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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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714년 - 피핀 2세가 프랑크 왕국 벨기에 리에주 근처의 쥐필에서 사망하다.
 
755년 - 중국 당나라 연경에서 안록산이 양국충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다.
 

1598년 -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이 벌어지다.

노량해전

노량해전은 정유재란 당시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전투이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와 수군의 잇따른 패배 그리고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명나라에 휴전을 제의하고 자국으로 철군하였다가 휴전 협상 조건이 서로 맞지 않아 결렬, 1597년 15만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에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하여 전세를 가다듬은 조선 수군이 명량 대첩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도독 유정과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참전으로 남부 해상권이 조명 연합군에게 다시 넘어가게 되자, 해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당한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듬해인 1598년 음력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까지 사망하고,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조선 주둔 일본군의 수뇌부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 계속되는 패전으로 병사들의 사기는 계속 저하되어 가고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해상 보급로를 차단당한 채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결국 일본군은 서둘러 전쟁을 끝내고 자국으로의 철군을 결정하고 순천, 사천, 울산 등지로 집결하며 철수를 서둘렀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 왜교성 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시게토 라, 남해에 주둔 중이던 소 요시토시 등은 고니시 군을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으로 하여금 남해도 서북쪽 죽도 뒷편에서 일본 수군의 퇴로를 차단해줄 것을 요청하고, 자신의 조선 수군은 일단 봉쇄망을 푼 후,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오후 10시경 남해도 서북단인 관음포에 매복시켰다.

이튿날인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새벽 4시경, 요시히로 등이 이끄는 일본 함선 500여 척이 노량에 진입하자 매복해 있던 조선 함선들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함대가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고, 이후 순천왜성 포구를 나선 유키나가의 일본 수군과 진린의 명 수군이 합세하여 4시간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같은 날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명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도주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 첨사 이영남·낙안군수 방덕룡·초계군수 이언량 흥양 현감 고득장 등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전사하였다. 이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결국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 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남해도 남쪽을 지나 퇴각하여 시마즈 군과 함께 일단 부산에 집결, 그 즉시 퇴각하였으며 노량 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1987년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 당선.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6월 항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에 따라 1987년 12월 16일 수요일에 직선제로 실시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최초로 치러진 국민들의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거였다. 12·12 군사 반란의 주역 중 하나인 노태우와 대표적인 민주 인사인 양김(김영삼, 김대중) 및 5·16 군사정변의 주역 중 하나인 김종필의 대결이었으나, 선거 결과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상 국민 직선을 통해 당선된 대통령 중 가장 낮은 득표율이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이 선거를 통해 신군부 정권이 연장된 이유로는 양김의 단일화 실패 등 야권의 분열과 KAL기 폭파사건 등 선거일 직전 터진 중대사고 등이 지적된다. 실질적으로 야권 진영의 두 후보였던 김영삼 후보, 김대중 후보의 표가 분열하면서 표가 갈라졌으며 노태우 후보가 당선됨에 따라 사실상 5년간 군사 정부가 연장된 상황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5년 후에야 민주 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1991년 - 카자흐스탄 독립.

 

1994년 -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 WTO 비준동의안이 찬성 1백52, 반대 58, 기권 1로 표결, 찬성.

 

1996년 - 대구문화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 공개방송이 있었던 대구광역시 달서구 우방랜드 대공연장에서 압사 사고로 여고생 2명이 숨지다.

 

1997년 - 환율 제한폭이 철폐되다. 한화그룹, 한화에너지와 한화에너지 플라자 매각 결정.

일본에서 포켓몬스터 38화인 전뇌전사 폴리곤을 시청하던 6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발작을 일으켜 1998년 4월 15일까지 119일 동안 방영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나다.
 
2003년 -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라왈핀디 근처의 자택에서 테러를 당했으나 부상만 당하였다.
 
2005년 -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이 줄기세포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기자회견에서 폭로하다.
 
2008년 - 대한민국의 민간 사이버 외교 사절단 반크가 2채널를 통해 자신들이 사이버 테러를 당했음을 밝혔다.
 
2012년 - 일본에서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다.그 결과 아베 신조 총재가 이끄는 자민당이 전체 과반을 넘는 294석을 확보하여 압승을 거둠으로써 3년 3개월만에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다. 아베 신조는 2007년 9월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 5년 3개월만에 다시 총리에 오르게 되었다.
 
2014년 - 파키스탄 페샤와르 소재의 아미 퍼블릭 스쿨에 탈레반의 무차별 총격으로 25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 아메리칸 항공 280편이 난기류로 인해 나리타 국제공항에 비상 착륙하였다.

 

문화

1899년 - 이탈리아의 축구 클럽 AC 밀란 창단.
 
1899년 - 프랑스의 축구 클럽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창단.
 
1946년 - 타이, 유엔 가입.
 
1963년 - 케냐, 유엔 가입.
 
1968년 - 대한민국에서 1969학년도 예비고사 실시
 
1988년 - 대한민국에서 1989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2004년 - 한국 자체 개발 고속열차 HSR350X, 시운전 중 시속 350km 돌파 (최고시속 352.4km).
 
2005년 - 중앙선 청량리역-덕소역 구간 복선 전철 영업 시작.
 
2011년 -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바다 위에 2층으로 지은 다리인 거금대교가 개통하였다.

 

탄생

1485년 - 아라곤의 캐서린, 영국왕 헨리 8세의 첫 번째 부인.
 
1742년 -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 장군.
 
1775년 - 영국의 소설가 제인 오스틴.
 
1790년 - 벨기에의 초대 국왕 레오폴드 1세.
 
1863년 - 미국의 철학자,시인,평론가 조지 산타야나
 
1901년 - 소련의 군인 니콜라이 바투틴.
 

1902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사진출처 굿뉴스

유관순(1902년 12월 16일 ~ 1920년 9월 28일) 열사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흥이다. 1916년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감리교회 선교사인 사애 리시 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하고, 1919년에 이화학당 고등부에 진학하였다. 3월 1일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5일의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였다. 총독부의 휴교령으로 천안으로 내려와 후속 만세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교도소 내 가혹행위로 인해 1920년 9월 28일에 사망했다. 2013년에 주일대사관에서 발견되어 국가기록원이 이관받아 11월 19일에 공개된 자료에 의하면 "유관순, 옥중에서 타살"로 기재되어 있다.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으며, 1996년에 이화여자고등학교는 명예 졸업장을 추서 하였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의 생가가 복원되어 1991년에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과 천안 종합운동장 내 '유관순체육관'은 유관순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해방 후 박인덕 등에 의해 기념사업이 추진되었는데, 이 때문에 일부 개신교 세력과 박인덕 등이 자신들의 친일 의혹을 덮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개신교계 학교인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를 부각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1957년 - 대한민국의 전직 씨름선수 이준희.
 
1974년 - 대한민국의 성우 홍범기.
 
1977년 - 대한민국의 가수 송호범.
 
1978년 - 대한민국의 가수 한영.
 
1979년 - 대한민국의 힙합 가수 피타입.
 
198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양성제.
 
1982년 - 대한민국의 배우 전세현.
 
1983년 - 대한민국의 성우 김나율.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오승원. 대한민국의 야구인 최형우.
 
1985년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한선수.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주다하. 일본의 가수 타치바나 케이타. (w-inds.)
 
1988년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조준호. 대한민국의 배우 박서준. 독일의 축구 선수 마츠 후멜스. 잉글랜드의 배우 애나 포플웰.
 
1989년 - 일본의 패션 모델 겸 배우 기리타니 미레이.
 
1992년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톰 로기치.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리커 마르턴스.
 
1994년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엘리엇 리. 이탈리아의 축구 선수 니콜라 무루. 스페인의 축구 선수 호세 로드리게스 마르티네스.
 
1997년 - 스웨덴의 가수 자라 라르손.
 
1998년 - 중국의 가수 결경 (프리스틴, 아이오아이)

 

사망

604년 - 중국 남북조 시대 진나라의 제5대 황제 진숙보
 
705년 - 중국 유일의 여자 황제 측천무후
 
714년 - 프랑크 왕국의 귀족이자 아우스트라시아 왕국의 궁재 피핀 2세
 
882년 - 107대 로마 교황 요한 8세
 
1598년 - 조선의 무신 이순신

한국사에서 독보적으로 유명한 군인이자 성웅이란 칭호가 따로 붙을 정도로 가장 드높은 영웅이며, 무장 이외에 역사적 인물 전체로 넓혀도 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무신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희대의 걸물이며, 파란만장한 삶을 산 사내이다. 그는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을 이끌고 해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북상을 저지하였는데, 전쟁 내내 적과 싸워 모든 전투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항상 승전을 거두었으며, 당시 임금인 선조와 조정에게 지원은커녕 불합리한 모함과 추궁만 당하였으나 끝까지 충성을 다했고, 임진왜란 최후의 대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후에도 조정에서는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지속적으로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꼽힌다. 이순신은 현대 한국에서 성웅, 명장, 군신이라는 최고급 수사들이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위인 중 한 명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늘 순위권을 다투며,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으로 이순신에게만 사용되고 있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받은 칭호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이순신 전용 시호로 인식된다.

사실 이순신이 이토록 위대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의 군사적인 위업을 떠나서 보통 사람으로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성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혹하고 거대한 형태의 폭력인 전쟁이라는 상황을 수행하며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감당하였다.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의 질시와 모함으로 인한 파면, 관리로서 받은 조정의 비합리적인 처우 등 앞으로는 왜적과 싸우면서 뒤로는 조정과 임금이라는 내부의 적을 홀로 버텼다. 또한, 어머니와 아들까지 연이어 전시에 잃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어렵게 만든 군이 궤멸 직전에 처해 출전이 곧 전사임이 확실시되는 참담하고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극복해냈고, 천재적인 능력과 노력을 발휘하여 임진왜란 당시 존망의 위기에 빠진 조국과 백성을 끝끝내 지켜냈다.

그는 웃음이 적고 행동이 단아했으며, 좌절과 포기를 모른 채 제 사명에만 충실하게 전장에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탐관오리들이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자 높으신 분들과 뇌물을 주고받는 등의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무관의 본분에만 충실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원리원칙적인 성향과 굉장히 청렴한 성격 탓에 당시 상사들과 갈등이 많아 임진왜란 전에는 인사이동이 자주 있어 여러 지역을 옮겨 다녔다. 한 번은 당시 임금 바로 밑으로 강력한 권력과 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이조판서였던 율곡 이이가 당시 같은 덕수 이씨 가문의 말단 무관이었던 이순신과의 만남을 먼저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은 만남으로 인해 주변에 오해의 소지가 생기고 혹시나 부적절한 인사권이 제시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만남을 거절해버린 실제 기록이 있다. 기본적으로 갈망하는 권위, 권력 같은 원초적인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신념대로만 매사에 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싸우다 죽던 순간까지 그 누구의 인정과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자 헌신하였으며, 몇몇 전투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걸 이뤄낸 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 가령 명량 해전의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두 시간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한 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대중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 하겠다.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 전투에서의 능력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전쟁의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이순신 지휘하의 조선수군은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많이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격파가 하루 동안 대여섯 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적군을 수장시켜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순신 휘하의 조선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 더 이상 전투를 회피할 경우 나라가 망하는 경우뿐이었다.

또한 함대의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국이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해진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 기피대상이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 한 번뿐이었다. 원균이 5천 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와 숭배 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1897년 - 프랑스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
 
1965년 - 영국의 소설가 겸 극작가 서머싯 몸
 
1980년 - 미국의 KFC 창시자 커널 샌더스

커널 샌더스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할랜드 데이비드 샌더스(1890년 9월 9일 ~ 1980년 12월 16일)는 KFC를 창업한 미국의 기업인으로, KFC를 상징하는 마스코트이기도 하다. 그의 사진은 KFC 매장 어디에서나 볼수있으며, 때때로는 KFC를 대신하는 이름으로도 사용된다.


1989년 - 미국의 배우 리 밴클리프
 
1993년 - 일본의 정치가 몽키매직파 다나카 가쿠에이
 
1997년 -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 김학순
 
2017년 - 미국의 가수 킬리 스미스

 

기념일

화해의 날: 남아프리카 공화국
 
독립기념일: 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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