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2월 10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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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258년 - 바그다드가 몽골 제국에 함락되고 압바스 왕조가 멸망하다.

1763년 - 7년 전쟁 종결을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파리 조약 체결

1948년 - 백범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반대 성명을 발표하다.

1948년 2월 10일 김구(1876~1949)가 발표한 「3000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구는 황해도 출신으로 3⋅1 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하여 주석이 되었다. 1945년 8⋅15해방으로 귀국하였으나 임시 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1945년 12월 한국 독립당 위원장으로 반탁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부터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김구는 1948년 1월 28일 한국의 총선거를 위하여 내한한 ‘국제 연합(UN) 한국위원단’에게 통일된 완전 자주 정부 수립이라는, 남북한 통일 정부 수립에 관한 6개 항을 제출하였다. 주된 내용은 각각 남쪽과 북쪽을 점령하고 있는 미군과 소련군이 동시에 철수하고, 선거를 통한 통일 정부가 세워지기 전까지 UN이 임시로 치안을 담당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던 이승만(1875~1965) 측은 김구의 방안이 소련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자 김구는 1948년 2월 10일 자신의 생각을 절절히 드러내는 「3000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하였다.

이에 앞서 1948년 2월 4일 김구는 김규식(1881~1950)과 함께 단정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지도자끼리 협상하기로 약속하였다. 3월 12일 김구⋅김규식⋅조소앙(1887~1959) 등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3월 25일 북측이 남북지도자 회합을 수용하였고, 북측 대표인 김두봉(188~1960)과 김일성(1912~1994), 남측 대표인 김구와 김규식의 회합이 약속되었다.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은 4월 19일에서 23일 사이에 열린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와 26일에서 30일 사이에 열린 ‘4김 회담’으로도 불리는 ‘남북요인회담’ 및 ‘남북조선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 우리가 부르는 남북협상은 후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전자에서는 협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김규식은 전자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고, 김구 등 남한의 우익인사들은 대체로 전자에는 형식적으로 참여했을 뿐이었다. 남북협상에서 남북 지도자들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이나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한다고 결의하였다. 그리고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한 뒤 전 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고, 직접 비밀투표로 통일된 민주 정부를 수립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그러나 남북협상에서 도달된 합의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9월 9일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었고,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김구, ‘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성명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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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동포에게 읍고함.
친애하는 삼천만 자매형제여! 우리를 싸고 움직이는 국내외 정세는 위기에 임하였다. 제2차대전에 있어서 동맹국은 민주와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천만의 생영을 희생하여서 최후의 승리를 전취하였다. 그러나 그 전쟁이 끝나자마자 이 세계는 다시 두 개로 갈리어졌다. 이로 인하여 제3차전쟁은 되고 있다. 보라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는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들을 다시 만난 어머니는 그 남편과 그 아들을 또 다시 전장으로 보내지 아니하면 아니될 운명이 찾아오고 있지 아니한가? 인류의 양심을 가진 자라면 누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바랄 것이냐? 과거에 있어서 전쟁을 애호하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군밖에 없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 강도 일본 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저희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남북에서 외력에 아부하는 자만은 혹왈 남침 오 북벌하면서 막연하게 전쟁을 숙망(오래된 희망-宿望)하고 있지만은 실지에 있어서는 아직 그 실현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발발된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는 동시에 동족의 피를 흘려서 적(오래된 적-敵)을 살릴 것밖에 아무 것도 아니될 것이다. 이로서 그들은 새 상전의 투지를 북돋을 것이요 옛 상전의 귀여움을 다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전쟁이 난다 할지라도 저희들의 자질만은 징병도 징용도 면제될 것으로 믿을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왜정 하에서도 그들에게는 그러한 은전(나라의 혜택-恩典)이 있었던 까닭이다.


한국은 일본과 수십년 동안 계속하여 혈투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전쟁하는 동맹국이 승리할 때에 우리도 자유롭고 행복스럽게 날을 보낼줄 알았다. 그러나 왜인은 도리어 환소(기쁘게 웃는-歡笑)중에 경쾌히 날을 보내고 있으되 우리 한인은 공포(무서움-恐怖)중에서 죄인과 같이 날을 보내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말이라면 우리를 배은망덕(남에게 입은 덕을 잊고 배반함-背恩忘德)하는 자라고 질책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신문기자 리챠드의 입에서 나온 데야 어찌 공정한 말이라 아니 하겠는냐? 우리가 기다리던 해방은 우리 국토를 양분하였으며 앞으로는 그것을 영원히 양국 영토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의 해방이란 사전상에 새 해석을 올리지 아니하면 아니되게 되었다.


유엔은 이러한 불합리한 것을 시정하여서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며 전쟁의 위기를 방지하여서 세계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유엔은 한국에 대하여도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 위원단은 신탁없는 내정간섭없는 조건하에 그들의 공평한 감시로서 우리들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하여 남북통일의 완전 자주독립의 정부를 수립할 것과 미소양군을 철퇴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제 불행히 소련의 보이코트로써 그 위원단의 사무진행에 방해가 불무하다. 그 위원단은 유엔의 위신을 가강(더욱 강력하고 완강함-加强)하여서 세계평화 수립을 순리(이익을 쫓음-順利)하게 진전시키기 위하여 또는 그 위원 제공(점잖은 여러분-諸公)들의 혁혁한 업적을 한국독립운동사상에 남기므로써 한인은 물론 일체 약소민족간에 있어서 영원한 은의(은혜로운 정의-恩誼)를 맺기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만일 자기네의 노력이 그 목적을 관철하기에 부족할 때에는 유엔 전체의 역량을 발동하여서라도 기어이 성공할 것을 삼척동자(철모르는 어린이-三尺童子)라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와 같이 서광이 비치고 있는 것이다. 미군주둔 연장(延長)을 자기네의 생명연장으로 인식하는 무지 몰각한 도배(배반의무리-徒背)들은 국가 민족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도 아니하고 박테리아가 태양을 싫어함이나 다름이 없이 통일정부수립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유언비어를 조출(造出)하여서 단선 군정의 노선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유엔위원단을 미혹(헷갈리게-迷惑)케 하기에 전심전력을 경주하고 있다.”

미군정의 卵境下에서 육성된 그들은 경찰을 종용하여서 선거를 독점하도록 배치하고 인민의 자유를 유린하고 있다. 그래도 그들은 태연스럽게도 현실을 투철히 인식하고 장래를 明察하는 선각자로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각자는 매국 매족의 一進會式 선각자일 것이다. 왜적이 한국을 병합하던 당시의 국제정세는 합병을 면치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애국지사들이 생명을 賭하여 반항하였지만 합병은 필경 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 현실을 파악한 일진회는 동경까지 가서 합병을 請願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자들은 영원히 매국적이 되고 선각자가 되지 못한 것이다. 설령 유엔위원단이 금일의 군정을 꿈꾸는 그들의 원대로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다면 이로서 한국의 寃情은 다시 호소할 곳이 없을 것이다. 유엔위원단 諸公은 한인과 영원히 不解의 怨을 맺을 것이오 한국 분할을 영원히 공고히 만든 새 일진회는 자손만대의 죄인이 될 것이다.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나 자기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민족을 死坑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여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와 같은 원칙은 우리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서 瞬息萬變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혹은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중국 蔣主席의 이른 바 ‘不變으로 應萬變’이라는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바와 같이 우리는 통일정부가 가망없다고 단독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자기위안을 받으려하는 것은 軍政廳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邪恩忘念은 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독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삼천만 자매형제여!
우리가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하려면 먼저 국제의 동정을 쟁취하여야 할 것이오 이것을 쟁취하려면 전민족의 공고한 단결로써 그들에게 정당한 인식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미군정의 앞잡이로 인정을 받은 한민당의 영도하에 있는 소위 臨協은 나의 의견에 대하여 大口小怪한 듯이 비애국적 비신사적 태도로서 원칙도 없고 조리도 없이 詬辱만 가하였다. 한민당의 후설이 되어 있는 ○○○○는 ×××란 여자의 이름까지 빌어가지고 나를 모욕하였다. 일찍이 趙素昻 嚴恒燮 양씨가 수도청에 구인되었다고 虛言을 造出하던 그 신문은 이번에 또 ‘애국단체가 제출한 건의를 김구씨 同意表明’이라는 제목으로써 허언을 造出하였다. 이와 같은 비열한 행위는 도리어 애국동포들의 분노를 야기하여 각 방면에서 시비의 聲恨이 높았다. 이리하여 내가 바라던 단결은 실현도 되기 전에 혼란만 더 커졌을 뿐이다.


시비가 없는 사회에는 改良이 없고 진보가 없는 법이니 여론이 환기됨을 방지할 바이 아니나 千載一遇의 호기를 만나서 원방에서 來監한 귀빈을 맞아가지고 우리 국가민족의 운명을 결정하려는 이 순간에 있어서 이것이 우리의 취할 바 행동은 아니다.


일절 내부투쟁은 정지하자! 小不忍이면 亂大謀라 하였으니 우리는 과거를 잊어버리고 용감하게 참아보자.

삼천만 자매형제여!
한국이 있어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자주독립적 통일정부를 수립하려 하는 이때에 있어서 어찌 개인이나 자기의 집단의 사리사욕에 탐하여 국가민족의 百年大計를 그르칠 자가 있으랴? 우리는 과거를 한 번 잊어버려 보자. 甲은 乙을 乙은 甲을 의심하지 말며 唾罵하지 말고 피차에 진지한 애국심에 호소해 보자!
암살과 파괴와 파공은 外軍의 철퇴를 지연시키며 조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결과를 조출할 것 뿐이다. 계속한 투쟁을 중지하고 관대한 온정으로 임해 보자!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有 3인 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 금일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물을 탐내며 영예을 탐낼 것이냐? 더구나 외군군청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냐 내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主持하는 것도 일체가 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내가 국가민족의 이익을 위하여는 일신이나 일당의 이익에 구애되지 아니할 것이오 오직 전민족의 단결을 위하여서는 삼천만 동포와 공동분투할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는 누가 나를 모욕하였다 하여 염두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


나는 이번에 마하트마 간디에게서도 배운 바가 있다. 그는 자기를 저격한 흉한을 용서할 것을 운명하는 그 순간에 있어서도 잊지 아니하고 손을 자기 이마에 대었다 한다. 내가 사형언도를 당해본 일도 있고 저격을 당해본 일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 있어서는 나의 원수를 용서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것을 지금도 부끄러워한다. 현시에 있어서 나의 단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을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의 달성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安逸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 도는 怨卑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런 용모가 내앞에 나타나는 것도 같았다. 삼천만동포 자매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눌러 막음-抑塞)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이루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번 더 심사(深思)하라.


1951년 - 거창양민학살사건 발생.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은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한국군에 의해 일어난 민간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공비 소탕 명목으로 500여명을 박산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6·25 전쟁 후 지리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 소탕을 위하여 주둔하였던 대한민국 국군 제11사단 제9연대 연대장 오익경 대령, 제3대대 대대장 한동석 소령의 작전에 의하여 감행된 민간인 학살 범죄로, 동년 3월 29일 동군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의 보고로 공개되었다. 동년 2월 11일 동대대장 직접 지휘로 부락민을 신원초등학교에 집합하게 한 후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500여명을(한동석 소령이 공비들과 내통한 자 187명 학살했다고 보고했다.) 박산에서 총살하였다.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국회 조사 결과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내무·법무·국방의 3부 장관이 사임하였으며, 김종원·오익경·한동석·이종배 등 사건 주모자들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되지 않아 모두 특사로 석방되었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유족 70여 명이 보복책으로 당시의 면장 박영보를 끌어다 생화장 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1963년 - 규슈 북부 5개시(고쿠라 시,모지 시,도바타 시,야하타 시,와카마쓰 시)통합.이로 인해 기타큐슈 시가 발족된다.

1992년 - 대한민국이 우크라이나와 수교하다.

2008년 - 국보 제1호 숭례문이 방화로 전소되다.

붕괴하는 숭례문

숭례문 방화 사건은 2008년 2월 10일부터 2월 11일에 걸쳐 서울의 숭례문이 방화로 인해 전소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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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범은 채종기(당시 69세, 경북 칠곡 출신)로 밝혀져 구속 수감되었다. 화재는 2008년 2월 10일 20시 40분 전후에 발생하여 다음날인 2008년 2월 11일 0시 40분경 숭례문의 누각 2층 지붕이 붕괴하였고 이어 1층에도 불이 붙어 화재 5시간 만인 1시 54분 석축을 제외한 건물이 모두 붕괴되었다.그이후관리소장들은 각문화재단청에CCTV을달았다.

2008년 2월 10일 20시 40분경, 채종기가 시너를 부은 다음 라이터로 불을 붙여서 일어난 불이 흰 연기와 함께 숭례문 2층에서 발생하여 소방 당국은 신고를 받고 소방차 32대, 소방관 128명을 현장에 출동시켜 불씨를 제거하고자 건물 일부를 잘라내고 물과 소화 약제를 뿌리며 화재 진압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2월 11일, 0시 25분경,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휩싸이고 화재 4시간 만에 0시 58분경 지붕 뒷면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곧 2층이 붕괴되었다. 이어 바로 1층에 불이 붙어 새벽 1시 54분 누각을 친는만 남긴 채 모두 붕괴되어 발화 5시간 만에 2층 문루는 90%, 1층 문루는 10%가 소실 되었다.

방화 발화 위치

2008년 2월 11일, 1시 54분경 1층 문루의 10%가 훼손됐고, 2층 문루의 90% 가량이 훼손되었다.

화재 진압 중이던 오후 11시 5분쯤 숭례문에 걸려있던 현판은 소방관들이 톱으로 현판을 떼어내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화재로 인한 열기로 약간 뒤틀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현판 절단시에 예상외로 무거운 현판을 받칠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대책 없이 지면으로 떨어졌는데, 이때 받은 충격으로 현판 전체에 크고작은 금이 가고 일부 파편이 유실되는 등 심하게 손상되었다.


현판 해체 작업을 담당한 소방관은 불이 2층 누각으로 번지기 시작하자 현판에 대한 우려가 들어 동료와 상의 후 지휘관에 보고, 직접 현판해체에 나섰다. 그는 해체하려는 순간 현판의 균형이 무너져 이를 힘으로 버텨보려 했으나 예상외의 큰 중량을 받치지는 못하고 현판은 그대로 1층 지붕을 타고 떨어졌으며, 밑으로 떨어뜨리는 것이 본래 의도가 아니었음을 시사했다.

처음엔 전기시설의 누전 등으로 인한 화재라고 보도되었으나 화재 발화점인 2층에는 전기시설이 없었고 1층에 있었던 전기시설은 정상이었다고 수정보도되었다. 이에 이어 숭례문에 5~60대로 보이는 흰머리의 남성이 흰색 항공점퍼 상의를 입고 가방을 메고서 휴대용 철제 사다리를 타고 철장을 넘어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의 진술이 이어져 사건의 원인이 방화로 추정된다고 정정 보도되었다. 또, 화재를 신고한 택시기사가 50대로 보이는 남성이 쇼핑백을 들고 숭례문에 올라간 지 1~2분이 지나자 불꽃과 함께 연기가 솟아올랐다는 제보도 있었다. 버스에서 상황을 목격한 첫 번째 목격자는 용의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고 했지만, 두 번째 택시기사 목격자는 쇼핑백을 들고 있다고 하여 증언이 조금씩 엇갈렸다. 하지만, 양쪽 다 노숙자 행색이라는 점과, 추정 나이대가 비슷한 것으로 볼 때, 동일인물일 가능성 또한 높다고 알려졌다. 경찰은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2008년 2월 11일 오전 10시에 첫 공식 브리핑을 발표하였고, 수사가 진전됨에 따라 추가로 숭례문 방화 사건과 관련된 공식 브리핑을 열었다.

한편, 경찰은 숭례문 1층에서 일회용 라이터 2개가 발견됐다고 11일 발표했다. 다만, 이 라이터가 화재 사고와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소방당국에서는 발화지점으로 추정되는 나무기둥 아래에서 일회용 라이터 2개와 불에 탄 나뭇조각 등을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합동수사본부는 동년 2월 11일 인천 강화군 하점면에서 69세의 방화 용의자 채종기(1939년, 대한민국 경상북도 칠곡군)를 붙잡아 수사에 들어갔다. 그는 목격자들의 증언과 비슷한 인상착의(옷, 가방 등)를 하고 있었으며 그의 자택에서 진술과 동일한 종류의 사다리, 의류, 시너 1병을 발견하고 유력 용의자로 지목, 구류 및 추궁에 들어갔다. 그는 2006년 4월에도 창경궁 문정전에 방화하여 400만원 상당의 피해를 입히고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2월 12일, 채종기는 범행을 시인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 보상문제에 불만을 품어 범행을 자행했으며, 2006년 창경궁 방화 때와 같은 동기로 밝혀졌다. 경찰은 용의자의 범행자백을 토대로 증거확인 작업에 나섰다.

그리고 채종기가 지난 2006년에 작성한 '오죽하면 이런 짓을 했겠는가'라는 제목의 편지에는 본인이 창경궁에 놀러 갔으며 그곳에서 우연히 불이 났는데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로 방화범으로 몰렸고, 방화범으로 몰리면 어쩔 수 없으니, 거짓 자백을 하라는 변호사의 말에 따라 거짓 자백을 하였고, 또 공탁금을 500만원을 걸었는데 국가에서는 오히려 1500만원의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며, 내 자식이라도 내가 범인이 아니라고 믿어줬으면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런 억울한 누명을 써서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고 그는 진술했다.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2월 13일 대한민국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채종기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2월 14일, 경찰은 채종기의 신발에서 숭례문에 칠해져 있는 것과 동일한 성분의 시료를 채취, 이를 결정적 증거로 보고 혐의 사실의 입증을 확신했다. 경찰은 전날 확보한 당일 감시 카메라 녹화 영상에서 채종기의 모습을 확인했으며, 이것이 그의 증언과 일치한다는 점 또한 증거로 내놓고 있다.

10월 9일, 대법원은 채종기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하였다.

화재 다음날, 경찰들이 숭례문 주변을 지키고 있다.

화재로 붕괴한 국보 1호 숭례문의 원형 복원에는 2~3년가량이 걸리며 예산은 200억 원 정도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숭례문의 주요 부분들이 불에 탔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 재현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의 하나로 2006년 숭례문의 실측 도면을 작성해두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원형 복원은 가능한 상황이다. 복원 사업은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서울특별시 중구청 주도로 진행될 예정이다. 숭례문은 한국 전쟁으로 말미암은 피해를 복원하고자 지난 1961년~1963년 한차례 대규모 해체, 보수공사를 거친 바 있으며 이후에는 소규모 정비공사가 진행됐다. 문화재청은 일제강점기에 숭례문 양측의 성벽이 잘라내어져 성곽 문루가 당당한 모습을 잃어버린 채 고립됐다며 이번 복원 과정에서 숭례문에 양 날개의 성벽을 달아주는 방안과 원래보다 약 1.5m 정도 올라와 있는 지표를 원상으로 회복시키는 일을 서울시와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상, 복원에 쓸 수 있는 대형 대한민국산 금강 소나무의 확보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며, 이를 안전히 사용하기 위해 건조하는 데만도 3년이 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최소기한을 5년으로 보고 있다. 잔해상태의 확인과 이의 재활용 여부, 그리고 건축에 사용된 나무의 수령과 재질, 사용연장 등의 조사에도 장기간 소요되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당장의 추가붕괴와 훼손을 막기 위해 덧집을 씌우는 것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문화재청은 2008년 8월 15일 복구현장을 공개했고, 2013년 4월 29일 복원 사업을 마쳤으며, 2013년 5월 4일에 완공식과 함께 복원된 숭례문을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했다.

또한, 문화재청은 옛 성곽자리를 그림으로도 복원하겠다고 밝히며 도로위에 옛 성곽자리를 표시했다.

2월 12일부터 중구청에 의해 숭례문 주위에 6m 높이의 임시 가림막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2월 13일에는 15m 높이의 이중 가림막이 설치되었다. 높이가 12.5m인 숭례문 주위에 15m의 가림막이 추가로 설치되어, 인근 고층 건물에 오르지 않고서는 숭례문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치부(사고 현장)를 감추기만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쇄도하자 중구청에서는 강화 플라스틱 소재로 제작된 투명한 판넬로 가림막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관람창을 여러 개 만들어두어 시민들이 관람창 사이로 불타버린 숭례문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여론을 반영해 3개월 후인 2008년 5월 경에는 가림막을 제거, 낮은 울타리를 설치한 후 복원과정을 공개하기로 했다. 단, 복원작업 중 비바람을 맞아 추가붕괴 위험이 생기지 않도록 안전 덮개를 씌우기로 했다.

숭례문 화재를 진압하는 데 5시간 이상이 소요되면서 화재 초기 소방 당국과 문화재청의 대처가 문제가 있었다는 논란이 있다. 또한, 숭례문 내에 배치된 소화기가 1,2층에 나눠 배치되고 상수도 소화전이 설치된 것과 사설 경비 업체의 무인 경보 시스템에 의존하였으며, 화재 감지기, 경보 설비 등은 전혀 없었다는 점도 화재 예방의 취약점으로 드러났다. 소방당국은 초기 진화 과정에서 숭례문이 국보 1호라는 점을 고려해서 신중한 진압작업을 펼쳤으나 정확한 발화지점을 찾지 못하고 소화 약재를 뿌리는 등 결국 초기 진압에 실패했다.

또한 숭례문의 문화재 보험금이 9500만 원밖에 되지 않아, 개방을 했음에도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석고대죄하는 시민

숭례문 화재와 관련하여 책임 논란들이 있었다. 방화범을 제외하고 숭례문 화재에서 숭례문을 개방한 서울특별시청과 중구청(지자체)에 대한 책임론이 대두되었다. 2004년 5월 27일 당시 서울시장이던 이명박은 숭례문 개방을 공약하였으며 문화재청의 부정적 견해를 무시하고 공사를 해 2006년 6월 28일 숭례문의 홍예문까지 개방하여 일반 시민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하였다. 이러한 숭례문 개방 사업은 청계천 복원사업과 함께 중요 치적으로 선전되었다. 이후 주간에는 근무자가 경비하였으나 2008년 초부터는 무선용역경비 업체인 KT텔레캅이 경비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방화범이 접근이 용이하게 하였다는 화근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5년부터는 삼성 에스원에게 유료로 맡겨오다가, 예산절감을 이유로 2008년 1월 문화재 지킴이 캠페인으로 무료경비를 자처한 KT텔레캅측으로 경비를 넘기며 경비인원과 경비재 및 경비횟수가 대폭 감소했다.

한편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2월 12일 국무회의 전 인터뷰에서 "파괴돼도 좋으니까 진화하라"고 사고 당시 소방방재청에 위임했었음을 밝혔다. 현재 문화재 관리책임은 지자체 즉 이 사건에서는 서울특별시청에 있지만 총괄적 지도 감독 및 지원은 문화재청의 책임임을 인정하였다. 결국 유홍준은 2월 1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숭례문 화재 사건을 책임을 지고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다"고 발표했다.

당시 대통령 당선자였던 이명박은 국민성금으로 숭례문을 복원하자고 제안하였으며 2008년 정부 출범 이후 국민 모금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국민에 책임을 전가하고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을 희석시키고자 강제 모금을 기획한다는 비판이 거세지자,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은 "이 당선인의 본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며 강제모금의 의도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또한 이경숙 인수위원장은 숭례문 화재가 "당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며 반성한다고 말했다.

한편 숭례문에 발생한 화재 진화에 필수적인 실측 도면이 화재 발생 2시간 후에 소방당국에 뒤늦게 전달된 것으로 드러나, 진화 과정에서의 문제점도 다수 지적되었다.


2011년 - 인도 재벌 무케시 암바니 회장이 이메일 성명을 통해 "라이벌회사가 퍼뜨린 루머로 인한 주가 하락으로 26억달러의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2014년 - 강원도 영동 지방에 이날까지 며칠간 1미터가 넘는 눈이 내렸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무성 초청으로 비공식 방문하다.

일본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마스조에 요이치가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문화

1965년 - 춘천댐이 완공되다.
 
1995년 - 황우석 연구 팀이 대한민국 최초로 복제송아지 생산에 성공하다.

2007년 - 대한민국 가수 원더걸스가 KBS 뮤직뱅크를 통해 데뷔.

2010년 -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이 중국에 0:3으로 참패를 당함. (이 사건으로 32년 동안 이어져오던 공한증이 막을 내렸다.)

 

탄생

1656년 - 프랑스의 원수 페르디낭 드 마르생.

1775년 -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

1785년 - 프랑스의 물리학자 클로드 루이 나비에.

1890년 - 러시아의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898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윤치영.

1898년 -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1902년 - 미국의 물리학자로 월터 브래튼.

1921년 - 대한민국의 군인 박양원.

1921년 - 대한민국의 군인 이한림.

1928년 - 대한민국의 군인 전재구.

1949년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양상국.

1961년 - 미국의 정치가, 언론인 조지 스테퍼노펄러스.

1966년 - 대한민국의 개그우먼 이경실. / 대한민국의 방송인 지석진.

1967년 - 미국의 배우 로라 던

1974년 - 미국의 배우 엘리자베스 뱅크스.

1975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이수근.

1978년 - 미국의 야구 선수 세드릭 바워스.

198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조여정. / 대한민국의 배우 조은지.

1984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효진.

1986년 - 콜롬비아의 축구 선수 라다멜 팔카오

1987년 - 대한민국의 레이싱모델 전예희.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시원 (슈퍼주니어).

1988년 - 대한민국의 쇼트트랙 선수 강윤미.

1989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정산 / 노르웨이의 축구 선수 잉빌 이삭센.

1990년 - 대한민국의 가수, 배우 수영 (소녀시대)

1991년 - 대한민국의 가수 록현 (백퍼센트).

1994년 - 대한민국의 가수 손나은 (에이핑크). / 대한민국의 가수 슬기 (레드벨벳).

1995년 - 일본의 배우, 패션 모델 가와구치 하루나. / 기니의 축구선수 나비 케이타

1996년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황대인.

1997년 - 미국의 배우 클로이 그레이스 머레츠.

2002년 - 일본의 가수 오제키 마이 (컨트리걸즈)

 

사망

1829년 - 252대 로마 교황 레오 12세.

1837년 - 러시아 소설가 알렉산드르 푸시킨.

1923년 - 독일의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1939년 - 259대 로마 교황 교황 비오 11세.

1957년 - 미국의 작가, 《초원의 집》의 원작자 로라 잉걸스 와일더

1961년 - 체코의 작가 야쿠프 데믈.

1970년 -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 김활란.

1974년 - 대한민국의 극작가 유치진.

1976년 -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정국진.

1983년 - 대한민국의 군인 이종찬.

1998년 - 프랑스의 정치가, 언론인 모리스 쉬망.

2000년 - 미국의 배우 짐 바니

2002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정희택.

2005년 -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

2016년 -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정병탁.

2019년 - 대한민국의 공무원 추경석.

2019년 - 미국의 영화배우 잔 마이클 빈센트.

 

기념일

한국의 설날 - 2013년: 2월 8일 ~ 2월 13일

문화재 방재의 날: 대한민국 문화재청

성바울 난파축제(Feast of St. Paul's Shipwreck): AD 60년 사도 바울이 탄 배가 난파되어 몰타에 온 것을 기념하는 날, 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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