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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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기원전 43년 - 로마시대의 정치가이자 웅변가인 키케로가 암살되다.

574년 - 유스티누스 2세가 정신병으로 인해 퇴위하고 황후 소피아가 티베리우스 장군을 부제(caesar)로 삼고 공동으로 섭정을 맡다.

1787년 - 델라웨어주가 미국의 첫 번째 주가 되다.

1941년 - 진주만 공습

진주만 공격(일본어: 真珠湾攻撃, 영어: Attack on Pearl Harbor)은 미국 하와이주 오아후 섬의 미국 해군 진주만 기지를 일본 해군이 기습한 공격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해군이 진주만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하와이주 오아후 섬에 위치한 진주만에 대한 기습 공격은 미국 태평양 함대와 이를 지키는 공군과 해병대를 대상으로 감행 되었다. 이 공격으로 12척의 미 해군 함선이 피해를 입거나 침몰했고, 188대의 비행기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었으며 2,335명의 군인과 68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 야마모토 이소로쿠 사령관은 제2차 세계 대전 태평양 전쟁의 시작으로 폭격을 계획하였고, 나구모 주이치 부사령관이 지휘를 맡았다. 일본군은 이 작전에서 64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항구에 있지 않았던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과 유류 보관소와 병기창 등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미국은 이와 같은 자원을 이용해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원상복구를 할 수 있었다. 미국 국민들은 진주만 공격을 배신행위로 보고, 일본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일치단결하여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이는 훗날 일본 제국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진주만 공격은 진주만 폭격, 진주만 전투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진주만 공격 또는 단순히 진주만이라고 더 자주 불린다.

일본의 준비

일본은 만주를 점령한 몇 년 뒤인 1937년부터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다. 1941년에는 일본과 미국과의 오래된 긴장이 더 고조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 무기 제조에 필요한 고철 수출을 금지했으며, 석유 수출 금지, 미국 내 일본 재산 동결, 일본 선박의 파나마 운하 통과 거부로 중국 내에서의 군사행동을 위축시키고자 했다. 1941년 11월 26일의 헐 노트를 마지막으로 외교적 노력은 절정에 다다랐고, 도조 히데키 수상은 자신의 각료들에게 이것이 최후통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석유 봉쇄는 유전이 없어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던 일본에게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세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 미국과 영국의 요구에 응하여 중국에서 철수하는 것.

- 유류 부족이 군사력 약화를 가져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 충돌을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자원 획득을 시도하는 것.

일본의 지도자들은 이 세 가지 중에 마지막을 선택하였다.

진주만 공격의 목표는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해군력을 무력화하여 전면전이나 동시 다발적인 준비된 공격을 잠시나마 막는 것이었다.

11월 26일은 일본의 연합 함대가 진주만을 향해 출정한 날이다. 일본은 미국이 제시한 헐 통지문 내용과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었다. 그 근거로 일본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보고서를 주일 미국 대사관의 조지프 그루(Joseph Grew) 대사가 본국에 송신하였으나, 유럽 내 전쟁 문제에 몰두하던 미국 정부는 그것을 묵살하였다.

■ 진주만 공격 이후 상황

루즈벨트 대통령은 12월 7일을 치욕의 날로 선포했고, 그로부터 3일 뒤 미국 의회는 전쟁을 선포했으며 미국인들은 일본이 본토로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해 전쟁 준비를 했고, 애국심에 군대에 자원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한인들은 진주만 공격 이후 일본인에게 반감을 사게된 미국의 생각을 반겼으며 미 정부에 한인으로 구성된 미 육군부대를 훈련시켜줄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 방위군 휴스 대령은 한인 중대를 조직하는데 협조해 주겠다는 약속을 해왔으며 이에 나이가 18세부터 64세까지인 한인들 50명이 지원했고 중국인들과 필리핀인들도 가세하여 동양인 대대가 구성 되었다. 이 대대의 이름은 '맹호군'이었고 대대장은 김용성이었다. 맹호군의 정식 인가가 1942년 4월 26일에 나왔고 대대기가 수여되었다.

진주만 기습과 관련된 음모론

태평양 전쟁 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소위 “음모론”이 떠돌고 있고, 그중 하나가 진주만 공격 당시 미 해군이 일부러 격침되어도 상관없는 구식 전함들만을 배치했다는 주장이 있다. 실제로 애리조나호 등 정박 중이던 미군 전함들은 1941년 기준으로 취역한 지 30년 가까이 된 전함이었다. 가장 젊은 편인 애리조나호도 취역 연도가 1915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상황을 모르는 오해에 불과하다. 미군은 1922년 워싱턴 군축 조약에 따라 1920년대 이후에 신형 전함을 한 척도 건조하지 못했다. 워싱턴 군축 조약 결과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은 일정한 비율의 전함만을 보유할 수 있었을뿐더러 신형함 건조는 제한되었다. 이미 건조 중이던 전함 및 대형 중순양함은 1920년대에 항공모함으로 용도 변경되었다(1920년대와 30년대에 각국이 항공모함을 취역시킨 원인은 항공모함의 가치에 주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군축 조약에서 탈퇴한 일본은 신형함 건조를 1930년대 초부터 진행해 왔으나, 미국은 1937년 이후부터 서둘러 신형함 건조를 시작했고, 1941년 12월까지 신규 건조된 최신형 전함은 단 2척이었다. 위의 피해 현황에도 나오지만, 전쟁 초기 군함이 부족했던 미국은 가능한 한 인양하여 수리한 후에 재투입했다. 문제가 된 구식 전함 가운데 애리조나호와 연습 표적함이던 유타호를 제외한 나머지 전함은 모두 일선에 복귀하였다.

뒤늦게 신형함 건조를 시작한 탓에 가용 가능한 군함은 구식함뿐이었던 미군이었지만, 일본군은 그 함대가 두려워 조기에 기습했던 것이다. 참고로 신형함 건조 시작 이후에도 미군은 전함이 모자라 진주만 공격 당시 파손된 구식 전함을 수리해서 다시 전투에 투입했다.

특히, 만약 미군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게 둘 필요도 없이 차라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중간 해역에서 요격하여 참전 명분은 명분대로 얻고 훨씬 적은 피해로 일본을 무력화할 수 있었을 것이나, 실제로는 진주만이 궤멸만 간신히 면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에서도 미국이 일본의 공격을 유도했다는 설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 진주만 공격 후 일본인들의 피해

일본의 진주만 공격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은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미국 정부는 이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수용소를 만들었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일본인들을 강제수용시켰다.

■ 애리조나호 기념관

진주만에 있는 애리조나호 기념관(USS Arizona Memorial)은 진주만 공격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애리조나호의 이름을따서 만들었다. 애리조나호는 그 당시 공격을 받은 지 불과 9분만에 침몰하였고, 총 인명피해 2403명중 1177명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선체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가 그 위에 기념관을 만들었다. 이 기념관을 설계한 사람은 알프레드 프레이스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통령인 루즈벨트가 1958년에 기념관 창설을 허용해서 그로부터 3년 후에 완공되었다.

1970년 - 빌리 브란트총리의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

1949년 - 국부천대

1964년 - 무즙 파동

1994년 - 아현동 도시가스 폭발 사고

2007년 - 태안 기름유출 사고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는 2007년 12월 7일 충청남도 태안군 앞바다에서 홍콩 선적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 호'와 삼성물산 소속의 '삼성 1호'가 충돌하면서 유조선 탱크에 있던 총 12,547킬로리터(78,918 배럴)의 원유가 태안 인근 해역으로 유출한 사고이다. 일반적으로 태안 기름 유출 사건 등으로 불린다.

■ 사고 경위

● 발생 원인

삼성물산이 시공하던 인천대교 공사를 마친 후삼성중공업 소속 삼성 1호 크레인 부선(동력이 없는 배)을 예인선이 경남 거제로 끌고 가는 과정에서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해당 부선이 바다에 정박해 있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호와 충돌하여, 유조선 내 원유가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허베이 스피릿호가 이중선체 구조가 아니었기에 유출사고가 발생했다.

● 초기 대응

초기에 파도가 심하여 빠른 대처를 하지 못했고 오일 펜스를 넘어 기름이 유출해 피해가 더 증가했다. 파손된 유조선은 2일 만에 구멍을 막았다. 9천여 명 가까이 되는 많은 인원이 기름 제거 자원봉사에 투입되어 기름을 제거하고 있으나 잘 알려지지 않은 어촌마을 등은 아직 지원이 많지 않은 상태이다. 이로 인해 태안군의 양식장, 어장 등 8천여 헥타르가 원유에 오염되었으며 철새 도래지인 천수만까지 위협하고 있다. 

● 유출로 인한 피해

원유 유출로 인해 바닷물이 혼탁해지고 용존 산소량이 줄어들면서 인근 양식장의 어패류가 대량으로 폐사했다. 또한 어장이 황폐해지면서 해당 지역의 생업에 영향을 미쳐 지역 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역 경제의 정상화를 위해선 빨라야 10년 정도가 걸리는 것이 보통이며, 길게는 20~30년 걸릴 것이다(1995년 7월 23일, 전남 여천 앞바다에서 일어난 씨프린스호 원유 유출 사건의 경우, 사건 후 10년이 지난 2005년에도 침몰해역의 밑바닥에서 기름띠가 발견된 것으로 확인하였다.). 또한 해양 생태계의 원상 복귀를 위해서 최장 10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조류가 심해짐에 따라 타르 찌꺼기가 현재 안면도와 군산 앞바다까지 밀려왔으며, 원유가 뭉친 타르 덩어리는 태안에서 점차 빠르게 확산해 12월 30일 전라남도에서도 발견되었으며, 2008년 1월 3일, 타르 덩어리는 급기야 제주도 북쪽 추자도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발견으로 인해 그동안 염려하던 남해안 확산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지만, 정부에서는 현실적인 대응 방안을 못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타르 덩어리가 이렇게 빨리 확산한 데는 조류, 강풍 등의 기상 악화 원인도 있지만, 관계 당국이 저지선 구축에 소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8년 12월 10일에는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유조선 선장 및 당직항해사, 법인에 대해 항소심에서는 유죄가 선고됐다.

● 논란

사고 발생 2시간 전인 오전 5시 23분부터 24분까지 항만 당국은 예인 선단의 운항이 의심스럽다고 판단하여 비상 호출 채널로 두 차례나 호출했으나 해당 선박은 응답하지 않았다. 이후 담당자는 수시로 연락을 시도했으나 여전히 선박에서는 응답하지 않았다. 간신히 삼성T-5 선장의 휴대전화번호를 알아내, 사고 발생 1시간 전인 6시 15분에 연락이 닿았으나 충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또한 오전 6시 28분쯤 유조선 허베이스피릿호 측에서도 삼성T-5를 호출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한다.

예인선의 와이어가 끊어지는 것은 드문 일이라고 한다. 현재 와이어가 왜 끊어졌는지와 언제 끊어졌는지 여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예인줄이 재활용품이었다고 한다).

 사고 수습

● 정부

12월 10일, 충청남도에서는 태안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할 것을 요청, 행정자치부에서는 12월 11일 충청남도 태안군, 보령시, 서천군, 서산시, 홍성군, 당진군(현 당진시) 등 6개 지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이에 따라 충청남도는 국고의 지원을 받게 되었고, 주민들의 국세 납부 기한은 9개월 연장되었다. 이후, 타르 덩어리로 인한 2차 피해로 인해, 전라남도에서는 신안군, 영광군, 무안군에 대해서도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 줄 것을 행정자치부에 건의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12월 11일 현장을 방문하여 사고 지역을 둘러보고 대책 방안을 점검하였다.

● 자원 봉사

대략 200만여 명의 봉사자가 태안을 방문하였으며, 사고 당시 많은 자원 봉사자가 해당 지역에서 자원 봉사를 지원했다. 특히 자원 봉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 주말 같은 경우는 해당 지역으로의 차량 소통이 정체되는 현상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보통의 자원 봉사자들이 하는 작업은, 유출된 기름으로 인해 오염된 해안가의 기름 제거 작업이었다. 오염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곳인 경우에는 삽 등의 장비를 이용해 기름을 제거했으며, 기름 유출이 적은 곳인 경우는 자원 봉사자들이 흡착포나 헌 옷 등을 이용해 해안가를 직접 제거했다. 다만 현지 지휘 체계의 부재로 인해 중구난방식의 작업이 계속 되고 있어 작업 상황에 따른 매뉴얼이나 지침이 빠르게 요구되기도 했다.

정부는 자원 봉사를 한 경우 기부로 간주하여 소득 공제 혜택을 주었으며, 민방위 교육과, 고속도로 통행료를 면제해 주었다. 해당 오염 지역의 일선지휘소 등에서 확인서를 발급해 주기도 하였다.

● 주민 보상

유조선의 선주보험사 측은 2008년 1월 7일까지의 방제 작업에 대해 보상을 할 예정이라 발표했다. 우선, 방제 작업을 한 약 15만 명 주민의 인건비 120억에 대해 먼저 지급을 하며, 추후 한국해양오염방제조합과 협의를 통해 방제정 등의 기타 방제 비용도 6개월 이내에 보상할 예정이라 한다. 아울러 조합은 그동안 압류하고 있던 유조선의 압류 조치를 해제하기로 했으며, 삼성 중공업 측에 방제 작업에 대한 손해 배상 소송을 할 예정이었다.

또한 삼성 측은 자발적인 성금을 내겠다고 했으나, 6년여가 지난 2013년 11월에 와서야 피해 지역 발전 출연금 명목으로 3천600억원을 지급하기로 하였다.

● 수사

태안 해양경찰은 원유 유출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삼성중공업 소속 해상크레인 선장 등 관련자 5명에 대한 사건 일체를 검찰에 송치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보강 수사를 거친 후 삼성 측 예인선장 1명은 구속(나머지 1명은 불구속), 삼성중공업 해상크레인 선장, 허베이스피릿선박주식회사, 허베이 스피리트측 선장과 1등 항해사(각 인도인)는 불구속 기소했다.

● 재판

- 1심

대전지법 서산지원 제2형사단독은 삼성측 예인선장에게 각 징역 3년, 벌금 200만원과 징역 1년(법정구속)이 선고되었고, 삼성측 해상크레인 선장에게 무죄 판결을, 삼성중공업에 벌금 3000만원이 부과되었다. 허베이스피릿선박주식회사, 허베이 스피리트측 선장, 1등 항해사에게는 무죄를 선고하였다.

- 항소심

2008년 12월 10일 대전지법 제1형사부는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던 홍콩 선적 허베이스피릿호의 선장에게 금고 1년 6월 및 벌금 2000만원을, 유조선 1등 항해사에게 금고 8월 및 벌금 1000만원을 각각 선고하고 법정구속하였다. 유조선사인 허베이스피리트선박주식회사는 원심을 파기, 벌금 3000만원을 선고했다.

또한 재판부는 1심에서 무죄였던 삼성중공업 해상크레인 선장 김모씨에 대해서도 징역 1년 6월을 선고했다. 반면 1심에서 징역 3년 및 벌금 200만원을 선고받았던 예인선단 선장 조모씨는 징역 2년 6월 및 벌금 200만원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보조 예인선 선장 김모씨는 징역 8월로 각각 감형했다. 또한 재판부는 1심에서 벌금 3000만원을 선고받았던 삼성중공업의 항소를 기각했다.

- 상고심

2009년 4월 23일, 대법원 1부는 "충돌로 인해 유조선에 발생한 손상은 형법 제187조에서 정한 선박 '파괴'로까지 평가하기에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업무상과실선박파괴죄까지 유죄로 인정한 부분은 위법하다"고 판단하여 항소심 선고를 모두 파기했다. 삼성중공업과 허베이스피리트선박주식회사에 대한 각 벌금 30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은 그대로 확정했다.

- 파기환송심

2009년 6월 11일, 대전지법 제3형사부는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서, 해양오염방지법을 적용하여 항소심에서 2년 6월을 선고받은 예인선단 선장 조모씨에게 징역 2년 3월, 징역 8개월로 감형된 보조 예인선 선장 김모씨는 징역 1년을 선고하였고 허베이스피릿호 선장과 1등 항해사에 대해서는 업무상과실선박파괴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 피해 보상

피해보상면에서 삼성 측은 1000억 원 상당의 지역발전금을 주겠다고 하였으나 태안군 주민들의 피해 배상 요구 금액과 차이가 커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였다. 사고발생의 주범인 삼성중공업은 사고가 발생한지 7년(2014년 기준)이 지났지만 출연금 제출과 관련해 배상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2016년 7월 기준, 중국 선박회사 '허베이스피리트 시핑(HEBEI SPIRIT SHIPPING co. Ltd)' 측에 부과한 161억원의 방제 비용을 법정 다툼이 계속되고 있어 아직 받지 못하고 있다.

2016년 12월 기준, 태안군의 피해 보상이 거의 마무리 되었다.



탄생

903년 - 페르시아계 무슬림 천문학자 압드 알라흐만 알수피

1595년 - 조선 16대 국왕 인조

1768년 - 프랑스의 군인 장 이시도르 아리스프.

1823년 - 독일 수학자 레오폴트 크로네커.

1849년 - 일본의 겐로 사이온지 긴모치.

1873년 - 미국 작가 윌라 캐더.

1903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종교인 강량욱.

1905년 - 네덜란드 천문학자 제러드 카이퍼.

1928년 - 언어체계분석 학자 촘스키.

1931년 - 대한민국의 천주교 추기경 정진석.

1937년 - 대한민국의 방송MC 이종환.

1958년 - 대한민국의 가수 홍서범.

1963년 - 대한민국의 코미디언 황기순.

1967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한병도.

1970년 - 대한민국의 배우 전미선.

1971년 - 대한민국의 배우 류태준.

1974년 - 대한민국의 만화가 강도영.

1980년 - 영국의 축구 선수 존 테리.

1980년 - 독일의 축구 선수 클레멘스 프리츠.

198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정인

1982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경언.

1984년 - 헝가리의 축구 심판 쿨차르 커털린.

1987년 - 미국의 가수 아론 카터.

1988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도연.

1989년 - 영국의 배우 니콜라스 홀트.

1990년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레나터 얀선.

1994년 - 일본의 피겨스케이터 하뉴 유즈루.

1995년 - 대한민국의 가수 소원(여자친구). 대한민국의 배우 최성민.

1999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한결(X1)


사망

기원전 43년 - 고대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

983년 - 신성 로마 제국 오토 왕가의 3번째 왕 오토 2세.

1741년- 중국 청나라 강희제의 이복 서얼 조카딸 고륜순희공주.

1907년 - 영국의 수리물리학자, 공학자 제1대 켈빈 남작 윌리엄 톰슨

1960년 - 루마니아의 피아노 연주자 클라라 하스킬.

1993년 - 독일의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

2004년 - 미국의 기업인, 암웨이의 창립자 제이 밴앤덜.

2006년 - 대한민국의 승마선수 김형칠.

2010년 - 대한민국의 군인 박종규.

2014년 -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김기원

2015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이헌조

2017년 -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화배우 장한

2018년 - 대한민국의 군인 이재수

2018년 - 대한민국의 의사 백낙환

2018년 - 콜롬비아의 정치인 벨리사리오 베탕쿠르


기념일

국제 민간 항공의 날

진주만 희생자 추모일: 미국

대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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