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이야기 2월 13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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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689년 - 메리 2세, 영국 국왕이 즉위하다.

1895년 - 조선의 정치인 윤치호가 조선 최초로 자기 집 노비들을 풀어주었다.

서재필의 귀국 직후부터 노비 해방 문제를 상의하던 윤치호와 서재필은 1897년 10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노비 해방 문제를 상정시키기로 계획한다. 한편 윤치호와 서재필은 노비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의하고 1897년 11월 1일 독립협회의 토론에 노비제도가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여론을 공론화시켰다.

1897년 11월 1일의 제8회 토론회의 광경을 보면, 약 500 명의 회중이 참석 한가운데 먼저 회원의 호명이 있었고 다음 지난 회의 토론회 기록의 확인이 있었으며, 내빈 소개와 신입 회원 소개가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회장에게 노비 해방에 대한 것을 건의하였고, 11월 1일 독립협회 회의의 주제로 채택된다. 회장이 토론회의 주제, 이날의 주제는 '동포 형제간에 남녀를 팔고 사고하는 것이 의리상 에 대단히 불가하다'를 선언하였다. 이에 따라 전 주의 선정에 의거하여, 주제에 대한 찬성 편은 힘껏 주제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주제에 대한 반대편 은 토론 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발언을 했으며, 토론회에 참석한 일반 회중은 토론에 자유롭게 토론하였다.

이 중 한 발언자가 용역은 '하나의 필요한 제도이며 노비 제도는 그러한 용역의 하나라고 발언하자, 회중의 하나가 일어서서 토론자가 명제를 정확히 말하고 있지 않다고 의사 규칙 위반을 들어 항의했으며 많은 회원들이 주제의 찬성 편에 서서 발언하였다. 1897년 11월 1일 윤치호는 노비제도의 폐해와 비인간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연설을 하고, 서재필은 미국에서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 들의 참상을 들어 설명하였다. 다음으로 주제에 대한 회중의 의견을 투표에 붙인 결과 만장일치로 주제에 대한 찬성이 의결되었으며, 주제에 찬성한 사람은 자기가 실제로 소유한 노비를 모두 해방시키도록 하자는 동의가 가결됨으로써 토론회를 끝내었다. 독립협회의 결의에 따라 한성부의 양반가에서는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을 석방시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윤치호와 서재필은 각각 인간은 물건이 아니며 재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부여한 것이라고 역설하고 다녔다. 시중에서는 이들의 사상을 위험한 사상이며 반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해괴한 요설, 궤변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1897년 11월 1일의 노비해방에 대한 기습 토론 이후 노비 해방 풍조가 점차적으로 확산되었다.


1898년 - 대한제국 고종이 경운궁 태극전을 중화전으로 개칭하다.

1945년 - 제2차 세계 대전: 영국과 미국 공군이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을 폭격하여, 수만 명의 시민이 사망하다.

1946년 - 미군정기 한국의 CIC 서울지부(CIA 한국지부의 전신) 지부장으로 미국 육군 대위 스위프트가 서울특별자유시로 부임하였다.

1951년 - 지평리 전투가 시작됐다.

지평리 전투 개요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 지를 구축한 미국 제2보병사단 제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제39군과 3일간 벌인 격전이었다.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 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임무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고 철수했다.

1950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1.4 후퇴와 장진호 전투로 대표되는 참담한 후퇴를 겪어야 했던 유엔군은 평택-원주-삼척 선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1951년 2월부터 반격에 들어갔다. 선더볼트 작전, 라운드업 작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러기드 작전 그리고 돈 틀 리스 작전 등으로 진행된 반격 작전은 이전과 달리 산악 지형을 이용한 중국군의 우회 및 포위 섬멸 전술을 염두에 두고 종방향으로 진격이 아닌 횡방향의 연결을 중요시하여 한 번에 최대한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인접 부대의 진격 속도에 맞추어 모든 전선에서 천천히 진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런 유엔군의 반격 작전에 공산측은 2월 11일에 2월 공세로 화답했다. 수원 - 이천 - 원주 - 강릉까지 진격해 있던 중국군은 유엔군이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으로 한강을 회복하고, 다시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하자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중국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몰아낸 다음 남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한국군 및 미국군은 중국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후퇴했고, 2월 초 미국 9 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지평리에 진주한 미국 23 연대 전투단의 방어 진지는 견부 진지로 남게 되었다. 지평리에 남게 된 23 연대 전투단은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편성된 전투단으로, 중국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군은 그 미끼를 물었던 것이다.

지평리의 23연대 전투단은 미국 2 보병사단 23 연대와 23 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주축으로 미국 37 포병대대, 미국 82방 공포 대대 B포대, 미국 503 포병대대 B포대가 연대전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중국은 이 지평리에 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했다. 좌우 인접 부대가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고립 상태가 된 23 연대전투단의 철수를 미국 10군단이 8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매슈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은 진지 사수를 명령했다. 23 연대전투단은 1.6km 길이의 원형 방어진 지를 구축했으며, 북쪽에 1대대, 동쪽 3대대, 남쪽 2대대, 서쪽 프랑스 대대를 배치하여 전투에 대비했다.

2월 13일 저녁, 중국군 2개 사단이 전방 2개 대대에 8차례에 걸친 파상 공격을 해왔으나, 미군은 이를 모두 격퇴했다. 이 날 전투 중에 폴 프리먼 23 연대장은 부상을 입었으나 후송을 거부하고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다음 날 미국은 공중보급으로 지평리의 미국군 및 프랑스군에게 필요한 물자를 보급했으며 중국군은 유엔군의 공군력 때문에 낮에는 숨어서 대기했다. 이날은 리지웨이 사령관이 직접 헬기 편으로 연대를 방문하여 연대원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2월 14일 저녁 7시, 중국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일제 공격을 시작했고, 중국군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했고, 진지 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미군 및 프랑스군은 끝내 진지를 사수했고 중국군은 새벽녘에 다시 철수했다. 이 무렵 후방에서는 미국 1 기병사단 미국 5 기병연대(연대장 마르셀 G. 크롬베즈 대령)를 주축으로 한 구조대(크롬베즈 특임대)가 편성되고 있었다.

2월 14일, 크롬베즈 대령의 5기병연대는 기본 보병 3개 대대에 의무중대, 전투공병중대, 자주포를 장비한 2개 야전포병대대, 2개 중전차 소대와 추가로 전차중대를 배속받았다. 전차대는 6 전차대대 D중대와 70 전차대대 A중대로 편성되었는데, 6 전차대대 D중대는 본래 1 기병사단 소속이 아니었으나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어 있던 전차중대여서 5 기병연대에 배속되었다. 6대대는 M-46 패튼을 장비했으며, 70 전차대대는 M4A 3을 장비하고 있었다. 어둠이 깔릴 즈음 5 기병연대는 진격을 개시했으나 부서진 다리 때문에 진격이 멈추었고, 배속된 전투공병중대가 급히 교량 복구에 투입되었다. 나머지 병력은 적의 공격에 대비해 방어 진형을 갖추었다.

2월 15일 아침, 크롬베즈 대령은 1대대를 우측 산지로, 2대대는 좌측 산지를 장악하도록 지시하여 두 대대는 중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두 대대의 임무는 도로 양측면의 산악지대를 장악하여 도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중국군의 반격은 매우 거셌고, 2개 포병대대가 작전을 지원했다. 미국의 정찰기는 교전 중인 두 대대의 북쪽에 중국군 대부대가 있다고 보고했다.

전투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고, 크롬베즈 대령은 기갑 병력만이 적의 점령지역을 관통하여 지평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무렵 프리먼 대령은 부상이 악화되어 결국 후송되어 연대는 2대 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크롬베즈 대령은 연대에 배속된 전차 23대를 진격 대열에서 분리하고 L중대 165명과 공병 일부를 전차에 탑승시켜 지평리로 곧장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작전에 앞서 크롬베즈 대령은 헬리콥터로 진격로를 직접 점검했다. 원래 계획은 앰뷸런스 및 보급품을 실은 트럭들이 함께 진격하는 것이었으나 크롬베즈 대령은 도로 사정상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보병을 태운 전차부대만 우선 진격하기로 했다. 구급차 및 보급품 트럭은 도로 사정이 괜찮아지면 그때 불러들이기로 했다. 공격 제대는 M-46을 갖춘 6 전차대대 D중대가 선두에서 진격하고, M4A 3을 장비한 70 전차대대 A중대가 뒤따랐다.

2월 15일 15시, 공격대는 공격준비를 서둘렀다. 전투공병 4명이 2번째 전차에 올라탔으며, 160명의 L중대원이 15대의 전차에 분산 탑승했다. 15시 45분, 부대는 공격에 나섰다. 전차 간 간격은 13m를 유지했다.

지평리 동쪽에서 국군 5 사단 및 8사단을 붕괴시킨 중국군의 4차 공세는 결국 지평리에서 23 연대 및 프랑스 대대의 치열한 저항과 후방의 화력 지원, 그리고 중국군 자체의 문제로 인해 결국 중국군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물러서게 되었다. 중국군의 주요 패배 원인은 다음과 같다.

  • 화력의 열세
  • 5개 사단에서 동원된 6개 연대를 통합한 지휘 체계 부재
  • 또한 각 연대는 연대 자체 계획에 따라 중대급 병력을 축차 투입하면서 병력 우세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함

1960년 - 프랑스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다.

1974년 -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추방되다.

1992년 - 몽골 인민 공화국이 해체되고 이원집정부제 구조의 몽골 공화국이 수립되다.

2019년 - 마케도니아 공화국의 공식 국명이 북마케도니아 공화국으로 변경되다.

 

문화

1961년 - 한국에서 민족일보가 창간되다.

2015년 - 한국어 위키백과 30만 문서 달성 기념 모임이 강남 파이낸스 센터에서 열리다.

 

탄생

1457년 - 부르고뉴 여공 마리, 저지대 국가의 통치자.

1599년 - 교황 알렉산데르 7세, 237대 로마 교황.

1735년 - 조선 영조대왕의 세자 사도세자.

사도세자 초상화 19세기 초에 제작. 작자미상

장조(1735년 2월 13일(음력 1월 21일) ~ 1762년 7월 12일(음력 윤 5월 21일))는 조선의 왕세자이자 대한제국 추존 황제이다. 영조의 서 차자, 효장세자의 이복동생이며 정조의 생부이다. 흔히 사도세자 또는 장헌세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성은 이, 이름은 선, 본관은 전주,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생후 1년만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49년 어명으로 대리청정을 시작하였으나 노론, 부왕과의 마찰과 정치적 갈등을 빚다가 1762년(영조 38년) 어명으로 뒤주에 갇혀 아사하였다. 사후 지위만 복권되었고, 양주 배봉산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아들 정조에 의해 수원 화성 근처 현륭원 융릉에 안장되었다. 정조 즉위 후 장헌의 존호를 받았다. 정조는 재위 중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노론 계열의 반발로 무산되고 만다. 한편 부인 헌경왕후는 후일 저서 한중록에서 그가 의대증과 정신질환을 앓았다고 진술했고, 실록에도 그의 병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우울증이나 화병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시호와 존호는 사도수덕돈경홍인경 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 였다가 후에 고종 때 국왕으로 추존되면서 장종의 묘호를 더하여 장종신 문환무장헌광효대왕이라고 하였다. 대한제국 때 황제로 격상되어 장조의 황제로 추존되었다. 비교적 근래의 무속 신으로, 무속 신앙에서 모시는 신의 한 사람으로 숭배되었는데, 이때의 호칭은 뒤주 대감이었다.


1805년 - 독일 수학자 페터 구스타프 르죈 디리클레.

1910년 - 미국의 물리학자 윌리엄 쇼클리.

1918년 - 대한민국의 군인 송요찬.

1919년 - 미국의 가수 겸 배우 테네시 어니포드
 
1925년 - 대한민국의 시인 김규동

1960년 - 이탈리아의 축구 심판 피에를루이지 콜리나.

1970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안경현. / 대한민국의 배우 박희순.

1974년 -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로비 윌리엄스

1977년 - 대한민국의 배우, 희극인 정정아.

1979년 - 대한민국의 탤런트 김태호. / 멕시코의 축구 선수 라파엘 마르케스.

1980년 - 대한민국의 배우 이상우.

1981년 - 브라질의 축구 선수 루이장. / 대한민국의 현 야구 코치, 전 야구 선수 정재복.

1985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기웅. / 대한민국의 배우 곽지민. / 대한민국의 배우 서해원.

1987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최슬기.

1990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홍상삼.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윤석영. / 프랑스의 축구 선수 마마두 사코. / 대한민국의 배우 정연주

1991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 모델 유리안. / 프랑스의 축구 선수 엘리아킴 망갈라. / 스웨덴의 축구 선수 폰투스 얀손.

1993년 - 대한민국 2014 미스코리아 서울 미(美) 출신의 방송인이며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장교 여군 중위 출신 항공 승무원 유지혜. / 일본의 배우 아리무라 카스미.

1994년 - 네덜란드의 축구 선수 멤피스 데파이.

 

사망

1542년 - 캐서린 하워드, 헨리 8세의 5번째 왕비.

1571년 -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조각가, 화가, 음악가 벤베누토 첼리니

1883년 -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1967년 - 일본의 실업가 아이카와 요시스케

2000년 - 대한민국의 포크 팝 가수 겸 대중음악 작곡가 이승희

2004년 - 이츠케리아 체첸 공화국의 2대 대통령 젤림한 얀다르비예프

2005년 - 파티마의 성모 발현의 목격자 루치아 도스 산토스 수녀.

2016년 - 미국의 대법관 안토닌 스칼리아

2017년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정치인 김정남.

이미지출처 KBS 창

김정남(1971년 5월 10일 ~ 2017년 2월 13일)은 김정일 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의 장남이자 現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 김정은의 이복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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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은 1971년 5월 10일에 평양에서 태어났다. 이후 9살 때부터 해외 유학을 떠나면서 식견을 넓혔으며,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영어나 프랑스어를 배우기도 했고, 개혁·개방에 관심이 있다고 알려졌다. 어린 시절 특별 관리 대상이 되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는 폐쇄적인 생활을 한 탓에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배다른 숙부인 김현이 김정남의 유일한 친구였다.

2001년 도미니카 공화국 위조 여권으로 일본에 밀입국을 시도하다 적발된 경력이 있다. 본인은 도쿄 디즈니랜드에서 놀고 싶었다고 주장했지만 그 원래 목적은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상당 기간 동안 조선컴퓨터센터(조선컴퓨터센터) 위원장을 맡았고 IT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일본의 IT 산업을 보기 위해 밀입국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김정남은 중국이 자신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김일성이 김정남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지목했다는 설도 있다.  1998년 3월 국가안전보위부 제1차장이자 직무대행이었던 김영룡이 숙청된 이후에는 국가안전보위부 제1차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2002년 5월 1일 일본을 방문하던 중, 위조 여권으로 입국한 사실이 일본 공안당국에 알려지면서 해임되었다.

일본 아키하바라에 출몰하고, 홍콩, 마카오 등지를 다니는 등 노는 모습을 보여 흔히 알려지게 된 김정남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과는 달리 장남인 김정남은 김정일로부터 상당한 신뢰를 받고 있다고 알려졌다.  술과 여자만 밝히는 방탕아라는 이미지 역시 상당 부분 과장됐다고 전현직 대북 정보당국 관계자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FNN은 파리의 우수 병원에 김정남이 직접 방문한 것을 볼 때 김정일의 건강 관리에 대해 장남인 김정남이 총괄 책임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김정남의 병원 방문 이틀이 지난 시점에서 김정남이 병원을 방문했을 당시 면담을 한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인 뇌신경외과 전문의가 유네스코 주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표부 소속 차량을 타고 샤를 드골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김정남은 아버지인 김정일의 직접 지시를 받는 무기 수출 총책임자라고 알려졌다. 스커드 또는 SA-16 미사일 등의 무기를 매각하고 받은 돈을 해외에서 이자가 비싼 은행에 예금해 놓은 뒤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버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김정남은 김정일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39호실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후계자 순위에서 밀려났으며 이복동생 김정은에 의해 암살당할 위기에 몰린 이후에는 계속 중국 당국의 보호를 받았다.

2012년에는 러시아의 한 주간지에 따르면 김정일 사후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이복동생 김정은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부터 돈을 받지 못해서 호텔에서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김정남이 묵었던 그랜드 라파 호텔 측에 따르면 그런 보도는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2017년 2월 13일 오전 9시경 김정남은 말레이시아 세팡에 위치한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무언가를 맨손에 묻힌 여성 2명이 얼굴을 문지르고 나서 곧 사망하였다. 보툴리눔으로 죽었다는 설도 나왔고, 독극물 스프레이를 맞고 사망하였다는 설도 있다. 또한 일부는 독침으로 죽었다는 가설도 있다고 한다. 김정남 암살은 김정은이 권력을 승계받은 2011년 다음 해 인 2012년 초부터 진행되었으며, 정찰총국 등 북한 정보당국의 최 순위 목표였다고 국가정보원이 밝혔다. 또한 국가정보원은 2012년 4월 김정남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살려달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낸 사실도 공개하였다.  2017년 2월 19일 말레이시아 경찰은 공식 브리핑을 통해 암살을 실행한 인도네시아, 베트남 출신 여성 2명을 배후에서 사주한 일당 4명이 모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적이라고 발표하였다.

2017년 2월 24일, 말레이시아 경찰이 감식 결과 김정남의 시신에서 VX 성분이 검출됐다고 발표했다. 여성 2명이 차례로 김정남의 얼굴에 손을 댔다는 점에서 북한이 김정남을 암살할 때 서로 만나면 반응해서 VX가 되는 이원화 화학무기 형태의 VX를 사용해서 여성 2명에게 각기 다른 원료물질을 손에 묻히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예측이 나왔다.

■ VX는 매우 독성이 강한 신경독의 일종이다. 실온에서 호박색의 유성 액체로 존재하고, 비휘발성이며 특별한 맛이나 냄새는 없다. 치사량은 흡입 시 50mg, 피부 접촉 시 10mg(1m2 기준)이다. 현재 대량살상 무기로 분류되고 있는 화학무기이며 생산이 금지되어 있다.


2009년 이후 이미 후계구도에서 완전히 배제됐다고 알려졌다.

강선제강소로 좌천된 장성택을 결정적으로 구해준 사람이 김정남의 어머니 성혜림이다. 이후 장성택은 김정일의 후계자로 김정남을 옹립하고 나섰다.

그러나 과거에는 김정남의 후계 옹립을 도왔지만 후에 둘 사이에는 거리가 생겼다. 장성택은 각별한 관계인 김정남을 버리고 삼남인 김정은을 지지하는 대신 권력의 핵심 요직에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임명하였다. 원래 김정남은 장성택, 김정은, 김옥이 지지하고 있었다.

장성택은 김일성의 사위이며,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 매제이다. 2009년 즈음에 김정일의 병상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은 세 아들들을 제외하면 김정일의 주치의와 아내 김옥 그리고 장성택 세 사람 정도였다고 알려졌다.

2009년 4월 9일 12기 최고 인민회의 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을 4명 더 늘렸다. 장성택은 대한민국의 대북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신임 국방위원으로 임명되었다.

2007년 8월 28일에 러시아 일간 코메르산트는 러시아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김정남의 복귀 소식이 사실이라면 김 위원장의 첫째 아들인 그가 다른 형제들을 권력에서 몰아낼 것"이라고 보도했다. 김정남은 이모 성혜랑의 1996년 미국 망명으로 그 위상이 크게 위협받았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사회는 유교적인 장자 상속사회라는 사회구조와 정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때 김정남이 가장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황장엽 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 비서는 김 위원장 사후 장남인 김정남이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면서 그 이유로 장성택이 그를 후원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후계자가 아니냐는 질문에는 "만약 내가 후계자라면 나와 마카오에서 만날 수 있었겠느냐."라며 "나는 그(김정일)의 아들일 뿐이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입장을 밝힐 위치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정남은 현재 서방 언론과 접촉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부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 듯한 발언을 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2010년 김정일의 후계자로 3남인 김정은이 내정되었다. 그러나 대북 전문가인 장성민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는 "나이가 어린 그가 후계자로 지명됐다는 주장은 후계와 관련한 외부 세계의 전망을 흐리게 하고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부에서 흘러나온 역정보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주장하였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명되어 후계자로서 자격이 적합한가에 대해, 중국 정부에서는 김정은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며, 중국 정부는 장남인 김정남을 더 선호하였다.

2009년에 CRS의 래리 닉시 박사는 "26세의 나이로 직접 국정을 운영하기에는 너무 연소하고 경험과 경력도 짧은 김정은이 김 위원장과 같은 권력을 행사하려면 최소한 10년 이상은 걸린다."면서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김 위원장이 당장 3년 안에 사망할 경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최고 통치자로서 김정은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라고 말했다.

한편 김정남은 김정은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발언을 하였는데, 이 발언은 일종의 생존 전략으로 분석하기도 한다.


2017년 - 일본의 영화감독 스즈키 세이준

2018년 - 덴마크의 왕자 덴마크 여왕 부군 헨리크

 

기념일

세계 라디오의 날(World Radio Day): 2011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교육, 표현의 자유, 공개 토론, 속보 전달 등의 매개체가 된 라디오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2월 13일을 '세계 라디오의 날'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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