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이야기 2월 14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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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859년 - 오리건주가 미국의 주로 33번째로 가입하였다.

1876년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일라이셔 그레이가 각각 전화에 대한 특허를 등록하다.

1879년 - 칠레가 볼리비아의 항구 도시 안토파가스타를 침공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다.

이키케 해전에서 페루 군함을 공격하는 칠레 군함

태평양 전쟁은 1879년 4월 칠레와 페루, 볼리비아 세 나라가 아타카마 사막의 초석 지대를 놓고 일어난 분쟁으로 인해 일어난 전쟁이다. 초석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볼리비아가 칠레의 초석 수출 회사에 과세를 강화하자, 칠레는 리토랄 주를 점령하면서 타라파카 주의 초석 자원 획득을 목적으로 페루에도 선전포고를 했다.

1880년 타크나 전투에서 페루·볼리비아 동맹군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결과, 칠레는 1884년 강화 조약으로 안토파가스타와 광물 자원이 풍부한 타라파카 주(옛 페루령), 리토랄 주(옛 볼리비아령)를 병합했다. 이 때문에 볼리비아는 바다로 이어지는 영토를 잃고 내륙국이 되고 만다. 전쟁에서 승리한 칠레는 광물 자원 수출로 높은 경제 성장률을 자랑하게 된다.


1910년 - 대한제국 독립 운동가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고되다.

단지동맹 직후의 안중근

안중근(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은 대한제국의 항일 의병장 겸 정치 사상가이다. 세례명은 토마스(Thomas, 도마, 다묵)이다. 본관은 순흥, 고려 시대 후기의 유학자 안향의 26대손이다.

동학 농민 운동에서 아버지 안태훈이 동학군을 정벌하는 데 함께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말기에는 학교 설립과 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하였으며 한때 복권 사업과 비슷한 채표회사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09년 우덕순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 지야 이지스고 역 근처에서 초대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 등의 하차 시 암살을 준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암살하여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에 살인의 죄형으로 관동주 뤼순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

1.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3. 1907년 정미 7 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4.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5. 군대를 해산시킨 죄.
6.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7.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8.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9.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10. (제일은행) 은행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11. 한국이 300만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12.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3.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14. 일본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15.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이다.

■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행적
2008년 3월 25일 국제 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2월 14일부터 순국한 3월 26일까지의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 1910년 2월 14일 : 오전 10시 30분 관동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음.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사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함.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함.
  • 1910년 2월 17일 : 안중근은 고등법원장을 면담하여 한 국가의 독립을 위한 의병장으로서의 행동을 살인범으로 심리한 것에 이의를 제기함.
  • 1910년 3월 9일 : 고해성사를 조제프 빌렘 당시 황해도 천주교 신천본당 주임신부에게서 받음.
  • 1910년 3월 10일 : 빌렘 신부의 집전으로 마지막 미사를 봉헌.
  • 1910년 3월 25일 : 사형 집행 연기. 세계적으로 성탄절, 정월 초하루, 황제의 탄신일에는 사형이 없다는 관례와 대한제국내의 의병활동이 강하게 전개되고 있어 통감부에서 이를 고려, 사형을 연기 요청. 이날은 대한제국 황제 순종이 태어난 건원절이었음.
    이에 안중근은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당부를 남김. 당부 내용은 노모의 안부를 묻고, 불효의 죄를 용서를 청하였고, 장남을 천주교 사제로 길러 달라고 부탁. 동생 안정근에게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공업 또는 식림 같은 한국을 위한 일에 종사토록 부탁.
  • 1910년 3월 26일 : 오전 10시 사형 집행. 향년 30세. 참석자: 미조부치 검찰관, 구리하라 감옥장.
    당시 안중근을 지원한 사람은 거부 최재형이었는데, 최재형은 안중근의 체포에 대비, 변호사와 상의할 정도로 안중근을 현실적으로 도왔다. 한편 안중근은 글씨가 뛰어나, 뤼순 감옥 수감 때 많은 유묵을 남겼고 보물 569호로 지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옥중에서 미완으로 끝난 저서동양평화론을 남겼다. 2008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다롄시 뤼순 감옥 뒤편 야산 일대 등지에서 유해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 유언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시신을 고국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형된 그날 밤 한 일본 간수가 그의 시신을 뤼순 감옥 터 뒤에 황급히 매장했다고 한다. 이후 1945년 11월 중화민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는 순국한 독립운동가의 유골을 찾아 국내에 봉환하기로 한다. 이듬해 6월,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 세 명의 유골을 일본에서 찾아온 후 효창공원에 안장하지만 안중근을 위해서는 네 번째 '허묘'를 만든다. 이것은 안중근의 시신을 꼭 찾겠다는 김구의 결심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구 역시 1949년 안두희의 암살로 사망하고 2008년 남북 정부는 광복 이후 처음으로 안중근 유해 공동 발굴에 나섰지만 유해는 찾지 못하고 위치 또한 찾지 못했다.

"내가 한국 독립을 회복하고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여한이 없겠노라."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르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1912년 - 애리조나주가 미국의 48번째 주로 가입하였다.

1950년 - 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 체결.

1967년 - 대한민국 해병대 11중대가 북베트남군 2개 연대와 1개 게릴라 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짜빈동 전투가 발발하다.

1989년 - 민간용 위성항법장치를 위한 블록II의 첫 인공 위성이 발사되다.

1989년 - 이란의 호메이니가 《악마의 시》의 저자 살만 루시디에게 사형을 선고하다.

1990년 -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 명명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지구를 촬영한 사진을 인류에게 전송함.

1992년 - 제7기동군단 7군단장 전용헬기 추락 사고가 발생하다.

2011년 - 바레인에서 2011년 바레인 봉기가 일어나다.

 

 

 

 

 

문화

1946년 - 세계 최초의 전자계산기 에니악이 만들어지다.

세계최초의 전자 계산기 애니악

전자식 숫자 적분 및 계산기(Electronic Numerical Integrator And Computer; ENIAC, 에니악)는 1943년에서 3년에 걸쳐서 1946년 2월 14일에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모클리와 에커트가 제작한 전자 컴퓨터이다. 1947년 7월 29일에 작동을 시작해 1955년 10월까지 활용되었으며, 현재는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에 분산해 보관되고 있다.

보통 에니악이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고 알려져 있으나, 현대적인 전자 컴퓨터로는 콜로서스가 최초이며, 모든 범주를 포함해서 보면 안티 키티라 기계가 최초의 컴퓨터이다.

  • 폭 : 1m
  • 높이: 2.5m
  • 길이 : 25m
  • 총 중량 : 약 30여t
  • 진공관 개수 : 약 18,000여개
  • 릴레이 : 1,500여개
  • 작동 전력 : 150kw
  • 개발비 총액 : 49만 달러 (당시 미국 달러 기준)

현재와 같은 프로그램 기억 식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배선판에 일일이 배선하는 외부 프로그램 방식이었다. 마크-원에서는 계산기를 제어하는 데 종이테이프가 쓰이는 데 비해 선 판의 연결에 의해 계산을 수행했으므로 작업에 따라 배선판을 교체해야만 하였다(그러나 어느 것이나 계산 순서를 지령하는 일련의 명령은 그 대상인 데이터와는 별도로 주어졌다). 또한, 릴레이 중 하나가 고장이 나면 작동이 아예 불가능하였다. 20개의 변수와 300개의 정수를 기억하는 메모리가 장착되었고, 플로피 디스크 등과 같은 외부 기억장치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현재의 컴퓨터는 2진수로 계산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에니악의 내부구조에는 10진수를 채용했다. 부호 첨부 10 자릿수의 연산이 가능해 매초 5000회 덧셈에 14회 곱셈을 실행할 수 있었으며, 이는 십진수 10자리의 곱셈을 0.0028(28,000분의 1초) 초, 나눗셈을 0.006초(6,000분의 1초) 이내에 처리할 수 있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컴퓨터였다.

에니악 개발은 프레 스퍼 에커트와 존 모클리가 주도했으며, 개발 목적은 대포의 정확한 탄도 계산이었다. 대포의 탄도 계산이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기억 용량이 적고 내장 프로그램이 아니라 외부 프로그래밍 방식이어서 사용에 제약이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난수 연구, 우주선 연구, 풍동 설계, 일기예보 등에도 이용되었다. 하지만 가동되었을 때, 펜실베이니아 시내에 있던 가로등이 모두 희미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력을 소모하였다(150kw). 게다가 한 번 가동을 시키면 엄청난 열과 소음이 발생하였으며, 고장도 많았다. 전자공학 기술의 발달로 1955년까지 사용되다가 다른 컴퓨터로 대체되어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하였다.

후에 아타나 소 프사가 자신들이 개발한 아타나 소프-베리 컴퓨터(ABC)가 최초의 컴퓨터라며 이의를 제기했고, 1973년 10월 19일 미국 법원에서 "인류 최초의 계산기는 ABC다"라고 판결하였고 아타나 소 프사가 승소했다. 하지만 대영제국이 발명하고, 발명 사실을 비밀로 한 콜로서스라는 컴퓨터가 최초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아직 대중 사이에서는 에니악이 최초의 컴퓨터라고 알려져 있다.


2010년 - 대한민국이 동아시아컵 3차전에서 일본에 3:1 역전승을 거두고 2차 도쿄대첩을 연출함. (설렌타인데이)

 

탄생

1404년 - 이탈리아의 철학자, 건축학자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1652년 - 프랑스 군인 탈라르 공작.

1763년 - 프랑스의 장군 장 빅토르 마리 모로.

1766년 - 영국의 인구통계학자 토머스 멜서스.

1895년 - 독일의 철학자 막스 호르크하이머.

1921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류미영.

1929년 - 미국의 배우 빅 모로.

1936년 - 대한민국의 성직자 조용기.

1942년 - 뉴욕 시장 마이클 블룸버그.

1946년 - 미국의 무용가 그레고리 하인즈.

1947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근태.

김근태는 1947년 2월 14일에 경기도 부천시에서 태어났다. 1965년에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했다. 1960년대 무렵에 학생운동을 주도하여 손학규, 조영래와 함께 ‘서울대 운동권 3 총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 각종 재야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수배와 투옥을 반복하였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5년 9월 39세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23일간 경기도 경찰국의 고문기술자인 이근안 경감에게 고문을 받았다.

서울민사 지방법원 합의 41부(재판장 고현철 부장판사)는 1990년 전민련 결성 사건과 관련하여 구속 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고 홍성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전 민청연 의장 김근태가 1985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며 국가 등을 상대로 낸 5천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김 씨가 경찰에 불법 연행돼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것이 인정된다며" 물고문 및 전기고문 등 가혹행위는 범죄행위일 뿐만 아니라 고문을 금지하고 형사 피의자의 진술거부권을 보장한 헌법 규정(12조 2항)에 위배된다 김 씨를 구속영장 없이, 또는 구속영장 발부 후 영장을 제시하지 않고 연행, 구금한 것도 역시 불법행위이다.

고문 피해사실의 유력한 객관적 증거인 金 씨의 상처 딱지가 구치소 재소자의 휴대품 영치를 규정한 행형법에 따라 구치소에 영치되지 않고 관계 교도관들에 의해 강제 수거된 후 폐기 처리된 것은 관계규정을 무시한 위법행위이다. 이 같은 불법행위들로 인해 김 씨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과 함께 그 영혼과 인격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점이 경험칙상 인정되므로 국가는 이에 대해 금전으로나마 배상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무리 고상한 명분이나 국가적 목적이 있는 수사라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무시한 고문을 통해 얻어진 사회안정과 국가안보는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국가는 김 씨에게 고문행위에 따른 위자료 3천5백만 원, 23일간에 걸친 불법구금 및 고문 증거(상처 딱지) 탈취, 인멸 행위로 인한 손해배상금 각 5백만 원 등 모두 4천5백만 원에 대해 가집행 조건을 붙여 지급하라"라고 1992년 1월 30일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김근태가 "1985년 9월 차 안 본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가 23일간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수사 경찰관들로부터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았다"는 이유로 검찰에 낸 고소사건이 무혐의 처리되자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냈으며 이것이 받아들여져 서울 형사 지방법원은 당시 고문을 한 김수현(56.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감)등 4명에게 징역 5년에서 2년까지를 선고했었다.

1996년부터 제15, 16, 17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 우리당 의장 등을 지냈다. 2008년 제18대 선거에서는 신지호 한나라당 의원과 겨뤘으나 낙선했다.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역임하였다.

지병인 파킨슨 병이 민주화 운동 도중 당한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2011년 12월 초 뇌정맥혈전증 투병 사실을 외부에 공개하였고, 12월 말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 30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 2016년 '민주주의자 김근태 상'이 제정되었다.
별칭으로는 민주주의자, 민주화의 대부, 세계의 양심수 등이 있다.


1953년 - 오스트리아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한스 크랑클.

1954년 -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수학자 블라디미르 드린펠트.

1955년 - 대한민국의 시사평론가 겸 대학 교수이며 프리 랜서 방송인 이상로.

1959년 -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르네 플레밍. / 대한민국의 정치인 조원진.

1964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원희룡.

1966년 - 대한민국의 배우 도지원.

1972년 - 대한민국의 배우 이상아. / 대한민국의 MC 겸 희극인 이윤석.

1973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성민.

1974년 - 이탈리아의 펜싱 선수 발렌티나 베찰리.

1977년 - 대한민국의 개그맨 이승윤.

1981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환성(NRG).

1983년 - 대한민국의 배우 성훈.

1984년 - 대한민국의 KBS 아나운서 엄지인.

1985년 - 대한민국의 가수 다비치의 멤버 이해리.

1987년 - 우루과이의 축구 선수 에딘손 카바니.

1988년 - 미국의 가수, 댄서 아시아 니톨라노(푸시캣 돌스) / 아르헨티나의 축구 선수 앙헬 디 마리아.

1992년 - 대한민국의 가수 라붐의 멤버 유정. / 덴마크의 축구 선수 크리스티안 에릭센. / 대한민국의 배우 이주영.

1997년 - 대한민국의 가수 재현

 

사망

1943년 - 독일의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

1968년 - 대한민국의 화가 김용진

2002년 - 헝가리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히데그쿠티 난도르.

2005년 - 레바논의 총리 라피크 하리리.
 
2008년 -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작곡가 이영훈.
 
2012년 -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격투기 선수 마이크 베르나르도.

2018년 - 대한민국의 음반제작자 이호연

2018년 - 네덜란드의 정치인 뤼트 뤼버르스

2018년 - 짐바브웨의 정치인 모건 창기라이

 

기념일

밸런타인데이

1910년 발렌타인데이 기념 카드

성 발렌티누스 축일은 초기 기독교의 사제였던 발렌티누스를 기념하는 날이다. 매년 2월 14일에 기념된다.

참고로, 연인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기도 하다. 현재 서양에서는 특정 성별 및 연애와 관계없이 초콜릿 등 선물을 나누기도 한다.

밸런타인데이가 국립국어원 지정 표준어이지만, 보통 발런타인데이라고 부른다.

성 밸런타인데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 밸런타인 주교가 군인들의 군기문란을 우려하여 미혼 남자들을 더 많이 입대시키기 위해 결혼을 금지하던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의 명령을 어기고 군인들의 혼인성사를 집전했다가 순교한 날인 2월 14일을 기념하기 위한 축일이라는 주장과 서양에서 새들이 교미를 시작하는 날이 2월 14일이라고 믿은 데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새들의 생체리듬은 양력보단 음력에 영향을 받기에 새들의 교미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없다. 단, 세계 각지에서 이날은 남녀가 서로 사랑을 맹세하는 날로써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초콜릿을 보내는 관습은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1936년 일본 고베의 한 제과업체의 밸런타인 초콜릿 광고를 시작으로 “밸런타인데이는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라는 이미지가 일본에서 정착되기 시작했으며 1960년 일본 모리나가 제과가 여성들에게 초콜릿을 통한 사랑고백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되어 여성이 초콜릿을 통해 좋아하는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날로써의 일본식 밸런타인데이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모리나가 제과는 밸런타인데이에 남성도 좋아하는 여성에게 초콜릿을 주자라는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초콜릿 상표 인쇄가 거꾸로 새겨진 이른바 〈逆초코〉시리즈를 발매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과 중국에서는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 등 선물을 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다"라는 식의 기념은 일본의 풍습이며 과도한 상술이라고 지적하는 의견이 존재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밸런타인데이를 챙기는 것은 금지되어 있고,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관점에서 밸런타인데이가 비 이슬람교 유럽 축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 경찰은 밸런타인데이를 챙긴 140명 이상의 무슬림을 체포했다.

북한에서는 광명성절과 지나치게 가깝고 적성국의 문화라는 이유로 밸런타인 데이를 챙기지 않는다.

중국어권에서는 밸런타인데이를 중국어로 情人節이라고 쓴다.


애리조나주의 연방가입일 (휴일)

오리건주의 연방가입일 (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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