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이야기 2월 15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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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775년 - 교황 비오 6세, 250대 로마 교황 취임.

1894년 - 동학 농민 운동 발발.

동학농민군 백산봉기 기록화 (출처 독립기념관)

동학농민혁명, 동학 혁명, 동학 농민 운동 또는 동학 농민 전쟁은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동학 교도 및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백성의 무장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기존 조선 양반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대한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남형이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그리고 동학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흥선대원군, 이준용 등과도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반의하면서도 명성황후와 민 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했고, 동학농민군과 제휴하게 된다.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까지도 거병의 명분으로 삼은 바 있었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 씨 계열의 관군에 의해 살해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들은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 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 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 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불매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1898년 - USS 메인 호가 쿠바의 아바나 항구에서 폭발하여 266명이 사망.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이어짐.

1950년 - 중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조인하다.

1989년 -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소비에트 연방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군 철수를 공식 발표하다.

1995년 - 케빈 미트닉이 FBI에 체포되다.

2003년 -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이 세계 각지에서 열리다.

2007년 - 탈북자 4명과 탈북자들을 도와준 한국인 1명이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단둥으로 강제 이송당했다.

고려대학교 이필상 총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2008년 - 체코 대통령 선거에 바츨라프 클라우스 현 체코 대통령이 재선되다.

2010년 - 벨기에 부이진겐에서 마주오던 통근열차가 충돌하여 최소 20여명이 사망하였다.

2011년 - 아랍의 봄의 일부인 리비아 내전이 일어 났다.

2012년 - 타이의 방콕에서 연쇄 폭탄테러 사건이 발생하여 5명이 부상당하다.

2013년 - 러시아 우랄산맥에서 운석이 낙하, 일부 파편은 인구 밀도가 낮은 첼랴빈스크에 떨어졌으며 100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2014년 - 부산광역시 남외항에서 기름이 유출되었다. 이는 여수 기름유출사고보다 1.5배 많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미국 연방법원이 버지니아주의 동성 결혼 금지법률을 뒤집는 판결을 내리다.

시리아 내전 관련 협상이 성과 없이 종료되다.

탐맘 살람이 레바논의 총리로 선출되다.

2015년 - 콜린다 그라바르키타로비치가 제 4대 크로아티아 대통령으로 취임하다.

 

 

 

 

 

문화

2011년 - 평창, 2018년 동계 올림픽 IOC 실사. ( ~ 2월 18일)

2014년 - 러시아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귀화한 안현수가 8년만에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이후 대한빙상연맹에서는 네티즌들의 비난으로 몸살을 앓았다.

 

탄생

1564년 -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이 초상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년 2월 15일 ~ 1642년 1월 8일)는 이탈리아의 철학자, 과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그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지방의 피사에서 태어났으며 7남매 중 장남이었다.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는 유명한 류트 연주가로, 음악 이론에 관해 중요한 연구를 일부 남겼다. 과학 혁명의 주도자로 요하네스 케플러와 동시대 인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고 교황청을 비롯한 종교계와 대립했다. 업적으로는 망원경을 개량하여 관찰한 것, 운동 법칙을 확립한 것 등이 있으며,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옹호하여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임을 믿었다.(그 당시에는 지구가 중심이라는 것이 진리였다)

그의 연구 성과에 대하여 많은 반대가 있었기 때문에 자진하여 로마 교황청을 방문, 변명했으나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 그러나 황금 측량자를 저술하여 지동설을 고집하였으며, 천문학 대화를 검열을 받고 출판했으나 문제가 생겨 로마에 감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갈릴레오는 결국 그의 지동설을 철회하도록 강요받았고, 그의 마지막 생애를 로마 교황청의 명령에 따라 가택에서 구류되어 보냈다.

그는 실험적인 검증에 의한 물리를 추구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의미의 물리학의 시작을 대개 갈릴레오의 것으로 본다. 또한, 진리의 추구를 위해 종교와 맞선 과학자의 상징적인 존재로 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종교계와의 대립과는 상관없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으며, 그런 대립도 자신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물리학 입문 과정에서 배우는 등가속 물체의 운동은 운동학으로서 갈릴레오에 의해 연구되었다. 그의 관측적 천문학의 업적은 금성의 위상과, 그를 기리기 위해 갈릴레이 위성이라 불리는 목성의 가장 큰 네 개 위성의 발견, 태양 흑점의 관측과 분석이라 할 수 있다. 갈릴레오는 또한 나침반 디자인의 개량 등 과학과 기술에 기여하였다. 그의 최대 공적은 과학적 연구 방법으로써 보편적 수학적 법칙과 경험적 사실의 수량적 분석을 확립한 점에 있다고 평가되며, '근대 관측천문학의 아버지',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또는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 불린다.


1710년 - 프랑스의 루이 15세

1748년 - 영국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

1823년 - 청나라의 정치가 이홍장.

1861년 -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1874년 - 영국의 군인,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

1875년 - 일제 강점기의 독립 운동가 노백린.

노백린(1875년 양력 2월 15일(음력 1월 10일)~1926년 양력 1월 22일)은 대한제국의 군인, 계몽사상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비행사이다. 임시정부의 각료로 활동하며 교통총장, 군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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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 게이오 의숙과 성성 학교를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 단기 과정을 졸업하였다. 그 뒤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되고 1900년(광무 3년) 10월 귀국하여 윤치성, 이갑, 류동렬 등과 함께 육군 참위에 임관, 대한제국 국군을 신식으로 개편하였다. 이후 한국 무관학교와 육군 연성 학교의 교관, 한국 무관학교 교육국장, 연성 학교 교장 등을 역임했다. 1907년(융희 1년) 군대가 해산당하자 안창호, 윤치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활동하였으며 고향으로 내려가 해서 교육 총회 조직 등에 참여하였으며, 광산업과 피혁상에 종사하였으나 사업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였다.

1910년(융희 4년)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 등과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비행사 훈련을 하였다.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을 맡았다. 그해 9월의 통합 임시정부 수립 후에도 군무총장으로 유임되었고, 1920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한국 최초로 한인 비행사 학교를 설립하여 비행사를 양성하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상하이로 되돌아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1875년(고종 12년 음력 1월 10일) 황해도 송화 풍해면 성하리에서 성리학자인 노병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이다. 일설에는 1873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원적지는 황해도 은율이며 어릴 때는 한학을 수학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키가 크고 얼굴도 컸다 하며, 마음이 침착, 차분하면서도 성격이 매우 호탕하였다 한다. 1895년(고종 32년) 대한제국의 일본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서 게이오의숙과 일본 육군사관학교(제11기)를 졸업했다.

1895년(고종 32년) 정부의 일본 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추천을 받은 뒤,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이갑, 박중양, 윤치성, 류동열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는 도쿄에서 체류하며 이갑, 윤치성, 류동열 등과 함께 게이 오의숙에서 보통과 와 특별과를 수학하였다. 1897년 세이조 학교 학교에 입학하였다. 1898년 2월 세이조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899년(광무 2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견습사관에 임명되었으며, 1900년 초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는 1900년(광무 3년) 10월 귀국하였으며 당시 원수부회계국총장 민영환 등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어담, 윤치성, 김형섭 등과 함께 육군 참위로 임관한 뒤 한국 무관학교 보병과 교관, 육군 연성 학교 교관을 맡았다.

이후 육군 보병 정위로 승진하고 1904년(광무 7년) 러일전쟁 당시 관전사가 되어 일본군 위문사인 군부 대신 권중현을 따라 일본군을 종군, 동삼성의 대련, 뤼순 등지를 두루 시찰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참령, 부령으로 승진하여 육군 무관학교 교육국장이 되고, 다시 육군 정령으로 승진하여 육군 무관학교 교장, 헌병대대장, 육군 연성 학교 교장 등 육군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노백린은 어담 등의 친일 군인들과는 달리 을사조약 체결과 군대 해산, 한일 병합 조약 등으로 국권이 순식간에 일본에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를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1907년 안창호, 이갑, 전덕기, 윤치호, 양기탁, 이동녕, 이동휘, 안태국, 조성환, 김규식, 신채호, 옥관빈, 김홍량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는데 참여하였으며, 1907년 자신의 재산과 땅을 헌납, 고향인 송화에 사립학교인 광무 학당을 설립하였다.

1907년 8월 을사 보호 조약의 영향력으로 대한제국 국군이 해산당하고 육군연성학교도 폐교되면서 노백린은 군부 교육국장으로 전보되었다. 1908년 김구, 최명식, 김홍량 등과 함께 해서 교육 총회를 조직하고 교육 계몽활동 및 신식 학교 설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10년 6월 군사 훈련기지를 마련했다는 연락을 접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박용만 등과 함께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국민군단을 창설하여 김성옥, 허용 등과 함께 국민군단 별동대 주임으로서 3백여 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에게서는 그에게 남작직과 은사금을 주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이후 안창호, 윤치호 등과 신민회에 관여하기도 하고, 이어 해서 교육 총회 회장이 되어 총무인 김구와 함께 해서 교육 총회를 지도하며 황해도 내에 교육 계몽 운동과 학교 설립 운동 전개하였다. 또한, 수안금광, 경성부에서 피혁상 등을 경영하였으나, 10여 만원의 손해만 보고 상속받은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다.

1914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하여, 재미 동포인 김종림의 지원을 얻어 항공 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용사를 육성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하와이로 건너가 박용만 등과 국민군단의 교관을 맡아 비행사 훈련을 하였다. 1915년 중국을 거쳐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916년 이승만, 서재필 등과 함께 독립운동 방략을 의논하기 위해 노백린은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그러나 서재필이나 이승만은 무장독립론을 주장하던 노백린의 견해에 그는 회의적이었다. 노백린은 캘리포니아에서 재미동포 최초 백만장자 김종림 등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아 비행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1918년 평양시사신보를 창간하는데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3·1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피해 열차 편으로 만주를 거쳐, 배편으로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해 4월 2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창설에 참여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4월 10일 상하이 임시정부 군무부 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승만, 안창호, 박용만, 이동휘,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 강화 회의의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 추가 선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고 확신하여 파리 강화 회의 대표자 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에서는 하와이주에 머물면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 박용만과 함께 한인 독립군 부대를 조직했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여 1920년 캘리포니아주 북부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공군 독립군을 양성했다. 그는 일찍부터 공군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했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 직후 결성된 한성임시정부에서 군무 부총장을 맡았고,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군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까지 지냈으며, 이동휘를 비롯한 류동렬, 신채호, 박용만 등과 함께 무력을 통한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쪽에 속했다.

1919년 임시정부 군무부총장으로 임명되어 파리 강화 회의에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으나 비행사 양성을 목적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 후 1919년 미국 체류 중 제2대 군무총장으로 재선임되었다.

미국에 체류하면서 그는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교포인 김종린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으로 최초로 한인 비행사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1920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에 맞춰 JN-4D 2대를 이용선·이초 두 사람이 조종한 것이 한국인이 처음 비행기를 조종한 것이 되었다. 독립군 비행사 양성소는 1923년까지 77명의 졸업생을 배출토록 하였다. 한편 군사 기지 건설에 대해 서재필 등과 협의하였지만 자금 조달과 재원 조달의 어려움, 한국인이 쉽게 찾아오기 어려울 것을 들어 실패를 예상하였다. 그러나 노백린은 비행기지와 군사 훈련을 계속 추진하였다.


비행사 양성소 설립초기에는 비행기 2대, 미국인 기술자 1인과 비행사 6명을 교관으로 하였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한다. 이후 임시정부의 군무 총장직에 있으면서, 계속 미국에 체류하면서 비행학교 육성에 종사하여 1920년 7월에는 제1회 졸업생 25명을 배출하고 1922년 6월에는 학생이 41명을 추가 모집하였으며,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이 기간 중 그는 모금 활동 등을 통해 비행기도 5대로 늘어났으며, 비행기는 무선통신장비까지 갖추게 된다. 한편 그는 미국에 있었으므로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1920년 1월 "전 국민이 광복군 전투 대령에 참가를 당부"라는 제목의 군무부 포고 제1호를 발표하였다. 그 뒤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항일 계몽 운동을 추진하다가 사람과 자원 등 활동 여건이 불편하여 1921년 1월 배편으로 다시 상하이로 되돌아왔다.

상하이로 돌아온 뒤 1921년 2월 국민대표자대회 개최 문제로 이승만과 안창호가 의견을 달리하게 되자 노백린은 김규식과 함께 이승만과 안창호 사이의 의견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만다. 그는 안창호 등과 시국대책을 논의하던 끝에 임시정부가 소련과 연합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 나타났다.

한편 그는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 노태연, 도인권, 김훈 등 무관학교 출신 청년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무력 항쟁 단체 설립을 주창하는 한편 일반외교 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광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1922년 1월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후 변절한 김희선, 소련 정부로부터 수령한 독립운동 자금을 임정에 주지 않고 사회주의 정당 조직에 사용한 전 임정 총리 이동휘와 전 국무원 비서실장 김립 등을 성토,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 내무부 총장 이동녕, 교통부 총장 손정도, 김구 등 각료들과 함께 이들을 규탄하는 '임시정부포고 제1호'를 서명하여 발표한다.

1922년 6월 임시정부 이승만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었다. 

1922년 7월 국민대표자회의 등의 개최로 임정 창조파, 개조파, 임정고수파, 아나키스트 등 상하이 내 독립운동 단체의 파벌 갈등과 알력을 수습하기 위하여 안창호, 김구, 김덕진, 한진교, 신익희, 최일, 최창식, 윤현진 등과 함께 시사책진회를 조직하여 통일된 의견과 행동으로 조국광복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분쟁 조절에는 실패했다. 그 해 10월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명의의 격문 등을 작성하여 국내에 파견원을 잠입, 전국 각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중 경상북도로 파견한 국내 특파원이 경상북도 경찰부에 체포되었다. 이를 의용 단사 건이라 한다.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었으며, 1924년 12월 16일 박은식 내각의 임시정부 군무총장 겸 교통총장에 임명되었다. 1925년 3월에 제2대 박은식 대통령의 지명으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교통총장 겸 군무총장직을 겸직하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활동은 열악하였다. 임시정부의 황폐는 극도에 달하여 불과 5원의 경비를 마련하지 못해 불법 어음을 발행하였고, 이보다 더한 경우는 궁하다 못해 자식을 중국인에게 넘겨주는 참상마저 일어났다. 개중에는 한 끼로 세 끼 식사를 때우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중국의 싸구려 호떡을 사 먹으며 식사를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하이의 많은 교포들은 차라리 고국으로 되돌아가기를 권유했으나 그것마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딱한 사정이었다.

1925년 4월 임정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그 해 5월 참모총장이 되어 독립군 육성에 헌신하였다. 그 후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워싱턴 D.C.의 구미 위원부에서 외교 위원으로 소련에 파견되어 외교 활동을 하였으나 소득 없이 되돌아왔다. 1926년 1월 22일에 상하이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러나 언론인 송건호는 그가 자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송건호에 의하면 임시정부의 참상에 좌절하여 자살했다는 것이다. 송건호는 '노백린은 골방 속에서 실의와 절망으로 상심한 끝에 인사불성이 되어 비참한 나날을 보내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라고 한다.

1926년 1월 시신은 화장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장으로 상하이의 송경령묘 공원묘역에 안장되었다가 1993년 8월 다른 독립운동가 4위와 함께 유골이 국내로 봉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산 44-7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2년 3월 건국공로훈장 복장(훗날의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으로 개정)이 추서 되었다.

1999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통 집터에 노백린 장군 집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아들인 노선경과 노태준, 딸 노 순경도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후일 독립운동 공로로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았다. 특히 노태준은 한국광복군에 참여하여 국내 진공작전에 참여하였다.


1909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가 현덕

1924년 - 대한민국의 시인 박화목.

1948년 - 미국의 만화가 아트 슈피겔만.

1951년 - 핀란드 자동차 경주 선수 마르쿠 알렌.

1954년 - 미국의 만화가 맷 그레이닝. / 몰도바의 외교관 미하이 벌란.

1955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손혜원.

1966년 - 대한민국의 배우 차광수.

1972년 - 대한민국의 MC 겸 희극인 서경석. / 일본의 우익선동가 사쿠라이 마코토. / 대한민국의 방송인 김성경.

1973년 - 대한민국의 배우 신은경.

1974년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선수 송재근

1977년 - 슬로베니아의 축구 선수 밀렌코 아치모비치.

1978년 - 대한민국의 작곡가 이루마.

1979년 - 대한민국의 성우 김두희. / 대한민국의 야구인 김병현.

1980년 - 대한민국의 MBC공채 아나운서 오상진.

198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일엽.

1981년 - 대한민국의 배우 홍수현.

1981년 - Baduser의 친구 이광표.

1983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준석.

1984년 - 대한민국의 배우 윤종훈.

1989년 - 대한민국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모태범. / 일본의 가수니시와키 아야카 (퍼퓸).

1992년 - 대한민국의 가수 래환 (빅스타).

1993년 - 대한민국의 래퍼 라비 (빅스).

1994년 - 대한민국의 배우 진세연 / 대한민국의 래퍼 조타 (매드타운).

1995년 - 독일의 축구 선수 자라 데브리츠.

 

 

 

 

 

사망

1591년 - 일본 센고쿠 시대 무장 도요토미 히데나가

1857년 - 러시아의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

1940년 - 대한제국의 의사 박서양.

박서양(1885년 9월 30일 ~ 1940년 12월 15일 황해도 연안 출생)은 대한제국의 외과 의사, 화학자,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외과 의사,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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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 박성춘의 아들로 태어나 의료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 한국 이름 '어비 신')과 친분이 있던 아버지 박성춘을 통해 제중원의 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 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 과목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의 교수로 재직했다.

1917년 만주로 망명, 용정에서 구세 의원을 운영하고 숭신 소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35년 학교가 폐교당하자 귀국하여 의료활동을 하였다. 자는 봉출이며, 뒤에 서양으로 개명하였다.

박서양은 조선 초기 서양식 외과의사이자, 한국 최초의 전문학교 교수의 한 사람이었다. 일본 이름은 우에노 즈이요이다.
 
1885년 9월 30일 한성부 장통 방 관자 동계 관자동에서 백정 박성춘과 그의 부인 조 씨의 아들로 태어나 1908년 제중원의 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의 집안이 어떻게 박 씨 성을 얻게 되었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박성춘은 백정의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기독교를 접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뜻에서 이름을 성춘이라 하였다.

 

아버지 박성춘은 그 뒤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유길준,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한성부 지역 연사,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편 황해도 연안 출신이라는 설로 보아 그의 선대는 황해도 연안에서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집안은 백정의 집안으로 아버지 박성춘 역시 1862년 종로 방 관자 골 혹은 관철동에서 출생하였다. 그 후 의료 선교사 에비슨(Oliver R. Avison, 한국 이름 '어비 신')과 친교를 맺고 기독교 운동가로도 활동했고, 교회의 장로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은행가가 되었다.

 

어머니는 조 씨로 성씨가 있는 것으로 보아 몰락한 양반이나 평민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서양 외에도 동생 또는 형인 박대양이 있었고, 여동생 박양빈과 1명의 여동생이 더 있었다. 여동생 박양빈(또는 박양 무)은 예관 신규식의 조카인 의사 신필호와 정식으로 결혼하였다. 의사이자 개화된 집안이었던 신필호의 집안에서는 그의 집안이 백정 가문인 것을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어머니 조 씨의 친정 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뒤에 어머니 조 씨가 사망하자 아버지 박성춘은 이한갑과 강 씨의 딸인 이 신심(1870년생)과 재혼하였다. 계모에게서는 이복형제가 존재하는가 여부는 알려지지 않았다.

처음 이름은 봉출 또는 봉주리라 지었다가 나중에 성인이 된 뒤에 서양으로 개명하였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다. 그러나 봉출이라는 어릴 적 이름과 함께 백정의 아들인데도 기억력이 좋고 글공부를 하려 하여 이를 딱하게 여긴 어느 선비가 자신의 사숙에 무료로 들게 하여 글과 성리학 학문을 가르쳤다 한다.

1893년(고종 30년) 9월 에비슨 선교사가 장티푸스에 걸린 아버지 박성춘을 살렸다. 1894년 아버지 박성춘은 새뮤얼 F. 무어(Samuel F. Moore, 한국 이름 '모 삼율'(1846∼1906))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후 무어 선교사는 백정과 그 자녀를 위한 선교,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895년에는 6명의 백정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박성춘은 1895년에 정식으로 기독교 세례를 받았고 1911년 12월에는 한국 최초로 백정 출신의 장로가 되었다. 1894년 박서양은 무어 선교사가 설립, 운영하던 곤당골 교회 부속 예수 학당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로서 신학문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무어 선교사의 배려로 그는 신학문을 배우고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접하게 되었다. 그 역시 어려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북장로교)로 개종하였다.

1896년 처음으로 호적에 오르게 되었다. 에비슨 등 선교사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1896년 2월 백정들에게도 면천이 허용되어 평민들과 같이 갓을 착용할 수 있었으며, 1896년 9월 백정들도 호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호적을 소중히 보관했고 이는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로 이어졌다가 후에 그의 손자들이 호적과 자료들을 일부 공개하고, 연세대학교에 기부함으로써 그의 가계와 활동에 대한 것이 일부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그는 아버지 박성춘의 인연으로 1898년 그는 의료선교사 에비슨과 친분이 있던 아버지 박성춘을 통해 에비슨을 찾아갔고, 그 해부터 제중원에서 허드렛일을 시작하였다.

1899년(광무 2년) 3월 에비슨이 안식년 맞아 고국으로 돌아갔고 그는 그해 1월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6월 14일에 졸업하였다. 1899년(광무 2년) 12월 조안의 숙의 교사가 되었으며 1900년 9월 에비슨이 안식년 마치고 귀국하였다. 1900년 아버지 박성춘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해 10월 제중원 의학교(후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처음 허드렛일을 시켜 그의 됨됨이를 본 에비슨은 그를 의학교에 입학시켰다. 1904년 에비슨이 제중원의 후신인 세브란스 병원을 개업하자 박서양은 조선인 병원 조수가 되어 낮에는 의료활동을 돕고 밤에는 야간반 학생이 되어 공부하였다.

1905년 박성춘과 박서양은 무어를 만나 곤당골 교회에 나갔다.

1906년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홍석후, 이승만, 김규식, 이교승 등과 함께 황성기 독 청년회에 나가 학생들의 교육을 맡았다. 특별히 그는 YMCA 학당의 부학감(부교감)을 맡아보기도 했다. 또한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윤치오, 유길준 등의 중앙학교에 초빙되어 화학을 가르쳤으며 이후 낮에는 소학교 교사로 밤에는 의학부 학생으로 다녔다. 또한 제중원의 의사 조수로 활동하면서 의사의 수술을 보조하였다.

그의 이름은 대한매일신보(1907년 10월 23일)의 기사에도 나오는데, "난산의 고통을 겪고 있던 서울 합동의 김 부인을 제중원 의사 허스터 씨와 의학생 박서양 씨가 소생시켰다"는 것이다.

최초로 영어를 배웠으나 영어가 어려웠고, 그의 동기 여섯 명 중에서 세 명이 중간에 자퇴한 뒤에도 그는 끝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08년(융희 2년) 6월 3일 제중원 의학교를 졸업하여 1회 졸업생이 되고 6월 4일 의사 면허를 받았다.

세브란스가 처음 제대로 훈련받은 의사를 졸업시킨 것은 1908년 6월 3일이었는데 첫 졸업식에서는 7명이 졸업했다. 김필순, 신창희, 김희영, 홍종은, 홍석후, 주 현칙, 박서양 등 7명이다. 졸업 직후 박서양은 기존에 출강하던 중앙학교 외에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 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한국 초기 의사였던 그는 고종황제의 진료를 보기도 했다. 독실한 장로교 신앙인이었던 그는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그가 다니던 교회 내에서 백정 출신인 박성춘과 박서양 부자의 역할이 커지자 양반들과의 갈등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대한제국기 조선 초기 외과의사와 화학교사였다. 그는 졸업 후 모교에서 해부학을 가르쳤다. 또한 서울 승동 학교의 화학교사로도 출강하였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설립한 승동 학교에서 화학교사였다. 그는 직접 학생들을 상대로 산소와 수소를 이용한 공개 화학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박서양이 백정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교사인 그를 무시했다. 학생들이 그의 신분을 문제 삼아 천시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백정이다 라며 내 신분보다 나의 기술을 볼 것을 호소했다. 그는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고 했다고 한다.

1909년 2월 승동학교에 음악학과를 설치되자 음악학과 학과장이 되었다. 1909년 9월 콜레라가 창궐하자 김필순, 김희영, 안상호, 이석준, 박용남, 장기무, 한경교, 정윤해 등과 함께 자발적으로 방역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10년(융희 4년) 세브란스의 학교의 화학 담당 강사가 되어 2학년 화학을 한 주에 6시간 강의하였다.

1913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로서 한국인 최초의 전문학교 교수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인 최초의 전문학교 교수의 한 사람인 그는 백정의 아들이었다. 1913년부터는 외과학 교실의 조교수와 부교수 역임하면서 병원 외과 환자를 진료하였다.

이후 1917년 만주 길림성 용정으로 이주해 구세 의원을 개업하여 의료 활동을 하고, 교회를 설립하였다. 이어 그해 6월 30일 숭신 소학교를 세워 교장이 되고, 직접 한 반을 맡아 학생들을 교육했다. 그는 교사 5명을 초빙하여 첫 반 28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후 연길현 27개 학교의 연합운동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소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독립군들의 의료도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학교에 신분, 반상의 차별을 받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여 무료로 가르쳤으며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의 중학교, 고등보통학교 진학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1919년 3월 숭신소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에 의해 일시 폐교당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한 국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에서 군의관을 맡기도 했다.

 

1919년 대한국민회 군의가 되었고, 1920년 5월 대한국민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북로 독 군부 등과 연합 정책 전개함에 따라 만주에서 벌어진 의병 전투에도 종군하였다. 1921년 숭신 소학교의 학급을 증설, 4 학급에 남자 25명, 여자 15명의 학생을 추가로 받아들이고 교사 5명을 더 충원하였다. 1923년 첫 졸업생 28명을 배출하였다.

1923년 8월 21일 숭신 학교에서 간도 지역의 조선인학교 운영자들과 간도교육협회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박서양은 집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고 김영학을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한편 1924년 2월 김성수, 송진우 등의 부탁으로 동아일보 간도 지국의 총무 겸 특파 기자 일을 맡아보기도 했다.

 

1924년 6월 연합 운동회에 간도 전체 48개 학교가 참여하였고 숭신 소학교에서 이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이때 간도 총영사가 숭신 학교를 불령선인이 건립한 배일 학교라 보고하여 이를 해명, 폐교 위기를 겨우 모면하기도 했다.

1924년 12월 구세 의원에서 무료 환자 3,315명, 유료 환자 6,416명을 진료하였다. 1927년 학교 유지를 위해 적극 노력하였으나 간도 일본영사관의 탄압을 받았고, 1929년에는 학교 존폐 문제로 기금을 마련 숭신 소학교 유지회 조직하였다. 그러나 1929년 숭신소학교 학생들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1930년 2월 19일 그의 숭신소학교 학생 120여 명도 광주학생운동과 제2차 서울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연길 시내 중심가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20여 명이 체포되어 연행되었다. 한편 1931년 만주사변 발생하고 박서양의 동생 박대양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32년 6월 윤봉길 의거 사건 직후 그의 숭신 소학교는 불온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의해 임시로 폐교당했다가 다시 복교되었으나 1935년 최종 폐교당하고 만다.

일제의 탄압으로 숭신 학교가 폐교되고 독립운동 기반이 무너지자 1936년 귀국하여 고향인 황해도 연안에서 개인 병원을 운영하다가 1940년 지병으로 인해 12월 15일 오전 6시 고양군 은평면 수색리 165번지 자택에서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40년 창씨개명이 강요되자 그해 8월 1일 성을 우에노로 개명하였다.

사후 은평면 수색리(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수색동)의 야산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대 경기도 고양군 도시 개발과 함께 어디론가 이장하였으나 이 장지가 알려지지 않아 결국 실전되었다.

동생(또는 형) 박대양과 그의 아들 두 명도 모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그의 큰아들은 1학년 재학 중 자퇴하였다. 딸 박인애는 에비슨 박사의 부인이 남대문에 세운 세브란스 유치원의 교사로 추천되어 1922년 11월부터 세브란스 유치원의 교사로 근무했다.

다른 아들 박경철은 배재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였고, 증손자 박종범은 칠레 데사로스 대학 경영학과 교수로 활동하였다. 6.25 전쟁 때 그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으나 손자 박연수가 칠레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2008년 8월 15일 독립운동의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다.

그는 1906년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황성기 독 청년회의 화학 강사였고, 또한 중앙학교에 초빙되어 화학을 가르쳤으며 낮에는 소학교 교사로 밤에는 야간반 학생이었다. 1908년(융희 2년) 6월 3일 제중원 의학교 졸업 후에는 오성학교, 중앙학교, 휘문 학교 등에서 화학과 물리를 가르쳤으며,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의 교수로도 재직했다.

1909년 2월 승동 학교에 음악학과를 설치되자 음악과의 과장이고 1910년(융희 4년) 세브란스의 학교의 화학 담당 강사였으며 1913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박서양이 백정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교사인 그를 무시했다. 학생들이 그의 신분을 문제 삼아 천시한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백정이다 라며 내 신분보다 나의 기술을 볼 것을 호소했다.

 

그는 "내 속에 있는 오백 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고 했다고 한다. 교육자로 활동했지만 평민 출신과 양반 출신 학생들의 무시와 냉대, 조롱은 그를 오래도록 괴롭혔다.

박서양의 기록과 자료는 대부분 사라지거나 유실, 인멸되었다. 한일합방이 된 후 1917년 돌연 만주로 떠나면서 그는 국내에선 잊혀졌다. 그는 연길에서 구세병원을 세우고 숭신 학교를 지었다. 한국인을 위한 진료와 교육 활동을 했다. 만주 지역의 독립 무장 투쟁단체인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의 군의로 임명돼 활동하기도 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은 그의 졸업 동기인 김필순이나 주현 측, 신창희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가 만주로 떠난 뒤 그의 행적은 단지 일제가 남긴 군 기밀서류에만 남아 있었다. 잊혔던 박서양의 독립운동 기록은 박형우 연세대학교 의대 교수가 발굴했다. 이 기록으로 그는 숨진 지 68년이 지난 2008년에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받았다.

 

그의 뒷얘기는 칠레로 이민 간 그의 손자(74)가 2005년 귀국하면서 알려졌다. 박서양에 대한 자료와 기록들은 2005년과 2008년 이후 그의 손자들과 후손들이 일부 공개함으로써 비로소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1959년 - 영국의 물리학자 오언 윌런스 리처드슨.

1988년 -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1960년 -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정치인 조병옥.

조병옥 1894년 5월 21일 충청남도 천안 ~ 1960년 2월 15일 미국)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 정치가이다. 일제 강점기 초반 도미유학과 독립운동에 종사하였고, 안창호에게 감화되어 그의 흥사단과 수양동지회, 국민회 일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 뒤 태평양 전쟁 무렵 수양동우회 사건 등으로 두 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해방 정국에서는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 뒤 미군정의 경찰총수를 지냈으며, 1948년 정부수립 후에는 UN대표단, 내무부 장관 등을 거친 뒤 이승만과 결별했다. 해방 직후 미군정 치하 제2대 경찰 통수권자였고 장택상과 더불어 친일경찰들을 재등용한 사람 중 한명이다.

한국민주당과 민주국민당에서 활동하였으며,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으며, 민주당에 입당, 신익희·윤보선·유진산 등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리더로 활동하였다. 1950년 대한민국의 제2대 정·부통령 선거에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60년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으나 선거유세 중 병으로 미국 워싱턴 D. C.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했다가 급서하였다. 제1공화국 후반 여야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장택상, 이기붕 등과 수시로 만나 회담, 절충을 주도하였으며, 기자들이나 강경투쟁을 요청하는 야당인사들에게 하던 “빈대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울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은 회자화되었다.


2019년 - 미국의 배우 리 라지윌.

 

기념일

세르비아의 국경일(Serbia's National Day)

캐나다 국기의 날(National Flag of Canada): 메이플 리프 플래그가 공식적으로 채택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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