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오늘의 역사 1월 25일 - 소소한 세상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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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41년 - 협상의 밤 이후 클라우디우스가 로마 상원에 의해 황제로 인정받았다.

750년 - 자브 강(江) 전투: 아바스 왕조의 반군이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를 패퇴시켰다. 이 전투의 결과로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에 이르렀다.

1890년 - 미국광산노동자연합이 설립됐다. / 미국의 기자 넬리 블라이가 72일간의 세계일주를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1945년 - 벌지 전투: 독일 최후의 대반격이 실패로 끝났다.

아르덴이 아모니네스를 방어하던 75사단 소속 미군병사들

벌지 전투(Battle of the Bulge)는 제2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에서 독일군 최후의 대반격에 대해 연합군이 붙인 이름이다. 벌지(Bulge)는 영어로 '주머니'라는 뜻이다. 독일군의 진격에 의해 전선의 일부가 돌출된 것을 가리켜 미군이 붙여준 이름에서 유래된 것이다. 영화 벌지 대전투 공개 이후 동명칭이 제일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독일군은 작전명 [라인을 수호하라](독일어: Unternehmen ”Wacht am Rhein”)의 아래에서 대공세를 펼쳤다. 대반격은 서부전역사령부이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에 의해 입안된 것으로 룬트슈테트 공세 혹은 지명에서 유래된 아르덴 공세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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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4일 영국군은 벨기에 안트베르펜을 해방하였지만, 보급거점으로써 사용하기 위해서는 주변의 독일군을 몰아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사용가능을 위한 목적을 세우지 않았다. 그 때문에 보급선이 길어져 연합군의 진격은 정지되고 전선은 교착상태가 되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9월 17일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이 계획한 마켓 가든 작전이 개시되어 라인 강 확보를 위한 전투가 시도되었으나, 이 작전은 너무나도 무모하게 진행되어 대실패로 끝났다. 전선은 다시 교착상태가 되었고, 연합군은 일시적으로 진격을 중지하고 중대한 문제가 된 보급대책의 해결에 나서기 시작했다. 또한 동부 전선에서도 소련에 의한 바그라티온 작전이 폴란드 동부에서 끝나가던 시기였지만 소련군은 1944년 12월 말까지 폴란드 서부로 진격할 수 없었다.

이 기회를 틈타 히틀러는 건곤일척이라 할 수 있는 반격작전을 구상했다. 1940년 프랑스에 대한 전격전 승리를 재현하는 것으로 벨기에 아르덴 지방의 삼림지대를 기갑부대로 돌파하여 단번에 안트베르펜까지 진격하여 이곳을 탈환하고, 서부전선 북쪽의 연합군을 포위, 괴멸시킨다는 작전안이었다. 군 수뇌부의 룬트슈테트와 발터 모델은 이 계획이 무모하다고 반대했으나, 묵살되고 히틀러는 이 작전의 성공으로 서부전선이 정체되고, 만약 연합군과 강화를 실현한다면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또 한 가지 작전안으로써 북부의 광대한 전선에 분산된 코트니 H. 호지스 장군 휘하의 미 1군을 협공하여 괴멸시킬 것을 제안했다. 적군의 포위, 분단이 쉽고, 아군의 피해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으나, 연합군 전력의 일부를 줄이는 것밖에는 성과가 없고, 전쟁의 귀추를 변화시킬 작전 안이 아니었기에 기각되었다.

작전 시기는 아르덴 숲이 안개에 휩싸이는 겨울로 잡았다. 이미 제공권은 연합군으로 옮겨졌기에 항공기에 의한 격렬한 폭격으로부터 부대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또한 독일군은 작전에 참가하는 전력으로 정예 약 20개 사단을 준비하고, 신예의 티거 2 전차도 포함시켰으나, 내실은 동부전선에서의 출혈의 간접적인 영향 때문에 거의 모든 부대가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고, 훈련도가 낮고 새로 편성된 국민 척탄병 사단까지 투입시킬 정도였다. 군수품과 연료의 부족도 심각할 정도로 증가하여, 만족할 만한 양을 준비하지 못했다. 그러나 작전은 1944년에 전쟁 중 최대치에 도달한 독일의 병기 생산량의 대부분이 투입된 정예 부대로 작전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공격을 예정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작전 도중 연합군의 보급 거점을 탈취할 필요가 있는 등, 처음부터 위험을 안고 있던 작전이었다. 한 가지라도 잘못되는 상황이 벌어지면 작전 전체에 파급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것이었다.

연합군 상층부는 독일군 집결의 정보나 공세작전의 조후를 보고받았으나, 독일에게는 공세에 나설 여력은 남아있지 않다고 판단하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아르덴지방은 깊은 삼림과 산악지대였기에 기갑부대가 쉽사리 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 지구의 방위에는 약체화된 부대를 배치할 정도였다. 이 판단은 전후에 통렬한 비판이 내려졌다. 이미 독일군의 전차부대는 1940년에 같은 지역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사이를 뚫고 프랑스에 쳐들어갔던 경험이 있었다.

9월 중순에 아르덴 숲을 통과하여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되었다. 주력은 서쪽으로 진격하여 뮤즈강까지 도달한 뒤 북서쪽의 앤트워프와 브뤼셀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가장 곤란한 것은 작전 개시로부터의 신속한 이동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뮤즈강을 넘는다면 극적으로 개선되어 해안까지 도달이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작전은 연합군 첩보 본부에 라인란트의 방어작전과 오인시키기 위해 "라인을 수호하라"(Wacht am Rhein)고 이름 붙여졌다. 이것은 독일의 노래에서 따온 명칭이기도 하다.

4개군의 작전투입이 결정되었다

  • 요제프 디트리히가 이끄는 SS 6기갑군은 1944년 10월 26일에 새롭게 편성되었다. 이 군에는 무장친위대의 정예사단 1 SS기갑사단 LSSAH 와 12 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가 참가했다. 그들은 주요 공격부대로써 북부공격을 감행할 예정이고, 목표는 앤트워프의 확보였다.
  • 하소 폰 만토이펠이 이끄는 5 기갑군은 중앙공격을 담당해 브뤼셀 확보가 목표였다.
  • 에리히 브란덴베르크가 이끄는 7군은 측면지원과 남부공격을 담당하였다.
  • 15군은 재편성되어 최북부에 배치되었다. 임무는 이 지역의 미군 세력을 붙잡아 공격에 대한 최적의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공격의 성공에는 3가지 요점이 요구되었다고 생각된다.

  • 공격은 완전히 기습이어야 한다는 점.
  • 악천후여야 한다는 점. 연합군의 제공권을 무효화시키고, 보급로를 확보해야 하는 점. 시기는 겨울 중에도 혹설기를 설정한다.
  • 신속한 진격이어야 한다는점. 모델 원수는 뮤즈 강까지 4일만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공격에 앞서 독일군의 부대 이동을 연합군은 확인하지 못했다. 프랑스 해방에서는 레지스탕스로부터 유익한 정보를 얻었으나, 연합군이 독일 국경에 도달한 당시로써는 그런 정보를 기대할 수 없었다. 프랑스는 에니그마에 의해 암호화된 무선통신으로 지령을 내리는 독일군을 감청해 울트라 암호 해독기로 해독하였으나, 독일 국내에서는 이러한 지령이 전화와 텔레프린터를 사용하여 송수신되었다. 또한 다가올 공세를 생각해 무선 교신의 특별차단 지령으로 교신이 감소하였다(독일 국내에 있던 전화나 전보 등이 많이 사용되었다).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독일 국방군 내에서 숙청으로 독일군의 통신보안은 재 강화되어 정보 누출의 감소가 현저해졌다. 또한 가을의 짙은 안개와 날씨는 연합군의 정찰기가 지형을 정찰하는 데 방해가 되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첩보부로부터 이전의 보고 - 독일군은 말기상황에 다다라 공세에 나설 여력이 없다-를 근거로 아르덴의 정세에 변화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아르덴 방면에는 휘르트겐 숲 전투를 겪으며 약체화된 부대를 배치하여, 이곳을 강화하는 조치는 취하지 않고 방치했다. 특히 아르덴 지방의 한쪽을 지키는 미국 2 보병사단은 역전의 사단이었으나 휘르트겐 숲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부대를 재건 중이었다. 또한 같은 지역을 지키던 99 보병사단과 106 보병사단은 미국 본토에서 도착한 신참 보병사단이었기에 대부분 전투 경험이 없었다. 그런데도 나중에 99사단은 선전했으나, SS 6 기갑 군 등의 맹공을 받았던 106사단은 순식간에 궤멸당해 다수의 병사가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1944년 12월 16일 독일군은 벨기에 아르덴숲을 통과해 진격을 개시했다. 끊이지 않던 악천후로 인해 연합군은 항공기를 띄울 수 없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큰 도움을 받았다.

돌연 기습으로 허를 찔린 미들턴 장군의 미 8군은 클레르보, 호 지겐 등 일부 거점에서 완강하게 저항했으나, 여단, 연대, 대대 등 고급 부대장의 전사 및 부상이 속출하여 괴멸당하거나, 포로가 되거나, 포위되거나 하는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 놀라움과 혼란을 틈타 벌어진 독일군의 진격은 최초 수일 동안만 계속되었을 뿐이었다. 12월 하순에 이르자, 독일군의 주력부대는 여러 지역에서 급히 달려온 미군에 의한 강력한 저항을 만나 전진은 매우 늦어지게 되었다. 또 각 전선의 진격 속도도 큰 편차가 생겨, 속공에 성공한 부대가 포위당해 집중적인 반격을 당하는 사태가 속출했다.

히틀러는 처음엔 연합군이 이 사태에 대응하는 데 시간이 어느 정도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라는 것을 인식하는 데 수일, 아이젠하워가 각국 수상과 상담하여 부대의 배치전환을 명령하는 데 수일, 그리고 배치전환 명령을 받은 부대가 현지에 도달하는 데 수일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정도 시간이 걸린다면 작전은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연합군의 반응은 히틀러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랐다. 또한 아이젠하워의 결단도 빨랐다. 그는 각국 수뇌 등과 상담하지 않고, 부대의 배치전환을 단행하고, 당시 프랑스에서 재건 중이던 101 공수사단을 바스토뉴로, 82 공수사단을 생비트로 급히 보냈다. 히틀러의 생각은 첫날부터 어긋나게 된 것이다.

연합국 점령지역 후방으로 공수부대를 강하시켜, 본 작전의 지원 및 연합군의 교란을 노린 슈퇴서 작전이 계획되었다. 사퇴서 작전에는 작전 개시가 12월 16일 이른 오전으로 예정되었으나, 악천후와 연료 부족 때문에 결국 하루가 늦은 12월 17일 새벽 03:00으로 강하 시간이 설정되었다. 강하 부대의 목표지점은 말메디에서 11km 북쪽의 [바라크 미하일] 십자로였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데아 하이트 대령과 부하들은 그 지점을 확보하고,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가 도착할 때까지 24시간 동안 그 지점에서 연합군의 증원과 보급을 방해할 예정이었다.

12월 17일 오전 0시 직후, 112대의 Ju 52수송기에 약 1,300명의 팔슈름예거를 탑승시키고, 짙은 구름과 강한 눈보라를 헤치고 이륙했다. 그 결과 다수의 수송기가 예정된 코스를 벗어났고, 또 강하 지점에 접근한 수송기도 강풍 때문에 많은 병사들이 강하 예정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지점에 낙하했다.

17일 정오쯤에 약 300명이 목적지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것으론 전력이 충분하지 못해 연합군에 대한 저항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이트 대령은 십자로를 확보한다는 계획을 파기하고 부근에서 게릴라 전술을 펼칠 것을 부하에게 명령했다. 낙하 범위가 광범위하고 분산되었기 때문에 각지에서 보고가 잇달아 연합군사령부는 대규모 공수작전이 실시된 것으로 오인하였다. 많은 혼란이 발생한 후방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인원 배치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전선에 대한 증원이 뒤늦은 결과 독일군의 공세를 용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오토 스코르체니 친위대 중령이 이끄는 제 150 기갑여단이 미군의 군복을 착용하고 영어를 구사하는 병사들이 노획한 연합군의 차량과 연합군의 것으로 위장한 차량을 사용하여 적 후방지역에 침입했다. 실제 완벽하게 영어로 이야기할 수 있고, 그곳에서 태어나서 후방 지역에 침투하는 것이 가능한 이는 20여 명 정도였지만 이런 부대의 존재는 그 행동 이상의 혼란을 발생시켰다.([본대]는 뮤즈강에 놓여 있는 다리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미군 병사의 군복을 착용한 독일 병사의 존재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조지 패튼 장군도 이 소문을 듣고 놀라, 12월 17일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그라 우츠들이 여러 곳에서 출몰하여 전화선을 절단하거나, 도로표식을 바꿔 아군의 방어 거점에 도착할 수 없게 혼란을 주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독일 병사는 미군의 군복을 착용하다가 체포되면 대부분 그 장소에서 스파이로 간주하여 총살시켰다. 제네바 조약 아래에서 군복 착용에 관련된 항목과 전시포로에 대한 취급이 모순이 되었지만 총살은 이 시점에서 일반적인 행위였다. 스코르체니와 그 부하들은 이러한 처벌을 각오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미군 군복 안에 독일군 군복을 착용하였다.

후방지역에서의 방해공작 중 몇 명의 병사가 연합군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이미 각오를 다진 그들은 최후까지 거짓자백을 하여 연합군에게 혼란을 주었다. 그들은 임무에 관련해서 취조받을 때, 파리에 있던 아이젠하워의 유괴와 살해가 목적이라고 답해 아이젠하워의 호위는 대폭으로 증가하고 그는 사령부에서 나올 수 없게 만들었다. 그 반면 그들은 정직하게 “부대의 지휘관은 스코르체니이다.”라고 자백했다. 정직하게 말하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파리에 침입하여 아이젠하워가 있는 장소에 다다르는 것이 무리인 작전이었지만, 지금까지 믿지 못할 작전을 성공시킨 스코르체니가 지휘하고 있었기에 연합군은 이 자백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그 결과 후방지역의 여러 곳에 검문소가 설치되어, 병력과 장비의 이동이 정체되었다. 야전헌병은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질문(미키 마우스의 여자 친구 이름, 유명한 야구시합의 스코어, 일리노이주의 주도 등)을 모든 병사들에게 엄격하게 질문했다. 헌병의 질문을 받은 오말 브렌 들리 장군은 일리노이주의 주도를 스프링필드라고 정확하게 답했으나, 헌병은 주도를 시카고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짧은 시간 억류되었다.(일리노이주 최대의 도시는 확실히 시카고였기에 결국 많은 미국인이 오해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의 여파로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란 별명이 붙은 스코르체니 자신은 이 작전이 실패했다고 말했다. 결국 첫날 달성하려던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고, 부대의 존재가 밝혀진 이상 작전을 고집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스코르체니는 작전을 중지시키고, 제 150기갑사단의 병사들을 통상의 군복으로 바꿔 입히고, 보통의 기갑여단으로서 전투에 투입시켰다.

북부에서는 SS 6기갑군의 주력인 4,800명의 병사와 600대의 차량으로 이루어진, 요아힘 파이퍼 SS중령이 이끄는 파이퍼 전투단이 벨기에 서부로 진출했다. 12월 17일 07:00시에 그들은 뷰리겐의 미군의 연료 보급기지를 확보하고, 서쪽으로 진격에 앞서 연료를 재보 급한 데 성공했다. 12:30분 말메디와 리 누빌 사이의 고지, 보 호즈 마을 근처에서 285 포병관측대대와 조우했다. 소규모 전투 후 미군부대는 항복하고, 포로 약 150명이 무장해제되어 십자로 부근 들판에 8열 횡대로 세워졌다. 이어 기관총 사격으로 최소 84명이 사살되었다.

훗날 재판에서 검찰측 기록에 의하면 기갑부대를 지휘하던 장교의 명령에 의해 곧 1명의 전차병이 포로를 피스톨로 쏘았고, 계속해서 다른 병사들이 기관총으로 총격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다만 이 [공식 견해]에 대해선 여러 가지 모순과 의문이 남아있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제 도망을 준비한 포로에 대해 위협발포에 의해 패닉이 발생하고 뒤이어 도망치려는 포로들을 쏜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있다. 최후까지 아직 숨이 붙어있던 자들을 돌면서 죽인 자들도 있다고 하나, 그들은 이전에 데렌의 마을에서 미군의 폭격 앞에 희생된 벨기에 민간인의 무참한 시체를 처리하고, 또 전투 경험이 낮은 자들도 많아 미군 병사에 대한 증오에 의한 사적인 보복 가능성도 있다.

전후 파이퍼 SS중령은 체포되어 말메디 사건의 책임을 묻는 재판이 열려 파이퍼를 포함한 친위대 대원 43명이 사형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전반적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56년까지 모두 석방되었다.

전투는 계속되었고, 1 SS기갑사단 LSSAH 사단은 밤까지 미 99보병사단을 공격해 이들을 격파했다. 파이퍼 전투단은 스다부로에 도착했다.

파이퍼는 12월 18일 스타벨롯에 들어갔으나, 미군 방어부대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미군의 배제는 어려웠기에 그는 소부대를 마을에 남기고, 트로와 퐁의 다리로 향했다. 그러나 다리는 퇴각하는 연합군에 의해 파괴된 뒤였다. 파이퍼는 라 그레즈에서 스토몽으로 향했다. 파이퍼의 접근을 알아챈 미군 공병부대는 다리를 폭파하고, 미군은 참호를 파고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파이퍼 전투단은 독일군 주력과 단절되고, 미군이 스타부로를 탈환하자 보급에도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스토몽의 상황은 절망적이었고, 파이퍼는 라 그레즈로 후퇴해 방어 진지에서 구원 부대를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구원 부대는 연합군의 방어를 돌파하지 못했고, 12월 23일 파이퍼는 퇴각을 결정했다. 전투단은 그들의 귀중한 차량 및 전차 등의 장비를 버리고 도보로 탈출했다.

생 비트의 중심부는 중요한 도로의 교차지점이어서 폰 만토이펠과 디트리히 부대의 주요 목표였다. 방어부대는 미군 제7 기갑사단에 제106 보병사단과 제9 기갑사단, 제28 보병사단의 일부가 합쳐져 있었다. 브루스 C 클라크 장군 지휘하의 이 부대는 독일군의 공격에 저항하여 진격을 최대한 늦추었다. 독일군은 12월 21일이 되어서 겨우 생 비트를 확보했으나, 미군의 저항은 계속되었기에 참호로 퇴각했다. 12월 23일까지 독일군은 그들의 측면을 분쇄하고, 미군은 세므강의 서쪽으로 퇴각했다. 독일 측이 계획은 12월 17일 18:00까지 생 비트를 확보하는 것이었으나, 계획의 지연으로 작전 진행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12월 19일 연합군 상급지휘관들은 베르됭 요새의 지하기지에서 회의를 가졌다. 아이젠하워는 패튼에게 제3군을 북부에 대한 반격에 나서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패튼은 48시간 안에 가능하다고 답했다. 실제 패튼은 회의에 출석하기 전 부하에게 북부에 대한 반격을 준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아이젠하워가 물었을 때 이미 그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12월 21일 코콧트 장군의 제26 국민 척탄병 사단을 주력으로 한 독일군은 연합국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제일 먼저 도착하여 전주 방위 진 지를 구축하여, 미 육군 제101 공정사단 및 제10 기갑사단의 일부가 수비하던 바스토뉴를 완전히 포위했다. 수비대의 책임자였던 제101 공정 사단장 대리 앤서니 맥컬리프 준장은 독일군의 항복 권고에 대해 “NUTS!”라고 답하고 부관이 그 말을 그대로 편지에 적어서 공식 회답으로 독일군에게 보낸 유명한 일화가 있다.(당시 사단장 맥스웰 D 테일러 장군은 회의 때문에 부대를 떠났었고, 사단장 대리인 맥컬리프 준장이 지휘를 맡고 있었다)

독일군은 몇 군데 개별지점에 대해 순차적으로 공격을 집중했다. 이것은 방어 측에게 공격이 격퇴되면 끊이지 않고 증원을 보내 이를 강화했으나, 한편으론 독일군의 병력수의 이점이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결국 독일군은 조기 바스토뉴 공략은 실패했고, 귀중한 며칠을 낭비하여 바스토뉴를 포위한 채 서쪽으로 진격해야만 했다. 남은 부대는 그 후 몇 차례 바스토뉴에 대한 공격에 나섰으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12월 23일 날씨가 회복되면서 연합군은 공중폭격과 공중보급을 개시했다. 항공폭격은 독일군의 보급기지에 대해 괴멸적인 타격을 주었고, P-47 썬더볼트는 도로상의 독일군을 공격했다. 거기에 바스토뉴에 대해 공중보급으로 의약품, 식료, 모포, 탄약이 보급되었다.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외과의팀이 글라이더로 현지에 들어가 부상자 구원에 나섰다.

12월 24일 보급선의 한계를 넘어선 독일군의 진격은 뮤즈강 근처에서 속력을 잃었다. 연료와 탄약의 고갈이 치명적이었다. 또한 작전이 개시된 뒤 독일군은 무선 봉쇄를 해제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정보부는 손쉽게 독일군의 위치를 알아내어 적절한 반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독일군의 손실은 파이퍼 전투단의 소모와는 별도로 경미한 상황이었다. 24일 밤 하소 폰 만토이펠은 작전의 중지와 철수를 진언했으나, 히틀러는 이를 거절했다.

패튼의 제 3군은 바스토뉴를 구원하기 위해 전투를 계속했다. 12월 26일 16:50분 제4 기갑사단의 일부가 바스토뉴에 도달하여 포위를 깨뜨렸다. 1월 13일 독일군은 바스토뉴에서 퇴각했다. 1월 23일에는 독일군 사령부에 의해 작전중지가 결정되었다. 전투는 공식적으로 1945년 1월 27일 날 종료되었다.

작전에 의해 연합군은 다수의 전력을 잃어 진공계획을 수개월 간 늦추게 되었으나, 연합군은 손실된 전력을 보충할 수 있었고 독일군은 결정적인 패퇴와 손실을 입어 전쟁 종결은 빨라지게 되었다. 또한 방어를 굳히지 않고 공세에 나섰던 독일군의 핵심 병력이 보급이 끊어져 궤멸당하였기에 진공에 의한 연합군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독일은 동부전선에 군을 돌릴 여력도 없어졌기에 소련의 진격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결과를 내놓았다.



1971년 - 이디 아민이 쿠테타로 우간다의 정권을 장악했다.

1973년 - 전남 진도군 지산면 세포리 앞바다에서 목포발 조도행 68.8톤급 여객선 한성호가 침몰, 13명이 사망하고 48명이 실종됐다.

배가 침몰한 지점은 육지와는 불과 20~3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바다로 뛰어들어 육지까지 헤엄쳐 온 생존자들의 신고를 받은 진도경찰서는 목포해경대에 연락했다. 경찰 경비정 1척과 해경 경비정 3척 등 5척의 경비정과 공군 헬리콥터가 사고 현장에 출동해 합동 구조작업을 벌였다. 하지만 스스로 바다로 뛰어든 승객들 외에 추가로 구조된 생존자는 없었다.

경찰은 사고 다음 날인 26일에야 잠수부와 목포 축항 사무소 소속 준설선을 사고 현장에 배치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파도가 높아 작업은 다음날로 미뤄졌다. 정부는 교통부 선박 담당관을 현지에 파견해 사후 수습을 맡겼다. 그러나 담당관은 승선자 수와 사망·실종자 수, 사고 원인 등 어느 것 하나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모습만 보였다.
사고가 나자 목포 해운국에서는 승객 66명과 승무원 9명 등 75명이 승선했다는 보고를 올렸고, 담당관은 그 이상의 상황은 파악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교통부의 한 관계자는 “내려간 교통부 관계자들의 연락이 없고 경찰에서 선장 등 사고 관계자들을 모두 연행해가 파악이 늦어지고 있다”고 해명했다.
경찰은 한성호 선장 등 관계자 5명에 대해 선박안전법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경찰은 “이들이 선장 대신 자격이 없는 갑판원에게 키를 맡겨 향해 구역을 위반했으며, 승객 명단을 허위 작성한 혐의 등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목포 해운국 직원 3명도 승객 명부 허위기재에 대해 묵인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구조작업이 더뎌지는 사이 한국해운조합은 한성호 희생자 위로금에 대한 논의를 서둘러 시작했다. 조합은 선령 13년의 노후선인 한성호의 선체 공제금 210만 원과 희생자 1명당 50만 원의 선객 공제금을 유가족에게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구조 작업반은 사고 사흘째인 27일 “실종자들이 선실 속에 갇힌 채 침몰한 것으로 보인다”며 “선체 인양작업을 서두르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미 해안가에는 목선인 한성호의 선체로 추정되는 배 조각과 승객들의 화물이 떠밀려와 가득 쌓인 상황이었다.

경찰 수색대는 가라앉은 선체의 위치도 파악하지 못했다. 해경 함정 4척과 7척의 배, 8명의 잠수부가 동원됐지만 13m나 되는 수심과 강한 물살 때문에 선체 수색작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치안국은 사고 나흘째가 돼서야 해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해군 함정 1척과 잠수부 등이 29일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수색작업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사고대책 본부는 사건 발생 8일째인 1일 오후 5시를 기해 모든 수색작업을 포기한다고 밝혔다. “수중 수색작업에도 판자 조각만 발견했을 뿐이므로 선체가 산산조각 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수색은 무의미하다는 게 이유였다. 사고대책 본부는 수색작업 포기 발표와 함께 작업반도 모두 철수시켰다.
한성호에 오른 승객 대부분은 조도에 사는 사람들로 일가족이 참변을 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수색작업 철수 발표에 실종자 가족들은 육지와 20~3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사고 지점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부는 한성호 침몰 사고의 책임을 물어 목포지방해운국장을 직위 해제하고 여수지방 해운국장을 이동 발령하는 것으로 서둘러 사고 수습을 마무리 지었다.

한성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여쯤 뒤인 1973년 2월 27일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10월 유신 이후 처음 실시되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시 박정희가 총재로 있던 민주공화당은 불법선거운동으로 인해 한창 논란이 일고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언론에는 대통령이었던 박정희가 한성호 침몰과 관련해 별도의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성호 침몰사고 당일인 25일에는 정부부처 보고 순시와 린든·B·존슨 전 미국 대통령 서거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명, 수석비서관을 미국 대사관에 직접 보내 조화를 전달하고 조의를 표했다는 보도가 나왔을 뿐이다. 26일에도 정부부처 보고 순시에서 장관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울러 인도 독립 25주년을 맞아 축전을 보냈다는 보도도 실렸다. 27일에도 역시 정부부처 보고 순시 소식은 빠지지 않았지만, 박정희의 한성호 사고와 관련한 언급은 없었다.

한성호 수색 중단 발표가 있던 2월 1일 박정희는 자신이 총재로 있던 민주공화당의 사무총장 등 관계자들을 만났다. 당시 보도를 보면, 박정희는 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민주공화당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이 정치 유신과 공명선거를 기필코 실현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박정희는 이날 정부 인사도 발표한다.
유신 이후 첫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 박정희는 “일부 지역에서 지각없는 사람들이 선거법을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해서 부분적인 오점을 남긴 것은 대단히 통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러나 이번에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는 전국적으로 볼 때 유신 이념을 구현한다는 뜻에서 깨끗하게 실시되었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한성호 침몰 사고로 인해 민주공화당의 불법선거운동 의혹은 조용히 잊혔고, 박정희가 장기집권의 장치로 도입한 중선거구제에 따라 민주공화당은 1당이 됐다.



1991년 - 평화방송 노동조합의 파업 농성장에 공권력이 투입돼 농성중인 조합원을 연행했다.

1981년 - 마오쩌둥의 미망인 장칭이 반혁명죄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2003년 - 한국에서 1·25 인터넷 대란이 일어났다.

2008년 - 삼성 특검:특검 수사팀은 새벽 3시 삼성화재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또한 서울 수유리, 수원의 삼성화재 전산센터와 과천의 그룹전산센터등 5곳에서도 압수수색을 동시에 진행하여 전산자료를 확보하였다. 특검 수사팀은 삼성 일가를 대리해 고가 미술품을 샀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홍송원 서미 갤러리 대표를 소환조사하였다.

2010년 - 에티오피아 항공 409편이 레바논 인근 지중해에 추락했다.

2012년 - 문화방송 기자협회가 김재철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뉴스 제작을 거부했다.

2013년 - 울산 자매 살인 사건의 용의자인 김홍일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2015년 - 그리스에서 열린 총선에서 시리자가 압승을 거뒀다.

 

문화

1924년 - 제1회 동계 올림픽이 프랑스 샤모니에서 개막됐다.

2006년 - 중앙고속도로 대동 분기점 ~ 동대구 분기점 구간이 개통되었다.

2017년 - 그룹 아이오아이가 공식 마지막 활동을 종료하였다.

 

탄생

17년 -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세 번째 아내 메살리나.

750년 -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레온 4세.

1736년 - 프랑스의 수학자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1739년 - 프랑스의 장군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1759년 -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의 시인이자 서정시인(작사가) 로버트 번스.

1870년 - 스웨덴의 수학자 헬리에 본 코크.

1874년 -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서머셋 몸. / 영국의 종교인 휼렛 존슨.

1882년 - 영국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1886년 - 독일의 지휘자, 작곡가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1888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지청천.

이미지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지청천(1888년 2월 15일 ~ 1957년 1월 15일)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항일 독립운동가 겸 군인이었으며,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지휘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여 광복군사령관.광복군 총사령관 등을 역임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정치가 겸 정당인으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충주(忠州). 호는 백산(白山), 아명은 지수봉, 지대형, 지을규, 지석규, 일명은 이청천, 이대형이다.

지청천은 1888년 국운이 기울어질 무렵,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30번지에서 지재선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지청천이 출생할 무렵의 1880년대 후반은 서양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되어가는 가운데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놓인 촛불과 같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였다. 일본과 청조,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세계열강들의 군대가 수시로 조선 침략의 손길을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1885년에는 영국의 불법적인 거문도 점령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갑신정변의 주요 세력으로 봉건사회를 해체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화를 이룩하자는 개화파와 외세의 침입을 절대적으로 물리치려는 반외세 세력 및 봉건 세력 사이의 대립 관계가 첨예화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1882년에는 반외세 운동의 지도자였던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사들에게 납치되어 청나라 허베이 성 보정부에 유폐되기도 하였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봉건 사회의 해체와 더불어 군대 내의 부패를 계기로 임오군란이 발생함으로써 국방력의 약화 현상이 노출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1888년 2월 15일에 출생한 지청천은 관향이 충주였고, 아명이 수봉이었으며, 관명을 석규라 하였다. 지청천의 부친인 지재선은 지문(池門)의 선조인 지경의 31대손이 되는 인물로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장의 집안이었는데, 왜구 토벌에 수훈이 컸던 지용기, 조선 중기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고 병자호란 때에 신계에서 청나라 군사들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지계최 등의 무관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5세 때 아버지가 장중풍으로 사망했으며, 그는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지청천의 모친인 경주 이 씨 부인은 지청천을 양육함에 있어서 외아들 만득자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익애 하지 않고, 때로는 자모로 때로는 엄부의 역할을 겸하면서 가장이 없는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지, 덕, 체 삼육에 고루 마음을 써서 교육하였다.

구한말 1906년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당시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는 1907년 여름에 군대해산으로 간신히 폐교를 면하고 축소된 형태로 존속했던 상태였다. 그래서 여기에 입교한다는 것은 당시 굉장히 까다로워 유력한 사람의 보증이나 추천이 필요했었다. 지청천이 입교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모친이 집안사람을 통해 엄 귀비에게 손을 쓴 결과 가까스로 입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909년 8월, 2학년 때 통감부의 압력으로 군부가 폐지되면서 동시에 무관학교도 폐교처분을 받았다. 이때 일본 측은 선심을 써서 재학 중인 1, 2학년 생도 50여 명을 일본의 동경 육군 중앙 유년학교로 유학을 보내 위탁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지청천은 동기생 및 후배들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까지는 본명인 지대형을 사용했다. 유학 도중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 육군사관학교 보병 과로 편입되었고, 1914년에 26기생으로 졸업하였다. 중위로 진급한 후 1919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 무관학교 교성 대장이 되어 독립군 간부 양성에 진력하였다. 이때 망명하면서 일본군의 병서(일종의 전술 교범)와 군용 지도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그는 독립군에서 유일하게 정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고, 지청천의 가치는 독립군에게 아주 중요하였을 것이다.

그 후 지청천은 어머니의 명에 따라 파평 윤씨 집안의 여인 윤용자와 혼인을 하였다. 신부와 합환주를 마신 지청천은 그날 밤에 아내와 합방을 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그대를 아내로 맞았지만 이미 세운 뜻이 있어 아내와 더불어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몸이 아니오. 나는 이미 군인의 길로 들어서서 나라와 겨레를 위망에서 튼튼히 지키려고 결심하였은즉,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몸이오. 그러니 내가 그대에게 바라는 바는 나와 뜻을 같이하겠다면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늙으신 어머니를 나 대신 잘 모셔주며 만약에 혈육이 생긴다면 잘 교육시켜주는 일이오. 만일 이것이 나의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한다면 나를 따라 시집오지 않아도 좋소.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뜻을 분명히 해 주시오.
아무리 구식 중매 결혼이라지만 꿈 많은 18세 꽃다운 신부가 결혼 초야에 신랑으로부터 들어야 했던 말이기엔 미처 상상도 못 하고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발언이었다. 그러나 윤용자는 자신도 모르게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죽는 것은 너무 헛된 것이니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름을 고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기존의 석규라는 이름 대신 청천이라는 신명을 짓고 성도 지 씨는 흔치 않아 남의 귀에 쉽게 들리므로, 모성을 따라 이 씨로 고치기로 하였다. 김광서 역시 이때부터 응천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혹은 열차로 만주를 건너가다 조선총독부 경찰에게 걸렸을 때 얼떨결에 말한 것이 ‘이청천’이라는 이름이었다고도 한다.

후에 지청천의 딸이며 독립운동가인 지복영은 이렇게 회고했다.

장군이 1919년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있을 때의 일이다. 도열한 학생들을 일일이 점검하던 장군은 한 학생이 군복의 단추를 잠그지 않은 것을 발견하였다. 장군은 곧 그 이유를 물었다. 당황한 학생은 “단추를 잊어버렸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군복을 살펴본 장군은 단추가 떨어져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장군은 “잊은 것이 아니고 잃어버렸군”하며 그 학생을 호되게 질책했다.

“제군은 잊어버렸다와 잃어버렸다의 구분도 제대로 못하는가. 모름지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인은 생각이 바로 되어야 하고 바른 생각은 바른 언어에서 나온다. 조국의 말도 제대로 모르는 군인이 어떻게 조국을 찾겠는가.”

당장 학교를 자퇴하라고 명령하는 장군 앞에서 그 학생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할 기회를 달라고 여러차례 간청한 끝에 겨우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920년 지청천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있었고 곧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만주군정부로 건너갔다가 초빙을 받고 서로군정서로 건너가 서로군정서 간부에 취임, 활동하였다. 그러나 청산리 대첩 이후 일본군의 한국인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을 피하여 신흥 무관학교를 폐교하고 병력을 간도로 이끌고 건너가, 서일, 홍범도, 김규식, 김좌진 등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다.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오하 묵 등과 고려혁명군(1921.8)을 결성했다. → 김규식, 이범석이 만든 길림성 소재의 고려혁명군(1923.5)과는 별개의 단체이다. 같은 해 10월 고려 혁명 군관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4월경 군관학교 교육방침과 소련 당국의 규정이 대립되어 체포되었으나 7월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양기탁, 오동진 등과 정의부, 후에 새로이 통합된 혁신의회를 조직했으며, 김좌진이 저격당한 후인 1930년 7월에는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별도로 한국독립군을 만들어 독립군의 총사령관에 취임하였다.

만주에서 중국 호로군과 연합해 한중 연합작전을 벌였으나(대전자령, 쌍성보 전투), 1933년 5~6월경 중 지청천과 이범석은 100여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중국 본토로 건너왔다. 1933년 후반 김구 세력과 합류하였으나 1934년 지청천은 탈당, 신한독립당을 창설하여 따로 나갔다.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두 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1935년 김원봉·김규식의 민족혁명당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김원봉과 갈등하다가 김원봉이 좌익 경력자들에 대한 유화와 포용책을 펼치자 반발하여 1937년 4월에 탈당하고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였다.

1940년에 중일 전쟁의 여파로 충칭으로 옮긴 임시정부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 그해 9월 광복군 성립 전례식에 참석하고,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이후 광복군을 인도에 파견하는 작전 제의에 승인하였다. 1942년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하고 김원봉은 광복군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이 되었으나 독자적으로 활동했고, 광복군의 1,2,3 지대 역시 각각 독자적으로 활동하면서 각자 자기 파벌의 세력 확장에만 치중하였으므로 지청천은 명목상 사령관이었지만 이들을 통솔하기 어려웠다.

1944년 중국군에 있다가 광복군에 귀순한 장준하 등으로부터 김원봉이 간계를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들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는 보고를 받고 이후 직접 광복군을 사열하였다. 장준하는 그가 계략을 써서 일본군 출신 한인에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불신임을 조장한다 하여 이소민 등에 대한 자료를 이청천에게 보고하였다.

광복군 일부의 횡포가 계속되자 김원봉은 이를 이용하려 했다.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 45년 10월 7일 충칭의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이 상하이로 왔는데 일본군 출신 부대는 사령관 이청천에 대한 사열을 거부하였다. 장준하 등은 그들 가운데 모 장교, 모 장교 등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이 문제에 대한 의논을 시작했다. 후일 장준하는 이를 두고 '의논을 시작했지만 실은 회유 작전이었다.'라고 하였다. 장준하 등은 김원봉의 계획을 이청천에게 보고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군 출신 탈영자들에게도 알려주고 그 대리인 노릇을 했던 책임자 황모와 이소민에 대한 자료를 주어 그들을 불신임시켰다. 설득은 주효했고 이청천이 직접 사열을 받게 되었다.

1945년 광복 후 이듬해인 1946년 4월 개인 자격으로 귀국, 광복군의 재건을 희망했으나 미군정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대동청년단을 창설하였다.

1946년 4월 22일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그의 귀국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프란체스카 도너, 이범석 등이 친히 마중나왔다.

지청천이 귀국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청년단체를 만들 것을 권고한다. 1946년 9월 지청천은 대동청년단에 26개 청년단체를 통합해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을 확대 개편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민족청년단의 이범석을 견제하려던 이승만은 지청천이 귀국하자 그를 중심으로 한 대동청년단에 족청을 흡수시켰다. 이후 독립 촉성 국민회 최고위원, 한중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48년 1월부터 정부 수립론을 놓고 남북협상론과 단독정부 수립론이 나뉘게 되자 그는 단독정부 수립론을 지지, 임시정부를 사퇴하고 독립 촉성 국민회에 입당하였다.

1948년 3월 좌우대립 과정에서 미군정에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두한에 감형을 위해 이범석 등과 존 하지에게 진정을 하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1948년 4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지 않고 신익희 등과 한국독립당을 탈당한다.

5월에는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6월 1일 헌법기초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초대 국무위원 겸 무임소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 뒤 1949년에는 신익희·임영신·윤치영 등과 함께 친이 승만 계 정당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으로 활동했다가 탈당, 민주국민당으로 건너가 민국당 최고위원, 민주국민당 대표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1949년 12월 19일 대한청년단 결성 때 대한청년단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한국 전쟁 때는 서울을 떠나 피신해 있다가 휴전 이후 서울로 되돌아왔다.

1951년 5월 16일의 제2대 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자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했다. 1차 지명전에서 2표를 받고, 2차 지명전에서는 2표를 받았다.

이후 국회 전원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으며, 자유당에 입당하여 자유당 원내대표위원, 자유당 중앙당 중앙위원을 지냈다. 기타 사회 활동으로는 대한적십자사 중앙 집행위원, 대한군인유가족협회 회장, 대한민국 반공 통일연맹 최고위원 등을 지냈다.

1957년 1월 15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성동구 신당동 자택에서 급서 하였다. 장례는 1월 21일 오전 10시부터 중앙청 야외음악당에서 거행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었다.

1995년 삼청동 집 터에 지청천 장군 집터 표석이 설치되었다.


1903년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 혹은 박문자(1903년 1월 25일 ~ 1926년 7월 23일)는 일본의 아나키스트이다. 조선의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부인으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문경에 묘가 있다.

일본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양육을 거부당하여 출생 신고가 되지 못해 무적자라는 이유로 학교를 제때 다니지 못하는 등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일본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중 1912년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에 살던 고모의 집에 들어가 할머니에게 학대당하면서 약 7년간 조선에서 살며 부강 심상소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동안에 3·1 운동을 목격한 후 조선인들의 독립 의지를 확인하고 이에 동감하였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에 아버지의 집에서 지내기도 하였으나, 문란한 생활을 하던 스님인 외삼촌과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아버지와의 사이가 좋지 않아 혼자 도쿄의 친척집으로 올라와 신문을 배달하고 어묵집 점원으로서 노동하면서 영어 교습소에서 공부하였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이 사람들에게 영향받아 아나키스트가 되었고 1921년에는 도쿄에 유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도 알고 지내게 되었다.

1922년 박열과 만나 동거를 시작하였고 흑도회와 흑우회에 가입하고서 기관지를 함께 발행하는 등 박열과 뜻을 같이하였다. 박문자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옹호하고 일제의 탄압 정책을 비판했으며, 이면으로는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박열 의사를 도와 의열단과 연계한 폭탄 반입을 추진했다.

1923년 4월 박열과 함께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하였고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당하였다. 그녀는 천황을 암살하려 한, 소위 대역죄 명목으로 1926년 사형을 판결받았다. 며칠 뒤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으나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서류상으로 결혼했기에 박열의 형이 유골을 인수하여 고향인 문경에 안장했다. 일본 제국 내에 시신을 거둬 줄 사람이 없어서 박열과 옥중에서 결혼 서류를 작성하고 서류상 박 씨 문중의 사람이 되었다. [3] 여사의 묘는 경북 문경읍 팔영리에 조성됐지만 일제의 철저한 감시 속에 방치된 채 잊혔다. 그러다 1973년 아나키즘 독립지사들이 뜻을 모아 묘역을 정비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2003년 박열의사 기념공원 조성과 함께 현재 위치인 박열의사 기념관 내로 이장하게 됐다.

박열과 후미코가 같이 찍힌 사진이 감옥 밖으로 유출되었는데 정우회와 정우 본당(일본어판) 등의 야당이 대역 범죄인을 우대했다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와카쓰키 내각 사퇴 운동에 이용하였다. 야당은 이 사진을 인쇄 살포하여 정치 문제화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3일간 의회가 정지되었고 사건의 예심판사 다테 마 쓰는 1926년 8월 9일 사직서를 제출하였고 11일 사표가 수리되었다.

묘소는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시에 건립된 박열의사 기념관의 옆에 있다. 정부는 가네코 후미코에게 2018년 3월 1일 일제에 저항한 공을 기려 일본인으로는 두 번째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했다.
전기로 야마다 쇼지의 가네코 후미코가 있다.
한국방송의 KBS 스페셜에서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 방영하였다



1913년 - 폴란드의 작곡가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

1917년 - 러시아의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

1924년 - 대한민국의 성우 구민.

1928년 - 소련의 정치인, 외교관, 조지아의 대통령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1942년 -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 에우제비우.

1947년 - 브라질의 전 축구 선수 토스탕.

1959년 -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김연자.

1964년 -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만희.

1971년 - 대한민국의 희극인 김진수.

1976년 - 대한민국의 기업인 조원태.

1978년 - 우크라이나의 희극인, 대통령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1980년 - 대한민국의 배우 장자연. / 스페인의 축구 선수 샤비 에르난데스.

1981년 - 미국의 가수 앨리샤 키스. / 대한민국의 배우 추소영.

1982년 - 일본의 가수, 탤런트 사쿠라이 쇼(아라시). / 대한민국의 방송사 SBS 소속 아나운서 박선영.

1983년 - 대한민국의 기상 캐스터 김혜선.

1984년 - 브라질의 축구 선수 호비뉴. / 독일의 축구 선수 슈테판 키슬링. /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 패라 윌리엄스.

1985년 - 대한민국의 유도 선수 김재범.

1987년 - 러시아의 테니스 선수 마리아 키릴렌코.

1990년 - 대한민국의 가수 준호 (2PM). / 대한민국의 가수 여은 (멜로디데이).

1992년 -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오효주. / 크로아티아-독일 축구 선수 이바나 루델리치.

1996년 - 대한민국의 가수 승희 (오마이걸)

1999년 - 대한민국의 가수 루카스 (가수) (NCT)

 

사망

390년 - 초기 기독교 교부 철학자 그레고리우스 나지안스.

1891년 -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인 테오 반 고흐.

1947년 - 미국의 마피아 알 카포네.

1983년 - 영국의 봅슬레이 선수 로드니 소허.

2004년 - 헝가리의 축구 선수 페헤르 미클로시.

2015년 - 그리스의 가수 데미스 루소스.

2016년 - 독일의 기자이자 언론인 위르겐 힌츠페터.

2017년 - 미국의 배우 메리 타일러 무어

 

기념일

유권자의 날: 인도

번스 나이트: 올드 랭 사인의 작사가 로버트 번스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 지역사회

타티아나 데이: 러시아

아퍼지트 데이/반대의 날

Criminon Day: 사이언톨로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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