징역 10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아 석방되었다. 2017년 12월 21일, 대법원 상고심 역시 항소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하였다.

2017년 12월 21일, 조현아는 재판에서 '항로변경죄'에 대하여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여파

- 대한항공의 여파

대한항공은 경복궁 여학교 밀집 지역에서 7성급 호텔을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박근혜 정부는 관광진흥법 개정을 통해 규제를 폐지하고 호텔 건설을 허가할 방침이었으나,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항공과 관련된 법안을 처리하기 어렵게 되었다. 송현동 호텔건립반대 시민모임은 12월 11일 보도자료를 내고 관광진흥법 개정안을 즉각 철회할 것을 주장하고, 대한항공에 대해 호텔 건립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새누리당 고위 당직자는 이런 분위기에서 법안 처리는 어렵다는 의견을 내었다. 종로구 국회의원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세균 상임고문은 "저를 비롯해 종로 주민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법까지 바꿔가면서 대한항공이 경복궁 앞에 호텔을 건립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줬는데, ‘땅콩리턴’ 때문에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호텔 설립이 무산될 경우, 조현아 부사장은 본인이 맡고 있는 호텔 사업 부분에 큰 손해를 입게 된다. 2014년 12월 17일 국토교통부는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대한항공의 뉴욕 존 F. 케네디 국제공항과 서울 인천국제공항을 연결하는 노선의 3주간의 취항금지 조치와 14억 4천만 원의 벌금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5년 - 서울 도심에서 2차 민중총궐기 집회가 일어났다.



문화

2012년 - KTX 서울 - 진주 구간 개통.

2014년 - 미국의 차세대 캡슐형 우주선 오리온(Orion)이 발사에 성공하다.



탄생

1782년 - 미국의 제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

1833년 - 대한민국의 의병장 최익현

최익현(양력 1834년 1월 14일(1833년 음력 12월 5일) ~ 1907년 1월 1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정치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1905년 을사늑약에 저항한 대표적 의병장이었다. 본관은 경주이고, 초명은 기남(奇男), 자(字)는 찬겸(贊謙), 아호는 면암(勉庵)이다. 김기현과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노론 화서학파의 지도자이자 위정척사파의 중심 인물이었고, 흥선대원군의 월권행위를 비판하였다. 1855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동부승지, 참의, 돈녕부의 도정 등을 역임했고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 1863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을 공격하여 끝내 실각시켰다. 그 뒤 의정부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는 고종 즉위 직후부터 나온 정도전, 남곤, 정인홍, 한효순, 윤휴, 이현일 등의 복권 여론을 친구 김평묵과 함께 여러 번 결사 반대하여 좌절시켰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개항오불가(開港五不可)의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를 올린 뒤부터는 개항 반대와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했고, 을사늑약 이후로는 항일 의병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 당일, 대마도주의 일본식 단발 요구에 대한 항의의 단식을 시작하였으나, 대마도주의 사과 및 왕명으로 단식을 중단을 하였다. 하지만, 3개월 뒤의 발병(풍증)으로 7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후 1928년 시호 없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다.

생애

- 생애 초반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다. 1833년 12월 5일 경기도 포천군 내북면 가범리(嘉范里)에서 최대(崔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찬겸(贊謙)이며 호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고 하였다가 뒤에 익현으로 고쳤다. 최익현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때 단양(丹陽)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때 부친의 명에 따라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 되어, 수학하였다.

- 수학과 소년기

14세 때 경기도 양근군 벽계(蘗溪)에 은퇴한 노론성리학의 거두 이항로의 문하에서 격몽요결, 대학장구 大學章句, 논어집주(論語集註) 등을 통해 성리학의 기본을 습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항로의 '애군여부 우국여가(愛君如父 憂國如家)'의 정신, 즉 애국과 호국의 정신을 배웠다. 그는 이항로의 제자들 중에서도 수제자로 인정되었고, 나중에는 송시열과 송준길-권상하-한원진, 이간-이항로를 잇는 노론의 정통으로 간주되었다.

스승인 이항로로부터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적(爲國如家的)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 23세 때에 명경과(明經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재임중 꾸준히 부정부패와 구국항일투쟁을 끊임없이 전개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였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으로 하였다.

화서는 최익현에게 '면암'(勉菴)이란 호를 지어 주고 '낙경민직'(洛敬민直)이란 글을 주면서 항상 학문을 권면하였다. 이로부터 최익현은 이항로의 학문을 전승받아 위정척사의 '구국부도'(救國扶道)의 의리를 구현시키고자 온 생애를 바쳤다. 이항로의 문하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인 유인석, 김평묵 등을 만나게 된다. 1855년(철종 6년) 2월에 춘당대(春塘臺)에서 열린 강경(講經)에서 1등, 바로 생원시나 진사시를 거치지 않고도 그 해의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부여되었다.

-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철종 재위 중인 1855년(철종 6) 과거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순강원수봉관(順康園守奉官)이 되었으며 이후 성균관과 사헌부, 사간원 등에서 근무했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정언, 이조정랑(吏曺正郞), 신창현감(新昌縣監) 등 내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강직과 선정(善政)으로 칭송되었다. 지방관·언관으로 재직시 불의와 부정을 척결해 강직성을 발휘하였다. 

그는 언관 벼슬에 주로 있으면서 일찌감치 조선조 사림의 최대 미덕인 강직한 성품을 드러냈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에 반대하다가 눈밖에 나는가 하면 1864년 흥선대원군의 집권과 개혁 정책을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세도 가문 축출에서 벗어나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 북인 등도 등용하자 그에게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게 된다. 왕권 강화를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는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여 관직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 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사헌부장령을 거쳐 공조참의, 돈녕부도정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8년 올린 상소에서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비정을 비판, 시정을 건의하였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상소는 그의 강직성과 그가 표방한 민본주의 성향 우국애민정신의 발로이며 막혔던 언로를 연 계기가 되었다. 1870년(고종 7)에 승전을 지냈다.

- 대원군 비판

스승인 이항로의 생존 시에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가 대원군을 정치적으로 지지하였으므로 대원군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이항로 사후에는 대원군에게 비판적으로 변하게 된다.

1868년(고종 5년) 경복궁 중건의 중지를 촉구하고, 부역에 동원되는 백성들의 생계 문제와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물가 인상과 재정의 파탄 등을 지적,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실정(失政)이라며 상소하였다. 그는 경복궁 중건의 대규모 공사에 많은 비용과 인력이 동원되어 인적, 물적 자원의 낭비가 심함을 들어 경복궁 중건을 반대하였다. 그해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1868년 10월 다시 경복궁 중건을 무리한 토목공사라며 이를 중지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간원사간 권종록이 이를 너무도 무례하다며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고종은 그를 10월 20일을 기하여 돈녕부 도정(敦寧府 都正)으로 승진시켰다. 그러나 최익현은 10월 28일을 기한즉 직책 승진한지 8일만에 돈녕부 도정직을 사퇴한다. 그 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리자 대원군에 대해 더욱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1871년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서원들의 철폐는 존주대의와 면학분위기를 망치는 것이며 철폐령을 취소할 것을 건의하였다.

- 대원군 축출에 협력

한편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자 한 명성황후는 사람을 보내 그와 교섭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873년(고종 10년) 10월 돈녕부도정으로 재직 중 계유상소(癸酉上疏)를 올려 고종이 성년이며 대원군이 섭정을 할 이유가 없음을 상소하였다. 이 상소를 계기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이때 그의 상소에 민씨 일족과 고종이 적극 지지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의 도움으로 즉위한 고종이 성인이 되면서 흥선대원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일었고, 여기에는 부인인 명성황후와 여흥 민씨 척족 세력들이 가담했다. 대원군을 비판했던 최익현은 승정원동부승지로 기용되어 반 흥선대원군파의 첨병에 서게된다.

동부승지로 기용되면서 그는 이어 조정 대신들이 일처리를 잘못하여 번잡하다는 것을 지적, 상소한다. 이에 의정부좌의정 강노와 우의정 한계원, 영돈녕부사 홍순목 등이 사직 상소를 올렸고, 삼사에서는 최익현을 규탄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의 상소를 높이 사서 일약 호조참판에 제수하였다. 그러나 상소문이 무례하다는 비난이 빗발쳤고 대원군계 인사들은 그를 규탄했다.

영의정 이유원 등과 함께 종실 흥선대원군 독점 전횡 체제 비판 작전에 전격 합세를 한 그는 서원을 철폐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는 등 대원군을 공격하여 결국 실각시켰다. 이후 고종의 신임을 받아 가선대부로 승진, 돈녕부도정을 거쳐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와 영상 이유원이 공동 시행한 흥선대원군 하야 운동은 부자이간의 행위라며 대원군 계열 인사로부터 비판받았다. 그는 임금의 아버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돈녕부도정에 전임되었다가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 辭戶曹參判兼陳所懷疏>를 올려 민씨 일족의 옹폐를 비난하자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11월 의금부에서 국문을 한 뒤, 다시 제주도에 위리안치되는 형벌을 받았으나 이는 실권을 잡은 민씨 세력의 형식적인 처벌이었다.

- 윤휴, 이현일 복권 반대

1873년(고종 10)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최익현과 김평묵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도전, 이현일, 윤휴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자 최익현과 김평묵은 이를 막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1873년(고종 10) 부터 1876년까지 최익현과 김평묵 등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한효순,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단해야 하며, 남인인 윤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 목내선, 이인좌, 정희량, 이현일의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올바른 선비들이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하여 이들의 복권 여론을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그 뒤에도 최익현과 김평묵은 남인과 이인좌의 난 관련자들의 복권을 결사 반대하였다. 결국 윤휴, 이현일 등은 김평묵과 최익현이 모두 죽은 뒤 1907년(융희 2년)에 가서야 복권된다.

개항, 개화 반대 운동

- 민씨 정권과의 갈등

최익현은 곧 외국과의 통상을 논의하기 시작한 민씨 정권과도 곧 마찰을 빚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반대에서 가일층 부각되었다.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개항을 해서는 안되는 다섯가지 이유를 적어 개항오불가(開港五不可)의 5조(條)로 된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를 올렸다. 척사소에서 그는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일제의 강압과 정부의 수교방침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그 무렵 모든 개항반대상소 중에서도 가장 잘 지은 내용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 상소는 외면되었고, 그는 일본과의 통상 조약 체결을 극렬 반대하다가 이번에는 흑산도에 4년간 위리안치된 것이다.

최익현이 반대한 개항 후의 사태는 개화, 주화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근대문물을 앞세운 일제를 비롯한 열강의 침략으로 나타나 그의 예견은 적중한 것이었다. 특히 외국 자본의 침투와 경제적 진출은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고 그에 더하여 정치적, 군사적 침략이 강화되어 경향(京鄕)의 백성이 정부의 개화시책을 비판하는 속에서 위정척사의 배일운동이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까지 되었다. 1879년 석방되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이후로 통상 확대와 여러 외세의 유입이 계속되면서 최익현은 이에 결사 저항하는 위정척사론의 거두로 활동하게 된다.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과 그해 친일 정권 성립과 함께 단행된 갑오개혁에 크게 반발했고, 이듬해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의병을 조직했다가 체포되었다. 이 당시 그가 상소를 올리며 적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라는 말은 강제적 단발령에 목숨을 걸고 반발했던 당시 유학자들의 뜻을 함축한 표현이었다.

- 갑오경장 반대 운동

최익현은 계속 서구 문물의 유입을 나라를 타락시키는 원인으로 규정, 척사운동에 앞장서 국민의 자주의식을 고조시키고 외세의존세력을 규탄하여 마지 않았다. 1894년의 갑오경장이 단행되자 외세의 내정 간섭은 부당하다며 성토하였다.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외세의 내정간섭이라며 규탄하였다. 갑오경장과 을미개혁에 반발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자 그는 고종으로부터 갑오, 을미년의 의병항전에서는 각처에서 봉기한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도리어 '진회대죄소'(陳懷待罪疏)를 올려 의병들을 "모두 충성과 의리를 앞세운 백성들"이라 일컬어 거의구국의 정당성을 밝혔다. 그리고 이들의 정당한 거병을 해산, 탄압할 이유가 없다며 항거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 때에도 각처에서 의병이 발생, 조정에서는 그에게 선유사의 직책을 내려 의병의 해산을 촉구하게 하였으나 해산 설득을 포기한다.

- 단발령 반대 운동

1895년 12월 30일(음력 11월 15일) 단발령이 시행되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요 불감훼상'이라는 이유로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호소하였다. 최익현은 유림 거두들과 연명하여 단발령은 야만적인 행태라며 규탄했다.

그러나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 등은 단발령을 단행하였다. 1896년 초, 유생들의 단발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이에 유길준은 유생들의 시위의 배후로 최익현의 체포를 지시한다. 유길준은 유생들의 단발에 앞서, 유림들과의 몸싸움도 불사하고 최익현 체포를 위한 순검 1개 부대를 보냈다. 그는 단발령 반대 여론을 주도하던 최익현을 경기도 포천군 영평에서 체포하여 투옥시켰다. 이후 유길준은 유생들에 대한 단발을 감행하다. 유길준은 직접 최익현에게 고시문을 보이면서 법령대로 단발을 강행하겠다 하자, 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고 질타하며 몸부림쳤다. 그가 완강하게 몸부림쳐 유길준의 삭발 기도는 실패하고 만다.

- 대한제국 수립 이후

1898년(광무 1년)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제수되어 입궐하고, 이어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거쳐 의정부찬정(贊政)이 되었다. 그해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그는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을 통해 위정척사론의 전파를 추진했다. 세상이 혼란한 것은 인륜과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라 굳게 확신하고 정론과 정학의 수호를 위해서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뒤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제의 군사적 국권침탈을 보고서는 '궐외대명소'(闕外待命疏)를 올려 외세의 척결과 국권수호의 방책을 역진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고, 한성부 거리에서 당시 내각 담당자들을 규탄, 이들의 파면과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을사늑약 반대 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그는 이를 늑약으로 간주,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최익현은 을사늑약의 늑결을 나라의 멸망으로 간주, 조약 체결 당사자 5명의 처단을 주장,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불법 조약의 폐기, 취소와 의병항일전을 천명하였다. 또한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발표하여 항일투쟁을 호소하였으며, 포고문과 신문을 통해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충남 홍주의 유학자 민종식(閔宗植)이 구성한 의병진과 연대, 공동항쟁할 호남의병진의 편성으로 나타났다. 최익현은 1906년 1월에 충청남도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에서 원근의 유림을 모아 강연을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 단결해서 국권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의 모임에는 1896년 진주의병진에서 활약했던 경남 합천의 명유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가 10여명의 지사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제천에서는 유인석 등도 거병하였다.

1906년 2월, 자신의 문하생이자 이미 독립하여 전북 태인의 종석산(鍾石山) 밑에 우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임병찬(林炳瓚)을 찾아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거사 장소는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으로 정한뒤, 최익현은 담양의 용추사(龍湫寺)로 내려가 기우만(奇宇萬), 이항선(李恒善), 장제세(張濟世), 조안국(趙安國) 등 호남의 명유지사 50여명을 소집, 이들과 회동하여 항전 방책을 논의하고 113명에 달하는 지사들의 연명부인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하는 한편, 순천, 낙안(樂安), 흥양, 여수, 돌산, 광양, 장흥, 보성, 강진, 해남, 완도 등 호남 고을마다 격문을 보내 외세를 척결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처단할 목적으로 거병함을 밝히고 양심적인 지사들은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한편 의병의 군율(軍律), 의복제도(衣服制度), 규칙(規則) 등을 작성하고, 임병찬이 주관이 되어 무기를 비롯한 각종 군비를 마련하였다.

- 의병 봉기

1905년 을사조약 체결을 계기로 그는 공개적으로 의병을 모집하였다. 임병찬, 임락 등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 에서 거병하였으나, 곧 관군에게 패하여 체포되었고 대마도에 유배된다. 1906년 6월 4일 아침 최익현은 최제학(崔濟學), 고석진(高石鎭) 등 문인 수십명을 거느리고 무성서원에 도착, 강회를 연 뒤 거사를 일으켰다. 그때 그는 비통한 눈물을 흘리면서 사생을 맹세하였다.

"왜적이 국권을 빼앗고, 적신이 죄약을 빚어냈다. 구신(舊臣)인 나는 이를 차마 그대로 둘 수 없어 역량을 헤아리지 않고 이제 대의를 만천하에 펴고자 한다. 승패는 예측할 수 없으나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다면 반드시 하늘이 도울 것이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의 호남의병진이 무성서원에서 거의한 당일에 태인 본읍으로 진군한 뒤 향교에서 잠시 유진할 때에 발표된 최익현의 <기일본정부서(奇日本政府書)>를 발표하였다.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성(性)이라 하고 신의를 지키고 의리를 밝히는 것은 도(道)라고 한다. 사람으로 이 성이 없으면 반드시 죽고 나라에 이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 이것은 다만 노생의 범담일 뿐만 아니라 또한 개화열국이라 할지라도 이것을 버리면 아마도 세계 안에 자립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우선 귀국(일본)이 신의를 저버린 죄를 논한 다음에 귀국이 반드시 망하게 되고 동양의 화가 그칠 때가 없게 되는 이유를 밝히고자 한다.

이어 그는 강화도 조약이 불법임을 선언하고, 강화도조약 체결 이래 조선에 대해 '기의배신'(棄義背信)한 일제의 죄상을 16가지로 나누어 조목조목 논술하여 한일 양국을 위해, 나아가서는 동양평화를 위해 일제의 각성을 촉구하였던 것이다.그의 거병에 제자 문인들과 이날 모인 모든 회중(會衆)이 흔연히 사생을 맹세하니, 최익현은 죽음으로써 국가의 은혜를 갚을 것을 천명하였다. 그 즉시로 80여명이 대오를 편성한 뒤 태인 본읍을 향해 행군을 개시하였다.

- 의병 전쟁

1906년 6월 중순 최익현 의병진이 태인 본읍으로 진군해 오자, 군수 손병호(孫秉浩)는 저항은 엄두도 못내고 도망쳤다. 따라서 의병은 무혈로 태인을 점령하였고, 최익현은 향교로 들어가 명륜당에 좌정하고 향장(鄕長)과 수서기(首書記)를 불러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는 한편, 군사들을 모아 의병진의 전력을 강화시켰다. 태인읍을 출발한 의병진은 30여리를 행군, 당일 하오 정읍에 당도하였다. 이어 정읍군 관군과 대결, 결국 정읍군수 송종면(宋鍾冕)의 항복을 받은 의병진은 이곳에서 소총 등의 무기류와 병력을 확보한 다음 다시 행군, 30여 리 떨어진 내장사(內藏寺)로 들어갔다. 이때 흥덕(興德) 선비 고석진(高石鎭)이 김재구(金在龜), 강종회(姜鍾會) 등과 함께 전투력이 뛰어난 포군 30여명을 거느리고 합류하였다.

이튿날 아침 내장사 뜰에서 좌, 우익을 갈라 잠시 군사를 조련한 다음 30여 리를 행군, 지세가 험해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던 구암사(龜岩寺)로 들어가 다시 진영을 정비하였다. 구암사에서 그날 밤을 지낸 의병진은 다음날 첫새벽에 빗속을 행군, 정오경에 순창읍으로 들어갔다. 많은 주민들과 이속들이 나와 의병들을 환영하였으며, 군수 이건용(李建鎔)은 최익현 앞에 나아가 항복했다. 이를 전후해서 채영찬(蔡永贊), 황균창(黃均昌), 김갑술(金甲述), 양윤숙(楊允淑) 등이 인근 각지에서 포군을 거느리고 합류해와 의병진의 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최익현은 여기서 의병진을 재정비하고 부서를 정해 임병찬을 참모장으로 하고 김기술(金箕述), 유종규(柳鍾奎), 강종회(姜鍾會), 이동주(李東柱), 이용길(李容吉), 손종궁(孫鍾弓), 정시해(鄭時海) 등을 부장으로 각기 임명, 전열을 가다듬었다. 이때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기도 하였으나 의병은 산골짝에서 이들을 일거에 격퇴시켰다. 그 후 의병진은 그곳 순창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인 6월 8일 남원으로 진출코자 행군, 정오 무렵 50여 리 떨어진 곡성에 당도,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稅錢), 양곡 등을 접수하였다. 그곳 군수 송진옥(宋振玉) 역시 의병진을 영접하였고, 또 주민들도 적극 협조해 왔다. 그러나, 남원에는 이미 의병의 공격에 대비, 방어태세가 견고하여 후일을 기약하고 이튿날 의병진은 다시 순창으로 회군하였다. 의병에 합세하려는 삼방(三坊)포군 1백여명이 구암사와 백양사(白羊寺)에 주둔하고 있다는 전갈도 왔기 때문이다.

순창군수 이건용이, 의병진이 곡성으로 진출한 틈을 타 전라북도 관찰사 한진창(韓鎭昌)에게 지원 요청을 하여 의병 '토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를 탐지한 최익현은 이건용을 의리로 타일러 오히려 그를 의병진에 가담토록 해서 전부장(前部長)으로 삼아 모병업무를 관장케 하였다. 이처럼 최익현 의병진은 거의 후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호남 각지를 행군하면서 무기와 군사를 모아 거의 초기에 80여명에 지나지 않던 병력이 이때에 와서는 9백여명에 달했고, 그중 상당수가 소총 등의 화기를 소지하게 되어 전력이 크게 증강되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중요한 점은 호남 일대가 최익현 의병의 활동 이후 의기로 가득차 의병진의 사기가 한층 고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6월 11일 아침,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의병해산을 명하는 광무황제의 선유조칙과 관찰사 고시문을 최익현에게 보내와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한국 통감부의 괴뢰로 전락한 정부에서는 전라북도관찰사 한진창에게 전북지방 진위대를 동원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훈령을 내렸다.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6월 11일 순창 외곽을 봉쇄하여 읍의 북쪽인 금산(錦山)에는 전주진위대가, 동쪽인 대동산(大同山)에는 남원진위대가 각각 포진하여 읍내 관아의 객관(客館)을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던 의병진을 압박해 왔던 것이다.

최익현은 처음에 이들이 일본군인줄 알고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었다. 그러나 얼마뒤 척후병의 보고로 이들이 일군이 아니라 동족인 진위대 군사임을 알고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해 진위대측에 다음과 같은 간곡한 통첩을 보냈다.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같은 우리 동포일진대,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왜적을 토멸하도록 하자. 그리함으로써 후세에 조국을 배반했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전주진위대와 남원진위대는 최익현의 이와 같은 호소를 묵살한 채 오히려 의병진의 피전(避戰)자세를 역이용해 일제히 공격을 가해 왔다. 의병측은 이미 '동포끼리는 싸워서는 안된다'고 사생취의(捨生取義)를 결행, 응전없는 상태에서 맹공을 받게 되자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는 등 일시에 진영이 와해되고 말았다. 최익현은 주위를 돌아보며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은 모두 떠나라"고 하며 지휘부가 있던 순창 객관 연청(椽廳)에 그대로 눌러 앉자,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은 자가 22명이었다. 진위대는 의병측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자 사격을 중지하고 지휘소를 에워싼채 그대로 밤을 지냈다.

- 단식과 최후

1906년 6월 13일 조정으로부터 궁내부특진관에서 해임되었다. 6월 14일 끝까지 남아 있던 최익현 이하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文達煥), 임현주(林顯周), 유종규, 조우식(趙愚植), 조영선(趙泳善), 최제학, 나기덕(羅基德), 이용길, 유해용(柳海瑢) 등 13인의 의사들은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최익현의 의병항전은 종말을 고하였다.

6월 말 최익현은 이들과 함께 다시 경성부로 압송되어 경성 주재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당하였다. 최익현 이하 13인의 의병장들은 여기서 그들의 심문과 회유를 받는 동안에도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음모의 죄상을 성토하였다. 2개월간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된 끝에 최익현과 임병찬은 그해 8월 하순 일본의 쓰시마 섬 엄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어 감금되었다. 그곳에는 홍주의병진의 유준근(柳濬根), 이식(李식) 등 의병 9인이 이미 함께 감금되어 있었다.

최익현은 일본 정부 측의 갖은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단식에 돌입하였다. 최익현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임병찬에게《유소(遺疏)》를 구술, 다음과 같은 여한(餘恨)을 남겼다.

신의 나이 75살이오니 죽어도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원수를 갚지 못하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다시 찾지 못하여 4천년 화하정도가 더럽혀져도 부지하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 선왕의 적자가 어육이 되어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이 죽더라고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강제로 그의 입에 음식을 넣었으나 모두 뱉거나 입을 열지 않고 저항하였다. 1907년 1월 1일 쓰시마 섬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 시신의 운구와 장례식

최익현의 유해는 1월 5일 쓰시마에서 배편으로 경상남도 동래부 초량(草梁)에 닿았다.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孤忠) 8자의 만장(輓章)을 앞세운 그의 영구(靈柩)는 연도에 수많은 인파가 늘어서 애도하는 가운데 구포, 성주, 황간, 공주 등지를 거쳐 1월 20일 청양의 본가에 도착, 무동산(舞童山) 기슭에 묻혔다. 1907년 논산군 상월면의 국도변에 안장했다가 뒤에 예산군 관음리로 이장했다.

사후

묘소 《최익현선생묘》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다. 1982년 8월 3일 충청남도의 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최익현의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땅에 묻혔다가 해방 후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소재 묘소에 다시 세워졌다.

시호 없이 1928년 이왕직에 의해 종묘 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시호가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사상과 신념

최익현의 위정척사론은 어디까지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중화사상의 테두리 속에 머물러 있어 중국으로부터의 완전 이탈이나 성리학적 윤리질서의 개조란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개화된 일본도, 금수시(禽獸視)하는 서구 각국과 다를 바 없었으며, 또한 그는 동학 농민 운동의 농민군과 동학도들을 도적이라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전통적 왕조 질서를 뒤흔들려는 동학(東學)도 '동비'(東匪)로밖에 간주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대한제국의 수립을 반대하였다. 조선의 국왕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皇帝)로 격상되는 것을 옳게 여기지도 않았다.

- 대원군 월권행위 비판

국왕의 생부로 집권해온 대원군의 강력정치와 월권행위를 비판, 대원군이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는 것 역시 정사를 어지럽히는 행위라 보고 대원군 집권 명분의 정당성이 없음을 들어 탄핵, 실각시켰다. 이때 '봉명조양'(鳳鳴朝陽)이란 찬사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도 대원군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한직으로 전임되었지만 한때 '왕실의 골육을 이간시킨' 죄목으로 2년간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기도 하였다.

단발령 반대

그는 갑오개혁과 단발령 당시 나라가 망하는 것이라며 저항하였다. '5백년 종사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 또한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충의(忠義)의 혼이 되는 것만 같겠는가'라며 갑오경장 등에 저항한다. 또한 단발령 당시 그는 '두가단(頭可斷)이나 발불가단(髮不可斷)'이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1868년 - 독일의 물리학자 아르놀트 조머펠트

1901년 -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901년 - 월트디즈니의 창시자 월트 디즈니

1906년 - 대한민국의 작곡가 안익태

1907년 - 중국 공산당 부주석겸 국방부장 린뱌오

1911년 -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1927년 - 타이의 국왕 푸미폰 아둔야뎃

1931년 - 벨기에 출신의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신부 지정환

1937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영옥

1938년 - 대한민국의 목사 옥한흠

1943년 - 대한민국의 가톨릭 추기경 염수정

1954년 - 대한민국 정치인 홍준표

1956년 - 독일의 전 축구 선수 클라우스 알로프스

1964년 - 대한민국의 배드민턴선수 박주봉

196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승철

1967년 - 대한민국의 성우 최원형

1968년 - 미국의 희극배우 마거릿 조

1976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이병희

1978년 - 대한민국의 배우 신이

1983년 - 대한민국의 만화가 이말년

1985년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앙드레피에르 지냐크.

1988년 - 일본의 축구 선수 시오타니 쓰카사. 일본의 축구 선수 우쓰기 루미.

1989년 - 대한민국의 가수 소녀시대의 유리, 대한민국의 가수 쥬얼리의 김예원

1995년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앙토니 마르시알. 캐나다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케이틀린 오즈먼드.



사망

1560년 - 프랑스의 왕 프랑수아 2세

1791년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870년 -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

1926년 - 프랑스의 화가 클로드 모네

1955년 - 일본의 정치인 미나미 지로

1977년 - 소련의 군인, 정치인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

2002년 - 버마의 군인 네 윈

2010년 - 대한민국의 언론인 리영희

2012년 - 미국의 재즈 음악가 데이브 브루벡

2013년 -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제8대 대통령 넬슨 만델라

사진 출처 MBC뉴스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영어: Nelson Rolihlahla Mandela, 1918년 7월 18일 ~ 2013년 12월 5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평등 선거 실시 후 뽑힌 세계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그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의 지도자로서 반아파르트헤이트운동 즉, 남아공 옛 백인 정권의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을 지도했다.

개요

1962년 8월 5일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1964년에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27년 만인 1990년 2월 11일에 출소했다. 1993년 데 클레르크 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1994년 실시된 평등 선거에서 ANC는 62%를 득표하여 ANC의 지도자인 넬슨 만델라는 1994년 5월 2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진실과 화해위원회(TRC)를 결성하여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사 청산을 실시했다. TRC는 성공회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참여하였으며, 수많은 과거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조사하였다. 인종차별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화형, 총살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하였으며, 나중에는 경제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또한 피해자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 피해자 무덤에 비석을 세워줌으로써,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잊히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자유를 향한 긴 여정》이 있었다. 2013년 12월 5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생애

- 유년기 : 1918-1936

1918년 7월 18일 그는 남아공화국 케이브 지방의 일부였던 움타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음베조에서 태어났다. ‘롤리흘라흘라(Rolihlahla)’는 이름이 주어진 것은 코사족 구어체로 ‘말썽꾸러기’라는 의미이며, 이후에는 그의 씨족명인 ‘마디바’가존경받는어른이 된다. 1832년에 사망한 그의 증조부 응구벵쿠카가 오늘날의 이스턴케이프 주에 있는 트란스케이 지역 에서 '인코시 엔크훌루' 혹은 군주로서 템부 족을 다스렸던 추장이었다. 만델라라는 이름은 그의 증조부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고, 이후 그의 성씨의 출처가 되었다. 만델라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 주 트란스케이를 통치한 템부 부족의 분파에 속한다. 만델라가 익시바 씨족(소위, 왼손잡이 집이라고 불리는)의 왕의 하나 밖에 없는 부인에게서 태어난 독자였기 때문에 왕가의 분가된 후손들은 왕위를 물려받는데 있어서 귀천 상혼이었으며, 부적격자였지만 세습이 가능한 왕손으로 인정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임자가 백인 판사로부터 부패 혐의로 기소되자, 지역의 족장이자, 왕손이었던 그의 부친 가들라 헨리 음파카니스와가 1915년 군주의 자리에 지명을 받았다. 1926년 가들라도 부패혐의로 퇴출당하였지만, 넬슨은 판사의 비합리적인 요구를 거부할 수 있는 그의 직위를 잃어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 반 아파르트 헤이트의 투사

비트바테르스란트(University of the Witwatersrand)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재학 중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수많은 사상을 접했으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정치적 식견을 공고히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재학 중 1944년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들어가 그 청년동맹을 설립하고, 청년동맹 집행 위원을 취임하여 반 아파르트 헤이트 운동을 벌인다. 이후 1950년, ANC 청년동맹 의장으로 취임한다.

1953년 8월에 요하네스버그에서 올리버 탐보와 함께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한다. 그 해의 12월에 ANC 부의장 취임하여, 1961년 11월, 움콘트 웨 시즈웨(민족의 창)라고 하는 군사 조직을 만들어 최초의 사령관이 된다. 그러한 활동으로 1962년 8월에 체포된다. 1964년에 국가 반역죄 종신형을 선고받아, 로벤 섬에 수감되게 된다. 1982년, 케이프타운 교외의 포르스모아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 민족 화해의 상징

1989년 12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레데리크 빌렘 데 클레르크와 회담을 통해, 1990년 2월 11일 석방된다. 석방 후 ANC 부의장으로 취임한다. 데 클라크와 예비 회담 시에는 ANC 대표로 참석했다. 1991년, ANC 의장에 취임하였고, 데 클레르크와 협력하여 모든 인종 대표가 참석한 민주 남아공화국 회의를 두 번 개최하였고, 또한 다당 협상 포럼을 열어, 임시 정부 잠정 헌법을 만들었다. 이 10월 5일, 베이징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1993년 12월 10일에 데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 4월 남아공화국 최초의 모든 인종이 참가 총선이 실시되었다. ANC가 승리하고, 넬슨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잠정 헌법의 권력 분배 조건에 따라 연립 정권을 세워 국민 통합 정부를 수립했다. 넬슨은 민족 화해 협력을 호소하면서, 화해와 관용이라는 톨레랑스 정신을 기초로 인종차별 체제 하에서 흑백의 대립과 격차의 시정하려고 노력을 했고, 흑인 간 충돌의 해소, 경제 불황을 회복하는 부흥개발 계획 (RDP)을 공개했다.

1997년 12월 ANC 전당 대회에서 넬슨은 의장의 자리를 부통령 터보 음베키에게 양보한다. 1999년 2월 5일 국회에서 마지막 연설을 했다. 같은 해 열린 총선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 은퇴 후

2000년 1월 19일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처음으로 연설을 실시했다. 2001년 7월 전립선암이 발견되었고, 7주간의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2005년 1월 7일에 전처 위니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마카토 만델라가 에이즈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는 것을 공개했다. 유네스코 친선 대사로 일을 했다. 2010년 6월 11일에 열린 FIFA 월드컵 남아공 대회의 개회식에 참석하려 했지만, 전날 증손자가 교통 사고로 사망하여 참석을 포기하는 대신 영상 메시지를 보냈으며, 폐회식에는 참석을 했다. 이때 이후 공개적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90세를 넘어 고령 몸에 쇠약해지기 시작했으며, 2012년 12월 8일에는 폐 감염으로 인해 수도 프리토리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2013년 4월 6일 증상이 호전되어 퇴원을 했다. 그러나 2013년 6월부터 상태가 악화되었고, 감염이 재발되어 6월 8일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

2013년 6월 23일 남아프리카 대통령궁은 넬슨이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고 발표했다. 그후 넬슨의 용태는 안정되었고, 7월 18일 병실에서 95번째 생일을 맞았다. 딸 인사는 7월 16일에, "헤드폰을 착용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어 웃음을 보였다"라는 모습을 전했다. 넬슨의 생일에 맞춰 2013년 7월 18일에 유엔은 본부에서 "넬슨 만델라의 날" 행사를 열고 넬슨의 공적을 기리는 것과 함께 회복을 기원했다.

12월 5일 95세로 자택에서 가족들의 품에서 서거하였다. 그의 서거는 제이컵 주마 대통령에 의해서 발표되었다. 12월 6일 이희호 여사(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부인)는 김대중평화센터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전 인류에 자유와 인권,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영면했다”면서 “증오를 넘어 사랑의 위대한 힘을 보여줬다”라고 애도를 표했다.


2017년 - 루마니아의 국왕 미하이 1세

2018년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송현섭



기념일

무역의 날: 대한민국

세계 경제.사회발전을 위한 자원 봉사자의 날

국왕 탄신일: 태국

성 니콜라스 축일 이브: 벨기에, 체코, 슬로바키아, 네덜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독일, 폴란드, 영국

유엔이 지정한 세계 토양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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