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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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미지출처 데일리저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역사 중 하나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영상출처 EBS)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 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당시 광주 시민은 신군부 세력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실행한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로 인해 발생한 헌정 파괴, 민주화 역행에 항거했으며, 신군부는 사전에 시위 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투입해 이를 폭력적으로 진압하여 수많은 시민이 희생되었다. 이후 무장한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지속적인 교전이 벌어져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대한민국 내 언론 통제로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렸다. 1995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으로 희생자에게 하는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이뤄졌고, 1997년에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1997년부터 대한민국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렸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도 본 사건을 광주 인민봉기로 부르며 해마다 기념하고 있다.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영화

 

꽃잎

5월의 광주, 우리들은 의문사한 친구의 여동생을 찾아 기차에 오른다. 그녀(이정현)는 김추자의 꽃잎을 잘 부르던 소녀였다. 공사장 인부인 장(문성근)이 길거리에서 미친 소녀를 만난다. 그녀는 장을 오빠라고 부르면서 졸졸 따라온다. 장은 그녀에게 강간과 폭력을 가하지만 그녀는 떠날 줄 모른다. 그녀의 악몽과 헛소리들을 지켜보던 장은 차츰 그녀의 아픔과 슬픔을 느끼게 되고 어느 무덤을 찾아가 고백하는 그녀의 진실을 듣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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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휴가

평범한 사람들의 평생 잊지 못 할 열흘간의 기억1980년 5월, 광주.그 날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믿기 싫었습니다. 광주에 사는 택시기사 민우(김상경 분).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끔찍이 아끼는 동생 진우(이준기 분)와 단둘이 사는 그는 오직 진우 하나만을 바라보며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진우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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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

1980년 5월.. 그리고 26년 후학살의 주범 ‘그 사람’을 단죄하라!광주 수호파 중간보스 곽진배, 국가대표 사격선수 심미진, 서대문소속 경찰 권정혁, 5. 18 민주화운동 희생자 2세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을 불러 모은 보안업체 대기업 회장 김갑세와 그의 비서 김주안의 제안은 바로 ‘그 사람’을 타겟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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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1980년 5월, 서울 택시운전사. “광주? 돈 워리, 돈 워리! 아이 베스트 드라이버”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은 외국손님을 태우고 광주에 갔다 통금 전에 돌아오면밀린 월세를 갚을 수 있는 거금 10만원을 준다는 말에독일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태우고 영문도 모른 채 길을 나선다.광주 그리고 사람들. “모르겄어라, 우덜도 우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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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날짜 1980년 5월 18일 ~ 1980년 5월 27일 
지역 대한민국 대한민국 전라남도 광주시(현 광주광역시) 
결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유혈 진압 
시위 당사자 
대한민국 광주 시위대 대한민국 대한민국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전라남도 경찰국
주요 인물
대한민국 윤상원 대한민국보안사령관 전두환
대한민국 박남선 대한민국 계엄사령관 윤흥정 → 대한민국 대한민국 소준열
대한민국 정상용 대한민국 31사단장 정웅
대한민국 김종배 대한민국 특전사령관 정호용
  대한민국 11공수여단장 최웅
  전남도경국장 안병하
사상자
사망 : 165명 사망 : 군인 23명, 경찰 4명
부상 후유증 사망자 : 376명 군경 부상자 : 253명
행방불명 : 76명  
부상 : 3,139명  

 

 

5.18 광주 민주항쟁의 시작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79년 10.26 사건으로 인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전두환 등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였고 실권자로 떠올랐다. 1980년 초부터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K-공작 계획을 실행하여 언론을 조종. 통제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은 같은 해 4월 14일에 중앙 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돼 대한민국 내의 정보기관을 모두 장악했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관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같은 달 국회에서는 계엄 해제와 개헌 논의를 비롯한 정치 현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월 17일 24시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고, 계엄 포고령 10호를 선포하여 정치활동 금지령. 휴교령. 언론 보도검열 강화 같은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 수천 명을 감금하고 군 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5월 18일에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부마 민주항쟁 때처럼 광주의 민주화 요구 시위도 강경 진압하면 잠잠해질 것으로 판단하였고, 공수부대 같은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신군부는 1980년 3월부터 5월 18일 직전까지 공수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했고, 5월 초부터 군을 사전 이동 배치하고 신군부에 반발하는 시위를 진압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5월 18일 16시 이후로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닥치는 대로 살상. 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두려움을 넘어 분노를 느꼈고, 그 결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에 전남대학교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다음에 철수했다. 이 날 저녁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 외곽도로 봉쇄작전을 펼쳤으며, 이 과정에서 차량 통행자나 지역 주민들의 희생이 발생했다.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 충정작전을 실시해 무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 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이후 호남 전역에서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반감이 극도로 높아졌다. 당시 신군부는 언론 사전검열을 실시하고 관제 보도를 의무화하도록 해 언론을 장악하고 조종했는데, 주한 미 대사관과 주한미군 사령관 등 관련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한민국 내 언론이 미국이 신군부의 쿠데타와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승인했다는 보도를 쏟아내자 학생운동권 내 미국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이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과 강원대학교 성조기 소각 사건을 비롯,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발생한 각종 민주화 혹은 반미 집회와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신군부 인사를 주축으로 한 제5공화국 정부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 또는 김대중의 사주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왜곡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 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로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 1996년 자 검찰의 수사에 의해 신군부 인사의 쿠데타를 통한 집권 의도와 5.18 민주화운동 유혈진압 책임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대법원이 1997년에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 대법원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피고인(신군부)의 국헌문란행위에 항의하는 광주시민들은 주권자인 국민이 헌법수호를 위하여 결집을 이룬 것."이라고 규정했다. 대법원은 전두환, 정호용, 이희성, 황영시, 주영복 등을 5.18 민주화운동의 진압 책임자로 판시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의 명칭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5.18, 광주항쟁, 광주학살, 광주사태, 광주 민중봉기, 광주시민항쟁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명칭은 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80년 5월 21일에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라고 군부 발표에서 언급한 것이 처음으로, 이후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 소요사태 또는 광주사태 등으로 보도되면서 일반화되었다. 이는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을 불순분자들이 체제 전복을 기도한 사태로 왜곡한 신군부의 주장에 근거한 호칭으로 제5공화국 기간 내내 사용됐으며, 현재는 당시 호칭에 익숙한 노년층이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일부 우파 인사들이 사용하고 있다. 현재의 명칭인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1988년 이후로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사건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나왔고, 이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의 공식 언급에서도 이 명칭이 사용됨으로써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한편, 신군부의 군사독재와 폭력에 맞선 민중항쟁을 광주 민중들이 주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광주 민중항쟁 또는 광주항쟁도 지역 사회와 5월 단체 등이 중심으로서 1980년대부터 사용됐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를 딴 5.18도 널리 통용되는 명칭이라 생각하면 된다.

 

사건 발생 원인

1979년 10월 26일,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한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는 막을 내렸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되돌아야 한다는 움직임 속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11월 7일에 긴급조치를 해제해 긴급조치에 의해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용했다. 하지만 12월 12일에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사령관 육군 참모총장인 정승화를 체포해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국민들의 민주 정권 수립 요구는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전두환은 1980년 2월에 보안사령부에 지시를 내려 K-공작계획을 실행해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의 정치 참여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여론을 조성해 나가고 있었다. 1980년 5월에 초순경 보안사령관 겸 중앙 정보부장 서리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에서는 국회와 내각을 무력화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 비상기구 설치 등을 중심으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로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했다.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국가보위 비상기구를 설치해 신군부에 대한 국민의 저항을 탄압하면서 신군부가 정국을 주도하고, 국회 폐쇄와 정치인 체포로 신군부의 안정적인 정국 장악을 담보한다는 것이 시국수습방안을 기획한 의도였다.

 

 

중앙정보부는 일본 내각조사실의 첩보를 토대로 5월 10일에 대북 특이동향을 경고하는 보고서, 북괴남침설을 작성했고, 5월 12일 심야에 임시 국무회의에서 관련 내용을 보고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5월 11일에 북괴남침설과 같은 첩보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 내린 상황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은 5월 13일에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으며, 전두환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위해 흘린 구실이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같은 날에 미국은 북괴남침설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훗날 남침설을 제보했다고 알려진 당시 일본의 내각 조사실 한반도 담당 반장은 "그런 구체적인 내용을 말한 적도, 그런 정보도 없었다."라고 밝혀 신군부가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악용했던 북괴남침설은 신군부로 말미암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해 5월 중순부터 정부와 국회에서는 민주화 일정을 앞당기고 있었다. 5월  12일에 신민당과 공화당 양당 총무들은 개헌안을 접수하였고, 비상계엄 해제 등의 정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해 5월 20일 10시 임시국회의 소집을 공고했다. 같은 날 신현확 총리는 국회와 협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하고, 개헌 일정을 앞당긴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1980년 5월 초부터 신군부 세력의 정치 관여를 반대하기 위해, 학생과 시민 10만여 명이 모여 서울역에서 시위를 벌였고, 5월 15일 시위대 대열 속에 속했던 청년 한 명이 버스를 탈취하여 저지선을 돌파, 전경에 돌진하여 전경 이성재 일경이 사망하고 4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에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내려 18일 1시부터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신군부는 같은 날 새벽 2시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해 헌정중단 사태가 발생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정치인 26명은 합동수사본부로 연행됐고, 2,600여 명의 학생, 교수, 재야인사 등이 체포됐다.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무장 헌병들에게 가택 연금됐다. 신군부가 이날 내린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 정치 활동 금지. 휴교령 등의 민주주의 역행 조치에 항의해,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5월 18일 오전에 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했고, 공수부대는 학생들을 구타, 폭행으로 진압했다. 과격한 공수부대의 투입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공수부대의 투입에는 향토 사단장 정웅의 개입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정웅은 광주 법정에서까지 부정하지만, 투입됐던 진압군의 증언에 의하면 정웅은 시위대의 강경진압, 해산, 전원 체포를 주문하였다고 한다.

 

공수부대의 폭력적 진압의 배경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조치에 대한 반대 집회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전두환, 황영시, 정호용 등 신군부 핵심세력은 진압병력 투입 및 강경진압 방침을 결정했다. 시국수습방안은 계엄 확대와 동시에 공수부대를 투입해 과감한 방법의 타격으로 시위대를 진압한다는 지침이 즉각 실행될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1980년 3월 4일부터 3월 6일까지 수도경비사령부에서는 제1차 충정회의에서 군의 투입을 요하는 사태 발생 시 강경한 응징조치가 필요하다고 내려졌으며, 이미 80년 초에 학생 시위가 가열될 것을 대비해 전국 군부대에 충정훈련이 강도 높게 실시됐다. 5월 10일부터 2군 사령부에서는 광주, 대전 등에 제7공수여단을 배치하는 방안을 의논했다. 5월 14일부터 제31사단은 광주 지역의 주요 보안 목표를 점거하기 시작했으며, 5월 15일 제7공수여단은 광주, 대전으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 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계엄사령부와 2군 사령부 등 체포 위주로 진압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 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5월 18시 23시부로 2군 사령관의 강조 사항이 각 공수부대에 지시됐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 지시는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하며,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하여 주모자 체포하고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같은 날 내려진 지시는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하며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토록 지시했다. 이 같은 지침으로 인해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더욱 과격한 진압에 나서게 되었다.

계엄 사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김대중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나 고정간첩들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담화문을 5월 21일에 발표했다.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

 

이렇듯 사실을 왜곡한 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를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과 지침들은 공수부대원들에게 일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 같은 요인들 때문에 현장에서 시위 진압에 나섰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 또는 시위대를 적으로 규정했고,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폭력적이고 가혹한 진압을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전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월 15일 자 광주에서는 오후 4시에 대학생 3만여 명이 도청 앞에 모여 복학생 대표 정동년이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는 등 대규모 시가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학생 지도부는 학생들에게 휴교령을 내리면 16일 오전 10시에 학교 정문 앞에 모여 시위를 벌인 다음에 정오에 도청 앞 분수대로 집결하라는 시위 방침을 시달했다. 5월 17일 오후 9시, 신군부 세력의 압력으로 개최된 비상 국무회의는 비상계엄령을 내리도록 의결했다. 보안사령부는 오후 10시경에 야당 인사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체포 감금했고,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국회를 점령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날 자정 비상계엄 전국 확대와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가 선포돼 대학 휴교령, 보도검열 강화, 정치활동 금지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 새벽 2시 제7공수부대는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를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각기 조를 편성해 광주 시내 각 학교의 입구를 지키고 검문 검속 했다.

 

대학생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8일 당일 아침 9시 이후, 텔레비전 방송, 라디오, 신문을 통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 소식이 보도됐다. 전남대학교 학생 100여 명은 18일 오전에 교문 출입을 저지하는 공수부대원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공수부대 측에서 부상자가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공수부대원들로 인해 학생들은 구타를 당했고, 일부 학생들은 금남로로 이동했다. 전남대 학생 300여 명은 가톨릭회관에 집결해 시위했다. 이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을 시도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계엄군의 무차별 진압

신군부는 신속하고 강력한 시위 진압을 위해 5월 18일 오후 4시에 제7공수여단을 시내에 투입했다. 제7공수여단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행인들에게도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했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과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했다.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무차별 살육을 가한 사례들은 다음과 같다.

  • 북동 276번지 3층 건물에서 2층에는 동아일보 광주 지사가 있고, 거기에는 정은철 총무와 배달 학생들과 도망 온 시민 3명이 있다. 공수부대원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와 도망 온 시민 3명을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긴 뒤 데리고 갔다. 한참 뒤, 두 군인들은 다시 들어와 정은철 총무 뒷덜미를 낚아챈다. 정은철 총무는 업무를 보던 상태였다. 정 총무는 의자와 함께 넘어졌고 두 군인들은 정 총무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정 총무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꿈틀거렸고, 두 군인은 정 총무의 두 발을 양쪽에 하나씩 붙잡고 끌고 갔다. 머리는 땅바닥에 끌린 채였다. 그 뒤, 두 군인들은 또 들어와서 담당구역 수금하고 들어왔던 배달 학생 박준하 씨를 진압봉으로 수도 없이 때리고 짓밟은 뒤에 정 총무처럼 끌고 나갔다. 박준하 씨는 계단에서 실신했고, 두 군인은 그대로 팽개쳐두고 내려갔다

 

  • 군인들은 부부들이 탄 택시를 붙잡았다. 부부들은 끌려나왔고 군인들은 몽둥이와 장작개비와 군홧발 세례를 먹인다. 신부는 치마저고리가 갈기갈기 찢기고 신랑은 아프다며 소리를 질렀다. 군인들은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 군용트럭이 11대가 줄을 지어서 행렬해 있다. 그 대열에서 마지막 차량에 젊은 여성은 옷이 갈기찢겨 젖가슴이 보일정도였고, 그 옷은 피투성이었다. 병원 옷을 입은 사람이 하얀 간호사 가운을 들고 나왔다. 병원 옷을 입은 남자는 옷을 여자에게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혀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받았다.

 

  •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쫓아왔다. 이민오씨는 교장관사까지 도망쳤지만 거기까지 쫓겨 구타당했다.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

 

  • 청각장애인 김경철 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구타를 당한다. 그 결과 뒤통수가 깨지고 눈이 터졌으며 팔과 어깨가 부셔졌고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지는 부상을 당했다. (후두부 찰과상과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와 대퇴부 타박상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과정

 

광주 시민의 시위와 계엄군의 폭력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계엄군의 진압은 가혹하게 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폭력을 가했다.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 시외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기도 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 교육사령부를 찾아가 직접 항의를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 MBC 방송국을 방화했다. 20일 24시 계엄군은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 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11 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월 21일 오전에 전남도청과 전남대학교 앞에서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하고 있었다. 시민 대표는 21일 오전에 계엄군과 협상을 진행했지만 결렬됐다. 전남도지사는 헬기에 타고 확성기로 21일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러나 공수부대 철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도청 집단 발포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 빌딩. 수협. 광주관광호텔 등에 4인 1조로 올라가 조준사격을 가했고,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날 광주시내 120여 개의 병원과 보건소. 3개의 종합병원 등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상자들이 몰려들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광주 시민의 항쟁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집단 발포가 일어난 21일 오후부터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전라남도 나주시, 화순군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시민들은 광주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인 아시아자동차로 몰려가 차량을 탈취했다. 일부 시민군은 26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나주와 화순 등으로 외부에 광주의 소식을 알리러 떠났다. 총과 실탄, 폭약 등 각지에서 탈취된 무기는 시민들에게 분배됐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시 외곽으로 퇴각했다. 시민군은 21일 저녁에 계엄군이 물러난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21일 저녁,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 정도영 준장은 자위권 발동을 경고하는 담화문을 계엄사령관 이희성에게 전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은 오후 7시에 보안사에서 전달한 자위권 발동 경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희성은 광주 지역의 시위를 광주사태로 명명하고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묘사했다.

 

계엄사령관 이희성의 담화문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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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오늘의 국가적 위기에 처하여 국가 민족의 안전과 생존권을 보유하고 사회 안녕질서를 유지해야 할 중대한 책무를 지고 있는 계엄사령관으로서 현 광주시 일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비극적인 사태를 냉철한 이성과 자제로써 슬기롭게 극복해 줄 것을 광주시민 여러분의 전통적인 애국심에 호소하여 간곡히 당부코자 합니다. 지난 18일 수백 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평화적 시위가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 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 행위를 선도한데 기인된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한 불순 분자 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로서 급기야는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와 폭약을 탈취하여 난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의 극한적인 목표는 너무나도 자명하며 사태의 악화는 국가 민족의 운명에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한 것이 사실입니다.

본인은 순수한 여러분의 애국 충정과 애향심이 이들의 불순한 지역감정 유발 책동에 현혹되거나 본의 아니게 말려들어 돌이킬 수 없는 국가적 파탄을 자초하는 일이 없도록 조속히 이성을 회복하고 질서 유지에 앞장서 주시기 바라며 가정과 지역의 평화적 번영을 위하여 각자 맡은 바 생업에 전념해 주시기를 충심으로 당부하는 바이며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경고
1. 지난 18일에 발생한 광주 지역 난동은 치안 유지를 매우 어렵게 하고 있으며 계엄군은 폭력으로 국내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하여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2. 지금 광주 지역에서 야기되고 있는 상황을 볼 때 법을 어기고 난동을 부리는 폭도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대다수의 주민 여러분은 애국심을 가진 선한 국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선량한 시민 여러분께서는 가능한 한 난폭한 폭도들로 인해 불의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거리로 나오지 말고 집 안에 꼭 계실 것을 권고합니다.
3. 또한 여러분이 아끼는 고장이 황폐화되어 여러분의 생업과 가정이 파탄되지 않도록 자중자애하시고 과단성 있는 태도로 폭도와 분리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계엄군의 치안 회복을 위한 노력에 최대의 협조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광주 외곽 봉쇄 작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히 차단하라는 지시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 교육사령부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 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광주 외곽 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사망했다.

 

광주 시민의 자치

 

22일 이후로 광주는 군인들에게 완전 포위, 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따르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자치 질서를 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자유 민주화 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높은 시민정신과 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다 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 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 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 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기간은 광주 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지식인들은 광주 자유 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광주 재진입 작전

 

5월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상무 충정작전이 시작됐다. 5월 27일 새벽 2시에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아침, 전라남도 도청에서 일방적으로 1만여 발을 사격해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살상했다. 도청 내 일부 시민군은 자진 투항하자는 의견과 결사항쟁 의견으로 나뉘었고,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한 채 날이 밝으면서 계엄군이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 생존자를 체포. 연행했고,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미국의 반응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월 18일 0시에 시작된 비상계엄 확대 선포 2시간 전에 갑작스럽게 이를 미국에 통보했다. 미국은 한국군 당국이 정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대학과 국회를 폐쇄하려는 의도를 사전에 알지 못했다. 미국은 5월 18일 오전에 서울과 워싱턴에서 계엄령 실시에 강력하고 맹렬하게 항의했다. 계엄사령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에 있지 않았다. 그 기간에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 아래에 있지 않았다. 특전사령부 예하 여단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하에 있었던 적이 없다. 20사단의 경우, 10. 26 사건에 뒤따를 혼란에 대비한다는 대한민국 측 요청에 따라, 10월 27일에 20사단 포병대와 예하 3개 연대의 작전통제권이 한미연합사에서 대한민국 육군으로 넘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 특전사 부대가 광주에 배치된 것을 사전에 몰랐으며,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미국은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초기에 방관적이었다. 5월 18일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각에 주한 미 대사관으로부터 미국 국무부로 타전된 전문에서는 광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 5월 20일까지만 해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한 미국 측의 인식은 막연한 소문에 불과했고, 공수부대의 광주 과잉진압 문제는 서울에서 일어났던 신군부에 의한 정치탄압 사건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미국의 인식이 바뀌기 시작한 건 5월 21일부터였다. 이 때는 이미 5. 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의 씨앗이 된, 시위 군중에 대한 강압적인 진압이 이루어진 다음에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시점이다. 미국은 이후에 광주사태에 대한 평가에서 첫 무력 진압이 이루어진 18일이나 27일의 전면 재 진압보다는 5월 21일을 사태의 정점으로 파악하고 있다. 미국은 5월 21일 이후에 신군부와 신군부에 반대하는 대한민국 국민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입장 표명의 압력을 받았다.

 

날짜 시간별 사건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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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금요일 이전

  • 5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전국 대학생 10~20만 명이 모여 지상 서울역 광장 주변에서 집회.
  • 5월 15일 대학생 단체 간부들에 의해 대한민국 경찰의 출동 소식을 사전에 접하고 서서히 해산.

5월 17일 토요일

  • 21시 40분: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 22시 00분: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 검속 실시.
  • 24시 00분: 5월 17일 24시부로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신군부 계엄포고 제10호를 통해 정치활동 금지, 언론검열 강화, 대학교 휴교령 선포. 주요 도시의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전주 전북대에 주둔한 계엄군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까지도 잡아들여 폭행. 이 과정에서 대학생 사망자가 1명 발생. 전북대 농학과 2년인 이세종(당시 21세)은 5월 17일 12시께 계엄군에 쫓기다 전북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추락사).

5월 18일 일요일

  • 01~02시 경: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가 김대중 등 재야 인사와 김종필 등 공화당 지도자를 체포하고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점령. 국회 기능 마비됨.
  • 09시 40분: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 학생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 10시 00분: 전남대학교 주둔 계엄군을 상대로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 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 시위를 벌임. 이 과정에서 공수부대를 향해 투석을 시작.
  • 10시 15분: 학생들이 던진 돌에 부상자가 발생한 데에 분개한 계엄군(공수부대원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항의 시위 진압.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계엄군측, 시민측 첫 번째 부상자 발생)
  • 10시 20분: 일부 학생들이 교문을 벗어나 광주 금남로로 이동함.
  • 11시 00분: 전남대 300여 명 가톨릭 회관 집결,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하며 해산시킴.
  • 12시 00분: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옴.
  • 15시 40분: 금남로 유동 삼거리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강경 진압. 진압 과정에서 시위대로 추정되는 시민들을 잡아다가 구타 및 현장 체포함.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청각장애인인 김경철이 계엄군에게 전신 구타 당함.
  • 19시 02분: 계엄사령부, 통행금지령 확대 국내외 방송을 통해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9시로 당긴다고 발표함.
  • 20시 00분: 공수부대의 무차별 구타에 불안, 흥분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학생들에게 동조.
  • 21시 00분: 계엄사령부 사령관 이희성 명의로 방송과 라디오를 통해 해산 경고문 발표함.

5월 19일 월요일

  • 03시 00분: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청각장애인 김경철 병원에서 사망 - 두 번째 희생자).
  • 09시 30분: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 10시 00분: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11공수여단 위력 시위 이후 착검한 상태로 진입, 대검으로 인한 자상자 발생. 11공수여단 약 천여 명이 강경 진압을 강행했고, 3~4명이 한 조가 돼 골목마다 누비며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폭행.
  • 14시 40분: 조선대학교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돼 무리한 진압 작전 전개.
  • 15시 00분: 시내 기관장과 유지들, 회의를 하고 시위 진압을 완화해 달라고 계엄사령부에 건의.
  • 16시 30분: 계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 20시 00분: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수만 명이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비상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침.

5월 20일 화요일

  • 08시 00분: 고등학생들의 참여에 자극받은 정부는 문교부를 통해 광주 시내 및 광산군, 나주군 일대 고등학교에 휴교 조치 하달.
  • 10시 20분: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 명이 속옷만 입은 채 끌려나와 마구잡이 구타 당함. 공수부대와 시민 사이에 공방전 계속.
  • 18시 4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금남로에서 도청을 향해 차량 경적 시위.
  • 20시 00분: 택시 및 버스 200여 대가 계엄군 및 공수부대원의 진입을 가로막음.
  • 20시 10분: 시위대, 도청으로 서서히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택시와 차량에 가로막힌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함.
  • 20시 00분: 3공수, 11공수 여단장 실탄 분배 지시 (3공수여단장 실탄 장착 지시, 11공수의 경우 61대대, 62대대가 각각 1,000여발씩 분배)
  • 21시 00분: 택시 200여 대와 버스들은 진입로를 차단, 공수부대 및 경찰과 충돌. 일부는 우회해서 감.
  • 21시 05분: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해 경찰 4명 사망.
  • 21시 50분: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 보도한 광주 MBC 건물 방화.
  • 23시 00분: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 사망. 시민 수십 명 부상.

5월 21일 수요일

  • 00시 35분: 노동청 방면에서 군중 2만여 명이 계엄군과 공방전 전개, 광주역에서 철수하던 계엄군, 대검과 곤봉 등으로 시위대 2명 살해. 계엄군 측 부상자 5명으로 보고됨.
  • 02시 18분: 시외전화 두절.
  • 04시 00분: 시민들이 광주역 광장에서 사망한 시체 2구를 손수레에 싣고 금남로에 등장함.
  • 04시 30분: 광주 KBS 건물 방화.
  • 08시 00분: 시위대, 광주공업단지 입구에서 진압 명령을 받고 투입된 20사단 병력과 충돌함.
  • 10시 00분: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군용 트럭, 장갑차 탈취해 광주시 내로 몰고들어옴.
  • 10시 15분: 도청 앞, 실탄을 지급받은 공수부대원을 맨 앞으로 배치함.
  • 11시 10분: 대형 헬기가 도청광장에 도착함.
  • 12시 10분: 전남대 진출을 시도한 시위대가 전남대 앞에 배치된 공수부대원들의 저지에 밀려 신안동 굴다리까지 1 km 후퇴. 공수부대의 진압 도중 시민 4명 사망함.
  • 12시 59분: 아시아자동차공장에서 몰고 온 장갑차 1대가 도청광장으로 기습 진출.
  • 13시 00분: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됨.
  • 13시 20분: 청년들이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집중사격을 받고 계속 쓰러짐, 이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에 올라가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시작.
  • 14시 00분: 시위대가 나주시, 화순군 등지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 시작.
  • 14시 15분: 도지사, 경찰 헬기에서 시위 해산을 종용하는 설득 방송.
  • 14시 40분: 시민들이 지원동의 탄약고에서 TNT 입수.
  • 15시 48분: 공수부대원들이 주요 빌딩 옥상에서 시위대를 향해 조준 사격.
  • 16시 00분: 화순군, 나주군 지역에서 무기 획득한 시위대들이 도청 앞에서 시가전 전개.
  • 16시 43분: 학생들, 전남대병원 옥상에 M2 중기관총 2대 설치.
  • 17시 30분: 7공수여단, 11공수여단 도청에서 조선대학교로 철수,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로 철수.

5월 22일 목요일

  • 광주 시내가 계엄군에 의해 고립됨.
  • 광주시내에서 시민군이 계엄군을 모두 몰아냄 (26일 새벽에 계엄군이 재진입할 때까지 광주시내에서 계엄군이 모두 철수).
  • 09시 00분: 도청광장과 금남로에 시민들 집결.
  • 10시 30분: 군용 헬기 공중 선회하며 "폭도들에게 알린다"라는 내용의 전단 살포.
  • 11시 25분: 적십자병원 헌혈차와 시위대 지프가 돌아다니며 헌혈 호소.
  • 12시 00분: 도청 옥상의 태극기가 검은 리본과 함께 반기 게양.
  • 13시 30분: 시민수습위원회 대표 8명이 상무대 계엄 분소 방문, 7개 항의 수습안 전달.
  • 15시 58분: 시체 18구를 도청광장에 안치한 채 시민대회 개최.
  • 17시 18분: 수습위 대표, 상무대 방문 결과 보고.
  • 17시 40분: 도청광장에 시체 23구 도착.
  • 18시 00분: 20사단이 통합병원 진입로 확보를 위해 1 km 전진하며 사격, 작전 중 지역 주민 8명 사망.
  • 19시 00분: 동양방송 라디오(현 KBS 제3라디오)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기상도에서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중간조사 결과 뉴스 보도.
  • 21시 30분: 박충훈 신임 국무총리, "광주는 치안 부재 상태"라고 방송.

5월 23일 금요일

  • 08시 00분: 학생들, 시민들에게 청소 협조 호소.
  • 10시 00분: 시민 5만여 명이 도청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함.
  • 10시 15분: 수습위 무기회수반을 조직해 총기 회수 작업 시작.
  • 11시 45분: 도청과 광장 주변에 사망자 명단과 인상착의 벽보 게시.
  • 13시 00분: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공수부대가 소형버스에 총격, 17명 사망.
  • 15시 00분: 제1차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계엄사의 '경고문' 전단이 시내 전역에 살포.
  • 19시 40분: 최초 석방자 33명 도청광장에 도착.

5월 24일 토요일

  • 13시 20분: 11공수부대, 원제 마을 저수지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 4명 사망.
  • 14시 20분: 송암동에서 11공수부대와 전투교육사령부 부대 사이에 오인 총격전 발생 9명 사망 40여명 부상, 오인 총격전 직후 공수부대원이 주변 민가를 수색해 마을 청년 4명 처형.
  • 14시 50분: 제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5월 25일 일요일

  • 11시 00분: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메시지와 함께 광주민주항쟁 구호대책비 1천만 원 전달.
  • 15시 00분: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재야 민주인사들, 김성용 신부의 4개항 수습안에 대해 만장일치 채택.
  • 21시 10분: 학생수습대책위원들, 범죄 발생 예방과 식량 공급 청소 문제 등 논의.

5월 26일 월요일

  • 김성용 신부를 비롯한 시민 대표들이 재진입하는 계엄군의 탱크를 막아섬. 시민군을 설득하기 위한 협상시간 요구로 계엄군 진군 멈춤.
  • 05시 20분: 계엄군, 화정동 쪽에서 농촌진흥원 앞까지 진출.
  • 08시 00분: 시민수습대책위원들, 계엄군의 시내 진입 저지를 위해 농성동에서 죽음의 행진 감행.
  • 10시 00분: 제4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4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광주시장에게 생필품 보급 등 8개항 요구.
  • 15시 00분: 제5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개최.
  • 17시 00분: 학생수습위원회 대변인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상황 브리핑.
  • 19시 10분: 시민군, "계엄군이 오늘 밤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공식 발표. 어린 학생과 여성들을 귀가 조치.
  • 24시 00분: 시내전화 일제히 두절됨.

5월 27일 화요일

  • 02시 00분: 계엄군의 광주시 진입.
  • 03시 00분: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함.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
  • 04시 00분: 도청 주변 완전 포위, 금남로에서 시가전 전개.
  • 04시 10분: 계엄군 특공대, 도청 안에 있던 시민군에게 사격
  • 05시 00분: 시민군 생존자들 자진해서 자수. 자수 과정에서 간첩으로 의심되는 사람 3명을 시민군이 자진해서 체포해 계엄군과 경찰에게 넘겼음.
  • 05시 10분: 계엄군, 도청을 비롯한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진압 작전 종료.
  • 06시 00분: 계엄군,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오지 말라고 무선 방송.
  • 07시 00분: 공수부대, 20사단 병력에게 도청 인계.
  • 08시 50분: 시내전화 통화 재개.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피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는 약 200여 명이고 부상자 등 피해자는 약 4,300여 명이다.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 민주화 운동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이 통계 중 사망자 163명은 유족이 보상금을 수령한 사망자 수이다. 확실하게 신원이 밝혀졌지만, 보상금을 수령받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사망자는 165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검찰은 1994년에 사상자 수를 발표했지만, 최초 발포 명령자와 암매장 장소와 같은 핵심 쟁점이 밝혀지지 않으면서, 5.18이 발생한 지 한 세대가 지나도록 이 문제는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5.18 민주화 운동 관련 보상자 통계를 보면, 사망자 240명, 행방불명자 409명, 상이 2,052명 등 총 7,716명이 보상금을 신청했으며, 이 중 인정된 보상자는 사망자 154명, 행방불명자 70명, 상이 1,628명 등 총 5,060명이다. 보상금 수령자 총 5,060명 중 중복 지급자 698명을 제외할 경우, 보상금 수령자는 4,362명이다.

 

연령별 사망자 직업별 사망자
연령 희생자 직업 희생자
14세 이하 8명 학생 27명
15~19세 36 자영업 21
20대 73 회사원 14
30대 26 방위병 2
40대 9 공무원 2
50대 6 운전사 11
60대 4 직공 34
확인불가 1 무직 34
163명 145명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에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으로 말미암아 2001년 당시에 공수부대원이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경찰 및 군인 중 사망자는 경찰 4명, 군인 22명으로, 이들은 1980년 6월 21일 자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1988년 7월, 국회 5.18 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에 제출된 국방부 답변자료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당시 민간인 사망자 가운데 14세 이하의 어린이가 8명에 달했다. 이 가운데 나이 가장 어린 사망자는 4세가량의 남자 어린이로서 1980년 5월 27일 자로 목에 관통상을 입어 숨졌으며,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당시에 계엄군이 어린이들에게까지 총을 겨눴다는 사실이 드러나, 5.18 유족회 측이 학살자들에게 단호한 처벌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 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모두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에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 후 사망 추정자는 376명 등이다. 1980년대 중반에는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과 무차별적인 연행으로 인해 사망자가 2천여 명에 달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실제로 5.18 종료 직후에 정부에 신고된 사망 추정자, 실종 추정자는 2천여 명에 달했고, 일부 학생운동권이 이를 인용한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윤성민 국방부 장관은 1985년에 1980년 당시의 사망자 및 실종자로 신고된 인원은 2천 명이 맞는다면서, 그중에는 체포 구금된 자, 사망자, 부상 입원자, 피신자도 포함돼 있어, 이들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이라고 답했다.

5.18 민주화 운동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직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다.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한 까닭에 상당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연구를 진행한 오수성 전남대 교수는 "5.18 체험자들은 지금도 만성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고 있다. 당시 충격을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재 경험하면서, 우울증, 불안장애, 알코올 중독을 함께 보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이들은 당시의 기억으로 인해 현재도 반복되는 불면과 악몽에 시달리며 고통받고 있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에 달한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고문 피해

5.18에서 3천여 명에 달하는 수많은 시민이 계엄군에게 폭행당하고 트럭에 실려 광주교도소, 상무대에 연행됐다. 연행자는 영창으로 넘겨지기 전에 보안대에서 온갖 고문을 당했다. 5.18과 사실상 연관이 없는 김대중과 관련하여 내란음모 조작이라는 각본 수사가 이루어졌다. 김대중에게서 자금을 얼마 받았느냐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며, 잔인한 고문, 구타, 심지어 같은 동료끼리 때리게 하는 비인격적 모독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폭거를 자행했다. 고문이나 구타를 당한 사람들은 석방이 된 뒤에도 오랜 시일 동안에 후유증에 시달려 정상적인 생활을 못 했고,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이들은 풀려난 뒤에도 엄청난 공포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이들은 경찰이나 중앙정보부처럼 기술적인 고문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안대 조사관들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연루 사실을 조작하기 위해 무지막지한 고문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국인권의료복지센터는 1980년 5.18 당시에 연행됐었거나 구금됐던 피해자가 1인당 평균 9.5회의 고문을 경험했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중 물고문, 매달기, 구타, 비 생리적 자세 강요, 강제 급식, 밥 굶기기, 의료 기회 박탈 등 신체적 고문이 62%를 차지했다. 수면 박탈, 복종 강요, 지각 박탈(암실 가두기) 등 심리적 고문은 38%를 차지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시민들에게 자행했던 고문은 다음과 같다.

군화 발로 얼굴 문질러버리기, 눈동자를 움직이면 담뱃불로 얼굴이나 눈알을 지지는 재떨이 만들기, 발가락을 대검 날로 찍는 닭발요리, 사람이 가득 찬 트럭 속에 최루탄 분말 뿌리기, 두 사람을 마주 보게 하고 몽둥이로 가슴 때리게 하기, 며칠째 물 한 모금 못 먹어 탈진한 사람에게 자기 오줌 싸서 먹이기, 화장실까지 포복해서 혀끝에 똥 묻혀오게 하기, 송곳으로 맨살 후벼 파기, 대검으로 맨살 포 뜨기, 손톱 밑으로 송곳 밀어 넣기 등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끔찍한 고문을 받았다.

피해자들의 55.8%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하고 있으며, 자살자 비율은 10.4%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어록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계엄군은 가짜 애국, 광주시민 진짜 애국 / 계엄군이 진짜 폭도, 광주시민 민주의거 / 계엄군은 정권 강도, 광주시민 민주항쟁
- 5.18 당시 궐기대회에서 낭송된 시 <계엄군과 광주시민>

 

민주화여! 영원한 우리 민족의 소망이여! / 피와 땀이 아니곤 거둘 수 없는 거룩한 열매여! / 그 이름 부르기에 목마른 젊음이었기에 / 우리는 총칼에 부닥치며 여기 왔노라.
- 5.18 당시 궐기대회에서 낭송된 시 <민주화여!>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년 5월 20일 전남매일신문기자 일동 전남매일신문 사장 귀하.
- 전남매일신문기자의 집단 사직서

 

나에게 총이 있었다면 나도 (계엄군에게) 총을 쐈을 것이다.
- 89.2.23. 국회 청문회에서 천주교 광주대교구 조철현 비오 신부

 

임신 8개월의 딸이 숨졌는데 뱃속에는 태아가 뛰고 있었다. 민정당 의원들에게 더도 덜도 말고 한 번만 똑같은 일을 당해보라고 얘기하려 했는데 아무도 안 나왔으니
- 89.2.22. 국회 청문회 김현녀 증인

 

딸이 행여 살아서 돌아올까 봐 대문을 잠그지 않고 있으며, 밤에 바람소리만 스쳐도 집 밖에 나가보곤 했다
- 88.5.21. 행불자 추가 신고한 이옥순

 

졸업장을 준다니 고맙긴 하지만, 광범이는 안 좋아할 거요. 그때의 주범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데 좋아할 리가 있겠소?
- 88.12.3. 5.18 명예졸업장을 받은 방광범군의 아버지 방두형

 

여보, 당신은 천사였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 임산부임에도 학살된 최미애의 묘비명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가족이 왜 총을 맞아야 했는가를 모르겠어요.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고향에 돌아가려 했는데 왜 우리에게 무차별 총질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 88.5.15. 최연소 부상자 김준향

 

살아생전 아들의 뼈를 찾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것이 소원이다.
- 5.17 행방불명자의 부친 김점식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 1980년 5월 30일, 당시 서강대 학생인 김의기 열사가 투신자살 직전에 남긴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의 한 구절

 

도대체 한 나라 안에서 자기 나라 군인들한테 어린 학생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 명이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죽어가는데 나만, 우리 식구만 무사하면 된다는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 1980년 6월 9일, 노동자인 김종태 열사가 분신 직전 남긴 유인물 <광주 시민/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며> 중에서

 

중국 문화 대혁명 때 수천만 명이 희생당하고 엄청난 피를 흘렸다. 이런 갈등, 이런 불화, 이런 피를 흘린 사건이 있었는데도 (책임자) 몇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한 사람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등소평이 중심이 돼 그 원로들을 다 대접하고 활용했다. 거기에 비하면 광주 사태는 아무것도 아니다.
- 95.10.5 경신회 모임에서 노태우

 

광주는 살아있다!
- 1988년 6월 4일, 숭실대 학생 박래전 열사가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 분신하며 외친 말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영향과 평가

위 사진은 6.10 민주항쟁때의 모습입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끝내 전두환 정권으로 인해 진압당했지만, 1980년대 이후의 민주화 운동(1987년 6월 민주항쟁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전두환 정권의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알면서도 묵인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면서 미국을 한국전쟁 때 같이 싸운 혈맹관계로 이해하던 종래의 대미관과 한미관계에 대한 인식도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재고됐다. 계엄사령부는 1980년 7월 4일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발표했다. 서울의 학생시위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화 운동가 20여 명이 조종했다는 명목으로 김대중과 민주화 운동가들을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이는 후에 신군부가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 등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의 강력한 사면 요청에 따라 감형됐다.

전두환 정권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김대중의 사주에 의해 발생한 소요사태로 조작했다. 하지만 1988년에 5공 청문회를 거치고 국회에서 1995년 12월 21일에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해,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한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자들에 대한 명예회복 및 피해 배상을 위한 5.18 민주 화운 동등에 관한 특별법(1995. 12. 21)과 5.18 광주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1997. 12. 17)이 제정되면서 전두환 정권의 비민주성과 폭력에 맞서 싸운 민주화 운동으로 다시 평가받았다. 광주 시민들을 학살한 광주학살 책임자들은 서훈이 취소됐으며 그 자격도 박탈됐다. 이 사건의 핵심 관련자인 전두환, 노태우는 1997년에 대법원으로부터 징역형과 2천억 원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2018년 7월 10일, 행정안전부는 부적절한 서훈 취소 안을 심의. 의결하여 5.18 진압 관련자에게 수여된 대통령 표창 5개와 국무총리 표창 4개를 취소하였다. 과거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통과되면서 훈. 포장 68점은 모두 취소되었지만, 표창은 관련법이 없어서 대통령령인 정부표창 규정의 개정을 통해 취소 근거를 마련하였다.

 

의의 및 교훈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됐다.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시민과 민중의 의지를 대내외에 드러내었고 반민주, 군사독재의 야만성을 세계에 폭로함으로써 군사독재체제의 입지를 크게 약화시켰으며,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들의 항쟁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으며,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이 한 지역에 머물지 않고 전국적 저항과 연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 광주 민주화 운동은 다른 국가의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유네스코는 광주민주항쟁은 1980년대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필리핀, 타이,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등지에서 일어난 여러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했다.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 등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록물은 2011년 5월 25일에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 심의를 통과함에 따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가 결정됐다. 5.18 민주화 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고 서석구, 지만원 등 극우 인사는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 유네스코는 국내외 검증 절차를 거쳐 북한군 개입설이나 폭동설 등은 허위라고 결론짓고 2011년 5월 25일에 심사위원 14명의 만장일치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Human Rights Documentary Heritage 1980 Archives for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against Military Regime, in Gwangju, Republ

The May 18th Democratic Uprising not only played a pivotal role in the democratization of South Korea but also affected other countries in East Asia by dissolving the Cold War structure and achieving democracy. After the 1980s, various democratic movements

www.unesco.org

유네스코는 5.18 민주화 운동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국가들의 민주화를 이루는데 기여했으며, 나아가 냉전 체제를 깨트리는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편철 4,271권, 8,580,904페이지, 네거티브 필름 2,017컷과 사진 1,733장, 영상 65 작품, 1,471명의 증언, 유품 278점, 연구물 411개, 예술작품 519개 등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5.18 관련 기록물은 다음의 9개 주제로 구분되어 있다.

  1. 국가기관이 생산한 5·18 민주화 운동 자료(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소장)
  2. 군 사법기관 재판 자료,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자료(육군본부 소장)
  3.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일기(광주광역시 소장)
  4. 흑백필름, 사진(광주광역시, 5.18기념재단 소장)
  5.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5.18기념재단 소장)
  6. 피해자들의 병원 치료 기록(광주광역시 소장)
  7. 국회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회의록(국회도서관 소장)
  8. 국가의 피해자 보상 자료(광주광역시 소장)
  9. 미국의 5·18 관련 비밀해제 문서(미국 국무성, 국방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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