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3.15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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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소소한 H입니다.

 

2020년을 맞이한 지금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나라 헌법 제1조를 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020년 올해는 3.15 부정선거, 3.15 개표조작이 발생한 지 6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리고 곧 있으면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도 실시되죠.

 

오늘은 3.15 부정선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는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해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선거와 대한민국 제5대 부통령 선거를 말합니다.

이 시기에 대통령 선거는 후보로 등록한 두 명 중 한 명이 선거 전에 사망해 사상 최초로 한 명의 후보에 대한 선거로 치러졌고, 선거법 규정에 따라 선거권자의 3분의 1 이상을 득표한 이승만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이기붕 후보가 79.2%의 득표율로 제5대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부정선거로 밝혀져 각지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항의 시위가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를 시위하던 학생들 중 김주열 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화장된 유골이 마산 앞바다에 유기되면서 후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 시위대와의 대화를 통해 이기붕 부통령 부정선거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후 즉각 하야하였습니다.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

 

그 당시 대통령 선거에는 이승만 자유당 후보와 조병옥 민주당 후보 등 2인만이 입후보하였고, 이외에도 출마를 시도한 정당 및 후보자가 있었으나, 자유당 측에서 공권력과 정치 깡패를 동원해 대대적인 입후보 방해를 자행해 모두 무산되었습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 공작을 펼치는 한편, 80대 노인인 이승만 대통령의 서거 시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어있는 부통령 자리를 다시 한번 노리기 위해 이기붕 추대 공작도 병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유당은 1959년 6월 29일 이승만, 이기붕 진용을 재구축하였고 서둘러 출마를 강행한 것입니다.

 

자유당 대통령, 부통령 후보

 

자유당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이승만 부통령 후보 이기붕

제1,2,3대 대통령

제헌 국회의장

제헌 국회의원

제3대 전, 후반기 제4대 전반기 민의원 의장

제3대 국방부 장관

제3,4대 서울 특별시장

제3,4대 민의원 의원

 


그러나 김준연 통일당 부통령 후보, 임영신 대한 여자 국민당 부통령 후보 등이 대통령으론 이승만을 지지한다면서 부통령 선거전에 출마하였고, 이승만 지지 표가 갈려서 패했던 4년 전 부통령 선거 때의 상황이 재현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3.15 부정선거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민주당은 지난 부통령 선거와 민의원 의원 선거에서의 연이은 선전으로 자유당을 강력하게 위협하고 있었지만, 민주당 내부에서는 신파와 구파 간의 갈등이 날이 갈수록 심화돼 후보 결정도 하게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은 1959년 11월 26일 정, 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구파의 조병옥 박사를 대통령, 신파의 장면 박사를 부통령 후보를 선출하게 됩니다.

조병옥은 선거를 한 달가량 앞둔 1960년 2월 15일 지병으로 미국에서 요양하던 도중에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이승만은 단독 후보가 되었고, 지난 대선 때 신익희가 유세 중 사망하였던 것에 이어 민주당은 두 번째로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대선 후보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논란이 많았다고 합니다. 자유당의 공장으로 연이어 두 명의 대통령 후보가 사망했다고 말입니다. 정확한 근거는 밝혀지지 않습니다.

 

민주당 대통령, 부통령 후보

 

민주당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후보
대통령 후보 조병옥 부통령 후보 장면

제5대 내무부 장관

제3,4대 민의원 의원

초대 경무부장

제4대 부통령

제2대 국무총리

제헌 국회의원

초대 주미 대사

 

 

선거벽보

 

부정 선거 계획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은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었습니다. 전쟁 이후 미국의 무상 원조가 줄어 민생고가 심해진 데다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자유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고 있었던 것이죠. 게다가 두 차례에 걸친 무리한 개헌으로 인해 민주주의와 헌법을 파괴하는 당이라는 낙인이 찍혀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내무부 관료들과 이정재, 임화수 등 정치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부정 선거와 개표 조작을 감행하였습니다.

 

자유당은 전국의 공무원과 경찰 등 공권력은 물론 정치 깡패, 완장 부대까지 동원해 야당의 선거 운동을 방해하고 주민들에게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하도록 압박하였습니다. 자유당은 또한 야당 참관인들을 갖은 핑계로 투표장에서 끌어내었으며, 투표자들을 3인 1조로 투표하게 하고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기 전에 자유당 측 참관인에게 보여주도록 하는 공개 투표를 시행했고, 유권자들에게 투표 방법을 교육하는데 쓰겠다는 핑계로 가짜 투표용지를 만들어두었다가 투표함에 무더기로 투입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공작에는 경찰이 가담하고 있었슷니다. 이에 야당과 몇몇 유권자들이 경찰이 수사는커녕 오히려 폭력을 조장하고 있다며 호소하였지만, 자유당은 정치 깡패들로 하여금 폭력 소동을 일으키게 해 이들을 탄압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 3월 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에서 각각 민주당 간부가 구타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를 계기로 민주당은 부정선거 거부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선거일

 

선거일이 가까워지자 이들은 위에서 짠 계획들을 적용하기로 했습니다. 선거 전날인 3월 14일 자유당은 모든 선거함에 이승만과 이기붕이 찍혀 있는 위조 투표지를 무더기로 집어넣었습니다.

 

3월 15일 드디어 선거가 치러졌고, 이들은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가 하면, 한 명 당 투표용지를 20장까지 가져가는 등의 선거 조작 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자유당 당원들이 기표소까지 들어가 자유당을 뽑는지 아니면 야당을 뽑는지 감시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 관리인을 투표소에서 쫓아내는 행위까지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부정행위에는 자유당 소속 정치깡패들이 동원되었고 그 밖에도 내무부 소속의 공무원들까지 조직적으로 개입하였습니다(이 일로 내무부의 차관급과 실국장급 간부들이 구속되었고,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민주당은 오후 4시 30분에 언론에 담화를 발표하였으며, "3·15 선거는 선거가 아니라 선거의 이름 하에 이루어진 국민주권에 대한 포악한 강도 행위"라고 규정하고 불법, 무효임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부정선거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날 오후 늦게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하였습니다.

 

한편 선거가 종료된 뒤 개표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개표 중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하는 결과가 나오자 국무위원들은 자유당 후보가 95% 또는 97%를 넘어갈 것을 우려하였고, 이렇게 되면 부정선거임이 들통날까 봐 "걱정"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최인규·이강학 등은 경비전화를 통해 "이승만은 80%로, 이기붕은 70~75% 선으로 조정하라"라고 지시가 내려졌습니다. 그리하여, 각 지에서는 감표에 들어갔으나, 일부 지방에서는 최병환 내무부 지방국장이 50%선 조정을 지시해 혼란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에도, 이기붕의 표는 79%로 하향 조정하게 되었습니다.

 

행방불명이던 김주열 열사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마산 바다 위로 떠오른 마산상고 김주열 열사 시신

 

선거 결과

 

제4대 대통령 선거 당시 총 유권자 수는 11,196,490명으로, 당선에 필요한 최소 득표수는 그 1/3인 3,732,164표였습니다. 유일 후보인 이승만 박사는 이를 넘는 득표를 해 대통령 당선자로 확정되었습니다. 부통령 선거에서는 4년 전에 46.4%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17.5%로 뚝 떨어지고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는 79.2%의 기록적 상승세를 보여서 당선에 성공했습니다.

 

재선거 결정

 

국회는 3월 18일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로 발표하였으나, 부정 선거에 대한 야권과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대국민 담화에서 제4대 대통령 선거 및 제5대 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밝혔습니다. 같은 날 국회에서도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치를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고, 결국 다음날인 27일 대통령 당선자인 이승만은 사퇴하고, 5월 3일 국회에서 사퇴서를 정식으로 수리하면서 제4대 대통령의 재선거가 확정됐으며, 28일에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가 사망함으로써 제5대 부통령 역시 재선거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대법원에 제기돼있던 선거 무효 소송은 소송 대상이 둘 다 없어졌고 재선거가 확정된 터라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대통령과 부통령의 재선거는 재선거 사유 확정 이후 40일 이내로 시행돼야 했으므로 제5대 부통령의 재선거는 6월 7일, 제4대 대통령의 재선거는 12일까지 실시돼야 했으나, 5월 2일 국회에서 개헌 뒤까지 정·부통령 재선거 보류가 만장일치로 결의되고 재선거 공고권자인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이 국회의 의사를 존중할 것을 표명하면서 재선거는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1960년 6월 15일 제2공화국 헌법이 시행되며 제1공화국의 대통령과 부통령의 직위는 없어져 재선거를 치르지 않아도 되게 되었고, 대신 제2공화국의 헌법 하에 새로이 제4대 대통령 선거를 국회 간접 선거로 실시해 윤보선이 당선되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라 했습니다.
이처럼 부정선거는 절대 용납될수 없으며, 용서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 국민의 소중한 한 표는 절대적이어야 하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기에 우리 국민을 우습게 봐서도 안될 것입니다.

4월 15일에 있을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ㅇ들의 소중한 한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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