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이야기 2월 25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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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400년 - 이방원이 왕세자로 등극하다.

1947년 - 프로이센의 해체.

1948년 -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정권을 장악.

1968년 - 하미 마을 학살 사건.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은 1968년 2월 25일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의 청룡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에 위치한 하미 마을에 비무장 민간인 135명을 학살하고 가매장한 사건이다.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월남참전전우 복지회는 하미 마을에 3만 달러를 기부하여 하미 마을에 위령비를 세웠다. 그러나, 위령비 건립 과정에서 월남참전전우 복지회는 학살의 경과를 적은 비문을 지워줄 것을 요청하였고, 디엔증 사 인민위원회 주석 응웬 반 하이의 반대로 결국 위령비는 비문을 연꽃 문양이 그려진 대리석을 덧씌운 상태로 제막되었다.

1968년 2월 당시 청룡부대는 캄란 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청룡 부대의 작전구역인 베트남 중남부 지방은 당시 남북 베트남의 분계선이었던 북위 17도선에 인접하여 치열한 전투가 계속 되었던 지역이다. 청룡 부대는 이 지역에서 북베트남의 베트남 인민군, 남베트남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등과 격전을 벌였다.

한편, 청룡 부대는 작전 지역에서 많은 민간인을 살해하였는데, 1968년 퐁니·퐁넛 양민 학살 사건과 같은 사건은 주월 미군 사령관에게도 보고되어 한미 양국 간의 외교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베트남 정치국 전쟁범죄 조사보고서는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희생자는 5천 여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미 마을 학살이 있던 1968년 2월 25일 당시 청룡부대는 다낭 지역을 중심으로 호이안 전역(戰域)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이 시기는 구정 대공세가 격렬하던 때로 후에를 비롯한 중부의 도시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이 점령하였고, 남베트남군과 미군, 한국군은 이 지역을 재점령하기 위해 격렬한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하미 마을이 속해 있는 꽝남 성에서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학살은 다음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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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추정 발생 일시 사망자 비고
꽝남 성의 위치

디엔반 현

투이보 마을 1967년 12월 21일 145  
탄퐁 사(퐁니.퐁넛 마을) 1968년 2월 12일 130(69)  
하미 마을 1968년 2월 22일 138  
디엔홍 사 1968년 12월 400  
주이쑤엔현 반꾸엇 마을 1968년 1월 19일 48  
찌에우쩌우 마을 1968년 1월 30일 42  
쑤옌타이 촌 1968년 2월 29일 62  
동예.찜선 마을 2년간 300 1968년 6월 8일 36명 학살
끼에우선 마을 1968년 10월 20일 22  
5촌 1968년 말 - 1969년 115    
4촌 1968년 말 - 1969년 133  
레선.선빈.투언안 마을 1969년 2월 21일, 4월 6일 108  
탕빈 현 1969년 3월 11일 - 5월 23일 411  
꾸예선 현 1969년 11월 11일 - 12일 700  
텅빈.땀끼.꾸예선현 1968년 11월 7일 - 17일 476  
호아방 현 1965년 6월 130  
다이록 현 1969년 5월 9일 - 12일 300  
프억선 현 1969년 1월 15일 - 27일 200  

1968년 2월 25일(음력 1월 27일), 청룡 부대의 3개 소대가 하미 마을을 세 방향에서 에워싸며 들어와 마을 사람을 세 곳에 따로 모았다. 장교의 지시에 따라 자동소총과 유탄발사기가 발사되었고 마을 30가구 135명이 2시간 만에 학살당했다. 학살이 끝난 뒤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은 서둘러 무덤을 만들고 희생자들을 묻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불도저를 가져와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한꺼번에 묻어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한국군이 불러 모을 때 크게 저항하지도 않았고 도망가지도 않았는데, 생존자인 응웬 티 본은 마을 사람들이 혹시나 죽이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속에서도 군인들이 먹을 것을 나눠주려고 모으는 것이라 여겼다고 증언하였다. 하미 마을 사람들은 학살 이전에 주민들이 부대원들을 기억할 정도로 한국군과 관계가 좋았다. 생존자인 팜 티 호아 역시 같은 증언을 하였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어요. 7 - 8시경에 호이안 쪽에서 군대가 들어왔지요. 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어요. 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 보다 하고 한 군데로 모였지, 한국군들이 우리를 죽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 죽일 거라고 생각했다면 도망을 가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모이지 않았을 거야.” -팜 티 호아, 하미 마을 학살 생존자-그러나, 한국군은 불러 모은 사람들을 총과 수류탄, 유탄발사기 등으로 학살하기 시작하였고 2시간 만에 135명의 주민이 죽었다. 이들은 대부분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었고 총을 들만한 나이의 남성은 세 명에 불과하였다. 학살이 끝난 날 밤 살아남은 사람들과 미라이 쪽에서 온 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선 빨치산들이 무덤을 만들고 시신을 묻었다. 수습이 되지 못할 정도로 훼손이 심한 시신들은 한꺼번에 모아 묻었다. 1969년 11월 미군 조사단은 버려진 하미 마을에서 부패한 시신으로 가득 찬 구덩이를 발견하였다. 다음날 한국군이 불도저를 가지고 다시 돌아왔고, 생존자들은 허겁지겁 도망갔다. 불도저는 무덤과 미쳐 묻지 못한 시신을 깔아뭉개며 밀어버렸다. 부상당한 하미 마을 생존자들은 다낭 항에 정박 중인 독일 의료선으로 보내져 치료를 받았다.

생존자들은 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이 장악한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난민촌에 들어가는 것이 거부되었다. 그들은 다낭과 같은 대도시에서 걸인이 되거나 복수를 위해 남베트남 민족해방 전선의 전투원이 되기도 하였다.

2000년 12월,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의 기부로 하미 마을 학살 위령비가 착공되었다. 그러나, 완공을 앞둔 2001년 월남참전전우 복지회는 비문의 내용을 문제 삼아 지워줄 것을 요구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8년 음력 1월 26일 학살당한 135명의 동포를 기리다. …… 1968년 이른 봄 음력 1월 26일 청룡병사들이 미친 듯이 와서 양민을 학살했다. 하미마을 30가구 중에 135명이 죽었다. 피가 이 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뼈가 뒤엉켜 섞이고 ……과거의 전장이었던 이곳에 이제 고통은 줄어들고 있고, 한국인들은 다시 이곳에 찾아와 과거의 한스러운 일을 인정하고 사죄한다. 그리하여 용서의 바탕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
하미 마을 사람들은 있었던 일을 과장도 없이 서술한 비문을 지우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디엔증 사 인민위원회 주석 응웬 반 하이는 “고칠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돈으로 세웠으면 증오비를 세웠지 위령비를 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반발하였다. 결국 학살의 참상을 표현한 위령비의 비문은 수정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 비문은 연꽃 그림이 그려진 대리석으로 덧씌워졌다.

하미 마을 사람들은 매 해 음력 1월 24일을 전후로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2013년 3월 6일 45주기 위령제가 열렸고, 학살 이후 최초로 한국인이 위령제에 참가하였다.

2018년 4월 22일 - 23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한베평화재단을 비롯한 대한민국의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 법정을 개최하였다. 이 시민평화 법정은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인 응우옌 티 탄과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의 생존자 응우옌 티탄(동명이인)이 원고로 나서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으며, 시민평화 법정의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국가배상법에 따른 배상을 판결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진상조사를 권고하였다. 시민평화 법정은 모의법정으로 법적 구속력이 없으나 베트남 전쟁시기 학살을 보편적 인권의 문제로서 천명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시민평화 법정 측은 공소 시효를 없애는 특별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민변은 1968년 당시 퐁니 퐁넛 마을 사건을 조사하였던 중앙정보부의 자료 공개를 청구하는 소송을 진행 중이다. 국정원은 "외교적 불이익"을 근거로 정보를 공개하지 않다가 법원의 공개 명령을 받자 "개인정보"를 이유로 다시 정보 공개를 거부하였다.

월남참전전우 복지회의는 위령비 기부 목적이 화해였지 학살의 전쟁범죄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1983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웅평 대위가 미그-19기로 대한민국에 귀순.

1988년 - 대한민국 제13대 노태우 대통령 취임.

1993년 - 대한민국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

1997년 - 이한영 피살.

1998년 - 대한민국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 햇볕정책 발표.

2000년 - 경기도청 북부청사 출범.

2002년 - 철도, 가스, 발전공동파업 요구안으로 민영화저지, 3조2교대제 쟁취, 해고자 복직 등의 파업을 시작하고 2월 28일까지 열차운행중단되다.

2003년 -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

2007년 - 납북 어부 이상철 심장마비로 사망.

2008년 - 대한민국 제17대 이명박 대통령 취임 및 노무현 대통령 퇴임

2009년 -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 국제공항에서 승객과 승무원 134명을 태운 터키항공 소속 보잉 737-800이 착륙을 시도하다가 불시착해 기장과 부기장을 포함해 9명이 사망하고 125명이 살아남았다.

대한민국 고흥길 국회 문방위원장은 문방위 전체회의에서 쟁점법안인 미디어 관련법을 직권상정했다. 야당에서는 여러 이유를 들어 상정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0년 -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이 사형제도에 대해 5:4로 합헌 결정을 내렸다.

2013년 - 대한민국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취임.

2018년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

문화

1953년 - 옥구선이 개통됨.

2002년 - KBO 리그 SK 와이번스의 홈 구장인 인천SK 행복드림구장이 개장되었다.

2008년 -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제80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시상식 결과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가 4개 부문의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2010년 - 2PM 리더 박재범 영구 탈퇴.

2013년 - 경원선 성북역이 50년 만에 광운대역으로 역명이 변경되었다.

2018년 - 2018년 동계 올림픽 폐막.

 

탄생

1682년 -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병리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모르가니.

1778년 - 아르헨티나의 장군이자 페루의 초대 대통령 호세 데 산 마르틴

1848년 -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4대 국왕 빌헬름 2세.

1888년 - 미국의 정치가 존 포스터 덜레스.

1917년 - 비전향장기수 방재순.

1920년 - 대한민국의 목사, 통일교의 창시자 문선명.

1936년 - 영국의 기업인 피터 힐우드.

1937년 - 소련의 정치인 예고르 스트로예프.

1940년 - 대한민국의 배우 여운계.

1943년 - 영국의 대중음악가 조지 해리슨

1950년 -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1951년 - 대한민국의 야구 해설가 허구연.

1953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영철.

1958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유승민.

1959년 - 프랑스의 연쇄 살인자 프랑시스 옴.

1960년 - 대한민국의 교육인 이병태.

1967년 - 영국의 금융인 닉 리슨. / 대한민국의 배우 송강호.

1973년 - 대한민국의 전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김윤만. / 대한민국의 전 배우, 현 디자이너 임상아.

1977년 - 대한민국의 가수, 브라운 아이드 소울 안정엽.

1978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승환. / 일본의 축구 선수 나카자와 유지.

1982년 - 대한민국의 배우 한가인.

1985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이시찬.

1986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전준우.

1988년 - 중국의 쌍둥이 대룡, 소룡 (테이스티).

1989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윤완주. / 대한민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이상화.

1991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민시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송주아.

1999년 - 대한민국의 래퍼 라키 (아스트로).

사망

805년 - 당 덕종 이괄

1713년 - 프리드리히 1세

1715년 - 중국 청나라의 작가 포송령

1815년 - 미국의 발명가 로버트 풀턴

1985년 - 영국의 봅슬레이 선수 랄프 브룸.

1995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 오진우.

1997년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언론인 이한영.

2006년 - 대한민국의 언론인 이규태.

2007년 - 납북 어부 이상철.

2017년 - 미국의 영화배우 빌 팩스턴.

2019년 - 대한민국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이영하.

2019년 - 독일의 헌법학자 에른스트볼프강 뵈켄푀르데.

 

기념일

대한민국에서는 1981년 그리고 1988년부터 2013년까지 5년마다 이 날이 대통령 취임일이었다. (2017년부터는 5월 10일이다.)

피플 파워 혁명: 필리핀

건국 기념일(National Day): 쿠웨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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