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2월 4일 - 소소한 세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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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211년 - 로마 제국의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칼레도니아 원정을 준비하는 도중 사망하다.

1789년 -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선출됨.

미국 제1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조지 워싱턴(1732년 2월 22일 ~ 1799년 12월 14일)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1789년~1797년)이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벌어진 미국 독립 전쟁에서는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미국의 대국민들이 그를 국왕과 같은 군주로 인식하여 서로 거리감을 느꼈으나, 점차 미국의 건국과 혁명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하여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정치인으로 등극했다.

1775년 대륙회의에서 워싱턴은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대륙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 전쟁 첫 전투인 보스턴 전역의 렉싱턴 콩코드 전투부터 파리 조약으로 독립을 승인 받을 때까지 총사령관으로서 복무하였다. 워싱턴은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와해될 것 같았던 대륙회의를 주재하고, 각지에서 모인 결속력 없는 군대를 통솔하면서, 동맹국인 프랑스와 의견을 조율하여야 했다. 1783년 전쟁이 끝난 후 워싱턴은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 개인적인 삶을 살았다. 당시의 영국의 국왕인 조지 3세는 워싱턴이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만약 워싱턴이 그리한다면, 그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일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하였다.

1787년, 조지 워싱턴은 연합 규약을 대체하는 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기 위해 열린 필라델피아 헌법 제정 의회를 주재하였다. 워싱턴은 1789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써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연방정부가 수립된 후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정부 각 부서의 관례와 임무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

워싱턴은 해외 문제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취하지 않는 정책을 택하였다. 1795년 워싱턴은 전쟁을 회피하고자 영국과 제이 조약을 맺었다. 토머스 제퍼슨과 그가 이끄는 민주-공화당이 영국과의 조약을 반대하였지만, 워싱턴은 자신의 특권을 사용하며 강행하였다. 워싱턴은 강력한 중앙 정부를 수립하는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가 부채를 조성하였고, 효율적인 세금 제도를 시행하였으며, 국가 은행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워싱턴은 공식적으로는 연방당 소속이었지만 퇴임 연설에서 당파성과 파벌주의 그리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의 가담 등에 대한 엄중한 경고와 공화주의적인 덕목을 강조하였다.

워싱턴은 1799년에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헨리 리는 장례식에서의 연설에서 워싱턴을 "전쟁에서도 으뜸, 평화에서도 으뜸, 그리고 그의 국민들 마음 속에서도 으뜸"이라 칭송하였다. 역사학자들은 꾸준히 그를 가장 훌륭한 미국 대통령 중 하나로 여기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미국의 1달러 지폐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1945년 -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이 독일 처리 문제를 위한 얄타 회담을 개최.

2004년 - 안상영 부산시장 자살.

이미지출처 오마이뉴스

안상영(1938년 11월 18일 ~ 2004년 2월 4일, 출생)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행정관이며 전 해운항만청장, 제25대 부산직할시장(관선), 제31~32대 부산광역시장(민선 3~4기)을 역임하였다. 성지국민학교, 부산중학교,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토목공학과에 진학하여 졸업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청 토목직 7급 공무원 공채에 응시하여 합격하여 관료생활을 하였으며, 서울지하철건설본부 건설차장, 서울시청 도로국장,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하였다. 이때 서울의 강남 개발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뒤 서울특별시 종합건설본부장으로 한강종합개발과 올림픽대로 건설을 주관하였다.

1988년 관선 부산직할시장에 부임하였다. 관선 시장 재직 당시 부산 앞바다에 인공섬을 건립하는 사업을 추진,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인공섬 개발계획을 추진하다 포기하고 1990년 해운항만청장으로 부임했다. 해운항만청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인공섬 건립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1992년 해운항만청장에서 물러났다. 그 뒤 한국항만협회 고문, 벽산건설 부회장 등을 지냈으며. 한강개발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과의 인연으로 1996년 대우그룹 계열사인 부산매일신문사 사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2년간 부산매일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 수사를 받던 당시 문정수 시장을 당내 후보경선에서 누르고 출마, 선거에서 무소속 김기재 후보와 접전 끝에 부산시장에 당선되어 1998년 ~ 2002년 민선 2기 부산광역시장을 지냈다. 이로써 부산광역시 역사상 유일하게 관선 직할시장과 민선 광역시장을 모두 지낸 시장이 되었다. 1998년 7월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조직위원장, 1999년 12월 초대 부산영상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2002년 자치단체장 선거에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하여 당선, 7월 민선 3기 부산광역시장에 취임하였다.

2003년 10월 진흥기업 박모 회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되었으며 10차례 공판을 치르면서 무죄를 주장하였다. 2002년 6월 지방선거 당시 부산 동성여객(현 삼성여객) 등으로부터 3억원을 받은 혐의가 추가돼 검찰의 추가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이후 금품수수혐의로 복역 중이던 그는 2004년 2월 4일 부산구치소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2006년 - 필리핀 마닐라의 한 경기장에서 압사사고가 발생, 88명이 숨지고 280여 명이 다쳤다.

국제원자력기구(IAEA) 특별이사회는 이란 핵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서울 세종로에서 "황우석 교수 줄기세포 연구재개"를 요구하며 정해준 씨가 분신자살을 했다.

덴마크 윌란스 포스텐 지를 통해 소개된 무함마드 만평에 분노한 시리아의 무슬림 수천 명이 다마스쿠스에 있는 덴마크 대사관 건물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무함마드 풍자 만평으로 이슬람권의 반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면서 최초로 만평을 그렸던 작가 12명이 24시간 경호를 받는 등 극심한 신변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영국 일간 더타임스 인터넷판이 보도했다.

2007년 - '종합편성채널 도입을 촉구하는 전문가모임' (정책건의 발의인단 공동대표 유재천ㆍ최열ㆍ문창재ㆍ유숙렬)은 종합편성PP가 조속히 도입돼야 한다는 정책건의서를 방송위원회에 보냈다.

2008년 - 대한민국의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선정된 25개 대학이 예비인가 잠정안을 그대로 최종 확정키로 했다. 탈락한 대학교는 이에 대응해 법원에 가처분 신청할 예정이다.

민주노동당 자주파 대의원들이 일명 "심상정 민노당 혁신안"을 부결시킨 것에 관련해 심상정 민주노동당 비대위원장이 사퇴했다.

WKBL은 김은경 선수에 대해 잔여경기 출장정지 및 벌금 300만원의 징계를 결정했다.

2008년 2월 미국 토네이도: 미국에서 토네이도가 발생, 52명이 사망하고 200여 명이 다쳤다. 사망자는 알라바마 주 4, 아칸소 주 13, 테네시 주 28, 켄터키 주 7명이었다.

2012년 -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의 재집권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시리아 아사드 정권에 대해 반체제파의 무력진압을 중단하는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다.

2014년 - 스코틀랜드 의회가 동성 결혼을 허용하는 법률안을 통과시키다.

2015년 - 중화민국 트랜스아시아 항공 소속의 ATR 72-600기가 지룽 강에 추락하였다.

 

문화

2007년 - 국악전문채널 국악방송(서울경기 FM 99.1MHz)이 원래 사옥인 국립국악원에서 서울 상암동 DMC로 이전했다.

2011년 - IANA가 IPv4의 할당 중지를 선언했다.

이미지출처 블루캣네트워크

IPv4는 인터넷 프로토콜의 4번째 판이며, 전 세계적으로 사용된 첫 번째 인터넷 프로토콜이다. 과거에 인터넷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프로토콜이였으나 오늘날에는 IPv6이 대중화되었다. IETF RFC 791(1981년 9월)에 기술되어 있다.

IPv4는 패킷 교환 네트워크 상에서 데이터를 교환하기 위한 프로토콜이다. 데이터가 정확하게 전달될 것을 보장하지 않고, 중복된 패킷을 전달하거나 패킷의 순서를 잘못 전달할 가능성도 있다. 데이터의 정확하고 순차적인 전달은 그보다 상위 프로토콜인 TCP에서(그리고 UDP에서도 일부) 보장한다.

IPv4의 주소체계는 총 12자리이며 네 부분으로 나뉜다. 각 부분은 0~255까지 3자리의 수로 표현된다. IPv4 주소는 32비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인터넷 사용자의 증가로 인해 주소공간의 고갈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따라 대안으로 128비트 주소체계를 갖는 IPv6가 등장하였다. 중국의 경우 주소공간 고갈을 우려하여 일부에서 독자적으로 IPv9(십진제 인터넷 주소체계)과 숫자도메인(Digital Domain Name System, DDNS)이 결합된 개념인 IP 주소와 도메인 이름이 동일한 네트워크 체제인 All-Digital-Domain-Address (ADDA)를 사용하기도 한다.

2011년 2월 4일부터 모든 IPv4 주소가 소진되어 IPv4의 할당이 중지되었다.


2011년 - 미국의 항공모함용 무인전투기 X-47B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에드워즈 공군 기지에서 첫비행에 성공했다.

 

탄생

1688년 - 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르 카르레 드 샹브렝 드 마리보

1740년 - 프랑스의 장군 퀴스틴 백작 아당 필리프

1820년 - 체코의 소설가 보제나 넴초바

1902년 - 미국의 비행기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

1906년 - 미국의 천문학자 클라이드 톰보

1906년 -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1913년 - 미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민권 운동가 로자 파크스.

로자 루이즈 매콜리 파크스(영어: Rosa Louise McCauley Parks, 1913년 2월 4일 ~ 2005년 10월 24일)는 미국의 민권 운동가이다. 이후 미국 의회에 의해 그녀는 “현대 인권 운동의 어머니”라고 칭송되었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서 백인 승객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하였고, 결국 이것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382일 동안 계속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이어졌고 인종 분리에 저항하는 큰 규모로 번져 나아갔다. 이때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여기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인권과 권익을 개선하고자 하는 미국 인권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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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파크스의 결혼 이전 원래 이름은 로자 루이즈 맥콜리(Rosa Louise McCauley)이고 1913년 2월 4일에 앨라배마 주 터스키지에서 목수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가 갈라지게 되자 어머니와 함께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근처의 파인 레벨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11살이 될 때까지는 집에서 어머니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이후에 몽고메리에 있는 여자 산업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앨라배마 주 흑인교원대학교에 입학하여 학교 선생님이 되려고 공부했으나 할머니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중퇴하였다.

당시의 미국 남부에서는 인종차별악법인, 사람을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하는 나쁜 법인 짐 크로우법에 의해 흑인과 백인은 거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분리되어 생활하였다. 버스와 기차 같은 대중 교통수단도 마찬가지였는데, 겉으로는 나눠있지 않으나 앉는 자리를 분리하도록 강제하였다. 또한 흑인 어린이들에게는 학교버스가 아예 제공되지 않아 걸어다녀야만 했다. 흑인들은 흑인을 백인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차별을 매일 겪으면서 살았던 것이다. 로자의 회고담에 따르면 "나는 매일 같이 그 버스들이 지나가는 것을 봤어요...그러나 내게는 우리가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인생이었고 이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했지요. 그 버스는 내게 세상이 검은 세상과 하얀 세상으로 나뉘어 있다는것을 실감하게된 계기였습니다."라고 한다.

1932년 로자는 레이먼드 파크스와 결혼하였다. 레이먼드는 유색인의 향상을 위한 국가 협회(NAACP,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에 참여하고 있었다. 결혼 후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생활을 꾸려 나갔으며, 그러던 중 남편의 외조로 1933년에 고등학교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약 7%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만이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이었다. 또한 ‘짐크로우 법’에 의해 흑인들의 정치 참여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3번의 도전 끝에 투표권을 등록하는데 성공하였다. 1943년 12월에 민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NAACP의 몽고메리 지부에 가입하였고 1957년까지 서기로 활동했다.

1944년에도 흑인 운동선수 재키 로빈슨이 비슷한 사건으로 제소된 적이 있었다. 또한 10년 전에도 아이린 모건이 비슷한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미국 고등법원에서 승소하였다. 이러한 승리로 각 주를 연결하는 버스에서의 분리 좌석은 철폐되었다. 1955년 3월 2일, Claudette Colvin은 하교길 버스에서 백인 남자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고 수갑이 채워져 체포되어 버스에서 쫒겨난 사건이 일어났다. 그녀는 헌법적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앞 네 줄은 백인전용으로 설정되어 있었으며 흑인들은 주로 뒤쪽에 있는 그들만의 유색 칸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런데 버스 이용 인구의 약 99.9%는 흑인들이었다고 했으며 버스가 만원이 되면 내려야만 했다. 수년동안 흑인 사회는 이러한 불평등에 대해 불만을 표시해 왔다.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하루일을 마친후 로자는 오후 6시쯤 클리블랜드 거리에서 버스를 탔다. 요금을 내고 유색칸으로 표시된 좌석들 중 가장 첫 줄의 빈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정류장을 계속 지나는 동안 앞에 있는 백인 전용칸의 좌석들이 점차 차게 되었고 엠파이어 극장 앞의 세 번째 정거장에서 몇 명의 백인들이 승차하였다. 버스 운전기사인 제임스 F. 블레이크는 두세 명의 백인 승객들이 서 있게 되자 유색 칸의 표시를 로자가 앉은 자리 뒤로 밀어내고 중간에 앉은 네 명의 흑인들에게 일어나라고 요구하였다. 세 명의 다른 흑인들은 움직였으나 로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기사가 왜 일어나지 않냐고 묻자, 로자 파크스는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요."라고 대답하였다.

버스운전기사인 블레이크는 경찰을 불러서 로자 파크스를 체포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몽고베리 시 조례 6장 11절의 분리에 관한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원래 그녀가 앉을 때에는 유색 칸이었으므로 혐의가 풀려 저녁때에는 풀려나올 수 있었다. 이 조례는 1900년에 제정된 것이었다.

그날 저녁 로자 파크스의 친구인 E.D. 닉슨은 앨라배마 주립 대학 교수인 조 안 로빈슨에게 이 사건에 대해 문의하였다. 그리고 밤을 새워 3만 5천여 장의 버스 보이콧을 선언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 또한 여성 정치 위원회(WPC, Women's Political Council)는 이 운동을 지지하였다.

12월 4일 일요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각지의 흑인 교회가 동참한다고 발표하였다. 버스 안에서 흑인이 충분히 평등하게 존중되고 흑인 운전사가 고용되며 먼저 탄 사람이 중간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때까지 투쟁하기로 하였다. 4일 후에 로자 파크스는 질서를 어지럽힌 행동을 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유죄를 선고 받아 10달러의 벌금과 4달러의 법정비용을 물게 되었다. 그녀는 이에 항소하여 무죄와 인종 분리 법에 정식으로 도전하게 되었다.

1955년 12월 5일 월요일, 성공적으로 하루 동안의 보이콧 운동을 마친 후 지온 교회에 모여 향후 전략을 논의하였다. 이 모임에서 "몽고메리 진보 협회"를 만들어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이 모임의 회장으로 젊고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덱스터 애비뉴의 침례교회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가 선출되었다.

로자 파크스는 이후 여러 고초를 겪었지만 인권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백화점에서의 직장을 잃었으며 남편 또한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였다. 1957년부터는 이 사건을 알리기 위해 각지를 돌며 연설하였다. 재봉사 일을 계속하였으나 1965년에 아프리카계인 미국 하원의원인 존 콘이어가 그녀를 비서로 고용하여 디트로이트의 사무실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녀는 1988년에 은퇴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였다.

1997년 자서전인 (로자 파크스: 나의 이야기)를 출간하였으며 1995년에는 회고록인 조용한 힘을 내놓았다.

2005년 10월 24일 92세로 운명하였다. 그는 31번째로 캐피톨 힐에 안장되었는데,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이고 흑인으로서는 두 번째 인물이다. 장례식에서는 콘돌리사 라이스 장관이 참석하였는데, 그녀는 로자 파크스가 없었다면 자신이 국무장관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24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영근

1928년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 김영남

1941년 - 대한민국의 시인 김지하

1943년 -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켄 톰프슨

1955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길정우

1956년 - 대한민국 강원도지사 최문순.

1958년 - 일본의 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

1970년 - 대한민국의 MC 박정숙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에버턴 FC 스트라이커 케빈 캠벨

1972년 - 대한민국의 열사이자 학생운동가 강경대

1973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김소원

1979년 - 대한민국의 축구인 설기현

1983년 - 대한민국의 소셜 벤쳐 공부의 신 설립자 강성태

1989년 -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 최원제. / 대한민국의 배우 김민.

1991년 - 대한민국의 배우 이아진(최아진)

1992년 - 대한민국의 모델 황현주

1993년 - 대한민국의 가수 김은비. / 대한민국의 배우 배누리.

 

사망

211년 - 로마 제국 20대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708년 - 87대 로마 교황 시신니오

1894년 - 벨기에의 음악가이자 색소폰의 발명가 아돌프 삭스

1918년 - 일본의 군인 아키야마 사네유키

1977년 - 대한민국의 국문학자 양주동.

1989년 - 대한민국의 사상가 함석헌

함석헌(1901년 3월 13일 ~ 1989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이며 기독교운동가, 시민사회운동가였다.

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민권운동가이자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 활약한 그의 본관은 강릉이며 호는 신천, 씨알, 바보새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 당한 후,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교육, 언론 활동 등에 종사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하였다. 이후에는 성서 강해 등을 하다가 1956년부터는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하여 정치, 시사 등에 대한 평론 활동, 신앙 활동, 반독재 민주화 운동 등을 하였다.

그의 종교는 초기에는 일본 유학 중에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자였다가 중기에는 기독교였으나 후기에는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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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당숙 함일형이 세운 한학 서당인 삼천재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덕일소학교에 입학, 1914년에 덕일소학교를 수료하고 그 해에 양시공립소학교에 편입하였다가 1916년 양시공립소학교를 졸업했다.

그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17년에 황득순과 결혼하고, 1919년 평양 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던 6촌 형 함석은 등의 영향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3·1 운동에 참가한 후, 3.1운동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되어 2년간 학업을 중단한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 등을 하게 된다.

1921년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했으며, 그곳에서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이때 안창호, 이승훈, 이광수, 조만식 등과도 알게되어 그들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후일 그는 맹목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가하여 그의 무교회주의를 접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하고 논객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역사과 수석과 동시에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다. 1934년~1935년에 동인지 성서조선에서 그의 주저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한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치되었다.

이후 1938년 3월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사임하였다.

1940년 평안남도 송산에서 김혁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의 이사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계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남도 대동경찰서에 체포, 유치장에서 1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초 풀려났다. 그러나 1942년 5월 성서조선 제 158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라는 우화로 관련자가 모두 투옥되는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1943년 4월 1일까지 1년간 복역하였다(수형번호1588번).

1945년 혈맹의 친구였던, 김교신이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별세하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이 되자 그는 해방이 ‘도둑같이 왔다’고 평하였다.

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탈출 전 그는 조만식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

1947년 3월부터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고, 이후 성서 강해와 신학, 종교적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조만식의 추모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 때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상경하였다. 이후 1956년부터 장준하 등의 천거로 사상계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견해를 발표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비평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1958년 5월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칼럼 하나는 화제가 되었다.

“ 전쟁이 지나가면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쌈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 진 것 아닌가? 어떤 승전축하를 할가? 슬피 울어도 부족한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달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 하고 떼어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로자는 전쟁에 이기면 상례로 처한다 했건만. 허기는 제이국민병 사건을 만들어내고 졸병의 못 밥 깍아서 제 집 짓고 호사하는 군인들께 바래기가 과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라의 울타리인가? ”

이 일로 그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그는 또 1959년 6.25 전쟁 관련자들에 대한 훈장 서훈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라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한국전쟁에 대해 비판하고 전쟁하는 국가와 거리를 두어보려는 목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1961년 장면이 국토건설단을 창설하고 강사를 초빙할 때, 국토건설요원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자 다시 야인으로 되돌아갔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있자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그해 7월 사상계에 발표한 정치평론인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신랄한 비판을 하여 군정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62년 미국 국무성내 기독교 신자 정치인들의 특별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파 인사들과 만나 친분관계를 형성하고 돌아왔다. 이후 1989년까지 매년 미국 정계의 기독교인사들의 초청을 받고 미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제3공화국 출범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67년 장준하의 국회의원 총선거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승만 정권 즉, 자유당 정권 시절부터 좌익 운동에 참여하여 3선 개헌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1970년에는 정치, 시사평론을 실은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나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이후 씨알의 소리의 발행인, 편집인, 주간 등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등 재야 언론인들을 필진으로 영입하고 1980년 1월 폐간당할 때까지 신진 문인들을 발간하였으며,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10·26 사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사건에 연루되어 윤보선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1980년 1월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복권되었다. 1980년 신군부 즉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씨알의 소리는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 복간되어 2011년 7월 현재 217호까지 출간되어오고 있다.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84년에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1985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그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에 위촉됐다. 또한 동아일보로부터 제1회 인촌상을 수여받았다.

성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각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소화하여,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비폭력주의 신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하였다(향년 87세).

장지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의 가족산에 매장되었다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 수훈 이후 묘소가 대전 현충원(애국지사 제3-329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김교신, 송두용 등과 함께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고, 퀘이커 모임(1961년과 1967년)을 계기로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 상훈으로 1987년 제1회 인촌상과 200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일대기로 내가 본 함석헌, 함석헌 평전이 있다.

그는 김교신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다. 이는 일본 유학 시절,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귀국 후에도 무교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집회의 영향을 받은 그는 이후 줄곧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

2010년 함석헌이 사회진화론 추종자인가 아닌가 하는 내용을 두고 관련 학계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2009년 3월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인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한길사에서 30권으로 발간한 ’함석헌 저작집’에 실은 글 '함석헌 저작집 발간에 부치는 말'에서 그가 사회진화론자라고 주장했다. 당시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이던 김영호는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로 소개하며, 함석헌 사상에서 거듭 반복되는 일관된 주제 가운데 하나로 사회진화론을 들었다.

이에 대해 함석헌이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씨알의 소리' 2010년 1~2월호에 반론인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의 문제'를 실어 “함석헌의 철학과 사회진화론은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반박했다. 김상봉 교수는 “사회진화론은 전쟁으로 열등한 종족이 도태되고 상대적으로 우수한 종족들만이 살아남아 인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라며 “사회진화론자들은 약자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적인 필연이므로 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뤄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말한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 사상은 ’힘의 철학’이 아니라 '사랑의 철학'이기 때문에 사회진화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김상봉은 이어 함석헌이 ’생명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라고 지적하였다. 김상봉은 함석헌이 평소 민족이기주의와 국가지상주의를 비판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2010년 김영호는 3월 16일 열린 함석헌학회 창립총회 기념 학술발표에서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을 재반박하고 나섰다. 김영호 교수는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자신이 쓴 '사회 진화론'을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로 오해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그에 따르면 ’사회진화론’에는 김상봉 교수가 받아들인 '사회다윈주의' 말고도 여러 가지 다른 일반론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함석헌이 쓴 “지금까지 생각의 주체는 개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커뮤니티이다. 그런 역사의 진화단계가 지금이다”라는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이 전체사회, 곧 인류공동체로서의 사회의 진화를 통찰했다고 강조하였다.

함석헌은 '누가 나처럼 수줍은 놈을 미친놈을 만들어 놓았느냐'라고 하기도 했다.

고려대학교 화학공학과 교수를 역임한 철학자 김용준은 함석헌이 철학자라고 하였다. 그는 "나는 화학 빼고는 다 함선생님한테 배웠다고. 요즘 사람들은 함석헌하면 마치 주먹질만 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것은 넌센스야. 그건 함선생님의 일부분이고 80퍼센트는 도를 찾아 헤맸던 구도자"라고 하였다.

그는 한국 전쟁 직전 전쟁을 예상하였다 한다. 김용준에 의하면 '6.25 바로 일주일 전에 함석헌이 “이 백성들이 왜 이러지. 지금 밑에서는 용암이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그 위에 살짝 덮힌 암반을 마치 만세반석처럼 여기고 까불고 있으니 이게 언제 터질지 몰라” 하고 말씀을 하시더라'는 것이다.
1979년, 1985년 등 2차례에 걸쳐 미국 퀘이커 세계 봉사회가 함석헌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AFSC는 1947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이래로, 노벨 평화상 후보추천규정에 따라, 해마다 후보를 추천해오고 있다.
박노자는 자신의 칼럼 '국가의 살인'에서 "20세기 한반도의 유일하다 싶은 기독교적 평화주의 사상가"로 불렀다.


199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장덕

장덕(1961년 4월 21일 ~ 1990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그녀는 싱어송라이터로서 진미령. 이은하. 양하영. 임병수. 김범룡. 국보자매 등 많은 다른 가수들의 음반에 참여하며 작사가.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음반 프로듀서로도 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친오빠 장현과 함께 현이와 덕이를 결성, 만 14세의 최연소 싱어송라이터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화제를 모은 바 있으며, 만 15세 때 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연소 작사. 작곡가로 출전하여 입상하는 등 천재소녀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로써 배우로도 활동, 1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도 거듭났다. 그리고 솔로로 독립해 성인이 된 후에도 더욱 많은 연예 활동을 하여 스타의 자리를 지켰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된 장덕 작사. 작곡의 작품 개수는 총 129개이며, 생전 남긴 창작작품은 록. 포크. 리듬 앤 블루스(R&B). 컨트리. 댄스. 펑키. 트로트. 발라드. 융합(복합) 등 다양한 장르의 300여개 정도이다.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고 가수활동을 중단하며 오빠의 병간호를 하던 장덕은 점점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1990년 1월 20일 장덕은 모처럼 가요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하는데 이것이 장덕이 대중 앞에 선 마지막 모습이었다. 1990년 2월 4일 오전 2시 50분 서울특별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 5동 1008호 안방에서 장덕은 다량의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 등 세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한 후 이상증세를 보이며 신음 중이었는데, 이것을 의상 담당 문인옥이 발견하고 장덕의 아버지에게 연락, 서대문 고려병원으로 옮겼으나 동시 투여에 따른 상승작용 즉, 약물 상호작용에 의한 쇼크로 별세했다. 그녀의 나이 만 28세였다. 문인옥의 말에 따르면 장덕은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장덕이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는 오빠 장현의 병간호를 오래 해왔으며 최근 이은하. 조영남. 최진희. 변진섭. 김승진. 하춘화 등 동료 가수들에게 곡 의뢰를 받고 신곡 작업까지 하는 등 빽빽한 일정으로 무리를 해왔다는 주변의 진술에 따라 과로와 감기증세 때문에 과다복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숨진 것으로 판명했다.

하지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알려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충격과 더불어 자살설까지 나돌며 세간의 관심이 불거졌다. 이후 그녀의 유작 앨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동생 장덕이 세상을 떠나자 장현은 인터뷰에서 "동생의 죽음이 자신을 대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앞선다"고 고백했다. 봉천동 자택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가수 이태원의 사회로 남궁옥분 등 50여명의 동료 가수들의 오열 속에 진행되었다. 그 해 6월 장덕. 장현 남매의 매니저로서 그들이 죽는 날 까지 항상 함께 했던 김철한의 기획하에 전영록, 이선희, 김범룡, 박혜성, 최성수, 진미령, 임종환, 위일청, 지예, 양하영, 임지훈 등 12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장덕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된다. 이 음반은 장덕이 생전 발표한 기존 곡들을 리메이크 하고 있는 형태이지만 일어나 등 악보로만 남아있던 미발표곡들도 수록되어 있으며 동명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1990년 한해 총결산 가요순위 톱10 안에 들게 된다.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장현은 7월 중순경 병세가 악화돼 경기도 성남시 성남병원으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혼수상태에서 인공호흡으로 연명했지만 8월 16일 오후 4시 20분경 아내와 아들 원을 남겨둔 채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향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을 접한 대중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1995년 - 미국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2001년 - 프랑스에서 활동한 그리스 작곡가 이안니스 크세나키스

2002년 - 대한민국의 목회자 김관석

2004년 - 대한민국의 부산광역시장 안상영

2012년 - 영국의 군인 플로렌스 그린

2014년 - 대한민국의 언론인, 前 한국방송공사의 사장 박권상

2017년 - 대한민국의 정치가 서영훈

2018년 - 미국의 배우 존 머호니

2019년 - 대한민국의 의사 윤한덕

2019년 - 프랑스의 스키점프선수 마티 뉘캐넨

 

기념일

한국의 설날 - 1992년, 2038년, 2057년

세계 암의 날

로자 파크스 데이: 미국

뿌요의 날: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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