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2월 1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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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02년 - 청나라, 만주족과 한족간 결혼금지령 해제

1906년 - 일제, 조선병탄 예비공작 위해 한성에 통감부 설치

통감기

통감부는 일본 제국이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대한제국 한성부에 설치했던 정치와 군사 관련 업무를 보는 관청이다. 형태는 대한제국 정부에 자문 또는 섭정을 하는 형식이었다. 한국통감부라고도 한다. 조선총독부의 모체가 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서는 대한제국 황제 밑에 일본제국 정부의 대표자로 1명의 통감을 두어, 한일의정서 이후 제한되던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통감이 지휘·감리하게 하였다.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만을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주재하도록 하였으며, 개항장 및 기타 지역에 이사관을 두어 통감 지휘 하에 일본 영사가 관장하던 일체의 직권 및 협약을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관리하게 하였다.

1905년 11월 22일에 ‘통감부 및 이사청 설치에 관한 칙령 240호’를 발포하였다. 이후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만 관리한다고 을사조약에 명시되었지만, 일본은 을사조약 이전에 한일 양국 간에 체결된 기존의 조약은 을사조약과 저촉되지 않는 한 유효하다는 조약 내용에 근거하여 외교 이외에도 종래의 양국 간의 조약 시행을 담임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하여 통감의 직권 확장을 도모하였다.

결국 이후의 관제에 따라 통감은 한국의 외교 대행자일 뿐만 아니라, “조약에 기초하여 한국에 있어서 일본 제국 관헌 및 공서가 시행하는 제반 정무를 감독하고 기타 종래 제국 관헌에 속하는 일체에 대해 감독사무를 시행" 하도록 하고, “한국정부에 용빙된 일본제국 관리를 감독”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를 통하여 한일의정서 체결 이후 한국 정부에 꾸준히 파견된 고문관에 대해 통감이 감독권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른바 고문통치를 통해 한국 내정에 관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통감부는 일본 외무성에서 독립된 일본 천황 직속의 기관으로, 통감 유고시에는 일본의 한국 주재군 사령관이 그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 주재군 사령관은 통감의 명령으로 병력을 사용할 수 있고, 긴급한 경우에는 재량으로 병력을 동원하고, 사후에 통감에게 보고하도록 규정되었다. 이처럼 통감부는 일본군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통감부 설치 초기에 고문통치를 통해 정부와 내각을 어느 정도 장악하게 되었으나, 광무 초기를 중심으로 강화된 대한제국 황제의 권한과 궁내부의 권한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일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끊임없는 불만을 드러내며 황제권에 대한 해체를 시도했고, 고종황제는 친일 내각의 붕괴를 시도하여 서로 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통감 이토는 1907년 5월 22일에 박제순 내각을 해체하고, 고종의 퇴위를 주장한 이완용을 참정대신으로 발탁했다. 나아가 6월 14일에는 갑오개혁 및 을미개혁 이후에 꾸준히 시도해오던 ‘내각 관제’를 발포했다. 일본의 내각을 모델로 한 새 관제에서 내각총리대신은 의정부의 참정대신에 비해 훨씬 더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황제권의 제한을 위한 것이었다.

곧이어 일본은 헤이그 밀사 파견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고종의 퇴위를 단행했다. 1907년 7월 19일에 고종의 황태자 대리 조칙이 발표되었고, 일제는 7월 20일에 양위식을 진행하여 대리가 아닌 양위로 몰아갔다. 이와 함께 고종과 순종의 격리, 병력의 증강 등을 통해 정국의 경색을 가져왔고, 7월 24일에는 제3차 한일협약, 이른바 정미7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정미7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고 규정하여 통감의 내정 관여를 공식화했다. 또한 행정상 처분도 통감의 승인이 필요하도록 하였으며, 한국의 고등관리 임명 동의권 등을 통감에게 부여하여, 한국 내정의 최고 감독권자로 부각시켰다. 또한 고문 통치를 대신하여, 일본인을 직접 관리로 임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른바 차관 정치의 시작이다.

또한 이완용과 이토 사이에 비밀리에 조인된 각서에서는 군대 해산과 한·일 양국인으로 구성된 재판소를 신설하는 등 국권을 순차적으로 해체시키는 데 합의하였다. 경찰권과 함께 사법권·행정권·군사권의 장악을 도모한 것이다.

대한제국 정부 조직에 일본인이 임명되면서 통감부의 조직은 크게 축소되었다. 그러나 통감부는 여전히 대한제국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고위 기구로 군림하면서, 입법·사법·행정·군사 등의 모든 분야에서 한국을 지배했다.

통감부 청사

통감부는 고종 폐위와 정미7조약 체결 등에 일본군부의 지원하에 활동하던 일진회를 이용하였으나, 의병 항쟁 등 전국적인 반일 운동이 거세지자 일진회가 반일운동의 목표로 대두되면서 부담을 느끼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완용이 권력에 핵심에 서는 것에 반발한 송병준은 이토 히로부미를 한국 병탄에 소극적이라고 비난하면서, 일본 내의 강경파나 병합 급진론자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일본 내의 강경파는 이토의 정책이 온건해 헤이그 밀사사건 등이 일어났으며, 병탄만이 이러한 상황의 대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토는 한국에는 자신이 적임자라며 정책을 고수했고, 송병준을 내부대신으로 전임하는 등의 방법을 동원했다. 그러나 우치다 료헤이 등의 지원을 받은 송병준은 내각에서 사퇴하여 본격적으로 병탄 운동을 벌이겠다고 주장하였으며, 일진회의 이완용 내각에 대한 불만도 고조되었다. 결국 일진회장 이용구는 1908년 9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의 경질과 함께 병탄을 호소하였다.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이토의 경질에 찬성해 이토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으나, 이토가 귀국한 후 정계로 복귀할 것을 우려한 총리 가쓰라 다로는 찬성파에서 이토의 유임을 주장하는 등 경질은 난항을 겪었다. 이토는 위기에 닥치자 1909년 4월 10일에 가쓰라 총리와의 회합에서 병탄의 단행에 이의가 없다고 표명하여 여론의 전환을 도모했다. 하지만 여론의 악화를 이기지 못한 이토는 6월 14일에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통감직을 넘기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결국 친일파세력인 일진회의 한국 병합 촉진 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진회는 지속적으로 한일병탄을 탄원하였으나 이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당시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의 의사를 왜곡한 것에 불과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면서 이토의 동양평화론이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거짓 평화론이라 주장하였다. 게다가 병탄 가속화시에 주도권을 잃는 것을 우려한 이완용 내각도 일진회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진회는 12월 4일에 일한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 황제와 총리대신, 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했다.

1910년 5월 30일에 일제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한국통감으로 겸임시키고, 한국 병탄을 진행시켰다. 6월 30일에는 유명무실하던 한국 경찰을 일본 한국주재군 헌병대에 통합시켜 폐지하였다. 7월 23일에 한국에 도착한 데라우치는 8월 16일에 이완용과 함께 병탄 늑약 체결을 진행시켰다. 8월 18일에는 별다른 수정 없이 병탄늑약안이 한국의 각의를 통과했고, 8월 22일에는 형식적인 어전회의에서 이완용이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같은 날 한일 병합 조약이 강제로 조인되었다. 그리고 8월 29일에 병합 조약이 공포되었다. 

역대 통감 및 부통감은 다음과 같다.


제1대 이토 히로부미 1906년 3월 2일 1909년 6월 14일
제2대 소네 아라스케 1909년 6월 14일 1910년 5월 30일
제3대 데라우치 마사타케 1910년 5월 30일 1910년 8월 29일


부통감
제1대 소네 아라스케 1907년 9월 21일 1909년 6월 14일
제2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1909년 6월 14일 1910년 5월 29일
제3대 야마가타 이사부로 1910년 5월 30일 1910년 8월 29일


1909년 - 미주 한국인단체, 통합하여 국민회 발족.

국민회(1909. 2.)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등에 의해 창설된 미국 내 독립운동단체였다.

당시 미국 하와이의 합성협회(1907. 9.)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협회(1905. 4.)의 연합으로 창설되었던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대동보국회(1907. 3.)와도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 1910. 2.)로 발전하였다. 이후 국민회 헌장을 자체적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자체적으로 신한민보(1909. 2.)와 신한국보(1909. 2.)라는 신문을 발간했다. 1910년 2월에 신한민보는 대동공보(1907. 10.)를 흡수하였고, 1913년 8월에 신한국보는 국민보로 명칭이 바뀌었다.

1911년 3월경 대한인국민회는 중앙총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분과와 임원을 완비한 완전한 조직구성을 완료하지는 못했다.

1912년에 대한인국민회는 확대회의를 통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상항지방총회, 하와이지방총회, 만주리아지방총회 서백리아지방총회를 상항(샌프란시스코)에 조직함으로써 조직의 범위를 넓혔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와 북미지방총회, 하와이에 하와이지방총회, 만주리아지방총회, 서백리아지방총회를 결성하였다. 지방총회 아래에는 지방회가 있었다. 이는 한국 최초의 세계적인 조직이 되었다. 1915년, 신한민보 이대위 목사가 인터탑입한글 식자기를 발명하였다. 이를 이용해서 신한민보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1921년 이승만이 대한인국민회를 탈퇴해 동지회를 설립한 후 안창호가 속해 있는 대한인국민회와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중인 대한인국민회회기

1932년 4월 이후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의 영향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상하이 훙커우 공원 사건으로 안창호가 체포되었던 것이다. 뒤에 출소했으나 1938년 안창호가 병으로 죽으면서 대한인국민회 역시 이승만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 뒤 1945년 이승만이 귀국한 뒤에는 임병직, 이원순 등을 통해 대한인국민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1960년 이승만이 하야한 뒤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도자 없이 순수 교민 단체로 변모하였다.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 제1대 회장 : 최정익
  • 제2대 회장 : 윤병구
  • 제3대 회장 : 안창호
  • 제4대 회장 : 윤병구 ← 중앙총회장을 두 번한 최초의 인물.

1935년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하였던 대한인국민회 주변지역에 Bay Bridge 건설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대한국민회관은 철거되었다. 이후, 1938년에는 대한인국민회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고 이곳에 대한인국민회관이 준공되었다. 이후 1974년 국민회관은 LA한인연합장로교회에서 매각되었다. 2003년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으로 대한인국민회관을 복원하였고 개관한 것이 현재에 이른다.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일반인도 방문이 가능하다.


1909년 - 청나라 상하이에서 제2회 아편 금지 국제회의 개막

1917년 - 독일군 잠수함이 영국행 중립국 상선 공격 해 미국의 제1차 세계 대전 개입 초래

1919년 - 무오독립선언

대한독립선언서 또는 무오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1일에 발표된 독립선언서이다. 일명 대한독립선언이라고도 불리며 3·1 운동의 전초가 된 독립선언서 발표 사건이다. 선언문은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하였다.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에서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들 39명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날이 기미년인 1919년 음력 1월 1일인데, 선언서의 작성과 서명이 그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고려하고, 기미독립선언과 구별하기 위해 '무오독립선언'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무오독립선언 직후 조소앙은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인 백관수, 이광수 등을 지도하여 2·8 독립 선언을 발표하도록 하였다. 이 선언의 영향을 받아 당시 한성에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의 기미독립선언과 함께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조소앙(본명 조용은)이 기초한 선언서에는 사기와 강박으로 이루어진 일본과의 병합(한일병합조약)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있다.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과 신성한 평등복리로 우리 자손 여민(黎民: 백성)에 대대로 전하게 하기 위하여, 여기 이민족 전제의 학대와 억압을 해탈하고 대한 민주의 자립을 선포하노라.

정의는 무적의 칼이니 이로써 하늘에 거스르는 악마와 나라를 도적질하는 적을 한 손으로 무찌르라. 이로써 5천년 조정의 광휘를 현양할 것이며, 이로써 2천만 백성의 운명을 개척할 것이니, 궐기하라 독립군! 제하라 독립군!

천지로 망한 한번 죽음은 사람의 면할 수 없는 바인즉, 개·돼지와도 같은 일생을 누가 원하는 바이리오. 살신성인하면 2천만 동포와 동체로 부활할 것이니 일신을 어찌 아낄 것이며, 집안이 기울어도 나라를 회복되면 3천리 옥토가 자가의 소유이니 일가를 희생하라!

아 우리 마음이 같고 도덕이 같은 2천만 형제자매여! 국민본령을 자각한 독립임을 기억할 것이며, 동양평화를 보장하고 인류평등을 실시하기 위한 자립인 것을 명심할 것이며, 황천의 명령을 크게 받들어 일절 사망에서 해탈하는 건국인 것을 확신하여,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무오독립선언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 무오독립선언은 기미독립선언에 앞서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이다.
  •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은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항일독립운동의 서막을 연 연해주 지역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해외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뜻을 모은 독립선언이다.
  • 무오독립선언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본에 대해 결사항전과 강력한 무장투쟁을 선언했다.
  •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 대부분이 독립운동사에서 지대한 업적을 남긴, 핵심적 독립운동가들이다.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 대부분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하였다.
  •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 중에는 이탁(李沰) 외에는 변절자가 없다.

독립의 선언에 그치지 않고, 연서자들이 중심이 되어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성의 한성임시정부 등의 망명정부를 수립하는, 구체적 행동으로 연결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연호를 '단군기원' 4252년이라 하였다.


1924년 - 영국, 소련 승인

1942년 - 마오쩌둥이 정풍운동의 시작을 선언했다.

1958년 - 이집트와 시리아, 아랍연합공화국 수립.

1973년 - 비상국무회의, 국정감사폐지법안 의결.

1974년 - 상파울루 빌딩 화재. 189명 사망.

1979년 - 해외망명중이던 이란 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 15년 만에 귀국.

1989년 - 대한민국, 공산권 국가로는 최초로 헝가리 인민 공화국과 수교.

1989년 - 대한민국, 북조선산 무연탄 2만t을 인천항 통해 첫 직수입.

1991년 - F.W. 데 클레르크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인종차별법 폐지 발표.

1992년 -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 양국의 적대관계청산하는 캠프 데이비드 선언에 서명해 냉전 공식 종결 .

2000년 - 대한민국 국무회의,'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 의결.

2002년 - 대한민국 여야 의원 46명, 미국 국가 정보를 대한민국에 제공한 혐의로 복역중인 로버트 김 석방을 촉구하는 결의안 국회에 제출.

2003년 - 미국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가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다 텍사스주 64km 상공에서 폭발, 승무원 7명 전원 사망.

 

 

문화

1881년 - 파나마 운하 기공식.

파나마 운하(스페인어: Canal de Panamá, 문화어: 빠나마 운하)는 파나마 지협을 가로질러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길이 82킬로미터의 운하이다. 1914년 8월 15일에 완공되었으며, 1999년 운하 소유권이 미국 정부에서 파나마 정부로 이전되었다.

파나마 국토는 누운 S자 모양으로, 운하의 북서쪽이 대서양, 남동쪽이 태평양이다. 정확하게는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갈 때는 북북서쪽으로,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갈 때는 남남동쪽으로 간다.

파나마 운하는 그 지리적인 특성 때문에 수요가 많다. 2006년에는 파나마 운하 확장 계획이 국민들의 압도적 지지를 얻었으며, 2016년 6월 26일에 확장공사가 완료되었다.

세계적으로 거대한 난공사였으며, 과거 남아메리카 끝 드레이크 해협과 혼 곶으로 가는, 남아메리카 해안을 빙 돌아서 가는 매우 긴 우회로를 대체하여 두 대양 사이의 해상 무역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선박이 뉴욕에서 이 해협으로 샌프란시스코까지 항해하는데 거리가 9,500 km 정도인데, 기존 방식대로 혼 곶으로 우회하면 거리가 그 두 배가 넘는 22,500km에 달한다.

파나마 쪽에 운하 건설을 착안한 것은 16세기 초의 일이었으나,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것은 1880년 프랑스인들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고, 21,900명의 노동자가 죽었다. 결국 1900년대 초 미국이 재시도해서 1914년 8월 15일에 완성했다. 77 km 거리의 운하를 건설하면서 온갖 문제에 부딪혔는데, 말라리아나 황열병 같은 질병이 덮쳤고, 흙이 무너지기도 했다. 프랑스와 미국이 운하가 완성하기까지 노동자 27,5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운하가 뚫리자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국제 해운 무역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다. 파나마 운하는 작은 개인 요트에서 거대한 상업 선박 모두 수용할 수 있었다. 운하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선박을 파나맥스 선박이라고 하는데, 파나맥스보다 더 큰 용량의 선박은 ‘포스트-파나맥스’ 혹은 ‘수퍼-파나맥스’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운송 선박이 운하를 지나는데 약 8~10시간 정도 걸린다. 2008 회계년도에 총 14,702척의 선박이 수로를 지났는데, 이를 합하면 총 309.6 PC/UMS 톤에 이른다고 한다. (파나마 운하/국제 기준 체계)

파나마 운하는 인공 호수와 준설하거나 새로 만든 수로와 세 곳의 수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알라후엘라 호(미국 점령기에는 ‘매든 호’라고 했다)라는 인공 호수도 있는데, 운하의 저수지 역할을 한다. 배 한척이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갈 때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친다.

태평양 쪽 파나마 만의 입구에서, 배는 아메리카의 다리를 지나 13.2km 거리로 미라플로레스 갑문까지 간다.

미라플로레스 갑문은 접근벽이 있으며 두 단계로 나뉘는데, 1.7km 길이로, 중간 조류 기준으로 배가 16.5m 올라간다.

인공 미라플로레스 호가 다음 단계이며, 길이는 1.7km. 깊이는 16.6m.

한 단계로 된 페드로 미겔 갑문이 나오는데, 1.4km이며 배가 9.5m로 올라가는데, 운하 주요 수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

갈리아드 통로로 대륙분수령을 지나며 12.6km 나아간다. 수위는 26m이며 백년 다리를 지난다.

가툰 호를 막으면서 물이 불어난 자연 수로 차그레스 강이 가툰 호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8.5km 나아간다.

가툰 댐을 쌓아 만든 인공 호수 가툰 호로 선박이 24.2km 간다.

3단계로 된 가툰 갑문 1.9 km를 지나서 배는 다시 해상 수위로 내려온다.

3.2 km의 수로로 대서양쪽 갑문으로 접근한다.

거대한 자연 항구인 리몬 만에서 몇몇 배들이 통과를 기다리며 정박하고 있으며, 외부 방파제까지 8.7 km 거리이다.

이렇게 해서 운하의 총 길이는 80여 km가 된다.

파나마 운하를 지나는 미군 미주리 호

원래 가툰에 있는 갑문은 28.5m 폭으로 설계되었다. 1908년 미국 해군은 미국 해군 군함이 지나갈 수 있도록 갑문 폭이 최소 36m이 되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결국 타협이 이루어져 갑문은 크기는 폭 33.53m로 건설되었다. 각 갑문의 길이는 304.8m이며, 가장 높은 벽은 3m, 가장 낮은 벽은 15m 두께를 이룬다. 가툰에 있는 평행 갑문들 사이의 중앙벽은 두께가 18m나 되며, 높이는 24m가 넘는다. 갑문 출입구의 문은 강철로 만들어졌으며, 평균 2m 두께로 길이는 19.5m이고 높이는 20m이다. 파나맥스 선박 기준과 파나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 크기 제한은 발보아에 있는 아메리카의 다리와 더불어, 갑문의 크기(특히 페드로 미겔 갑문의 경우)로 결정되는 것이다.

미라플로레스 갑문의 RORO 선박. 파나마 운하를 지나는 거대한 선박이다.

파나마 운하의 통행료는 파나마 운하 당국에서 결정하며, 선박 종류, 크기, 선적물의 종류에 따라 결정된다.

컨테이너선의 경우 요금은 1척당 20피트 컨테이너(Twenty-foot equivalent unit, TEU) 적재량으로 정한다. 1 TEU는 가로 20피트(6m), 세로 8피트(2m), 높이 8.5피트(3m)의 컨테이너 적재량을 뜻한다. 2009년 5월 1일부터 발효되는 통행료는 TEU당 미화 57.60 $이다. 파나맥스급 컨테이너선 한 척이 4,400 TEU를 싣는다. 여객선이나 화물이 없는 컨테이너선(밸러스트)의 경우 요금이 다르게 책정된다.

파나마 운하를 지나는 거대선박

30,000톤(PC/UMS) 이상의 흔히 '크루즈선'이라고 하는 여객선은 "침대(berth)" 개수를 기준으로 요금을 정한다. 즉 배의 침대로 수용할 수 있는 승객 수에 따라 돈을 받는 것이다. 사람이 없는 침대에는 80$, 사람이 쓰는 침대에는 100$씩 받는다. 2007년부터 이 요금 제도로 여객 선박의 통행료가 크게 늘었다. 30,000톤 이하 혹은 승객 1인당 33톤 이하의 여객선은 화물선과 동일하게 톤 단위로 요금을 책정한다.

대부분의 다른 선박 종류는 100 평방피트 용적인 PC/UMS 순 등록 톤(net register ton) 기준으로 통행료가 책정된다. (상선의 톤수 계산은 매우 복잡하다) 2008 회계년도에 이 톤수 기준의 요금은 10,000톤까지는 톤당 미화 3.90$이며, 10,000톤이 넘어간 다음에는 3.19$를, 그 다음 10,000톤부터는 3.82$를 그 이상 넘어가면 3.76$를 내야한다. 컨테이너선의 경우 화물이 없어 빈 "밸러스트"일 경우 통행료를 감해준다.

583 PC/UMS 순 등록 톤 이하의 승객이나 화물을 적재한 작은 선박, 혹은 735톤을 넘지 않는 비어이 선박, 또는 1,048톤 이하의 완전 적재 톤의 선박의 경우 전체 길이에 근거해서 최소 통행료로 책정되는데, 다음 표를 참조하면 된다.

선박 길이요금15.240 m 까지 (50 ft)US$50015.240 m 이상 (50 ft) 최대 24.384 m 이하 (80 ft)US$75024.384 m 이상(80 ft) 최대 30.480 m 이하(100 ft)US$1,00030.480 m 이상 (100 ft)US$1,500

파나마 운하를 지나갈 때 가장 비싼 통행료를 낸 선박은 259m 길이의 디즈니 매직 크루즈 라이너로, 2008년 5월 16일의 일이었다. 이 배는 331,200$를 지불했다. 가장 적은 통행료는 미국 모험가 리처드 핼리버튼이 1928년 파나마 운하를 수영하여 지나갈 때 낸 돈 39센트였다. 평균 통행료는 약 54,000$이다.


1919년 - 김동인, 주요한 등, 한국 최초의 종합문예동인지 "창조" 창간

1943년 - 철도국을 교통국으로 개편.
 
1952년 -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창립.
1963년 - 부산, 직할시로 승격. / 서울 장충 체육관 개관. / 국민은행 개점.
 
1968년 - 경부고속도로 착공.

1974년 - 대한민국 한국방송협회 창립.

1989년 - 대한민국 세계일보 창간.

2008년 - MBC TV에서 엄기영 앵커, 평일 MBC 뉴스데스크 마지막 방송.

2012년 - MBC 게임이 MBC 뮤직으로 재개국.

2015년 - 대한민국 해군이 제9잠수함 전단을 소장급 장교가 지휘하는 해군잠수함사령부로 승격시키다.

2018년 - 대한민국 가수 NCT 2018이 새 멤버 쿤, 정우, 루카스를 포함하여 공개되었다.

 

 

탄생

1707년 - 영국 조지 2세의 장남 프레더릭 루이스

1805년 -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루이 오거스트 블랑키

1883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조만식

조만식(1883년 2월 1일 ~ 1950년 10월 18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 이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 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하였다. 1946년 1월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공산군의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산 물산장려운동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여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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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을 필두로 교사와 직원에 이르기까지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그도 교장직을 사직하고 3·1운동에 적극 가담했다가 수배되어 피신, 1919년 3월 4일 안명근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던 독립운동 동료 도인권과 함께 평양을 떠나 국내를 탈출, 상해로 망명하려던 중, 평안남도 강동에서 일본 헌병대의 추격을 받았다. 도인권은 미리 몸을 피했으나 그는 체포되어 평양에 압송되었고, 보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가 1년 형을 선고받고 평양 감옥에 수감되자 아버지 조경학은 아들이 형무소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졸도하였다. 집에서는 가장의 인사불성으로 온 집안이 초상집이 되었으나 얼마 후 아버지 조경학은 병석에서 일어났다. 병석에서 일어난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그가 수감된 평양형무소에 가 형무소 주변을 한바퀴씩 돌았다고 한다. 외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정성을 본 사람들은 그의 정성에 감복하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조만식을 면회하기 위해 형무소를 찾아가서 옥중 간수에게 취사장의 위치를 물은뒤 간수의 안내를 받아 취사장으로 갔다. 형무소 취사장에서 조경학은 수수와 콩으로 지어진 밥을 직접 시식하고는 너털 웃음을 지으면서 “뭐, 이만하면 견딜만하겠다” 하며 아들을 면회하게 되었다. 조경학은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염려의 기색을 숨긴 채 태연하게 아들의 안부를 묻고는 이정도의 식사면 건강에 지장이 없으니 잘 이겨내라며 사내에게 이런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참고 견딜 것을 주문하였다. 아버지 조경학은 외아들에 대한 걱정을 감추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평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한 후 1920년 1월 평양 형무소에서 2개월의 형 만기를 남겨 두고 가석방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가석방 소식은 감방 내에서 경사와 같았지만, 그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감형을 단호하게 거절, "10개월 동안 수감된 것 자체가 불법인데 가석방이라는 이름으로 은전을 받는다는 것은 더욱 불명예스러운 일이니 가출옥을 하지 않고 이대로 잔여 형기를 모두 채우고 나가겠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석방조치 되었다. 평양교도소에서 석방된 뒤 조만식은 다시 오산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20년 10월 오산학교 교장직에 취임하였다. 1921년 평양 YMCA청년회 총무가 되고, 산정현교회의 장로에 선출되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산정현교회에서 장로가 되어 주기철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는 등 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다해 일할 때에 교우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산정현교회에선 예배에 늦으면 교회 문앞에 있어야 했는데, 고당 조만식 선생도 공동체의 규칙을 존중하여 예배에 늦으면 스스로 서 있었다.1922년 국산품 애용을 독려하기 위해 조선물산장려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으며 부회장으로는 저명한 변호사였던 한근조를 찾아가 초빙해서 영입하였다. 평양 YMCA 총무를 지내기도 하였다.이때부터 “조선의 간디”로 불리었다. YMCA 청년회를 중심으로 그는 YMCA내에 장,감여합 저축조합을 조직하였고, 자본을 모아 평양 양말회사를 설립하여 한민족이 일본의 경제적 지배에서 벗어나도록 애쓰기도 하였다.

민립대학 설립운동 홍보 광고

1923년에는 김성수, 송진우 등과 함께 연정회 조직에 동참하였다. 연정회의 구성 목적은 민족 교육을 위한 대학 설립 목적의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했으나 일제에 의해 좌절되었다. 바로 숭인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계속된 탄압과 압력 끝에 1926년 숭인학교 교장직을 사퇴하였다. 1921년 평양 YMCA 청년회 총무로 취임하였다. 평양 YMCA 청년회 총무로 취임되면서 그는 평안도를 대표하는 민족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21년부터 1932년 평양 YMCA 총무직을 지내는 동안 그는 평양을 비롯한 평안도 전역을 근거지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자신이 구상한 '풀뿌리 민족운동'을 실천에 옮겨 나갔다. 조만식은 YMCA를 거점으로 지역사회의 공론을 형성하였고, 물산장려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지역의 개신교계와 상공업계,교육계,여성계,청년계를 하나의 '네트워크'식으로 엮어나갔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도 참가했다. 1927년 평양지역의 신간회 조직 활동에 적극참여하고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었다.

1929년 평양에 공회당이 설립되자 참석하였다. 개관식 사회를 맡은 조만식은 공회당의 명칭을 '백선행 기념관'이라고 명명하였다.

1929년 인파를 모아 서울역 앞에 집결하여 광주만세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였으나 조선 총독부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1930년대 이후로 잡지 삼천리에 칼럼을 기고하기도 했다. 1932년 평양 YMCA 청년회 총무직을 사퇴했다. 1932년에는 숭실학교 후배인 조병옥이 출감하자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에서 그를 사장으로 임명하였고 조만식은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해 경성부로 활동무대를 옮겨 사장직을 맡았다. 조선일보의 사장이 되자 편집국장에 주요한, 전무겸 영업국장에 조병옥을 임명했다. 그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이 되자 조선총독부로부터 신사참배와 지원병제도를 협조하라는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부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거의 평생을 평양에서 살아온데다 경성부에서 활동하기에는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조만식은 신문사 경영난 악화와 지역감정의 혹독한 시련을 받은 채 9개월만에 퇴사하게 되었다.

조선일보 사장직에 물러난 이후 조만식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조선물산장려회와 관서체육회의 회장으로 복귀하여 지역사회의 대소사를 챙겨 활동했다. 한편 이봉창·윤봉길 사건으로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수감되자, 여운형, 이광수 등과 함께 매일 안창호를 찾아 안부를 물었으며 그의 옥바라지를 하기도 했다.

증산교의 일파인 보천교와도 관계를 갖고 출입하였다. 독립자금 중 많은 부분이 보천교를 통해 종교자금 명목으로 모금되었으며, 이 때문에 조만식이 보천교와 관계를 맺고 출입한 이후, 조만식을 비롯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보천교를 출입했던 것으로 조선총독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조만식이 출입한 이래 조만식 외에도 한규숙·장덕수·최팔용·송진우·백관수·조병욱·신석우·김철수·김철수(동명이인)·안재홍·백남훈·설태훈·임모, 김모 등이 보천교에 출입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그와는 동명이인인 조만식도 보천교에 가담하였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만식과 한규숙 등은 보천교 신도들이 마련한 30만 원을 독립 군자금으로 만주에 보내려다가 발각되어 조선총독부 경찰서에 체포되기도 했다. 조만식과 한규숙이 체포된 원인은 그들과 함께 권총 2자루를 소지하고 있다가 검거된 '상해 밀정'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함께 관여한 월곡의 후손들은 보천교에 있다 체포된 사람은 고당 조만식이 아닌 1936년에 신의주에서 사망한 동명이인이라 증언하였다.

1932년 조만식은 평양의 을지문덕묘소를 돌보면서 '을지문덕장군 묘 수보회'를 창립하고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평양 고아원 및 양로원, 인정도서관 개관 등에도 참여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33년 백선행이 사망하자 조만식은 평양 시민들을 이끌고 자발적으로 장례식에 참여하여 애도하였다.

1935년 12월 18일 부인 이의식 여사가 별세하였다. 그 뒤 아내를 잃고 혼자 살고 있었다. 이때 주변의 소개로 옛 제자인 전선애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전선애는 이 무렵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지 3개월 만인 1937년 봄 조만식은 전선애와 결혼하였다.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있으면서 미국유학을 준비중이던 전선애는 조만식과 결혼하게 된 동기로는 조만식의 인품을 보고 결혼하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1936년 공석인 목사를 대신하여 산정현 교회의 일을 보고 있던 조만식은 목사가 된 제자 주기철에게 산정현 교회의 목사로 부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은사의 부탁을 받은 주기철은 곧 평양 산정현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왔다.

왼쪽 여운형, 중간 안창호, 오른쪽 조만식

1938년 3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수감 후 갖은 고문을 당한 안창호가 간경화 및 고문후유증 등으로 별세하자 조만식은 일제의 감시와 방해속에서도 안창호 장례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윤치호, 양주삼, 장택상 등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장례를 집행하였다. 4월 안창호의 장례식은 서울에서 집행되었다.

1939년 12월 18일 정동의 이화여전 강당에서 80여 명의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후원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12개조의 후원회 장정을 통과시키고 25명의 위원을 선출했다. 조만식도 이화여전 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에 도착한 소련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우)이 일본군 평양사관구 사령관 다케시타 요시하루 중장(중)을 숙소인 철도호텔로 불러 항복을 받는 장면. 이 자리에 조만식 선생(좌)도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조선청년이 참전하는 것이 일본인과 동등해지는 길"이라며 회유했던 당시 일제 총독부의 협조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총독부는 그를 이용하여 민심을 회유해 보려던 조선군 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면담을 거절하고 지원병제를 반대하다가 구금되었다 곧 석방되었다. 1943년 11월 16일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학도에게 고한다”라는 조만식의 이름으로 조작된 학병 지원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는 도용이었고, 당시 평양 지사장 고영한이 날조하였음이 나중에 당시 평양 특파원 김진섭 씨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1944년 주기철 목사가 옥사하고 산정현 교회가 강제로 폐쇄되자 그는 1945년 봄 가족들을 데리고 강서 고향으로 내려갔다. 1940년대 후반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무렵, 서울에 있던 여운형이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로부터 통치권을 교섭을 받았던 것처럼, 총독부는 평남도에서는 조만식에게 차를 보내 평양으로 모셔오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이를 거부했고 대신 오윤선이 보내준 차를 타고 평양에 입성했다. 조만식은 1945년 8월 하순 여운형 등이 밀사 손치웅을 평양에 보내 그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요청 받았지만 "뜻은 함께 하겠으나 몸은 여기 남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사양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평안남도 도지사는 고향에 은거하고 있는 조만식에게 차량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 총독이 타는 차는 탈수 없다며 심부름 온 김항복을 통해 돌려 보냈다. 해방 직후 청년들이 그를 찾아왔고, 조만식은 만주에서 귀국한 백선엽 등을 비서로 채용했다. 백선엽은 광복직후 잠깐 조만식의 비서로 활동하기도 했다.1945년 8.15 해방 이후 조만식은 여운형 등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8월 16일 조선건국 준비위원회 평안남도를 조직하고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며 혼란기를 수습했다. 이어 그는 평양지역 시민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아가며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5년 8월 25일 소련군이 평양에 진주한 이후, 소련군의 권고에 따라 광복 직후 조만식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 지부와 현준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에서 각각 16명의 위원을 선정하여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조만식은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오윤선과 현준혁이 각각 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현준혁은 연희전문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나온 수재로 공산주의자였지만 조만식을 공대하며 원만한 관계를 유지 하였고, 조만식-현준혁 을 통한 좌우의 협력관계를 이끌어나갔다.이후 조만식은 치안공백상태에 있던 북한 지역의 정치적 혼란을 정리해나갔다.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 25군의 정치사령부 정치담당관이었던 G. 메클레르(1909~2006) 중좌는 '평양은 조만식의 판이었다.'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의 명단에는 준비위원: 김병연, 노진설, 김광진, 지창규, 김동원, 한근조, 총무부장에는 이주연, 재무부장에는 박승환, 선전부장에는 한재덕, 산업부장에는 이종현, 지방부장에는 이윤영, 교육부장에는 홍기주, 섭외부장에는 정기수, 치안부장에는 최능진 등이 각각 선임되었다. 이 중 노진설, 한근조, 이윤영, 최능진 등은 훗날 월남하여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하게 된다.

8월 24일 평안남도 건국치안대 대원들을 위문하였다. 이때

“우리 민족에게 총칼이 필요 없어요. 총칼을 휘두르는 자는 제 총칼에 망하거든..."
라고 하였다.

9월 3일 현준혁이 트럭을 타고 갈때 조만식은 그와 함께 동승하였는데, 현준혁의 암살을 예측한 그는 현준혁이 암살당할 당시 조만식은 긴급하게 사람을 보내 현준혁을 구명하고자 했으나 극우 테러단체 백의사에 의해 암살당해 조만식의 구명노력은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조만식은 현준혁을 공산주의자로 평가하지는 않고, 다만 좌경화된 민족주의자로 보고 있었다. 1945년 9월 8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내각이 발표되었는데, 조만식은 인공 내각의 재정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미 군정 진주 후 인민공화국 내각이 와해되면서 사퇴하게 되었다.

9월 12일 평양 산수소학교에서 '인민 정치위원회'가 무장한 소비에트 연방군의 감시 속에 개최되었다. 조만식은 그 날 인민정치위원회의 사회를 진행하였다. 인민정치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공산 측의 방해 공작으로 민족진영의 의견은 빈번히 묵살되었다. 공산진영측에서 민족진영을 향해 인신 공격까지 퍼붓자 조만식은 분연히 일어나 이들을 질책하였다. 1945년 9월 30일 조만식은 소련군 정치장교 메클레르 중좌의 소개로 김일성을 만난다. 조만식은 김일성의 나이가 의외로 젊은 것을 들어 의심하였으나 이내 받아들였다. 10월 7일 조만식은 평양에서 '북조선 5도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ㅈ스승 유영모의 동창이자 친구인 조만식과 안면이 있던 함석헌은 이날 조만식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회상하였다. 한편, 이남 지역에서는 미군정으로부터 11명 고문(9명 한국민주당,1명 여운형, 1명 조만식) 가운데 한명으로 임명되었으나, 조만식은 평양에 있었으므로 참여하지 않았다.

1945년 10월 14일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평양시 민중대회에 참석한 고당 조만식 선생. 그 왼편이 레베데프 소장. 고당도 이날 연설을 하였고, 이어 김성주(김일성)가 대중 앞에 처음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서 연설했는데, 가짜 소동이 벌어졌다.

1945년 10월 14일 기림리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평양시 민중대회에 참석한 고당 조만식 선생. 그 왼편이 레베데프 소장. 고당도 이날 연설을 하였고, 이어 김성주(김일성)가 대중 앞에 처음 김일성 장군을 자칭하며 나서 연설했는데, 가짜 소도이 벌어졌다


1945년 가을부터 전국의 지방의 농민연맹지국들이 실시하던 3·7제를 반대했다. 1945년 9월 21일 날짜로 소련은 민주정당,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초를 둔 부르주아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공식적으로 지시를 내린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민족주의자가 필요했는데, 민족주의자 인사들은 대부분 월남했고 북조선 지역에는 거의 남아있지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민족주의자는 조만식뿐이었다. 조만식은 '나는 노린내 나는 소련군이 싫다.'고 공언할 정도로 배타적인 민족주의자였다. 소련군정은 직접 나서지 못하고 김일성과 최용건을 통해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라고 권유했다. 9월 27일에는 평안남도 인민위원회는 3·7제를 적용했다. 조만식은 항의의 뜻으로 이틀 동안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인민위원회가 자본가들을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의 준비위원장을 맡았고 10월 16일 ~ 10월 17일 평양의 요리집 가선에서 김일성 가족을 위한 환영연을 주관하였다.

소련 정부는 북조선에 독자적인 정권기구를 수립하려는 소련군정의 구상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군정의 계획이 아무런 반대 없이 곧바로 실현된 것은 아니다. 조만식은 소련군정의 구상에 분명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11월15일 김일성과 한 대담에서 “이승만, 김구, 김일성 등을 포함하는 중앙정부의 수립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만식은 이러한 정부의 수립에 참여하기 위한 자신의 서울 방문 계획을 김일성과 협의했다.

김일성은 “인민의 참여에 기초해서 밑으로부터 정권기관을 수립해 나가고 나중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답변했지만, 조만식은 “12월1일 이전에 중앙정부를 수립해서 외국군대의 철수문제를 제기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김일성이 점령군의 철수를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조만식의 남한 방문은 소련 군정의 거부와 감시로 무산되었다.

10월 중순 김일성과 면담하였다. 한 월남자의 진술에 10월 20일경 김일성은 조만식을 만났고, 새로운 정당을 구성하는데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다고 미군정 정보기관에 증언하였다. 김일성은 조만식을 설득하기 위해 처음만났을 때부터 '선생님'이라 깍듯이 부르며 큰절을 올리기도 하고 여자 접대원이 딸린 고급 요정으로 초청해 성대히 대접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만식은 술과 노래도 모르는 철두철미한 우국지사였다. 조만식은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북조선에만 정당'을 만들자는 설득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일성은 조만식을 만날때마다 '선생님'이라 불렀지만, 돌아와서는 '조만식을 초기에 죽여 없애자.'고 떠들곤 하여 소련군 장교들을 놀라게 했다. 결국, 김일성은 독단적으로 조선공산당으로 사업의 중심을 되돌렸다.

김일성의 협력제안을 거절하고 난 이후인 10월 하순 조만식과 비공산계 민족주의자들은 공산주의자들의 대안이 될 수 있는 정당의 창당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1945년 10월 28일 북조선5도행정국이 설치되자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조선민주당 결성대회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은 '광주학생운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민족·민주계열이자 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조선민주당은 창당에서 ‘105인 사건’을 기념하여 105인의 창당발기인을 두었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기념하여 중앙상임위원은 33인으로 하였다.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의 당수가 되어 반공노선과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다. 부당수에는 그의 제자였던 이윤영과 최용건이 선출되었다. 1945년 10월 조선민주당의 정강에서 조만식은 친일파들의 즉각적인 해임 조항에 반대했다.

조선민주당은 곧 면단위 지구당을 만들었으며 11월의 지방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조선민주당은 창당 수개월 만에 50만 당원을 확보할 정도로 대중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당원 대부분은 조만식의 인품과 독립국가 건설에 대한 순수한 염원을 보고 입당하여 당원이 되었다.  조만식의 지지기반은 그가 세운 조선민주당의 지지자였던 개신교세력과 자산계급이었다. 특히 평안남도에서 압도적이었던 보수적인 미국식 장로교도들 사이에서 폭넓은 지지를 획득하고 있었다.

조만식과 그의 지지자들은 소련의 북조선 점령 과정에서 점차 공산주의자들 및 소련과 충돌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어떻게든 조만식이 친소련적 입장에 서도록 회유와 압박을 가하였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가 결정되면서 4개국 신탁통치안에 대한 문구가 쟁점이 되어 찬·반탁 구도가 설정되자 조만식에게는 정치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조만식은 광복 당시 북조선 지역에서 유력한 지도자였고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통일 임시정부 수립'안에는 찬성했으나, 소련 측에서 후견제로 표현한 신탁통치안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발했다.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 이어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통과되자 소련은 조만식을 계속 재촉하였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에 대한 조만식의 격렬한 반대에 당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넨코 장군은 조만식이 모스크바 신탁통치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신탁통치가 아니라 후견이라며 끈기있게 설득했고 만일 조만식이 협력한다면 조선 정부의 고위직으로 옹립하고 김일성을 군부에만 맡기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 소련 군정청장 겸 소비에트 연방 극동사령부 정치위원 스티코프는 조만식을 찾아와 '당장 신탁 지지성명을 내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조만식은 '그 말이 그 말'이라며 반대했을뿐 아니라 완강히 거절했다. 이에 흥분한 스티코프가 권총을 빼들고 위협하였다. 조만식은 자신의 한복 옷자락을 헤쳐 보이며 '그래, 쏘아라'고 맞받았다 한다. 그 기개에 질린 스티코프는 얼굴만 붉히고 되돌아갔다. 치스차코프 점령군 사령관은 '신탁통치 결정서에 서명만 해 주면 조선의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조건을 제시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결정이 알려진 직후, 조만식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신탁문제를 둘러싸고 소련과 공개적으로 충돌했다. 소련 측은 1946년 1월 2일, 4일, 5일의 세차례에 걸쳐 조만식에게 새로 수립될 정부의 대통령 자리까지 제시하면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김일성도 1945년 12월 말 이후 빈번하게 조만식을 방문하였으며, 조만식의 오랜 제자인 최용건은 조만식을 19번을 찾아가 설득하였지만 조만식은 끝내 모스크바 의정서에 대한 지지를 거부하였다.

1946년 1월 5일 이후에도 개신교인 중심의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반탁 운동을 벌이던 조만식은 뜻을 바꾸지 않았고, 신탁통치 협정문 안건에 관한 사회를 거부함으로써 북조선에서 정권을 잡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 곧바로 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서 축출된 뒤 조만식은 결국 1월 5일부터 연금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소련군 소좌로 제25군 특별정치선전공작대인 '제7부'의 부책임자로 있었던 레오니드 바신의 후일 증언에 의하면 북조선 주재 내무인민위원회총책 아노힌 소장이 협력을 거부하는 조만식에게 '일제가 항복 직전 그를 석방한 것은 일본 첩자였기 때문'이라는 누명을 씌워 신문과 방송이 이를 보도하게 한 후에 연금했다고 하였다. 미군이 기록한 1948년 5월 남북협상차 방북후 귀환한 "김구, 김규식이 발표한 공동성명(Kim Koo and Kim Kiusic issue joint statement: 1948-05-06)"에도 "양인 모두 조만식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를 친일 반역자로 낙인찍어 재판에 회부할 서류들을 마련중으로 보였다 (Both reported that they did not see Cho Man Sick, against whom dossier is apparently being compiled, for possible trial, as died in wool pro-Japanese traitor.)"고 하였다.

북조선은 내외 방문객들에게 조만식이 고급호텔에서 좋은 대접을 받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이는 명백한 연금이었다. 조만식이 물러난 조선민주당 위원장에는 빨치산파 최용건이, 부위원장에는 홍기주가 선출되었다. 이렇게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쥠으로써 반탁운동의 중심이던 조선민주당은 찬탁의 거점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연금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 전쟁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1월 23일 김일성은 조만식을 반동으로 규탄하고 조선민주당을 접수, 2월 24일 최용건을 북조선민주당 당수로 임명하였다. 한편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에서 강제 축출되자 최용건은 '조만식이 일본인의 신민이 되는 것을 칭찬하고, 격려한 사이비 민족주의자라고 격렬하게 성토했다.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조만식은 김구, 김규식, 이승만,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미군정청의 브라운 소장이 방문하자, 그는 자신을 방문한 미군정청의 브라운에게 "나는 북한 일천만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소." 라며 월남권유를 거절하였다.

1946년 2월 9일부터 2월 11일까지 북조선을 방문한 여운형과 신탁통치 관련 안건에 관해 협의했다. 북조선의 저명 인사들은 조만식에게 월남할 것을 권하였지만 그는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

이승만과 김구는 1946년 4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 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 이윤영은 ‘이승만과 김구에게만 이 문서를 보여준다’는 조건하에 서명하였지만 결국 문서가 공개되자 월남하였다. 조선민주당은 당수인 조만식이 연금상태에 있던 상황에서 부당수인 이윤영마저 월남하자 다른 부당수였던 최용건에 의해 장악되었다.

 

1946년 5월 남한과 북조선의 단독정부 수립이 확실시되자 그는 밀사를 보내 후처 전선애를 불렀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여 머리카락을 삭발해 두었다가 면회시간에 전선애에게 자신의 머리카락과 자른 일시를 적은 쪽지를 담은 흰 편지봉투를 전선애에게 건내주었다.

조만식은 아내 전선애에게 호텔에 놓여 있던 피아노로 찬송가를 연주하게 하였고 그 사이 세 자녀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기도한뒤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그는 여기서 눈뜬 장님을 만드는 것보다 위험이 따르겠지만 자녀들을 서울로 데려다가 공부를 시키는게 좋겠다며 아내에게 월남을 권고했고, 가족과 작별한 뒤 전선애는 조만식이 건네준 머리카락을 품에 간직하고 세 자녀와 함께 월남하였다. 10월 남한 미군정의 경제고문 번스는 평양 방문기간 중 조만식을 만났다. 번스를 초청한 소련군의 경제고문인 1등 서기관 발라사노프는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지지하지 않는 반동이라고 번스에게 말했다. 번스에 의하면 당시 '조만식은 비교적 건강한 정신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우리를 떠나보내기를 주저했다.'고 진술했다.

1947년 6월말 브라운 소장 등 미군정 대표단이 회담차 특별열차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조만식은 6월 30일 평양역의 열차 안에서 브라운 소장과 두세 시간 회담을 가졌다. 소련군은 미군정 대표단의 대인접촉을 극심하게 차단했는데 예외적으로 허용해 주었던 것 같다.

해방 초기에도 여운형· 김규식 등으로부터 남한으로 내려오라는 권유가 있었으며 김일성 세력과 마찰을 빚던 즈음부터는 남한의 반공 우익 세력들과 미군정, 월남한 개신교인들은 반탁 운동의 기수로 신망이 높은 그를 월남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으나, 조만식은 북녘의 동포들을 버리고 혼자 내려갈수 없다며 월남을 거부했다.

1950년 6월 17일자 동아일보. 조만식<->김삼룡,이주하 맞교환 다룬 기사.

1948년 5월 남북협상을 마치고 돌아가는 김구는 김일성에게 조만식을 데리고 가게 해줄것을 부탁하였으나 김일성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며 주둔군 당국의 양해가 있어야 된다며 거절하였다.

1950년 6월 10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보름 전에 북조선에서는 김삼룡 및 이주하를 조만식과 38선에서 교환하자고 주장하며, 6월 23일을 협상기일로 제안했다. 이는 북조선 부수상 겸 외무상인 박헌영의 강력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1950년 6월 16일 이승만은 북에서 먼저 보내라는 요구를 했고, 6월 18일 북조선은 동시교환을 주장했다. 한동안 “먼저 보내라,” “아니다. 동시에 교환하자”라는 공방을 되풀이하였다.

1950년 5월 16일 북조선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 이승만의 거부로 성사되지 못했다. 한국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10월 15일 조만식은 북조선 내무성 안에서 일단의 내무서원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황은 비슷하나 총살된 날짜가 10월 18일이라는 설도 있다(박길룡 증언). 소련 출신으로 김일성의 통역과 북조선 외무성 제1부상을 지내다가 1959년 소련으로 돌아갔던 박길룡 등의 증언에 의하면 조만식은 1950년 10월 18일 퇴각 중이던 북조선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대동강변 내무성 정보처에서 한규만 소좌 등에 의해 다른 민간인들과 함께 학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공군과 함께 북조선 당국이 다시 평양에 들어온 이후, 그의 죽음은 유엔군 및 한국군에 의한 학살이라고 주장된 바 있다.

1952년 1월 23일자 미국 CIA 보고서에는 1951년 9월~10월 현재 북한에서 구금 중이거나 추적 중인 도망자 명단에 조만식이 나오며, 수년간 구금되었던 그가 도주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로보아 당시 미군도 조만식의 생사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없었던 것 같다.

1970년 8월 15일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훈 1등)이 추서되었다.

1965년 '고당의 날' 기념준비위원회가 주최한 '고당경모회'행사가 거행되었다. 1966년 평남민보사 발행으로 일대기인 고당조만식이 발간되었다. 1976년 1월 21일 고당조만식선생기념사업회(초대 회장 한경직, 상임위원장 박재창)가 창립되었다. 1976년 12월 7일 어린이대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고, 1992년 10월 20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도 동상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5일 서울특별시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열린 고당선생 추모-안장식때 시신 대신 유발이 안장되었다. 1993년 8월 23일 '고당조만식선생 물산장려운동73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렸다. 1995년 10월 저서 고당조만식회상록 이 출간되었다. 현재 서울 능동 어린이대공원과 경기 파주의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동상이, 저동에는 고당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2000년 3월 27일 후처 전선애가 사망하자 국립묘지 조만식의 묘소 옆에 합장되었다. 매년 10월 16일~10월 17일 사이에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


1901년 - 미국의 군인 프랭크 버클스

1902년 - 미국의 시인 랭스턴 휴즈

1915년 - 영국의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스탠리 매슈스

1928년 - 대한민국의 경제학자, 정치인, 민선 1기 서울시장 조순

1929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차규헌

1931년 - 러시아의 정치인 보리스 옐친

1938년 - 대한민국의 정치가 한화갑

1948년 -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윤한봉

1949년 - 영국의 기업인 데이비드 설리번

1956년 -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교수 정수현

1957년 - 대한민국의 가수 배일호

1958년 - 홍콩의 영화 배우 양가휘

1962년 - 일본의 음악가 호테이 토모야스

1969년 - 아르헨티나의 전 축구 선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1973년 - 대한민국의 배구 선수, 배구 감독 신진식

1979년 - 브라질의 축구 선수 주앙
 
1991년 - 알제리의 축구 선수 파우지 굴람

1996년 - 대한민국의 가수 NCT의 멤버 도영.

1997년 - 대한민국의 가수 트와이스의 멤버 지효.

 

 

사망

1328년 - 프랑스 국왕 샤를 4세

1691년 - 241대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8세

1851년 - 영국의 소설가 메리 셸리

1925년 - 한말 정치인 친일파 송병준

송병준(1857년 음력 8월 20일 ~ 1925년 2월 1일)은 조선 말기에 활동한 무관이다. 정미칠적 중 한 사람이며 한일 합병 조약 체결 과정에서도 일진회를 통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과 급제 후 무관으로 활동하다가 김옥균을 암살 밀명을 받고 일본에 건너갔지만 오히려 김옥균에게 감화되었고 그의 동지가 되면서 개화파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뒤에 친일파로 변절하여 일진회 등의 조직과 한일신협약 체결, 한일 합방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오늘날 그는 이완용과 함께 친일파, 매국노의 수괴로 대표되는 인물이 되었다.

창씨개명 제1호였으며 이름은 노다 헤이슌 혹은 노다 헤이지로이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은진 송씨라고는 하나 그것을 증명할 족보 등의 문서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엔 성씨 도용이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함경남도 장진군 출생, 어머니 홍씨는 양자로 들어간 민태호의 첩인 기생 홍씨로 알려져 있으며 서출이었다. 이후 민영환의 식객 생활을 하게 된다.

서자에 어머니가 기생이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잠시 서당에 나가 한학을 수학하였다. 8살 때 홀로 서울로 상경하여 수표교 근처 기생집에서 조방꾸니 노릇을 했다. 우연히 세도가 민태호의 눈에 띄었는데, 달변과 민첩한 행동으로 그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후 민태호의 애첩인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고, 민영환 집안의 식객생활을 했다.

일설에는 자신의 생모와 같은 가문 사람인 민태호의 첩 홍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1871년 무과에 합격하여 수문장이 되어 수문장청에 배속되었고, 이후 훈련원판관이 되었다. 1873년에는 오위도총부도사.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때 접견사 수행원으로서 구로다 일행을 접대하였다. 그 뒤 송병준은 구로다 일행을 따라온 일본의 무역회사 대창조 사주인 오오쿠라와 합작하여 부산에 상관을 차렸다. 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한일 합작 상회인 셈이다. 당시 국법에 따르면 일본인과 합작하여 상행위를 할 수 없었으며, 더구나 송병준이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그에 격분한 부산 사람들이 그의 상관을 부숴 버렸다.

1882년 임오군란 때에는 간신히 피신하였다. 그를 좋지 않게 본 사람들이 그의 집을 불태웠고, 그는 남대문 밖 농가의 쌀뒤주에서 열흘쯤 숨어 지내야 했다. 1884년 갑신정변 때에도 사람들이 그의 집을 불태웠고, 그는 겨우 도망하여 살아남았다. 샤쿠오는 조선병합사에서 “일본의 감독이 없는 고종 치하와 조선인 내각 밑에서는 … 생명이 위태롭다”라고 송병준이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쓰기도 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송병준은 그 뒤로도 요직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 뒤 그는 본시 수구파에 속했으므로 1884년 조선정부로 부터 밀명을 받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을 암살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도리어 김옥균의 인품에 감화, 설득되어 암살 파견 사실을 이실직고하고 그의 동지가 되었다.

그 뒤 조선에 귀국하였는데, 1877년때 일본인과 같이 상회를 차린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민태호의 양아들인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하였으나, 86년에는 그와 함께한 조선인 밀정의 밀고에 의해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다시 출옥하였다.

이후 흥해군수·양지현감 등을 역임하다가1897년 정부로부터 체포령이 내려져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김옥균의 암살 소식을 듣고 그는 황제와 조정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후 조선인임을 포기하고 노다 헤이치로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은신하며, 야마구치현에서 잠업과 밭 농사, 막노동에 종사하면서 숨어 지냈다. 체력이 좋았던 그는 보통의 사대부와는 다르게 거친 공사장 인부일을 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을 따라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일본군 통역관으로 조선을 귀국한 후부터는 완전히 친일파로 변신하여, 비밀리에 일제의 지시를 받아 이용구 등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하였다. 윤시병과 함께 유신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했다. 이때 일본군 병참감 오오다니 소장의 통역을 맡으면서 용산지역에 일본군 사령부에서 주보 (PX)를 경영했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는 고종 황제 양위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07년 고종 퇴위 후 노상에서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내부대신을 지내면서 일진회의 일한합방상주문‎ 제출을 조종하는 등 대한제국 국민들이 “합방”을 간절히 원하는 듯 한 여론을 조작,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비난과 지탄을 받았다.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이후 송병준은 한일 합방에 대한 이러한 공로를 인정 받게 되어 한일 병합 후 일본 제국으로부터 훈1등 자작 작위를 받게 되었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이 되었으며 1920년 백작 지위에 승급한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한일 병합 조약의 원흉으로 몰려 여러 번 피습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많은 부를 축적하여 재산가가 되었으며, 부의 축적 과정은 ‘권력을 앞세운 재산강탈형’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일진회와 시천교 재산을 사유화하여 부를 쌓았던 송병준의 재산은 1920년대 들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일진회의 멤버였던 그는 천도교에서 파문 당하고 독자적으로 수만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시천교를 만들기도 했다. 1925년 2월 1일 경성 자택에서 뇌일혈로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는 1925년 2월 1일 친일 실업거두 한상룡이 주최한 연회에 참석한 뒤 갑자기 사망하였다. 그런데 일설에는 한상룡이 주최한 연회에서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자신의 작위를 습작 받은 아들 송종헌과 함께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007년 5월 2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는 송병준과 송종헌의 재산을 국가로 환수하기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11월 22일 제3차 재산환수 대상자를 선정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시행 이후 제3자에게 처분한 송병준의 재산에 대해서도 국가귀속 결정을 내렸다.

송병준의 증손자는 재산 국가귀속 결정에 반발하여 2008년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2010년 8월, 송병준의 후손들이 인천광역시 부평구에 있는 옛 미쓰비시 공장 부지이자 부평 미군부대 부지였고, 부평공원이 조성될 예정인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걸었다. 참고로 이 부지는 3,000억 원대로 추산되며 부평구의 절반에 해당되는 영역이다.


1935년 - 한말 의사 지석영

이미지출처 줌 학습백콰

지석영(1855년 5월 15일 ~ 1935년 2월 1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한의사, 한글 학자이다.

그는 1883년(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장령, 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종두법의 하나인 우두법의 보급에 공헌하였다.

1855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지익룡은 근교에 한약과 침으로 이름난 유의였다. 어려서 부터 의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었고, 특히 일찍부터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 의학서의 번역본을 많이 읽었고, 영국의 의사 에드워드 제너의 우두법(우두 접종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6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을 다녀온 역시 명의로 칭송이 자자하던 스승 박영선에게서 종두귀감을 얻어 보고 감명을 받았고, 1879년 10월 부산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생의원에서 일본인 의사에게서 두 달 간 우두법을 배웠다. 그해 겨울 충청북도 충주시 덕산면에서 최초로 40여 명에게 우두를 시술하였다. 서울에는 종두장을 설치하였다.

1880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을 따라 일본에 건너가 우두종계소에서 두묘의 제조법을 배우고 두묘 50병을 얻어서 돌아와 종두법을 보급하기에 힘썼다.

1883년(고종 20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사헌부 장령 등을 역임하였고, 1887년 공가와 화폐 문제에 대하여 상소하였다.

1885년 우두신설을 저술하였다.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1894년에는 김홍집에 의해 토포사로 동학군 토벌에 참여하였다.

1894년 형조 참의에 제수되었고, 1895년 동래부 관찰사가 되었다.

1896년 우두법의 보급에 공헌하였으며, 1899년 경성 의학교가 세워진 이후로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1907년 통감부에서 의학교를 폐지하고 1908년 대한의원의육부로 개편할 때 학감이 되었으나 한일합방 후(1910년)에 사직하였다.

이후에는 (한방)소아과를 특히 주요 진료를 하였고, 1915년에는 전국조선의생대회(현 한의사협회의 전신)가 열리고 회장을 맡는다. 일제는 보안법 1조로 조선 의생회의 해산을 명하고 관계자인 지석영 선생을 필두로 김성기, 최동섭, 경도학, 장기학, 윤용배, 조병근, 박인서 등 의생들을 종로경찰서로 초취하여 금후 다시는 이와 같은 회를 설립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게 한다. 그리고 1916년 조선의생회는 일제의 압박에 의해 해체되고 만다.

지석영은 나라의 정책에도 관심을 기울여 1905년에는 신정국문 6개조를 고종에게 상소하여 공포하게 하였다. 또한 그는 여러 외래 도서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글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자각하여 한국어의 발전과 보급에도 노력하였다. 지석영은 학부 안에 국문 연구소를 설치하게 하였으며, 1908년에는 국문 연구소 위원이 되었다. 또한 1909년에는 한자를 국어로 풀이한 자전석요를 간행하여 한자 해석의 새로운 방법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조선의 종두법 시행의 선구자로, 종두에 대한 알기 쉬운 서적을 저술하여 의학 발전에 기여하였고, 천연두가 유행할 때마다 우두 종법을 실시하여 병에 걸린 이들을 구제하였다. 또한, 한글 보급에 힘쓴 공로를 인정받아 팔괘장과 태극장을 받았다.

지석영의 부친 지익룡은 양반이라 개업은 하지 않았지만 한의학에 정통했고, 지석영의 장남 지성주는 1919년 경성의전(내과 전공)을 나온 이후 개업했는데 1927년 및 1928년 동아일보에 독자를 위한 의학 관련 기사를 실을 정도로 장안의 명의로 소문났다. 그의 장남 지홍창은 서울의대 박사로 군의관을 거쳐 박정희전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바 있다.

신동원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지석영을 내세우고 조선 정부의 우두 보급에 대한 노력을 폄하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지석영 신화’라 지칭하였다.

조선 총독부에서 지석영이 부산의 제생의원 원장 마쓰마에와 군의 도즈카로부터 종두법을 배운 지 50주년이 되는 해에 즈음하여 행사를 벌였고, 1928년 11월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지석영에 대한 기사가 연일 실렸으며, 그 내용이 조선의 종두에 대한 논문에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신동원은 1934년 조선총독부 과학장관이었던 시게무라의 발언에서 드러난 당시의 지석영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 반론하였다. 조선인들이 종두를 이해하지 못하던 중 지석영이 일본으로부터 우두법을 들여온 것으로 선전되었으나 지석영 이전에도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마과회통의 부록 〈신증종두기법상실〉과 같은 우두에 대한 서적이 조선에 존재하였고, 종두법의 하나인 인두법은 이미 조선 헌종 때에 널리 시행되고 있었으며, 조선 정부 또한 국가적 사업으로서 우두의 보급을 추진하였고, 갑오개혁 이후의 성과는 일본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민간의 저항을 조선 민중의 무지에 의한 것으로 선전되었으나, 당시에는 우두의 효과에 대한 불신감, 고가의 접종비 등에 의한 반감이 존재했고, 개화된 지식이 무속적 세계관을 대체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지석영이 갑신정변의 배후로 모함을 받는 등 자주 유배를 간 것을 조선 정부가 무능하여 ‘훌륭한 인사’를 박해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횡포를 일삼는 종두 의사에게 내려진 포박령을 지석영에게 내려진 포박령으로 왜곡한 것이며, 결정적으로 지석영을 의학교에서 쫓아낸 이들은 바로 일본이었다고 지적하였다.


1976년 - 독일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986년 - 스웨덴 정치가 알바 뮈르달

2012년 -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

2014년 - 스위스의 배우 막시밀리안 셸

2016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명윤

2016년 - 과테말라의 군인이자 정치인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

2019년 - 일본의 성우 아리모토 킨류

 

기념일

흑인 역사의 달 시작일: 미국,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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