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2월 11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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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244년 - 고르디아누스 3세가 메소포타미아 자이타(Zaitha)에서 반란군에게 살해되다.

1534년 - 수장령(Acts of Supremacy, 首長令): 헨리 8세가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 교회에 대한 모든 권한이 국왕에게 있음을 선포하다.

1896년 - 아관파천: 조선의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

러시아 공사관(1900년경)

아관파천은 1896년 2월 11일부터 1897년 2월 20일까지 1년간 조선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를 러시아 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이다. 러시아에서는 이 사건을 고종 러시아공관 망명이라고 불렀다.

1864년 조선 고종 1년 이후 러시아 제국을 한자로 ‘아라사’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하였다. 따라서 ‘아관’이란 러시아 대사관을 뜻하며, 당시 일본에서는 러시아를 ‘노서아’라고도 하기 때문에, 노관파천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 '노서아'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1905년 대한제국 광무 9년 9월 5일 노서아-일본의 강화 조약(포츠머스 조약) 기록이 유일하며, 러시아 대사관을 ‘노관’이라고 칭한 것도 1897년 두 차례에 불과하다. (아관은 고종 때 네 차례, 순종 때 한 차례 등장) 아관파천 당시에는 “파천”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고, 나중에 붙인 명칭이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조선 국민의 대일 감정이 극도로 악화하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전국이 소란해지자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공사관 보호라는 명목으로 수병 백명을 서울로 데려왔다. 이에 친러파인 이범진 등은 베베르와 공모하여 건양 1년(1896년) 2월 11일에 국왕의 거처를 궁궐로부터 정동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고종은 옮긴 당일 내각총리대신 김홍집을 비롯하여, 김윤식, 유길준, 어윤중, 조희연, 장박, 정병하, 김종한, 허진, 이범래, 이진호를 면직하고, 유길준 등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김병시를 내각총리대신에 명하는 등 내각 인사를 새로 하였다. 이날 김홍집과 정병하가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어윤중 또한 살해되었고, 유길준·조희연 등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 내각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황제 대관식 이후에 일본 제국과 가까워지며, 야마가타-로바노프 협정을 맺는다. 또한 러시아 제국은 경원과 경성의 채굴권과 압록강, 두만강 및 울릉도의 채벌권과 같은 각종 이권을 요구하였다. 이에 1897년 2월 18일, 궁으로 돌아갈 것을 명한 고종은 이틀 뒤인 2월 20일에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이때, 고종이 다른 나라의 공관에 피신하여 다른 나라 군대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조선의 자주권이 심하게 훼손된다. 그리고 그 이후 러시아의 간섭이 심해지게 된다.

서울 구 러시아 공사관 일부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체류하고 있는 1년 동안 모든 정치는 러시아의 수중에 있었으며, 당시 탁지부 고문 알렉세예프는 사실상 재무장관이나 마찬가지였다. 한편,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위시한 열강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긴 후에 왕은 비로소 군주권을 회복한다. 이전까진 일본이 일본식 제대로 내각이라는 것을 만들어 친일적 인사를 총리대신이 되도록 하여 그가 일본공사관의 지시를 받아 국사를 결정하도록 했다. 왕은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면서 빼앗겼던 군주권을 회복하고 왕정을 원상으로 돌렸다. 그리고 나라를 한 등급 승격시켜 제국으로서 재출발하는 기회를 만들었다. 황제는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근대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일본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던 그의 의도를 봐야 한다는 평가도 있지만, 자주적이지 못한 외세 지향의 행동이라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1929년 - 라테란 조약 체결

1945년 - 얄타 회담이 끝났다.

1960년 - 흐루쇼프, 네루 수상 회담; 군축과 개발촉진에 합의

1999년 - 이스라엘, 헤즈볼라 거점 폭격

2000년 - 영국 정부, 북아일랜드 자치권 회수 및 직접 통치 개시(북아일랜드 분쟁)

2007년 -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2008년 - 방화로 인해 숭례문이 완전히 붕괴되다.

2015년 - 영종대교 상부에서 106중 추돌사고가 일어나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의 동작구립 사당종합체육관 건설현장에서,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다.

2018년 - 포항 지진 으로 인해 유리가 부서지는 등 피해를 입었다.

2017년 포항 지진은 2017년 11월 15일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발생한 지진이다. 진앙은 포항시 북구 북쪽 9km 지점인 흥해읍 남송리이며, 진원지는 지표에서 7km 떨어진 지점이다. 오후 2시 29분 31초에 발생한 본진의 지진 규모는 Mw 5.4로, 2016년 경주 지진에 이어 1978년 본격적인 지진 관측 이래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지진이다. 수정 메르칼리 진도 계급 기준 최대 진도는 Ⅵ로 2016년 경주 지진에 이어 관측 사상 2번째로 최대 진도 Ⅵ을 기록한 지진이다. 또한, 역대 가장 많은 피해가 발생한 지진이다.

포항지진의 원인을 조사해온 정부조사단은 2019년 3월 20일, 이 지진이 인근 지열발전소의 실증연구에 따른 ‘촉발지진’이라고 공식발표했다. 이 조사에는 대한지질학회와 해외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해외조사위원으로 참여한 쉐민 게 콜로라도대 교수는 “포항지열발전소에서 다섯 번의 자극이 주어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대한민국 기상청과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이 본진을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았다.

  • 지진 발생시각: 2017년 11월 15일 수요일 14시 29분 31초
  • 진원지: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북쪽 8km 지역 (북위 36°11'동경 129°37')
  • 진원 깊이: 4km
  • 지진 규모
  • 모멘트 규모 (Mw) 5.4
  • 릭터 규모 (ML) 5.4
  • 최대 진도: 진도 Ⅵ (경상북도 포항시)
  • 최대지반가속도: 0.58g (경상북도 포항시)
  • 단층 형태 : 역단층성 우수향 주향이동단층 (북동-남서 방향을 축으로 압력을 받음)

11월 15일 오후 2시 22분 32초에 포항시 북구 북쪽 7km 지역에서 규모 2.2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어 22분 44초에 포항시 북구 북서쪽 7km 지역에서 규모 2.6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이 두 지진은 전진으로서, 규모 5.4의 본진은 그 뒤를 이어 29분 31초에 발생하였다.

오후 2시 32분 59초에 포항시 북구 북쪽 7km 지역에서 규모 3.6의 지진이 이어졌다. 이후 규모 2에서 3을 오가는 몇 차례 여진이 추가적으로 발생하였다. 계속 여진이 이어져 4시 49분에는 규모 4.3의 여진이 발생하였다.

본진 이후에도 여진은 계속해서 진행되어, 12월 25일 오후 4시 19분 22초에는 경북 포항시 북구 북쪽 8km 지점에서 규모 3.5의 여진이 발생하였다. 이 여진까지 총 70회의 여진이 발생하였으며, 규모 3.0 이상의 지진은 총 여섯 번 발생하였다.

발생일시 진원지

좌표

진원깊이

릭터 규모

KMA

모멘트 규모

USGS

최대 진도
2017년 11월 15일 오후 2:29:31 경북 포항시 북구 북쪽 9km

북위 36.109° 동경 129.366°

KMA : 7 km
USGS : 10 km
NIED : 5 km
5.4 5.5 KMA : VI
USGS : VII
2017년 11월 15일 오후 4:49:30 KMA : 10 km
USGS : 10 km
4.3 4.7 KMA : VII
USGS : IV
2018년 2월 11일 오전 5:03:03 경북 포항시 북구 북서쪽 5km

북위 36.08° 동경 129.33°

KMA : 9 km
USGS : 10 km
4.6 4.7 KMA : V
USGS : VII
본진 이후 여진 발생 추이

본진의 진동은 일본에서도 느껴져, 쓰시마 섬에서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2를, 규슈 북부의 후쿠오카현, 나가사키현, 사가현, 주고쿠 지방의 야마구치현, 시마네현에서 진도 1의 유감지진을 감지했다.

한동대학교 건물 외벽 파손

한동대학교에서 지진으로 건물 외벽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경상북도교육청은 11월 16일 낮12시까지 99개교에서 피해가 접수되었다고 하였다. 대한민국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지진 발생 후, 전국의 원전과 중·저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분시설에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은 동남아시아 순방 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진 소식을 듣고 귀국하는 대로 수석·보좌관 회의를 소집할 것을 지시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행정안전부에 지진으로 인한 인명피해 여부 등 피해상황을 신속히 파악하고, 전 행정력을 동원해 현장에서 피해자 구조지원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지난 2016년 경주 지진 이후 긴급재난문자 발송이 크게 개선되었기 때문에, 이번 포항 지진에서는 문자 발송이 매우 신속하였다.

포항 일대의 고사장이 파손되는 등, 지진으로 인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정상적인 진행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어, 원래 일정이었던 2017년 11월 16일에서 일주일 뒤인 2017년 11월 23일로 연기되었다. 교육부는 11월 16일 오후 2시 수능 성적 발표와 대학별고사를 모두 일주일 순연시킨다고 밝혔다.

 

문화

2015년 - 지상파 다채널방송 EBS 2TV가 개국하였으며, EBS TV의 채널명을 EBS 1TV로 변경되었다.

 

탄생

1466년 - 헨리 7세의 왕비, 헨리 8세의 모후 요크의 엘리자베스.

1847년 -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

토머스 앨바 에디슨(1847년 2월 11일 ~ 1931년 10월 18일)은 미국의 발명가 및 사업가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발명을 남긴 사람으로 1,093개의 미국 특허가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토머스 에디슨은 후에 제너럴 일렉트릭을 건립하였다.

1847년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나 미시간주 포트 휴런에서 자랐다. 에디슨은 어린 시절부터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당시의 주입식 교육에 적응하는데 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정규 교육을 받은 것은 3개월 뿐 이었으나, 결혼하기 전에는 교사로 일했던 어머니의 열성적인 교육 덕에 점차 재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중앙교육연구원에서 펴낸 에디슨 전기에 따르면, 에디슨의 어머니는 아들의 재능을 생각해서 직접 실험을 할 수 있는 과학책을 사 주었다.

전신기 특허로 큰 돈을 번 그는 1876년 세계 최초의 민간 연구소로 알려진 멘로파크연구소를 세워 발명을 계속하였다. 그의 발명은 굉장히 많아서 특허의 수효만도 1,300여 개나 된다. 에디슨의 발명품으로는 1874년 자동 발신기 개발, 1877년 축음기, 1879년 전화 송신기개발, 1880년 신식 발전기와 전등 부속품개발, 1881년 전차의 실험을 했고, 1882년 발전소 를 건설했고, 1888년 영화의 제작방법을 알아냈고, 1895년 광물을 가려내는 방법, 1900년 시멘트 공업의 개량, 1909년 엔진형 개발, 축전지개발 등이 있다. 흔히 노력형 천재라고 알고있으나 의외로 상당히 틀린 부분이 많다. 이 중 가장 높게 평가되는 부문은 역시 도시의 밤을 환하게 했다는 것이다. 전구의 발명은 발전, 송배전 부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했고 각 가정마다 전기가 들어가게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1929년 82세 때 백열 전구 발명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연설을 하고 난 뒤 병을 앓게 되었다. 에디슨은 그 이후 미국 뉴저지주 웨스트오렌지 자택에서 병상에 누워서 지내다가, 1931년 10월 18일에 총 1,033개의 발명품을 남기고 향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극 진공관 발명의 기초가 되어 라디오 발명의 길을 열어 준 과학상의 중요한 발견을 말한다. 일부 학자들은 에디슨 효과를 에디슨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에디슨은 한평생 발명/사업에 힘써왔지만 가족에게는 정말로 소홀했다. 첫째 부인은 쓸 만한 발명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구박했고 대학교육에 대한 컴플렉스 탓에 자식들을 공과대학을 제외한 그 어떤 대학에도 보내지 않았다.

첫 번째 부인 메리 스틸웰이 죽었을 때 그는 일이 바쁘다며 장례식도 가지 않았다고 하며, 그 후 한동안 적적하게 지내다 두 번째 부인이 된 미나 밀러에게 모스 부호로 프로포즈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족에 소홀했던 탓인지 자식들의 삶도 좋지 못했다. 첫째 아들 토머스 주니어는 '전기 활력 회복기’라고 이름 붙인 가짜 건강기계를 만들어 팔다 고발당하는 등 아버지 이름을 빌려 사기나 치는 사기꾼이었고, 둘째 윌리엄은 하는 사업마다 망해서 매주 40달러씩 생활비를 대주는 처지가 되었다. 문제는 윌리엄의 부인이 허영심이 많았는지 주 40달러 가지고 어찌 사냐고 시도때도없이 편지를 보내 에디슨을 닦달했다는 것이다.

다만 셋째 아들 찰스 에디슨은 정계로 진출해 훗날 뉴저지 주의 주지사가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가장 친밀하다고 자부하던 그였지만, 그마저도 아버지 얼굴을 평생 봤던 시간이 채 1주일도 되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당시의 미국의 과학기술은 유럽에 비해 내세울게 없었다. 특히 유럽의 물리학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퀴리 부부,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등 천재적인 학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비약적인 발전하고 있었으나 미국은 변방이었다. 비록 에디슨은 학자적인 이론을 갖고 있지는 못했지만 실험과 호기심을 통한 발명으로 미국을 응용기술면에서 유럽을 압도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었다.


1877년 - 일본항공의 개척자 나라하라 산지.

1908년 -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최재서.

1909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오영수.

1915년 - 미국의 수학자 리처드 해밍.

1934년 -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

1941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종교인 유병언. / 대한민국의 소설가 현기영.

1944년 - 이탈리아의 전 축구 선수 루이지 리바.

1947년 - 일본의 정치인 하토야마 유키오.

1950년 - 대한민국의 가수 나훈아.

1955년 - 대한민국의 변호사,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서울특별시장 박원순.
 
1959년 - 대한민국의 배우 전광렬.

1963년 - 스페인의 전 축구 선수, 현 축구 감독 호세 마리 바케로.

1969년 - 미국의 배우 제니퍼 애니스턴.

1971년 - 대한민국의 배우 박소현.

1972년 - 대한민국의 전 야구선수 최익성.

1973년 - 대한민국의 배우 전도연.

1980년 - 오스트레일리아의 축구 선수 마크 브레시아노.

1981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김승회.

1986년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허민.

1990년 대한민국의 배우 고아라. / 대한민국의 가수 황찬성 (2PM).

199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오승훈.

1992년 - 대한민국의 전 가수 김동준.

1993년 - 대한민국의 가수 이대열 (골든차일드).

1994년 - 대한민국의 가수 서지수 (러블리즈).

1997년 - 대한민국의 가수 로제 (블랙핑크).

1999년 - 대한민국의 래퍼 디노 (세븐틴).

 

사망

244년 - 로마 제국의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

641년 -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헤라클리우스

1503년 - 헨리 7세의 왕비, 헨리 8세의 모후 요크의 엘리자베스

1650년 - 프랑스의 과학자 르네 데카르트

1868년 - 프랑스의 물리학자 레옹 푸코

장 베르나르 레옹 푸코(1819년 9월 18일 ~ 1868년 2월 11일)는 프랑스의 물리학자이다. 지구의 자전을 실험으로 증명해 보인 최초의 과학자이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푸코의 진자(1988년)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푸코의 진자'라는 장치를 만들어 지구의 자전을 최초로 실험으로써 증명하면서 코플리 상을 수상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맴돌이 전류 발견, 자이로스코프 제작 등 다양한 업적이 있는데, 특히 광학 분야에서는 빛의 속도 측정과 파동설 확립, 반사망원경 연구 등으로 유명하다. 달에 있는 크레이터인 푸코 크레이터도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레옹 푸코는 1819년 9월 18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장 레옹 포투네 푸코는 프랑스에서 유명한 출판업자였다. 하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은퇴하고 가족과 함께 낭트로 휴양을 떠났으나 푸코가 9살 때 세상을 떠났다. 푸코와 그의 어머니는 다시 파리로 돌아왔으나 푸코 역시 병약했다. 그는 한 쪽 눈에 원시가, 다른 쪽 눈에 근시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외모가 약간 이상해 보였다. 이로 인해 푸코는 자신의 외모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과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에는 소질이 있었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파리 스태니슬라스 대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푸코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다. 과제를 제때 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그의 담당교수는 그가 게으르다고 했다. 푸코의 어머니는 학교가 푸코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고, 푸코가 학교에 다니지 않고 가정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고향 친구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어떤 부분도 그가 미래에 유명해 질 거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몸은 약했고, 겁 많고 마음이 좁았다. 별로 없어 보이는 소질과 느린 일처리 능력은 그가 더 이상 대학에 다닐 수 없게 만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다행히도 가정교사를 알아봐주셨고, 그제서야 그는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

학교에 다니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푸코는 학교를 그만둔 후 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10대 때 그는 장난감 조립이나, 증기기관이나 전신기 같은 정교한 기계들에 관심을 가졌다. 이런 그의 재능을 본 어머니는 푸코가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839년에 파리 의학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첫 해부학 실험 때 피를 보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의 담당 교수였던 알프레드 다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을 믿고 조교로 채용했다. 푸코는 약 3년간 알프레드 다니의 미세 해부학 실험의 조교로 일했으나, 결국 피에 대한 공포심을 떨쳐내는 데 실패하고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이후 그는 루이 다게르가 사진술을 발명한 것에 대해 크게 감명 받았고, 대학 시절의 친구 히폴리트 피조를 만나면서 실험물리학의 길로 전향했다.


1844년 이후 그는 과학 교과서와 신문의 과학 기사 등을 써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그는 피조와 함께 다양한 빛의 강도에 대한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아크 램프의 탄소, 산수소 취관의 석회, 태양광 등을 적외선 방사에 의한 간섭, 색 편광, 경로의 길이에 따른 분광 등을 이용하는 것이 당시에 그들이 사용했던 연구 방법이었다. 그리고 1845년에 다게레오 타입의 은판 사진술을 이용해 태양의 자세한 사진을 찍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다가 1847년에 태양광이 간섭을 일으키는 파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빛의 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장치의 개발을 지휘했다. 그 결과 피조-푸코 장치를 만들었고, 그것을 이용해 1850년 피조-푸코 실험으로 알려진 빛의 속도를 측정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이 실험을 통해 물속에서의 빛의 속도를 측정하여 그것이 공기 중에서보다 늦다는 것, 즉 빛의 속도는 매질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실증하였고 이를 토대로 빛의 파동설을 확립하였다. 하지만 이 이후에는 피조와 결별하고 각자 독립적인 연구를 이어나갔다.

1851년, 그는 축에 따른 지구의 자전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파리의 판테온의 지붕에 매우 길고 무거운 진자를 매달아서 진동시켰다. 이 실험은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푸코의 진자라는 이름으로 유럽과 미국 등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또한 1852년에 이를 좀 더 단순한 실험으로 증명할 수 있는 자이로스코프를 발명했다. 푸코는 이와 같은 업적으로 1855년에 왕립 학회로부터 당대 최고 권위의 상인 코플리 상(‘매우 주목할 만한 실험적 연구’ 부문)을 수여받았다.

1855년 9월, 그는 구리 원판이 돌아갈 때 필요한 힘이, 원판의 가장자리가 자석의 두 극 사이에서 돌아가도록 되어 있을 때 더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때 이 원판은 금속에 유도된 와전류로 인해 가열된다. 이 전류는 다른 말로 푸코 전류라고도 불린다.

1857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편광판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를 이용해 반사망원경의 반사경을 검사하는 방법인 푸코 테스트(푸코 나이프엣지 테스트)를 만들었다. 그는 이 방법을 '파리 천문대 연보'에 발표했고, 그 결과 1860년대부터 영국에서는 다수의 많은 아마추어가 은도금 유리 거울을 제작하게 되었다.

1862년, 그는 찰스 휘트스톤의 회전하는 거울을 이용해 빛의 속도를 측정해 298,000 km/s라는 값을 얻었다. 이는 현대에 측정된 값과의 오차가 거의 나지 않는 아주 정밀한 값이었다.

그는 나폴레옹 3세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고, 파리 천문대의 경도국 관리자가 되었다. 또한 1864년에 그는 왕립 학회의 회원이 되었고, 이듬해에 공학 부문 기구의 회원이 되었다. 1865년에 그는 제임스 와트의 거버너가 등장함에 따라, 회전 상수의 주기에 대한 관찰과 전기광을 조절하는 장치에 대한 논문의 수정을 마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그는 망원경 렌즈의 표면에 반투명한 은 박막을 증착시키는 방법을 통해 태양을 눈의 손상 없이 관찰하는 방법을 선보였다. 그의 최종 논문은 파리 과학 학회지 (1847년~1869년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68년 2월 11일에 그는 다발성 경화증으로 인한 뇌 질환으로 파리에서 사망했다. 현재 그는 몽마르트 묘지에 안장되었다.1986년 - 미국 작가 프랭크 허버트



1994년 -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파울 파이어아벤트

2000년 - 프랑스의 영화 감독, 영화 제작자, 극작가, 작가, 배우, 언론인 로제 바딤

2010년 -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

2012년 - 미국의 가수 휘트니 휴스턴

2013년 - 대한민국의 가수 임윤택

2016년 - 미국의 종합격투기선수 케빈 랜들맨

2017년 - 일본의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

2017년 - 브라질의 농구선수 파브 멜루

2018년 - 미국의 가수 빅 다몬

2019년 - 아프기니스탄의 정치가 시브가툴라 모자데디

 

기념일

일본의 건국기념의 날: 진무천황이 내려왔다는 날에서 유래함.

발명가의 날: 미국

112 데이: 유럽 연합

건국일: 바티칸 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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