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6일

반응형


사건

1917년 -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다.

1917년 - 핵이 아닌 폭발 사고 중 가장 큰 사고인 핼리팩스 대폭발이 발생하다.

1921년 - 영국과 아일랜드가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맺었다.

사진 출처 the journal뉴스

영국-아일랜드 조약(영어: Anglo-Irish Treaty, 아일랜드어: An Conradh Angla-Éireannach)은 공식적으로는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조약 체결을 위한 문서(Articles of Agreement for a Treaty Between Great Britain and Ireland)라고 불린다. 이 조약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영국)과 아일랜드 공화국 사이의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임시의회의 대표들이 영국-아일랜드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대영 제국하의 자치를 확립했다.

영국 정부의 대표들과 아일랜드 공화국의 사절단이 1921년 12월 6일 런던에서 체결했다. 아일랜드 의회에 의한 조약의 비준을 위해서는 남아일랜드 의회와 영국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조약 사실이 누설됐기에(이 조약은 온건파 세력이 일방적으로 체결한 조약이었다.) 아일랜드 의회에서 겨우 비준될 수 있었다. 정식으로 법제화하긴 했으나 조약사실의 누설은 아일랜드 내전을 야기시켰다.

조약으로 인해 형성된 아일랜드 자유국은 1922년 12월 6일 왕실 선언을 통해 유효화되었으며 후에 아일랜드 제3대 의회(Third Dáil)과 영국에 의해 법제화되었다.

■조약의 내용

주요 조항은 다음과 같다:

● 영국군은 아일랜드 공화국에서 대부분 철수한다.

● 아일랜드의 대부분은 캐나다, 뉴펀들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그리고 남아프리카 연방과 같이 대영 제국의 자치령으로서 인정받는다.

● 아일랜드 자유국의 주요한 주는 대영 제국의 다른 영토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아일랜드 자유국은 영국의 군주가 상징적 지배자로 군림한다.

● 새로운 자유국 의회의 의원들은 자유국에 충성의 맹세를 해야한다. 둘째로 국왕 조지 5세와 그의 왕위 계승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해야한다.

● 북아일랜드는 조약이 유효화되는 한 달 이내에 선택에 의해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분리된다.

● 만약 북아일랜드가 제의를 거절한다면 아일랜드 국방 위원회가 아일랜드 자유국과 북아일랜드 사이의 경계를 만들것이다.

● 영국은 조약의 담보로 개방 항구(일명 조약 항구)의 수를 영국 해군을 위해 조절한다.

● 아일랜드 자유국은 대영 제국의 은혜를 감사히 받고 충성해야한다.

● 조약의 내용은 아일랜드의 모든 법보다 우선권을 가진다.

 


조약 협상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의회의원  (영국의 수상)

버컨헤드 공

윈스턴 처칠 

오스턴 체임벌린

고든 헤월트경

아서 그리피스 (아일랜드 대표단의 지도자)

마이클 콜린스 (아일랜드 공화국의 재무부 장관)

로버트 바턴

이먼 더건

조지 게번 더피

■상세한 내용과 배경

이몬 데 발레라는 아일랜드 사절단을 몇가지의 비밀 지령과 조약의 초안을 가지고 1921년 런던으로 협상을 위해 파견했다. 협상은 공식적으로 2주간 진행되었다. 아서 그리피스과 마이클 콜린스의 보고에 따르면 두 대표단은 각 대표단 중 오직 두명씩만 참가하는 비공식적인 협상을 시작했다고 했다. 아일랜드측에서는 이 사람들은 항상 아서 그리피스와 마이클 콜린스였고 영국 측에서는 네빌 체임벌린이 항상 참가했다. 영국 측의 두 번째 참가자는 자주 바뀌었다. 12월 말에 아일랜드 대표단은 더블린으로 돌아와 그들의 지령에 따라 내각과 논의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콜린스와 그리피스는 서약에서의 영국의 이권과 방위 및 무역협정, 그리고 국방 위원회에 관련된 조약의 마지막 세부사항을 조율했다. 콜린스와 그리피스는 다른 사절단이 조약에 서명하도록 설득했다. 조약이 체결된 사실을 이몬 데 발레라가 들었을 때 그는 내각회의에서 조약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성명서를 제출했다. 내각회의 끝에 데 발레라는 조약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조약의 내용들은 아일랜드 공화국의 지도부를 갈라놓았다. 공화국의 대통령인 이몬 데 발레라는 소수의 조약반대세력을 이끌었다. 주 논점은 공화국의 독립보다 지배권(충성과 성실을 맹세로 대표된다.)의 상태였다. 분할이 비록 분명한 사실이긴 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양 측은 국방위원회가 민족주의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자유국에 편입하고 북아일랜드의 크기는 정치적으로 최소한 성장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분할할 것이라고 믿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아일랜드 제2대 의회(Second Dáil)는 공식적으로 1921년 12월에 조약을 비준했다. (아일랜드 의회만큼이나 많은 수의 의원이 있고 영국 헌법상 합법으로 인정되어 조약을 비준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남아일랜드 의회는 1922년 1월에 비준했다.) 데 발레라는 대통령직을 사임했고 아서 그리피스가 새 대통령에 취임했다. 마이클 콜린스는 남아일랜드 의회의 후임격이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 임시정부를 조직했다. 1922년 12월,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 아일랜드 헌법이 아일랜드 제3대 의회(Third Dáil)에 의해 통과되었다.

조약 반대세력은 무력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아일랜드 내전 (1922년 - 23년)을 발발시켰다. 1922년 주요한 서명자인 그리피스 대통령과 마이클 콜린스가 모두 사망했다. 그리피스는 노환으로 사망했고 콜린스는 그리피스가 죽은 지 약 일주일 뒤에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로 조약반대 성향의 공화주의자에게 1922년 8월 Béal na mBláth에서 암살당했다. 두 사람의 직위는 모두 윌리엄 T. 코즈그레이브가 계승했다.

법에서 영국 국왕과 총독 그리고 조약 그 자체의 우월성에 대한 내용(아일랜드에 불평등한 내용들)은 1932년 아일랜드 자유국의 헌법에서 완전히 삭제되었고 영국 의회는 웨스트민스터 법을 이어서 제정했다.

이 법은 잔존하거나 최근에 만들어진 모든 지배권을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영국 의회의 어떠한 법에도 간섭(subject)을 받지 않았다.(이 법의 예외적인 경우는 오직 캐나다뿐이었다. 그들은 영국의회의 지배를 받길 자청했고 1982년이 돼서야 간섭이 끝났다. 그들이 자청했던 이유는 연방정부와 지방정부가 캐나다 헌법의 공식적인 내용을 개정하는 것에 서로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는 영국 의회가 그 전에 통과시킨 어떤 법도 그들의 입맛에 맞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조약은 "자유를 얻기 위한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데 발레라는 스스로 1930년대의 자신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가 그의 반대자들과 1920년대동안의 독립의 안정성에 대해 말하던 것들에 대해 고백했다. 그는 1932년, 그의 아들에게 그가 정부에 들어간 뒤 코즈그레이브의 피네 게일당의 행정심의회에 대한 문서를 읽은 후 "그들은 굉장했다."고 말해주었다(데 발레라는 자신이 조약에 반대한 사실을 후회했다.)

오늘날 데 발레라의 당인 피아나 페일당의 당원들을 포함한 아일랜드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약에 반대한 것이 큰 실수였다는 것과 그것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하는 점에 동의한다. 비록 1914년부터 영국 정부는 전 아일랜드의 완전한 자치를 원했지만 영국 의회는 중무장한 개신교 연합론자들의 손에 의한 얼스터 가톨릭신자들의 대량 학살없이는 1921년 그 당시에는 아일랜드가 완벽한 독립을 부여받을 순 없다고 믿었다. 그때 비록 전 국토에 연합론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북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연합론자들이 자치에 반대하여 일으키는 폭동은 아일랜드에서의 내전뿐만 아니라 "모국"에 대한 반란이 되어왔다. 연합론자들이 그들이 편안하게 지배할 수 있다고 느끼는 6개주에 대한 분할과 함께 26개주의 아일랜드에게로의 주권이양은 그 당시에 가능한 최선의 타협이었다.

사실 아일랜드가 받은 주권의 정도는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가 누린 것과 동등한 것이었고 오히려 1914년의 자치법에서의 권리보다 훨썬 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확실히 19세기에 찰스 스튜어트 파넬가 말한 자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진이었다.

더 나아가서, 비록 그것이 그때 바로 현실화되지 않았으나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분쟁을 일으켰다. 소량의 탄약과 무기가 남아있었다. 콜린스가 처음으로 영국인들이 1921년 중반에 정전을 요청했다는 것을 들었을 때, 국왕 조지 5세의 북아일랜드 의회 개회에서 화해를 호소했을 때, 콜린스는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비록 영국인들이 그것을 절대 실현시키지 않았으나 어쩌면 그 기간 동안 IRA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을지도 모른다.

데 발레라는 한 차례 그의 최대의 실수가 뭐였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답했다. "조약에 동의하지 않은 것". 유명한 아일랜드의 총리인 버티 에이헌은 아일랜드 자유국의 성립과 조약의 체결 같은 1922년 전후의 일련의 사건들이 결과적으로 영국과 아일랜드 독립의 국제적인 인식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1928년 - 콜롬비아에서 바나나 학살이 일어났다.

1950년 - 대한민국 국군, 중공군의 개입으로 38선 전역에서 철수. 조선인민군 평양 재점령.

2007년 - 2007년 강화 총기 탈취 사건이 일어났다.

2008년 - 민주노총 조직강화위원장 김모가 민주노총 위원장 이석행 외 간부들을 숨겨준 초등학교 교사 이모를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아파트에 찾아가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추후에 민주노총과 전교조는 피해자 구제보다 사건 은폐에 가담해 논란거리가 되었다.

2014년 - 태풍 하구핏이 필리핀을 강타해서 65만여명이 긴급 대피하였다.


문화

1877년 -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가 창간됨.


탄생

1421년 - 잉글랜드의 왕 헨리 6세

1917년 - 미공군(USAF) 예비역 대령, 6.25 참전용사 딘 헤스.

1920년 - 미국의 재즈 음악가 데이브 브루벡.

1929년 - 대한민국의 비전향장기수 신인영.

1950년 - 일본의 음악가 히사이시 조.

1958년 - 대한민국의 성우 김준.

1963년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나경원

1966년 - 대한민국의 배우 심혜진.

1975년 - 이탈리아의 기업인 안드레아 아녤리.

1979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류담.

1985년 - 대한민국의 가수 타이미.

1988년 - 대한민국의 배우, 모델 고은아.

1992년 - 대한민국의 기계 체조 선수 양학선.

사진출처 조선일보

양학선은 대한민국의 기계 체조 선수이다. 2012년 하계 올림픽 기계 체조 남자 도마 종목의 금메달리스트이자, 대한민국 체조 종목 최초의 금메달 리스트이다.

■ 생애

양학선은 1992년 12월 6일 전북 고창군 공음면에서 태어나, 본관은 제주다. 2011년 도쿄에서 열린 기계 체조 세계선수권대회 도마에서 금메달, 2013년 10월 6일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열린 2013년 국제체조연맹 기계 체조 세계선수권 도마 종목 결선에서 평균 15.533점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기계 체조 세계 선수권 대회 2연속 1위를 하였다.

■ 경력

● 2014 인천아시안게임 체조 남자 도마 은메달

● 2013년 제44회 기계체조 세계선수권대회 도마 금메달, 카잔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기계체조 남자 도마 금메달, 국제체조연맹 월드컵 대회 도마 금메달

● 2012년 도요타컵 기계체조 초청대회 도마 우승, 제93회 전국체육대회 체조 남자일반부 도마 금메달, 제30회 런던올림픽 체조 남자 도마 금메달

● 2011년 제43회 기계체조 세계선수권대회 남자 도마 금메달, 코리아컵 고양 국제체조대회 남자체조 도마 1위

● 2010년 아시안 게임 체조 남자 개인 도마 금메달, 아시안 게임 체조 남자 단체 동메달, 아시아 주니어 기계체조선수권대회 링 금메달, 아시아 주니어 기계체조선수권대회 도마 금메달

● 2008년 전국체육대회 남자체조 제1경기 단체종합 1위, 전국체육대회 남자체조 제2경기 개인종합 1위, 전국체육대회 남자체조 제3경기 도마 1위

■ 학력

광주광천초등학교, 광주체육중학교, 광주체육고등학교, 한국체육대학교,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 수상

2010년 대한체조협회 최우수 체조 선수상

제57회 대한체육회 체육상 시상식 경기부문 우수상

제58회 대한체육회 체육상 우수상

제58회 대한체육회 체육상 경기부문 남자 최우수상

제50회 대한민국 체육상 경기상(선수부문 최고상)

제17회 코카콜라 체육대상 최우수선수상

2012년 올해의 브랜드 대상 특별상, SFCC 어워드 스포츠 부문 수상, 동아스포츠대상 특별상, 대한민국 인재상

제18회 코카콜라 체육대상 우수선수상

제59회 대한체육회 체육상 경기부문 남자 최우수상

■ 활동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 대회 홍보대사

대외경제협력기금 홍보대사

행복바라미 모금캠폐인 홍보대사

투르드 코리아 홍보대사

굿월스토어 홍보대사

스포츠닥터스 홍보대사


사망

343년 - 동로마 제국의 기독교 성직자 성 니콜라우스

사진출처 경향신문

니콜라우스(270년 3월 15일 ~ 343년 12월 6일)는 3세기~4세기 동로마 제국에서 활동하였던 기독교의 성직자로, 산타클로스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니콜라오, 니콜라스, 니콜라라고도 한다.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축일은 12월 6일이다. 상징물은 황금이 든 세 개의 자루이며, 어린이·죄수·선원·그리스·벨기에·불가리아·시칠리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케도니아 공화국·슬로바키아·그루지야·로렌·러시아·대한 성공회의 수호 성인이다. 대한민국의 서울에는 그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과 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이 세워졌다.

■생애

니콜라우스는 270년 (또는 270 년과 286 년 사이에) 소아시아 의 리키아 지방의 파타라 에서 태어났다. 매우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자신에게 막대한 유산이 돌아오자 그것을 모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사용하였다. 기독교를 믿은 후 신부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리키아 지방의 도시인 뮈라 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당시 뮈라의 주교가 죽고 그 후계자로 마땅한 신부가 없자 다른 지방의 주교들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하늘에서 “내일 아침 제일 먼저 교회에 들어오는 자를 주교로 삼아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때마침 니콜라우스는 그 날 뮈라에 찾아왔으며,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제일 먼저 교회에 들어와 참배하였고, 그로 인하여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때 투옥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나중에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무사히 석방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쇄신과 선교 활동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도 참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 성직자를 때렸다가 투옥되었다. 옥중에 있던 그에게 한밤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는데, 예수는 그에게 성서를 건네주었고 마리아는 그에게 오모포리온 을 어깨 위에 둘러주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경비병이 보니 니콜라우스가 감옥 안에서 오모포리온을 두른 채 성서를 읽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것이 기적이라며 너나할것없이 니콜라우스에게 달려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다.

또한 니콜라우스 주교는 예전부터 했던 사회선교를 곧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일을 더욱 크게 확대시켜 그의 교구는 늘 자금이 넉넉하지 못하여 성직자들이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다. 그의 행적 가운데 가난한 집안의 세 딸에게 지참금을 준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세 딸을 둔 한 아버지가 있었는데, 너무 가난해 딸들을 시집보낼 수 없게 되자 사창가로 팔아버릴 결심을 했다. 우연히 이 소식을 들은 니콜라우스는 그 가난한 딸들을 돕고자 했으나 겸손한 성격이었던 그인지라 대놓고 낮에는 못하고 밤중에 남 몰래 창문으로 딸들이 출가하기에 넉넉할 만큼 황금이 들어있는 자루 세 개를 던져 놓고 돌아갔다.

그 덕분에 세 딸은 사창가로 팔려갈 위기를 모면하여, 정당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수세기를 거치면서 니콜라우스의 축일에 아무도 모르게 선물을 주는 관습으로 발전하였다. 이 외에도 사형 직전에 몰린 무죄한 죄수들을 구출하고, 난파선의 승객들을 구출하는 등 그와 관련된 전설은 부지기수이다.

343년 (또는 326 년과 365 년 사이에) 니콜라우스가 죽자 그의 명성은 곧 전 유럽에 널리 알려졌으며, 1087년에는 그의 유해를 바리로 이전하여 예배당을 세웠다. 그 후 그 예배당에서 각종 기적들이 일어났다고 한다.

한편, 니콜라우스는 산타클로스의 원형이기도 하다. 라틴어로 성 니콜라우스를 뜻하는 상투스 니콜라우스(Sanctus Nicolaus)를 네덜란드어 로는 산테 클라스라 불렀는데, 이 발음이 영어식으로 변형되어 오늘날의 산타클로스가 된 것이다.

1352년 - 198대 로마 교황 클레멘스 6세

1771년 -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병리학자 조반니 바티스타 모르가니

1779년 - 프랑스의 화가 장바티스트시메옹 샤르댕

1868년 - 독일의 언어학자 아우구스트 슐라이허

1926년 - 구한말의 정치인 이병무

1956년 - 인도의 정치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2007년 - 대한민국의 군인 박양원

2015년 -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장성만

2017년 - 프랑스의 가수이자 배우 조니 알리데


기념일

성 니콜라스 데이(Saint Nicholas Day): 서방 기독교

반응형

'보관함 > 오늘의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역사 12월 11일  (4) 2019.12.11
오늘의 역사 12월 10일  (4) 2019.12.10
오늘의 역사 12월 9일  (10) 2019.12.09
오늘의 역사 12월 8일  (6) 2019.12.08
오늘의 역사 12월 7일  (4) 2019.12.07
오늘의 역사 12월 5일  (4) 2019.12.04
오늘의 역사 12월 4일  (6) 2019.12.04
오늘의 역사 12월 3일  (0) 2019.12.03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