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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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1901년 - 마르코니가 영국-캐나다 사이의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을 성공한다.

- 제1대 마르코니 후작 굴리엘모 조반니 마리아 마르코니

(이탈리아: Il marchese Guglielmo Giovanni Maria Marconi, 1874년 4월 25일 ~ 1937년 7월 20일)는 이탈리아의 전기 공학자이다. 볼로냐 출신으로 무선 전신을 실용화하였다. 1895년 헤르츠의 전자기파 이론에 기초하여 현대 장거리 무선통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1948년 - 유엔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승인되다.

1952년 - 오스트리아, 빈에서 제국민 평화대회 개최.

1958년 - 기니, 유엔 가입

 

1979년 - 전두환,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12·12 군사 반란 발생.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2·12 쿠데타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했다. 전두환은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 사건의 배경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건을 수사했다. 하지만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현장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증폭됐다.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 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면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 총장이 육군본부로 가자고 하였다"라고 말했다.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총장이 무혐의라는 발표를 뒤집고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와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로 내세우며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이던 정 총장을 강제 연행한 실제 이유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 경비 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 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인사조치 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 전개과정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선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은 일과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연행하는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 육군본부 범죄 수사단장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도록 지시했다. 12월 12일 18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 참모 충장 체포 안에 대한 재가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횐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 유경윤은 정승화 총장 연행계획을 진행했다. 이들은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수도경비사령부 33 헌병대를 투입했고 병력은 공관을 경비하던 해병대 병력을 제압하고 공관에 난입 이후 반란군은 정충장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했다. 연행 후 전두환, 유학성, 황영시 등은 다시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 총장의 연행 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채 요구하였으나 다시 거절당했다. 이후 신군부 세력에 반하는 진압군을 무력화시키고 결국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은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 반란 이후
12.12는 숙군 목적을 띤 군 내부의 반란이었다. 정권을 탈취한다고 하는 의미로의 쿠데타에 해당하는 것은 오히려 1980년의 전국 비상 계엄령으로부터 광주 민중항쟁에 이르는 과정이다. 결국 이런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최구하를 사임시키고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반란 이후 대대적인 군 장성 물갈이가 있었고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는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광주 민중항쟁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같은 해 최규하 대통령은 긴 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했고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회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보위는 헌법을 개정했고,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 처벌 및 사면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투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결국 전두환, 노태우들의 신군부 핵심 인사는 1월 23일 5.18 사건에서의 내란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 재판 1심에서는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의 판결을 내렸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보복은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영삼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12.12, 5.18 사건 관계자를 특별 사면했다.


2002년 - 북한, 핵 동결 해제 선언

 

2007년 - 대한민국 강화도 총기 탈취 사건 용의자가 검거되다. 

- 강화 총기 탈취 사건은 2007년 12월 6일 오후 5시경에 조영국(피의자, 사건 당시 35세)이 경계근무를 마치고 귀대 중인 해병대원의 총기를 탈취한 후 P 모 상병(피해자, 사건 당시 20세)을 흉기로 살해하고 L 모 병장(사건 당시 20세)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다.

 

2011년 - 서해상에서 불법조업 중이었던 중국 어선들을 나포하던 대한민국의 해양경찰관이 중국 선원에게 피살당하였다.

 

2013년 - 북한에서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이 특별 군사재판 후 처형되었다.

- 장성택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정치가, 군인이자, 조선노동당의 고급 간부였다. 조선노동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며 2009년부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자, 최고 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이었으나, 2013년 12월 3일 모든 직위에서 배제되고 출당 조치를 당했으며, 같은 달 12일 특별 군사재판 후 사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사형 방식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기관총과 같은 화기를 이용해 총살형을 집행하였을 가능성과 교수형을 집행하였을 가능성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보당국은 총살형 뒤 시신을 불태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항일활동을 하던 아버지의 덕으로 김일성 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로 진학했으며, 대학 재학 중 김경희와 만나 결혼하였다. 1970년 김일성종합대학교에서 학사 학위 취득 이후 조선노동당 중앙당의 간부로 활동하였고, 김정일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장성택의 친형인 장성우와 장성길은 인민군 장성이다. 자녀로는 딸인 장금송이 있었으나 2006년에 결혼 반대를 비관하며 프랑스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 문화

1961년 - 오스카 1호 발사.

 

1995년 - 대동여지도 목판본 발견.

멸실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던 대동여지도의 목판이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이 목판은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목판과 함께 제작된 것으로 11매로 가로 43cm, 세로 32cm의 목판에는 양면에 표제 및 24 도엽이 판각되어 있는데, 대동여지도의 전체 126 도엽 가운데 5분의 1에 해당한다. 목판의 재질은 피나무이며, 목판에는 교정된 흔적이 있는데 1861년 초간본 완성 이후 여러 차례 오류를 시정하였다. 목판은 1864년 인쇄되었던 고종 원년 갑자 본의 원형으로 판단된다. 숭실대학교에서 가지고 있는 판목은 함경도 함흥지방의 것으로 성불사, 철산, 삼장산이 판각되어 있다.

7층 1면

목판의 빈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지도의 여러 면을 판 하나에 몰아넣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대동여지도의 7층 1면(북청군 남부) · 8층 6면(룡천군 서부) · 13층 6면(황해도 남부의 섬들)은 목판 하나에 같이 새겨져 있다. 또한 대동여지도의 판본 중에는 무의도가 강릉 앞바다에 잘못 찍혀 있는 것이 있는데, 이를 통해 13층 1면과 5면이 같은 목판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8층 6면
13층 6면

2010년 - 2010 광저우 아시안 패러 게임이 개막되었다. ( ~ 12월 19일)

 

2012년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오전 9시 51분 평안북도 동창리 발사장에서 장거리 로켓 은하 3호를 발사했다. 발사된 광명성 3호는 지구 궤도 진입에 성공했다.

 

2016년 - 동대구복합환승센터가 개장.

 

※ 탄생

1574년 - 덴마크의 앤


1712년 - 오스트리아의 귀족이자 군인 로트 링겐 공 카를 알렉산더.

 

1745년 - 미국의 초대 국무부 장관 존 제이.

 

1821년 - 프랑스의 19세기의 소설가, 귀스타브 플로베르.

 

1863년 -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

 

1875년 - 2차 세계대전 독일의 군인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1905년 - 멕시코의 작곡가 구티 카르데나스.

 

1913년 - 대한민국의 법조가 민복기.

 

1914년 - 영국의 소설가, 번역가 패트릭 오브라이언

 

1915년 - 미국의 가수, 배우, 프로듀서 프랭크 시나트라

 

1927년 - 미국의 인텔 창업자 로버트 노이스.

 

1934년 -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가 차지철.

 

1938년 - 대한민국의 의사 황연대

 

1954년 - 대한민국의 전 법무부 장관 천정배.

 

1966년 - 대한민국의 방송인, 전 아나운서 이금희.

 

1976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홍성흔.

 

1978년 - 대한민국의 만화가 김풍.

 

1979년 - 대한민국의 요리사 이원일.

 

1990년 -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BIGBANG의 멤버 승리

 

※ 사망

884년 - 샤를 로망, 서 프랑크 왕국의 왕


1586년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선거 왕, 스테판 바토리


1990년 - 대한민국의 변호사 조영래.


2002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황낙주.


2003년 - 구 소련의 정치인 헤이다르 알리예프.


2011년 - 대한민국의 해양경찰관 이청호.


2013년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장성택


2013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지훈


2015년 - 미국의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

※ 기념일

독립기념일: 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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