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뜻과 의미, 민족대표 33인과 기미 독립선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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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거리 곳곳에 태극기가 자랑스럽게 펄럭이던 그날 3.1절(삼일절)입니다. 3.1절은 1,919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일본의 무단통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항일만세운동으로 일제 강정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습니다. 모든 국민의 열망이었던 독립이라는 염원 하나로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던 선열들의 위업을 기리는 날입니다.

삼일절 뜻과 의미, 민족대표 33인과 기미 독립선언문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열린 회의에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자기 민족의 일은 자기 민족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나라나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라는 내용을 포함하여 평화를 위한 여러 가지 원칙을 제안했습니다.

이 발표가 바로 민족자결주의입니다.

이 발표 이후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던 때, 고종황제가 갑지가 붕어하게 됩니다.

붕어란 : 황제나 황후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

고종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국민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였으며, 또, 일제의 만행이라 의심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종황제 독살 상황도

이 시기에 국민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 국권 상실 이래 기회만을 찾고 있던 민족지도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발표와 재일 유학생의 2.8 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한데 겹쳐 민족적 항일의식이 고조되자, 이때가 한국 민족이 독립을 꾀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고, 거족적인 3.1 독립만세운동을 본격적으로 계획하게 된 것이죠.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웠던 종교단체와 교육기관에서 각각 독립만세운동의 추진계획을 세웠지만, 나중에는 거족적이고 일원화된 독립만세운도을 위해 서로 통합하게 됩니다.

독립운동의 3대 원칙을 정하기에 이르렀죠. 3대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 독립운동을 대중화할 것. 일원화할 것. 비폭력적으로 할 것.

각 단체들은 개별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는데 단독으로는 불가하단 판단을 하여, 기독교, 불고, 유림 등 각 교단을 총망라하기로 하였습니다. 동시에 대한제국시대의 유지들을 민족대표(33인)로 추대할 것에 합의를 하게 됩니다.

민족대표 33인 - 이미지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민족대표 33인 외 16인

1. 손병희 : 1861-1922 (천도교, 59세)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동학혁명 가담. 1897년 동학 3세 교주가 됨. 1907년 천도교로 개칭. 천도교를 대표하여 서명. 3.1 운동으로 3년형을 받고 복역하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보석으로 출감 후 사망.


2. 길선주 : 1869-1935 (기독교, 51세)
1907년 목사가 된 한국최초 목사 중 한 명. 기독교계 장로교파를 대표하여 두 번째로 서명함. 평양 장대현교회 설립.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기독교인이 됨. 태화관에는 서울 도착이 늦어 불참. 3.1 운동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으나 무죄로 풀려났음. 33인 중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음. 이후 전국을 돌며 전도에 힘씀. 1927년 말세론을 저술. 평남 고창 교회에서 뇌일혈로 사망.

3. 이필주 : 1869-1942 (기독교, 51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서울 출생. 기독교 감리교파를 대표하여 세 번째로 서명함. 3.1 운동으로 2년 복역. 이후 교육 사업에 힘씀. 신사 참배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

4. 백용성 : 1865-1940 (불교, 56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전북 장수 출생. 해인사 승려. 불교계를 대표해서 네번째로 서명함. 3.1 운동으로 1년 6개월 복역. 이후 일본의 대처승 정책에 반발하여 불교계 정화를 위해 노력. 대각사 창건. 태평양 전쟁 소식을 듣고 피를 토한 뒤 열반.

5. 김완규 : 1876-1949 (천도교, 44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서울 출생. 여수통신주사, 한성부 주사 역임. 3.1 운동으로 2년간 복역. 출옥 후 천도교 도사가 되어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함. 해방 후 국민 회재 정부장 역임.

6. 김병조 : 1877-1948 (기독교, 44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평북 정주 출생. 태화관 모임에는 참석치 못함. 3.1운동을 선천에서 지휘. 상해로 망명하여 임정에 가담함. 1924년 만주에서 저술 활동 및 후진 양성에 힘씀. [한국독립운동 사략] [대동 역사] [독립 혈사] 등 간행. 해방 후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 창당. 1946년 광복회라는 비밀결사 결성하여 지하운동을 펼치다가 소련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사망.

7. 김창준 : 1889-1956 (기독교, 31세)
민족대표 중 가장 어리다. 숭실중, 숭실전문대를 거쳐 일본 유학도 했다. 독립선언서를 선천에 보내는 임무도 수행했다. 3.1 운동 후 1925년 함경북도 영성 주재소 습격사건을 일으킴. 뒤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 해방 후 사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벌이다가 월북. 1948년 북한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이 되었다. 1950년에 서울에서 남조선 기독교도 연맹 위원장을 역임. 더 이상의 기록이 없음.

8. 권동진 : 1861-1947 (천도교, 59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서울 출생. 함안 군수, 육군참령 역임. 임오군란(1882) 때 일본 망명. 1906년 귀국하여 대한협회 부회장으로 계몽운동에 힘씀. 3.1 운동으로 3년간 복역. 신간회 부회장. 광주학생운동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 옥고. 해방 후 신한 민족당 당수, 민의원 등 역임.

9. 권병덕 : 1867-1944 (천도교, 53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청주 출생. 동학혁명 가담. 손병희 밑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천도교 안에서 전제관장, 금융 관장 등을 역임. 3.1 운동으로 2년간 복역. 소파 방정환의 아버지 방경수와 의형제. 방정환이 손병희의 셋째 사위가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함.

10. 나용환 : 1864-1936 (천도교, 56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남 성천 출생. 동학 혁명 참가.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11. 나인협 : 1872-1951 (천도교, 49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남 성천 출생. 동학 혁명 참가.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해방 후 간암으로 사망. 아내는 보따리장수로 아이들을 키우고 손자 나명재는 평택에서 산부인과 원장.

12. 양전백 : 1869-1933 (기독교, 51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평북 의주 출생. 최초의 장로교 목사 7인 중 하나. 1892년 김관근의 전도로 서울 도 사경회에 참석하고 기독교에 입문. 구성 신시 교회를 창설. 1894년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음. 1896년 휘트모어 의료사가 되었고 선천 선교부의 개설과 함께 선천읍교회를 시작. 1907년 최초의 7인 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1909년 선천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1911년 105인 사건으로 6년형 선고받고 2년간 복역. 각 학교 및 양로원, 고아원을 세우며 사회운동에 헌신. 3.1 운동으로 3년간 복역.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이 되어 신앙운동과 애국운동에 헌신, 저술 활동에 전념하던 중 별세.

13. 양한묵 : 1862-1919 (천도교, 58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전남 화순 출생. 1905년 헌정동지회 결성. 3.1 운동으로 체포되어 그해 여름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

14. 유여대 : 1878-1937 (기독교, 42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평북 의주 출생. 의주에서 3.1운동을 지휘했음. 이 때문에 서울에 늦게 도착해서 태화관 모임에는 참석 못함. 3.1 운동으로 2년간 복역. 1931년 병석에서도 민족계몽을 위한 저술활동을 계속함.


15. 이갑성 : 1889-1981 (기독교, 31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경북 대구 출생. 3.1운동때 학생시위운동 조직 및 전단 살포 등 중요 임무 수행. 2년 6개월 복역. 1933년 신간회에 관여하다가 상해로 망명. 1940년 귀국했다가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7개월 복역.
이갑성에 대해서는 그가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갑성은 '이와모토 쇼이치'(岩本正一)로 창씨개명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친일 의혹의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여 훈장이 삭탈 안됨.

16. 이명룡 : 1872-1956 (기독교, 47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북 정주 출생. 1911년 105인 사건으로 3년 복역.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종교, 산업, 교육 분야에서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미국으로 망명. 1945년 조만식과 함께 조선민주당 창당. 고문 취임. 북한 정권의 탄압으로 월남.

17. 이승훈 : 1864-1930 (기독교, 56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목사. 평북 정주 출생. 1911년 신민회 사건, 105인 사건으로 연달아 체포. 4년 2개월 옥고. 3.1운동으로 3년형 선고받고 복역 중 가출옥. 1924년 동아일보 사장. 물산장려운동. 1926년 오산학교 이사장 재임. 민족의식과 독립정신 고취를 가르치다가 사망. 종손자에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가 있음.


18. 이종훈 : 1858-1931 (천도교, 65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경기도 광주 출생.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의 시신을 수습한 사람. 동학 혁명 참가. 손병희와 사돈. 3.1운동으로 2년 복역. 1922년 고려혁명위원회 고문으로 추대. 만주에서 독립운동 중 고문 후유증으로 병사. 아들 이관영(손병희의 맏사위)은 1905년 이완용의 집을 방화하고 1907년 경기도 용문산에서 의병으로 일본군과 전투 중 사망했으며 손자 이태운도 보성전문학교에 재학하던 스무 살에 3.1 운동에 가담함.

19. 이종일 : 1858-1925 (천도교, 62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중추원의관 역임. 제국신문, 황성신문 사장 역임. 보성사 인쇄소 사장으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 3년형을 받고 2년 반 옥고. 고문 후유증으로 1925년 별세.

20. 임예환 : 1865-1949 (천도교, 55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남 중화 출생. 평안도 지방에서 동학 혁명 참여. 천도교 도사가 되어 평양에서 민중 계몽과 포교에 힘썼다.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출옥 후 계속 독립운동.

21. 박준승 : 1866-1921 (천도교, 54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전북 임실 출생. 장성, 남원, 임실 등 각지 궐기를 지휘.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중 사망.

22. 박희도 : 1889-1951 (기독교, 31세)
변절
황해도 해주 출생. YMCA 간사로 3.1운동 참여. 본래 3.1 운동과 별개로 기독학생 중심의 전민족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음. 기독교 측의 운동자금 출납 담당. 2년 복역. 이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또 2년간 옥고. 1927년 신간회 본부 간사. 그러나 1931년 동양 지광 창간 후 주간으로 있으면서 친일 행위. 조선 자치를 위해서 단체를 결성하려고 노력하기도 함. 1943년 학병 독려 강연회 가짐. 19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됨.

23. 박동완 : 1885-1941 (기독교, 35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경기 양평 출생. 3.1운동으로 2년 복역. 신간회 상임간사 역임. 1931년 만보산 사건 때 재만 동포 옹호 연맹 재무부장으로 현지 시찰. 1932년 하와이로 망명한 후 흥업구락부와 연락하며 국내 독립운동을 지원 중 병사.

24. 신홍식 : 1872-1937 (기독교, 48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충북 청주 출생.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출옥 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신앙운동과 독립운동을 계속. 신사 참배 거부 등으로 여러 차례 투옥됨.


25. 신석구 : 1875-1950 (기독교, 45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3)
목사. 충북 청주 출생. 1908년 기독교인이 됨. 1917년 목사 안수를 받고 서울 수표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 3.1 운동에 참여.  3.1 운동으로 2년간 복역. 신사 참배, 전승기원 예배 등 거부로 여러 번 투옥됨. 1946년 3.1절 기념 방송 사건으로 구금. 1949년 기독교민주당 비밀결사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로 북한 정권으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때 총살됨.

26. 오세창 : 1864-1953 (천도교, 56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서울 출생. 농상공부참의, 우정국 통신국장, 만세보 사장, 대한협회 부회장, 대한민보 사장 등 역임. 3.1 운동으로 3년간 복역. 서예가로 유명.

27. 오화영 : 1880-1962 (기독교, 40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89)
서울 출생. 3.1운동으로 2년 6개월 복역. 1927년 신간회 간부.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체포. 1939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6개월 구금됨. 해방 후 과도정부 입법의원 역임. 한국전쟁 때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납북됨.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 1996년 국립묘지에 위패 안장.

28. 정춘수 : 1875-1951 (기독교, 45세)
변절
충북 청주 출생. 3.1운동 때 남 감리교회 목사로 참여. 태화관 모임에는 참석하지 못함. 1년 6개월 복역. 1927년 신간회 본부 간사. 1937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105일간 고문을 당함. 1938년 친일단체인 경성 기독교연합회 부위원장이 됨. 1941년 국민총력연맹 가입. 조선임 전보 국단 참여. 그러나 적극적인 행위는 하지 않고, 창씨개명함.

29. 최성모 : 1874-1937 (기독교, 47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목사. 서울 출생. 3.1운동으로 2년 복역. 출옥 후 만주로 망명. 봉천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사망.

30. 최린 : 1878-1958 (천도교, 42세)
변절
함남 함흥 출생. 최남선을 보호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자기가 썼다고 주장했고, 보성고 등보 통학교 교장. 3.1 운동으로 3년 선고받고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 가출옥 당시 일제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간 것으로 보임. 이후 자치운동에 힘을 기울이다가 전면적 친일로 넘어감. 1931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 사장, 조선임 전보 국단 단장 역임. 한국전쟁 때 납북됨. 창씨개명함.

31. 한용운 : 1879-1944 (불교, 41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
충남 홍성 출생. 3.1 운동으로 3년 복역. 1925년 [님의 침묵] 발간. 1926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1931년 조선불교청년동맹 주도. 1937년 만당 사건으로 체포.

32. 홍병기 : 1869-1949 (천도교, 51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경기 여주 출생. 3.1운동으로 2년 복역 후 만주로 망명. 만주에서 고려혁명당 고문이 되었다가 신의주에서 체포. 다시 2년간 옥고. 출옥 후 천도교 장로로 교세 확장과 민족 운동에 힘씀.

 

33. 홍기조 : 1865-1938 (천도교, 60세)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
평남 용강 출생. 3.1운동으로 2년간 복역. 출옥 후 고향에서 청년들을 지도하던 중 병사.

여기까지가 서명한 33인입니다. 이후는 백업 요원들 명단. 시위를 조직, 확산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습니다.

 

34. 송진우 : 1889-1945 (교육계, 31세)
건국훈장 독립장(1963) 
3.1 운동으로 1년 6개월 복역. 출옥 후 동아일보 사장 취임.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사임. 1945년 총독부로부터 정권 인수 제의를 받으나 거절. 해방후 한민당을 결성. 복간된 동아일보 사장으로 취임. 암살됨.

35. 현상윤 : 1893-? (교육계, 28세)
변절. 3.1 운동으로 2년 복역했으나 무죄를 받음. 1937년 시국순회강연을 시작으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유도연합회, 녹기연맹 등의 친일단체에서 간부를 역임. 해방 후 고려대 초대 총장 역임. 한국전쟁 때 납북.

36. 최남선 : 1890-1957 (문인, 31세)
변절
3.1 운동으로 2년 6개월 복역. 독립선언서 기초안 작성. 1927년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위원. 1938년 중추원 참의. 1943년 학병지원 연설. 해방후 반민특위에 기소됨.

37. 함태영 : 1872-1964 (기독교, 48세)
건국훈장 독립장(1962)
함북 무산 출생. 한성재판소 검사, 대법원 복심법원 판사 역임. 태화관에 참석하였음. 3.1운동으로 3년 복역. 1952년 3대 부통령 역임.

38. 강기덕 : 1890-? (학생, 31세)
건국훈장 독립장(1990)
함남 덕원 출생. 3.1운동 당시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현 고려대) 학생대표로 파고다 공원 시위 계획, 주도.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500장을 받아 각 학교에 배부. 3.1 운동 당시 1년 6개월 옥고를 비롯 총 3차에 걸쳐 8년간 투옥. 한국전쟁 때 납북됨.

39. 김원벽 : 1894-1928 (학생, 27세)
건국훈장 독립장(1962)
황해도 안악 출생. 연희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 3.1운동으로 2년 복역. 출옥 후 신생활사, 시대일보사 종사

40. 박인호 : 1855-1940 (천도교, 66세)
건국훈장 독립장(1990)
충남 예산 출생. 천도교 4대 대도주로 3.1 운동에 천도교 결집을 위해 노력.

41. 노헌용 : 1866-? (천도교, 53세)
황해도 곡산 출생. 천도교 총부 금융 관장으로 3.1 운동에 필요한 자금조달책으로 활약. 체포되었으나 1920년 복심원에서 무죄 선고받음.

42. 김홍규 : 1874-? (천도교, 45세)
대통령 표창(1968)
서울 출생. 3.1 운동으로 1년 복역. 독립선언문을 인쇄한 인쇄소의 공장감독으로 2만 매를 인쇄하고 각지에 발송함. 체포되어 1년 복역.

43. 김도태 : 1891-1956 (기독교, 29세)
건국포장(1980)
평북 정주 출생. 사학자. 3.1운동으로 1년 8개월 복역. 1921년 휘문중학교 교사. 해방 후 조선 지리학회 회장. 1953년 이화여대 강사. 1954년 서울시사편찬위원.

44. 임규 : 1867-1948 (무직, 51세)
대통령 표창(1968), 건국포장(1977)
전북 익산 출생. 1919년 2월 27일 일본으로 건너가 귀족원, 중의원 등 각처에 독립선언서를 제출하다가 체포되었으나 무죄 방면됨.

45. 안세환 : 1887-1926 (기독교, 33세)
건국훈장 독립장(1963), 건국포장(1977)
평남 순안 출생. 1911년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5년형 선고. 항소심에서 무죄 방면. 평양 기독교 서원에서 독립운동. 3.1 운동 후 임규와 더불어 일본에서 활동. 체포됨. 출옥 후 정신이상으로 의식 없이 지내다가 죽음.

46. 이경섭 : 1874-? (천도교, 45세)
건국훈장 독립장(1962)
황해도 곡산 출생. 3.1 운동으로 1년 6개월 복역. 3월 1일에 곡산, 서흥, 수안 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함.

47. 정노식 : 1899-1965 (무직, 21세)
3.1 운동으로 2년 복역. 1921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입당.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 집행위원. 1924년 조선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전형위원. 해방 후 남로당 중앙상무위원. 이후 월북하여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등 역임.

48. 김지환 : 1892-1972 (기독교, 29세)
건국훈장 독립장(1963)
평북 정주 출생. 3.1운동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보내는 독립 탄원서 전달책으로 만주에 있던 임시정부의 현순에게 다녀오다 체포되었으나 무죄로 풀려남.

49. 김세환 : 1889-1945 (기독교, 21세)
건국훈장 독립장(1963)
경기 수원 출생. 수원 삼일 남녀학교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함. 3.1 운동 당시 수원, 이천, 충청남북도를 책임짐. 3.1 운동을 해외로 알릴 인물들을 모색함. 고등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났으나 수개월 복역하며 고문을 당함.

 

 민족대표 33인 외 16명은 변절자는 5명이며, 변절자라 함은 창씨개명과 친일활동을 한 자임을 뜻합니다.

 

기미 독립선언서

기미 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 해석문

우리는 오늘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합니다.
이를 세계만방에 알려 인류 평등의 큰 진리를 환하게 밝히며, 이를 자손만대에 알려 민족의 자립과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만 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이를 선언하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을 모아 이를 두루 밝히며, 영원한 민족의 자유와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하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제기하니, 이는 하늘의 명백한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 인류 공동 생존권의 정당한 발로이기에 세상의 어떤 힘도 이를 막거나 억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의 희생이 되어 유사 이래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고통을 당한 지 이미 십 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정신상 발전에 장애를 받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영광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이겠습니까! 슬픈 일입니다.

오랜 억압과 울분을 떨치고 일어나려면, 현재의 고통을 헤쳐 벗어나려면, 장래의 위협을 없애려면, 땅에 떨어진 민족의 양심과 국가의 체면과 도리를 떨쳐 얻으려면, 각자의 인격을 정당하게 발전시키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현실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자자손손에게 영원하고 완전한 행복을 안겨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바로 민족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천만 겨레마다 마음속에 칼을 품은 듯 굳게 결심하니, 인류 공통의 성품과 이 시대의 양심이 정의라는 군사와 인도주의라는 창과 방패로 호위하고 도와주고 있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싸우니 어느 강도를 꺾지 못하겠습니까! 물러가 일을 꾀하니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겠습니까! 병자 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배신을 죄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학자들은 강단에서, 통치배들은 실생활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대대로 닦아 온 찬란한 위업을 식민지로 삼아 문화민족인 우리를 야만족같이 대우하여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무도함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닙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습니다.

현재를 꼼꼼히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것뿐이지,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 남을 시샘하여 쫓아내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배들의 부귀공명의 희생이 되어 압제와 수탈에 빠진 이 비참한 상태를 바르게 고쳐서 억압과 착취가 없는 공정하고 인간다운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민족의 요구에서 나온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침략·강점이었으므로, 그 결과는 마침내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들고 있는 오늘날의 실정을 보십시오!

용감하고 현명하게 그리고 과감하게 과거의 잘못을 뜯어고치고, 참된 이해와 선린을 바탕으로 우호적인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것이 서로 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지름길인 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원한과 분노에 쌓인 이천만 민족을 폭력으로 구속하는 것은 오직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동양의 안전과 위태함을 좌우하는 사억 중국인들은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시기가 갈수록 두터워진 결과,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넘어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이 될 것이 분명하니,

오늘 우리 한국의 독립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정당한 생존과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의 선진 후원국으로서의 중대한 책임을 온전히 이루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악몽처럼 괴로운 일본 침략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한 동양의 평화로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수적인 받침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사소한 감정상의 문제이겠습니까!

아!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무력의 시대가 가고 도덕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과거 한 세기 동안 갈고닦으며 키우고 기른 인도주의 정신이 이제 막 새로운 문명의 밝은 빛을 온 인류 역사에 비추기 시작하였습니다. 새 봄이 온 세계에 돌아와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혹심한 추위가 사람의 숨통을 막아 꼼짝 못 하게 한 것이 저 지난 한 때의 형세라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때의 형세이니, 천지의 돌아온 운수에 접하고 세계의 새로 바뀐 조류를 탄 우리는 아무 주저할 것도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본래부터 지녀 온 권리를 지키고 온전히 하여 생명의 왕성한 번영을 맘껏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천지에 순수하고 빛나는 민족문화를 찬란히 꽃 피우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떨쳐 일어났습니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남녀노소 없이 어둡고 답답한 옛 보금자리로부터 분연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 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억만 대의 조상님들의 신령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를 돕고 온 세계의 새로운 형세가 우리를 밖에서 호위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입니다. 다만 앞길의 광명을 향하여 힘차게 곧장 나아갈 뿐입니다.

공약삼장 해석문

오늘 우리의 이번 거사는 정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생존과 영광을 갈망하는 민족 전체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인 감정으로 정도에서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지 맙시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최후의 한 순간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흔쾌히 발표합시다. 모든 행동은 질서를 가장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합시다.

- 조선 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 -

 

민족대표 33인이 결정되고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기초하여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소성사 인쇄소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2만 1,000매를 인쇄하였습니다. 인쇄가 완료된 독립선언서는 2월 28일 아침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되었습니다.

 

본래 거사일은 고종황제의 인산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지방 사람들이 서울에 모일 것을 예측하여 3월 3일로 내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산일을 택하는 것은 전 황제에 대한 불경이라는 천도교 측의 의견과 2일은 일요일이므로 안식일이라 피하자는 기독교 측의 의견을 반영하여 최종 3월 1일로 결정하게 된 것이죠.

 

민족대표들과 학생들은 많은 국민들이 집결하는 이때를 이용하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자 하였습니다.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같은 때 탑골공원에선 학생들이 기미독립선언서를 공표하였습니다.

 

탑골공원의 옛 이름 파고다 공원

 

본래 독립선언식은 탑골공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하여 민족대표는 태화관에 모였던 것이며, 탑골공원의 학생들은 나타나지 않는 민족대표를 기다리다가 한 청년이 자진하여 등단,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던 것입니다.

국민들은 학생들 독립선언서 발표에 감동을 받았고 탑골공원부터 시작된 대한독립만세 외침은 서울, 지방, 그리고 해외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3월 21일에는 제주와 조천리 시위로 바다를 격한 제주도까지 파급되어,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비폭력운동이었던 3.1 운동을 발포로 무자비하게 탄압하였고, 이때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국민들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3월 1일부터 4월 말까지 두 달 동안 대한민국 국민들은 모두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민족의 염원을 풀어냈답니다.

 

운동 규모 (1919년)

도별 참가군 참가인원 운동기간
경 기 도 22 약 47만 3. 1∼4.23.
강 원 도 20 약 2만 5천 3. 2∼4.21.
충청북도 9 약 2만 8천 3.19∼4.19.
충청남도 13 약 5만 3. 3∼4.12.
전라북도 14  1만 3. 3∼4.18.
전라남도 18 수 만 3. 3∼4.18.
경상북도 20 약 2만 6천 3. 8∼4.28.
경상남도 21  10만 3. 3∼4.29.
황 해 도 17 약 7만 3. 1∼4.22.
평안남도 15 약 6만 3. 1∼4.16.
평안북도 18  15만 3. 1∼4.11.
함경남도 15 약 2만 5천 3. 1∼4. 8.
함경북도 10 약 2만 3.10∼4.19.
212  110만 3. 1∼4.29.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운동 상황 (1919.3.1∼4.30.)

도별 시위횟수 단순시위 시위충돌 일본관언사상 경찰헌병관서습격 일반관서습격
경 기 도 288 180 108 24 29 51
강 원 도 74 53 21 7 8 9
충청북도 56 28 28 20 18 8
충청남도 75 35 40 8 5 5
전라북도 39 32 7 - 3 5
전라남도 44 40 4 - 1 -
경상북도 62 36 26 13 12 6
경상남도 121 82 39 18 22 16
황 해 도 137 84 53 30 19 8
평안남도 85 59 26 14 15 1
평안북도 114 56 48 18 11 10
함경남도 75 57 18 9 12 1
함경북도 44 36 8 5 4 -
1,214 778 426 166 159 120
자료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위 표에 나오는 집계 외에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투쟁했던 거대한 독립운동입니다.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어가자, 일제는 군경에 의한 비인도적이고 잔혹한 탄압으로 이 만세운동을 종식시키려 하였습니다. 전국 각 도·군·면과 기타 요지에 강력하고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헌병·경찰을 분산 배치시키고, 또 새로운 무기로 장비한 정규 일본군 2개 사단을 주둔시켜 언제든지 신속하게 출동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죠.


일본군은 1915년 이래 한반도에 상주하였습니다.

즉 19사단은 나남에 사령부, 함흥에 제37여단, 나남에 제38여단을 두었으며, 제20사단은 서울 용산에 사령부, 평양에 제39여단, 용산에 제40 여단을 두었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3월 1일 평양에 있던 보병 제77.78 연대를 즉시 만세운동 발생지역으로 파견하였고, 3월 12일 각 연대에서 병력을 뽑아내어 성진. 북청. 춘천. 공주. 안동. 충주. 이리. 송정리. 진주 등지에 배치하였습니다. 또, 평안남북도 및 황해도에는 제39여단의 잔여 병력을 상황에 따라 배치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헌병. 경찰뿐 아니라 완전 무장한 2개 사단 이상의 병력을 전국에 분산시킨 일제는 시위 운동자의 대량 학살, 피검자에 대한 무자비한 고문으로 만세운동을 종식시키려 하였고, 평화적 시위를 하는 군중에게 대량 학살을 감행하여 곳곳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일제의 폭력적인 탄압으로 한국 민중이 입은 피해 상황은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 지혈사]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참가자 수와 피해상황

구분 회집횟수 회집인수 사망자수 부상자수 피검자수
경기 297 665,900 1,472 3,124 4,680
(72) (243)
황해 115 92,670 238 414 4,218
(36) (82)
평안 315 514,670 2,042 3,665 11,610
(231) (519)
함경 101 59,850 135 667 6,215
(39) (139)
강원 57 99,510 144 645 1,360
(23) (47)
충청 156 120,850 590 1,116 5,233
(49) (175)
전라 222 294,800 384 767 2,900
(10) (21)
경상 223 154,498 2,470 5,295 10, 85
(76) (211)
국외 51 48,700 34 157 5
1,542 2,023,098 7,509(536) 15,961(1,437) 46,948

 

 

이 통계는 국내에서 조직 운영된 연통제의 보고서에 근거한 것이어서 만세운동 발생 당시의 피해상황일 뿐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진 설움 가득한 외침은 또 다른 해외 식민지 국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국의 5·4 운동, 간디의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준 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3·1 운동의 목적은 국권회복과 민족자주에 있기 때문에, 비록 일제의 무력 탄압과 세계 열강의 외면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민족사적·사상사적·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남기고 있습니다.

 

먼저 민족사적 의의로는 3·1 운동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이로 인해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렬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의 무단통치방법을 이른바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고,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문예운동. 산업 운동이 활성화되어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였습니다. 사상사적 측면에서의 의의를 살펴보면 자주독립사상을 들 수 있는데요.

 

이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헌법 전문에 있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3.1 운동은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건립하는 것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경제사적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3.1 운동 이전부터의 노동자 파업 운동. 납세거부운동. 물산장려운동. 국산품 애용운동 등 경제적 자립을 꾀하는 운동은 3.1 운동 이후에도 계속되어 민족기업을 건설하려는 운동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민족기업의 붐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한국 경제사의 내재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내용은 민족대표를 필두로 전체적인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 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고 느끼게끔 하는 거 같네요. 암울했는 시대의 우리 소중한 역사를 기억하고 되새겨 후손에게도 역사를 잊지 않는 그런 대한민국의 국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한독립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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