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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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63년 - 잔지바르가 독립했다.

2002년 -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다.

16대 대선은 지난 15대 대선에서 간발의 차로 낙선하고 재도전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사상 최초의 국민 참여 경선을 통해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의 양강 구도로 진행되었다. 대선 재수생인 이회창 후보는 경험이나 세력 면에서 노무현 후보보다 대권 고지에 좀 더 유리할 것으로 점쳐졌으나, 이전 대선부터 불거진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 노사모를 비롯한 네티즌들의 열성적인 노무현 지지,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성공 등에 힘입어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선거 전 상황

제16대 대선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두 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로 진행되어, 1971년 제7대 대선 이후 최초로 3자, 4자가 아닌 양자 구도로 치러진 대선이 되었다. 그러나 제15대 대선에서 패한 후 차근차근 대권 재도전을 준비해오던 이회창 후보가 한나라당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진보 성향 인사이면서 보수 정당 민주당의 후보가 된 노무현 후보는 끊임없이 당 내부에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회창의 당선이 유력시되고 있었으나, 제15대 대선과 마찬가지로 아들 병역기피 의혹에 시달리며 난관에 봉착한 데다 노무현 후보가 이른바 '노풍'을 일으키며 선풍적 인기를 끌어 승패를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통합 21 후보와 극적으로 단일화에 성공, 이를 발판 삼아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맹추격했다.

민주당 후보 재신임

5월 들어 김대중 대통령의 두 아들인 김홍업과 김홍걸의 비리가 불거지며 민주당의 지지율이 하락함과 더불어, 노무현의 지지율도 본격적인 내림세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에 노무현은 6.13 지방선거에서 영남권 광역 단체장을 한 명도 당선시키지 못할 경우 재신임을 받겠다고 공약했다. 선거 결과 새천년민주당은 호남과 제주의 광역단체장만 당선되는 등 참패를 기록했다. 노무현은 선거 전 약속한 대로 후보 재신임을 물었고, 민주당 당무회의는 만장일치로 재신임을 의결했다. 민주당 내 최대 계파 모임인 중도개혁 포럼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후보·지도부 즉각 사퇴론’을 주장했다. 지방 선거 참패를 계기로 이인제 등 민주당 내 반노무현 세력의 후보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정몽준 의원 출마

대한축구협회장이던 정몽준 무소속 의원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유치해내고 성공적으로 개최함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얻어 유력 대권 주자가 되었다. 정몽준이 대선에 출마하자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토막 났고, 안 그래도 노무현 후보와 갈등이 있던 당내 상당수 의원들은 노무현 후보를 더 적극적으로 배척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흔들기’는 더욱 노골화되었고, ‘후보 단일화론’은 물론이거니와 ‘후보 교체론’까지 나왔다. 노무현은 경쟁력이 없는 만큼 정몽준을 수혈해 대선 새판 짜기에 나서야 하지 않느냐는 정치공학적 판단이었다. 10월 들어서는 아예 노무현의 낙마를 바라는 의원들이 탈당하여 후보 단일화 추진 협의회(후단협)를 만들고 후보 단일화를 주장했는데, 이들은 노무현으로 후보 단일화가 되면 함께 할 수 없다고 발언하였고 정몽준 지지의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11월 19일 후단협은 정몽준에 대한 공개 지지를 밝혔으며, 심지어 후단협 소속 의원이 정몽준 대표 측에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 후단협 해체 후 일부 의원은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12명은 민주당에 복당 했다.

그러던 10월 17일 김민석 전 민주당 최고위원이 민주당 탈당 및 통합 21 합류를 선언했는데, 노무현에게 큰 타격이 되리라는 관측과 달리 오히려 이는 노무현 후보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동정론이 불었고, 결국 답보 상태였던 그의 지지율은 20%대를 회복하고 후원금도 크게 늘어난 것으로 드러났다.

노무현. 정몽준 단일화

단일화 방안으로는 크게 3가지가 제시되었는데, 국민 경선과 여론 조사, 협상 담판이었다. 정몽준 캠프는 11월 1일 양 캠프가 협상·담판을 통해 단일 후보를 정할 것을 제안했고, 노무현 캠프는 11월 3일 국민 참여 50%, 당원 참여 50%로 국민 경선을 실시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한 여론조사상 노무현 후보에 우위를 점하고 있던 정몽준 후보 측은 여론조사로 단일 후보를 정하는 방안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통합 21은 노무현 캠프의 국민경선 실시 주장에 대해 “국민 경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를 표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꾸준히 회복해 이미 판세는 이회창 후보가 독주하고 노·정 두 후보가 2위 싸움을 벌이는 1강 2중 구도로 재편되고 있었으므로, 정몽준 캠프로서도 하루빨리 단일화를 성사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11월 11일, 자신에게 불리한 것으로 여겨지던 여론조사를 통한 단일화를 정식으로 제의하였다. 또한 여론조사 결과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일정 수준에 미달할 시 그 여론조사는 무효 처리하자는 정몽준 캠프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이에 따라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주요 언론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중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결과보다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더 낮게 나올 시 그 결과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역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무효 처리하기로 하였다. 11월 23일부터 25일까지 실시된 여론조사 중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가장 낮게 나온 것은 국민일보-월드리서치가 11월 25일 실시한 결과에서의 30.4%였다. 따라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30.4%보다 낮을 시 그 조사 결과는 무효 처리하도록 했다.

단일화 협의 과정에서 노무현 후보가 단일화 방식 등 쟁점 사항에 있어 통 큰 양보를 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고, 이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상승하는 효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단일화의 방식은 합의되었으나, 여론조사의 설문 내용을 두고도 논란이 일었는데,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 중 누가 더 마음에 드느냐'는 지지도 질문에는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반면, '어느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경쟁력 질문에는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결국 양 캠프는 조율을 거친 결과 지지도 질문과 경쟁력 질문을 조금씩 섞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견주어 경쟁력 있는 단일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십니까"를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두 후보는 여론조사 실시에 앞서 텔레비전 토론을 가지기로 했는데,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사전 선거 운동이 될 수 있다며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한 차례에 한해 텔레비전 토론을 허용하였고, 두 후보 간 토론은 11월 22일 실시되었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는 11월 24일 오후 1시부터 8시 30분까지 7시간 반에 걸쳐 실시되었다. 여론조사는 월드리서치와 리서치 앤 리서치, 2개 업체에 의해 실시되었으며, 한 업체가 각각 2,000명, 총 4,000명을 상대로 실시되었다.

민주당과 통합 21은 11월 24일 자정 공동으로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리서치 앤 리서치 조사는 응답자 중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32.1%가 나와, 무효 처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월드리서치 조사는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28.7%로 무효화 기준인 30.4%에 미달하여 무효 처리되었다. 리서치앤리서치 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46.8%, 정몽준 후보가 42.2%를 얻음으로써 노무현 후보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무효 처리된 월드 리서치 조사 결과 또한 노무현 후보가 38.8%, 정몽준 후보가 37.0%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정몽준 후보는 단일화 여론조사 결과에서 패배함에 따라 사퇴를 선언하고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 노무현 후보는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계기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후보를 역전하였다.

이인제. 정몽준 노무현 지지 철회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당시 2위를 했던 이인제 전 민주당 최고위원은 12월 1일 민주당 탈당을 선언한 데 이어 이틀 뒤인 12월 3일 자유민주연합에 입당하였으며, 입당과 동시에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지명을 받아 총재 권한대행으로 취임하였다. 이인제는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할 계획으로 자민련에 입당했으나, 김종필 총재의 강력한 의지로 자민련은 12월 12일 당 차원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선언하였다. 다만 당원 및 당직자들이 개별적인 지지를 하는 것은 막지 않기로 해, 이인제는 다수 자민련 의원들과 함께 이회창 지지를 선언하고 이회창 후보 지원 활동에 나섰다. 정몽준 역시 대선 전날인 12월 18일 밤 10시 긴급 발표를 통해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를 선언하였다. 정몽준은 지지 철회 발표문에서 그 날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는 표현을 한 것에 노무현 후보의 외교안보 의식에 문제를 느껴지지를 철회했다고 밝혔다. 노무현 후보와 정대철 민주당 선대위원장 등은 정몽준을 만나기 위해 정몽준의 자택 앞까지 찾아갔으나, 정몽준 대표는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습이 전파를 타며 당시 진보 진영이 민노당 권영길 후보 대신 민주당 노무현 후보로 결집하는 의외의 효과가 일어났다는 분석도 있었다.

2007년 -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다.

2007년 12월 19일 수요일에 실시되어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총 12시간 동안 투표가 진행되었다. 3765만 3518명의 유권자 중 2373만 2854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투표율은 63.0%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투표 결과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호남 지역에서 승리했지만,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는 호남 지역을 제외한 수도권, 충청, 영남, 강원, 제주 지역에서 승리했다. 정동영 후보는 비호남권에선 보은군에서만 간발의 차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보은군에서도 이회창 후보의 표차를 합치면 보수 후보들이 앞섰다. 특히 수도권에서 개혁 성향이 강하던 서울특별시에서도 보수 후보들이 압승했다. 또한, 인천과 경기의 전 지역을 휩쓸었는데 인천에서는 구도심과 연수구 등에서 모두 승리했고, 경기도에서는 구도심과 대도시권, 남서부 권역에서도 모두 승리했다. 보수 진영은 호남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승리했다. 또한 대전에서도 구도심과 신도심에서 보수진영이 모두 승리, 충남에서도 전 지역에서 보수 진영이 승리했다. 무소속 이회창 후보는 대전, 충남, 영남 지역에서 2위를 하여 나름 선전은 했지만 결국 최종 순위는 3위로 낙선했다.


 
2011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이틀 전(12월 17일) 사망했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2012년 -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다.

2014년 - 헌법재판소가 법무부의 청구를 받아들여 통합진보당 해산을 선고했고, 통합진보당 소속 지역구 의원 3명과 비례대표 의원 2명의 의원직도 모두 박탈되었다.

 

 

문화

1843년 -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 《크리스마스 캐럴》 출간.

1909년 - 독일의 축구 클럽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창단.

발 슈필-페어라인 보루시아 1909 e. V. 도르트문트(Ballspiel-Verein Borussia 1909 e. V. Dortmund)는 흔히 도르트문트 또는 BVB로 알려진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도르트문트를 연고로 하는 독일의 축구 클럽이다. 현재 독일 축구 1부 리그인 1 분데스리가에 속해 있다. 독일에서 가장 성공적인 축구 클럽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09년 도르트문트 출신의 축구 선수들이 창단하였다. 현재 독일 챔피언쉽 8회 우승과 DFB-포칼 3회 우승, DFL-슈퍼컵 4회 우승으로 공동 최다 우승을 기록하며, 1966년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첫 번째 독일팀의 컵위너스 컵 우승)과 1997년 UEFA 챔피언스리그, 인터콘티넨털컵 우승의 업적을 달성하였다. 또한 1966년에 획득한 UEFA 컵 위너스컵은 독일의 프로 축구 클럽으로는 최초로 획득한 유럽 대항전 타이틀이다. 1974년을 기점으로, 도르트문트는 베스트팔렌 슈타디온에서 홈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장은 독일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자, 유럽 내에서 6번째로 가장 큰 경기장이다. 도르트문트는 FC 샬케 04와 오랜 기간 동안 라이벌이었고, 이 두 팀 간의 더비 경기를 레비어 더비라고 부른다. 20년간 FC 바이에른 뮌헨과 더불어 상위권을 형성하며 라이벌 관계를 구축하였고, 이들 간의 경기는 데어 클라시 케어 (Der Klassiker, 고전 더비)가 되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모토는 "진정한 사랑" (Echte Liebe)이다.
노란색과 검은색이 혼합된 유니폼의 컬러로 인해 "꿀벌"이라는 팀 애칭이 있다.



2009년 - 소녀시대가 《Into The New World》라는 타이틀로 첫 번째 단독 콘서트를 개최함.

2015년 - 서해안고속도로 서해대교 송악 나들목 ~ 서평택 나들목 구간이 개통되었다.

 

 

탄생

1683년 -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초대 국왕 펠리페 5세

1742년 - 스웨덴의 화학자 칼 빌헬름 셸레

1778년 - 루이 16세의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1899년 - 미국의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1세

1903년 - 대한민국의 교육인 윤인구

1906년 - 소련의 정치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1915년 -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샹송가 에디트 피아프

1922년 - 네덜란드의 정치인 크리스 판 베인

1936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김우중

1941년 -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 이명박

1944년 - 미국의 수리물리학자 미첼 파이겐바움

1953년 - 대한민국의 축구인 허정무

1965년 - 대한민국의 경찰 공무원, 제21대 경찰청장 민갑룡

1970년 - 일본의 소설가 타니가와 나가루

1972년 - 미국의 배우 앨리사 밀라노.

1974년 - 대한민국의 배우 오만석.

1980년 - 대한민국의 래퍼 버벌진트

1985년 - 한국계 일본의 축구선수 이충성

1987년 - 프랑스의 축구선수 카림 벤제마

카림 모스타파 벤제마 (Karim Mostafa Benzema, 1987년 12월 19일, 리옹 ~)는 프랑스의 프로 축구 선수로 알제리 혈통이며,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공격수이다. 그는 "매우 재능 있는 공격수"로 묘사되며, "세고 강인하다"라고 덧붙였으며 "페널티 구역 내에서 위협적인 득점원"이다. 벤제마는 리옹 출신이며, 인근 동네 구단인 브롱 테레용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1996년, 그는 도시 최대 구단인 리옹에 입단해 구단의 유소년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벤제마는 2004-05 시즌에 데뷔하였고, 리옹에서의 처음 세 시즌 동안 간간히 출전하며 3번의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2007-08 시즌, 벤제마는 구단의 주축 선수가 되어 대 도약하여 30골 이상 넣어 리옹의 리그 7연패에 일조했다. 그의 활약상에 따라, 국가 프로 축구 선수 연합 (UNFP)에 의해 리그 1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고, 올해의 팀 일원으로도 선정되었다. 벤제마는 리그 득점왕이었고, 이탈리아의 구에린 스포르 티 보지로부터 브라 보상을 받았다. 리옹에서 한 시즌을 더 보낸 후인 2009년 7월, 벤제마는 €35M ($50M)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해 6년 계약을 맺었다. 구단에서의 첫 시즌에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고전한 후, 이어지는 두 시즌 간, 벤제마는 도약했고, 32골을 득점해 2011년에는 코파 델 레이 우승을, 2011-12 시즌에는 라 리가를 우승했다. 그는 프랑스 올해의 축구 선수로 2011년, 2012년, 그리고 2014년에 세 차례 선정되었다. 벤제마는 전 프랑스 청소년 국가대표로, U-17 대표팀 시절부터 조국을 대표로 출전했다. 성인 대표팀 일원이 되기 전, 그는 U-17 대표로 2004년 U-17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었다. 벤제마는 2007년 3월, 오스트리아와의 친선경기에서 성인 대표팀 데뷔전을 치러 1-0 결승골을 기록했다. 벤제마는 프랑스를 대표하여 3번의 주요 국제 대회에 참가했다: 2008년과 2012년의 두 차례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와 2014년 FIFA 월드컵. 그러나, 벤제마는 여러 추문에 연루되어 두 차례 주요 대회 (2010년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 2016)에 참가할 선수단에 들지 못했다.


 
1988년 - 칠레의 축구 선수 알렉시스 산체스 / 스웨덴의 축구 선수 엠마 베릴룬드.

1989년 - 대한민국의 래퍼 용준형 (비스트, 하이라이트).

1990년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선수 김성일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이지민

1991년 - 일본의 여성 성우 우에사카 스미레

1993년 - 대한민국의 밴드 데이식스 멤버인 가수 Young K

2011년 - 대한민국의 아역배우 박규림.

 

사망

1370년 - 교황 우르바노 5세, 200대 로마 교황.

1741년 - 덴마크 출신 러시아의 항해사이자 탐험가 비투스 베링

1848년 - 영국의 소설가 에밀리 브론테.

1851년 - 영국의 화가 터너

1882년 - 일본 군인 겸 귀족 정치가 나카야마 다다요시.

1932년 - 한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

윤봉길(尹奉吉,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은 조선의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시인 겸 저술가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아명은 윤우의, 호는 매헌이고, 충청남도 덕산 출생이다.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 군 현내면 조량리(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목바리마을) 광현당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고려 시대의 명장이었던 윤관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윤황(尹墴)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 씨 김원상이다. 1911년 3월 4세 때 광현당에서 저한당으로 옮겨와 23세까지 생활하였다. 1918년 덕산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다음 해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받아 식민지 노예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어 최병대 문하에서 동생 윤성의 와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1년 유학자인 매곡 성주록의 서당 오치 서숙에 들어가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치서숙에서 윤봉길은 사서삼경 등 중국 고전을 두루 익혔다. 1922년 15세에 성주 배씨 배용순과 결혼하였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1923년 16세에 오치서숙 춘추 시회에서 장원하기도 했다. 1926년 윤봉길은 매헌이라는 아호를 얻었다. 1928년 18세 되던 해에는 시집 <오추>(嗚推), <옥수>(玉睡), <임추>(壬椎) 등을 발간하였다. 1929년 오치 서숙을 졸업, 한학수업을 마쳤다.

농촌 계몽 활동

청년 시절에는 농민 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1929년 오치서숙을 졸업한 윤봉길은 농촌계몽활동, 농촌 부흥운동, 야학 활동, 독서회 운동 등을 시작하였다. 1927년 농민독본 3권을 저술하였다. 1928년 부흥원 설립을 기념하는 공연인 우화 토끼와 여우의 공연과 월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기사년 일기를 지었다. 이어 위친계 조직, 월진회, 수암 체육회 등을 조직하였다. 1930년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집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후에 이 정보를 일본 경찰이 입수하여 미행,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되어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였다.

훙커우 공원 푹 탄 투척 사건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채소 장사를 하던 그는 1931년 겨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를 찾아, 독립운동에 몸 바칠 각오임을 호소해 그가 주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며, 협의 끝에 투척하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홍커우 공원에는 상하이 침략 일본군 1만 명, 상해 거주 일본인 1만명, 그밖에 각국 사절, 각계 초청자 등 2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다. 당시 폭탄은 도시락 모양과 물통 모양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폭탄을 도시락 및 물통으로 위장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당시 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에서 식사가 제공되지 않으므로 일본 측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각자 도시락을 지참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공원에 입장한 후 11시가 되자 중국 주둔 일본군(천진 군) 총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이 등장했고 상하이에 있는 외교관과 내빈들이 자리를 잡았다. 군악이 울려 퍼지고 열병식이 이어졌다. 천장절 행사가 끝나자 외교관과 내빈은 돌아가고, 일본인들만 남아 일본 상하이 교민회가 준비한 축하연을 열었다.

11시 50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은 물통 폭탄을 단상으로 힘차게 던졌다. 경축대 위에 폭탄이 명중한 것을 확인한 윤봉길이 자결하기 위해 도시락 폭탄을 떨어뜨렸으나 불발하였다. 도시락 폭탄이 불발되자 일본 헌병들이 윤봉길을 덮쳐 구타하였다. 윤봉길은 구타를 당하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

훙커우공원에서의 폭탄 투척을 실행한 윤봉길은 상하이 파견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상하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 등을 처단하고, 총영사 무라이는 중상,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은 실명되었고,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은 다리 절단 중상을 당했으며, 주 중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한쪽 다리를 잃어 절름발이가 되었다. 

최후

폭탄 투척 직후 체포, 곧바로 헌병으로 넘겨지면서 보다 가혹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32년 5월 28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1월 18일 일제 대양 환 편으로 일본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2년 12월 18일 가나자와 육군 구금소로 이감되었다.

1932년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32년 12월 19일 새벽 7시 27분 일본 이시카와현 가나자와 시 미스 코지 야마 서북 골짜기에서 십자가 모양의 형틀에 묶인 사형수(윤봉길)는 미간에 총알을 맞고 13분 뒤에 순국했다. 시신은 아무렇게나 수습되어 가나자와 노다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길 밑에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사형 집행 전에 미리 파 놓은 2미터 깊이의 구덩이에 시신을 봉분(封墳)도 없이 평평하게 묻어놓은 것으로,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 윤봉길 의사가 수뇌부를 섬멸시킨 데 대한 일제 군부의 복수였다.

유언

2005년 12월 18일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는 순국 73주기를 맞아 유언 친필 사본을 공개했다. 윤 의사는 거사 이틀 전인 1932년 4월 27일 공원을 답사한 직후 훙커우 숙소인 동방공우에 돌아와 백범 김구 선생의 요청에 의해 유언을 작성했다. 이 자리에서 윤의사는 거사가, 조선 청년단에 대한 당부의 시,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의 시, 두 아들에게 남기는 유언 등 4편의 시를 2시간여 만에 썼다. "너희도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두 아들 종과 담에게 남긴 시에는 거사를 앞둔 비장한 심경과 자식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사후

국민회의 부주석 김구는 일본에 있던 박열에게 3 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유해 봉안 추진위원장을 맡은 박열은 재일동포들과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가나자와시 노다산 시영 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 서울에 도착하여 6월 30일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장지는 효창공원이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다.

1987년 윤봉길 의거 55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성금을 모아 서울 서초구 양재동 “양재 시민의 숲”에 매헌기념관 - 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세웠다. 현재 양재 시민의 숲역의 부역 명도 그의 호를 딴 '매헌'이다.
1963년 윤봉길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에 충의사가 세워졌고, 1972년 생가와 고택 및 충의사 영역이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 사당과 삼문을 전면 증축하고 충의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충의사는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본전 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윤봉길 의사 기념관, 어록탑, 보부상 전시관이 있다. 성장가 지역은 윤봉길이 4세 때부터 망명 전 23세까지 살던 저한당과 의거 기념탑, 윤봉길의 동상이 있다. 생가 지역에는 도중도, 광현당, 부흥원 등이 있다.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의 장소였던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지금은 루쉰 공원)에도 기념관 매정이 있다.

평가

만보산 사건으로 일본 제국에 대해 큰 자존심의 상처를 입고 있던 당시 중화민국의 장제스는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 투척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중국의 100만이 넘는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조선인 청년이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라며 감탄하였고, 이는 그동안 장제스가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한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장건상의 증언에 의하면 윤봉길의 의거가 임시정부 지원을 이끌어 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특히 윤봉길의 의거가 있기 전에 임시정부는 참 외로웠다. 장개석이 임시정부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동전 한 푼도 도우지 않았으며, 윤봉길 의거를 보고서야 장개석이 전적으로 도왔던 것이다”라고 회고하였다. 반면, 박헌영과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하였다.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없는 극소수의 활동'이라며 윤봉길 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였고, 이승만은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2012년 - 맨발의 겐의 저자 나카자와 케이지

2015년 - 독일의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

 

기념일

남남 협력의 날

해방의 날(Liberation day): 인도 고아 주

성 니콜라스 데이(Saint Nicholas Day): 동방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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