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이야기 2월 28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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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22년 - 이집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1947년 - 중화민국의 타이완에서 2·28 사건 발생.

1960년 -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에서 2·28 대구 학생의거 발발.

이미지출처 주간현대

2·28 대구 학생의거는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60년 2월 28일 3.15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대구시에서 일어난 학생의거로, 2.28 의거는 이후 3.15 마산 의거와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민주당 정. 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 당일은 일요일이었으나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못 나가도록 당국이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이 되었다.

경북고등학교는 일요일인 이날 등교 지시를 내린다. 사유는 3월에 있을 중간고사를 앞당겨 친다는 사유였다. 대구 시내에 있던 다른 국공립 고등학교 7개 역시 일요등교를 지시한다. 사유는 토끼 사냥, 영화 관람과 같은 황당한 이유도 있었다.

1960년 2월 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이대우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집에 경북고등학교, 대구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했고,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는 결의문도 작성했다. 2월 28일 오후 1시 학생 800여 명이 대구 반월당을 거쳐 경상북 도청으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커졌고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땐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경상북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은 전부 공산당"이라고 말한 반면, 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박수를 쳤고, 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다.

1,2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중 12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게 된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1960년 2월 28일 오후 12시 55분, 경북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 이대우 등이 조회단에 올라 격앙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자 흥분이 고조된 학생들은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쳤다. 반독재의 횃불은 이처럼 대구에서 처음 불타올랐다.

2.28 운동은 고교생들이 주체이고, 계획적 조직 시위의 민족운동 요건을 갖춘 학생 운동이었다. 우리 역사상 1926년 6·10 만세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이은 의거로 전후 학생 운동의 효시가 되기도 했다. 특히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으며, 한일 수교 반대와 그 이후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 경북고등학교
  • 대구고등학교
  •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 대구상업고등학교 (현 대구상원고등학교)
  • 대구농림고등학교 (현 대구농업마이스터고등학교)
  • 대구공업고등학교
  • 경북여자고등학교대구여자고등학교

대구는 곧 1,200여 명 학생들의 ‘민주화 함성’ 도가니로 변했다. 이때는 발췌 개헌(1952년), 사사오입 개헌(1954년), 진보당 사건(1958년) 등 자유당 정권의 실정에 분노하고, 대통령 선거(3월 15일)가 다가온 시기였다.

2.28 대구 학생의거 기념사업은 다음과 같다.

  • 1961년 4월 10일 매일신문이 주관하여 대구시민 성금으로 명덕로터리에 2.28 대구 학생기념탑을 세웠다.
  • 1990년 2월 28일 2.28 기념탑을 명덕로터리에서 두류공원으로 이전하였다.
  • 1999년 2월 28일 문희갑 대구시장은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동에 위치한 대구중앙초등학교 부지를 2.28 민주의거 기념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선포하였다.
  • 경북고등학교에 2.28 기념탑과 작은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문화

2002년 - KBS 위성 1TV와 KBS 위성 2TV 폐국.

2007년 - 하이텔 VT 서비스종료 / 케이블TV 채널인 퀴니가 사행성 문제로 폐국되었다.

2008년 - 제로보드 XE버전 공식 발표.

2009년 - 대한민국의 종합 인터넷 검색회사 엠파스가 네이트에 통합되었다.

2010년 - 대한민국에서 구글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웹 브라우저인 인터넷 익스플로러 6에 대한 일부 지원을 중단했다.

2012년 - ITX-청춘 열차 운행 시작. (청량리~춘천 구간)

2017년 - 서원주 IC 지연 개통

 

탄생

1928년 - 파키스탄의 자선가이자 운동가 압둘 사타르 에디

1533년 - 프랑스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

1880년 - 브라질 최고령 마리아 올리비아 다 실바.

1900년 - 대한제국 고종 황제 비공식 천출 서녀이자 덕혜옹주(德惠翁主)의 이복 언니인 이문용 궁주(李文鎔 宮主, 1987년 3월 25일 (87세) 별세.).

1881년 - 대한제국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이미지출처 오마이뉴스

김규식(1881년 2월 28일 ~ 1950년 12월 10일)은 대한제국의 종교가,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통일운동가, 정치가, 학자, 시인, 사회운동가, 교육자였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비서, 경신학교의 교수와 학감 등을 지내고 미국에 유학하였다. 1918년 파리에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10여 년간 외교 무대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이 국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각지에서 세워진 임시정부로부터 전권대사와 외무부서장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의 외무 총장에 임명되고 파리 대표부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됐으며, 구미외교위원회 총본부 부위원장, 위원장, 대한 임정 학무 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1921년 임시정부의 창조파와 개조파를 놓고 갈등할 때는 창조파의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 뒤 임정을 떠나 독립운동단체의 통합 노력과 교육 활동 등을 하다가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주도하고 좌우합작의 일환으로 임정에 다시 참여, 1944년부터 1947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냈으며 주로 외교활동을 전개해나갔다. 

광복 후에는 김구 등과 함께 임정 환국 제1진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나섰으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은 임시정부 수립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견해를 수정, 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 운동에 앞장섰다. 3상 결정 부분 지지와 미소공위, 좌우합작 당시 테러에 시달려야 했다. 1948년 2월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였으나 1948년 5월 귀환 후, 불반대 불참가로 입장을 바꾸고 민족자주 연맹 당원들에게 초대 제헌의원 선거와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어 병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으로는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 외무총장, 파리위원장, 8월 구미 외교위 원부 위원장, 부위원장, 1920년 학무 총장, 1930년 8월 학무장, 11월 국무위원, 1932년 11월 국무위원 등을 지내고 1944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이었다. 대중정치나 선동정치를 경멸하였고 정당활동을 기피하였으며, 정당활동으로는 민족혁명당 주석, 민중 동맹 위원장, 민족자주 연맹 위원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1901년 - 미국의 물리화학자 라이너스 폴링.

1909년 - 영국의 문인 스티븐 스펜더.

1921년 - 프랑스 최후의 사형집행인 마르셀 슈발리에

1930년 - 대한민국 정치인 노신영.

1942년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디노 초프.

1947년 - 폴란드의 전 축구 선수 브워지미에시 루반스키.

1954년 - 벨기에의 수학자 장 부르겡.

1957년 - 대한민국의 전직 씨름선수 이봉걸.

1962년 - 대한민국의 야구인 이광근.
 
1965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광재.

1966년 - 필립 리브.

1968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정찬우.(컬투)

1973년 - 역대 최연소 주한 미국 대사 마크 리퍼트.

1974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적.

1975년 - 대한민국의 성우 이자명.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박진철. / 대한민국의 배우 김혜진 / 일본의 성우 하야미즈 리사.

1980년 - 대한민국의 가수 겸 뮤지컬배우 바다. / 대한민국의 래퍼 비지.

1984년 - 체코의 모델 캐롤리나 쿠르코바.

1985년 - 대한민국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이강석.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백지훈.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지에구 히바스 다 쿠냐.

1986년 - 일본의 성우 산페이 유우코.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허승민. / 대한민국의 배우 구재이 / 대한민국의 가수 윤혁(디셈버)

1987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정.

1988년 - 체코의 싱어송라이터, 배우 마르케타 이르글로바.

1992년 - 대한민국의 가수 건지 (가비엔제이). / 멕시코의 축구 선수 나옐리 랑헬.

1995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유회승 (엔플라잉)

1997년 - 대한민국의 가수 태양 (SF9).

사망

1452년 - 조선의 재상 황희.

1975년 - 대한민국의 시인 한하운.

1978년 - 미국의 한국계 영화배우 안필립.

1981년 - 대한민국 군인 겸 기업가 및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장 양국진.

1986년 - 스웨덴의 총리 올로프 팔메.

1989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 박세영.

2005년 - 대한민국의 화가 장우성.

2015년 - 터키의 소설가 야샤르 케말

2016년 - 미국의 배우 조지 케네디

2018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최기선

2019년 - 미국의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

 

기념일

2.28 민주운동 기념일: 대한민국

핀란드 칼레발라의 날

중화민국 평화 기념일(Peace Memorial Day)

스승의 날(Teachers' Day): 아랍 국가(Arab countries). 이란은 5월 2일

세계 희귀병의 날(2월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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