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월 31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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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314년 -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교황 멜키아데를 계승하다.

1504년 - 프랑스가 나폴리를 아라곤 왕국에 할양하다.

1578년 - 젬블루 전투가 발발하다.

1606년 - 화약음모사건의 주모자 가이 포크스가 제임스 1세와 영국 의회에 대한 반역혐의로 처형되다.

1747년 - 런던의 록병원에서 세계 최초로 성병(venereal diseases)진료가 시작되다.

 


1801년 - 존 마셜이 연방 대법원장에 임명되다.

1812년 - 조선 평안도 가산군에서 홍경래의 난 발발. (음력으로는 1811년)

이미지출처 줌 학습백과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인 역량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분위기가 확산되어 갔다. 교육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지식인이 양산되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사로서 입신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짐에 따라 정부에서는 문무 과거의 급제자를 크게 늘렸지만, 종래의 관직 체제와 인재 등용 방식으로는 더 이상 그들을 포섭할 수 없어 불만 세력은 점점 늘어났다. 특히 평안도는 활발한 상업 활동을 바탕으로 빠른 경제 발전과 역동적인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중앙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 되었고 지역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로는 조선 시대에 서북인을 일반적으로 문무 고관에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격문에서 홍경래는 “임진왜란 때 재조의 공이 있었고, 종묘의 변에는 양무공(정봉수)과 같은 충신이 있었다. 돈암(선우협)·월포(홍경우)와 같은 재사가 나도 조정에서 이를 돌보지 않고, 심지어는 권문세가의 노비까지 서북인을 평한이라고 멸시하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완급의 경우에는 서북인의 힘을 빌리면서도 4백 년 동안 조정에서 입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하였다.

조선에서 사실상 서북인을 중요한 자리에 임용하지 않았으나 이것이 정책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선조 때 이이가 서북인의 수재(지방관)가 되는 자가 적으므로 지방 인재의 등용을 상책한 것은 이를 증명한다. 다만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는 서북인의 불평불만을 이용하여 거사의 첫 조건으로 내세워 민심을 얻기로 꾀하였던 것이라고 하겠다.

다른 기록에 보면 사마시에 실패한 뒤 그 급제한 자를 보니 모두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당시 과거 제도도 크게 부패하여 권문세가의 자제는 무학둔재라도 급제의 영예를 차지하고 그렇지 못한 자는 쉽게 성공할 수 없으며, 특히 평안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있으니, 이것이 홍경래로 하여금 개조범상의 뜻을 굳게 하였다고 하였다.

홍경래가 뜻을 결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당시의 국정에 비위가 거슬린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각지의 부호·명사들을 농락하면서 기회를 보았을 것이다. 그는 가산에 있는 재략이 풍부하고 풍수복좌를 업으로 하는 우군칙, 가신의 역속이며 졸지의 부호로 무과에 급제한 이희저, 문재가 뛰어난 곽산의 진사 김창시 등을 심복으로 하여 거사에 참여시켰으며, 태천의 김사용, 곽산의 홍총각, 개천의 이제초 등으로 지휘부를 구성하고 그 밑에 평양의 양시위, 영변의 김운룡 등을 비롯한 장사들을 모두 선봉장 겸 군사 지도자로 하였다. 이 장사들은 주로 홍경래의 조직활동에 의해 봉기의 인근 지역뿐 아니라 멀리 평안도 남부 및 황해도로부터 모여든 인물들이었으며, 봉기 당시 30∼40명 가량이 적극적으로 항쟁하였다.

박천의 김혜철, 안주의 나대곤 등 상인들도 아랫사람들을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상인들은 특히 봉기 준비 단계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군졸을 모으는 데 절대적인 성과를 올렸다. 주도 세력은 또한 철산의 정경행, 선천의 유문제 등 청천강 이북 각처의 권력을 쥐고 있는 명망가들과 행정 실무자들을 포섭하여 내응세력으로 삼았다. 그들은 봉기군을 맞아들이고 자기 지역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가산의 대령강(대령강) 인근 다복동에 비밀 군사 기지를 세워 내응세력을 포섭하고, 거사하기 전부터 이곳에 옮겨와 금광 채굴을 구실로 유민을 꾀어 장정 일꾼을 모아들였다.

이리하여 준비를 하면서 기회를 보다가 1811년(순조 11년)에 종래에 없었던 큰 흉년이 들게 되어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궁민을 끌어들여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칭하고, 우군칙을 참모로 한 본대는 가산·박천을 함락시킨 후 한양으로 남진케 하고, 1대는 김사용을 부원수, 김창시를 참모, 박성간을 병참장으로 하여 곽산·정주를 점령하고, 선천의 이서의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안주를 공략할 방책으로 거병하였다.

1811년 음력 12월 18일(양력 1812년 1월 31일) 삼경에 이희저의 일대가 가산군청을 습격하여 군수 정저와 그의 아버지 정노를 죽이고, 군청을 점령하고 난을 일으켰다. 봉기는 한때 정주성을 중심으로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가 평서대원수로서 본대를 지휘하여 안주군 방면으로 진격하고, 김사용은 부원수로서 의주 방면을 공략하고, 김창시와 우군칙이 모사, 이제초는 북진군 선봉장, 홍총각은 남진군 선봉장, 이희저는 도총을 맡았다. 결약을 맺어 서명한 인원에서 자의가 아니었던 자들을 제외하면 봉기 당시 군사 지휘자와 주요 내응자는 약 60명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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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군졸은 상인들이 운산의 금광에서 일할 광부들을 구한다는 구실로 임금을 주어 끌어들인 인물들로서, 대개 가산·박천 지역의 땅없는 농민이나 임금노동자들로 구성되었다. 봉기군 본대는 가산군과 박천·태천을 별다른 저항 없이 즉시 점령하였고, 북진군도 곽산·정주를 점령한 후 어려움 없이 선천·철산을 거쳐 이듬해 2월 15일(음력 1월 3일)에는 용천을 점령함으로써 의주를 위협하였다. 점령한 읍에는 해당 지역의 토호·관속을 유진장으로 임명하여 수령을 대신하게 하였고 기존의 행정 체계와 관속을 이용하여 군졸을 징발하고 군량·군비를 조달하였다.

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의 여러 읍에서 기세를 올렸으나 요해처인 영변에서 내응세력이 발각되어 처형되고 경계태세가 정비됨으로써 병영이 있는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는 어려움에 빠지고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다.

홍경래군은 남하하는 제1관문인 안주를 공략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와 목사 조종영이 필사의 각오로 천여 명의 병사를 모아 2대로 나누어 음력 12월 29일에 송림리의 홍경래군을 공격하였으며, 곽산 군수 이영식의 원군의 도움으로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허항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 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 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갔다.

한편 이 변보가 음력 12월 20일 평양에 전해지자 평안감사 이만수는 22일 순안의 병사를 안주로 향하게 하고, 다시 열읍의 병사를 계속 동원하게 하고, 도내의 곳곳 요새를 굳게 지키게 하며, 만일을 위하여 창의의 유생.문사를 모집하여 평양을 방비하게 하고 일부는 출정시켜 안주의 관군에 부속시켰으나 송림리 전투에서 적을 추격·섬멸치 않았다는 이유로 이만수는 파면되었다.

정부에서는 병조참판 정만석으로 양서위무사 겸 감진사에 임명하여 반란지를 위무케 하고, 난군에게 귀순을 권고하였다. 24일에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요헌으로 양서순무사에 임명하고, 박기풍을 중군으로 삼아 서적 토벌에 관한 군무를 보게 하고, 27일 선봉대로 한양을 출발하여 이듬해 음력 1월 3일 정주성 아래에 도착하였다. 이는 송림리 전투 후 5일 만이다.

이와 전후하여 곽산에서도 관군이 이겨 박천·가산을 회복하였으며, 8읍 중 정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회복하였다. 따라서 정주성은 완전히 고립하게 되었으며, 관군은 사방의 의병과 더불어 전세가 유리하였다. 그러나 홍경래군은 성을 굳게 지키고 여러 번 성 밖으로 돌격하여 나왔으나 성과를 보지 못하고 농성을 계속하였다.

이에 정부군은 땅굴을 파들어가 화약으로 성의 아래를 폭발시키고 성내로 돌입하여 함락시키니 5월 29일(음력 4월 19일)로 농성한 지 100여 일, 거병한 지 5개월 만이었다. 이때 홍경래는 총에 맞아 죽고 우군칙·홍총각 등 다수는 포로가 되어 한양으로 압송된 후 음력 5월에 참형되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842명)와 열살 이하의 남자 소년(224명)을 제외한 1,917명이 전원 처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많은 준비와 세력을 등에 업은 대규모 반란이었으나, 진행 중 몇 전투에서 패하여 기세가 수그러들자 빠르게 진압되어갔다. 이는 홍경래 세력이 같은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각자 다른 이해를 가지고 모여든 세력이었던 것이 이유이다. 처음에 성공을 거두어 기세가 강했을 때는 전력 이탈이 없었으나, 몇 번 실패를 하면서 가능성이 낮아지자 발을 빼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반란군 내부에서 분란도 있었고 도중에 홍경래가 암살 기도를 겪기도 했다.

홍경래의 계획이 일부 어그러진 것 또한 실패를 가져온 원인 중 하나다. 박종일로 하여금 한양에서 난을 일으켜 중앙의 혼란을 꾀하였으나 주살되고, 창성.강계.초산.위원 등지의 포수들의 내원을 기대하였으나, 모두 체포되었으며, 점령한 8읍이 함락되어 정주성이 고립되고, 붙들린 포수들이 정주성 공격을 도왔으며, 호병(청나라 군대)을 청하려 하였으나 부하의 번의로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사건의 관련자이며 홍경래와 통했던 채수영은 1817년(순조 17) 3월 다시 사람을 모아 순조를 폐위하고 은언군의 서자 이철득을 추대하려다가 거사 직전 가담자 박충준의 밀고로 실패하였다.

지도자들이 내세운 봉기의 이념은 세상을 구원할 정진인을 받들어 사업을 벌인다는 참위설이 가장 중요한 몫을 하였으며, 토호 관속을 향해서는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한편 토지 문제 등 사회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여 전개 과정에서 일반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지 못하고, 단지 곡식 분배 등을 통해 빈민을 불러모으는 데 그친 것이 커다란 한계였다.

홍경래의 난은 극도로 피폐한 조선 말기의 생활불안과 억울한 감정에서 오는 위정자에 대한 반항이라는 평가도 있다. 비록 정부의 힘으로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정치의 폐단이 가시지 않고 1813년(순조 13) 음력 11월에 제주도의 양제해의 음모 사건, 1816년(순조 16) 음력 10월 성천군 성천읍의 승려 학상이 홍경래의 여당이라 자칭하며 사서 표현에 의하면 흉패한 행위를 한 것 등으로 보아 홍경래 난은 일시 돌발적인 군란이나 민란에 그치지 않았다. 그 여파가 파급되어 민중의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이 되었으며 철종 때 곳곳에서 민란이 계속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951년 - 북조선의 부수상 겸 산업상 군사위원회 위원 겸 전선사령관 김책이 사령부 막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1952년 - 일본, 경찰예비대를 자위대로 개편. 일본 재무장 시작.

1955년 - 중국 국무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의 연구를 위해 중국을 원조하는 소련의 제안에 관한 결의> 채택

1961년 - 장면 대한민국 국무총리가 민주당 탈당을 하고 무소속 전향.

1968년 - 나우루 독립.

나우루 공화국(나우루어: Ripublik Naoero 리푸블리크 나오에로, 영어: Republic of Nauru)은 오세아니아의 공화국이다. 정식 명칭은 나우루 공화국이며 남태평양의 미크로네시아에 있다. 가장 가까운 섬은 동쪽으로 300 km 정도 떨어져 있는 키리바시의 바나바 섬이다. 면적 순으로는 세계에서 바티칸 시국, 모나코 다음인 세 번째로 작고, 공화국 중에서는 가장 작다. 인구 순으로는 바티칸 시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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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크로네시아와 폴리네시아인들이 처음 정착했다고 추정되며, 19세기 말에 독일 제국에 의해 합병되어 식민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나우루는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영국의 승인을 받아 국제 연맹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우루는 일본 제국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나우루는 다시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나우루는 1968년 독립을 하였다.

20세기 중반까지 나우루는 자원에 전적으로 의존한 나라였다. 나우루는 섬의 표면이 인광석으로 된 섬이어서 간단한 노천 채굴만으로도 쉽게 채굴을 할 수 있었다. 나우루는 Pacific Phosphate Company가 1907년, 처음 채굴을 시작한 이래로, 1919년 설립된 영국 인산염 위원회를 통해 인산염의 주요 수출국이 되었다. 이후, 나우루 인산염 주식회사를 통해 자원의 소유권을 돌려받았고, 1980년대에 자원이 고갈될때까지 소유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그 이유로 나우루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주권국들 가운데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나라중 하나였다. 인광석이 고갈되기 전까지 주민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인산염이 고갈되고, 무분별한 채광으로 인해 환경이 급속도로 오염되자 나우루 경제의 심각성이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돈을 벌기 위해 나우루는 조세 피난처와 불법적인 돈세탁 지역이 되기도 했다. 나우루는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 밀입국한 사람들을 수용하는 수용소를 짓는 조건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로부터 경제 원조를 받았다.

나우루의 유일한 공항은 나우루 국제공항이다. 나우루의 인광석이 모두 떨어지면서 2005년 12월, 섬과 바깥을 잇는 항공사였던 나우루 항공이 운행을 중단함에 따라 2006년 1월부터 9월까지 나우루 사람들은 오직 배를 타고서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2006년 10월, 중화민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아워 항공이란 이름으로 다시 운행을 시작했다. 현재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나우루를 주 2회 운항하고 있다.

미크로네시아와 폴리네시아 민족이 정착했다고 추정된다. 1798년에 영국인 탐험가 존 피언 선장이 나우루를 서양인으로서는 가장 최초로 발견했다. 1888년 독일령이 되었다. 1900년경 영국인이 이 섬의 최대 자원인 양질의 인광석을 발견해 1906년에 영·독 합자회사에 의해 그 채굴이 시작되었다. 1914년 호주군에 점령되었고, 1920년에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엔 일본군의 점령하에 있다가, 전후 1947년에 영국·호주·뉴질랜드 3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다. 그 뒤 원주민 사이에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어, 1966년 입법평의회를 설치하고, 1968년 1월 31일에 독립하였다. 독립한 즉시, 영국연방에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였고, 2000년에는 정회원이 되었다. 하지만 다시 2005년 7월 1일에 특별회원이 되었다. 2009년 12월 15일에 압하스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17일에는 남오세티야의 독립도 승인했다. 이 뒤에는 나우루가 압하스 공화국과 남오세티야를 인정해주는 대신, 러시아가 나우루에 돈을 대준 것이 밝혀졌다.

하나의 섬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지형이 평탄하여 최고점이 70m를 넘지 않으며 남서부에 부아다 호가 있다. 주요 자원이었던 인광석의 채취에 따른 자원 고갈로 섬 전체의 생태계가 황폐화되어 있다.

나라가 매우 작아 법률로 정해 놓은 수도는 없으나 행정 구역 가운데 가장 번화한 곳이 야렌 구이기 때문에 사실상의 수도 역할을 한다.

나우루는 대통령 중심제 나라이다. 국무 총리 제도는 없다. 또, 대통령은 18명의 호선으로 진출한다. 의회는 단원제이며 국회의원은 만 20세 이상이 되어야 선출할 수 있다. 정당은 나우루당과 민주당이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대법원과 가정법원이 있다, 국방으로서는 군대는 없고 오스트레일리아가 이를 담당한다. 이 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군부를 정치세력으로 인정하여, 삼권분립이 아닌, 사권분립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UN 미가입국이었다가 1999년 UN에 정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정치부패가 심해 독재가 시작되었다.

1980년대 초 나우루는 아랍에미리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 사는 나라였다. 나우루의 경제는 산호섬과 풍부한 인광석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다. 수요는 대부분 수입에 의존한다. 2000년대 이후 인광석의 고갈로 인하여 경제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섬에는 메넹 호텔과 OD-N-아이워(OD-N-Aiwo) 호텔이 있지만, 관광 수입은 아주 적은 편이다. 주민세는 없으며 실업률은 90%에 달한다. 나우루의 노동자 중 95%는 정부에 고용되어 있다.

이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1990년 중반부터 외국 투자자들을 유치하기 위해 관련 제도를 완화시켰는데 이 결과 나우루는 외국인들이 비밀 송금 및 페이퍼컴퍼니 설립이 난무해 결국 OECD에서 2000년에 나우루를 조세피난처로 발표했다. 이후 현재 은행들의 면허가 잇따라 취소되어 2006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은행이 문을 닫아 금융거래 자체를 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또한 1997년부터는 누구든 ‘돈만 내면’ 여권을 발급해주기까지 하였다. 이 때문에 나우루에 살지도 않는 이들에게 1000여개의 여권이 검증 없이 발급되었으며 심지어는 아제르바이잔 출생의 한 남성이 이런 방식으로 나우루 여권을 취득 후 중국 항저우에서 활동하다가 미국인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 후 약 7년동안 은행이 없다가 2013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벤디고 앤드 애들레이드'은행이 나우루에 지사를 설립하는 것을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은행 설립 비용은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서 난민 수용을 조건으로 지급하는 지원금이 사용될 것이며, 이번 은행 설립 추진으로 나우루 국민들은 다시 은행 업무 재개의 혜택을 받을 예정이다.[5]어업으로 돈을 벌려고 했지만 사람들은 해수욕을 즐겼고 결국 나우루정부는 마피아,테러리스들에게 나라를 팔았다 결국 나우루는 베네수엘라같은 비극을 맞아야 했다.

2006년 말 나우루의 인구는 9,265명이었다. 전에는 인구가 그보다 많았으나 2006년 인광석의 양이 급격히 준 것이 원인이 되어 1,500여 명에 달하는 키리바시와 투발루 출신 노동자들의 대귀환이 이루어졌다. 공용어는 나우루어이지만, 영어도 널리 쓰인다. 1968년에 제정한 현행헌법은 공용어에 대한 성문규정은 없지만, 두 언어를 함께 쓰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나우루인이 58%, 기타 태평양 섬나라의 출신이 26%, 화교가 8%, 백인이 8%이다. 모든 백인들은 독립 때 남겨진 영국인이다. 나우루 국민의 33% 정도가 개신교(회중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인인데, 로마 가톨릭의 비중(30%)도 크다. 이외에 소수인 불교, 토착 종교가 있다.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제한하기도 한다. 문해율은 96%다. 6세~15세까지 의무 교육을 시행하고 있으며 11, 12학년은 의무교육이 아니다. 남태평양 대학 캠퍼스가 나우루에 있다. 이 대학이 들어서기 전에는 오스트레일리아(호주)나 뉴질랜드로 대학교육을 위해 유학을 갔다.

나우루는 세계에서 비만율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성인의 90%는 BMI 지수가 평균 이상이다. 또한, 당뇨병 발병률이 40%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신장 질환과 심장병도 흔하다. 기대수명은 2006년 기준으로 남자 58세, 여자 65세이다.

나우루는 독일에 합병되었을 때 독일에 의해 전통 춤이 금지당한 적이 있지만 씨족 사회적 특징은 유지하고 있다. 현대문명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통적인 가부장 제도가 짙은 편이다.

대한민국과는 1979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82년에 수교하였다. 중화민국과 수교중인 나라이기도 하다.


1969년 - 천안 열차 추돌 사고

천안 열차 추돌 사고는 1969년 1월 31일에 부산을 떠나 서울을 향하던 제10 열차 청룡호가 천안역 남쪽 500m 지점에서 진입 신호를 기다리는 남원발 서울행 102호 완행 열차의 뒷 부분을 들이받아 승객 41명이 사망하고 131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2003년 -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18명이 사망하다. 이 중 다수가 미국인이었다.
 
2006년 - 경기도 용인시 등지에서 초등생 12명을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있는 일명 용인 발바리 이득재(당시 38세)를 검거하였다.
 
2007년 - 쿠바에서 카스트로의 병세가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요코 이야기》 수업이 마침내 중단되었다.

2009년 - 케냐 서부에서 주민들이 유조차에서 흘러나온 기름을 주워담던 중 화재가 발생, 최소 111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화상을 입었다.

2014년 - 전라남도 여수시 낙포동 낙포각 원유2부두에서 기름 600여톤이 유출되어 근해가 오염되었다.

 

 

문화

1996년 -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2011년 - 순천완주고속도로의 순천 ~ 서남원 구간 개통.

2017년 - 그룹 아이오아이가 공식해체 되었다.

 

탄생

877년 - 고려 1대 국왕 태조 왕건

고려 태조(877년 1월 31일 (음력 1월 14일)[3] ~ 943년 7월 4일 (음력 5월 29일)[4])는 후삼국 시대 후고구려의 장군이자 고려의 초대 황제 재위:918년 7월 25일~943년 7월 4일)이다. 성은 왕(王), 휘는 건(建), 본관은 개성(開城), 자(字)는 약천(若天), 묘호(廟號)는 태조(太祖), 시호(諡號)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이고 능호는 현릉(顯陵)이다.

송악(松嶽)의 호족 왕융과 그 부인 한씨 사이에서 877년에 태어났으며, 896년에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그의 장수가 되었다. 후백제와의 교전에서 거듭 승리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견훤의 군사를 여러 번 격파하고 906년 상주의 사화진, 909년 진도 부근의 도서와 나주를 공략하였다. 이어 충주와 청주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북도의 상주 등을 점령하여 태봉의 세력권을 넓혔으며, 나주를 공략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뱃길을 차단하여 국력을 확장시켰다. 뛰어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으며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에까지 올랐고, 918년에 궁예의 독단과 전횡을 문제삼은 여러 호족들과 배현경, 홍유 등 무장들의 지지로 거병하여 마침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세웠다.

후백제의 견훤과 세력을 다투었으며, 927년 10월 견훤이 경주를 약탈하자 출병, 공산 동수 전투에서 후백제에게 대패하였으나 고창 전투와 병산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고 패권을 잡았다. 935년에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나 투항해오자 936년 9월에 대병을 일으켜 후백제를 무너뜨렸다. 938년에 탐라를 복속시키고, 신라에 호의를 보여 경순왕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투항하였다. 경순왕에게 두 딸인 낙랑공주 와 부인 박씨를 내려주고, 정승공에 봉하였으며 토지와 경주를 식읍으로 내렸다. 또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고려 사심관제도의 시원이 되었다. 926년부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고 북방 정책을 추진하였으며, 호족가문의 딸들과의 결혼정책, 자제를 도성으로 유학시켜서 볼모로 삼는 등의 정책을 펼쳤다.


1338년 -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3대 왕 샤를 5세

1543년 - 일본 에도 막부 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

1751년 - 프랑스의 화가이자 장군 장 프랑수아 카르토

1797년 -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프란츠 슈베르트.

1902년 - 스웨덴의 정치인 알바 뮈르달.

1919년 - 미국의 야구 선수 재키 로빈슨.

1935년 - 일본의 작가 오에 겐자부로.

1937년 - 미국의 작곡가 필립 글래스.

1938년 - 네덜란드의 여왕 베아트릭스.

1939년 - 대한민국의 제15대 국회의원 국창근

1956년 - 네덜란드의 프로그래머 귀도 반 로섬

귀도 반 로섬(Guido van Rossum, 1956년 1월 31일 ~)은 네덜란드 출신의 컴퓨터 프로그래머이다. 프로그래밍 언어인 파이썬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2005년부터 2012년까지 구글에서 일했으며, 2013년부터 드롭박스에서 일하고 있다.

귀도 반 로섬은 한국어 파이썬 사용자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표기로, 네덜란드어 발음은 히도 판 로쉼(네덜란드어: [ˈɣido vɑn ˈrɔsʏm, -səm])이다. 로섬은 그의 홈페이지 에서 'Guido'를 이탈리아어식으로 "구이도"로 발음하여도 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유튜브에 공개된 2006년 7월 21일자 구글 Techtalk 에서는 자신을 귀도 판 로썸으로 소개하고 있다.

반 로섬은 네덜란드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며 1982년 암스테르담 대학에서 수학과 컴퓨터 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Wiskunde & Informatica (네덜란드 Centrum Wiskunde & Informatica) 미국 국립 표준 기술 연구소 (NIST), 메릴랜드 주 게이 더스 버그, 버지니아 주 레스톤 (Reston)에있는 CNRI (National Research Initiatives)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다.

귀도 반 로섬은 서체 디자이너이자 프로그래머 인 Just van Rossum의 형제이다. Just van Rossum은 "Python Powered"로고에 사용된 서체를 디자인했다. Guido는 그의 아내 Kim Knapp와 그의 아들 Orlijn과 함께 캘리포니아 주 벨몬트 (Belmont)에 거주한다.

귀도 반 로섬은 Stichting Mathematisch Centrum (CWI)에서 일하면서 1986년에 BSD 유닉스에 glob () 루틴을 작성하고 기고했다. 또한 Ransum은 ABC 프로그래밍 언어의 개발에 참여했으며, 나중에 ABC 언어는 또한 파이썬을 제작할 때 쓰였다.

반 로섬은 2008년 구글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파이썬의 기원에 대해 귀도 반 로섬은 199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1989년 12월, 저는 크리스마스 주중에 저의 "취미"가 될만한 프로그램을 찾고 있었습니다."
1999년, 반 로섬은 DARPA에게 Computer Programming for Everybody라는 자금 제안서를 제출하여 Python에 대한 자신의 목표를 정의했습니다.

당연히 무료이며 오픈 소스이므로 누구나 개발할 수 있습니다.

평이한 영어로 이해할 수 있는 코드, 일상적인 업무에 대한 적합성과 짧은 개발 시간등 장점을 기반으로 파이썬은 대중적인 프로그래밍 언어가 되었습니다.


1963년 - 대한민국의 소설가 공지영.

1964년 - 미국의 음악가 제프 한네만.

1967년 - 중화민국의 영화배우 왕조현.

1969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오영훈.

197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이영애.

1974년 - 대한민국의 성우 전숙경.

1979년 - 독일의 스피드스케이팅 선수 예니 볼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이지.

1980년 - 대한민국의 배우 심이영.

1981년 - 일본의 야구 선수 모리모토 히초리. / 미국의 팝·R&B 가수 저스틴 팀버레이크.

1987년 - 알제리의 축구 선수 압델무멘 자부.
 
1988년 - 독일의 축구 선수 시드니 샘

1990년 - 일본의 가수 야부 코타.

1994년 -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윤대영.

1997년 - 대한민국의 가수 미연 ((여자)아이들).

1998년 - 대한민국의 래퍼 우석 (펜타곤).

 

 

사망

1606년 - 화약음모사건의 주모자 가이 포크스.
 
1840년 -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권진이. /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박종원. /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홍병주. /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손소벽.
 
1944년 - 프랑스의 극작가, 소설가 장 지로두.

1951년 - 북조선의 군인 겸 정치인, 작곡가 김책.

1956년 - 영국의 소설가, 시인 A. A. 밀른.

1981년 - 스리랑카의 정치인 윌리엄 고팔라와.

1987년 - 대한민국의 군인 유원식.

2015년 - 독일의 제6대 대통령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2017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강봉균.

2017년 - 잉글랜드의 음악가 존 웨튼.

2018년 - 대한민국의 국악인 황병기.

2019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김만제.

 


2020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박연차.

박연차(1945년 12월 27일 ~ 2020년 1월 31일)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태광실업의 회장으로서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을 후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리, 탈세, 정관계 로비 사건 등의 의혹으로 2008년 12월 검찰의 수사를 받았다. 노무현의 둘째 형 노건평과 더불어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 관련 뇌물을 건넨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90년 2월 6일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강신욱 부장, 채동욱 검사)는 모텔 등지에서 히로뽕을 투약한 뒤 환각 상태에서 관계를 맺어 온 기업인과 연예인들을 적발한 사실을 발표했다. 박연차는 연예인 소개 주선자인 이순희로부터 KBS 탤런트 임옥경, MBC 12기 탤런트인 이순규, 김영님, 김경옥, 1985년 미스코리아 태평양화학 최은희를 소개받아 일자표연료공업(주) 대표 이정식과 함께 부산과 일본 도쿄 등을 오가며 여러차례 히로뽕을 투약한 뒤 성관계를 맺어온 혐의로 수배되었다.

1990년 2월 21일 부산지방검찰청 동부지청(민유태 검사)는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위반 혐의로 박연차를 구속했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재벌2세 마약·매춘사건'의 당사자로 방탕한 재벌 2세의 이미지로 낙인 찍혔으나, 이후 건실한 사업가로 변신하여 1997년 김영삼 정부때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박연차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에 뇌물을 제공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박연차는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정상문 청와대 총무비서관을 통해 요청을 받고 차명계좌에서 노무현의 아들 노건호와 조카사위 연철호가 동업하는 기업에 5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2020년 1월 31일에 지병인 폐암으로 타계하였다.

 

기념일

독립기념일: 나우루

한국의 설날 - 1995년, 2014년, 2033년, 20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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