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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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 1545년 - 로마 가톨릭교회의 트리엔트 공의회 개최


- 1937년 - 군국주의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키고 난징 대학살을 자행함


강가에 쌓인 대학살 희생자들의 시체 더미와 일본 군인의 모습. 당시 패잔병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항복한 중국군과 민간인 남성들을 대량 총살하였다.


난징 대학살이란 중일 전쟁 때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한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약 30만 명의 중국인들이 학살되었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6주간에 걸쳐 이뤄졌으며, 1939년 4월에는 1644 부대가 신설되어 생체실험 등이 자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를 난징 대도살이라고도 부르며, 일본에서는 난징 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서구권에서는 아시아 홀로코스트라고도 한다


- 1950년 - 장진호 전투가 끝났다.


장진호 전투 중 중공군 저지선을 뚫고 이동하는 미 해병대


장진호 전투 또는, 장진 저수지 전역, 장진 저수지 전투는 한국 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었다면 한국 전쟁 당시에는 장진호 전투가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은 이 전투의 지명을 장진이 아닌 "초신"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한자어인 長津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다. 유엔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인 1945년, 한국을 점령한 이후 일본어로 작성된 지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진이라는 단어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읽히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 전쟁에 참여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이 북한 북동쪽으로 침투했다.


1950년 11월 27일, 중국 제9병단은 장진호 지역에서 에드워드 알몬드가 이끄는 미국 제10군단을 기습공격했다. 혹독한 겨울에 잔혹한 17일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30,000명의 유엔사령부 병력이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이들은 곧 포위되었고, 마오쩌둥의 유엔군 격파 지시를 받은 쑹스룬이 이끄는 약 120,000명의 중공군이 이들을 공격했다. 유엔군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위해 싸움을 이어나갔으며 중공군의 사상자를 늘려가며 포위를 돌파했다. 제10군단의 흥남 철수 작전이 유엔군의 북한 철수의 마지막 단계였다. 해병대가 철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쪽에서 중공군의 예봉을 맡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역할이 컸다. 페이스 특수임무부대가 희생을 치르며 포로가 되는 동안, 서쪽의 해병대는 포위되지 않을 수 있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을 북한 동북부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 1959년 - 키프로스 대주교였던 마카리오스 3세가 대통령이 되다.


- 1974년 - 몰타가 영연방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변경되다.


- 1991년 -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남북 기본합의서(南北基本合意書)는 1991년 12월 13일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국의 재통일과 관련하여 합의한 뒤 이듬해 1992년 2월 18일 정식으로 효력을 발생시킨 문건이다.


■ 내용

남북기본합의서는 5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과 13차례의 실무대표접촉을 통해 완성되었고, 1992년 2월 19일 발효되었다. 서문 외에 4장 25조항으로 구성되었다. 서문에서는 7·4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의 재확인, 민족 화해 이룩, 무력 침략과 충돌 방지, 긴장 완화와 평화 보장, 교류 협력을 통한 민족 공동의 번영 도모,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 등을 규정하고 있다. 제1장은 남북화해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특히 상호 체제 인정 및 존중, 내부 문제 불간섭, 비방·중상 중지, 파괴·전복 행위 금지, 정전상태의 평화상태 전환, 국제무대에서 대결과 경쟁 중지, 민족 성원 상호 간의 화해와 신뢰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제2장은 남북 불가침에 관해 규정하고 있는데, 주로 무력 불사용과 무력침략 포기, 대립되는 의견이나 분쟁의 평화적 해결,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 명시, 남북 군사공동위원회 구성 및 운영, 남북 군사당국자 간 직통전화 설치 등을 명시하고 있다. 제3장은 남북 교류 협력에 관한 내용으로, 주로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을 통해 민족 전체의 복리 향상과 민족 공동체의 회복·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실천적 조치 등을 담고 있다. 제4장은 수정 및 발효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그밖에도 남북기본합의서에서는 각 장마다 협의 실천기구인 분과위원회·공동위원회·남북연락사무소에 관한 조항들을 설정하고 있다. 이로써, 남북한이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고, 군사적 침략이나 파괴·전복 행위를 하지 않으며, 상호 교류 협력을 통해 민족 공동 발전과 점진적·단계적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이후 남북 관계는 다시 경색되었다. 이 합의서는  남북 간의 자주적 차원에서 화해와 협력의 토대를 구축하는 동시에 평화정착을 위한 틀을 마련하고 새로운 통일시대를 열어 나갈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하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남북한이 공히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내부문제에 간섭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파괴 혹은 전복 행위를 하지 않기로 함으로써 상대방 체제를 위협하는 행위를 금지하는데 약속하였다. 이에 따라 분단이래 지속되고 있는 ‘불안정한’ 평화상태를 ‘공고한’ 평화상태로 전환시켜 나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합의서는 남북관계 전반에 관한 포괄적인 원칙에만 역점을 두고 구체적인 실행방법에 대해서는 후속회담을 통해 논의하도록 되어 있는 상징적인 합의문건이었다. 이후 남북 쌍방은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구체적 대책을 협의하는 과정을 거쳐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1992.9.15.~18.)에서 남북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를 채택, 발효하였다.  1992년 합의 내용의 실질적인 이행은 후속회담으로 상정된 정치분과위원회, 군사분과위원회, 교류협력분과위원회, 핵통제분과의원회 등 4개 분과위원회에서 논의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1992년 3월부터 12월까지 각 분과위원회 별로 적게는 7회, 많게는 13회에 걸쳐 남북협상이 진행되었지만 아무런 합의성과를 내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분야별 후속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북한은 남한의 한미합동 군사훈련을 구실로 기본합의서 이행을 위한 분과별 회담의 중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 2006년 - 양쯔강돌고래가 멸종된 것으로 발표되다.


- 2014년 -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서 산사태가 발생해 56명이 사망하고 52명이 실종되다.


※ 탄생


- 1521년 - 교황 식스토 5세


- 1553년 - 프랑스의 국왕 앙리 4세


- 1797년 -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하인리히 하이네는 유대계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 평론가, 기자이다. 신랄한 풍자와 비판의식, 허무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시와 사설을 남겼으며, 독일 정부의 미움을 받아 추방되기도 하였다. 괴테와 더불어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시인이다.


- 1921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진의종.


- 1934년 - 미국의 영화 제작자 리처드 D. 재넉.


- 1942년 - 대한민국의 야구인 김성근.


- 1952년 - 대한민국의 배우 독고영재


- 1957년 - 미국의 영화 배우, 영화 감독 스티브 부세미


- 1964년 - 일본의 음악가 히데(X JAPAN)


히데는 일본 대중음악 음악가로, 본명은 마츠모토 히데토.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에서 태어났다. 일본의 록 밴드 엑스 재팬의 기타리스트, 솔로 뮤지션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아마추어 시절의 Saver Tiger(Yokosuka Saver Tiger), 솔로 프로젝트 hide with spread beaver, 인더스트리얼 밴드 zilch라는 팀 들을 결성해 주도적 역할을 했다.


- 1967년 - 일본의 배우 오다 유지.


- 1967년 - 미국의 배우 제이미 폭스.


- 1972년 - 대한민국의 배우 김정태.


- 1974년 - 대한민국의 모델 박둘선.


- 1977년 - 대한민국의 배우 고세원.


- 198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유미.


- 1982년 - 미국의 야구 선수 리키 놀라스코. 대한민국의 음악 밴드 럼블피쉬의 최진이. 일본의 배우 에이타


- 1984년 - 대한민국의 탁구 선수 이정우, 스페인의 축구 선수 산티 카솔라


- 1986년 - 스웨덴의 축구 선수 미카엘 루스티그.


- 1989년 - 미국의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 일본의 가수, 모델 후루카와 아이리


- 1994년 - 일본의 여성 싱어송라이터 이에이리 레오


※ 사망


- 1250년 -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 1557년 - 이탈리아 수학자 니콜로 타르탈리아.


- 1602년 - 조선 관료 김명원.


- 1834년 - 조선 23대 국왕 순조.


조선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의 모습


순조는 조선의 제23대 왕(재위: 1800년 8월 23일(음력 7월 4일) ~ 1834년 12월 13일(음력 11월 13일)이며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성은 이(李), 휘는 공(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보(公寶), 호는 순재(純齋), 사후 시호는 순종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純宗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이다.


이후 철종 때 정원용의 의견에 따라 묘호가 순종에서 순조로 바뀌었고, 1897년 숙황제(肅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체성응명흠광석경계천배극융원돈휴의행소륜희화준렬대중지정홍훈철모건시태형창운홍기고명박후강건수정계통수력건공유범문안무정영경성효숙황제(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精啓統垂曆建功裕範文安武靖英敬成孝肅皇帝)이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선각왕(宣恪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그는 정조와 후궁 수빈 박씨 사이에서 출생한 서차남이다.


■ 치세

1800년에서 1834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800년 7월 4일에서 10월 27일까지 영의정 심환지가 넉 달 간 섭정하였으며 1800년 10월에서 1803년 12월까지 계적증조할머니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하였고 1803년 12월에서 이듬해 1804년 3월까지 장인 김조순이 3개월간 섭정하였으며 1804년 3월에서 이듬해 1805년 12월까지 영의정 이병모가 1년간 섭정을 한 후 1805년 12월에서 1827년 1월까지 친정을 하였고 1827년 1월에서 1830년 6월까지 아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으며 1830년 6월 아들 효명세자가 훙서(薨逝)하자 그 직후 영의정 남공철이 1830년에서 1831년 5월까지 마지막 대리청정하였으며 1831년 5월 이후 군주로서 다시 친정을 하였고 그 친정 체제는 1834년 승하할 때까지 이르렀다.


■ 생애와 정치

즉위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로, 어머니는 박준원의 딸 수빈이다. 비(妃)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이다.


1800년(정조 24) 1월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6월 정조가 죽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나이가 어렸으므로 즉위와 함께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고 1803년 음력 12월까지 계속되었다. 정순왕후는 영조 때에 사도세자의 폐위를 주장했던 친오라버니 김귀주를 비롯한 벽파와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수렴청정 기간 동안 벽파가 정권을 장악했으므로, 이들은 정조 때 집권세력이었던 시파 숙청에 주력했다.


이들 벽파는 사학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해온 터였다. 무너져가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정순왕후는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렸다. 그 내용은 “천주교 신자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사학을 믿는 자들이니,인륜을 위협하는 금수와도 같은 자들이니 마음을 돌이켜 개학하게 하고, 그래도 개전하지 않으면 처벌하라”는 것이다. 또한, 오가작통법을 시행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이러한 하교에 따라 많은 천주교 신자들과 주문모 신부가 처형되었다. 천주교도뿐만 아니라 남인과 시파의 주요인물들을 처형하거나 유배보냈다. 이때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을 처형하고, 정약용채공등의 관직을 빼앗고 귀양을 보내 남인과 시파는 대거 몰락했다. 한편 수렴청정기에 공노비를 없애고 서얼허통을 시행하는 등조선 후기의 신분질서 변화를 추인하는 정책이 나오기도 했다.


친정기: 세도 정치와 봉건왕조의 모순 심화

그러나 수렴청정을 맡았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마저 국구 김조순 일파에 의해 실각되어(1803년 음력 12월) 김조순이 1803년부터 1804년까지 1년간 섭정을 맡은 후 비로소 순조는 1804년부터 직접 국정을 관장했으나 여전히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 김씨 일문이 장악했다. 김이익. 김이도. 김이교. 김조순. 김문순. 김희순. 김명순. 김달순 등이 주요인물로, 이들은 정부의 요직을 거의 독점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인사권을 장악했다. 김조순이 정권을 장악할 당시에는 그나마 안정이 되었다. 김조순은 반남 박씨나 풍양 조씨 등을 기용하며 권력을 분산시켰다.


김조순이 죽고난 뒤 그의 자제들이 권력을 장악하며 부정적인 방법을 재산을 늘리고 하층민을 착취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세도 정치로 뇌물수수 등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안동 김씨 일족에 줄을 대는 것이 지름길이 되었다. 이에 과거 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양반관료체제가 안정을 잃었을 뿐 아니라, 중간수탈의 가중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조세체계도 크게 흔들렸다. 탐관오리의 중간수탈이나 토호의 세금 전가는 주로 일반 농민층에 집중되어 그렇지 않아도 지주제의 압박에 시달리던 농민층의 몰락을 촉진했다. 이른바 '삼정의 문란'이 그것이다.


대리청정기의 세도 정치 견제 시도

안동김씨 세도 정권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순조는 이를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방책을 강구했다. 1819년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을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했으며, 1827년에는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세자는 강단있고 뚝심있는 태도로 분명하게 판단하였고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흔히 세자가 안동김씨를 막으려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안동 김씨의 김이재 등은 요직을 맡으며 조씨의 협력을 얻으면서 정치적 기반을 더욱 굳건히 다져나갔다.


최후 및 능묘

말년의 순조는 웃음기가 사라졌으며 자녀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병이 심해져 소화불능 등의 병을 앓다가 순조는 재위 34년 만에 45세를 일기로 1834년 12월 13일 (음력 11월 13일) 해시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공식적인 승하 원인으로 추정하는 바로는 정조같은동홧 이치일이릉높다) 다.인 순원왕후와 합장되어 있으며 인근에는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인 헌릉이 위치해 있다. 묘호 순조 의 '순' 은 청렴하며 공정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사회

민란

'삼정의 문란' 속에서 홍경래 등이 부농. 사상을 규합하여 봉건체제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더불어 1811년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홍경래의 난은 무력에 의해 이듬해 진압되었으나, 정부는 사회경제적인 근본 수습책을 마련하지 않았으므로 이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봉기나 모반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이양선의 출현

조선은 후기에 와서 일부 이양선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순조실록에 기록된 이양선 출현은 총 3번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영국의 배였다. 이양선이 출현했을 때는 대부분 최대한 빨리 바다로 내보내고, 이들에 대한 기록을 청나라 조정에게 보고하는 것이 조선의 이양선에 대한 기본 대처방안이었다.


순조 16년에 충청 수사 이재홍의 장계가 올라왔는데, 충청 마량진 갈곶 밑에서 영길리국의 이양선이 출몰하였다고 했다. 첨사 조대복과 지방관 비인 현감 이승렬은 이양선에 있던 낯선 사람들과 언문이나 한자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장계에서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들의 배에 들어가보니 내부는 무척 컸고,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배는 무척 빠른 속도로 바다를 빠져나갔습니다." 라고도 했다. 이들이 영국인임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준 한 폭의 서전에서 영길리국이라는 국명이 나왔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순조 32년에는 로드 애머스트호가 공충도 홍주의 고대도 뒷바다에 나타났다. 사실 이 배에는 영국 동인도 회사의 간첩 휴 해밀턴 린지가 승선해 있었다. 그는 카를 귀츨라프와 함께 광둥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청나라 여러 해안의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경제·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 배의 선원들과 홍주 목사 이민회와 수군 우후 김형수는 한자문으로 문답을 나누었다. 이들은 영길리국의 배이며, 청나라와 국력이 대등하여 조공을 바치치도 않는다고 했다. 영길리국의 정보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조선에게 교역을 하고 싶다는 청을 여러번 했으나, 조선 측에서는 이에 대해 강력히 거부하며, 이들이 원하는 물품들을 제공하고 이들을 되돌려 보냈다고 했다.


 문화

천주교의 수난

신유박해 때의 주문모 신부의 사망으로 조선 천주교회에는 공백이 생겼고, 1805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천주교회도 역시, 제사를 금지한 천주교회를 중국의 전통을 파괴하는 무리로 본 중국사회의 저항으로, 천주당과 신학교가 파괴당하는 등의 박해를 받기 시작해, 조선 천주교회에 선교사를 보낼 여유가 없어졌다. 이에 조선 천주교회의 공백은 장기화되었다. 천주교 탄압은 신유박해 뒤에도 계속되어 1815년과 1827년에도 많은 교인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했다. 이러한 박해 속에서도, 공백이 된 조선 천주교회에 대해서 교황 레오 12세가 조선에서의 전교를 프랑스의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하면서, 조선 천주교회에 선교사가 파송될 가능성이 생긴다. 이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바르텔르미 브뤼기에르 신부가 조선 선교를 자원하고 나서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1831년 9월 9일 천주교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를 초대 대목구장 즉, 조선 천주교회 초대 주교로 임명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에서의 전교를 전담하고 싶어하는 중국 천주교회 유방제 신부의 욕심 때문에 입국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1835년 병으로 별세했다.


순조 어진 (절반 정도가 불에 타버린 채로 남아 있음)


■ 비평

세계사적으로 귀족층이 신흥지주층에게 그 지위를 내주던 때였다. 이미 영국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신흥지주층이 자리를 잡았으며 신흥지주층을 바탕으로 한 서양의 물품이 청과 일본을 통해서 조선으로 조금씩 들어오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서 경제는 몰라도 정치는 글을 배우고 자기수양을 닦은 선비가 해야 한다고 믿었던 조선에서는 신흥지주층의 대두로 인한 귀족층의 몰락을 시대과제로 인식, 선비에 의한 도학정치를 지키려 하였다.


처음에는 정순왕후를 비롯한 영조의 일파가 사대부의 유학질서를 지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안동김씨로 대표되는 신흥지주층이 주류로 정치의 키를 잡았다. 경제를 비롯하여 그 시대의 새로운 요구에 충족시키는 순기능이 있었으나 기존의 유학정치를 포기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다.


후기에는 전기의 안동김씨라는 신흥지주층의 기용을 축소하고 풍양조씨라는 신흥사대부층을 기용하였으나 이 또한 물밀듯 밀려오는 시대에 대응하는데 실패하여 말기에는 안동김씨의 재기용으로 마감하였다.


- 1866년 - 조선의 가톨릭 순교자 손선지.


- 1944년 - 러시아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


- 1965년 - 미국의 군인 로버트 싱크.


- 1996년 - 이탈리아의 아랍학자 프란체스코 가브리엘리


- 2009년 -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


- 2011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박태준.


- 2016년 - 미국의 경제학자 토머스 셸링.


※ 기념일


- 난징대학살 희생자 국가추모일: 중화인민공화국


- 성 루시아의 날: 스칸디나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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