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건
395년 - 참합피전투: 중국 허베이 성 바오딩 시에서 참합피 전투가 벌어져 후연이 북위에 참패하다.
1791년 - 윤지충·권상연이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성당)에서 순교함(신해박해 발발).
1940년 - 독일군이 성공적으로 나우루를 공격한다.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독일군의 나우루 공격은 1940년 12월 독일군이 나우루를 폭격한 사건이었다. 12월 6일부터 8일, 27일 두 차례에 걸쳐 보조순양함 2척이 나우루를 공격하였다. 급습으로 인해, 연합국 소속 상선 5척이 격침되었고 나우루의 경제에 중요한 인산염 캔틸리버 하중 장치가 손상을 입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경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나우루는 방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독일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나우루의 두 차례 공격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태평양의 독일군 작전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던 작전이다. 이 피해로 인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일본으로 운송되는 인산염 보급이 중단되면서 농업에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연합군 해군은 나우루와 바나바 섬을 보호하기 위해 남태평양 근처로 일부 배치되었다. 또한, 두 섬을 지키기 위한 주둔군이 배치되었다.
■ 배경
나우루와 근처의 섬들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비료 생산지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양국의 농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멜버른을 기지로 한 영국 인산염위원회(BPC)는 나우루의 인산염 수출 및 생산을 통제하고 있었다. 1940년 6월 30일까지 한 해 동안, 인산염위원회는 나우루에서 백만 톤 이상의 인산염을 생산했으며 이중 거의 절반 이상이 나우루에서 근처 섬의 4척의 수송선(트리아딕, 트리아스터, 트리오나, 트리엔자)과 공인 상선으로 운반되고 있었다. 이 섬에는 항구나 닻을 댈 만한 곳이 없었으므로, 인산염 수송선은 수심이 깊은 곳에서 계류한 이후 외팔보 방파제를 통해 화물을 수하했다. 남서풍이 부는 전년도 11월부터 3월까지 수송선은 운반을 그만두고 풍향이 나아질 때 까지 섬에서 멀리 떨어졌다. 보통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 표류를 허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나우루에서 떨어져 표류하는 배들은 꽤 많았다. 호주와 뉴질랜드 경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나우루는 제한된 군비에서 오스트레일리아군 주둔지에서 섬 보호에서 낮은 우선순위를 받았으며 두 섬은 1940년 12월까지 방비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주 본토의 전략적 인산염 비축으로 섬 공격의 영향을 줄이고자 했다.
나우로의 독일 공격도
1940년 10월 말, 선장 쿠르트 베이허가 지휘하는 코메트와 선장 로버트 예센이 지휘하는 독일 기습군 오리온과 보급선 쿨메르랜드가 캐롤라인 제도의 라모트레크 섬에서 만났다. 예센은 다른 두 선장보다 더 연공이 있었으며 이 선단의 총지휘를 맡게 되었다. 3척의 함선은 11월에 18일동안 뉴질랜드 동부 해안에서 작전을 펼쳤고, 소형 연안 연락선 "홈우드"와 대형 원양 정기선 MS 렝기타네를 각각 11월 25일과 27일에 미약한 뉴질랜드 방어군에 감지되지 않고 격침시켰다. 이러한 공격에 이어, 11월 29일에는 케르메덱 제도를 급습하여 "쿨메르랜드"로 여성과 어린이, 포로를 보냈다. 이후, 3척의 선단은 나우루의 인산염 산업체를 공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독일 선장은 이 섬의 선단의 집중도를 잘 알고 있었다.
■ 나우루 공격
독일군은 나우루로 가는 동안 첫 번째로 BPC 함선을 만났다. 12월 6일, 트리오나(4,413 롱톤, 4,484t)는 솔로몬 제도 북동부에서 공격받았고, 승무원 3명이 기습군의 포에 사망한 이후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 생존자 68명 모두 살아 포로가 되었다. 기습군 선장은 12월 8일 나우루 해안에 폭탄을 설치하고자 했으나, 날씨가 나빠져서 외곽에서 선박을 격침하고자 했다. 12월 7일 밤, 일본 상선 "만요 마루"로 위장한 코매트가 정찰하던 도중 나우루 남쪽 약 14km에서 노르웨이 상선 "비니"(5,181 롱톤, 5,264t)를 격침시켰다. 기습군이 해안에서 발견된 반면, 배들은 일본 소속 상선으로 위장에 성공했다.
"오리온"은 12월 8일 새벽 코매트와 합류하여 공격을 시작해 트리아딕(6,378 롱톤, 6,480t)을 손상시켰고 트리아스터(6,032 롱톤, 6,129t)를 격침시켰다. 그리고, 코매트는 트리아딕을 고의적으로 구멍을 내어 침몰시킬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나중에 오리온이 포를 발사하여 상선을 침몰시켰다. 나중에 코매트는 영국 기선 "코마타"(3,900 롱톤, 4,000t)을 격침시켰다. 이러한 공격들에 이어, 두 기습군과 쿨메르랜드가 철수했고 나우루 동쪽 약 32km에서 규합했다. 날씨가 계속 좋지 않았기 때문에, 코매트와 쿨메르랜드는 마셜 제도의 아일링글라플라프 환초에 간 이후 나우루 북동쪽에서 재보급할 계획을 세웠다. 이후 함선들은 섬에서 공격대와 함께 섬을 공격할 시도를 하였다.
독일군이 12월 15일 나우루에서 떠나 재규합한 이후, 날씨가 나우루를 공격하고 상륙하기에는 계속 좋지 않았다. 함선에 대한 추가 공격은 비실현적이라고 판단하고 기습군은 분산하여 나우루와 태평양 섬 사이를 오가는 라디오 메시지를 차단했다. 대신, 선박 3척은 호주 관할 섬인 에미라우 섬에 침공하여 포로 675명을 얻었다. 베이허는 보드에 오리온이 유럽 민족 포로를 해방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그는 "숙련된 장교와 승무원은 영국에 선박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라고 믿고 34명의 유럽인과 171명의 중국인, 남태평양 원주민을 풀어주었다.
독일에는 다행스럽게도, 에미라우 섬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해군 선박이 제공하는 라디오를 가지고 있지 않은 소수의 몇몇 섬들 중 하나였다. 섬에는 유럽인 가족 2가구가 풀린 포로에게 보급품을 주었으며 뉴아일랜드 섬의 캐비앵으로 카누를 보내 호주 정부에게 이를 알렸다. 에미라우 섬에 추가 보급을 하기 위해 스쿠너가 출발하여 12월 24일 도착했다. 뉴브리튼 섬의 식민지총독과 몇몇 보급품 또한 보급품 보트를 이용하여 에미라우 섬에 도착했다. 해방한 포로에 대한 운송 작업은 기선 "넬슨"을 이용하여 12월 29일 시작하여 1941년 1월 1일 퀸즐랜드주 타운즈빌에 도착했다. 이들은 독일의 급습 작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독일 해군 장교가 1941년 2월 19일 기습 작전에 대한 포로 해방의 금지하는 명령을 내보냈다. 독일 선박 3척은 1940년 12월 21일 에미라우 섬을 떠난 후 갈라졌다. 오리온은 라모트레크로 향한 이후 캐롤라인 제도의 메르그 섬에서 엔진을 정밀 검사하였고, 쿨메르랜드는 일본으로, 코매트만 남태평양에서 작전을 계속했다. 이 선박은 12월 24일 라바울에서 모터보트를 이용하여 기뢰를 심을려고 했지만, 보트의 엔진이 고장나 이 작전은 취소되었다.
코매트는 라바울의 작전이 실패한 이후 나우루로 돌아가서 12월 27일 05:45에 섬에 도착했다. 라디오를 이용하지 않고 경고를 보낸 이후, 인산염 공장을 파괴하려는 함선의 시도가 보이고 06:40에 포를 발사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 가량의 이 포격으로, 기습군은 공장 설비, 석유 탱크, 보트, 건물들 및 계류 부포를 파괴했다. 이 공격에 이어 코매트는 남동쪽으로 항해했고, 나우루에서는 방송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에게 나우루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전달했다. 이것은 전쟁 기간 동안 마지막으로 나우루에 활동한 독일 선박이며, 이후 코매트는 인도양으로 활동지를 옮겼다.
독일함선 3척의 이동 경로
■ 여파
독일군의 나우루 기습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경제에 타격을 미치는 데 성공했다. 나우루에서 인산염 출하를 재개하기까지 10주가 걸렸고, 선박 및 인프라 손실로 인해 출하량이 급감하였다. 이 결과, 1941년 7월 뉴질랜드에서는 인산염 비료의 배급제가 시작되었다. 코매트의 섬 포격은 일본의 인산염 위탁 생산도 방해하여 일본 정부가 독일에게 제공하는 원조를 줄이는 위협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나우루 공격 성공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기습군이 섬의 배반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게 하였다. 몇몇 소문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이후, 이 소문들은 근거가 없다고 밝혀졌다.
이 기습에 이어 태평양 지역의 영연방군 군대는 추가 기습 방지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공군과 뉴질랜드 왕립 공군은 주요 항구 근처에서 침입군을 찾기 위한 순찰 작전 횟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위원회는 영국 해군에게 기습군 위협을 줄이기 위한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병력의 배치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동의하여, 경순양함 HMAS 시드니와 무장 상선 HMAS 카님블라가 해외 기지에서 오스트레일리아 본토로 돌아왔다. 나우루와 태평양 섬들에 대한 해군 보호가 허락되어 무장 상선 순양함 HMAS 마누라가 트리엔자를 호위하기 위해 1941년 1월 4일 섬에 도착했다. 몇몇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군함이 이후 1달동안 섬에 떨어져 지속적으로 배치되었으며, 각 섬에는 2개의 야전포가 배치되었다. 또한, 이 공격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사이 호송대 도입을 주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해군부는 에미라우 섬에서 해방된 포로의 정보를 이용하여 독일 침입군이 작전을 하는데 이용한 지역을 순찰했다. 이는 기습의 효과를 낮추었으며, 코매트와 오리온은 나우루에서 공격한 이후 1941년 말 유럽으로 돌아올 때 까지 단 3척만 격침시켰다.
1941년 - 일본해군이 성공적으로 진주만을 공습한다. 진주만 공습 (도쿄시간 12월 8일, 현지시간 12월 7일)
1949년 - 중화민국 정부가 타이베이로 이전함.
1980년 - 존 레논, 뉴욕에서 마크 채프먼에게 암살.
1991년 - 투르크메니스탄의 독립이 승인됐다.
1999년 - 러시아와 벨라루스간에 통합조약이 조인됨
■ 문화
1944년 - 조선전시종교보국회가 창립됐다.
1955년 - 유럽회의와 각료이사회의가 유럽의 상징으로 파란색 바탕에 12개의 노란별이 수놓인 기를 채택.
1965년 -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하다.
2000년 - 대전가톨릭평화방송 FM 라디오 방송 개국.
2006년 - 경부선 전철화 조치원~대구, 서울~부산 전구간 완전개통.
■ 탄생
1542년 -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
1708년 -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 황제.
1765년 - 미국의 발명가 엘리 휘트니.
1858년 - 러시아의 작가 블라디미르 길랴롭스키.
1861년 - 프랑스의 마술사이자 영화 제작자 조르주 멜리에스
1865년 - 핀란드의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
1865년 - 프랑스의 수학자 자크 아다마르.
1880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신채호.
신채호(申采浩, 1880년 12월 8일 ~ 1936년 2월 21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적 아나키스트,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관련 영상 대전KBS 다큐 단재 신채호1부 - 일편단생, 오직 독립을위하여
관련 영상 대전KBS 다큐 단재 신채호2부 - 조선혁명선언의 탄생
■ 독립운동
● 망명
국권의 피탈 되자 신채호는 애국지사들과 협의하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중국 안둥을 거쳐 칭다오에 도착했다. 칭다오에서 안창호, 이갑 등 신민회의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건 문제를 논의하여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만들어 ‘독립군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을 세우고, 9월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新韓村)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다.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고,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신규식의 초청으로 상해로 떠났다. 상해에서 1년간 머무르며 김규식에게 영어를 배웠다.
● 언론 활동
1914년 윤세복의 초청으로 서간도 환인현 홍도천에 머물며 동창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쳤는데, 이때 국사 교재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까지 4년간 체류하였고, 북경에서 체류하면서 중화보와 북경일보에 글을 기고하여 생계를 꾸렸다. 그러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 임시정부 참여
1919년 2월에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이승만의 과거 위임통치청원 전력을 지적하며 그를 반대하였고, 8월에 시작한 6회 의정원회의에서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다”라고 크게 성토하면서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 결별하였다.
그는 《신대한》이라는 주간신문을 창간하여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였는데,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과, 독립운동의 외교우선론, 노선의 전투성의 미흡, 임시정부의 무능과 파쟁, 여운형의 도일 등이 비판의 이유가 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을 정면 반박하였고, 조선초대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부음과 함께 조선인 살상과 경제침탈을 비판하였다. 이 시기에 신채호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을 취하하라는 편지를 두 번이나 보냈으나 답을 받지 못했다. 1920년 《신대한》이 발행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가서 제2회 보합단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때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유학 중이던 28세의 박자혜와 결혼하였다. 박자혜와는 3년간 함께 생활하였는데 1922년에 생활고 때문에 아들 신수범과 함께 귀국시켜야만 했다.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를 창간하였고 김정묵 등과 함께 ‘통일책진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단장이 되었다. 1912년 7월 중국 상하이에서 설립한 무역회사인 동제사(同濟社)에도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 후원하였다.
● 임정 탈퇴와 무장독립 운동 가담
5월 10일 이회영, 박용만과 함께 10여 개 무장항쟁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군사통일 준비위원회를 열고, 만주 시베리아에서의 무장 독립전쟁을 통일적이고 조직적으로 수행할 '통일사령부'를 임시정부정 군무부 산하에 설치할 것인지의 여부 문제를 논의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해 이승만과 격렬히 싸우고 법정투쟁까지 벌인 하와이 대표단의 박용만은 이승만의 미국 위임통치 문제를 공개적으로 폭로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안이 실질적인 독립운동 대표들인 무장항쟁단체 앞에서 하와이에서 이승만과 함께 활동하던 박용만에 의하여 폭로되자 대표단 전원은 이승만을 불신임하게 되어, 이승만이 사퇴하지 않은 상해 임시정부 자체를 만장일치로 불신임하였다. 임시정부 당국에게 군사통일회의 이름으로 임시정부 및 의정원을 불신임하고 무효를 선언하고 이를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이를 대신하기 위하여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결정했다. 군사통일 준비위원회는 신채호를 주간으로 하여 《대동》(大同)이란 주간지를 발행했다. 안창호와 김규식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안을 받아들였으며, 1922년 임시정부의 쇄신을 위하여 국민대표회의안이 4월에 가결되었는데, 신채호는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적극 지지하였고 가족을 떠나보낸 그는 상하이에 와서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1월, 70개의 독립단체의 대표 123명이 국민대표회의를 가졌는데, 이때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하였다. 신채호는 창조파의 주동자로서 민중의 폭력혁명을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랜 논쟁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창조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떠나 1923년 6월 7일 새 헌법을 제정하고 창조파의 임시정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소련정부의 반일활동 금지에 따라 활동이 중지되었고, 신채호는 자유시 참변과 소련이 창조파 임시정부를 불인정하자 공산주의에 대해서 매우 실망하였다.
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고, 북경의 순치문 안에 있는 석등암에서 출가하여 1924년 3월 북경 교외의 관음사에서 61일간의 계를 마치고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1925년까지 6개월간 유마경, 능엄경을 연구하였고 마명의 대승기신론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후 국사연구에 뜻을 더 깊게 두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 국사 연구
그는 국사연구를 위해 북경대학 교수 이석증에게 대학도서관 열람의 편의를 부탁하여 사고전서 등에 출입하며 중국계 역사서적을 읽고 본격적으로 국사연구를 시작하였다. 1922년 중국역사연구법을 쓴 양계초의 역사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다. 1924년 1월 동아일보에 ‘조선 고대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을 게재하였고, 1924년 10월부터 1925년 3월까지 ‘상고사 이두문 명사해석법’, ‘삼국사기중 동서양자 상환고증’, ‘삼국지 동이열전 교정’, ‘평양패수고’, ‘전후삼한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들은 1930년대에 ‘조선사연구초’라는 책으로 묶여졌다. 또한 1925년 시대일보에 ‘부를 수한 차대왕’, ‘고구려와 신라의 건국년대에 대하여’를 투고하였다.
1890년 - 체코의 작곡가 보후슬라프 마르티누.
1934년 -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임권택.
1941년 - 영국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제프 허스트.
1943년 - 미국의 가수 짐 모리슨.
1945년 - 대한민국의 배우 연규진.
1956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동섭.
1957년 - 러시아의 정치인이자 총리인 미하일 카시야노프.
1959년 - 대한민국의 의사, 연세대 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인요한
1961년 - 미국의 작가, 보수 논객 앤 콜터.
1963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재명.
1966년 - 아일랜드의 싱어송라이터 시네이드 오코너.
1967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광규.
1974년 - 대한민국의 야구인 이병규.
1975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기환.
1976년 - 대한민국의 가수 노브레인의 보컬리스트 이성우.
1978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박경림.
1981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김나영.
1983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유호석 (클릭비).
1986년 - 대한민국의 개그맨 양세찬. 대한민국의 래퍼 그레이.
1989년 - 대한민국의 배우 이유영.
1993년 - 미국의 배우 애나소피아 로브.
1994년 - 대한민국의 가수 주니 (레이디스 코드).
1992년 - 대한민국의 리포터, 개그맨 유재필 (개그맨)
■ 사망
1292년 - 캔터베리 대주교, 스콜라 철학자, 중세신학자 요하네스 페캄
1788년 - 프랑스 해군 제독 쉬프랑 드 생 트로페.
1791년 -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권상연.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 윤지충.
1818년 - 스웨덴의 화학자 요한 고틀리브 간
1830년 - 스위스의 작가 뱅자맹 콩스탕.
1864년 - 영국의 수학자 조지 불.
1903년 - 영국의 사회학자,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
1980년 - 영국의 음악가 존 레논
2004년 - 미국의 기타리스트 다임백 대럴
2016년 - 미국의 우주비행사 존 글렌
기념일
성도재일(Bodhi Day): 일본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로마 가톨릭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