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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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546년 - 고딕 전쟁 : 동고트의 토틸라가 비잔틴 제국 수비대를 매수하여 로마를 정복하다.

942년 - 노르망디의 윌리엄 1세가 암살되다.
 
1538년 - 교황 바오로 3세가 잉글랜드의 헨리 8세를 파문하다.
 
1600년 - 프랑스의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가 결혼하다.
 
1718년 - 영국이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다.

1770년 -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 출생하다.

요제프 칼  슈타이어가 그린 베토벤의 초상화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독일의 본에서 태어났으며, 성인이 된 이후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감기와 폐렴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57세로 생을 마친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음악의 성인" 또는 "악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등이 있다. 베토벤을 둘러싼 찬반 논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낭만주의 작곡가인지, 아니면 고전주의 작곡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적’의 의미와 낭만주의 음악 시대 자체의 기간에 대한 의견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토벤을 이 운동이나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문맥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한 미학적 시기로 간주한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독일의 괴테·실러와 영국의 퍼시 실리와 같은 문학적 낭만주의 시기의 첫 절반에 위치한다. 그는 또한 슈포어와 E. T. A. 호프만의 민속적 특징에 자주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부검에 따르면 머리카락에 수은이 치사량 이상 함유되어 있어서 독살의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1819년 - 시몬 볼리바르가 앙고스투라(Angostura, 현재 베네수엘라의 시우다드 볼리바르) 그란콜롬비아의 독립을 선언하다.
 
1874년 - 청나라 제10대 황제 동치제가 사촌 남동생 광서제에게 보위를 선위하다.
 
1939년 - 제2차 세계 대전 : 플라테 강 전투, 독일 순양전함 아드미랄 그라프 쉬페가 몬테비데오 바깥 바다에서 한스 랑스도르프 함장에 의해 자침하다.
 
1941년 - 제2차 세계 대전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이 시작되다. /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 육군이 북부 보르네오 섬을 침공하다.
 
1944년 - 제2차 세계 대전 : 벌지 전투 - 말메디 학살 미국 육군 285포병관측대대 포로들이 무장친위대(WaffenSS) 요아힘 파이퍼 전투단에 의해 학살되다.
 
1945년 - 온두라스, 유엔 가입.

1963년 - 대한민국의 5,6,7,8,9대 대통령 박정희의 정식 취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다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졸업 성적 석차 2등으로 만주국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성적우수자 추천을 받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57기로 입학한 후 1944년 성적 석차 1등으로 졸업했다.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본 제국이 수립한 만주국의 일제 관동군 장교로 근무하였다. 일제가 패망하고 1946년 7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대한민국 국군 장교로 지내던 중, 형인 박상희가 경찰에게 사살당하자 이재복의 권유로 복수심에 남조선노동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가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에서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국에 남조선노동당 조직과 동료들을 증언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장이었던 백선엽의 최종 면담에서 사형을 면하였다.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였고, 이로써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되어 정치를 시작하였다.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장기집권을 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등 조국 근대화 정책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고, 후진국 탈피와 경제자립으로 국가발전의 기틀을 닦았다. 3선 개헌 및 유신헌법 등의 장기 집권을 반대하던 여야 및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무렵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으로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연회를 하던 도중 당시 중앙 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아 암살당했다.

박정희의 대통령 직무 수행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장면 내각이 수립한 국가 주도 핵심 공업 개발을 골자로 하는 '불균형 개발 모델-지도받는 자본주의 체제'(제2공화국과 울프 박사의 합작인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미국이 주문한 환율 현실화 및 노동집약형 수출 경공업 개발을 비교적 충실하게 따랐다는 평가와 무리하고 비효율적인 중공업 중복 투자 및 지나친 관치 경제로 인한 금융 시장의 부실화로 한국의 경제발전을 늦추었다는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이외에도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발전에 성공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군정 시절 이래로 중농 정책, 통일벼 보급, 새마을 운동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농가 경제를 피폐하게 만들었다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으며, 그린벨트 규제에도 불구하고 수도권 과밀을 예방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 의료보험 제도가 오늘날 한국 의료보험의 토대가 된 전두환 정부의 의료보험만 못하다는 부정적 평가, 개발 위주의 획일화된 정책이라는 부정적 평가 등이 뒤따르고 있다. 다만,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에서 꾸준히 실시되었던 사방 사업, 조림 사업, 산림 복원 사업 등에 관하여는 호평이 더 많은 편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존경하는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 선호도와 공적 부문 등에서 최상위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5.16 군사 정변, 10월 유신을 통한 헌정 파괴, 노동 운동 및 야당 탄압, 군사 독재 등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한일협정을 강행한 것과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한 평가가 양립하고 있다. 핵무기 개발, 행정 수도 이전을 추진하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의 영향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다소 낮아져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이 1위를 차지하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2위로 하락하였다.


 1987년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노태우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97년 - 일본에서 포켓몬스터 무인편 38화인 전뇌전사 폴리곤을 시청하던 600명 이상의 어린이들이 발작을 일으켜 1998년 4월 15일까지 119일 동안 방영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나다.
 
2007년 - 라코타 공화국이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하다.
 
2008년 - 민주노동당 강기갑 대표에게 선거법위반혐의로 300만원의 벌금형이 구형되다. 

2011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오전 8시 30분 열차에서 급성 심근경색, 심장마비(쇼크)등 합병으로 사망하였다.

김정일(1941년 2월 16일 ~ 2011년 12월 17일)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이다. 본관은 전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이었으며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의 첫째 아들이다.
김정일은 어린 시절 한국 전쟁 당시 평양을 떠나 간도 지역으로 은신하였으나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귀환했다. 김일성 종합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으며 1961년 7월 22일 조선로동당에 입당한 이후부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비서 등에 임명되었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의 후계자로 주목되었으며 1980년 제6차 당 대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1994년 김일성 국가 주석의 사망 이후에 권력을 세습해 공화국의 실권을 잡아 통치자가 되었고 경제적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던 1993년부터 6년 동안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재정낭비 등으로 무능력한 지도자로 비판받았다. 2011년 12월 17일에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면서 김정일의 후계 자리는 그의 셋째 아들인 김정은에게 승계되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조선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우리 당과 우리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줄여서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로 불렸다. 2012년 4월 11일 조선로동당 당대표자회의에서 조선로동당의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되었으며 2012년 4월 13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2013년 - 아프리카 북동부 남수단에서 정부군과 반대파간의 교전이 벌여져 1천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문화

546년 - 로마 포위전: 비잔티움 제국 병사의 배신으로 동고트 왕국 병사들이 밤중에 성에 잠입하여 성문을 열다. 토틸라 왕의 군대가 도시를 함락하고 약탈하다.

1903년 - 라이트 형제가 노스캐롤라이나주 키티호크에서 라이트 플라이어로 사상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하다.

라이트 플라이어(Wright Flyer) 또는 플라이어 1호(Flyer I)는 미국의 기계기술자인 라이트 형제가 발명/비행을 성공시킨 세계 최초의 동력 비행기이다. 원래는 글라이더였다가 라이트 형제가 엔진과 프로펠러를 추가해 만든 것이다. 1903년 12월 17일 키티호크 해안에서 이 기계는 12초 동안 36.5m를 날았는데, 이것은 세계 최초의 동력비행이었다. 그러나 관객들은 추운 날씨 탓인지 5명뿐이었고, 이것을 못 믿는 기자들도 많았다. 형제는 3일 전인 12월 14일에 비행에 나섰다. 이때 기체는 아무 이상 없었다. 형 윌버가 먼저 올랐다가 비행했는데, 이륙도 하지 못하고 추락했다. 윌버는 부상을 당했는데, 매우 큰 부상은 아니었다. 1년 후인 1904년에 신문 기자들을 초청하여 새로 제작한 플라이어 2호를 타고 비행하였는데, 결국 실패하였다. 이에 기자들은 형제가 지난번에 비행한 것도 거짓말이라면서 투덜대는 기자들도 생겨났다. 이륙 직전에 동생 오빌이 올라탔고, 형 윌버가 승강타를 조작하자 비행기가 떠올랐다. 그 후 1905년에 그 전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가끔씩 조종불능에 빠지는 플라이어 2호를 폐기하고(엔진만을 제외하고) 상당 부분을 개량한 플라이어 3호를 제작했다. 다만 플라이어 3호의 1905년 6월 23일의 처녀비행은 모두 10초를 넘기지 못했으나 이후 7월 14일의 추락으로 인해 오빌의 척추가 어긋난 사고 이후 엘리베이터와 러더의 크기를 키우고 주 날개와의 거리를 늘리는 개량을 하자, 9월 26일에서 10월 5일 사이에 있었던 비행시간과 비행거리가 획기적으로 향상된다. 이 시기에 형 윌버가 플라이어 3호에 올라타서 기록한 최장시간 최장거리는 38분 동안 약 38km(24.5마일)이었다.


1922년 - 이집트의 투탕카멘 묘가 발굴됨.

디지털 복원한 사진

투탕카멘(재위 기원전 1361년 ~ 기원전 1352년)은 이집트 제18왕조의 파라오이다. 아크나톤의 아들로, 출생 시의 이름은 투탕카텐이었다. 재위 2년에 투탕카멘으로 개칭하였다. 투탕카몬이라고도 한다. 투탕카멘의 무덤은 1922년에 처음으로 발견되었다.(왕가의 계곡 KV 62호) 그 이전에는 투탕카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다. 아비도스 왕 목록, 카르나크 왕 목록 등에서는 아크나톤처럼 투탕카멘이 제외되어 있다. 또한 그에 대한 자료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솔 레브 사원의 비문에 따르면, 투탕카멘의 아버지는 아멘호테프 3세이다. 하지만 투탕카멘이 태어났을 때 아멘호테프 3세는 이미 죽고, 아크나톤의 시기였다. 고고학자들은 kv55호의 미라가 아크나톤이라는 것을 밝혀냈으며, 투탕카멘의 아버지로 확인하였다. 2010년, 고고학자들은 아멘호텝 2세 무덤에서 발견된 네페르티티로 추정되는 미라가 투탕카멘의 어머니의 미라라는 것을 밝혀냈고, 그녀가 아크나톤의 여동생인 것으로 보아, 투탕카멘의 어머니는 네 베타흐 공주 또는 베 케타 텐 공주일 확률이 아주 높다. 아마 르나에서 왕자로 살아가던 투탕카텐은 아버지 아크나톤과 삼촌인 스멘크카레가 죽은 후 멤피스에서 10세의 어린나이로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다. 행정관 아이와 장군 호렘헤브가 이 나이 어린 파라오를 보좌하였다. 또한 이미 출산 경험이 있는 누나인 안케센파아텐과 결혼하게 된다. 재위 2년 째에 아크나톤의 아텐 신앙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공식화되었다. 투탕카텐은 투탕카멘으로, 안케 센 파아 텐은 안케센나멘으로 개명하여 아멘 신앙으로의 복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큰 석비가 세워졌는데, 여기에는 아멘 신앙의 부활과 신전의 재건과 개방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카르나크와 룩소르에서도 갖가지 건축사업이 진행되었다. 훗날 호렘헤브가 파라오가 되었을 때, 이것을 모두 자신의 업적으로 돌렸는데, 이는 이미 이때부터 호렘헤브 등이 정치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의 치세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몇 차례의 해외 원정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투탕카멘의 무덤에는 왕의 사냥, 전쟁 모습이 담겨 있다. 사막에서 사자 등을 사냥하기도 하며, 누비아와 시리아의 적들을 화살로 공격하기도 한다. 훗날 호렘헤브의 무덤이나, 누비아 총독 후이의 무덤을 통해 이러한 그림들이 실제 사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투탕카멘 본인이 직접 원정을 이끌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투탕카멘은 근친상간의 혼인에 의해 태어난 자식으로, 오른쪽 다리에는 골질환과 왼쪽 다리에는 선천성 내반족이 있어서 걷기가 아주 힘들었으며, 선천성 기형인 구개열이 있었으며 이로 인한 언어 장애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투탕카멘의 미라를 분석한 연구팀은 유전자 검사로 투탕카멘이 치명적인 말라리아의 원인 기생충인 열대 열원충에 감염되었었던 것을 밝혀내었다. 결국 여러 가지 유전적 질환으로 면역체계가 약했던 투탕카멘은 다리 골절상을 입은 상태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재위 9년째에 1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투탕카멘이 젊은 나이로 죽자 투탕카멘의 왕비인 안케세나멘은 히타이트의 왕인 수필 룰리 우마 1세에게 편지를 써, 히타이트의 왕자 중 한 명과 자신이 결혼해 파라오가 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수필 룰 리우 마스 1세는 제안을 받아들여 왕자 잔 난자를 보냈다. 그러나 잔 난자는 이집트에 도달하기 전에 알 수 없는 세력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후 파라오의 자리는 투탕카멘 시대의 권력가인 아이에게 돌아간다.


 1935년 - 더글러스 DC-3 비행기가 첫 비행을 실시하다.
 
1983년 - 서울 지하철 2호선 교대역 ~ 서울대입구역 구간 개통.
 
1991년 - 대한민국에서 1992학년도 학력고사 실시
 
2013년 - 플레이스테이션 4가 대한민국에서 출시되다.
 
2015년 - 서울 지하철 8호선의 연장선 별내선 착공.

탄생

1267년 - 제91대 일본 천황 고우다
 
1770년 - 독일의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1830년 - 프랑스의 비평가 쥘 드 공쿠르.

1905년 - 핀란드의 군인, 저격수 시모 해위해.

1923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김상홍

1936년 - 제266대 로마 교황 프란치스코.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면서,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이다. 또한 최초의 남반구 국가 출신이자 이중국적을 보유한 교황이기도 하다. 또한, 시리아 출신이었던 교황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 만에 즉위한 비 유럽권 출신이다. 그리고 교황 요한 바오로 1세 이후 35년 만의 이탈리아계 교황이기도 하다. 프란치스코는 라틴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 포르투갈어, 영어, 우크라이나어를 구사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으로 화공학자와 나이트클럽 경비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생이 되었다. 1969년에 그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예수회의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지냈다. 199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01년에는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2013년 2월 2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스스로 교황직을 사임한 후에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다수의 표를 얻어 같은 해 3월 13일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에 선출된 그는 교황으로서의 자신의 새 이름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따서 프란치스코라고 명명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항상 검소함과 겸손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사회적 소수자들,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관용을 촉구하며, 여러 가지 다양한 배경과 신념, 신앙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이 오갈 수 있도록 대화를 강조하는데 헌신적인 노력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소박하고 격식에 덜 얽매인 형식에 따르는 생활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과거에 전임자들이 사도 궁전에 거주했던 데 반해 프란치스코는 성녀 마르타 호텔을 자신의 거주지로 선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교황직에 선출될 당시에 전통적으로 교황 선출자가 전통적으로 착용하는 붉은색 교황용 모제타를 입지 않았으며, 전례를 집전할 때에도 입는 화려한 장식이 없는 검소하고 소박한 제의를 입는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순금으로 주조해왔던 어부의 반지를 도금한 은반지로 교체하였으며, 목에 거는 가슴 십자가는 추기경 시절부터 착용하던 철제 십자가를 그대로 고수하였다.

프란치스코는 낙태, 피임, 동성애 등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고수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동성애를 죄로 규정하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동성애자들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거나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추기경 시절에 그는 이미 아르헨티나 정부의 동성 결혼 합법화 시도에 대해서 반대한 적이 있었다. 교회의 가르침에 관해서 ‘교회의 아들’로 자처한 그는 낙태에 대해서도 ‘소름이 끼치는 행동’이라고 언급하였으며, 교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 확대를 강조했지만, 여성의 사제 서품 문제에 대해서는 교회가 이미 안 된다고 밝혔다며 교회의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미혼모 자녀의 세례를 거부하는 사제들에게는 “사람들과 구원의 길 사이를 갈라놓는 위선자들”이라고 질책한 바 있다. 더불어, 그는 “예수님을 믿지만, 교회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2014년 3월, 미국의 유력지인 포춘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리더 50인을 선정했고, 그중 1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정되었다.


1939년 - 대한민국의 시인 정현종

1955년 - 대한민국의 배우 길용우.

1969년 - 대한민국의 축구인 서정원. 미국의 종합격투기 선수 척 리델.

1975년 - 우크라이나의 배우 밀라 요보비치.

1976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김상식. 스위스의 축구 선수 파트리크 뮐러.

1983년 - 일본의 비마니시리즈 작곡가 Kors k.

1985년 - 일본의 가수 오가타 류이치 (w-inds.).

1988년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진선유.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김민성. 대한민국의 골프선수 김하늘. 대한민국의 가수 제시

1989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성의준

1991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재진. 대한민국의 배우 정해나.

1992년 - 대한민국의 가수 나인뮤지스의 멤버 금조.

1993년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베아트리스 자네라투 주앙.

1994년 - 미국의 가수, 배우 냇 울프.

1996년 - 러시아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옐리자베타 툭타미셰바.

1998년 -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 마르틴 외데고르.

 

사망

1273년 - 페르시아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이슬람 법학자 루미

1833년 - 독일의 미스테리 소년 카스파어 하우저

1919년 - 대한제국의 관료 이근택 [친일파-을사조약의 주범]

1998년 -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변호사 이태영

2009년 - 미국의 애니메이션의 아버지 로이 디즈니.

2011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의 위원장 김정일

2013년 - 스페인의 추기경 리카르도 마리아 카를레스 고르도

2013년 - 대한민국의 사회기관단체인 김동주

2018년 - 미국의 영화배우 페니 마셜

 

기념일

성노동자에 대한 폭력 종식의 날(International Day to End Violence Against Sex Workers): 미국
 
라이트 형제의 날(Wright Brothers Day):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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